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는 내가 지시한 작전대로 간다.”
“하지만 전하, 그 작전은 너무…!”
“그럼 스자쿠가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란 말이야?!”
“전하, 쿠루루기 경을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를르슈는 침착한 제레미아의 목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지금 스자쿠를 얼마나 더 믿어줘야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방법을 운운하는 제레미아를 노려보았다. 제레미아는 날이 선 를르슈의 눈빛에 시선을 내리깔면서 전하, 하고 한 번 더 를르슈를 불렀다.
“쿠루루기 경이 이대로 당할 리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위치 추적기도 먹통이고, 연락도 되지 않아. 적의 본부에 잠입한지 14시간째 계속 이 상태라면, 아무리 스자쿠라고 해도 당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데. 제레미아, 네가 너무 침착한 건지, 아니면 내가 이성을 잃은건지, 어느 쪽이 맞을지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전하.”
“아무렴, 도박할 시간 따위 없지. 작전대로 간다.”
“전하…!”
를르슈의 작전은 말 그대로 막무가내였다. 적진에 쳐들어가 를르슈의 이름을 걸고서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를르슈의 이름, 말 그대로 를르슈를 내거는 싸움에서 를르슈는 기꺼이 미끼가 되고자 했다.
적들은 브리타니아의 하얀 사신의 약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노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들의 목적은 를르슈였고, 그런 악랄한 적의에 스자쿠가 반기를 들고서 소탕하러 나갔다가 연락두절이 된 것이었다.
스자쿠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말한지 14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연락이 없었다. 위치 추적기는 어느 순간 끊겨버렸고, 해킹이 먹히지 않는 구닥다리 요새에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이 스자쿠를 어떻게 해버렸을지, 를르슈는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스자쿠 혼자 돌격하겠다는 무모한 작전을 믿어서는 안 됐는데, 스자쿠를 너무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안일함에 빠져있었던 것인지… 를르슈는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우는 것 대신에 스자쿠를 구해내야만 했다. 침묵하고 있는 적 만큼 무서운 게 없다지만, 더 무서운 것은 스자쿠를 잃는 것이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이름을 걸고서 싸우겠다고 말한 이상, 제레미아도 더는 를르슈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얌전히 자리로 돌아갔다. 지휘관기에 올라탄 를르슈도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며 적진으로 향했다.
싸움은 를르슈의 승리에 가까운 듯 싶었다. 적들은 투항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듯 했고, 를르슈를 감싸는 호위부대의 손에 목숨을 내던졌다. 뭔가 쉽게 풀려나가는 듯한 전투 상황에서, 를르슈는 불안함을 느끼면서 적진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기다렸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마리안느 황비의 장남, 나의 원수여!”
적군의 장수는 그렇게 외치며 를르슈에게 총을 빼어들고 달려들었다. 무방비하게 몸을 내놓고 있던 를르슈는 황급히 나이트메어프레임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적장이 쏘아대는 총알에 몸을 겨우 보호하면서, 총탄에 튀기는 파편에 스치는 고통을 감내하며 를르슈는 스자쿠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여기까지 왔는데 스자쿠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했다.
적장은 계속해서 를르슈를 향해 총을 쐈다. 그는 잔뜩 흥분했는지 쏘는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를르슈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젠장, 마지막 한 발이다! 이제 진짜로 죽여주마!”
그렇게 외치는 적장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를르슈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쯤이었다. 스자쿠가 적장의 목에 총을 겨눈 채로 그대로 발포했고, 뇌수가 튀면서 핏자국이 길게 뻗어나갔다. 를르슈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스자쿠는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를르슈를 건조한 시선으로 내려보았다. 스자쿠, 살아있었어, 라고 말하고 싶은 를르슈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를 보고서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이렇게 많은 부대를 이끌 정도의 작전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를르슈.”
“…스, 자쿠.”
“게다가 이곳에 네 스스로 발을 들이다니… 나를 못 믿은 거야?”
스자쿠의 눈빛은 우울과 분노로 잠겨있었다. 암울한 녹색빛의 눈동자가 를르슈를 탓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를르슈는 제레미아 앞에서의 기세등등하던 자신을 잊고, 스자쿠의 시선 아래에서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너를 믿었지만, 네가 걱정 되어서… 그래서 나는, 너와의 약속을 져버리고…. 그런 말들은 를르슈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을 감싸면서 중얼거렸다.
“뭐라도 대답해 봐, 를르슈.”
를르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작 나이트 오브 라운즈 한 명을 구하려고 황자전하께서 기꺼이 목숨 내던지시고 달려들면, 내가 좋다고 반겨야 돼?”
“…….”
“대답 못 하겠어?”
를르슈가 말없이 입술을 꾹 내닫는 것에, 스자쿠는 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계속 그렇게 입 다물고 있을 거야? 스자쿠의 분노가 점점 거세지는 것이 그 웃음 사이로도 느껴졌다. 를르슈는 뒤따라오던 호위부대들이 스자쿠의 앞에 나타나며, ‘쿠루루기 경!’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스자쿠는 사람들 앞에서 를르슈를 질타하지는 않을 것이다. 쿠루루기 경, 이라고 불린 스자쿠는 침착하게 를르슈를 제레미아의 손에 맡겼고, 자신은 뒤처리를 하고 가겠다며 를르슈에게서 멀어졌다. 를르슈는 멀어지는 스자쿠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를르슈는 무사히 아리에스로 돌아와서, 그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불만인 것이 있다면 스자쿠가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를르슈를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만이 아니라 불안이겠지. 를르슈는 스자쿠를 믿지 않고 적진에 무모하게 쳐들어간 자신을 탓하기도 하면서,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스자쿠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반복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저택에 찾아갔다. 미리 전화를 했기 때문에 스자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자쿠의 집사에게 곧 방문할 것이라고 말해두었고,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의 전화에 피하지 않고 기다린 듯 했다.
문 밖에서 서성이던 를르슈는 노크를 두 번 했다. 스자쿠의 평소보다 낮은 ‘들어오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목소리에 들어가는게 망설여져서, 를르슈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들어섰다. 를르슈가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것에, 스자쿠는 창문 근처에서 그런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뭘 그렇게 눈치를 봐, 를르슈.”
를르슈, 라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어딘가 차가움이 느껴졌다. 를르슈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스자쿠와 마주했던 시선은 어느덧 땅바닥에 처박히면서, 를르슈는 어눌해지는 말투를 겨우 감추면서 입을 열었다.
“그… 스자쿠가 도와줬으니까, 일이 잘 처리되었다고… 말하려고.”
“아, 그래?”
“…응.”
“고맙다는 인사만 전하려고 온 거야?”
“…….”
“그럼 굳이 안 와도 됐는데.”
“……스자쿠, 화가 난 건 알겠는데, 이제 적당히….”
를르슈가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한 말에 스자쿠는 하핫, 하고 또 웃어버렸다. 그의 웃음은 뭔가 무서웠다. 를르슈는 그래도 억지로 스자쿠와 시선을 맞추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적당히… 하는 게 서로 좋지 않을까?”
“있잖아, 를르슈. ‘적당히’ 한다는 게 뭐야?”
“……화를 그만 내라는 이야기야.”
“내가 화를 낸 적이 있어?”
“지금, 그러고 있잖아.”
스자쿠는 를르슈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시선을 겨우 마주한 를르슈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스자쿠의 눈빛에 더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들끓고 있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데, 화를 낸 적이 있냐고 묻는 스자쿠의 말은 뭔가 맞지 않았다.
“내가 진짜 화를 내면 어떻게 되는지, 넌 알지도 못하잖아.”
“…….”
“화를 그만 내려면, 적당히 하려면, 뭐라도 내가 했어야 하지 않아?”
“…뭘, 하고 싶다는 거야.”
“말로 해야 알아?”
를르슈는 이제 그만두고 싶어졌다. 스자쿠의 시선 앞에 내던져진 기분도 최악이었다. 스자쿠로부터 등을 돌리려고 하는데, 스자쿠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면서 를르슈의 어깨를 붙잡았다. 를르슈는 그 손을 내쳤다. 그리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멱살을 잡고서 그대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의 시선이 반쯤 돌았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리 꽂힌 몸이 덜덜 떨려왔다. 스자쿠의 폭력 앞에서 를르슈는 눈을 겨우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무, 무슨 짓을…….”
“적당히 할게. 를르슈는 적당히가 뭔지 모르는 거 같으니까.”
“스, 자쿠, 잠깐…!”
스자쿠는 다시 를르슈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먹을 내려 꽂았다. 오른쪽 볼이 터져 나가면서 퉁퉁 부어오르고, 입안을 잘못 깨물었는지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비틀거리는 를르슈의 멱살을 붙잡고서 스자쿠는 뺨을 두세 대 갈겼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스자쿠는 를르슈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 속에서 헉헉거리는 를르슈의 신음소리가 울렸다.
“네가 했던 생각이야 뻔하지. 황자와 황녀는 이 나라에 차고도 많으니 너 하나 쯤 없어져도 괜찮다… 이런 생각 아니겠어?”
“스, 스자쿠.”
“적당히 하라는 말, 너한테 그대로 돌려줄게.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 같아서 말이야.”
“아, 파. 아프다고.”
“아픈 걸 알면서 왜 그런 짓을 했어?”
배를 한 번 더 걷어차이고, 갈비뼈 부근이 뻐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갈빗대가 나간 게 틀림없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힘들어질 정도로 아팠다. 를르슈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스자쿠는 머리채를 붙잡고서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때리고 있는 건 스자쿠인데, 어째서 스자쿠가 더 아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를르슈는 알 도리가 없었다. 스자쿠로부터의 폭력은 너무 아프고, 버겁고, 힘들었다. 를르슈의 오른쪽 다리를 부러뜨릴 기세였던 스자쿠는, 를르슈가 아프다고 소리 질러 우는 것에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아픈 거 아는구나. 알면서 왜 나를 못 믿어? 죽는 건 이거보다 더 힘들고, 더 괴로운 일인데. 를르슈, 왜 죽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처럼 나를 못 믿어?”
스자쿠는 기어이 를르슈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뺨이 퉁퉁 부어오르고, 오른쪽 눈에 멍이 들 정도로 심하게 두들겨 맞은 를르슈는 기절하고 말았다. 스자쿠는 기절한 를르슈의 모습에 손을 털고서 소파에 걸터 앉았다. 아파서 덜덜 떠는 를르슈를 보고 싶지 않았는데, 정작 그것을 보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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