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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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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eat 4

Re:play / DOZI 2020.05.28 11:05 read.125 /

약속을 한 첫날에, 스자쿠는 해가 질 때까지 L.L.와 C.C. 사이에 앉아서 노을을 바라보다 갔다. 그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를 한 것은 L.L. 뿐이었다. 어색한 대화의 이어짐에도 스자쿠는 길게 이야기 하지 않고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면 L.L.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L.L.에게서 ‘그럼 일주일 후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지’라는 말로 둘러대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는 쿠루루기 스자쿠다웠다고 할 수 있었다.

해가 다 지고 나서 스자쿠는 이제 집에 가야한다고 말했다. 데려다 줄까? 걱정스러운 L.L.의 말에 C.C.가 결국 적당히 하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스자쿠킄 두 사람의 모습에 해맑은 모습으로 웃었다. 

 

“를르슈, 우리집 알아?”

“아, 아니. 모르지만, 그래도.”

 

즉답을 하면 스자쿠는 또 애매한 표정으로 L.L.를 바라보다가 혼자서 내려가겠다고 했다. 익숙하거든. 안 넘어질 자신도 있고. 근데 를르슈는 넘어질 것 같네. 가벼운 조롱이 있었지만, 어린애 혼자서 해가 다 진 산을 내려간다는 게 익숙하다는 점이 마음이 쓰여서 무어라 크게 대꾸도 하지 못한 채로 스자쿠를 보내버렸다. 그럼 내일 봐! 그렇게 쾌활하게 외치는 것에 더 따질 수도 없었다. 

스자쿠가 내려가고 나서, 이제 텅 비어버린 통조림 주머니를 들여다본 C.C.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이야기 좀 해보실까, 를르슈 람페르지 씨?”

 

그것은 L.L.의 규칙 위반 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C.C.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L.L.는 잘못한 어린애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C.C.의 말을 들었다. 

 

“를르슈라고 자기 소개한 건 어디서 나온 거지?”

“어, 어쩔 수 없었어. 스자쿠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순 없는걸.”

“불가항력이다 이거군. 그게 쿠루루기 스자쿠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본인도 자기 이름이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말했어. 그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네가 잘 알거라고 생각하는데. 너야말로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스자쿠와 계약이라도 한 거 아니야?”

“이젠 내 탓을 하시는군, 그래. 내 계약자는 네가 마지막이야. 그래서 내가 그 꼴을 당하면서 너를 살려낸거야!”

“계약자가 나 밖에 없어서 살려냈다는 거짓말까지!”

“그래, 너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었어!”

“외로웠다며!”

“L.L.! 몇번이고 말하지만 너 때문에 나는 소원을 못 이루고 이제껏 살아있어! 너도 그 책임을 느껴줬으면 해!”

“살려낸 사람이 너잖아!”

“살려냈다고 살아난 너도 문제잖아!”

 

악다구니 밖에 남지 않은 싸움에서 L.L.와 C.C.는 씩씩거리다가, C.C.의 텅 빈 주머니자루로 얼굴을 맞은 L.L.가 ‘망할 마녀가!’라는 욕과 함께 C.C.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싸움은 몸싸움으로 번졌다. L.L.의 따귀에 화가 난 C.C.가 주먹질로 L.L.를 때려눕혔다. 전직 노예의 힘은 전직 황제의 힘보다 셌기 때문에 L.L.는 땅바닥에 한 번 구르고 나서야, 열이 올랐던 머리가 팍 식고 말았다.

 

“이렇게 싸워서 얻는 게 뭐야, 좀 진정해봐.”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너는 여자가 무슨 힘이 그렇게 세서….”

“그러는 너는 남자가 그렇게 약해 빠져서.”

“적당히 해.”

“하나도 안 무서워.”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L.L.를 일으켜 세운 C.C.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를르슈라는 이름을 꺼낸 이유가 뭐야?”

“너는 왜 거기에 자꾸 집착을 해? 너도 나한테 네 진짜 이름 알려줬으면서.”

“너는 내 계약자였잖아. 계약자도 아닌 애한테 자기 진짜 이름을 술술 밝히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

“쿠루루기 스자쿠 앞에서는 맥을 못추리는 군. 예나, 지금이나.”

“그래. 그런걸로 해. 이제 너도 말해, 왜 그렇게 집착해? 걔가 스자쿠인지 아닌지는, 그저 우연일지도 모르는데.”

“우연? 너는 그 정도로 닮은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C.C.는 팔짱을 낀 채로 L.L.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걔는 쿠루루기 스자쿠야.”

“……죽은 사람은 다시 살려낼 수 없다며. 코드도, 기어스도 가지지 않는 이상.”

“맞아, 쿠루루기 스자쿠는 코드도, 기어스도 없지만, 다시 살아났어.”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있어.”

 

C.C.의 눈은 매섭게 빛이 났다. 밤하늘의 별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날카롭게 다듬어져있었다. 그녀는 그 진실 앞에서 단호해보였다. 

 

“그 애는 기어스의 조각이야.”

 

그 말투 또한 칼 같아서, L.L.가 그 진실을 꺾기에는 힘들어보였다. 그녀의 단언에 L.L.는 잠시 목이 메였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까지 거쳐온 긴 시간 동안, L.L.는 기어스를 쓸 수 있는 대가인지, 기어스의 조각에 대해서는 하나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회수되어 C의 세계가 복구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C.C.가 ‘기어스의 조각이다’라고 말하면 기어스의 조각으로 여겼고, ‘회수했다’라고 말하면 회수가 된 것으로 알았다. 

그런 과정 속에서 써왔던 절대 복종의 기어스로 사람을 죽여도 크게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기어스가 가지고 올 혼란에서 오는 희생보다는 자신이 죽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기어스가 불러오는 기적의 이면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L.L.는 그러한 일들을 망설이지 않았다. 할라와 아자드를 죽였던 이후부터 L.L.의 삶은 보통 인간의 삶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C.C.의 말을 믿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애는 쿠루루기 스자쿠, 기어스의 조각이다. 기어스의 조각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되며, 기어스 그 자체가 무엇으로 변질되어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C.C. 뿐이다. 그걸 믿는 것은 오로지 L.L.의 몫이었다. 

그 몫을 다해야하는데, L.L.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의심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어.”

“…….”

“쿠루루기 스자쿠는 기어스를 미워하면 미워했지, 코드를 받을 정도로 기어스를 계약할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기어스 뿐이다.”

“아직까진 그건 너의 가설에 불과해.”

“증명해 볼까?”

 

그런 C.C.의 말이 괜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L.L.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에 있던 C.C.의 잘 개켜진 담요를 집어 던졌다. 그 담요를 받아낸 C.C.는 거봐,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도 나름의 인정도 있고,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한 빚도 있으니까 일주일 정도 유예한거야.”

“일주일이 그래서…!”

“그래. 회수할 거지, L.L.?”

“…….”

“회수해야 해.”

“……일주일 있다가.”

“그럴 줄 알았다.”

 

너는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약하고 물러터졌거든. C.C.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L.L.는 무어라 한마디 더 덧붙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속이 지금 잠을 잘 때가 아니라 밥을 먹을 때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L.L.는 담요를 뒤집어 쓰고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C.C.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때의 버릇이었다. 

자는 척을 하다가 진짜로 잠의 세계로 달아나버린 L.L.의 뒷모습을 보던 C.C.는 혀를 차며 자기 담요를 펼치고 그 위에 누웠다. 늦봄와 초여름 사이의 바람이 산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에 생각지도 못한 풍류를 느꼈다. 

본인들의 생활은 살인과 휴식의 반복이기 때문에 많이 지쳐있던 것은 사실이라, 바람의 풍류를 즐기기에는 C.C.도 지쳐있었다. 알게 모르게 쌓아온 감정들이 오늘 L.L.의 손찌검으로 다시 한 번 터져버린 느낌이었다. 그것들을 다시 닫아서 쌓아두려니 피곤했다.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남자다. 

 

L.L.는 다음날 아침에 주린 배를 쥐어잡고서 일어났다. 꼬르르륵. 길게 이어지는 소리에 스스로도 한숨이 나왔다. 최근 몇년 사이에 요리하는 재미도 잃어버린 L.L.는 어떻게 해도 숨이 붙어있는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굴리며 아무거나 주워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던 탓에, 몸은 더 형편없게 마르고 있으며, 식욕은 날이 갈수록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왕성해졌다. 

제때 먹지 못하니 먹을 수 있을 때 닥치는대로 먹는 버릇도 생겨서 곤란했다. 이렇게 새벽에 가까운 아침에 배가 고파서 깨는 경우도 허다했다. 젠장. 배고프다. L.L.는 입밖으로 중얼거리면서 텅 빈 통조림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으나 빈속에 할라피뇨를 들이부을 만큼의 마조히스트는 아니었기에 먹을 순 없었다.

자고 있는 C.C.를 깨워서 마을로 내려가 뭔가 먹을까 했지만, 자연스럽게 그녀를 챙기고 있는 스스로에게 약간의 자괴감이 들어서 깨울 힘도 나지 않았다.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죽을 지경이 되면 C.C.가 이때를 노렸다는 듯이 할리피뇨 통조림을 들이부을 것이 뻔해서, L.L.는 현기증이 나는 머리를 꾹꾹 누르면서 자리에 앉았다.

 

“어, 벌써 일어났네. 어제는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들리는 어린 목소리에 L.L.는 화들짝 놀랐다. 벌떡 일어나서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면 공터가 막 보이기 시작하는, 아직은 어둑한 하늘 아래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 입구 쪽이었다. 

 

“스자쿠?”

“응!”

“아직 해도 다 안 떴는데….”

 

L.L.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스자쿠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신경 쓰는 사람도 없어!”

“아니, 내가 걱정이 되니까.”

 

이번엔 L.L.의 말에 스자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서는 약간 울컥한듯, 뺨을 붉히면서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모습은 왜인지 모르게 L.L.가 알던 스자쿠와 똑같아서 L.L.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내일 다시 보자고 했으니까, 눈 뜨자마자 왔어.”

“흐음, 감동이네.”

 

스자쿠의 행동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어린 아이가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등산을 해도 말리지 않는 부모, 그런 부모를 내버려두는 마을, 방치에 익숙한 스자쿠 같은 것은 L.L.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먹을 거 있어?”

“아침도 안 먹고 온거야?”

“응…. 배고파서 빨리 왔어.”

 

아침까지 거르고 올 정도로 ‘를르슈’를 찾으러 오는 스자쿠는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어린애라고 할 수 없는 그 쓸쓸함이 L.L.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스자쿠에게 텅 빈 통조림 주머니를 내보이자 스자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근데 나도 배고프거든.”

 

어제부터 하나도 못 먹었지 뭐야. 스자쿠에게 말하자마자 L.L.의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꽤나 유쾌하게 비웃어도 될 법한 큰 소리였음에도, 그 다음에는 스자쿠의 차례였다. 스자쿠의 꼬르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자쿠는 배 부근을 만지더니 한숨을 쉬었다.

“나도 엄청 배고파.”

L.L.가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것들을 해결하기 이전에 우선 먹여야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의 안에서 아직 를르슈의 습성이 남아있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었다. L.L.는 담요를 배낭 안에 넣어두고 자고 있는 C.C.를 깨웠다. 새벽녘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C.C.는 귀찮다는 듯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뭐야, 쿠루루기 스자쿠. 아침부터….”

 

벌써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면서 C.C.는 중얼거렸다. L.L.의 뒤에 몰래 숨은 스자쿠는 안녕, 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이제 와서 귀여운 척 하기는.”

“귀여웠어?”

“귀여운 척.”

 

스자쿠와 C.C.의 만담 같은 대화를 들으면서, L.L.는 C.C.를 깨운 이유를 설명했다.

 

“밥 먹으러 가자.”

“밥?”

“배고파.”

“웬일이야, 배고프다고 깨우고. 역시….”

 

C.C.는 스자쿠 쪽을 힐끔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요를 곱게 접는 C.C.의 모습에 L.L.는 스자쿠에게 금방 산 아래로 내려가서 밥을 먹으러 가자고 그랬다. 아는 식당이 있다면 알려주면 좋겠는데, 하고 입을 열었을 때 스자쿠는 L.L.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렴풋한 거절의 분위기에 의아한듯이 쳐다보면 스자쿠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나는 밖에서 밥 못 먹어.”

“왜? 부모님이 외식하는 걸 안 좋아해?”

“아니, 그, 별로. 내려가고 싶지 않아.”

“내려가면 안 돼?”

“그게 아니라……. 그냥,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둘이서 밥 먹고 와.”

“그럼 스자쿠는? 배고프잖아.”

“괜찮아.”

 

익숙하거든, 이라는 말이 이어지자 이번엔 C.C.도 놀란 듯이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괜찮아, 정말로, 하고서 두 사람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L.L.는 미간을 찌푸리며 스자쿠의 팔을 붙잡았다. 끌고 내려가려고 하자 스자쿠는 거세게 팔을 내뺐다.

 

“괜찮다니까! 안 내려 갈거야!”

“대체 왜?! 배고프잖아! 돈이 없으면 내가 사줄 테니까!”

“사, 상관 없어! 내려가기 싫어!”

 

스자쿠는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세 사람이 만들었던 원에서 달아났다. C.C.는 그런 스자쿠를 보더니 알겠다고 하면서 L.L.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우리끼리 갔다 오자. 그러고서는 스자쿠에게 말했다.

 

“우리 짐 좀 봐줄 수 있어? 뭐, 훔쳐도 내다 팔 건 없어. 괜한 헛수고일걸.”

“그런 비겁한 짓은 안 해! 짐보기 정도는 해줄 수 있거든?”

“그래. 그럼 부탁할게.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어.”

 

뭐가 오래 걸리는데? 이번엔 L.L.가 C.C.에게 물었다. C.C.는 엉망인 머리를 쓱쓱 만지다가 ‘목욕하고 싶거든’이라고 말했다. 어제까진 살벌하게 싸워놓고 나서 씻고 싶다고 말하는 태평한 말에 L.L.는 앓는 소리를 냈다.

 

“금방 돌아올게. 스자쿠,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스자쿠는 그들의 짐 옆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서 다리를 까닥거리다가 고민에 빠졌다. 

 

“엄청 많았는데 갑자기 말하려니까 잘 생각이 안 나.”

 

아이다운 귀여운 말에 L.L.는 뭐든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스자쿠는 더 고민을 하면서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피자는 어때?”

“그건 네가 먹고 싶은 거잖아.”

“피자? 나 피자 안 먹어봤어. 피자 먹을래!”

“……피자를 안 먹어봤어?”

“응. 근데 그거지? 동그랗고 엄청 커다란 빵!”

 

어쩜 이런 대참사가 다 있나. C.C.는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 비틀거렸다. 그 나이를 먹도록 피자 한 번 먹어보지 못했다니 불쌍하기 짝이 없군. 중얼중얼거리면서 C.C.는 허어, 하고서 깊게 탄식하기도 했다. 그녀도 배가 고파서 돌아버릴 지경이라고 판단한 L.L.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C.C.의 팔을 붙잡고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자쿠에게 금방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열 살짜리가 피자를 못 먹어볼 수도 있지, 왜 그렇게 말을 해?”

“아, 모르겠어? 설마 네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뭘?”

“…쿠루루기 스자쿠, 지금 제대로 된 부모 밑에서 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

 

C.C.는 앞질러 가던 L.L.의 등을 스쳐지나가면서 말했다. 

 

“이 나라는 전쟁 직후라고 하더라도 부모가 욕심 내면 외식으로 피자 정도는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안정된 곳이야. 그런데도 피자 한 번 먹어보지 않았다고?”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

“그렇지? 쿠루루기 집안에서, 쿠루루기 스자쿠가 어떤 인물일지 모르진 않을거야. 악명을 떨쳤으면 떨칠 그 이름을 아이한테 붙여주는 이유랑….”

“…….”

“어제 쿠루루기 스자쿠가 한 말도 신경 쓰여.”

 

C.C.는 성큼성큼 걸었다. L.L.가 생각에 빠져 걷느라 한 바탕 구른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C.C.의 조롱 속에서 L.L.는 흙투성이의 옷을 털어냈다. 산을 내려오고,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고, 시내 입구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가게의 유리창으로 보이는 자신의 꼴을 보고서 L.L.는 먹는 것 이전에 사람 모양을 갖추자고 C.C.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C.C.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씻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럼 씻는 게 먼저지.”

“…배고프니까 내려온거잖아.”

“하, 설마 네 사정 먼저 해결하고 움직일 줄 알았어?”

“너 어제부터 왜 자꾸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이야?”

 

이번엔 C.C.가 말문이 막혔다. 그 모습에 L.L.는 기가 막혔다.

 

“역시 일부러 그랬군.”

 

C.C.는 대답 대신에 눈 앞에 보이는 건물에 들어갔다. 혼자서 어딜 가! L.L.는 뒤따라 갔다가 그곳이 대중 목욕탕이라는 것에 완전히 질리고 말았다. C.C.의 빨리 처리하라는 눈짓에 L.L.는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떴다. 

기어스의 효과는 완벽했다. 며칠 동안 꼬질꼬질했던 몸을 닦고 나오니 개운했다.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르는 커피 우유와 딸기 우유를 들고 있던 C.C.는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며 L.L.에게 내밀었다. 딸기 우유를 고른 L.L.는 이것이 C.C.의 사과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즉 그녀도 지금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괜한 짓이 L.L.에게 짜증을 내는 것인지, 아니면 스자쿠와 관련된 일인지 감이 안잡혀서 문제였다. 또 그것을 물어보기엔 번거로워서 L.L.는 목욕탕 근처를 서성이다가 음식점이 줄을 지어 선 골목을 발견하고서는 그곳으로 향했다.

 

“피자 사는거지?”

“그래.”

 

이것은 L.L.가 C.C.에게 화해에 응하겠다는 하나의 신호이기도 했다. C.C.는 좀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L.L.의 뒤를 따랐다. 옷 가게에서 멀쩡한 옷도 기어스로 구매하고—거의 강탈이었지만— 돈 한 푼 없이 피자를 라지 사이즈로 두 판과 콜라를 사서 돌아오기도 했다.

마을에 막 내려왔을 때보다 늘어버린 짐에 L.L.는 그것들을 들고 산을 타야한다는 생각에 잠시 머리가 아찔했다. 긴 세월을 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체력이 상상 이상으로 저질이라는 것이었다. 기어스야말로 L.L.의 시간에 있어서 신의 한수였다. 

결국 숨을 헐떡거리는 L.L.의 손에서 피자를 빼앗아 든 것은 C.C.의 본능이었다. 가벼워진 두 손에 L.L.는 주변 나무를 짚으면서 천천히 좀 가자고 말했지만 C.C.는 피자가 식는다며 속도를 더 빨리할 뿐이었다. 저 마녀 자식! L.L.는 속으로 욕을 했음에도 C.C.가 노려보는 시선에 말없이 발을 최대한 빨리 움직이려고 애를 썼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온 C.C.와 L.L.를 반기는 것은 짐 옆에서 자고 있는 따끈따끈한 스자쿠였다. C.C.는 평평한 땅에 담요를 피크닉 매트처럼 펼쳤다. 피자 박스를 풀어 펼쳤고, 한 사람당 한 병의 커다란 콜라를 자리에 두고서 식사 준비를 마쳤다. L.L.는 땀에 젖은 손끝을 닦고 나서 스자쿠의 머리를 살짝 만졌다.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었다. 괜한 감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꼴불견이다. L.L.는 아이의 높은 체온으로 따뜻해진 손으로 스자쿠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스자쿠, 나 왔어.”

“……으음, 를르슈?”

“응. 피자 사왔어. 먹어.”

 

C.C.는 L.L.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는 피자를 벌써 한 조각 떼어내서 먹고 있었다. 피자? 스자쿠는 멍하니 L.L.의 말을 따라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C.C.가 차려놓은 그 담요에 달려간 스자쿠는 탄성을 터뜨렸다.

 

“우와, 나 피자 처음 먹어봐!”

“정말, 인생 헛산 녀석이군.”

“를르슈, C.C., 고마워!”

“그래, 맛있게 먹어.”

 

어느새 L.L.는 스자쿠의 옆에 앉았다. 셋이서 하는 식사가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L.L.는 피자를 와구와구 먹고 있는 스자쿠가 감격을 받은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가, 콜라를 마시면서 켁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오려다가도 굳어버렸다. 그 기시감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C.C.는 굳어버린 L.L.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차면서 피자를 먹었다. 그는 여전히 를르슈였다. L.L.가 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C.C.만의 생각이길 바라면서, C.C.는 속모를 얼굴로 피자를 한 판을 혼자서 다 먹었다. 

C.C.의 기예에 가까운 피자 흡입에 스자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L.L.와 피자 한 판을 나눠먹었다. 그리고 나서 L.L.가 먹는 적은 양에 스자쿠는 더 놀랐다. 결국 피자 한 판의 삼분의 이는 스자쿠가, 나머지는 L.L.가 먹었다. 

 

“콜라도 처음 마셔봤어! 목구멍이 엄청 따가워. 근데 재미있어.”

“피자와 콜라도 좋고, 맥주도 나쁘지 않은 조합이지. 맥주가 좀 더 비싸지만.”

“맥주? 그건 뭐야?”

“술이다.”

“나도 마실 수 있어?”

“당연히 안 되지.”

“왜 당연히 안 돼?”

“넌 어린애잖아.”

 

C.C.의 피자 예찬론에 맥주 이야기가 나오자 L.L.는 칼같이 스자쿠를 음주로부터 보호했다. 어린애라서 술을 못 마셔? 스자쿠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따라했다.

 

“당연한 거잖아. 스자쿠,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어?”

“…고, 공부는 안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린애라고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건 너무해. C.C., 맥주는 콜라처럼 맛있지?”

“콜라보다 더 맛있지.”

 

C.C.의 부추기는 말에 L.L.가 째려보았다. 스자쿠는 아쉬운 듯이 ‘나도 술 마시고 싶다’라고 중얼거렸다. 무서운 소리였다. 

 

“근데 피자는 진짜 맛있다. 뭐랑 먹어도 맛있을 거 같아.”

“뭘 아는구나, 쿠루루기 스자쿠.”

 

그리고 세 사람은 피자 박스를 치우고서, 머리를 맞대고서 담요 위에서 낮잠을 잤다. 햇살은 길어져서 저녁이 될 때까지 세 사람을 포근하게 감쌌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기 시작하자, L.L.는 스자쿠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스자쿠, 집에 안 가도 돼?”

“가야겠지? 근데 가기 싫다….”

 

집에 가면 나 혼자야.

스자쿠의 처음 나온 자기 이야기에 L.L.는 당황하지 않은 척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자쿠는 L.L.의 말투가 웃긴지 작은 소리로 풉, 하고 웃다가 결국 배를 잡고 웃었다. 너는 사람 무안하게…! L.L.의 이어지는 말에 C.C.도 풉, 하고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심상 크게 웃진 않았다. 그 양심의 매너가 L.L.의 자존심에 금을 가게 했지만 말이다. 

 

“를르슈는 왜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아? 친구랑 닮아서?”

“어, 어린애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게 당연히 신경 쓰이니까.”

“어떤 표정?”

“외로워 보이는 표정 같은 거…. 너는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아? 맨날 그런 뚱한 얼굴 하고 있으면 친구도 안 생긴다.”

 

마치 과거의 를르슈가 모두에게서 벽을 세우고 가면을 쓰고 누구도 믿지 않았던 때처럼. L.L.는 수치를 무릅쓰고 스자쿠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스자쿠는 웃는 것을 멈추고서 무언가 허를 찔린 듯 굳어있었다. 그러다가 스자쿠는 궁금한 듯이 순진하게 L.L.에게 물었다.

 

“를르슈는 어떻게 알았어?”

“뭘?”

“나 외로운거.”

 

그건 쿠루루기 스자쿠가 지을 표정이 아니니까. 하지만 더 큰 스자쿠는 늘 그런 얼굴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미소가 더 천진난만하게 기억에 남은 듯 했다. 그런 전말을 알려주기에는 지금의 스자쿠에게는 쓸데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C.C.에게도 좋은 놀림거리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같은 말로 조롱당하고 싶진 않았다. 

 

“어린애는 웃는 게 디폴트야.”

“디폴트가 뭐야?”

“처음 설정이라는 뜻이야.”

“그럼 를르슈가 보기엔 나, 어린애 같지 않아?”

“뭐라는 거야, 꼬맹이가.”

 

L.L.는 스자쿠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대놓고 어린애 취급을 해도 스자쿠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L.L.의 기억 속의, 를르슈의 친구였던 스자쿠는 늘 어른이 되고 싶어했고, 자신의 힘을 늘 시험하고 그 힘을 이상을 위해 실현하고자 하는 소년이었다. 더 크고 나서는 자신의 힘을 두려워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나타나는 눈앞의 스자쿠와, 기억 속의 스자쿠의 차이점이 두드러질수록, L.L.는 괴로워져서 괜히 먼곳을 바라보면서 스자쿠를 대하게 되었다. 이따금 C.C.와 눈이 마주치면 C.C.는 일주일, 이라고 입모양만 벙긋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또 기분이 나빴다. 

일주일 후에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번에도 시선을 마주치고는 무심한 손길로 담요의 흙먼지를 털어내고 있는 C.C.에게서 꺼림칙함을 느낀 L.L.는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피자도 사줬으니까 말해줄게. 원래는 일주일 있다가 말해주려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는 건 중요하잖아. 일주일 있다가 말해주면 돼.”

“내가 먼저 말했다고 를르슈는 약속 안 지킬 거야?”

“자기 맘대로 할 거면 약속은 왜 했어?”

“그런가.”

“규칙은 중요한 거 아니야?”

 

그것은 스자쿠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스자쿠’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는지 눈을 깜빡였다. 둥근 아이의 눈을 들여다본 L.L.는 스자쿠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 무릎을 굽혀 그와 키를 맞추었다. 

 

“초조해할 필요 없어. 나도, C.C.도 일주일은 있을 거라는 약속은 지킬거니까.”

“를르슈는 왜 그렇게 착해?”

 

착하다는 말에 이번엔 C.C.가 키득거렸다. 그녀는 이부자리를 정돈하면서 스자쿠의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우스꽝스럽게 따라했다.

 

“를르슈는~ 왜~ 그렇게~ 착할까~?”

“놀리지 마! 궁금하단 말이야!”

“하하, 살다 살다 L…이 아니라 를르슈가 그렇게 평가 받는 것도 듣고. 어이가 없고 황당하네.”

“C.C.는 나빠!”

“어차피 마녀라서 그런 욕은 신경도 안 쓴단다, 쿠루루기 스자쿠.”

“마녀?”

 

L.L.는 급하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녀라니, 쓸데없는 말을 해도 적당히 해야지. 

 

“비유적인 표현이다.”

“비유가 뭐야?”

 

이번엔 스자쿠의 무식함에 잠깐 말을 잃었다. 10살은 이렇게 멍청하던가? 잠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른 말에 빗대서 말한다는 표현이야. 그냥 돌려서 말하는거지.”

“뭐야, 그럼 C.C.는 진짜 나빠서 마녀인거야?”

“그래. 그러니까 네가 백날 내 욕을 해봤자 난 아무렇지도 않아, 꼬맹이 쿠루루기 스자쿠.”

“C.C.가 정말 나빠?”

 

방금 전까지는 놀림을 받아서 펄쩍 뛰었던 스자쿠는 L.L.에게 그것을 되물었다. C.C.가 정말 나빠? 왜 나빠? 누가 마녀고라고 해? C.C.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을 금방이라도 때려주러 갈 것 같은 스자쿠의 모습에 C.C.도 당황한 듯 했다.

 

“누구겠어, L…이 아니라 를르슈지.”

“거짓말! 를르슈는 착하니까 C.C.한테 그럴 리가 없어.”

“하하, 착한 건 쟤가 아니라 너군.”

 

다시 돌아온 원점에 스자쿠는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다시 떠올렸는지 아아아!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린애의 무신경함인지, 아니면 그저 스자쿠 특유의 정신산만함인지 알 수가 없어서 L.L. 역시 이제 대화에 끼지 못한 채였다. C.C.가 정신 사나우니 저리 가라고 내쫓자, 스자쿠는 저도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내리막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L.L.는 급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스자쿠,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C.C.는 저렇게 자주 놀리니까.”

“아니야, 괜찮아. C.C.는 좀 얄밉긴 한데.”

“이해해줘.”

“아, 그래서 못 들었어. 내가 어떻게 외로운지 알았어?”

“…….”

“나 친구도 없고, 부모님도 나 별로 안 좋아하고……. 그래서 맨날 심심해. 어제 여기 온 건, 원래 맨날 나 혼자 여기서 노는 곳이거든. 그런데 를르슈랑 C.C.가 있어서 신기해서 쳐다봤어.”

“그래?”

 

제대로 웃고 있는지, L.L.는 자신이 없었다.

 

“근데 둘 다 여자 같았는데 를르슈는 남자였네.”

“사과해라.”

 

콩, 하고 정수리를 쥐어박으면 스자쿠는 헤헤 소리내어 웃었다.

 

“를르슈도 부모님이 이름 그렇게 지어줬어?”

“응?”

“를르슈라는 이름, 별로 좋진 않잖아. 그 브리타니아의 마지막 황제 이름이니까.”

 

본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L.L.는 ‘부모님의 악취미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악역에 심취하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으니까. 우리 부모님이 그런 쪽인 것 같았어.”

“그래? 를르슈 황제를 좋아해서 를르슈라고 지은 거야?”

“그런거지.”

“…….”

“스자쿠는, 어제 한 말이 진짜야?”

“응. 부모님은 나 싫어해. 그래서 그렇게 이름 지었댔어.”

“정말?”

“다 말해줄까? 일주일 있다가 말해주려고 했는데.”

“……됐어. 약속은 지켜야지. 규칙은 중요하니까.”

 

겨우 다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말을 삼키고 나면 스자쿠는 손을 흔들었다. L.L.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느새 나타난 C.C.가 L.L.를 비웃었다.

 

“아주 애틋하셔.”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잖아.”

“네가 알던 쿠루루기 스자쿠랑 달라서?”

“그래.”

“그럼 더 신경 쓰지마.”

“……뭐?”

“기어스의 조각이라고 했잖아. 우리가 이제껏 어떻게 회수했는지 잊었어? 이제까지의 고군분투를 잊다니 섭섭하군.”

 

기어스의 조각. 회수. 회수 방법. 살인.

갑자기 떠오른 단어들 끝에 잊고 있었던 제로 레퀴엠이 떠올랐다. 살가죽을 뚫고 들어오는 칼날의 느낌까지 생경하게 떠올라서 L.L.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육체라고 하더라도 죽음은 그닥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런 L.L.의 표정에 C.C.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면서 말했다. 

 

“그렇게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잖아.”

 

C.C.의 말은 은근히 상처를 받은 것 같아서 L.L.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말아버렸다. 어차피 말을 해도 이젠 의미가 없다고, 너무나도 긴 시간들이 그렇게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공지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2019.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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