흐르는 물소리로 신음이 흐르고 있었다. 이 숙소의 수압은 낮다. 샤워 콕을 있는 힘껏 비틀어도 그저 몸을 닦을 정도라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것은 한계라는 걸 의미하는 거겠지. C.C.는 인형을 끌어안으며 한숨을 쉬었다. 들어간지 5분이 지났으니 앞으로 10분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샤워실에 쳐박혀 있을 것이다. 밖에서 무슨 전화를 해도 못 알아차릴 것이고.
여러가지의 연락 수단 중에 현존하는 가장 빠른 연락수단인 휴대폰을 꺼내서 상대에게 전화를 건 C.C.는 염치 없게 미안하게 됐지만, 하고 입을 열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화가 났다고 하기 보다는 아마 이제 잠에서 막 깬 것 같았다. 최근 제로가 어디에 있는지는 텔레비전을 틀면 알 수 있으니, C.C.는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기어스에 대한 일이라면 나보다는 로이드 씨가 좋아할 텐데. 이제 그쪽과 제로는 관련이 없어.’
“아, 그런 이유로 전화를 건 게 아니야.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한 사적인 이유다.”
‘네가 나에게?’
“정확히는…를르슈가 너에게. 그리고 내가 제멋대로.”
‘제멋대로인 두 명이 나에게 사적으로 전화를 걸다니. 왜?’
“를르슈와 섹스를 해줬으면 해.”
‘응?!’
를르슈의 샤워소리가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겠으니 C.C.는 빨리 말을 전하기로 했다.
“를르슈는 네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한 채로 벌써 1년 넘게 수절 중이다. 나도 시도했는데 몇 번을 얻어 맞았는지 몰라. 그런 점에서는 완벽한 남자다. 네가 책임지고 한 번은 A/S를 와줬으면 하는데 부탁한다, 쿠루루기 스자쿠. 1년 전까지는 내가 가둬놓고 감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막을 수가 없어. 저러다가 기어스로 남자를 꼬셔서 전설의 남창으로 소문나기 일보 직전이다.”
‘잠시만, 잠깐만, 뭐라는거야!’
“지금도 샤워하는 중에 혼자서 하고 있어. 네가 어떻게 길들여 놓았길래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만 가는…”
‘너네는…대체 뭘 하고 산 거야?’
“제로의 업무는? 와줄 수 있어?”
‘정말 사적인 이유로 나를 부려먹는구나. 내가…내가 무슨….’
“를르슈가 곧 나올 거 같으니 GPS 정보를 보낼게. 움직일 수 없다면 우리가 그쪽으로 가겠다.”
C.C.는 전화를 끊었다. GPS 정보를 보내고 나서 스자쿠와의 통화 내역과 그 이력을 모두 삭제했다. 를르슈가 이 휴대폰을 이용하는 일은 드물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해킹까지 해서 아예 백업내역까지 삭제했다. 휴대폰을 짐 사이로 숨겨놓고 태블릿을 꺼내놓았다. 뭐라도 보는 척을 해야겠다. 손이 많이 가는 동정 자식. 어느새 물소리가 끊겼다.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로 샤워실 밖으로 나온 를르슈는 느슨하게 묶은 목욕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 앉았다. C.C.는 건너편의 침대에 앉아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도 를르슈는 별다른 반응 없이 숨만 고르고 있었다.
꼭 그때의 를르슈 같군. C.C.는 태블릿으로 대충 화면을 켜두었다. 어차피 자위 후의 를르슈는 대체로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뭘 해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별다른 수확은 없는 거 같아. 조만간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던가 해야겠어.”
“…그래. 스자쿠와 나나리의 동선과 겹치지 않게.”
“물론.”
앉아있던 몸이 침대에 무너졌다. 자위 후의 밀려오는 수마를 견뎌낼 수가 없을 것이다. C.C.는 를르슈가 완전히 자는 걸 확인했다. 지난 1년간 몇 번이고 자는 모습을 확인한 결과, 를르슈의 자는 척과 진짜 자는 걸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숨겨 놓았던 휴대폰을 꺼냈다. 스자쿠로부터 연락이 와있었다. 여기서 기차로 3일 거리에 있는 지역에 흑의 기사단이 올 것이라는 예정이었다. 카페 제로 해외 체인점의 첫 확장의 기념으로 내방하는 것이라고. 카페 제로. 를르슈도 알고 있는 엉망인 네이밍 센스의 카페 이름이다. 흑의 기사단이 와도 카렌, 혹은 오우기나 타마키가 손수 움직일 거라는 생각은 안할 것이다. 실제로 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스자쿠가 올 거라고는 를르슈는 모를 거다.
내용을 외우고 다시 이력을 삭제했다. 휴대폰을 다시 숨겨놓았다. 태블릿으로 기차표를 구하면서 C.C.는 쓴웃음이 났다. 이쯤 되면 스자쿠에게 가지 않았던 를르슈가 문제인지, 를르슈를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던 스자쿠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두 놈 다 바보 멍청이라는 것이다. 섹스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걸었더니 오겠다고 하는 건 해주겠다는 거겠지. 자존심이 먼저냐, 성욕이 먼저냐. 그것의 정답을 C.C.는 알고 있었다.
몸의 기억이라는 걸 눈으로 보는 건 오랜만이어서 C.C.는 얻어 맞은 아픔도 까먹을 정도였다. 제 몸 위로 쏟아진 토사물과 함께 를르슈의 울부짖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대충 벗어놓았던 몸으로 를르슈가 토한 것들을 닦아냈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를르슈는 몸을 웅크리고 자는 사람을 모두 깨울 정도로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목이 아파 앓는 소리만 내며 숨을 껄떡거렸다.
“를르슈?”
조심스럽게 불러보아도 를르슈는 귀를 틀어막을 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이 서서히 굳더니 곧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C.C.는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하는지 고민했다. 우선은 씻고 싶다. 토를 닦아낸 옷과 함께 욕실에 들어갔다.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빨래를 먼저 했다. 이건 익숙하다. 원래 노예였으니까. 더한 짓도 해봤다. 원래 노예란 그런 것이다. 과거의 황제였던 남자와 과거의 노예였던 여자가 함께 있는 이 낡은 여관. 대충 구석에 몰아넣었다. 이 나라에서는 새벽 사이에도 옷은 금방 마를 것이다.
C.C.가 옷을 벗고 알몸으로 를르슈의 앞에 서게 된 이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래야할 것 같아서였다. 이제껏 열심히 동정이라고 놀려왔던 를르슈의 동정을 가져갈 여자가 자기가 된다는 게 우습다. 오랜만에 여자로써 기능할 제 몸이 를르슈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괜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처음은 저녁이 다 됐어, 라고 말을 하려고 있던 때였다. 침대 위에서 바지와 속옷을 벗고서 성기를 만지고 있는 를르슈를 본 C.C.는 잠시 숨을 골라야했다. 빈 껍데기라고 해도 이건 인간이고, 남자이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죽을 것 같으면 살고 싶고…성욕도 있구나. 저녁은 한참 후에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C.C.는 머리를 굴렸다.
사람의 기척에 예민할 C.C.의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를르슈는 자기의 성기를 만지면서 신음하고 있었다. 남자의 신음 치고는 높다. 를르슈가 절정을 맞이하고 사정한 걸 보고서 C.C.는 하나 남은 수건을 적셔서 왔다. 젖은 땀을 닦아내고 정액도 닦아냈다. 시트에 묻지 않아 다행이다. 벗어낸 속옷과 바지를 입히고 침대에 편히 뉘여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그 이후로 2주에 한 번씩, 를르슈는 자위를 했다. 뒷처리는 C.C.의 몫이었다. 사정을 하고 나면 보통 잠에 빠져버린다. 체력이 형편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C.C.가 알고 있는 남자들의 성욕 패턴보다도 더 담백하다. 대체로 한계 끝에 자위를 해서 해소하는 것 같았다. 이 패턴은 좋지 않다. 안 그래도 몸이 느린 를르슈가 참고 있는 성욕으로 더 느려지면 이동속도가 느려진다. 앞으로의 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결단의 날에, C.C.는 겉옷 하나만 벗으면 되는 옷차림으로 저녁을 차렸다. 속옷도 안 입었다. 를르슈와 섹스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위 후의 를르슈는 다음날까지도 멍한 경우가 많았고, 무언가 불만족스러워 보였으니 섹스가 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엉성한 손놀림으로 먹는 를르슈를 보고 나서 먹은 것을 다 치웠다. 를르슈, 씻을래? 이번엔 혼자 씻을까? C.C.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옷을 하나 둘 벗기 시작하는 를르슈를 보고 C.C.는 이 섹스가 과연 앞으로의 진전에 도움이 될 지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 이런 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자주 하던 거였지.
알몸이 된 를르슈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C.C.는 침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끈을 풀어 옷을 벗었다. C.C.의 알몸 따위 를르슈도 목욕 때 보고 있으니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센티멘탈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이 섹스가 네 동정 졸업이라니, 가엾지만 이거에 매달리는 나도 피차일반이니, 이래나 저래나 공범자의 운명은 고달픈 것이다.
를르슈의 마른 손을 음부에 갖다댔다. 흥분이 없기에 젖지 않은 그곳에 를르슈의 손끝이 닿아도 온기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로 기분 좋게 해줄게.
천한 창녀의 단골 멘트를 날리며 를르슈의 위로 올라탔다. 우선 입술부터. 를르슈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섹스의 전희 과정이니 혀를 섞는 키스 정도는 알려줘야겠지. 꾹 닫혀있는 입술 위로 혀를 문질러도 를르슈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키스는 실패. 그렇다면 아래를. C.C.는 를르슈의 시들어있는 성기에 손을 대며 만졌다.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동정 남자를 발기시키는 노하우는 열 손가락이 넘는다. 아무리 주무르고 자극을 줘도 설 기미가 보이지 않아 C.C.는 결국 펠라치오를 하기로 생각했다. 손이 많이 가는 자식. 돌아오기만 해봐. C.C.는 를르슈의 것을 입에 물려는 순간에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에 눈을 질끈 감아야했다.
를르슈는 토했다. 먹은 저녁을 전부 토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C.C.는 이제야 머리에 묻었던 를르슈의 토사물을 다 씻어내고 비누질을 마쳤다. 그 이름은 오랜만에 들었다.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너, 스자쿠가 아니야. 를르슈의 엉성한 발음 사이로 또렷하게 들린 나이트 오브 제로의 이름에 C.C.는 한동안 몸이 굳어서 를르슈의 비명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 몸의 기억.
몸의 기억은, 를르슈를 강하게 얽매고 있어서, 그건 고통이기도 했다. 를르슈에게도, C.C.에게도. 그걸 재차 확인한 건 한 달 후였다. 혼자 씻을래?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다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다가 곧 신음소리가 들렸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은 신음은 이제 익숙하다. C.C.는 다음 장소로 이동할 곳을 고르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욕실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C.C.는 벌떡 일어났다.
를르슈?! 괜찮아?! 문을 잠그는 습관은 가르치지 않았기에 욕실 문은 바로 열렸다. 문 너머에서는 뜨거운 물의 여파로 증기가 가득하고. 그 사이로 를르슈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바닥에 무너져 온갖 물건들을 다 무너뜨린 를르슈는 자위를 하고 있다. 바디 로션의 향이 가득한 걸로 봐서 병이라도 깨졌나 싶었지만 그건 다 를르슈가 쓰고 있었다.
여자의 유혹에 토악질을 하는 남자가 자기의 엉덩이 사이에 손가락을 두 개나 꽂아넣으며 몸을 떨고 있는 장면에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높은 신음소리와 함께 를르슈는 사정했다. 잘게 떨리던 몸을 보며 C.C.는 샤워기를 틀어 잠든 몸을 다시 씻겨냈다. 아래까지 다 씻겨낼 때는 몸의 기억을 저주했다. 내가 동정 남자의 애널 자위의 뒷처리나 하고 있단 말이지….
빈 껍데기여도 를르슈는 를르슈. 몸의 기억은 몸의 기억이다. 바디 로션을 비롯하여 샤워 중에 윤활제로 쓰일 수 있는 모든 것의 소비 속도가 빨라졌다. 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 남자가 어떻게 해놨길래 껍데기만 남은 놈이 애널 자위를 하냔 말이다. C.C.는 아무도 없는 비포장도로에서 경적을 세게 울렸다.
하여, 를르슈는 돌아오고 나서 L.L.라고 불러달라며 C.C.의 옆에 있기를 원했다. 왜? 너에겐 돌아갈 곳이 있어. 나에겐 살아갈 이유가 따로 있고. 너를 살려낸 건 내 욕심이지만 살아가는 건 네 자유다. C.C.의 말에 를르슈는 이제 모든 건 예전과 같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내일 당장에 없어지면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어지니까. 두 번은 못하지. 하지만 너는 내가 어느날 사라져도 그냥 영원히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죽어서도 못 만나게 되는 벌이다. 이제는 또 다시 살려낼 수 없을거야. 그때는 영원한 이별이다.
고백도 전에 차인다는 건 이런 느낌으로, C.C.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당하고 있을 C.C.는 아니었다.
—너에게 영원한 내일이 오게 되면 평생 내 곁에 있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게 나의 죄에 대한 벌이지.
벌 받는지 1년도 안 되어서 아직도 애널 자위나 하는 동정을 위해서 그의 예전 남자친구 지원사격까지 나가는 C.C.는 카페 제로 글로벌 체인 1호점이라는 촌스러운 네온사인의 마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왜?”
“여기는 피자를 팔고, 지금 내가 피자를 먹고 싶어서.”
“……그래, 1년 넘게 굶었으면 너 치고는 장하다.”
그래, 1년 넘게 수절한 동정 비처녀 애널 자위남아. 남자를 굶은 너만 할까. C.C.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롱 이전에 한숨이 나왔다.
어서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두 명이다. 테이블로 안내하겠습니다. 제로 가면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를르슈는 마스크를 더 깊게 눌러썼다. 일부러 기침소리를 내면서 아픈 척을 했다. C.C.는 변변찮은 를르슈의 연기에 대꾸도 않고 메뉴판을 보았다.
“나리타 치즈 콤보네이션 라지 사이즈 피자. 음료는 콜라 두 개. 치즈 크러스트 추가로.”
“알겠습니다.”
가게 안에는 제로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있고, 제로의 가면과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악역 황제로 화려하게 퇴장한 를르슈와 다르게 C.C.는 자유롭기에 얼굴을 드러내도 상관 없다. 이 정도 산만한 분위기면 마스크를 벗고 음료를 마셔도 들키지 않겠지. 를르슈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게에서 팔고 있는 엉성한 제로 가면을 쓴 남자가 다가왔다. 4인석 테이블이기에 자리는 널널했다. 를르슈는 C.C.에게 시선을 보냈다. C.C.는 느긋한 얼굴로 가면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미모의 관광객에게 자신만만하게 헌팅을 하러 오다니. 가면 속의 얼굴에 꽤나 자신이 있나봐? 아직 확인된 게 없으니 내 옆은 싫고 쟤 옆에 앉아.”
“…C.C.!”
“그런 애정 없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L.L. 아, 쟤는 목소리 들으면 알겠지만 예쁘게 생겨도 남자인데. 여자 둘을 노리고 온 거라면 가도 좋아.”
테이블 회전이 빠른 탓에 를르슈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메뉴가 나와버렸다. 음료수까지 세팅되자 C.C.는 콜라 한 잔 더 추가를 부탁했다. 를르슈는 가면을 쓴 남자가 기어스와 관련된 무엇인가 싶어서 상대하는 걸까, 추측했다. 그러나 그 추측은 다 빗나갔다. 무수한 패턴을 떠올리는 를르슈의 비상한 머리가 올 스톱되는 목소리였다.
“가면을 쓰고 뭘 마실 순 없잖아. 방금 전에 주문한 콜라는 취소해줘.”
“…!”
“계산을 하고 갈 테니 C.C.의 플랜대로 움직이면 될까?”
“그렇다면 감사하지. 행차해주신 것도 감사한 걸.”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카드는 기록이 남으니까 여기 현금.”
“그것도 고맙네. L.L. 잘 다녀와.”
“C.C., 너, 나를 파는거냐!”
익숙한 그 대사에 스자쿠는 가면 속에서 웃었다. 마스크를 쓴 를르슈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흐악! 요란스러운 비명과 함께 를르슈는 스자쿠의 몸 쪽으로 무너졌다.
“이런, 이 녀석 또 아픈가봐. 부탁할게.”
“알겠어. 안고 가도 돼?”
“그 편이 편할거다.”
마치 원래 알고 지냈던 친구들마냥 이어지는 대화에 주변에서의 관심은 금방 사라졌다. 를르슈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올린 스자쿠는 빨리 병원가자, 하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스자쿠라고 부를 수도 없고 제로라고 부를 수도 없다. 진퇴양난의 를르슈는 스자쿠의 팔 안에 얌전히 안기며 이 자식들이 꾸며놓은 판에 팔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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