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L
를르슈 람페르지는 이토록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해본 적이 없었다. 를르슈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쉽게 손에 넣었고, 그것이 설령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를르슈가 원하는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를르슈의 간교한 계략에도 쉽게 함락당하지 않았으며, 투항하지도 않았다. ‘그’는 무관심했다. 를르슈는 ‘그’의 무관심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꽃이 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를르슈의 안에서는 천불이 일었다. 오로지 ‘그’ 하나를 이렇게 원하고 있는 자신이 믿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저 이 부분 모르겠어요!”
“아, 여기. 여기는 함정이 많긴 하지. 어디까지 풀어봤어? 풀이과정 보면서 설명해줄게.”
“잠시만요.”
를르슈는 자신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여학생의 평소보다 더 신경 쓴 화장이 거슬렸다. ‘그’의 앞에 서기 전에 거울을 수십차례 들여다보고, 틴트로 입술을 한 번 더 발라줄 정신은 있으면서 풀이과정을 써둔 노트를 하나 챙기는 일 조차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것. 를르슈는 속으로 그녀를 욕하면서 앞에서 볼펜을 달깍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말했다.
“의외네, 람페르지도 모르는 문제가 있어?”
“저는 선생님께 질문하면 안되나요?”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뭐랄까…… 긴장 되네. 어떤 문제를 물어볼지.”
“평범해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선생님, 저 찾았어요! 여기에요.”
여학생은 금방 찾아온 노트를 들이밀며 를르슈와 ‘그’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다정한 시선으로 웃으면서 여학생의 노트 위로 글씨를 적어가며 옳지, 그래, 이렇게 푸는 거야, 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학생은 ‘그’의 웃음에 정신이 팔려 숫자와 수식이 어떻게 기어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이해했어? ‘그’가 그렇게 묻자, 여학생은 에헤헤, 웃으면서 ‘쉽네요!’라고 대꾸했다.
쉬운 걸 왜 물어보는 건데, 그럼. 를르슈는 이제 돌아온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는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를르슈의 담임 선생님이기도 했다. 이름은 쿠루루기 스자쿠, 28세, 미혼, 여자친구 없음. 쿠루루기 스자쿠는 여학생이 웃으면서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것에 들고 있던 출석부에 턱을 괴며 히죽거렸다.
“그럼 이제 됐으니까 람페르지 질문도 받아볼까?”
“아이, 참. 선생님, 저 더 궁금한 거 있는데.”
“안 돼. 쉬는 시간동안 람페르지를 기다리게 할 순 없지. 나중에 교무실에 와서 물어봐.”
“히잉, 네.”
뭐가 히잉, 인데. 를르슈는 여학생을 힐끔 쳐다보았다. 여학생도 를르슈를 마주보며 눈꼬리를 사납게 세웠다. 그녀와 를르슈는 알게 모르게 쿠루루기 스자쿠를 사이에 두고서 이런 신경전을 벌일 때가 있었다. 를르슈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같잖은 것과 자신을 동일선상에 두고서 라이벌 의식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를르슈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런 경쟁에서도 지지 않기 위해서 를르슈는 매일 같이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T대 수학과 입시 기출문제를 어정쩡하게 풀어놓은 노트를 펼쳐놓는 것이다. 를르슈가 내민 문제를 보고서 쿠루루기 스자쿠는 허어, 하고 탄식했다.
“이거 모의고사 문제 아니지, 람페르지?”
“네. 근데 실제 시험에도 나온 문제라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디 시험인데?”
“…….”
“이 정도 레벨이면 거의 T대 기출문제인데.”
맞는 말에 를르슈는 할 말이 없었다. 입술을 꾹 닫아버리는 를르슈의 모습에도 쿠루루기 스자쿠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달깍거리던 볼펜을 휘휘 돌리더니 이렇게, 이렇게, 음, 아슬아슬하네…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를르슈의 어깨를 툭 잡아 끌었다.
“자, 람페르지. 너의 접근방법은 좋았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푸는 게 더 빠를 거야.”
“네?”
“그래프를 그려서 보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여기 노트 더 써도 될까?’
“네, 네.”
“좋아.”
를르슈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면서 자신에게 잘 들리게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나즈막이 설명하는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홀리는 것 같았다. 분명 를르슈가 다 풀어봤으며, 정답과 예시해설까지 다 체크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설명을 들을 때면 뭐든지 새롭게 느껴졌다. 여기까진 이해했어? 를르슈에게 묻는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착각이겠지. 를르슈는 그러길 바라면서 쿠루루기 스자쿠의 뒷말을 기다렸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다가 애매한 얼굴로 물었다.
“설명이 어려웠어? 뭔가 이해가 안 된 표정인데.”
“아뇨, 이해했어요.”
“그래? 그럼 나머지는 쉽지. 여기서부터는 다 대입해서 정리하면 끝이거든.”
“……네.”
“x, y, z 값 구했으니까 나머지는 간단하지.”
를르슈는 간단하다고 말하면서 정답을 쉽게 도출해내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필체를 눈으로 쫓았다. 글씨는 어른인데, 간단하지, 라고 말하면서 눈을 맞추며 웃는 얼굴은 또 아이 같고, 를르슈를 감싸고 있던 팔은 또 완전한 어른이었고…. 를르슈는 속으로 느끼는 감상이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며칠 동안 고민한 거였는데 물어보길 잘 한 거 같아요.”
쿠루루기 스자쿠의 시선을 적당히 끌면서, 우수한 성적을 가진 자신이 멍청해보이지 않을 법한 문제를 고르는데 며칠의 시간이 들긴 했다. 를르슈가 수줍게 웃으며 하는 말에 쿠루루기 스자쿠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줬다.
“나도 이런 재미있는 문제는 오랜만이네. 람페르지 덕분에 시간이… 어어, 벌써 쉬는 시간 다 끝났네. 이제 다음 수업 가야겠다.”
“아, 네.”
“그럼 종례 때 보자.”
를르슈는 손을 흔들며 교실 밖으로 나가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를르슈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본 쿠루루기 스자쿠가 웃는 얼굴을 한 것이 보였다. 멀어지는 실루엣으로도 그가 웃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를르슈 뿐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그가 웃어준 것은 오로지 를르슈만을 향한 것일 테니.
side: S
그러니까, ‘그’는 귀여운 학생이다. 스자쿠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스자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경계하며, 그러면서 스자쿠에게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무방비하게 보여주는 것이, 귀여운 학생. 스자쿠는 교무실 밖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그’를 힐끔 쳐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쭈뼛거리면서 스자쿠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람페르지?”
“아, 저, 몸이 안 좋아서.”
“조퇴? 또?”
스자쿠는 앉은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쳐다보면 ‘그’는 말을 하려다가도 매번 삼키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또 교무실에 되도 않는 조퇴 핑계를 대면서 들어온 거야? 스자쿠는 ‘그’를 바라보면서 흐음, 하고 목을 가다듬고 그를 다시 불렀다.
“람페르지, 이리 와.”
“네?”
“어디 보자…….”
‘그’의 팔을 잡아끌고서 시선을 낮추고, 눈을 맞춘 뒤에 이마에 손을 얹었다. 항상 냉정한 듯 날카로운 시선이 둥글어지면서 어린 아이 같이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 된다. 스자쿠가 손을 대면 ‘그’는 매번 이런 반응이었다. ‘그’의 귀여운 반응에 스자쿠도 매번 이렇게 굴게 되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하면서.
“얼굴은 좀 빨갛지만 열은 없어. 조퇴는 안 돼. 무단 조퇴는 더 안 돼.”
“…….”
“알겠지? 교실로 돌어가고. 종례할 때 보자.”
“……네.”
오갈 곳 없는 시선을 겨우 맞추면서 ‘그’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예의가 바른 학생, 귀엽기도 하고. 스자쿠는 얌전히 교실로 돌아가는 ‘그’를 보면서 실실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귀엽다, 귀여워, 저 나이 때에는 뭘 해도 귀여운 거 같아.
를르슈 람페르지는 작년까지만 해도 성적은 우수했지만 품행은 바르지 못한 출결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스자쿠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는 교내에서도 소문이 났다. ‘부회장이 달라졌다’고.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학년 1위 수준은 아니었던 를르슈 람페르지가 2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전 과목 만점은 물론, 전국 모의고사에서는 수학 1문제를 제외하고서 모두 만점을 받았다. 수학 1문제를 틀린 것이 서러운지 스자쿠에게 자주 찾아와서 수학 과목에 대한 상담을 하기도 하고, 수학 문제를 자주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열심인 학생을 돕는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스자쿠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열심히 하는 학생의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교 모의고사 레벨에서는 말도 안되는 수학 문제를 가져온다거나, 스자쿠의 수업이 끝나고 나면 바로 질문하기 위해서 줄을 서있거나, 아니면, 방금 전처럼 말도 안되는 조퇴 문제로 관심을 끌어본다거나…….
“요즘 를르슈 너무 모범생이라서 재미가 없어.”
“학생이 학생다워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리발.”
“에효, 저랑 같이 놀러 다니시던 분은 어디의 람페르지 씨였습니까?”
“잠깐 일탈한 거 가지고.”
“우리 사이가 고작 일탈이었어?!”
스자쿠가 학생회실 근처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학생회장 미레이에게 전달할 것이 있어서 잠깐 들리다가, 를르슈 람페르지의 ‘평소’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흐음, 일탈 같은 걸 하는 구나. 무슨 일탈을 할까? 스자쿠는 낮게 웃는 를르슈 람페르지의 목소리에 괜히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남이 오해할 법한 말은 하지 말아줄래?”
“오해가 아니잖아, 를르슈! 너와 내가 쌓아온 역사는!”
“잠깐 놀았던 것 뿐이야. 나도 이제 곧 수험생이니까 정신을 차려야지.”
“와, 를르슈가 했던 말 중에서 제일 황당하고 어이 없는 말이야.”
보통의 남학생처럼 말하는 를르슈 람페르지는 신선했다. 은근한 허세가 느껴지면서도, 자신감에 부풀어 있는 소년이란. 스자쿠는 이야기를 더 엿듣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울 것 같아서, 학생회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를르슈 람페르지가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들어오세요, 라고 하는 말에 스자쿠가 얼굴을 내미니 를르슈 람페르지는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빨갛게 물들다가 하얗게 질리는 얼굴을 보니 그것도 또 귀엽게 느껴졌다. 스자쿠는 태연하게 말을 했다.
“바쁜데 미안해, 미레이 애쉬포드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아, 회장님은 오늘 보충수업이 있어서 늦게 오세요.”
“아니면 아예 안 오실 수도 있고요.”
리발이 우울해하면서 ‘회장님, 제발 오세요! 저의 희망, 저의 삶, 저의 즐거움!’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에 스자쿠가 피식 웃었다. 를르슈 람페르지는 옆에서 손끝을 가볍게 떨면서 컴퓨터로 뭔가 입력하고 있던 것을 어중간한 속도로 누르고 있었다.
“아예 안 온다고? 오늘 학생회 정기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음… 근데 다들 겸업으로 하고 있는 부활동이 있어서, 그거 때문에 못 모이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도 되는 거야?”
“부정기 회의도 자주 하니까 괜찮아요.”
“뭐… 람페르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하, 네.”
스자쿠가 그렇게 콕 찝어 물어보면 를르슈 람페르지는 환하게 웃으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일면을 숨길 수 없는 것 같았다. 리발과 있었을 때의 그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스자쿠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런 것들이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걸 다 물어보고 있는 건, 어른답지 못하니까.
“그럼 애쉬포드가 오면 전해줄래? 내일 점심시간까지 수학 숙제 밀린 거 안 내면 나도 보충수업 할 수 밖에 없다고.”
“…네.”
“에효, 선생님도 고생하십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리발의 인사를 받으면서 스자쿠는 문을 닫고 나섰다. 를르슈 람페르지의 굳어있던 손끝이나 어색하게 미소 짓던 입가 같은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졌다. 아직 한창 자라나는 어린애고, 학생이고, 세상이 다 자기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 나이 특유의 알량함 같은 것도, 오히려 그런 것들이 귀엽고 순진하게 느껴졌다.
스자쿠는 다음날, 미레이 애쉬포드의 수학 숙제 노트를 들고 있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나타난 것에 소리 없이 웃고 말아버렸다. 애쉬포드가 아니라 왜 람페르지가 왔어? 스자쿠가 짓궂게 묻는 말에 를르슈 람페르지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그 날카로운 눈매를 어딘가 둥글게, 혼나지 않는 방법을 열심히 연습한 아이처럼.
“회장님이 오늘 지각할 거 같다고 저한테 맡기고 가셨거든요.”
“뭐어?”
스자쿠가 놀라자, 를르슈 람페르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진짜에요, 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는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원래 좀, 이런 날도 있으시고, 저한테 자주 맡기고 가시는 일도 있고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선생님께……. 를르슈 람페르지의 부진한 말을 들으면서 스자쿠는 알겠어, 알겠어, 라고 손을 내저으며 그 노트를 받았다.
노트를 주고 받는 순간에는 일부러 손끝을 스치고, 를르슈 람페르지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어이쿠, 하며 일부러가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그러면 그는 네에, 하고 은근히 말꼬리를 늘이면서 스자쿠의 눈치를 본다.
를르슈 람페르지, 너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정말 네가 귀여워서 재미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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