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구야의 주장에 의하면, 를르슈는 여자가 아니었다.
를르슈에게 자궁은 없었으며, 그는 영원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런 사실들이 를르슈의 눈앞에서 ‘진실’이 되어갈 때마다, 를르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것은 카구야도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를르슈는 여자로, 아내로 길러진 어린 남자아이었다.
카구야는 를르슈가 자신의 인생이 스자쿠의 거짓말 하나로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것에 분노하거나, 혹은 절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를르슈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려는 것처럼 담담하게 굴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를르슈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카구야는 그것이 아무래도 쿠루루기 스자쿠가 를르슈를 계속해서 속여왔다는 사실에 상처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내색하지 않으려는 를르슈의 모습은 어른스러웠지만, 진짜 어른인 카구야의 앞에서는 소용 없는 허세였다.
카구야는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갔다.
“를르슈 씨, 당신이 원한다면 다시 브리타니아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요. 거기서는 원래대로의 삶을 살 수 있어요. 스자쿠 같이 비겁한 놈과 어울릴 필요도 없고요.”
“…….”
를르슈는 그녀가 하는 말을 숨죽여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브리타니아로 돌아간다? 이제 와서 브리타니아어도 다 잊어버린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그것은 그리움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공포가 먼저 들이닥쳤다. 원래대로의 삶이란 또 무엇인지, 를르슈는 알 수 없었다. 를르슈의 ‘원래대로의 삶’이란 스자쿠의 아내로, 스자쿠의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침에는 스자쿠를 배웅하고 저녁에는 스자쿠를 마중 나가는 삶이었다. 그런 것들의 근간이 모두 뒤흔들려서, 카구야의 말에 를르슈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자쿠를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를르슈는 자신이 왜 불안하다고 느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를르슈는 깨달았다. 자신이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자궁이 없는 남자이기 때문에, 스자쿠의 옆에서 떨어져야 하고, 그 자리를 카구야를 비롯한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다는 것에 대한 부당함과 불합리함,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제가 만약…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면, 카구야 씨는 스자쿠와 결혼하게 되나요?”
“그건 저희 교토6가의 문제라서, 아마 브리타니아로 떠난 를르슈 씨와는 관계가 없게 되겠죠?”
“카구야 씨는 스자쿠를 사랑하나요?”
카구야는 갑자기 사랑을 운운하는 를르슈의 말에 퍽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를르슈는 진심인 모양인지 올곧은 시선을 하고서,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보듯 카구야에게 질문했다.
“카구야 씨가 스자쿠를 사랑하니까… 저를 스자쿠한테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건가요?”
“뭐,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고 있다고는 하겠죠. 그가 가진 쿠루루기 집안의 후계자라는 위치는 제게 있어서 가장 큰 매력이거든요.”
를르슈는 그런 이유에서 스자쿠가 카구야에게 선택되는 것은 싫었다. 그 싫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카구야는 이 소년이 진심으로 스자쿠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를르슈가 애초부터 스자쿠에 대해서 분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 이유에서 스자쿠랑 헤어져야 한다면, 저는 싫어요.”
“이상하네요.”
“네?”
“를르슈 씨는… 스자쿠가 밉거나 싫지 않나요?”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스자쿠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수는 없었다. 그를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은 를르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를르슈는 그녀의 질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불안하고 슬퍼했는지를 깨달았다.
“전… 제가 정말 스자쿠의 아내가 아니었다는 게 싫어요.”
를르슈는 그 사실을 굳이 입밖으로 꺼내어 말함으로써 마음을 정리하는 자신이, 어딘가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아픈 상처를 헤집어가면서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스지쿠의 아이를 낳아줄 수 없었다는 것도 싫고요.”
“…스자쿠가 억지를 부리고 있었던 것 뿐이에요. 당신은 거기에 휘둘리는 것 뿐이에요.”
“휘둘린 건 아니에요.”
를르슈는 스자쿠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애정을 떠올렸다. 그것은 를르슈를 농락하려고 했다고 하기에는 진짜였으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자쿠는 자궁도 없고 남자인 를르슈를 10년 가까이 아내로 맞은 채로, 자신의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를르슈를 보호해왔다.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도 스자쿠한테는 진짜 여자, 진짜 아내가 필요하겠죠.”
“를르슈 씨가 스자쿠보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네요.”
“…….”
카구야는 자신의 패배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안심한 듯이 말했다.
“브리타니아가 싫다면 다른 곳도 준비해줄 수 있어요. 스메라기 가문이 당신이 있는 곳을 안전하게 보호할 거예요. 스자쿠한테는 제가 잘 말해 둘게요.”
언젠가 를르슈가 카구야에게 했던 말과 닮아있는 그 말투에, 를르슈는 자신이 스자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된 듯 했다. 를르슈는 여기서는 확실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스자쿠한테 인사하게 해주세요.”
를르슈는 카구야가 자신에게 마지막 인사 정도는 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애초부터 비겁한 수를 쓰는 것에 스스로도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를르슈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준다고 하더라도 이번 상황에서 비겁한 수단으로 를르슈를 뒤흔들었음에 대해 속이 쓰렸을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카구야는 고민하는 듯 하더니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스자쿠가 올 거 같거든요. 그 바보 같은 스자쿠라고 해도 당신을 납치한 게 저라는 걸 알아차렸을 테고. 지금 인사해두죠.”
“…….”
“단둘이 인사할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어요.”
를르슈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스자쿠와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납득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드러난 사실 중 많은 것들이 를르슈의 패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를르슈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성장을 겪어도 그는 여자가 될 수 없으며, 스자쿠의 아내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를르슈는 이해가 빠른 자신이 싫었다. 아예 더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떼라도 썼으면 좋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든 사고가 멈추었다. 두 번의 노크. 그리고 들어오라는 허락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그가 들어왔다. 들어오는 사람은 스자쿠였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카구야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서 소리 없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스자쿠는 자신이 냉정한 이성을 유지해야지, 이 우습게 돌아가는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방식이든 를르슈를 빼앗겼다는 것에 집중하면 화가 들끓었지만, 그런 감정적인 대응이야말로 카구야가 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순순히 들어주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럴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 뭐해, 를르슈?”
스자쿠는 최대한 평온한 척 를르슈에게 물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부드럽지만 분노가 서려있는 말투에 그와 시선을 맞추는 것이 두려웠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껏 인정하고 다짐한 마음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카구야는, 이런 곳까지 를르슈를 데려와서 뭐하는 짓이야?”
“다소 무리한 방법을 쓰긴 했지만, 를르슈 씨의 동의로 이루어진 일이니까요.”
카구야는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에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런 여유를 가지고 있는 카구야를 이미 예상한 것처럼, 스자쿠는 그녀의 대답에 그렇게 뜻을 두고 있진 않았다.
“그럼 시간을 드리죠.”
카구야는 를르슈에게 말했다. 스자쿠가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나가는 카구야는 스자쿠와 를르슈만을 남겨두고서 문을 닫았다.
그렇게 그 공간은 스자쿠와 를르슈, 두 사람의 밀실이 되었다. 스자쿠는 저보다 한참은 작은 를르슈의 곁으로 걸어갔다. 스자쿠의 그림자가 를르슈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스자쿠였다.
“를르슈, 말 안 할 거야?”
스자쿠는 자신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는 를르슈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두 눈이 마주치면, 를르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진짜 스자쿠를 마주하고 나니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의 불안함이 더욱 커져갔다.
“카구야 씨가 진실을 알려줬어.”
“무슨 진실?”
“…난 여자가 아니야.”
카구야는 를르슈의 세계를 부수어놓았다. 스자쿠가 허술하게 쌓아놓은 거짓말로, 그리고 애정으로 견고하게 만들어놓았던 세계가 완벽하게 붕괴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다 산산조각이 난 상태로 를르슈는 스자쿠를 응시했다.
“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스자쿠의 아기를 낳아줄 수도 없어. 그래서 스자쿠를 더 괴롭히게 될 거야.”
“…….”
“그러니까, 그러니까 스자쿠랑 헤어질 거야.”
를르슈의 마지막 말에 스자쿠의 이성은 순식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아슬아슬했던 이성의 끈은 헤어지겠다는 이별 통보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스자쿠는 처음으로 를르슈를 때렸다.
뺨을 얻어맞은 를르슈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짜악, 하고 뺨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간 고개가 얼얼했다. 를르슈는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스자쿠는 자신에게 맞아서 뒤로 밀쳐진 를르슈와 벌어진 거리를 다시 좁히면서 다가갔다.
“누가 날 괴롭히는데?”
를르슈는 이어지는 고통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스자쿠를 노려보았다. 스자쿠한테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얻어맞은 사실에 당황스러워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스자쿠가 자신과의 이별에 화를 내고 있다는 것에 기쁘기도 했다.
“내가 묻잖아, 를르슈.”
를르슈는 억눌린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으면서,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스자쿠를 앞에 두고서 말했다.
“말했잖아. 내가 널 괴롭히게 될 거야.”
“를르슈가?”
“응.”
“왜? 를르슈가 여자가 아니라서?”
“…….”
스자쿠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를르슈의 눈물로 젖어드는 뺨을 쓸어주었다. 많이 아팠지, 하고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다. 평소의 스자쿠 같은 모습에 를르슈는 다시 그의 품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를르슈는 여자가 아니었고, 잘 속아 넘어갔던 거짓말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여자가 아니어서, 아이를 못 낳아줘서, 그래서 를르슈는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
그렇지만 스자쿠한테는 지켜야 할 게 많잖아, 라고 를르슈는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씁쓸하게 웃었다.
“를르슈는 나를 사랑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구나.”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라니, 어딘가의 소설에서나 볼 법한 말이었다.
다가온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어보고는, 그에게 키스를 했다. 를르슈는 자신의 입술에 다가오는 스자쿠의 입술을 느꼈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을 타고 넘어오는 스자쿠의 체온이 를르슈를 울게 했다. 조금씩 파고 혀에 를르슈는 자신의 목소리가 곧 말이 되어 스자쿠를 붙잡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언제나 사랑하는 스자쿠가 불편하고 곤란한 상황에 놓이는 것 같았다. 그것이 다 자신 때문인 것 같았는데, 정말로 사실로 드러나고 나니 를르슈는 달아나고 싶어졌다. 비겁하다고 해도 좋다. 자신이 도망침으로써 스자쿠를 이제 힘들게 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를르슈, 이것만 대답해줘.”
입술이 떨어지고 나면 스자쿠가 흩어지는 숨 사이로 속삭였다. 를르슈의 귓가에 가볍게 부딪힌 입술이 하는 말에 를르슈는 숨을 죽였다.
“를르슈가 여자가 아니라는 게 사실이라고 해서, 내가 를르슈를 미워할 거 같아?”
“…아니.”
“맞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그걸 명심하라고 말했다. 스자쿠의 명심하라는 말에 를르슈는 그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 치고는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를르슈의 의아함에 스자쿠는 더는 돌아보지 않고서 그의 손을 잡고서 닫혀있는 문쪽으로 다가갔다.
“인사는 이쯤이면 된 거 같아.”
벌써, 라는 마음과 동시에 이제 끝이 실감이 났다. 를르슈는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억누르면서 문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 스자쿠를 보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그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스자쿠가 쥐고 있던 문고리는 조금 다급한 손길로 열렸고, 를르슈는 들이치는 복도의 조명으로 환해진 시야에 눈을 찌푸렸을 때였다.
스자쿠가 카구야의 옆에 있던 남자 둘을 때려 눕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구둣발로 얼굴을 내리찍어버리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물론이고 카구야조차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홀로 남은 카구야를 뒤로 하고서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고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냅다 안겨졌다. 빠르게 달리는 스자쿠의 품에서 를르슈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뒤늦게 스자쿠를 쫓아오는 발소리에 괜히 다급해진 를르슈는 그의 품에 꼭 매달렸다.
스자쿠는 지하주차장까지 단숨에 계단으로 내려갔고, 자신의 차에 를르슈를 조수석에 앉혀두고서 안전벨트까지 채워주었다. 그리고 바로 운전석에 앉은 스자쿠는 시동을 걸고 두 발로 내달렸을 때보다 더 숨가쁘게 움직였다. 를르슈는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 스자쿠의 차에 안전벨트를 꼭 붙들어맸다.
“어,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든 좋아. 를르슈랑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갈 거야.”
“도망치는 거야?”
“를르슈가 먼저 도망친 거잖아. 그리고… 부부는 일심동체고.”
스자쿠는 도로 위를 빠르게 질주했다. 그는 뒤에서 쫓아오는 차들을 보면서 키득거렸다. 급하게 꺾이는 핸들과 다른 차들을 앞지르는 속도감에 를르슈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카구야는 재미있는 애야, 그렇지?”
“…모, 모르겠어.”
“나도 를르슈한테 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고, 그러면서 너를 나한테서 빼앗아가려고 하는 게, 정말 웃기지 않았어?”
“…….”
스자쿠는 정말 재미있다는 것처럼 목을 울리며 웃었다. 뒤따라오는 차들을 모두 따돌린 모양인지, 한적해진 어느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스자쿠는 말했다.
“를르슈, 네가 좋든 싫든 사실은 하나 뿐이야.”
“…그게 뭔데?”
“너는 내 아내고, 나는 네 남편이라는 거지.”
그건 를르슈의 안에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 부부 관계를 이제까지 부정하려고 애를 쓴 를르슈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담백하다 못해 명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스자쿠의 말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한 번 터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더니, 를르슈는 이내 소리 없이 울어버리고 말았다.
스자쿠는 우는 를르슈를 달래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운전만 했다. 훌쩍거리는 를르슈의 울음소리는 이내 커지기 시작했고,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를 힐끔거리면서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울 거면서 왜 그런 소리를 했어?”
“난 정말로… 헤어지고 싶으니까…!”
“이렇게 갑자기, 이야기도 없이, 헤어지겠다고? 를르슈를 그렇게 키운 기억은 없는데….”
스자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가를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한 손으로 여유롭게 핸들을 굴리는 스자쿠는 말을 이었다.
“를르슈가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건 나였으면 했는데.”
“넌 날 속인 거야.”
“미안해.”
“미안하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물론이지. 나는 평생을 바쳐서 를르슈한테 사과할 생각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평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스자쿠는 미안한 마음은 조금도 없어보였다. 를르슈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면서 중얼거렸다.
“난 그런 평생 필요 없어.”
“그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스자쿠는 진심으로 한 소리인 듯 싶었다. 를르슈는 자신들이 처했던 상황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태평하게 농담 같은 소리나 늘어놓는 스자쿠를 보고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넌 정말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말했잖아, 평생을 바쳐서 사과할 생각이라고.”
“…나보고 평생을 시달리라는 이야기잖아, 그거.”
헤어짐을 이야기했다가 앞으로의 평생을 논하고 있는 지금의 자리가 를르슈는 이제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더 이상 말하는 것은 괜한 소모전인 것 같아서 를르슈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스자쿠는 말하지 않는 를르슈에게 더 이상 대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스자쿠가 운전하는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를르슈는 주위가 어두워져서 파도치는 소리만 무섭게 들리는 삭막한 밤바다를 함께 걷자고 하는 스자쿠의 손에 이끌려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푹푹 파이는 발밑에 휘청거리면 스자쿠가 붙잡아주었다. 위험해, 하고 말하면서 잡아주는 손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불빛조차 비치지 않아 검게 보이는 바닷물이 철썩거리는 근처까지 걸었다.
를르슈는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스자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아, 하고 숨을 고르면서 를르슈를 마주보며 말했다. 그의 결연한 시선에 를르슈는 마른침을 삼켰다.
“를르슈, 이제 나는 너 말고 모든 걸 다 포기할 거야.”
“…왜?”
“왜 그런지는 알고 있잖아.”
알고 있지만, 그것이 피부로 와닿을 때의 현실감이 너무 없었다. 나를 사랑해서? 를르슈가 조심스럽게 되묻는 말에 스자쿠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니 너도 포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여기서 무엇을 더 포기할 수 있을까. 스자쿠가 전부인 자신에게 세상은 이미 한 번 뒤집혔다. 답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를르슈를 보며 스자쿠는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를 포기해. 그리고 나를 선택해.”
다른 누군가가 너를 무언가로 옭아매려고 할 때, 그때 너를 포기해. 그리고 나를 선택해. 스자쿠는 되뇌었다. 나는 언제고 너를 사랑할 거고, 너는 내 사랑을 받으면서 포기한 걸 채워가면 되는 거야.
스자쿠의 말은 엉망진창이었고, 논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를르슈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여유가 없는 스자쿠의 고백을 들으면서, 를르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그러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아버리게 되는 거잖아.”
를르슈의 이제까지의 세계는 스자쿠 하나만으로도 완전했지만, 그만큼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했었다. 를르슈는 그 불안 속에서 같이 함께 하자는 스자쿠의 말에 불안정함을 토로했다.
“나쁘지 않아. 를르슈랑 단둘이 남는 세계는 오히려 좋은걸.”
미소를 짓는 스자쿠는 평온해보였다. 그는 를르슈의 대답을 재촉하며 재차 물었다.
“그래서 어때, 나를 선택해보는 건?”
를르슈는 그의 말도 안되는 말에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며, 볼이 뜨겁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북받쳐 오르는 기쁨 같은 것들이 를르슈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웃고 있는 스자쿠가 있었다.
스자쿠는 대답 없는 를르슈에게 입을 맞추었다. 를르슈는 두 눈을 감기 전, 스자쿠의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궁지에 몰리고 몰린 어른의 눈물은 꼴사나운 게 분명한 데도, 스자쿠가 울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를르슈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키스를 받으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품에 매달렸다. 말로 전달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를르슈의 대답에 스자쿠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에 덩달아 눈물이 터진 를르슈는 스자쿠의 눈물에 입을 맞추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거짓말이라는 수단 없이도 하나가 되어 완전해지는 충족감은 스자쿠와 를르슈, 두 사람을 모두 울게 했다. 이제까지의 쌓아온 시간과 비교도 안될 만큼의 평생이라는 시간이 두 사람을 영원히 옭아맬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서로를 끌어안는 팔이 있다면, 느낄 수 있는 서로의 체온이 있다면, 두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걸 다짐하기라도 한 듯한 맹세의 키스는 깊게 얽혀들어왔다. 다시 닿는 입술에, 를르슈는 찬 바닷바람을 맞는 와중에도 달아오르는 몸을 감추려고 스자쿠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를 알아차린 듯,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자가 아닌 를르슈는 처음이라서 긴장되네.”
그렇게 차로 돌아가기로 한 두 사람의 걸음은 돌아올 때보다 빠르고 다급했다. 스자쿠의 뜨거운 손에 이끌려서 뒷좌석에 눕혀진 를르슈는 자신의 옷을 벗기는 스자쿠를 보면서 말했다.
“스자쿠, 나도 긴장돼.”
“상냥하게 할게. 차에서 하는 섹스는 처음이니까.”
를르슈가 무엇에 겁을 먹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 스자쿠는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하며 그에게 대답했다. 브래지어도, 속옷도, 전부 다 벗겨져서 알몸이 된 를르슈는 자신이 이전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긴장이 되었다.
여자가 아닌 자신으로 하는 섹스는 어떨까.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런 섹스를 알려주고 다시 사랑해 주는 스자쿠가 를르슈의 곁에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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