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루루기 스자쿠의 이야기를, 아니 제로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기호로써는 완전하더라도, 인간으로써는 불완전한 존재로써 살아가던 중이었다. 제로의 가면을 쓸 때에 그는 자신의 설 자리를 찾을 줄 알았고, 그 자리를 지켜내는 방법과 힘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가면을 벗고 나서, 거울을 마주할 때면 그는 자신의 힘이 앗아간 것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몇번이고 반복되는 지옥이고,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착각이 들게 했다. 실제로 스자쿠는 가면을 벗고 나면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본다거나, 샤워를 한다거나, 그러한 일상조차 그는 해낼 수가 없었다. 몇번이고 그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자살 충동이 그를 ‘살게’ 했다. 강제적으로 이어지는 삶은 스자쿠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었다.
그렇게 살았다.
제로는 완벽했다. 스자쿠가 존재하는 방식 중에 가장 선하고 효율적이었다. 제로로 있을 때 스자쿠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기호로서, 상징으로서 존재함으로 인해 쿠루루기 스자쿠의 과거는 사라지고, 오로지 제로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자유를 주었다. 를르슈는 이러한 자유를 이용한 걸까. 스자쿠는 나나리의 뒤에 있을 때면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는 눈앞에 있는 나나리를 위해서 그 거짓된 자유를 진실로 이끌어내기 위한 기적을 일으켰지만, 스자쿠에게는 제로의 가면이 주어져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면의 자유와 가면이 주는 진실과의 괴리감 사이에서 쿠루루기 스자쿠의 삶은 가라앉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하면서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기어스는 소망과 닮아있다고, 그가 말했다. 그와 그녀가 찾고 있는 기어스의 조각은, 누군가가 바랐던 소망의 조각들인 것일까? 그런 걸 찾아서…… 무엇을?
스자쿠는 를르슈와 C.C.가 떠나던 뒷모습을 떠올렸다. 둘과 스자쿠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자쿠의 안에서 를르슈에 대한 의문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자쿠의 를르슈에게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았다.
왜 기어스를 얻기 위한 계약을 맺었어?
왜 제로가 되었어?
왜 유피를 죽였어?
너는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진실이 많은데….
너의 이루고 싶은 소망은?
나나리는……
……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그러한 물음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기도 했고, 유치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나리조차 를르슈를 찾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자쿠는 계속해서 그의 흔적을 좇았으며, 혹시 들리는 이야기 속에서 C.C.나 를르슈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긴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가 죽은 이후, 재회한 이후 일이 년이 고작이었다.
그는 스자쿠를 찾지 않는다.
스자쿠도 그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둘 사이에는 이제 남은 관계라는 것이 없었다. 정의할 것들은 모두 과거의 것이었다. 친구, 원수, 기사, 주군, 공범자. 많은 단어들이 서로를 정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없는 상황을 정의할 만한 단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뭐가 있을까. 제로가 아닌 쿠루루기 스자쿠로서의 밤이 깊어지는 날이면 를르슈의 생각에 빠졌다. 그와 필사적으로 무언가의 관계를 짓고 싶어하는 것은 과거의 관성이라고 생각했다. 스자쿠보다 똑똑한 를르슈라면 정확하게 단어를 짚어서 둘 사이의 애매함을 확실하게 정리해줄 것이다. 하지만, 를르슈는 그를 찾지 않는다. 그리고 스자쿠도 그를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흑의 기사단, 그리고 제로이다. 를르슈는….
를르슈는 나나리의 손을 놓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 그는 무언가 한 차례의 결심을 한 듯 했다. 자신의 죽음이 만들어놓은 세상이, 를르슈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를르슈는 제로의 자리를 스자쿠에게 내밀고 유유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눈에 띄는 미모와 화려한 언변은 를르슈를 세상에서 감추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스자쿠의 기우였던 것 같았다. 를르슈나 C.C.가 연락하지 않는 이상, 스자쿠는 그들에게 닿을 수 없었다.
서로 완벽한 평행선을 그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걸 무엇이라고 하지…. 접점이라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서, 과거 조차 이제 의미가 없어진 사이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 스자쿠는 한숨과 함께 밤잠을 설쳤다. 그런 답이 없는 의문에 빠져드는 날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제 본능적으로 몸이 거부하는 그 물음은 답을 찾아 헤매지 않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운 좋게 살아 돌아온, 나의, 나의… 나의……?
그러한 물음에 오랜만에 빠져든 것은, 서른 두 살의 쿠루루기 스자쿠를 찾는 전화가 왔을 때였다. 그 전화는 예전에 를르슈와 C.C.가 떠나고 나서, 나나리가 만들어놓은 핫 라인의 전화번호였다. 그 전화번호가 부르는 벨 소리가 울리길 얼마나 기대했던가. 하지만 그때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스자쿠는 바라던 전화 한 통에 감동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를르슈, 너는 나의, 나의 무엇이기에, 이것조차 망설이게 만들고 있어?
나는 아직도 너를 미워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지나간 시간들은, 너와 모두 상관없이 흘러버렸는데.
스자쿠는 처음 울린 전화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스자쿠가 받기를 기다리는 듯, 그 전화는 계속 울렸고, 받을 사람이 받지 않자 전화는 곧 끊겼다. 그리고 두 번째 콜이 울렸다. 스자쿠는 계속해서 받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을 몸으로 느끼고 확인하는 것은 더 두려웠다.
그의 무슨 소식이 들리는 것이 두려웠다. 이제 더 이상 증오와 우정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마른 감정에 두려움만이 남은 것은 입안을 쓰게 만들었다. 몇번 마른 세수를 하고 나서 스자쿠는 전화를 아예 꺼버렸다.
제로의 핫 라인이 끊기면, 아마 명예고문인 나나리에게 그 전화가 돌아갈 것이다. 그가 찾는 것은 스자쿠도, 제로도 아닌 나나리여야만 했다. 나나리는 그와 피를 나눈 남매이고, 그를 움직였던 진짜 킹King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스자쿠와 같은 두려움도, 괴로움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순수하게 오빠의 소식을 기뻐할 여동생이다.
불순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전화를 받는 것보단 훨씬 나은 전개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스자쿠에게는 그러했다.
* * *
스자쿠와 나나리의 관계는 글자 하나로 압축할 수 있는 사이였다. 친구도 아니며, 주종 관계도 아니며, 오로지 비즈니스 파트너, 그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나나리 명예고문과 제로는 평화의 상징이자 기호,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두 사람의 조합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진 못했다.
설령 둘이 어렸을 적에 함께 했던 친구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나리의 컨디션에 따라서 상황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제로의 일이었지만, 반대로 제로는 나나리가 제로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만약 그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스자쿠는 노골적으로 나나리를 멀리 두기도 했다. 스자쿠에게 있어서 나나리는, 그녀는 제로와 가장 가까이 있지만, 제로에 대해서 누구보다 몰라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순은 어딘가의 누구와 닮아있다.
를르슈가 제로 레퀴엠을 위해 죽고 난 이후, 나나리는 빠르게 무너졌다. 보이지 않았던 세상을 만들어주고 지켜주었던 오빠의 죽음은 두 눈을 뜨고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인지, 나나리는 한동안 병원에 갇혀 지내면서 비명을 지르거나, 아니면 약을 먹고 죽은듯이 자는 것 말고는 하는 것이 없었다. 스자쿠는 절대로 그녀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는 를르슈가 남긴 최후의 유산이었다. 나나리마저 죽는다면 스자쿠는 자신의 죄를 누구를 위해 속죄해야하는지 몰랐다. 결국 자기 만족을 위해 나나리를 살게 만들었다. 이 또한 누군가와 닮아 있어서, 스자쿠는 자기가 그렇게 그를 닮아버렸는지, 그래서 그 가면을 쓰고 내달리는 것이 거침이 없었는지 허탈한 웃음도 나오기도 했다.
나나리를 방 안에 가둬놓고 24시간 감시한다. 그녀의 옆에 사람을 붙여둔다. 그녀에 대한 보고를 매일 매일 받는다. ‘그때와 닮았어.’ 라고 스자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와 완전히 다르다. 다른 사람들은 제로가 극악 무도한 황제의 유일한 친여동생이 무서운 반항심을 품고서 테러를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고자 감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 반대다.
그녀가 죽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그녀야말로 지금 만들어진 세상을 반짝이는 두 눈으로 바라보며 가슴을 펴고 살아가야할 사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를 죽게 만들 순 없었다.
나나리는 어느 순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은 채로 말라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생명이 버석버석한 소리를 내면서 말라비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도 메말라가서, 그녀는 금방이라도 창문 밖으로 푹 고꾸라질 것 같아서, 스자쿠는 잠가두었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제로의 가면을 쓴 채로 등장한 스자쿠를 보고서 나나리는 시선을 한 번 주고는 작은 소리를 웃었다.
‘이제 제 차례인거죠? 언제까지 살려두나 궁금하긴 했어요.’
나나리는 원래 제로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것이 를르슈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눈앞에 있는 제로가 누구인지 모른다. 를르슈를 눈앞에서 잃게 만든 제로는 대체 누구인지, 그녀는 알지도 못하며, 알 수도 없는 채로 홀로 남겨졌다.
‘오라버니는 제로, 그러나 제로의 손에 오라버니는 죽었다…….’
나나리는 쉬어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가면 너머를 꿰뚫는 강한 시선은 증오로 점철되어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악마군요…!’
악마가 아니고서야 당신이 내 눈앞에 나타날 리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흐느끼는 나나리는 그때를 떠올렸다. 제 손 안에서 식어갔던 사람의 체온. 그 끔찍한 경험은 두 번이나 있었다. 이쯤 되면 이 손을 잡아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저주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나나리의 덜덜 떨리는 손끝은 스스로를 끌어안으며 겨우 떨림이 멎었다.
이제 내 차례, 어서 죽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누구도 나나리를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부르지 않았다.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마 제로뿐일 것이다. 제로—쿠루루기 스자쿠는 한 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 없는 나나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계속 그렇게 멈추고 싶다면, 이 세상 밖으로 나가면 돼.’
그러지 마, 나나리. 이 세상이야말로 를르슈가 너를 위해 만든 세상이니까. 스자쿠는 간절하게 바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했다.
‘죽으라는 말인가요? 나를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어떻게든 살려둔 건 제로 당신이잖아요.’
‘여기는 를르슈 황제의 죽음이 만든 상냥한 세상이다.’
‘…….’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시대에서, 네가 만약 를르슈 황제의 뒤를 잇겠다면, 나는 너를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겠다.’
‘…….’
‘하지만, 네가 나와….’
그것은 를르슈의 바램이었다. 나나리와 함께 있는, 나나리의 눈으로 보았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세상을 함께 하는 것. 를르슈의 진짜 소원은 이것이었을 텐데. 스자쿠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나리는 넋이 나간 눈으로 제로를 쳐다보았다.
‘당신과 함께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건가요?’
‘…….’
‘당신은…나를 어디까지 바닥으로 보고 있는거야! 내가 어떻게 오라버니의 원수와 함께할 수 있어, 당신은, 당신은…! 제로는 유피 언니를, 그리고 오라버니를 죽였어! 제로라는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증오스러운 존재인 줄 알고서, 그런, 그런…!’
유피의 이름이 나오자 제로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가려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목소리를 억눌렀다. 나나리는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제로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사람을 미리 나가라고 해뒀기에 아무도 그녀의 발악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나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유피를 죽인 것은 를르슈, 를르슈를 죽인 것은 또 다른 제로라는 것을. 지금 자신의 발악이 그다지 유익하지도 않으며, 효율적이지도 못한 감정의 배출이라는 것까지도.
‘어떻게 제로가 정의의 사도인거죠? 나에게 당신은 그저 한 명의 테러리스트에 불과한데.’
나나리는 를르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제로라는 기호, 상징, 전설을 증오한다. 그녀의 매서운 분노를 받아내는 스자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돌아가세요. 나는 당신이 싫으니까.’
‘내가 싫으면 흑의 기사단에 들어오는 건? 코우즈키 카렌도 있으니까. 그녀라면 네게…….’
‘아무도 오라버니를 대신할 수 없어!’
나나리의 말에 스자쿠는 상처를 받고 돌아섰다. 혼자 흐느껴 우는 나나리를 달래줄 순 없었다. 돌아서서, 달빛도 비추지 않는 어둠 속의 복도를 걸으면서 를르슈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아무도 너를 대신할 수 없어. 나나리는 그 사실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를르슈, 나는 너를 대신할 수 없어. 네가 살아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라면 죽지 않고 살아서, 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나나리에게 알려줄 거야.
내일 다시 올 때, 나나리가 한 번 더 제로를 부정한다면, 스자쿠는 그녀를…….
철컥.
장전되는 소리가 들린 총, 그 총구가 들이밀어진 눈앞에, 나나리는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제로의 뜻에 따르지 않습니다. 당신을 믿을 수 없고, 당신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래?’
‘흑의 기사단도 싫습니다.’
‘아쉬운 이야기가 되었군.’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나리의 망명을 준비해야 할까. 슈나이젤에게 말하면 그녀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겠지. 스자쿠는 총알 하나 들어있지 않은 총을 느릿한 동작으로 내리면서, 가면 너머의 시선으로 나나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예전보다 마르고 있었지만, 무너졌던 그때보다 강해보였다.
‘지금의 브리타니아를, 오라버니가 바랬던 세상의 브리타니아를 만들 거예요.’
‘…제국의 황제라도 되겠다 이건가?’
‘그럴 리가요.’
나나리는 제로를 쳐다보며 품 안쪽에서 숨겨진 총을 꺼냈다. 붉은 레이저가 스자쿠의 가슴팍을 향했다.
‘나는 브리타니아의 마지막 황제가 죽이려고 한, 그의 뜻을 부정한 여동생, 이 정도의 이름을 걸고 오라버니가 만든 세상을 볼 자격은 있습니다.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세상을 지켜나가는 건 제로가 할 일이 아니에요.’
그녀는 곧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굴다가, 울음을 터뜨리며 곧 바닥에 총을 떨구었다. 카페트가 그 소음을 묵직하게 잡아먹었다.
‘이 세상을 지키는 일은 제가 할 일입니다.’
‘…….’
‘이 세상이야말로 저의 원수입니다.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도 제가 할 선택입니다.’
나나리는 제로도, 흑의 기사단도 고르지 않았다. 그녀가 고른 것은 를르슈가 바라던 것이었다.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웃음을 감출 수 있는 가면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자쿠는 나나리가 제로와 흑의 기사단과 상관 없는 삶을 살아주었으면 했다. 그저 를르슈의 세상에서 평화를 즐겨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선택은 어딘가 스자쿠와 닮았다. 마치 를르슈를 죽이기 위해서 를르슈를 지키는 기사가 되었던 쿠루루기 스자쿠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자신만의 정의를, 그리고 세상을 향한 대의를 내비쳤다. 그녀의 올곧은 시선에 스자쿠는 아아, 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음날 스자쿠는 나나리의 일을 슈나이젤에게 말했다. 나나리가 브리타니아 공화국의 힘이 될 수 있게 돕도록 자리를 준비하라고. 슈나이젤은 나나리의 이름을 듣자마자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알겠다고 하며 그녀와의 만남을 갖고서 곧 나나리에게 명예고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준비해주었다.
나나리와 지르크스탄의 인근에 같이 가게 된 이유는 슈나이젤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곳은 난민이 많았다. 난민이 많다는 이야기는 내란이 잦다는 이야기였고, 흑의 기사단과 초합중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슈나이젤은 제로의 정의를 따르면서, 제로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명예고문이 된 나나리의 정치적 연출을 위해서는 제로가 필요했다. 흑의 기사단이 이 내란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으며, 브리타니아 공화국에서도 그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걸 보여주려면 제로와 나나리가 함께 있어야한다고 슈나이젤은 나나리를 설득했다. 나나리와 제로는 중요한 자리는 함께 했지만, 항상 함께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나나리와 슈나이젤의 판단 하에 제로의 동석 여부가 결정되었다. 스자쿠는 그들의 통보를 따랐다. 슈나이젤은 를르슈가 고전할 만한 상대였고, 나나리는 를르슈의 뜻 그 자체였으니 불만은 없었다.
를르슈가 없는 세상은 평화를 향해 어느 시대 때보다 더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이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 올바른 과정이고 정의로운 결과인가? 그 대답에는 항상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딘가 한 구석이 석연치 않았다.
이 세상은 어딘가 고독해. 누구나 웃을 수 있고, 누구나 울 수도 있지만,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이 세상은 어딘가가 고독해.
그 텅빈 허무함에 대해서 스자쿠는 답을 찾아냈다. 가면을 벗고 마주한 나나리는 처음으로 스자쿠를 보고 웃어주었다.
“스자쿠 씨.”
를르슈와 다시 재회한 나나리는 모든 것을 이룬 얼굴로 스자쿠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휠체어를 조종하며 스자쿠의 곁으로 온 나나리는 그의 손에 들린 제로의 옷을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동안 죄송했어요. 스자쿠 씨는 저를 위해서 계속…….”
“아냐, 나나리.”
“사과 정도는 하게 해주세요.”
“……사과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야.”
“아니죠, 스자쿠 씨야말로 사과를 받아야죠. 저런 제멋대로인 오라버니와 저 때문에 계속, 계속 힘든 일을 하고 있잖아요. 부탁하기가 염치없지만 앞으로도 계속 같이 해줬으면 해요.”
“무슨 소리야, 나나리, 힘든 일이라니.”
나나리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가면을 쓰는 건 힘든 일이에요. 저는 사실, 제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조금만 생각하면 제로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만, 가면을 쓰고서 저를 계속 만나는 이상, 저도 제로에 대해서 알지 않아도 된다고 맘대로 생각했죠.”
“…….”
“오라버니의 일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저 미안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제 생각대로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잖아요?”
를르슈는 떠났고, 나나리는 남았다. 스자쿠는 여전히 제로의 가면을 쓴 채로 살아간다. 나나리는 스자쿠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얼결에 저보다 낮은 위치로 내려간 스자쿠는 나나리의 손이 제 뺨을 훑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울지 말아요, 스자쿠 씨.”
예전에 들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스자쿠는 제 뺨에 닿는 나나리의 손이 눈물을 닦는 것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의 체온은 눈물을 그치게 만드니까….”
스자쿠의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에, 나나리는 아무말 않고 스자쿠와 손을 잡고 있다가, 이내 둘 다 소리 없이 울고 말아버렸다.
를르슈는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돌아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힘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말해주세요.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어느 때보다 상냥한 미소로 웃어주면서, 그렇다면 든든하지, 하며 나나리를 믿어주었다. 나나리는 그렇게 를르슈를 보내주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제로의 옷으로 갈아입은 스자쿠는 부은 눈을 문질렀다. 가면을 쓸 생각을 하니 새삼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로는 한 명, 그 한 명으로 혼자서 이 세상을 다시 살아가는 것인데, 이전보다 더 외롭거나 고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가면을 쓰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그 고독함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를르슈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을 지워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스자쿠가 가지고 있는 해결하지 못한 수수께끼들을 를르슈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는 상상 같은 것이 언젠가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같은 것을 꿈꾸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말도 안되는 기적이지. 스자쿠는 그런 꿈을 꾸고 나면 혼자서 쓴웃음을 지었다.
전화는 계속해서 스자쿠의 방에 벨을 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스자쿠는 받지 않았다.
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