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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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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ial 7

Re:play / DOZI 2020.05.03 16:43 read.194 /

C.C.는 오늘 마리안느에게 노트를 한 권 선물 받았다.

하얀색 표지가 아직 때 하나 묻지 않게 깔끔한 노트였다. 표지를 넘겨서 안을 살피면 팔랑거리는 종이가 부드러웠다. 보기에도 비싸보였다. 단어 몇 개만 읽을 줄 아는 C.C.에게는 과한 선물이었다. 

“얼마야? 비싸보이는데.”

“레이디의 선물에 가격을 따지다니, 실례야, C.C.!”

마리안느는 떨떠름한 C.C.의 표정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볼을 톡톡 건드리면서 귀여워라, 하고서 귀여워했다. 새로 사귄 친구 마리안느는 이런 식으로 C.C.를 놀려댔다. 묘한 기분에 마리안느의 손에 노트를 쥐어주었다.

 

“나한테 이런 건 필요 없어.”

“왜? 일기장으로 써. 아니면 뭐, 가계부라던가. C.C.는 돈 계산은 철저하잖아?”

 

가계부? 처음 듣는 단어였다. C.C.의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읽은 마리안느는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가계부 쓰는 법 알려줄까? 이거 나름 가계부로 연습하면 장부 정리나 이런 거 할 때 유용하다구.”

“…….”

“연필이 어디 있더라, 아, 만년필도 좋아.”

 

마리안느는 식탁 위에 굴러다니는 잉크병에 만년필의 촉을 적신 다음에 C.C.가 돌려준 노트의 첫장에 거침없이 획을 그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에 마리안느는 만족한 듯 했다. C.C.도 그 옆에 다가가 그것을 구경하였다.

 

“C.C.와… 마리안느의…가계부! 좋아. 사실 칸을 쳐서 하는 것도 좋지만 난 색으로 구별하는 게 편해서. 빨간색 잉크가 있던가?”

 

마리안느의 이름 옆에 쓰여진 제 C.C.라는 말도 안되는 이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든지 다 잘하는 마리안느는 가로 세로 선을 반듯하게, 뭐 하나 대지 않고 쭉 긋더니 C.C.가 잘 모르는 글자를 적었다. 유려한 글씨체로 적힌 내용은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가 알기로는 이 집에 빨간색 잉크는 없어.”

“흐음…. C.C.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그럼 저녁에 장 보러 갈 때 사러가자!”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아마…. 마리안느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적었다. C.C.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랑 똑같은 숫자였다. 엉망으로 살림을 하는 듯 해도, 마리안느는 자기 수중의 돈이 얼마인지 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돈들을 전부 다 C.C.에게 맡긴다.

C.C.는 그저 마리안느와 계약한 마녀일 뿐인데, 마리안느는 C.C.를 믿고 있었다. 마녀는 사악하다는 일반론은 마리안느에게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C.C.의 비인간적인 상처 회복 속도에도 눈 하나 깜빡 안하고서 ‘멋지네!’라고 말해준 사람이었으니까.

 

“가계부는,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얼마나 쓰는지, 이렇게 적는거야.”

“…흐음. 그래서?”

“뭐, 돈을 얼마나 덜 써야하는지, 더 써도 되는지, 미래에 대해서 준비할 수 있지.”

“미래.”

 

미래라는 말은 C.C.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눈앞에 있는 이 노트가 얼마나 무쓸모한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마리안느의 옆에 쓰인 제 이름을 지우고 싶어졌다. 

그런 C.C.의 불안을 모르는지, 아니면 모른척 하는 것인지, 마리안느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진다거나, 갑자기 죽는다거나, 그렇다면 모두 의미없는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계속 이런걸 기록하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 걸 떠올릴 수 있거든.”

“써봤어?”

“가계부?”

“…뭐든.”

“가계부는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고, 굳이 써봤다고 하면 일기 정도겠지?”

“…….”

“C.C.의 일기장도 살까? 이 노트 좋지? 다른 색으로 살까?”

“돈을 막 쓰지 마, 마리안느.”

“C.C.에게 쓰는 건 아깝지 않아서 그래,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고 싶은 건 누구나 그렇잖아?”

 

마리안느는 C.C.의 앞머리를 넘겨주며 키득거렸다. 이마에는 흉측한 코드의 흔적이 있었다. 부끄럽진 않지만, 남들에게 보여줄 것은 못된다. C.C.가 고개를 돌리면 마리안느는 괜찮아, 하고 말했다.

 

“나는 C.C.에게 진짜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 이런 거라도 해주고 싶어.”

“…정이 많은 녀석이군.”

“후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C.C. 뿐일 거야.”

 

마리안느 람페르지는 C.C.가 새로 계약한 계약자였다. 그녀와 처음 계약을 맺었을 때에는 기어스를 쓸 수 있는 잠재력을 보았지만, 정작 살려내고 보니 마리안느는 기어스에 대해서 영 모르는 얼굴로 C.C.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마리안느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에 의해서 부모를 잃었지만 그들이 죽었을 때 슬프지 않았다고 그랬다. 하지만 주변에서 아름다운 그녀가 울고 있으면 달래주고 위로를 건넸기에 울었다. 가족들과의 추억이 남은 집을 팔아버리고 팬드래건의 변두리 마을에서, 예쁜 얼굴과 타고난 신체능력으로 먹고 사는 것에 지장 없이, 때로는 좀 곤란한 일도 겪으면서 잘 살던 중이었다. 

가끔씩 마리안느를 덮치는 이유 없는 공허함은 그녀를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까지 걸어가다가, 그 공허함에 빠져버린 그녀는 남자들에게 끌려가서 죽을 뻔했다. C.C.는 자신의 소원을 위해서 죽어가는 그녀를 도와주는 척, 기어스의 계약과 함께 살려냈다. 그러다가 본인도 기력이 다해 쓰러졌고, 다시 깨어났을 때에는 마리안느의 집에서 눈을 떴다. 

C.C.라는 해괴망측한 이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안느는 멋지네, 하고서 귀여운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마리안느가 가지고 있는 미모, 그리고 그녀의 매력은 그녀를 사람의 중심에 서게 했지만, 마리안느의 옆에 흔쾌히 다가갈 수 없는 힘을 발휘했다. 

 

‘이래저래 늘 친구가 없었는데, 나를 살려준 너라면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는걸.’

 

친구?

 

‘너라면 특별한 친구가 되어줄 것 같고.’

 

특별한 친구?

그 달콤한 말에 이끌려서 C.C.는 마리안느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노예 출신인 덕분에 집안일은 익숙하지만, 마리안느처럼 검이나 총 같은 것을 화려하게 다룬다거나, 홍차를 맛있게 우리는 것 같은 일들은 할 수 없다. 그렇게 말을 하면 마리안느는 C.C.에게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찻잎을 고르는 법, 물을 데우는 법, 온도를 어느 정도로 맞춰야하는지, 우유는 어떻게…. 

그런 걸 왜 알고 있어? 보기는 좋지만 보통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그런 기술들에 대해서 물어보면, 마리안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나는 기사거든, 이정도는 필수야. 마리안느가 말한 ‘기사’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면, 마리안느는 그건 나중에—라고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마리안느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예쁘장한 귀족 영애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하는 마리안느는, 그 영애가 연 다도회에서 영애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어 내린 마리안느는 평소라면 잘 차려입지 않는 하얀 옷과 장신구를 하고서, 아버지에게 물려 받았다는 검을 차고 있었다. C.C.는 저녁 장을 보러 나가던 길에 본 것이었다.

귀족 영애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마리안느를 보고 있었다. 마리안느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C.C.의 눈에는 지루함을 겨우 참아내고 웃는 것 같았다. 마리안느가 말한 기사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 사람의 검이자 방패가 되는 것이 기사다.

C.C.는 마리안느의 옆에 있는 귀족 영애의 자리가 탐이 났다. 오랜만에 드는 욕심이었다. 죽고 싶다는 소원 말고 다른 소원이 생길 줄은 몰랐다. 자신의 마음에 당황해서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 C.C.는 몇번이고 세수를 하고 손을 씻었다. 다 닦아내야만 했다. 그런 마음은 불순하고, 더럽다.

마리안느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그 날, 마리안느는 기사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상당히 지친 얼굴로 누구의 기사도 되지 않을거라고 말했다. 그 말에 조금 안심했다. 

 

마리안느는 나의 마리안느로 남아주는구나. 

누구의 기사도 되지 않은 채로 나만의 마리안느로.

 

그 마음은 물로 씻어내도 닦여지지 않아서, C.C.는 한동안 마리안느를 보면 울고 싶어지는걸 겨우 억눌렀다. 무슨 일 있었어? 마리안느는 평소보다 더 말이 없고 가라앉은 C.C.를 신경 쓰더니, 결국 선물을 준비했다면서 노트를 내밀었다.

그 노트에는 마리안느와 C.C.의 이름이 적혀있다. 가계부가 무엇인지 모르고, 앞으로 무슨 내용을 적어야할지 감이 잡히진 않았지만 두 이름이 같이 적혀있는 것, 그리고 그걸 마리안느가 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이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녁 장을 볼 때 빨간색 잉크를 기어이 산 마리안느는 가계부를 쓰는 법을 알려주었다. 오늘은 장을 봤으니까 빨간색 잉크도 지출에 적는거야. 빨간색으로! 마리안느의 말에 C.C.는 검은색 잉크를 찍었다가, 펜촉을 닦아서 다시 빨간색 잉크를 찍었다가를 왔다갔다 했다. 분주하고 엉성하게 움직이는 C.C.의 손은 결국 검은색 잉크병을 엎질러서 흰 노트에 검은색 얼룩이 남게 되었다.

 

“나름 멋있지 않아? 흰색도 좋긴 하지만 검은색도 좋은걸.”

 

마리안느는 크게 신경쓰지 말라고 하면서 C.C.와 함께 손을 씻었다. 검은색 잉크로 서로 손이 검게 물든 탓에, 몇번이고 다시 비누질을 해야만 했지만 결국 검은물은 다 빠지지 않았다. 

잉크에 젖은 노트를 창가에 두어 말려놓고, 얼마나 말랐는지 확인하려고 창가로 다가갔다.

 

“아….”

 

마리안느와 C.C.의 이름이 완전히 지워져있었다. 남아있는 것은 가계부라는 글자 뿐이었다. 수건으로 손을 대충 닦고 나온 마리안느도 C.C.의 옆에 서더니 ‘본질에 충실한 이름이 되었군!’라고 말했다. 

 

“이름이, 지워졌어….”

 

너와 나의 이름이, 라는 말을 겨우 삼켰다. 마리안느는 뭔가 골똘히 고민하더니, 겨우 펜 끝에 묻어있는 검은색 잉크로 ‘가계부’라는 단어 밑에 글자를 적었다. 

 

‘가계부

-C.C.의’

 

“이제 됐지? 너무 울 것 같은 얼굴 하지 마, C.C..”

 

노트야 나중에 다시 사면 되니까. 마리안느는 다시 노트를 창가에 말려두었다. 

이후, 노트에서 떨어진 잉크에 창틀에는 검은 얼룩이 생겼다. 마리안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C.C.는 틈이 나면 그 창틀의 얼룩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오히려 새카만 자국이 옅게 번져서 더 엉망이 되고 말았다. 마리안느가 나이트 오브 식스가 될 무렵에는 C.C.도 그 창틀에서 벗어났고, 가계부는 마지막 한 장을 남겨두고서 쓸 일이 없어졌다.

 

그 노트,

마리안느가 나에게 선물한 노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노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망토를 이제 막 풀고 있는 마리안느는 C.C.의 말을 흘려듣다가 그녀가 묻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C.C.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마리안느의 눈치를 보며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머뭇거리는 C.C.의 모습에 마리안느는 노트, 노트, 하고 중얼거리다가 자신이 예전에 C.C.에게 선물했던 그 노트를 떠올렸다. 

 

“C.C.가 가지고 있지 않아?”

“아니, 나한테는 없어.”

“그래? 그럼 나도 모르지. C.C. 거잖아?”

 

마리안느는 피곤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망토를 아무 의자에나 걸쳐둔 마리안느는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 욕실 앞에서 마리안느가 마구잡이로 벗어둔 옷들을 들고 세탁실로 갔다.

나이트 오브 식스가 된 마리안느는 최근 들어 더 바빠지면서 C.C.와 얼굴을 마주하는 날이 적어졌다. 사흘에 한 번 보는 것이면 많이 보는 거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마리안느는 바빠졌다. 하지만 C.C.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귀여운 내 친구, 너무 외로워 하지마. C.C.를 귀여워하면서, 마리안느는 세상 밖으로 나아갔다.

C.C. 자신도 언젠가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어스의 계약이 맺어졌다고 하더라도, 마리안느에게는 소질이 없다. 그녀는 기어스를 쓸 수 없으니 이 시간은 무의미했다. 그렇지만 마리안느의 귀여운 친구로 보내는 시간은 C.C.의 발을 그 집에 묶어두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그때보다 더 행복하고 부드럽고 포근하고…. C.C.의 부족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리안느의 옆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것들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으면 C.C.는 더 이상의 소원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시간이 점점 더 흐를수록, 마리안느도 그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때가 견디기 힘들정도로 슬펐다. 마리안느도 늙을 것이고, 언젠가 죽는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다. 누구의 기사도 되지 않겠다고 했던 마리안느는 황제의 기사가 되어버렸다. 스스로의 말을 져버릴 정도로 마리안느는 무언가에 의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에 갇혀, 성장할 수 없는 C.C.는 그녀의 흔들림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이트 오브 식스, 서민 출신으로 황제의 기사에 오른, 나이트메어프레임 3세대의 테스트 파일럿, 아름다운 얼굴, 지지 않는 박력. 마리안느를 설명하는 많은 말들이 세상에 떠돌았다. 그 사이에는 ‘C.C.의 친구’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혼자만의 감정, 혼자만의 친구, 혼자인 나.

C.C.는 세탁실에 쌓여있는 옷가지들을 다 정리했다. 내일 날씨가 맑으면 빨래를 할 생각이 들었다. 마리안느와 같이 이불 빨래를 하던 때가 떠올라서 작게 미소가 지어졌지만, 이내 그럴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 느껴져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런 것이 일희일비할 정도로 어리지도 않은데, 어째서? 어째서일까. 원래부터 나는 혼자인데. 

마리안느의 다정함에 너무 취해있던걸까.

세탁실을 나오면서 마리안느가 씻고 있을 욕실 앞으로 갔다. 욕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마리안느의 물기에 젖은 슬리퍼가 현관 앞에서 나동그라져 있었다. 드레스 룸에 걸린 새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복이 통째로 사라졌다. 익숙한 일이었다. 나이트 오브 식스가 된 이후부터 마리안느는 급하게 황궁에 불려가는 일도 잦았고, 비상 소집이라는 이유로도 나간 적이 많았다. 대체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다녀올게, C.C.!’라고 말하는 그녀가 오늘은 그럴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꽉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를 잠그면서, C.C.는 한숨을 쉬었다. 욕실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사라지는 수증기 사이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부터 이런 추한 얼굴로 마리안느를 보고 있었지?

 

어떤 반란 사건을 제압한 마리안느는 나이트 오브 원의 자리 대신에 황제의 다섯 번째 아내가 되었다. 마리안느가 결혼하겠다고 이야기를 밝혔을 때, C.C.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람은 변한다. 마리안느도 변한다. 이건 당연한 일이지만, 왜 이렇게 두려운지 알 수가 없었다. 떨리는 두 손을 뒤로 감추면서 마리안느에게 왜 결혼을 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마리안느가 가지고 있는 그 쓸쓸함을 오랜만에 보았다. 

 

“더 위로 간다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아무것도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 달라지는 건 없을거야.”

 

거짓말쟁이. 넌 계속 달라지고 있어. 한결 같지 않아. 나를 이제 봐주지 않잖아. 마리안느의 귀여운 친구라고 말해주지 않잖아. 너는 나를 이렇게 매달리게 만들어. 나를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변하고 달라지는 너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는 내 자신이 이상해지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너는 나를 버리고 갈 거면서!

말도 안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은 입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C.C.는 마리안느의 손가락이 자기 뺨을 만지는 것에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사람의 체온은 눈물을 그치게 만들거든.”

“…….”

“내가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

“…싫지 않아.”

 

사실은 싫어, 마리안느.

 

“내가 황제와 결혼하고 나면, C.C.도 본격적으로 기어스 향단에 대해서 알게 될거야. 나쁘지 않은 조건이잖아? 나는 너와 계약을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는데…. 이제서야 계약자 노릇을 하게 되었네.”

“나를 위해서 결혼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

 

C.C.는 말끝이 떨리는걸 겨우 감추었다. 마리안느는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맞아, 모두 내 이기심에 하는 거야. 있잖아, 나 말이야.”

“응?”

“계속 이상했지?”

 

마리안느는 C.C.를 돌아보며 웃었다. 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마리안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계속 이상해서, C.C.를 만나고도 변하지 않아서, 이게 내 운명이라면 너무 비참해.”

“…….”

“나는 계속 죽어있던거야.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고, 사람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도,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게 느꼈던거야.”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래도 C.C.는 살아있어. 얼마나 멋진 친구인지!”

 

마리안느는 C.C.를 끌어안았다. 작게 떨리던 두 주먹도 떨림을 멈추고 마리안느의 호흡에 맞춰서 모든 것이 멈추었다가 흘렀다를 반복했다. C.C.를 끌어안은 마리안느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곧 떨어지는 마리안느의 체온에 C.C.는 아쉬움과 함께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용기를 내어 입밖으로 꺼냈다.

 

“마리안느, 내 진짜 이름……알려줄까?”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지옥 같은 영생(永生)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리안느가 C.C.에게 얼마나 특별한지 알았으면 했다.

마리안느는 C.C.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그 반짝이는 눈망울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괜찮아.”

 

C.C.의 상상 속에서는 마리안느는 언제나 그 활기찬 목소리로, C.C.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 속의 마리안느는 부드럽게 거절하고 있었다.

 

“C.C.는 C.C.니까. 그걸로 됐어.”

 

마리안느는 처음부터 C.C.를 보고 있지 않았다는 걸, C.C.는 그제야 깨달았다. 

 

 * * *

 

오랜만에 마리안느를 떠올렸다.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친구. 그 친구를 부정하고 없애버린 그 장본인이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C.C.의 기준에서 L.L.는 아직도 를르슈, 즉 사람이었다. 그는 이니셜로 불리기엔 너무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C.C. 역시 마리안느를 다시 찾을 정도의 미련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감정도 언젠가 빛을 잃고서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채로, 또 다시 C.C.만이 남아 세상을 떠돌 것이다.

소원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이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엔 자기가 죽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에 누군가에게 이 운명을 떠넘겨야 한다는 것도 괴로웠지만, 지금은 같이 살아가주는 사람이 있음에도 소원은 여전했고, 그 소원을 이루고 싶어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여전했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변하는데…

나는 변하지 않아.

 

자고 있는 를르슈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그가 빈 껍데기로 살아가던 시절에 들었던 습관이었다. 그때의 를르슈는 악몽을 자주 꾸어서, C.C.가 가끔씩 살피러 오면 늘 끙끙 앓는 소리와 함께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넘기고 따뜻한 손으로 괜찮다고 다독여주면 금방 나아졌다.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습관에 기대하며 를르슈의 머리를 넘겨주다가, 그의 하얀 이마를 보던 C.C.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정말 마리안느와 닮았어….

를르슈의 호의를 이용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건 얼마나 비겁해보일까? 그녀에게서 보답받지 못했던 마음을 그에게서 찾고 있다고 생각하면 를르슈는 뭐라고 생각할까? 다정하고 상냥한 를르슈는 그럴 수도 있으니 마음껏 이용하라고 하겠지. 

를르슈의 손을 잡은 C.C.는 소리 없이 기도를 했다. 

 

그가 나쁜 꿈을 꾸지 않게 해주세요.

나를 정말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나를 두고 가지 않기를……,


한 번 죽었던 그를 살려냈을 때를 떠올린다. 

V.V.의 손에서 죽었던 마리안느를 C의 세계에서 조우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너도 또 나를 버리고 가겠지? 그래도 살아있다면 더는 외롭지 않을거야. 빈 껍데기의 를르슈를 끌어안고서 C.C.는 그렇게 말했었다.

똑같은 사랑을 돌려받을 수 없더라도, 살아있는 존재로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영생을 살아가는 저주를 받은 C.C.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기억을 되찾으면 너는 나를 두고 가겠지만, 그 짧은 순간으로도 나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를르슈는 C.C.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순간 C.C.는 자신에게 기어스의 힘이 돌아왔나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를르슈가 저를 고를 수가 없을 테니까. 그에게는 소중한 것이 많았다. 나나리라던가, 흑의 기사단이나, 제로……. 말도 안되는 이니셜 이름을 지으면서 C.C.와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믿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죽어있던 마음이 C.C.에게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속아서 넘어가라고 종용했다. 

계속 되었던 사랑의 패배에 지쳐있었다. 를르슈가 내주는 품은 늘 따뜻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좋은 것은 늘 좋지만은 않다. ‘그때’와 비교하게 된다. 이 시간의 끝은 또 얼마나 비참할까. 

 

를르슈, 너는 언제 돌아갈거야?

내가 죽고 나서 돌아갔으면. 

 

C.C.는 를르슈가 두고 온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가 사랑하는 나나리, 그가 만든 제로와 흑의 기사단. 모두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들은 를르슈가 C.C.의 손을 잡으면서 목표도, 목적도 없이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그의 안에서 인간으로서 가졌던 감정들이 다 마무리 되는 것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고 를르슈는 떠날 지도 모른다. V.V.는 그 시간을 견뎌내게 만드는 진짜 힘은 오로지 샤를 지 브리타니아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C.C.도 비슷하게 를르슈를 그녀의 지원으로 삼았다. 

를르슈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를르슈에게는 진짜 친구가 있었으니, 가짜인 자신이 그걸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쿠루루기 스자쿠. 

 

C.C.는 를르슈가 자신의 손을 잡을 때 들었던 약간의 기쁨은, 쿠루루기 스자쿠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무너졌다. 그와 를르슈 사이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감정들이 있다. 우정과 애정, 호의와 적의,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있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C.C.가 끊어낼 수도 없으며, 끼어들 수도 없었다. 

 

나는 쿠루루기 스자쿠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너에게 두 번째, 세 번째…… 몇 번째로 소중한 것이 될까, 를르슈?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으로 물었다. 자고 있는 를르슈는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