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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기사황제의 날을 기념하며

 


 

 

나이트 오브 제로가 된 쿠루루기 스자쿠는 요즘 들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처음에 바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그 사소한 것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탐욕이 되고 말아버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욕심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요즘 스자쿠는 자신이 품고 있는 욕구에 대한 불만이 아주 커진 상태였다.

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유일한 검이 되었다는 것은 스자쿠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안정감과 동시에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를르슈의 옆에서 그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은 스자쿠가 어렸을 때부터 간절히 바라왔던 일이었다. 처음 자신이 나이트 오브 제로라는 자리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스자쿠는 더 이상 기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를르슈 본인에게 인정받는 그 유일함이라는 감정이 주는 기쁨은 언제 곱씹어도 기분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유지되는 것은 1년도 가지 못했다. 황제가 된 를르슈의 옆을 지키면서, 스자쿠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이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에게 유일한 존재인가?

 

아마 작년까지의 스자쿠라면 그것에 자신감 넘치는 ‘그렇다’라고 대답을 했겠지만, 이제 나이트 오브 제로가 된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의 스자쿠에게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 확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어느날의 사소한 대화 때문이었다.

그날은 모처럼 를르슈의 정무가 일찍 끝나, 우연히 타이밍이 좋게 그의 여동생인 나나리가 정무실에 들러 간단한 티 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나나리와도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스자쿠는 오랜만에 들린 나나리의 방문에 반가워했고, 본래대로라면 메이드를 시켜서 준비했을 티 타임도 스자쿠가 기꺼이 준비했다. 사이가 워낙 좋은 두 남매의 모습은 스자쿠에게는 소중했다. 를르슈와 나나리가 서로 웃으면서 스자쿠와 함께 있어주는 것은, 언제가 되었어도 스자쿠를 행복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카트에 준비해 둔 간단한 홍차와 다과를 담아가며 들어온 스자쿠는 대화를 나누고 있던 를르슈와 나나리의 모습에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스자쿠에게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알려주었을 를르슈와 나나리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자쿠가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를르슈와 나나리는 황급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네, 알겠어요. 오라버니 뜻이 그러하시다면요.”

“그래, 스자쿠 앞에서 할 이야기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스자쿠도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나나리 앞에 찻잔을 놓아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야기인데 나는 들으면 안 돼? 둘이서 내 험담이라도 했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면 평소처럼 를르슈가 먼저 스자쿠에게 설명해주고, 나나리가 맞장구 치는 흐름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스자쿠의 말에도 를르슈는 어려운 표정을 지으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나나리는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상 두 사람이 진짜 자신의 험담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자쿠는 두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뭐야, 나 섭섭하게 말 안 해줄 거야?”

 

스자쿠는 를르슈와 나나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 이제는 슬슬 말해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말에 나나리는 를르슈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나리의 시선에도 를르슈는 응하지 않았다. 정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스자쿠가 조금 날이 선 눈빛으로 를르슈를 노려보자, 를르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선을 그었다.

 

“그냥 가족끼리 할 이야기가 있었어. 스자쿠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야.”

 

를르슈의 ‘가족끼리’라는 말에 스자쿠는 알 수 없는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를르슈와 나나리랑 함께 티 타임을 즐기게 되었다는 설렘도 사라지고, 좋았던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렸다. 스자쿠의 어두워진 분위기에도 를르슈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서 찻잔을 들어올려 홍차를 들이킬 뿐이었다. 평소라면 스자쿠에게 무엇이든 설명해주었을 를르슈가 그러지 않고서 노골적으로 감추는 모습에 스자쿠는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나나리가 다른 화제를 꺼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더 물어보려고 를르슈의 틈을 노리던 스자쿠는 나나리가 지금의 분위기 속에서 곤란한 것을 느꼈다. 짧은 순간의 판단일지는 몰라도, 나나리는 감추고 싶지 않지만 를르슈가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같았다. 를르슈가 중요한 만큼, 나나리도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자쿠는 더 이상 캐묻지 말아야만 했다. 나나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숨기고 있는 장본인이 따로 있는 이상 나나리까지 잡아 끄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를르슈와 나나리가 ‘황궁 밖 펜드래곤의 유행’에 대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에, 스자쿠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스자쿠가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한 마디를 툭 던지면, 를르슈와 나나리는 이렇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이며 스자쿠를 대화의 가운데로 끼워주었다. 방금 전처럼 ‘가족끼리’ 나누었던 대화처럼 따돌리지는 않았다.

거절 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이 되면서도, 그럼에도 스자쿠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기에, 스자쿠는 크게 상처받은 자신을 억지로 모르는 척을 했다. 아무리 가까이에 있고 유일한 존재임을 인정해주더라도,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가족끼리’의 대화에 끼워주지 않을 만큼의 존재였던 것이다.

 

나이트 오브 제로라는 것도, 어쩌면 스자쿠를 적당한 위치에 두기 위해서 만든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을 갖고 나면, 스자쿠는 자신이 를르슈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느껴왔던 를르슈의 유일한 검이라는 자부심도, 나이트 오브 제로라는 이름이 주는 안정감도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를르슈가 자신을 한 번 밀어냈다고 해서, 스자쿠는 의심에 흔들려 무너지진 않았다. 오히려 더 철저하게 완벽한 나이트 오브 제로가 되기 위해서 스자쿠는 안간힘을 썼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스자쿠는 를르슈가 자신을 ‘가족끼리’에도 끼워주지 않는 건 물론이고, ‘친구끼리’의 이야기에도 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스자쿠의 노력하는 모습에 를르슈는 딱히 무언가를 의심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꼼꼼해진 일 처리 방식이나 줄어드는 업무의 오차 같은 것에 만족스러워보였다.

스자쿠의 마음이 어떻게 일그러져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를르슈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가 있어서 다행이군.”

 

를르슈의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차오르는 기분 좋은 고양감 같은 것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스자쿠는 마음 한 구석에서 점점 커져가는 불만과 불안에 씁쓸해졌다.

 

무엇이 불만이고, 무엇이 불안한 것인가? 

 

일과가 끝난 뒤, 를르슈의 침실 옆방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온 스자쿠는 그 고민에 빠졌다. 황제이기 이전에 를르슈도 인간이다. 가족에게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스자쿠가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는 가족이 아니니까, 끼워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감정적으로 기분 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크게 상처 받았다. 를르슈가 그럴 수도 있다는 걸 계속 핑계처럼 떠올리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정말 그랬다는 것이 믿을 수 없어서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가 너의 유일한 검이라고 했으면서.

나이트 오브 원을 뛰어넘는 나이트 오브 제로라고 했으면서.

그래놓고서 나는 가족이 아니니까 끼워주지도 않고.

 

스자쿠는 침대에 걸터앉아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머릿속에 가득찬 분노를 덜어내려고 애를 썼다. 배신감이라는 단어를 지금의 기분에 명명하고 나면 스자쿠는 화가 났다. 를르슈에게 화가 났다. 지금 당장 옆방의 문을 두드려 를르슈에게 따지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스자쿠는 노력했다.

 

—를르슈도 그럴 수 있어. 를르슈도 사람이니까. 를르슈가 나쁜 게 아니야.

 

그렇게 낮 동안의 일과 속에서는 를르슈와 함께 있는 나이트 오브 제로는 완벽했다. 평소와 같은 거리감, 평소와 같은 말투, 평소와 같은 태도로 스자쿠는 나이트 오브 제로가 되었다.

 

—그래도 나한테 그럴 수는 없잖아. 나는 를르슈한테 뭐야? 가족보다 못한 존재야?

 

밤이 되면 스자쿠는 그런 배신감과 분노 속에서 화를 삭혀야만 했다. 이성과 감정을 수없이 저울질 하면서, 스자쿠는 매일 밤마다 나이트 오브 제로를 그만 둘 각오로 를르슈에게 따지고 싶어졌다. 하지만 잠들고 나서 아침이 되면 를르슈의 옆에 있음으로 느껴지는 안락함이 좋아서, 나이트 오브 제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를르슈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감정의 기복을 겨우 감추면서 스자쿠는 나이트 오브 제로로써 보내는 1년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를르슈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질문에 대해서 완벽하게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 * *

 

를르슈 황제의 즉위 1년을 맞이하는 기념식에 대한 서류를 훑어보던 중이었다. 스자쿠는 ‘이제 1년째구나.’ 같은 감상으로 기념식의 진행상황에 대한 간단한 개요와 절차를 보고 살폈다. 화려한 퍼포먼스 대신에 간소하게 형식만 갖춰서 진행하라는 를르슈의 의견대로 쓰여져 있었다.

 

* * * 

 

를르슈는 쳐내야할 정무가 많기 때문에 기념식 따위 없어도 된다고 했지만, 현 황제에 대한 권세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방법이더라도 기념식을 치러야한다는 여론의 의견을 따라서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그때의 회의가 2시간 30분동안 내리 진행되고 나서, 귀족들과 장관들에게 꺾이고 만 를르슈는 스자쿠와 단둘이 있었을 때 진심을 토로했다.

 

“자존심 상하는군. 그깟 기념식이 뭐라고 내가 정무도 미뤄야하는지 모르겠어.”

“즉위 기념식을 가지는 것도 폐하의 정무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시간 낭비야. 보다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데 하루 종일 그 기념식을 하기 위해서 낭비되는 인력도 아깝잖아.”

 

를르슈는 자신의 의견이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이 억울한지 스자쿠에게 불만을 내비쳤다. 그리고 스자쿠가 은근히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나이트 오브 제로마저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같은 말을 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알아주지 않으니 섭섭하고 속상하다,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저에게 진심을 보여주고 솔직하게 구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거리감을 느꼈다. 아니, 거리감을 만드는 것은 자신일 것이다. 를르슈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스자쿠가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갈등과 고민 때문에 를르슈가 멀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젠 슬플 지경이었다. 그런 서글픈 마음을 숨기고서 스자쿠는 를르슈를 바라보며 무심코 대꾸했다.

 

“나는 를르슈랑 이렇게 보낸 1년을 기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스자쿠가 나이트 오브 제로의 가면을 잠시 벗어두고서 친구로써 대답하는 것에, 를르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일과 중에는 친구라는 관계를 뒤로 하고, 오로지 기사와 황제로써만 존재하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 있었다. 아직 일과 중인데도 스자쿠는 그 무언의 약속을 가볍게 어기면서, 를르슈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깬 스자쿠는 그런 자각도 없는지, 대답 없는 를르슈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둥근 눈매가 무엇이 이상한지에 대한 의심도 없는 모습에, 를르슈는 놀란 시선을 거두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말을 이어갔다.

 

“스자쿠는 앞으로 매년 이런 기념식을 하고 싶어?”

 

를르슈에게 나이트 오브 제로가 아닌 스자쿠라고 이름이 불리자, 스자쿠는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무언의 약속을 어겼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는지, 스자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스자쿠가 고개를 젓는 것에 를르슈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뭐야, 나랑 기념하고 싶다며. 매년 기념하는 건 싫은가?”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매년 하면 조금 낭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격년마다 치르는 것도 폐하께서 바쁘시면 무리일 테고. 적당한 주기로 하면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완전히 나이트 오브 제로의 말투로 말하는 스자쿠를 보고서 를르슈는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기껏 그 재미없는 약속을 깨는 줄 알았는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다니 아쉬워라. 를르슈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자쿠에게 더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을 알고 있었다.

 

“올해는 첫해니까 기념식을 하긴 할 테지만 적당히 해줬으면 해. 쓸데없이 돈이 많이 들어간 티를 내는 건 진짜 싫으니까. 나이트 오브 제로는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생각한다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스자쿠가 ‘예스, 유어 마제스티’라고 대답한 뒤에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스자쿠는 그때의 를르슈의 부탁대로 준비된 서류들을 확인했다. 스자쿠가 보기에는 크게 걸리는 부분이 없었지만, 기념식에 대해 부정적인 를르슈가 볼 때에는 놓쳤던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를르슈의 앞으로 서류를 가져갈 때의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정무에 한창 집중하고 있던 를르슈의 정무실 밖에서 노크를 한 스자쿠는 들어오라는 말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스자쿠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보면서 를르슈는 미간을 좁혔다.

 

“정말 쉴 틈을 주지 않는군. 정무는 하면 할수록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는데 말이야.”

“그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도 이 서류는 폐하의 즉위 기념식에 대한 것이라서 폐하의 검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입니다.”

“그렇겠지. 이리 줘.”

 

를르슈에게 서류를 건네주고 나면, 스자쿠는 그의 얼굴을 오랜만에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요즘 들어 를르슈에 대한 확신을 잃고, 덩달아 떨어진 자신감 같은 것 때문에 를르슈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일이 줄어들어서 그런건지, 오랜만에 보는 를르슈의 얼굴은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서류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글자를 읽어감에 따라 흔들리는 시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준비된 기념식 서류가 나쁘지 않은 모양인지 좁혀진 미간도 느슨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약간 긴장했던 스자쿠는 를르슈의 표정 변화에 안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소리에 를르슈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스자쿠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치자마자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서 그저 살짝 웃어주기만 했었을 뿐이었다. 스자쿠는 별 거 아닌 일로 웃어주는 를르슈의 미소에 그동안 마음을 괴롭게 했던 그 고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한테 이렇게 쉽게 웃어주면서, 왜 그때는 자기를 끼워주지 않고 따돌렸는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아직 일과 중인 낮인데도, 감정에 휩쓸리는 밤이 아닌데도 치고 올라왔다.

나이트 오브 제로는 감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황제 앞에서는 감정을 감추는 게 제일 어려웠다. 를르슈가 충동에 시달리는 스자쿠를 알아차리기 전에 빨리 감정을 갈무리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스자쿠는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숨겨야 돼. 빨리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하는데…. 스자쿠는 아무렇지 않게 심호흡을 하려고 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표정이 왜 그래?”

 

그러나 필사적인 스자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를르슈는 스자쿠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지금 당장 표정을 감춘다고 하더라도, 를르슈 특유의 재빠른 눈치는 언젠가 스자쿠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스자쿠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으려고 할 때, 를르슈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자쿠.”

 

나이트 오브 제로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지난 번에 스자쿠가 그 무언의 약속을 어겼던 것처럼, 이번엔 를르슈 차례인 듯 했다. 그것은 곧 스자쿠에게 도망갈 퇴로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할 말 있으면 바로 해. 나한테 뭔가 숨기려고 하지 말고.”

 

숨기려고 하지 말라니.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가족끼리’ 하는 이야기를 숨겼으면서. 그런 주제에 스자쿠에게는 숨기려고 하지 말라니. 를르슈는 치사하고 비겁해. 그렇게 생각한 스자쿠는 짧게 호흡을 삼키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나이트 오브 제로가 뭔가를 숨기는 건 상관없어. 근데 스자쿠가 나한테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면 정말 상처 받을 거야.”

 

스자쿠 때문에 상처를 받을 거라고 협박까지 하는 를르슈의 모습이 뻔뻔하게 느껴졌다. 스자쿠는 잘 억눌러왔던 분노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겨우 꾹꾹 담아두었던 그 쓰레기 같은 감정을,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라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친구의 위치를 이용해서 협박까지 한다니.

스자쿠는 를르슈와 마주했던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면서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호흡을 고르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더 이상 피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시선을 보냈다. 바닥의 무늬를 하나 하나 세어볼 것처럼 시선을 굴린 뒤에야, 스자쿠는 조금 침착해진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가족끼리’에 끼워주지 않아 배신감을 느꼈다는 자신의 감정이 유치하다는 것을 알고, 그 전제 하에 를르슈 본인에게 부딪친다는 것은 어딘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를르슈가 모처럼 솔직하게 굴라고 한 자리에서 아예 대놓고 솔직해지는 것도 하나의 기회처럼 느껴졌다. 스자쿠는 자신 답지 않은 기회를 노리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그래도 더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입을 열었다.

 

“나는 를르슈의 나이트 오브 제로지?”

“그렇다만.”

“나는 를르슈한테 하나 뿐인 기사잖아.”

“맞아.”

“근데 를르슈가 말은 그렇게 해도 안 그런 거 같아서, 요즘 좀… 마음에 걸려.”

“내가 말은 그렇게 해도 안 그런 거 같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그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하나도 이해가 안 돼.”

 

를르슈는 들고 있던 기념식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황당한 표정을 드러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자신이 나이트 오브 제로가 맞냐고 확인하는 스자쿠의 대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스자쿠는 괴로워보였다. 를르슈는 자신의 황당함은 둘째치고, 스자쿠가 안고 있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에 걸린다는 일이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선해야 할 게 따로 있었군. 를르슈는 침착하게 스자쿠에게 하나씩 물어보기로 했다.

 

“너는 내 기사인데, 내가 그걸 부정한 적이 있어?”

“그건 아니야.”

“아니면 네가 내 기사인 게 불만이었던 거야?”

“그것도 아니야.”

“나한테 너 말고 다른 기사가 없다는 게 싫어? 하나 뿐인 기사의 일이 부담이 된다거나.”

“그건 아냐, 정말로 아냐.”

“그럼…… 뭐가 문제야?”

 

스자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를르슈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스자쿠의 대답을 들을수록 를르슈는 그의 속내를 더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럼 대체 뭐가 마음에 걸린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스자쿠는 입밖으로 내뱉으려니 더 수치스러운 자신의 감정 고백에 괴로웠다. 평소에 말을 잘 하는 편도 아니라서 어떻게 말해야 잘 포장해서 를르슈를 덜 어이없게 만들 수 있는지 고민이 되었다. 역으로 생각해봐도 이 질투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나나리한테는 해도 되고, 스자쿠한테는 안 되는 그런 이야기를 를르슈가 먼저 시작했으니, 그게 싫었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

 

결국 스자쿠는 어떻게 말해야 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로 어정쩡한 거짓말을 내뱉었다. 스자쿠의 거짓말은 눈에 띄게 노골적이어서, 를르슈는 혀를 차고 말아버렸다.

 

“스자쿠. 너랑 나는 곧 있으면 나이트 오브 제로와 황제가 된지 1년이 다 되어가.”

“알아.”

“아는데 왜 이제 와서 뭘 숨기려고 해?”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말하기가 어려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내 앞이라서 설명하기가 어려운 건가?”

“그건…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스자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상대가 나나리였다면, 괜히 부끄럽긴 해도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가 를르슈라고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일을 꽁하게 마음에 묻어둔 채로 기분이 상해있는 자신을 얼마나 속 좁은 남자로 볼지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했다. 황제로써 완벽하고 빈틈이 없는 를르슈의 모습과 비교가 되는 것 같았다.

 

“내 앞이라서 말하기 어려운 거라고 하니까 더더욱 알아내야겠어.”

“…를르슈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럼 이제 말해.”

“미안, 못 하겠어.”

 

정말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단칼에 거절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나이트 오브 제로와 황제가 된 이후로 스자쿠와 크게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만큼 서로의 강점과 약점,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옛날처럼 감정을 아예 드러내놓고 살벌하게 싸우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런 어렸던 시절과 이제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자쿠는 스자쿠였고 를르슈는 를르슈였다. 서로가 서로의 앞에서 분노의 기폭제가 되는 것은, 서로 알고 있는 것이 많아지고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진다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다. 를르슈가 책상을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자쿠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분노한 를르슈의 기세에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제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모습까지 보이는 스자쿠를 보고서 를르슈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제 좀 적당히 해!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해!”

“그렇게 다그쳐도 말하기가 조금…….”

“그럼 티를 내지 말던가!”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그게 내 잘못이야?! 못 감추는 네 문제잖아!”

“…….”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스자쿠에게 미안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어딘가 뻔뻔하게 나오는 것 같은 분위기는 느낌 탓이 아니었다. 마치 를르슈에게 너도 잘못이 있으니 내가 이렇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자신이 어렴풋이 느끼는 그 느낌이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뭐야, 지금 이 상황이 내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뭐, 어느 정도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건…….”

 

이제껏 대답하기 위해 잘 열리던 스자쿠의 입술이 또 굳게 다물렸다. 를르슈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스자쿠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 보려고 그의 멱살을 붙잡았지만, 책상 위에서 정무만 보는 를르슈의 근력으로는 들 수 없는 무게가 나가는 스자쿠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를르슈는 애꿎은 옷만 쥔 사람이 되어버렸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한 행동이었지만 별로 성과가 없다는 것이 부끄러워져서 를르슈는 스자쿠를 뒤로 밀어버렸다. 약이 오르게도 스자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만 할 뿐, 넘어지지 않고 크게 흔들리지도 않았다.

씩씩거리는 를르슈의 숨소리에 스자쿠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말하지 않아 답답한 나머지 몸까지 쓰는 를르슈를 보고 있으니 자신이 좀 심했다는 자각이 느껴졌다. 를르슈가 나나리에게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를르슈까지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역지사지도 정도가 있지 않을까. 역지사지, 라는 단어가 떠오르자마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네! 

지금 를르슈가 느끼는 답답함이 스자쿠가 느꼈던 감정이랑 비슷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자쿠는 이제껏 답답하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면서 어딘가 들뜬 목소리로 를르슈에게 말을 걸었다.

 

“를르슈, 지금 기분이 어때?”

“기분이 어떠냐니,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소리야?!”

“내 기분이 그렇거든!”

“내 기분이 어떤지 네가 어떻게 알아?!”

“되게 답답하지 않아? 내가 말해주지 않아서 싫고.”

“잘 아네.”

 

를르슈는 이제 어이가 없었다. 황당한 게 아니라 어이가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고 해놓고서 말도 안하고 있다가 갑자기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스자쿠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상 예상대로 되는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상식 밖의 일을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를르슈가 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스자쿠는 를르슈의 터질 것 같은 분노에 ‘맞아!’라고 말하면서 부추기듯이 말했다.

 

“를르슈가 먼저 나한테 말 안 해줬잖아!”

“내가 무슨 말을 안 했는데?”

“아… 그건.”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이제 와서 꺼내는 게 다시끔 부끄러워졌다. 스자쿠가 말하기를 또 주저하는 것에 를르슈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스자쿠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나나리가 왔었을 때 말이야.”

 

뜬금없이 나나리의 이름이 나오자, 를르슈가 ‘하아?’하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스스로도 되게 뜬금없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스자쿠는 말하기를 이어갔다.

 

“내가 티 타임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 전에, 를르슈가 나나리랑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잖아. 내가 들어오니까 갑자기 이야기를 멈췄고.”

“…그게 왜?”

“내가 무슨 이야기 했냐고 물어봤는데 를르슈가 ‘가족끼리 할 이야기’라고 말 안 해줬어.”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 일은 정말 오래 전의 일이었고, 그 일 이후로 스자쿠와 를르슈, 나나리가 함께 티 타임을 갖는 일은 제법 자주 있었다. 그래서 스자쿠는 를르슈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습게도 를르슈는 ‘가족끼리 할 이야기’라고 둘러댔던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해내고 나면 를르슈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말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려고 했던, 나나리와 나누었던 그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 있는 를르슈가 당황하며 말을 멈추는 것에 스자쿠는 그가 완전히 기억을 떠올린 것을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를르슈의 기세가 누그러진 것에 스자쿠는 어딘가 기세등등해졌다. 이제 스자쿠가 를르슈를 추궁할 차례였다.

 

“무슨 이야기였어?”

“그,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그럼 나도 말 안 해.”

“뭐?”

“를르슈가 말 안 하면 나도 할 이야기 없어.”

“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마, 스자쿠.”

“유치해서 미안하게 됐어.”

 

를르슈는 침착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스자쿠의 도발에 넘어가면 안 되었다. 를르슈가 심호흡을 하며 다시 책상 근처로 돌아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스자쿠는 그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면서, 를르슈가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던 나나리가 안쓰러워서 넘어갔지만, 지금은 인정사정 봐줄 것 없는 를르슈 당사자만 남아있었다. 스자쿠가 물러서지 않을 기미가 보이니 를르슈는 작전상 후퇴를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를르슈는 눈앞에 보이는 서류를 아무거나 짚으면서 억지로 시야에 구겨넣었다. 때마침 손에 쥔 서류는 즉위 1주년 기념식에 대한, 빈틈없이 잘 짜여진 서류였다. 괜한 트집을 잡을 것도 없는 것에 를르슈는 성질을 부렸다. 스자쿠에게 서류를 집어던지면서 를르슈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렇게 유치하게 굴 거면 이거나 다시 해와.”

“이거라니… 기념식을 여기서 어떻게 더 하라고?”

“예산을 더 줄여!”

“여기서 더 줄일 수 없어!”

“그럼 때려쳐!”

“이제 와서?!”

“안 하고 싶어졌어. 하지 마, 기념식 같은 거 없어도 되잖아?!”

 

팔자에도 없는 폭군 짓을 하려니 를르슈는 손발이 떨렸다. 이제 와서 시일이 다가온 기념식을 무를 수도 없고, 대내외적으로 기념식을 하겠다고 발표한 이상 취소하는 것에도 엄청난 인력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자쿠에게서 벗어나려면 지금은 이 방법 뿐이었다.

 

“를르슈, 다시 한 번 묻는데 진짜 취소할 거야?”

“어.”

“후회 안 해?”

“뭘 후회해야 하는데? 난 원래부터 기념식 하기 싫었어.”

“……정말 이럴 거야?”

“자꾸 헛소리 할 거면 빨리 나가서 기념식 취소 됐다고 말이나 해.”

 

스자쿠는 를르슈를 잠시 노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기 손에 들린 기념식 서류를 반으로 찢어버렸다. 제법 두께가 되던 종이뭉치가 순식간에 찢겨져 나가는 것에 를르슈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 번 더 말을 걸었다가는 스자쿠 손에 찢기는 건 종이가 아니라 를르슈가 될 것 같았다.

 

“예스, 유어 마제스티.”

“…….”

 

살벌한 스자쿠의 목소리에 를르슈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스자쿠는 반으로 찢겨진 기념식 서류를 품에 안고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를르슈는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에 겨우 숨을 골랐다. 스자쿠에게 어떻게든 잘 둘러댄 것 같았다. 기념식을 취소하게 되긴 했지만 꼴사나운 자신의 짝사랑 연애사정을 들키는 것보단 나은 결말이었다. 가족인 나나리에게나 겨우 터놓을 수 있는 스자쿠에 대한 절찬 짝사랑 중인 이 마음을 들키는 것은 죽기 보다 싫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에 대한 짝사랑을 숨기고 싶었던 를르슈 황제의 즉위 1주년 기념식은 이렇게 취소되었다. 나중에 짝사랑을 이루고 나이트 오브 제로와 백년가약을 맺은 를르슈 황제는 이 기념식을 취소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는 것이 후대에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