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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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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eat 13

Re:play / DOZI 2025.01.15 11:40 read.105 /

피로와 나른함이 L.L.의 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햇살이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이치는 것에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L.L.는 무심코 스자쿠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들릴 것 같았는데 그는 여기에 있는 게 아닌 모양인지, 스자쿠의 대답 대신에 L.L.의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L.L.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와 그 밑으로 느껴지는 통증에 대해서는 눈을 흘기면서도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픈 것은 둘째 치고 몸은 그렇게 섹스를 했음에도 긁어내야한다는 정액의 느낌 같은 것도 없었고, 찝찝함도 없었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혀놓은 것까지 오히려 상쾌할 정도였다. 아마 스자쿠가 한 것이 틀림없는데, 확인하려고 하기에는 스자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L.L.는 눈을 떴던 자신의 방에서 벗어나, 늘 열려져 있는 스자쿠의 방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자기 방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부엌 쪽에서 스자쿠가 나오고 있었다. 

 

“아, 깨우러 가려고 했는데.”

 

스자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부끄러워진 L.L.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면서 아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절하기 직전까지는 목이 아플 정도로 쉬어있었는데 말하는 것도 무리가 없었다. 스자쿠는 L.L.의 비교적 멀쩡한 모습에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것 같네.”

“뭐? 지금 얼마나 아픈 줄 알고.”

“그렇게 말해도 움직일 수는 있잖아. 밥 먹을 거지? 내가 차렸어.”

 

스자쿠는 준비가 다 되어간다면서 부엌으로 먼저 들어갔다. 사라지는 스자쿠의 뒷모습에 L.L.는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괜한 부끄러움이, 알 수 없는 수치심이 스자쿠를 볼 때마다 들었다. 아마 첫 번째는 강간이었다고 치더라도, 두 번째는 부정할 수 없는 섹스였다. 스스로 스자쿠를 끌어안았던 것까지 기억했다. 왜 그런 짓을 했지. L.L.가 혼자서 중얼거려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어영부영 발걸음은 부엌에 닿았고, 부지런히 아침 식사 준비를 한 스자쿠는 L.L.가 자리에 앉고 식사를 시작하고 나서 제 식사에 손을 댔다. 왠지 L.L.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간지러운 시선에 L.L.는 묵묵부답으로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밥 먹고 목욕할래? 이번엔 혼자서. 어제 닦아주긴 했지만 그래도….”

“밥상에서 그런 이야기는 됐어. 혼자 씻는다.”

“그래….”

 

스자쿠는 제멋대로 굴었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어딘가 차분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스자쿠의 저를 잠깐 잠깐 훑어보는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 착각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제와의 차이를 느끼고 나서부터 L.L.는 식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입에 넣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수준으로 식사를 하고 있으면 스자쿠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 시선을 피한 것은 스자쿠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국그릇을 들고서 마시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자, 이번에는 사례가 들린 스자쿠가 컥컥거리며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L.L.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꽤나 길게 기침을 하는 모습에 걱정스레 손을 뻗으면, 스자쿠는 L.L.의 손을 내치기까지 했다. 그래놓고선 제가 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적당히 해라, 진짜!”

 

결국 화가 난 L.L.는 짜증을 냈다. 계속 빗나가는 시선이며 내치는 손까지 스자쿠가 어디에서 저를 어색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거부를 당하는 건 사절이었다. 만약 내친다면 지금 손 하나 까닥하는 게 힘든 제가 하는 게 아니던가.

 

“미, 미안. 뭐랄까, 그, 를르슈를 보는 게 좀 힘드네.”

“뭐?”

“지금이 마지막인 거잖아?”

 

스자쿠가 말하는 ‘마지막’이라는 말에 L.L.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를르슈, 내일이면 떠날거니까….”

 

내일, 떠난다. 

그 말을 듣자마자 L.L.는 자신의 상황을 다시 한 번 파악했다. 두 번의 섹스, 아픈 몸. 이렇게 화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가장한 L.L.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내가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세, 섹스 몇 번에 고작.”

 

떨지 않고 말하려고 해도 아무래도 동정 청년에게는 과한 언어라는 것을 몸이 먼저 알고 떨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으로 스자쿠가 비웃을까 했지만 정작 스자쿠는 비웃지도 않은 채로, 그러나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당연한 일이거든. 나한테는 특히 더.”

 

그런데 를르슈가 떠난다고 하니까, 뭐랄까, 좀 싫고…. 바보 같을 수도 있는데.

 

“왠지 눈물이 날 거 같아.”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하는 말에 L.L.는 저도 모르게 씰룩이는 스자쿠의 뺨을 툭, 하고 건드렸다. 뭐야,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소년이 불만을 가장해서 머쓱함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왜 이렇게 스자쿠에게 너그러워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해결되지 않은 미안함에 대한 심리가 가라앉아있는 채로 살아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애절할 필요는 있을까. 혼자 살아가는 스자쿠를 보면 안쓰러운 이유는, 그의 전의 인생을 자신이 망쳤다는 죄책감, 그것 하나라고 말하기에는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것들을 고스란히 흐르게 내버려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막아두었다가는 스스로 괴로워지는 감정이 더 깊어지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나한테 정이라도 들었어?”

“그러니까, 그런 게….”

“그럴 수도 있지. 너는 원래 정이 많으니까.”

“……그 친구 이야기지? 어제 말했던 그 친구.”

 

스자쿠는 그 이야기가 싫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L.L.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의 어린 스자쿠와 과거의 스자쿠는 다른 인물이지만, 그 둘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제 인정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스자쿠는 기어스의 조각이라는 걸, 오랜 시간을 걸려서 인정한 것이었다. 바로 옆에 C.C.가 없기 때문에 C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스자쿠가 죽으면 흩어진 기어스의 조각 하나가 또 다시 회수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L.L.는 빨리 이 곳을 떠나야만 했다. C.C.는 L.L.의 기척을 읽고, 기어스의 조각의 기미를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는 L.L.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기어스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C.C.로부터 스자쿠를 지킬 수 있을지는 쉽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L.L.와 기어스의 조각이 같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C.C.는 바로 스자쿠를 죽이러 올 것이다. 

망할 마녀.

나 하나로도 모자라서, 스자쿠까지. 

그녀에 대한 분노가 다른 것으로 변질된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L.L.는 자신이 변한 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스자쿠의 앞에 있을 때면 를르슈가 된다. 이젠 그 찰나의 기억으로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야만 했다. 

 

“나는 그 친구가 아니야, 를르슈.”

“알고 있어. 그건, 아마 내 착각 같은 거겠지…. 네가 그 녀석과 너무 닮았으니까. 어제는 아파서 헛소리를 한 거야.”

“그랬어?”

“아마도.”

“를르슈도 잘 모른다는거네.”

 

긴 시간을 살아가도, L.L.가 알게 된 것은 아주 보편적인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으며, 죽은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도 않고, 헤어졌던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 그런 보편적인 법칙에서 벗어난 자신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해서 안되는 것으로 변해버린 이후부터,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너무 신경쓰지 마, 스자쿠.”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으며, 스자쿠에게는 저에게 가지고 있는 미련을 접으라는 말로 쐐기를 박기 위해 한 것이었다. 스자쿠는 그 말에 눈을 부릅 떴다가, 무어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리기도 했었다. L.L.가 무심하게 식사를 이어가는 모습에 스자쿠도 더 말하지 않고서 남은 식사를 끝냈다. 설거지는 L.L.가 했다. 

점심이 될 때까지 L.L.는 방에서 머리가 아플 때까지 잠을 잤다. 꿈도 꾸지 않고 자는 잠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만 빼면 다시 하는 기상은 상쾌한 편이었다. 이제 슬슬 짐을 싸야만 했다. 내일 아침 나츠미가 오는 것만 확인하면 어디론가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 방금 전이었다. 

L.L.는 배낭과 몇 개 없는 짐을 싸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니 어디로 떠나야할지 아직도 정하질 못했다.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게 며칠이 될지 준비도 하지 않고 떠나는 것은 그 아무리 기어스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리였다. 좀 나아졌다 하더라도 섹스로 지친 몸을 이끌고서 장을 보고 무거운 짐을 꾸려서 나갈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더 머물 수도 없었다. 

체력이 없는 것이 매번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것이 불편했다. 조금의 틈이라도 잡고서 스자쿠를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자신의 약해 빠진 모습을 다시 보게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자쿠를 또 다시 이용하려는 것 같아서 죄책감까지 드는 것은 물론이었다. 

다시 태어나는 스자쿠도 변하는 것이 없지만, 저도 이런 면에서는 변하는 것이 없다.

L.L.는 채워야할 짐들의 목록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복도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서 물건을 사고 —비합법적인 방법으로도 갈취할 생각도 있었다.— 다시 저녁이 되면 돌아올 생각이었다. 스자쿠에게 미리 말은 해둬야할 것 같아서 그를 찾으려고 스자쿠의 방에 가면, 여전히 주인 없는 방이 문은 활짝 열린 채로 L.L.를 맞이하고 있었다. 

 

“스자쿠….”

“어라, 를르슈. 거기서 뭐해?”

 

스자쿠가 나타난 곳은 다름 아닌 욕실이었다. 옷 끝을 말아 접은 것을 보아 아마 청소 중인 것 같았다. 물기가 흥건한 손으로 L.L.를 보며 손을 흔들던 스자쿠는 제 손에서 튄 물방울에 우왓, 하고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를르슈, 또 잔 거야?”

“아, 응. 지금은 잠깐 나가려고.”

 

스자쿠는 를르슈와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 평소보다 더 밝은 미소로 제 뒷통수를 만지작거리면서 를르슈를 불렀다. 여기, 뻗쳤어. L.L.는 떨떠름한 얼굴로 제 뒷통수를 만졌다. 한참을 뒹굴며 잤던 탓에 머리가 눌린 모양이었다. 

 

“모자라도 쓰고 갈래?”

“아니, 뭐…. 이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를르슈는 의외로 그런 걸 신경쓰지 않는구나.”

“어차피 내일이면 안 볼 사람들이니까.”

 

괜히 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나면 스자쿠가 의기소침한 얼굴로 그렇구나, 하고 말을 했다. 그러다가 자기를 스쳐지나가는 L.L.를 보면서 방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는 듯 말을 붙여왔다.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건데?”

“시장에. 해가 지기 전에 다녀오려고.”

“뭐 사러?”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통조림이나, 보존식, 그런 거.”

“헤에, 시장에서 팔려나.”

 

잽싸게 수건으로 손발을 닦은 스자쿠는 L.L.의 뒤를 따라가며 저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왜냐면 를르슈, 여기 잘 모르니까 내가 알려줄 수도 있잖아. 저도 꼭 같이 가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스자쿠의 흥을 깨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이제 슬슬 냉정해져야겠다고 생각한 L.L.였다. 

 

“방금 전에 말한 물건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굳이 네가 안 따라와도 돼. 그리고 너도 바쁜 거 아니야? 청소 중이지 않았어?”

“청소는 나중에 해도 돼. 를르슈는 내일 가니까, 같이 있을 수 있을 때 있고 싶어.”

“왜?”

“왜일까…. 정말 정이 들어서 그런 걸 수도.”

 

스스로 의문문으로 대답하는 스자쿠에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주어도 스자쿠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같이 가자는 말을 해버린 L.L.는 알겠다며 환하게 웃는 스자쿠의 얼굴에 화도 내지 못했다.

물건을 사는 것은 수월했다. 어디를 가도 여행자들을 위한 곳은 늘 있다. 떠날 사람들을 위한 물건을 파는 가게는 작았지만 물건들을 확실하게 준비하고 있었고, L.L.의 아슬아슬한 주머니 사정에 맞추어서 모든 구색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그거면 돼? 정말로? 옆에서 스자쿠가 귀찮게 물어왔지만, L.L.는 짜증내지 않고서 이정도면 된다고 말했다. 떠나는 날까지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근데 를르슈는 어디로 가?”

 

저녁으로 먹을 거리와 내일 아침까지 사들고 오는 짐은 꽤 묵직했지만 스자쿠가 대부분을 들었고, L.L.는 내일 떠날 때 쓸 짐만 챙겨드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저보다 두세 배는 무거울 주머니를 들고 있던 스자쿠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평온한 말투로 L.L.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어디든, 여기서 멀리 가야겠지.”

“이제 다시 안 와?”

“목적은 달성했거든.”

“뭐였는데?”

“그건 비밀이야.”

 

스자쿠는 비밀이라는 말을 꺼내는 L.L.를 보면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더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L.L.가 비밀을 쓰는 순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여기서 멀리 떠나야 돼?”

“도망쳐야 하거든.”

“누구한테서?”

“마녀가 나를 쫓아와.”

 

이번엔 마녀.

를르슈가 하는 말에 스자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를르슈, 사실은 나한테 계속 거짓말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 친구나, 마녀 그런 거 다 거짓말이지?”

“나는 너한테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L.L.는 정직하게 진실을 답했다. 사소한 것엔 거짓말을 했을지는 몰라도, 스자쿠에게는 늘 진실로 답하려고 애를 쓴 자기 자신이 좀 가여웠다. 이렇게 의심을 받을 거면 그냥 거짓말을 마구잡이로 늘어놓는 게 좋았을까. 형편 좋은 거짓말이 어쩌면 가장 진실에 가까웠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를르슈가 했던 말은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하지. 이해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을 거야.”

 

전생의 기억이 있다느니, 그런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츠미와 같이 사는 게 평화롭다. 

 

“그럼 를르슈는 미쳤다는 소리 들어?”

“그럴 리가. 나는 적당히 말해.”

“나한테도 적당히 말했어?”

“아마도?”

“거짓말 한 거야?”

“거짓말은 안 했다고 말했지.”

 

조금 경사가 진 언덕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도 문답은 계속 이어졌다. 스자쿠는 묵직한 짐을 휘두를 정도로 무겁지 않은 것 같았고, 그것의 절반도 안되는 무게의 짐을 들고 가는 L.L.는 약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진짜 어디로 가?”

“그건…안 정해졌어.”

“꼭 내일 가야 돼?”

“응.”

“왜?”

 

스자쿠의 마지막 말에 L.L.는 잠깐 숨을 고르면서 마른 목에 침을 삼켰다. 헐떡거리는 숨 때문에 입안이 말랐다. 마른 입속으로는 거짓말도 하지 못한다. 애초에 지쳐서 거짓말을 할 겨를 따위 없었다. 

 

“내일 안 떠나면, 영원히 못 갈 거 같아서.”

 

스자쿠는 저보다 훨씬 뒤처진 L.L.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태양을 등지고 있어서 평소보다 더 눈이 부시고, L.L.는 바라보는 것이 여러모로 괴로워서 눈을 내리깔고서 바닥으로 시선을 처박았다. 

 

“그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그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라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뜬금없는 말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래서 두 번의 재고도 하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바보 같다는 소리에 기분이 상한 듯한 스자쿠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래?’가 전부였다. 하긴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스자쿠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그의 다음 이야기를 듣는건 어려웠다. 를르슈는 도망치는 중이니까. 더운 바람 사이로 스자쿠의 말은 흐르지 않고 고여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의 이야기가 목구멍을 턱턱 막아왔다. 

 

“를르슈는 왜 도망가야 돼?”

“도망가지 않으면, 붙잡히니까.”

“싸우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이길 확률이 없어.”

 

긴 시간동안 C.C.를 따돌릴 수 있는 방법만 생각했다. 결국 알아낸 것은 그것뿐이었다. C의 세계가 완전히 돌아온다면 C.C.가 L.L.를 잡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정도로,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L.L.는 열심히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고 싶다고 하면…를르슈를 도울 수 있어?”

 

스자쿠는 계속해서 같이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돌려서 했다. 너무 바보 같은 이야기, 꿈같은 이야기, 거짓말이라고 믿게 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이건 선택지에도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스자쿠는 지금의 삶을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번도 지금의 스자쿠와 같이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L.L.는 대답 대신에 짐을 든 손에 힘을 꽉 주면서 스자쿠를 앞질러 걸어갔다. 

언덕길은 곧 끝이 날 것이다. 스자쿠를 뒤흔드는 자신의 존재도 언젠가 그때의 추억으로 남아버릴 것이다. 찰나의 감정으로 스자쿠에게 허락을 내줘서는 안 됐다. 

단호하게 보이는 L.L.의 거절에 스자쿠는 더 말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처음엔 L.L.가 앞질러 가다가, 나중엔 스자쿠가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저를 앞지르는 순간의 스자쿠의 눈이 반짝거린 것을 보아, 그가 혹시 울었던 건가, 생각이 들었지만, 울었다고 하더라도 L.L.는 자신의 뜻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우는 스자쿠를 달래주는 것은 L.L.의 몫이 아니라, 나츠미가 할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스자쿠는 문을 열자마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하고 미닫이문이 잡아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쾅하고 닫혔다. L.L.는 스자쿠가 들고 온 짐을 낑낑거리면서 부엌까지 끌고 갔다. 음식들을 정리하면서, 스자쿠에게 같이 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하마터면 데리고 갈 뻔했어. 

이 외로운 길에, 나를 또 외롭게 만들 뻔 했어. 

 

그 생각을 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L.L.는 입술을 깨물며 자기가 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나의 외로움은 나의 죄이다. 나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굴어서는 안 돼. 스자쿠에게, 지금의 스자쿠에게는 평범한 행복이 필요하다. 그래야 하는데. 

를르슈의 마음은 L.L.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아무리 살아도 그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스자쿠를 보면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 다시 태어난 스자쿠를 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희망을 조각조차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L.L.의 벌이었음에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마음을 남겨서는 안 된다. 

흔들리려는 마음을 붙잡고서 L.L.는 새로 사온 짐을 가방에 넣으면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을 부릅떴다. 자기 뜻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은 이윽고 덜덜 떨리면서 물건들을 몇 차례 바닥으로 떨구긴 했지만 나중엔 별 무리 없이 모두 안에 넣었다. 이로써 며칠을 멀리 떠나도 불안하진 않을 것이다. 

똑똑.

 

“…를르슈, 들어가도 돼?”

 

이 방문을 두드릴 사람은 스자쿠 밖에 없었다. L.L.는 꽉 잠긴 가방을 구석으로 치우면서 들어오라고 말을 했다. 소리 없이 열린 문 사이로 스자쿠가 보였다. 역시 그는 울었던 것 같았다. 커다란 눈이 부은 티가 역력했다.

 

“울었어?”

“조금.”

 

어렸을 때나, 그때나, 지금이나, 스자쿠는 눈물이 많았다. 모르고 있는 점도 많지만, 알고 있는 점도 제법 겹쳐서 L.L.는 이런 닮은 구석을 찾을 때마다 즐거웠다. 그래도 울었던 얼굴을 보는 것은 쓴웃음이 났다. 그가 왜 울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를르슈, 정말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왜 같이 가고 싶어하는 거야, 너는 나츠미 씨랑 있는 게 더….”

“나는 여기에 있기 싫어.”

 

나츠미 씨가 싫다는 게 아니야. 말하고 있는 지금의 스자쿠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한다. 이런 건 스자쿠가 아닌데. L.L.는 스자쿠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계속해서 여기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입술에 손을 댔다. L.L.의 손길에 스자쿠는 말을 멈추었다. 

 

“네가 떠나고 싶다면 떠나는 건 말리지 않아. 하지만 나랑 같이 가는 건 안 돼.”

“왜?”

“왜냐니, 어린애 뒷바라지 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거짓말이다. 둘이 같이 붙어다닌다면 또 다시 C.C.가 찾아낼 것이다. 그녀는 무자비하고, 무정하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탓에 스자쿠는 또 죽고 말 것이다. 어차피 스자쿠는 완벽한 타인으로써 살다가 죽을 것이지만, L.L.와 관련되서 그 생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은 싫었다. 

 

“나, 그렇게 어린애도 아닌데. 어제 를르슈랑 섹스도 했고.”

“섹스할 사람이랑 떠나고 싶으면 나츠미 씨랑 떠나는 게 어때?”

“나츠미 씨는….”

 

애초에 스자쿠와 섹스하게 된 것도 그런 것을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츠미와 스자쿠와의 관계를 우선해야한다. L.L.는 말하는 것 대신에 분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스자쿠와 마주했다. 

 

“나츠미 씨를 좋아하진 않아.”

“싫어하지도 않고? 그녀가 가엾군. 이런 애매한 녀석이랑.”

“맞아, 나츠미 씨가 가여워. 그러니까 난 떠나야 해.”

“좋아하면 되잖아.”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것은 꽤나 정석적이고, 스자쿠가 할 법한 말이었다. L.L.야말로 그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쉬운 것이라면, L.L.가 이러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나츠미 씨를 좋아하게 되겠지. 그렇게 좋은 사람은 드물잖아.”

“그러니까, 내가 더 옆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뭐야, 그럼 나를 따라오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갈 만하다고 생각해?”

"그게 아니라, 나는 를르슈가 좋아."

 

내가 좋다고?

 

“를르슈랑 같이 있고 싶어.”

 

나와 같이 있고 싶다고?

스자쿠의 말에 L.L.는 속으로 그 말을 따라서 읊어보았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라면 어쩌면 이 전개를 반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름을 버린지 너무 오래되었다. 너무 늦었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L.L.는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늦었다는 말에 무엇이 늦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으며, 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에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는 것은 비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스자쿠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비겁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 뿐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L.L.는 를르슈의 마음으로 가득 차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스자쿠와 함께 이 외로운 여행길을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고 있어서, 그가 하는 좋아한다는 말도, 같이 있고 싶다는 말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스자쿠에게 있어서 도움이라고는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알고 있음에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충동처럼 일었고, 그것은 곧 용기가 되었다. L.L.의 꾹 다물렸던 입은 무거운 공기를 한 차례 토해내고 허락을 말했다.

 

“…알았어, 그럼 내일 같이 떠나자.”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L.L.의 허락에 스자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역시도 를르슈의 허락에 놀란 모양이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다. L.L.를 찾아다니는 C.C.는 스자쿠와 같이 있는 걸 알면 그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런 C.C.를 막을 수 있는 방법 따위, L.L.에게는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L.L.는 스자쿠와 같이 떠난다는 사실에 무언가가 북받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 끊어냈다고 생각했던 를르슈의 마음이 미련하게 남아있기 때문인 걸까. L.L.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그 마음을 겨우 억누르면서 스자쿠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에 나츠미 씨한테는 제대로 설명해야 돼.”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조금 상기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괜찮아, 제대로 말할게. 나츠미 씨도 분명 이해해줄 거야.”

 

들뜬 스자쿠는 L.L.를 힐끔 쳐다보더니 더 붉어진 뺨을 문지르면서 물었다.

 

“그, 를르슈는 어때? 나는 를르슈가 좋다고 했잖아…?”

 

분명 스자쿠는 동정이나 연민을 바라면서 애정을 갈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L.L.는 그가 과거 어떤 인간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돌려줘야할 대답도 무엇인지 정해져 있었다.

나 역시 너를, 스자쿠 너를….

L.L.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마음을 다시 한 번 입안에서 되새기며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한 번 벌어진 입술로 고백을 말하기에는 혀끝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너를…….”

 

너를 선택할 자격이나 있을까. 너를 이 외로운 길에 끌어들여도 되는 걸까. 원치 않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이 여행에, 스자쿠 너를.

L.L.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스자쿠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쉽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어린 소년은 상처받은 눈을 했지만 울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감내한 눈빛으로 L.L.를 보고 나서, 자신보다 훌쩍 큰 키의 L.L.의 품을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괜찮아. 다음 말은 내일 아침에 들려줘.”

 

스자쿠는 짐을 챙기고 오겠다면서 꼭 끌어안았던 L.L.에게서 벗어났다. 스자쿠의 체온이 떨어지는 것에 L.L.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스자쿠와 떨어지는 것이 이제껏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같이 가기로 한 이상 그 체온은 이제 완전히 L.L., 아니 를르슈의 것이 되었다.

내일 아침이 되면 같이 떠나는 거야. 그리고 그 말을 전하자.

공지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2019.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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