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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자 8

그는 여자 / DOZI 2024.04.28 11:41 read.141 /

그날은 를르슈가 혼자서 브래지어 후크를 풀고서 잔 날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스자쿠가 를르슈를 홀로 내버려두고서 갑작스러운 출장을 나선 날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출장, 이라고는 말하지만 스자쿠는 자신이 왜 집에 돌아갈 수 없는지 알고 있었다. 위에서는 ‘그쪽에서 계속 쿠루루기 씨를 찾아서 말이야’ 같은 말을 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위에 있을 스자쿠의 아버지, 겐부가 지금의 판을 짜둔 것이 분명했다.

직접 보는 것보다 덜하지만 나쁘지 않을 정도로 를르슈를 충전했다고 생각한 스자쿠는 자신의 전장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스자쿠와 를르슈를 갈라놓으려는 개수작은 언제나 스자쿠의 뒤를 따라다녔고, 스자쿠는 그것을 귀찮게 여기면서도,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저에게 달려드는 것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호텔 방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바Bar로 향하면서, 스자쿠는 자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사람 한 명 없는 것에 자신을 이 교토까지 불러낸 상대가 꽤나 각오했음을 깨달았다. 바에 들어서면 사람으로 북적여야 할 금요일 밤임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음악조차 흐르지 않는 이 공간을 술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하고 맥빠진 생각을 하고 있던 스자쿠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는 교토6가의 아가씨, 스메라기 카구야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얼굴로 스자쿠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를 다 빌린 거야? 별 걸 다 하네, 카구야.”

“당신 만큼이나 할까요, 스자쿠?”

 

한 살 어린 사촌동생은 겁없이 웃어보이면서 의자에 걸터앉은 채였다. 화려한 기모노를 갖춰입은 카구야는 그 옷에 걸맞는 사람이었다. 어린 여자 답지 않은 기백, 어떤 상황에서든 패를 보이지 않는 치밀함,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다 넣는 그 끈기와 행동력까지. 그래서 스자쿠는 그녀가 싫을 정도로 자신과 닮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 좀 하죠.”

“거기서 해.”

“술이라도 한 잔 하는 건 어때요?”

“우리가 술 한 잔 할 사이도 아니잖아. 용건만 간단히 해줄래? 피곤해서 얼른 자고 싶거든.”

 

스자쿠의 냉정한 거절에 카구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언제까지 저한테서 도망칠 건가요?”

“너야말로 언제까지 그런 말을 할 거야?”

“겐부 아저씨도 한계이신 거 같더라고요.”

“아버지야 늘 한계지.”

 

카구야는 말 한 마디 지지 않고 대꾸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하하, 스자쿠. 당신은 여전히 당신만 생각할 줄 아는 어린애군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라고 했던가요, 스자쿠의… 뭐라고 불러야 할까, 피앙세?”

“내 아내는 왜?”

 

스자쿠의 바로 고치는 정정에 카구야는 키득거렸다.

 

“여전하군요, 정말.”

“앞으로도 계속 이럴 생각이야.”

“저도 딱히 당신을 좋아해서 이러고 있진 않아요. 그래, 당신이 쿠루루기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 이유도 없고요.”

 

카구야는 웃으면서 잘 접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스자쿠는 그녀의 허튼 수작에 넘어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우선 이런 자리를 준비한 정성을 헤아려 볼 생각이었다.

 

“저랑 계약하죠, 스자쿠.”

 

그녀가 넘긴 종이는 계약서였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스메라기 카구야에게 후계자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이제까지의 생활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스자쿠는 흥미 하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녀에게 그것을 돌려주었다.

 

“필요 없어.”

“겐부 아저씨는 오늘이 지나면 이제 당신한테서 모든 원조와 지원을 끊을 생각이에요. 집에서 쫓겨나서 그 브리타니아 황자님도 챙기지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집에서 쫓겨난다고?”

 

스자쿠는 그 말에 재미있는 장난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 집에서 쫓겨난다라… 스자쿠는 그 말을 되뇌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 좋지. 난 그 집이 너무 싫거든. 신혼집으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은 최악이야.”

“정말 괜찮은 건가요? 그 황자님은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데도?”

 

스자쿠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웃었다. 거의 배를 잡고 웃다시피 하는 스자쿠는 이내 박수까지 치면서 그녀의 말에 있는 힘껏 비웃었다. 방금 전 카구야가 웃어준 것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한참 웃던 그는 이내 숨을 고르고서는 말했다.

 

“아, 너무 웃었다. 카구야, 교토식 농담에 재능이 있네.”

 

카구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스자쿠는 웃느라 흐트러진 자세를 고치면서 카구야의 시선에 응했다.

 

“넌 정말 를르슈가 그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집에서 벗어나게 되는 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부유하게 자란 사람들은 손에 넣은 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어요. 그게 날 때부터 가지고 난 것이든, 나중에 갖게된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그건 당신도, 당신의… 를르슈도 그렇겠죠.”

“넌 정말 를르슈를 모르는구나.”

 

스자쿠는 다리를 꼬고서 비밀을 알려주듯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를르슈가 떨어질 나락은, 내가 없는 세계가 되는 거야. 그 애한테는 내가 전부니까.”

 

그 말에 카구야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당겨 웃었다.

 

“못 본 사이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됐네요, 스자쿠.”

“이건 자신감이 아니라, 사실이야.”

 

스자쿠는 카구야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올렸다. 이거, 내가 마실게. 방금 전에 너무 웃어서 그런지 목이 마르거든. 그러자 카구야는 ‘거기에 내가 뭘 탔을 줄 알고요?’라고 대꾸했다. 그런 카구야의 말에 스자쿠는 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스자쿠는 카구야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무엇이든 하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프라이드 때문에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약을 타서 스자쿠의 정신을 잃게 하는 일 따위, 카구야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고작 스자쿠를 얻기 위해서 비겁한 수를 쓰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게 서로 닮은 듯한 스자쿠와 카구야의 유일한 차이였다.

들이킨 술은 맛있었고, 스자쿠의 예상대로 어떤 약도 타지 않은 술이었다. 카구야는 맛있게 술을 들이키는 스자쿠를 보면서 질린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오늘 즐거웠어. 가족이랑 웃을 일이 없는데, 너 덕에 많이 웃었어.”

“그렇게 즐거웠으면 다시 계약에 대해 재고해보는 건 어때요? 겐부 아저씨는 정말 진심이에요.”

“나는 아버지가 연을 끊어주면 오히려 고맙다니까. 이따위 집안 같은 거 두 번 다시 엮이고 싶지도 않고. 교토6가니 뭐니 하는 것도 나에게는 의미 없어.”

교토6가를 부정하는 스자쿠의 말에 카구야는 시종일관 웃는 낯을 유지했던 것을 무너뜨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무너진 카구야의 여유에 스자쿠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그리고 카구야, 너는 우리 아버지를 잘 몰라. 아버지는 그렇게 무모하게 굴 사람이 아니야. 너를 그저 이용하기 쉽게 부추겼을 뿐이야.”

“…….”

“이래보여도 나는 아버지한테는 꽤 쓸모 있는 패거든. 후계자 문제만 빼면 말이지.”

 

아무튼 이제 일어날게. 내일 아침 도쿄로 바로 돌아갈 거니까.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걷다가 스자쿠는 뭔가 잊은 것이 있다는 듯이 카구야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쳐다보는 카구야의 말에 스자쿠는 게게 내밀어졌던 계약서를 들어올리곤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종잇조각이 되어 흩날리는 자신이 만든 게약서에 카구야는 쓴 웃음을 지었다. 스자쿠는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또 이런 걸로 날 불러내면, 다음에 찢는 건 이 종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둬.”

 

그렇게 스자쿠는 바를 나갔다. 카구야는 조용해진 공간에 음악을 틀라고 말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움직여 잔잔한 재즈를 틀었다. 카구야는 스자쿠가 다 비워버린 자신의 술잔을 손끝으로 굴려버리다가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크리스탈 잔이 박살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종잇조각과 크리스탈 조각이 뒤엉킨 바닥을 내내 쳐다보던 카구야는 자신이 오랜만에 궁지에 몰렸음을 느꼈다. 그것도 저 철부지라고 생각했던 쿠루루기 스자쿠에 의해서라니. 기분이 나빴다. 

 

* * *

 

집안 사람들이 스자쿠를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더러워진 팬티를 다시 입거나, 어젯밤 겨우 벗은 브래지어를 직접 할 수 없는 를르슈는 속옷도 다 입지 않은 채로 스자쿠를 마중나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중을 나가는 것 대신에 를르슈는 스자쿠가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침실에서 그가 빨리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스자쿠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를르슈는 문 옆에서 초조해지는 마음이 되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스자쿠가 들어왔다. 출장을 다녀온 스자쿠는 나갈 때와 다름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문 옆에 바로 서 있던 를르슈를 알아차린 스자쿠는 그를 보면서 평소와 같이 웃어주었다.

 

“하루 만이네, 를르슈.”

“응, 보고 싶었어, 스자쿠.”

 

를르슈는 자신을 안아주는 스자쿠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스자쿠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한 를르슈는 스자쿠의 품에 어릴 때 모양으로 안겼다. 를르슈의 답지 않은 애교에 스자쿠는 그가 외로웠음을 알고서 그를 더 깊게 안아주었다. 따뜻한 품이 깊어지는 것에 를르슈는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일찍 왔네.”

“어제 바쁜만큼 오늘은 보상 받는 거지. 를르슈랑 잔뜩 쉴 거야.”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을 보더니 말했다.

 

“브래지어 안 했네, 를르슈.”

“으응, 혼자서 하기 어려워서….”

 

를르슈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계속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듯, 스자쿠의 귓가에 속삭였다.

 

“패, 팬티도 아직… 못 입었어.”

 

한마디로 지금 셔츠와 바지만 벗기면 금방 알몸이 될 것이라는 를르슈의 수줍은 고백에 스자쿠는 그가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우선 샤워부터 같이 할까?”

“아침에 씻긴 씻었는데.”

“검사해볼까?”

“무슨 검사?”

“를르슈가 어젯밤에 정말 보지 안 만졌는지 확인 검사.”

“…보지, 안 만졌어.”

“정말로?”

“나는 스자쿠한테 거짓말 안 해.”

 

를르슈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뾰로통해져서 튀어나온 를르슈의 입술에 스자쿠는 입을 맞추면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속삭이는 스자쿠의 입술에 를르슈는 입을 벌려 혀를 내밀어 스자쿠에게 키스를 했다. 이내 진득하게 엮이는 키스에 숨이 차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를르슈의 작은 고개를 받치고서 그의 입안을 들쑤시듯 탐하던 스자쿠는 눈을 감고서 키스에 열중하는 어린 아내를 살짝 뜬 실눈으로 감상했다. 홍조로 물드는 하얀 얼굴이며, 촉촉하게 젖어가는 눈가가 자신이 주는 쾌락에 흠뻑 젖어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자쿠는 한껏 기대하고 있는 이 작은 몸에게 응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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