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은 좀처럼 무언가를 담는 법이 없다. 그의 시야에 비치는 것은 대체 어떤 것들인가 궁금해 했던 적도 있지만, 오랫동안 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 와닿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쿠루루기 스자쿠는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시선 끝에 맺히는 모든 것들을 궁금해 하기에는 지금의 ‘를르슈’에게는 그것 말고도 신경 써줘야 할 것들이 많았다.
지금의 ‘를르슈’. 그를 를르슈라고 불러도 되는지, 스자쿠는 고민에 빠졌지만, 그를 데리고 온 C.C.가 그 남자를 ‘를르슈’라고 불렀다. 그는 L.L.가 아닌 듯 했다. 그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며 세상으로부터 어긋난 이치를 살아가는 그 남자와는 다른 존재겠지.
지금처럼 스자쿠의 옆에서 딱 달라붙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이런 백치 같은 남자를 어떻게 L.L.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를르슈’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너무한 일이 아닌가, 스자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름이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아서, 스자쿠도 억지로 수긍하며 그를 ‘를르슈’라고 부르기로 했다.
C.C.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난 애 돌보는 거에 진저리가 나. 아무리 전직 노예라고 하더라도, 애를 돌보는 고급진 특기는 없단 말이야.”
“으응, 그렇다고 내가 이… ‘를르슈’를 돌보는 건 뭔가, 좀.”
“어차피 일은 나나리가 다 하고 있지 않아? 너는 지금 하고 있는 게 없을 텐데.”
“맞는 말이지만.”
“그럼 몇 년 동안 좀 부탁해.”
“뭐? 몇, 몇 년?”
“그래. 너한테 이 녀석 돌보는 건 일도 아니잖아? 아니면 가녀린 내가 이 남자애를 데리고 다녀야 해? 그것도 감당 안되고 막무가내에 제멋대로인 녀석을?”
그렇다고 해서 제로인 스자쿠가 하루 종일을 할애해서 ‘를르슈’의 옆에서, 감당 안되고 막무가내에 제멋대로인 ‘를르슈’를, 어떻게 돌볼 수 있냔 말이다. 말을 마친 C.C.는 가지고 온 조촐한 짐에서 ‘를르슈’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경과 장난감, 그리고 다 낡아빠진 비디오 테이프 같은 것을 꺼냈다. 이런 골동품 어디서 구한 거야?— 라고 스자쿠가 물어보고 싶은 것에 C.C.는 ‘너는 내 고생을 좀 더 치하할 필요가 있어.’ 라면서 스자쿠의 입을 닫게 했다.
담요에 싸여서 새근새근 낮잠을 자는 ‘를르슈’를 두고서 C.C.는 이제 짐을 챙겨 제로의 개인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럼 당분간 잘 부탁해, 라고 C.C.가 말하는 것에 스자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나리나 카렌한테 맡기는 게 낫지 않아? 카렌은 이 ‘를르슈’를 만나본 적 있다면서.”
“지노 바인베르그와 한창 신혼인 녀석한테 너무하군, 너도.”
“를르슈가 나를 의지할 리가 없잖아.”
“하, 쿠루루기 스자쿠도, ‘를르슈’도, L.L.도, 나한테 너무 성가셔. 귀찮아 죽겠어.”
“C.C., 나는….”
스자쿠가 C.C.를 부르는 것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고리에 손을 걸었다. ‘를르슈’는 그렇게 떠나려는 C.C.의 뒷모습도 보지 못하고 자고 있었다. 스자쿠는 이 상황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몇번이고 고민했지만, C.C.가 아예 문밖을 나서는 것을 보면서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C.C.가 마음 먹으면 어지간한 일은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스자쿠는 물론이고 를르슈도 알고 있었으니. 매정한 C.C.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고, 남아버린 스자쿠는 자고 있는 ‘를르슈’의 옆에 잠깐 앉아보았다.
그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도 가깝게 들리는 거리에서, 스자쿠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스자쿠와 ‘를르슈’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C.C.가 떠난 뒤, 스자쿠와 단 둘이 남게 된 ‘를르슈’는 처음에는 발작하듯 울어댔지만, 스자쿠의 눈물 나는 노력과 C.C.가 남기고 간 만화경, 장난감, 그리고 다 낡아빠진 비디오 테이프들을 틀어주자 가까스로 조용해졌다. 그리고 스자쿠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망토에 관심을 가지고, 그 다음에는 가면을 궁금해 하던 ‘를르슈’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도 아닌 스자쿠의 머리카락이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끝을 살살 쓰다듬는 것을 허락해주면, ‘를르슈’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도 스자쿠의 곁에 앉아서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서 조용히 놀았다.
스자쿠는 그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서 ‘를르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스자쿠의 시선을 모르는 듯한 ‘를르슈’는 스자쿠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으면서, 헤헤, 하고 웃었다.
그는 소리 내어 웃는 법이 좀처럼 없었는데.
스자쿠에게 무릎을 내어주고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을 반복하면서, 스자쿠와 눈을 맞출 듯 하면서도 맞추지 않은 채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가 지겨우면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새액새액 숨을 내쉬다가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럼 그제서야 잠에 같이 빠져들 뻔 했던 스자쿠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담요를 ‘를르슈’의 어깨에 걸쳐주고서, 그를 편히 잘 수 있게 몸을 뉘여주었다.
“나나리를 그리워하는 걸까….”
스자쿠는 를르슈가 마구잡이로 쓰다듬어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쓸어넘기면서 생각했다. 관리도 하지 않는 남자의 곱슬머리가 아끼는 여동생의 곱슬머리랑 비교할 것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딘가 그 느낌이 닮아서, 지금의 ‘를르슈’가 스자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나나리를 만나게 해줘야 할 텐데. 그러나 지금의 나나리는 몹시 바쁘고, 흑의 기사단의 업무에서 벗어난 제로에게 내어줄 시간은 아마도 올해 말 쯤이나 되어야 내줄지도 모른다. 그래도 ‘를르슈’의 사정을 말하면 그녀는 만나줄 테지만….
스자쿠는 그러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를르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나나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나는 어른이 못 됐어, 를르슈.’
너를 여전히 독점하고 싶어해.
네가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으로부터, 네가 선택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너를 떼어놓고 싶은 이 마음은, 어른이 되었다고 하기에는 한참 멀었지.
“…?”
잠에서 깬 ‘를르슈’가 스자쿠의 옆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를르슈’의 행동은 조심스럽지만, 스자쿠를 향해 뻗는 손은 신뢰로 가득했다. 스자쿠는 그의 손을 잡아주면서, 이제 막 자다 일어나 따끈따끈한 그 손에 자신의 손을 얽어두었다.
힘 주어 잡을 수 없는 ‘를르슈’의 하얀 손을 놓아야 하는 날이 언제든 올 것이다.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이며,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마다 않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지금 이 손을 잡아보는 것은 아주 잠깐, 스자쿠만의 욕심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너도 나를 두고 갔고, 나도 너를 두고 갈 테니.
“우리는 어쩔 수 없나봐, 를르슈.”
스자쿠는 붙들린 손에 힘을 주며, 스자쿠를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는 ‘를르슈’에게 이끌렸다.
어렸을 때부터 여전했던 미모는 이렇게 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를르슈’가 되면서 더 어린 얼굴이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출 줄 모르는, 정말 아이가 되어버린 ‘를르슈’는 지금의 스자쿠를 오롯이 자신의 세상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그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닐 텐데도.
“……기뻐.”
스자쿠가 기쁘다고 말하는 것에 ‘를르슈’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에게 소리내어 한 번 웃어주었다. 그의 작은 웃음소리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을 쓸어주었다. 그에게는 입을 맞출 수 없고, 사랑을 전할 수도 없고, 그 무엇도 이해시킬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의 온기 만큼은 스자쿠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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