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된 오늘, 한낮이 되어도 스자쿠는 오지 않았다.
어린애의 약속이란 그런 것이다. 지키는 게 규칙이라고 말해도 쉽게 어기기 마련이다. L.L.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이에 C.C.는 심드렁한 얼굴로 태평한 생각 좀 하지 말라고 타박했다.
“걔는 기어스의 조각이야.”
“…그 말은 꼭, 스자쿠를 죽이겠다는 것 같잖아.”
“그래.”
“스자쿠를 죽일 셈이냐?!”
“죽이지 않고 회수하는 방법이 뭐가 있는데? 걔가 병들어서 빨리 죽길 바라는 거 밖에 없어.”
“너는 말을 해도…!”
“사실이잖아.”
C.C.는 손을 가볍게 털면서 짐을 정리했다. 일주일보다 빨리 진행된 거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약속을 어긴 건 쿠루루기 스자쿠니까. 듣기엔 불안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L.L.는 잠깐만, 하고 그녀의 말을 끊었다.
“오늘 하루만 기다려줘도 되잖아. 어차피 일주일 기다려줄 생각이었으면서.”
“굳이 기다릴 필요 없는데 기다려주는 거랑 다른 거지, 그건.”
“하루만.”
“시간이 남아돌아?”
“…원래 쉬러 온 거잖아. 다른 조각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시간은, 많고.”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L.L.에게 진 것은 C.C.였다. 딱 하루야. C.C.의 못박는 말에 L.L.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물이 정말로 떨어질 뻔 했었다. C.C.는 은근히 L.L.의 눈물 투정에 약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정말 울 것 같은 얼굴만 해도 그녀는 꺾였다.
짐을 다 정리하고, 남은 하루는 몸도 편하고 밥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숙소에서 머물고 싶다는 C.C.의 말에, L.L.는 배낭을 메고서 내려왔다. L.L.의 숨이 거칠어지면서 호흡이 조절이 안되는 걸 보면서도, C.C.는 앞질러 가는 발검음 속도를 늦추질 않았다.
결국 L.L.가 한 번 구르고 나서야 C.C.는 배낭의 짐을 나눠 들면서 어제의 거리 사이로 들어갔다.
기어스를 이용해서 부엌이 딸린 아파트먼트 호텔 하나를 얻었다. 꽤나 번거로웠다. 왜 하필 이런 곳이야? 네가 해준 밥이 먹고 싶으니까. C.C.의 단호한 의사에 L.L.는 오늘 하루를 더 달라도 떼를 쓴 탓에 더 대꾸하지 않고서 기어스를 걸었다.
호텔 직원들을 모조리 다 불러놓고 기어스를 걸고, 경비실에 들어가서 CCTV를 해킹해서 L.L.와 C.C.가 기어스를 거는 기이한 모습을 일일이 지우기까지 했어야했다. 원래 L.L.의 방식은 이렇게까지 주먹구구식이 아니었지만, 하루만 남았다는 그 초조함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L.L.의 머릿속은 온통 스자쿠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쿠루루기 스자쿠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살려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계획이 빠르게 세워지지 않았다. 판단도 제대로 서지 않았다.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효율적인지.
그리고 C.C.를 어떻게 따돌릴 수 있을지 생각하면 그것에 제일 난관이었다. C.C.를 버리고 도망갈 수 있나. 그녀 또한 가여운 사람인데. L.L.의 머리는 곧 뒤죽박죽이 되었다.
어느덧 하늘은 보랏빛이 되어갔고, L.L.외 C.C.의 방은 가장 안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쓸 수 있는 안쪽 방이었다. 가장 안쪽 엘리베이터는 비상구 계단 쪽에 있는 것이라 거의 쓰지 않는 것이었다. CCTV도 진작에 끊어놔서 걱정없이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C.C.가 한 번 물었지만 L.L.는 대답하지 않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샤워를 한바탕 하고 온 L.L.는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가장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C.C.가 물었다.
“어디 가?”
“스자쿠 찾으러.”
“혼자서? 무슨 수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여기서 잠이나 자던지.”
“흥, 반항기야?”
어린애 취급하는 말투에 넌덜머리가 났지만 더 이상 말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기 때문에 L.L.는 빠르게 호텔 밖으로 나왔다.
시내로 한참 나왔기 때문에 그 공터가 있던 산까지 가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게다가 산까지 타고 있자니 하늘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L.L.는 급한 마음에 거칠어진 호흡도 신경쓰지 않은 채로 발을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오르막길이 멈추는 구간이 나와서야 L.L.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나무에 기대서 빨리 올라가야하는 상황에도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 체력이 미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올라간다고 스자쿠가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혼자서 너무 그 약속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규칙에 대해서 자기 정의 조차 내리지 못한 스자쿠가 과연 다시 태어난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할 수 있을까?
왜 그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까? 기어스의 조각이라면, 회수하면 그만인 것을….
멍청한 생각 끝에 공터로 나오면 누군가가 목이 다 쉬어버린 소리로 울고 있었다. 히끅거리는 울음소리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작은 몸을 웅크리고 엉엉 울고 있는 스자쿠가 있었다. 흙바닥은 L.L.의 발소리를 둔하게 만들어서 스자쿠에게 닿지 못하게 했다. L.L.가 스자쿠의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 스자쿠는 훌쩌걱리면서 울기만 했다. 그의 울음소리에는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그저 울음소리, 무언가를 억누르는 느낌만이 가득했다.
아이 답지 않은 울음.
아니, 그 이전에 쿠루루기 스자쿠는, 이렇게 울지 않는다. 하루 하루 알아갈수록 그가 쿠루루기 스자쿠이되, 쿠루루기 스자쿠가 아니라는 점만 드러나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이 스자쿠는 그저 기어스의 조각일 뿐. —존재 자체가 잘못된 인간인 것이다. 언젠가 스자쿠에게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리며 L.L.는 씁쓸한 표정으로 스자쿠의 이름을 불렀다.
“스자쿠.”
“르, 를르슈?!”
“또 울고 있어?”
“아직, 일주일, 안 지났는데, 흑, 없어져서….”
“너야말로 오지 않았으면서.”
L.L.는 스자쿠를 일으켰다. 퉁퉁 부은 눈인데도 반짝이는 녹색 눈이 여전히 스자쿠다웠다. 스자쿠는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닦아냈다.
“학교, 가야 되니까, 아침엔 못 온단 말이야.”
“아…!”
이런. 세상의 시간과 상관 없이 흘러가는 사람이 되었다보니 학교에 가야하는 날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지 오래였다. 학문에 대한 열의도 없을뿐더러, 인간의 과학은 긴 시간동안 폭발적으로 발전했다거나, L.L.가 따라가지 못할 기술이 생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핑계였다. 스자쿠에게는 그를 믿지 못하고 떠난 사람으로 남아버릴 여지가 있었다. 미안해. 솔직하게 사과를 하고 나면 스자쿠는 고개를 들고서 괜찮아, 하고 혼자서 끄덕거렸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거는 말처럼 느껴졌다.
“를르슈는 학교에 안 가?”
"안 가.“
“왜?”
“배우고 싶은 게 없으니까.”
알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하나. 언제쯤 죽을 수 있는지.
어느새 C.C.와 같아진 자신의 소원이 웃긴 나머지 L.L.는 실소를 터뜨렸다. 혼자서 웃는 L.L.를 의아하게 쳐다본 스자쿠는 나도 그래, 라고 말을 했다.
“나도 배우고 싶은 게 없는데, 학교에 가.”
“어린애니까 어쩔 수 없지.”
“를르슈도 그렇게 나이가 많아보이진 않는데.”
그럴 것이다. 외모는 18살의 나이에서 멈춰버렸다.
“사정이 있어.”
“무슨 사정?”
“…그건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알려주지.”
“그래, 약속이야.”
울음이 다 멎은 스자쿠는 L.L.에게 어디에 있었냐고 말했다. 시내에 있는 호텔 이름을 대자 스자쿠는 왜 거기 있냐고 또 물었다. 물음 투성이의 스자쿠가 이렇게 순진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라, 또 곧이 곧대로 대답했다.
“C.C.가 이제 흙바닥에서 못 자겠다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사치를 부렸지.”
“그럼 진작에 호텔에 머물 수 있었는데 왜 여기에서 잤어?”
“어…….”
이번엔 L.L.가 대답하지 못하자 스자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냐, 그렇게 해서 를르슈를 만났는걸.”
외로움에 잔뜩 시달린 그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서, L.L.는 저도 모르게 스자쿠를 끌어안았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고 느껴질 아이의 체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스자쿠가 왜 외로운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외롭지 않게 살아갔으면, 그렇게 바라게 되었다.
그가 진짜 쿠루루기 스자쿠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이름을 가졌다고 불행하게 사는 것은 보기 싫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것을 ‘미련’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못 보는거야?”
“아냐, 스자쿠도 들어올 수 있어. 올래?”
“……사람들 만나야하지?”
“우리도 사람 만나기 싫어서 일부러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어.”
아파트먼트 호텔은 정확히 말하면 산쪽 마을보다는 항구 쪽에 가까웠다. 호텔의 위치를 말하자 스자쿠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그곳이라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초등학생에게는 더 먼 거리라서 힘들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마을에서 멀다는 것을 알자마자 스자쿠는 안심한 듯 했다.
마을 사람들을 피한다. 가족들에게 수상한 사람들과 만난다는 걸 들킬까봐? 그렇지만 그런 가족들은 스자쿠가 빨리 죽길 바라는 마음에서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이름을 붙였다. 알 수 없는 모순과 이해할 수 없는 상관관계에 대해서 L.L.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 근데 를르슈. 나 혼자서 갈게.”
“같이 가면 되잖아?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려줘야 되는데.”
굳이 안쪽 엘리베이터의 CCTV를 끊어놓은 이유는 스자쿠가 편하게 오고가기 위함이었다. 어린 아이 혼자서 돌아다녀도 이해를 받을 수 있는 호텔이 아니었다.
“우리 방까지 오는 데는 꽤 번거로운 절차가 있어서.”
“……그럼 마을 밖으로 나갈 때까지만 따로 가면 안 돼?”
“응?”
“를르슈가 먼저 가 있어. 그럼 내가 나중에 따라 갈게.”
스자쿠는 더는 양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을 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L.L.도 더 이상 같이 가자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추궁하여 진실을 알아내기에는 어린 스자쿠에게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L.L. 스스로도 주어진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유예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 시간동안 스자쿠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L.L.가 먼저 산을 내려가고, 혼자서 한참을 걷고 나와 호텔 근처로 나왔다. 스자쿠는 2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L.L.를 보고서 어딘가 불안한 듯 사람들을 둘러보던 스자쿠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를르슈! 기다렸지!”
“아냐, 안 헤매고 바로 왔네.”
“응, 나 사실 여기 자주 다녀.”
“그럼 같이 와도 됐잖아?‘
“음……. 혼자서 다니는 거니까, 혼자서 다닐 거야.”
스자쿠는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냐고 물었다. 말을 돌리는 스자쿠의 모습에 L.L.는 또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쪽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고 카드 키를 쥐어주었다. 이걸 갖다 대면 열려. L.L.가 주는 카드 키에 스자쿠는 왜 주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스자쿠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면 돼.”
“…언제든지?”
“응.”
“그럼 매일매일 와도 돼? 를르슈가 가는 날까지?”
“그래도 돼.”
“C.C.도 그래도 된대?”
“걔 이야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곧 L.L.와 C.C.가 머무는 7층에 도착했다. 스자쿠에게 카드 키를 갖다대라고 해보고, 여는 방법을 알려주자 스자쿠는 신기해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렸을 때 그 얼굴과 비슷해서 L.L.도 마음이 놓였다. 스자쿠가 오는 소리에 C.C.가 오늘도 피자가 어떠냐며 인사를 건넸다. 또 피자? L.L.는 이틀 연속 피자인 것에 대해서 잔소리를 한껏 퍼부으려다가, 스자쿠가 기대에 부푼 얼굴을 한 탓에 크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L…이 아니라 를르슈라면 피자도 직접 구울 수 있을걸?”
“정말?!”
그래서 L.L.는 저녁 해가 다 지기 전에 급하게 미니 피자를 팬으로 굽는 요리를 해야만 했다. C.C.가 미리 약삭 빠르게 냉장고를 피자 재료로 채워놔서 가능한 일이었다. L.L.의 피자를 먹은 스자쿠는 어제 먹은 것보다 맛있다며 극찬을 했다.
L.L.는 칭찬 받은 기념으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스자쿠에게 말했지만, 스자쿠는 여기에 왔던 것과 같이 혼자 가겠다며 거절했다.
“위험하잖아.”
“음…. 상관없어. 어차피 맛있는 것도 먹었고!”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임에도 스자쿠는 정말 괜찮다며 손까지 붕붕 흔들면서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불로불사의 몸을 얻어도 어린 스자쿠의 스피드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속상해서 L.L.는 호텔로 돌아가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두 개나 깨먹었다. 여분의 접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C.C.는 부른 배로 벌써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녀는 벌써 어떻게 해야할지 정한 것 같았다. 정하지 못한 것은 또 L.L. 뿐이다.
늘 어중간한 상태인 자신이 싫어서, L.L.는 C.C.가 자고 있는 침대의 한 가운데에 털썩 누웠다. 갑자기 닥치는 L.L.의 무게에 C.C.가 신경질을 내며 일어났다. 자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니 이해는 하겠다만 C.C.의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린 심술이었다.
잠이 먼저인지, C.C.는 다시 구석으로 몸을 말고 잠을 잤다. L.L.는 저도 잠을 자려고 하다가, 돈 한 푼 없는 C.C.가 어떻게 피자 재료를 채워놓았는지가 궁금해서 배낭을 뒤졌다.
총알을 겨우 채워놓은 낡은 권총이 사라졌다. 여기는 항구가 있는 곳이고, 안정되긴 했지만 전란이 끝난지 얼마 안 된 때이기에 권총 정도는 비싸게 거래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권총은 기어스도, 불로불사도 뭣도 안 먹힐 때에 쓰는 최후의 보루였다.
너무 화가 나서 자고 있던 C.C.를 침대 밖으로 발로 밀어 내쫓았다. 어느 만화에 나오는 소녀처럼 C.C.의 프라이팬에 맞은 L.L.는 유치하게 뭐하는 짓이냐고 따지고 들다가, 세상이 빙글 도는 현기증에 눈을 감고 말았다.
새삼 자신의 저질 체력이 미워지는 밤이었다.
* * *
“있잖아, 가끔 C.C.가 그러는 거 왜 그러는 거야?”
“뭐가?”
“를르슈 부를 때, ‘L…이 아니라 를르슈’라고 하잖아.”
“흐음….”
스자쿠는 어제 알려준대로 학교가 끝나자마자 호텔에 찾아왔다. L.L.가 미리 차려놓은 간식을 먹으면서 한창 숙제를 하던 중이었다. 꽤나 기본적인 문제로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길래, 나름 요령을 알려주면 스자쿠는 금세 이해하고 응용문제까지 풀어냈다.
그러다가 잘 놀리던 연필을 멈추더니 묻는 말이 그것이었다. 정작 질문의 장본인인 C.C.는 지금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보나마나 피자 타임 세일 같은 것이 아닐까, L.L.는 태평한 생각으로 그녀를 보내주었다. 어차피 안 죽으니까 걱정은 없다. L.L.의 말에 C.C.가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맞지는 않았지만 피하지 않았다면 직진으로 정통 타격 코스였다.
“이름이 를르슈니까 L로 시작해서, 성까지 합치면 이니셜로 L.L.이야.”
"C.C.처럼?“
“응.”
“를르슈 성이 뭐야?”
“람페르지,”
“를르슈 람페르지?”
“맞아.”
그렇구나…. 말끝을 늘이던 스자쿠는 연필을 L.L.에게 내밀었다. 뭐야? L.L.는 건네는 연필을 받으면서 물었다.
“이름, 적어줘.”
“적어달라고?”
“응.”
떨떠름한 기분으로 스자쿠가 숙제를 하던 공책에 이름을 적어주고 나면, 스자쿠는 신기한 것을 보는 것처럼 그 글씨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왜 이니셜로 부르는 거야?”
“글쎄.”
사실 스자쿠가 아니면 를르슈로 이름을 밝힐 이유도 없었다. 스자쿠의 앞에서는 왜 를르슈라고 이름을 밝혔을까.
기어스의 조각으로, 말도 안되는 기적을 가지고 다시 나타난 스자쿠에게,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기사가 아니어도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던 걸까. 미련이 아직도?
L.L.는 저의 대답을 기다리는 스자쿠에게 대충 둘러대며 표정을 감추었다.
“를르슈는 별로 좋은 이름이 아니니까, 이름이랑 성을 따서 이니셜로 부르기로 했어.”
“그래? C.C.도 그래?”
“걔 사정은 몰라.”
“둘 다 이니셜로 부르는 게 익숙해?”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젠 그쪽이 더 편해.”
“그럼 나도 L.L.라고 부를까?”
“아니, 그러지 마.”
그건 생각하지도 않고 나간 대답이었다. 스자쿠에게는 L.L.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를르슈로만 남는 것이 좋다.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왜? 이름이 두 개면 헷갈리잖아.”
이름만 두 개였을까, 가면도 여러 개를 뒤집어쓰고 있는 삶이다. L.L.는 다시 를르슈가 좋다고 말했다.
“스자쿠가 를르슈라고 불러주는 게 좋아.”
“친구가 그렇게 불러서?”
그 말에 잊고 있었던 쿠루루기 스자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늘 비참한 얼굴로, 참을 수 없는 원망을 싣은 시선을 를르슈에게 보내던 남자였다.
이 소년에게서 그를 찾고 있었나? L.L.는 아니야, 라고 작게 말해놓고서, 스스로에게 다시 말하듯 아니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딘가 굳은 L.L.의 표정에 스자쿠는 눈치를 보며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를르슈의 친구가 이름이 나랑 똑같고, 나랑 닮아서 좋아.”
“그렇지 않아. 스자쿠는 스자쿠니까. 그 녀석과 달라.”
“아니, 닮았으니까, 나를 알아봐 준 거잖아?”
“…….”
“를르슈가 많이 좋아한 친구니까, 지금 나한테도 잘해주는 거지?”
“처음엔 그래도, 스자쿠가…….”
L.L.는 자기 입으로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말을 삼켰다. 처음엔 그랬다. 쿠루루기 스자쿠를 잊지 못해서.
꿈에서조차 볼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그 정도로 그리워했다. 미련이 가장 많이 남아서. 그와는 완벽하게 끝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 바램이 무의식 속에서 기어스의 조각과 만나서 지금의 쿠루루기 스자쿠를 만든 거라면?
내가 또 다시 쿠루루기 스자쿠를 괴롭게 하고 있는 거였다면?
하얗게 질리는 L.L.의 낯빛에 스자쿠는 그의 떨리는 손끝을 잡으면서 기쁘다고 말했다. 난데없는 그 말에 L.L.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스자쿠는 정말 기쁜 것처럼 웃었다.
“내가 를르슈의 친구랑 닮아서 난 정말 기뻐. 진짜야. 그 사람한테 감사할 정도야.”
“……왜.”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를르슈가 처음이거든.”
다들 나를 미워해. 나를 싫어하거든. 내가 있으면 안 된대. 스자쿠가 늘어놓는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잘게 떨리는 정도였다가, 나중엔 스자쿠의 손을 잡고서 단호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스자쿠, 스자쿠, 네가…. 네가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
“를르슈가 나를?”
“너를 만나서 얼마나 기쁜지, 너는 몰라.”
아마, 평생을 가도 모르겠지.
너의 평생이 나에게는 또 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덧없는 한때로 남겠지. 혼자 남겨질 것을 생각하면 를르슈 람페르지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L.L.로써 살아가야하는 죽음 없는 삶이 괴로웠다. 추억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며 살아가는 고통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두려워서 스자쿠가 잡고 있는 손은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알겠어. 나도 를르슈를 만나서 기뻐.”
“…….”
“일주일 뿐이지만, 그래도 를르슈처럼 친절한 사람을 만나서 좋아.”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 스자쿠는 어떻게 되는 걸까.
L.L.는 자기가 놓치고 있던 그 문제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스자쿠는 정말로 죽는걸까. 이렇게 외로운 얼굴을 한 아이의 모습으로, 나의 손에 죽게 되는걸까. 내가 그에게 지은, 아직 용서 받지 못한 죄가 있는데. 죽는 것만이 방법은 아닐 거야. C.C.가 아직 찾지 못한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러면, 지금의 스자쿠에게….
지금의 스자쿠에게 사죄하는 건 오로지 자기만족에 불과하지만.
L.L.가 말을 고르지 못하고 그저 울컥하는 마음으로만 스자쿠를 쳐다보는 것이 고작일 때, 문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C.C.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 특유의 고양이 같은 발소리에 스자쿠도 L.L.도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상당히 지친 얼굴의 C.C.는 두 사람의 시선이 저에게 닿자마자 해괴한 것을 보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뭐야, 좋은 분위기 망쳐놓은 사람 보듯이 쳐다보지 마.”
“조, 좋은 분위기 아니었어!”
“L…이 아니라 를르슈는 눈으로 욕하고 있는데?”
“누가?! 헛소리 하지 마!”
“그런 반응이군. 저녁은 아직이야?”
C.C.는 씻겠다면서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 문밖으로 집어 던졌다. 그것을 보던 L.L.는 한숨과 함께 옷가지들을 집어서 정리를 했다. 속옷 정도는 네가 빨아! L.L.의 잔소리에 C.C.는 물소리로 대응했다. 귀찮은 녀석. L.L.는 이를 갈았다. 옷 정리를 마치고 나서 부엌 앞에 서려고 하니 스자쿠가 L.L.를 불렀다.
“를르슈.”
“왜?”
“를르슈는 C.C.랑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냐니, 보면 알잖아.”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이라는 뜻이었지만 스자쿠는 뜻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L.L.를 올려다보았다.
“모르겠으니까 물어보잖아.”
“아무 사이도 아니야. 짜증나는 녀석과의 관계는 뭐라고 부르더라, 원수? C.C.는 내게 있어 만악의 근원이다. 아니, 근본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잖아.”
C.C.와의 관계를 정의하자니 갑자기 치밀어 오른 짜증에 도마를 칼로 쾅, 하고 내리쳤다.
“스자쿠.”
“으응?!”
“햄버그 좋아해?”
“응? 아, 아니, 안 먹어봐서 몰라.”
“햄버그를 안 먹어봤다고.”
쾅하고 다시 한 번 도마를 칼로 내리쳤다. 스자쿠의 어깨가 들썩거렸지만 L.L.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칼로 끊어내고 싶은 온갖 생각들을 겨우 가라앉혔다.
그럼 이제부터 해줄게. L.L.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떨떠름한 그 대답에 L.L.는 괜한 짜증이 일었다.
요리를 하고 있는 와중에 C.C.가 ‘수건 갖다줘!’하고 외치는 말에 L.L.가 칼을 들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스자쿠가 막았다. 스자쿠가 대신 수건을 가져다주러 갔다가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옷을 제대로 입어라, C.C.. 애 교육에 좋지 않아.”
“알겠어, 엄마.”
“놀리지 말고!”
“쿠루루기 스자쿠, 저 녀석 너무 짜증나지 않아?”
“저녁이 필요 없어 보이는 것 같으니 안 먹어도 되지?”
“먹을 거로 치사하게 굴지 마.”
“한 번 말을 하면 알아듣는 지능은 죽어도 안 생기나봐?”
"누구누구 씨 교육이 별로여서 그런 게 아닐까?“
한 번 더 놀리는 말투로 빈정대는 C.C.에게 L.L.가 화를 낼까 말까 하던 사이에, 스자쿠의 배가 꼬르륵하고 울었기 때문에 모두들 책상으로 만든 식탁에 둘러앉았다. 오랜만에 한 요리였지만 손은 익숙하게 놀릴 수 있었고, 헤매지 않고 만든 햄버그는 모두의 입맛에 맞았다. 스자쿠는 연신 맛있다고 하면서 나중엔 내일 아침의 여분으로 만들어놓은 것까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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