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움직이는 소리는 어디에 있든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
줄리어스 킹슬레이의 발소리도 묻히게 만드는 그 소음은 모처럼 맑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두 눈으로 보는 차창 밖의 풍경과, 차창 너머로 비치는 밝은 햇살은 줄리어스에게 모든 것이 낯설었다. 벌써 사흘째였다.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컨디션과 함께 두 눈으로 본다는 이 낯선 느낌은 줄리어스로 하여금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세상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의 옆에 늘 있어야할 쿠루루기 스자쿠는 있지 않았고, 그의 모든 것인 황제 폐하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라고 말하는 여자가 옆에 있을 뿐이었다. 자기 이름을 이니셜 두 글자로 대신하는 여자에게 줄리어스는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 말고는 줄리어스 근처에 있던 사람이 없었다.
줄리어스가 각성한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기분이 상쾌한 각성은 곧 알 없는 상황에 대한 패배감으로 번져갔다.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하다고 믿은 것들이 흔적도 없이 온데 간데 사라졌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패배로 잠겨들었다. 그런 것치고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줄리어스를 안쪽 창문 너머로 훔쳐보는 여자의 이름은 C.C.였다. 그녀는 줄리어스가 각성하자마자 본 사람이었다. 머릿속 데이터 베이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이 여자는 줄리어스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L.L.라던가, 를르슈라던가, 이윽고 제로라는 이름이 나올 때까지 줄리어스는 그녀가 미친 여자인 줄 알았다. 폐적된 황자와 사로잡힌 테러리스트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냔 말이다. 줄리어스가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팔을 내치면 C.C.는 맥없이 바닥에 널부러지고 말았다. 습관적으로 안대를 만지려고 했던 손은 곧 그것이 없음에 당혹스러움은 분노로 번지고 말았다. 그것은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나만의 것이다…!
—내 안대, 어디에 뒀어?
줄리어스의 말에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줄리어스를 쳐다보았다. 원근이 맞는 느낌은 줄리어스에게 낯설었다. 어딘가 한쪽이 일그러진 평면으로 보이는 것이 줄리어스의 시야였다.
—너, 누구야?
누가 할 소리를 자기가 하고 있는지. 줄리어스는 발소리를 쾅쾅 내면서, 저에게서 두세 걸음 떨어진 여자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여긴 어디고, 너는 누구지? 쿠루루기는 어디 있어?!
—쿠루루기, 스자쿠?
—그래, 그는 알고 있을 거다.
—너는, 를르슈야?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게 하지 마라, 망할 여자.
더 이상은 시간 낭비였다. 줄리어스는 여자의 뺨을 한 대 때렸다. 짜증과 더불어 함께 치밀어오른 분노를 담은 일격이었기에 여자는 또 바닥으로 넘어졌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줄리어스를 노려보는 눈은 갑자기 맞은 것에 대한 분노와 당황함보다는 무엇도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 눈은, 쿠루루기가 자주 했던 눈이었다. 경멸도 아니고, 상황에 대한 굴욕도 아닌 이상한 눈이다.
—여기가 어딘지, 네가 누군지 말하지 않으면 손톱부터 뽑아주마.
—하하…. 너는 또 도망을 갔구나.
—뭐?
—정말, 너무해.
여자는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자신의 이름은 C.C.라고 대답했다. C.C.? 이상한 발음에 줄리어스가 무심코 따라했다. 이제 네가 대답해. 너는 누구야. C.C.의 말에 줄리어스는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럼 나도 쿠루루기 스자쿠의 행방에 대해서 말해줄 필요는 없어.
—정보 교환이라도 하자고 말할 셈인가? 누가 봐도 네가 불리한 상황에서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줘야하지? 나는 널 죽일 수도 있어.
—죽일 수 있다면 죽여 봐. 너는 할 수 없을 거야.
—배짱은 두둑하군.
—이거라도 있어야지.
웃기는 여자.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C.C.의 목을 두 손으로 옭아매어 숨통을 졸라 죽이면 그녀는 곧 눈을 까뒤집고 바닥에 쓰러졌다. 껄떡거리는 숨 사이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찮은 시간 낭비였다. 빨리 쿠루루기를 찾아내야한다. 그 녀석은 손이 가는 호위군. 모처럼 기분 좋은 각성 중에 쿠루루기의 부재는 이 모든 것을 단숨에 망칠 정도로 심사가 뒤틀릴 일이었다. 줄리어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뭐야, 고작 하는게 목졸라 죽이기? 저열하군.
—뭐…?!
—이 정도로 나를 죽일 수 없어.
—분명 방금.
—죽었어.
—죽었는데?
—나는 죽지 않아. 이제 네 차례야. 슬슬 이름 정도는 말해주지 그래?
그녀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줄리어스에게 말했다. 그녀가 죽지 않는다는 것은 방금 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 줄리어스의 심정을 알았는지, 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고는 줄리어스에게 내밀었다.
—이 칼로 심장이라도 찔러보던가.
—못 찌를 줄 알고.
—참고로 피 묻은 옷은 네가 빨아야할 거야.
죽음을 일상적인 것처럼 말하는 그녀에게서 나이프를 받아들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일순간이라도 그녀에게 휩쓸려 칼을 들어볼 뻔한 자기 자신의 나약함에 혀를 찬 줄리어스는 입을 열었다.
—줄리어스. 줄리어스 킹슬레이다.
—줄리어스?
—그래. 네 진짜 이름은 뭐지?
—네 이름보단 예뻐. 뭐, 알 필요는 없어.
—이 자식이!
—힘없는 남자의 폭력은 지긋지긋해. 네 분풀이 상대가 될 시간을 내주긴 아깝네, 줄리어스.
그녀는 어딘지 줄리어스를 꿰뚫어보는 것처럼 말을 하면서, 이 열차는 어떤 나라로 가고 있는지 말했다.
—그걸로는 쿠루루기를 찾을 수 없어.
—아,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해서 말하기로 했었지.
—그래.
—걔는 죽었어.
—뭐?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봐.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C.C.의 것으로 보이는 짐 가방에서 낡아빠진 여행 책자가 날아왔다. 너덜너덜한 겉표지에는 지금 막 차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호수가 그려져 있었다. 산을 끼고 아름다운 호수가 많은 이 나라는…. 진부한 소개글을 넘겨 읽은 줄리어스는 이 낡은 책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그가 자연스럽게 흘러들었던 정보를 다시 곱씹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죽었다.
그 말은 곧 현실로 느껴졌다. 줄리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쿠루루기의 시선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 불편한 족쇄처럼 느껴졌던 시선은 사실은 족쇄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줄리어스의 불안한 심리를 지탱해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가 없는 줄리어스는 시도 때도 없이 흔들렸다.
* * *
C.C.가 L.L.를 발견한 것은 일본의 어느 항구에서였다. 미지근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L.L.를 찾기 위한 오랜 여행으로 지친 C.C.는 정작 그를 보고 나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L.L.는 눈물이 말라 붙은 자국을 한 얼굴은 엉망진창이었고, 핏자국이 낭자한 흰옷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기어스의 조각은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이곳에서, L.L.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어쩔 수 없는 이별을 하고 사람과 어울릴 수 없는 고독함에 몸부림 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 고통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이틀 동안 배를 타고, 앞으로 20시간은 달려야 하는 새벽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거기서, L.L.는 모습을 감추고 줄리어스 킹슬레이는 눈을 뜬 것이다.
그것도 벌써 사흘 전의 일이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벌써 기차를 두 번 갈아탔고, 지금은 마지막 목적지로 향하는 야간기차를 타고 있었다. 앞으로 7시간 후면 도착하는 기차 안에서, 줄리어스와 C.C.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얌전히 관광책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줄리어스는 겉보기에는 완벽하게 를르슈 그리고 L.L.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속내는 전혀 모르는 남자였다. C.C.를 매번 다른 수법으로 곤란하게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L.L.지만 이번에는 인격을 바꿀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것도 샤를 지 브리타니아의 기어스로 만들어진 거짓된 인격이 튀어나올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C.C.는 눈을 감고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젠 정신적인 부분까지 놓아가며 도망친 L.L., 그리고 남겨진 줄리어스 킹슬레이. 이 천방지축 그 자체인 남자를 어떻게 묶어둬야할지가 고민이었다. C.C.의 깊어지는 한숨에 줄리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출입문 쪽으로 나가려는 줄리어스에게 C.C.가 물었다.
“어딜 가려고?”
“어차피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재주는 없어. 쿠루루기도 아니고.”
“…그랬지, 참.”
“식당 칸에 다녀올 거야. 배고프니까.”
“그래, 그러던가. 돈은 있고?”
“너는 있나보지?”
“네게 그 돈을 줘야할 의무는 없어.”
줄리어스는 그런 C.C.의 대답에 흥미가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시겠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줄리어스의 말에 C.C.는 그러던가, 하고 대꾸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줄리어스를 살폈다. 줄리어스는 출입문을 열고 나서서, 식당칸이 있는 복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줄리어스가 나가자마자 C.C.는 숨겨놓았던 낡은 태블릿PC를 꺼내들었다.
줄리어스 킹슬레이에 대해서 검색했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그는 실존했던 인물이긴 했을까. 그가 어떤 남자였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쿠루루기는 어디 있냐고 묻는 것을 보면 그는 쿠루루기 스자쿠와 관련이 있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C.C.를 완벽하게 모르는 걸 보면 조작된 를르슈의 기억 속 편린 중 하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추측일 뿐, C.C.는 줄리어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가 또 가면을 바꾼 를르슈라는 인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현재로써 내려진 결론이었다.
L.L.의 삶에서 를르슈는 언제까지 존재하는 걸까? C.C.는 태블릿PC를 집어넣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하얗게 눈이 쌓이는 산맥을 훑고 지나가는 기차는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설경을 지나가고 있었다.
—눈이 왜 하얀 줄 알아, 를르슈? 그건 자기가 무슨 색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언젠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C.C.는 눈을 감았다. 기어스의 조각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니면 줄리어스가 나타난 뒤로 느껴지는 불안을 억누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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