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자쿠가 학교에 다니는 중에는 L.L.는 어쩔 수 없이 반나절을 C.C.와 보내야만 했다. 처음 사흘 정도만 C.C.는 스자쿠에 대해서 꼭 죽여야한다고 하루에 한 번은 말을 꺼내서 두 사람은 자주 싸우곤 했으나, 일주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L.L.가 예민해졌을 무렵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조용한 그녀는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도 L.L.가 시키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예를 들면 빨래를 하라던가, 청소를 하라던가, 설거지를 시켜도 C.C.는 성실하게 해냈다. 그 모습은 나중에 저지를 나쁜 짓에 대한 사과 같아서 더 기분이 나빴다.
L.L.에게 지금의 스자쿠는 스자쿠지만 스자쿠가 아니라는 느낌에 낯설면서도 그래도 반가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타고난 머리는 시간이 지나도 녹슬지 않았기 때문에, 스자쿠에 대해서 나름의 추리는 가능했다. 그와 관련해서 L.L.는 하루 종일 스자쿠의 생각 뿐이었다. 미련하다고 하더라도, 스자쿠에 대한 빚이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치러야할 대가라고 생각했다.
스자쿠는 집안에서 버림받은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 옷과 단정한 몸가짐이 나무랄 곳이 없었지만, 아이가 가질 수 없는 특유의 외로운 구석이 늘 석연치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이상한 사람이 분명한 L.L.와 C.C.를 의심없이 따른다는 점도, 그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에 불과했다. 또한 미움 받는 것으로부터 익숙한 모양인지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구는 것이 L.L.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스자쿠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L.L.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외롭게 하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그의 친구조차 쉬이 될 수 없는 자신까지.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애정도, 우정도 아닌 죽음 뿐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지냈던 나흘 동안의 시간이 쿠루루기 스자쿠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가 이 시간에 존재해서 안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했다.
그럼 스자쿠는 언제 있어야 옳은 것인가. 그는 이전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존재를 부정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를르슈의 소원을 들어줄 정도로 인정에 물러터진 사람이었다. 착하다면 멍청하다고 말할 정도로 착한 그가 다시 태어나서도 이런 운명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오늘도 오겠지, 쿠루루기 스자쿠.”
“아마 그렇겠지.”
C.C.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도, 그 남자도 정말 멍청해. 갑작스러운 욕에도 L.L.는 당황하지 않았다. 반응조차 없는 L.L.를 보고서 C.C.는 재미없다는 식으로 눈을 흘겼다.
“기어스의 조각이 죽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건 아마 그 사람을 아는 누군가가 비슷한 기적을 바라서 그런 게 아닐까?”
날카로운 C.C.의 추리에 L.L.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 누군가가 내 눈앞에 있는 L.L.가 아닐까, 싶은 것도 내 추측이다만. 어디 변명이라도 해보시지.”
“변명할 게 없어.”
말을 에둘러서 하기에는 둘의 사이는 너무나 가까웠고, 그런 배려들은 모두 시간 낭비로 이어졌다.
“그럼 솔직하게 말해봐.”
“여기 오기 전에 꿈을 꿨어.”
“무슨 꿈?”
“스자쿠를 만나는 꿈.”
“흥미롭네. 그래서 쿠루루기 스자쿠를 만나게 되니까 어땠어?”
“뭐, 네가 보다시피, 이 모양 이 꼴이다.”
“수절하던 과부가 죽었던 남편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뻐했다고?”
“왜 그런 비유를 하는거냐!”
결국 몇 분을 채 가지 못하고 C.C.와 악악거리면서 싸우고 있다가 L.L.는 밖으로 나왔다. 저녁 장을 봐야하기도 했지만 C.C.가 했던 말을 다시 되새겨볼 필요도 있었다.
해는 살짝 저물기 시작했고, 어린 스자쿠가 학교에서 바로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지금쯤이면 항구 근처로 다 왔을 것이다. 스자쿠가 오면 함께 장이라도 볼까. L.L.는 바닷가 근처로 걸어갔다. 근처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에 조금 거리가 있어도 조용한 곳을 찾으려고 하던 때였다.
“너 왜 자꾸 우리 동네에 오냐?!”
“여기 살지도 않으면서!”
“빨리 꺼져!”
어린 녀석들이 저와 조금 다르다고 남을 내쫓는 방식은 왜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인지. 그늘진 곳에서 싸우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L.L.는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아예 내빼려던 때였다.
“이름도 재수 없는게!”
“스자쿠가 뭐냐?!”
“너네 엄마 아빠가 너 싫어한다며!”
“주워왔다고 하던데~!”
하지만 그 이름을 듣고서는 도망친다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L.L.가 나서려고 하는 순간에, 먼저 움직인 것은 스자쿠였다. 어두운 곳에서도 커다란 눈은 빛을 받아서 반짝거렸고, 아마 울고 있는 모양인지 크게 일렁거리기도 했다. 세 명의 사내 녀석들을 때려눕힌 스자쿠는 퉁퉁 부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두 번은 안 봐줘’라고 말을 했다. 씩씩거리는 작은 어깨가 불안해보였지만, 쉽게 말을 걸 순 없었다.
예전에는 그 어깨에 얼마나 많은 의지를 했었던가.
스자쿠가 더 멀어지기 전에 L.L.는 급하게 스자쿠를 불러 세웠다.
“스자쿠!”
“르, 를르슈?!”
안절부절 못하는 스자쿠를 보고서 L.L.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잘 싸우던데.”
“다, 다 봤어?!”
“뭐, 그렇지만…. 우선 도망칠까?”
벌써부터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녀석들을 등 뒤로 하고서 스자쿠와 L.L.는 허겁지겁 달아났다. 때린 스자쿠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달렸지만, L.L.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으로 내달린 탓에 건물의 뒤편에서 어둑한 그림자를 등지고서 숨을 골라야만 했다.
“왜 그렇게 못 뛰어?”
“아니, 내가, 허억, 못 뛰는, 게, 아니라…!”
“으응. 를르슈, 일부러 대답 안 해도 돼.”
그게 더 L.L.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는 걸 모르는 스자쿠는 그의 숨이 다듬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조금씩 걸음을 옮겨서 사람들이 제법 북적거리는 거리가 코앞에 있었을 때, 스자쿠의 발은 멈추었다. L.L.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도 놓아버렸다.
“스자쿠?”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면 스자쿠는 사람들의 발이 오가는 바닥에 시선을 박은 채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안 갈거야?”
“를르슈, 혼자서 가면 안 돼?”
“왜?”
이젠 감추지 않는 것이 느껴지는 그 노골적인 거부에 L.L.는 늘상 짓는 미소도 지을 수가 없었다. 하얗게 질려버린 스자쿠의 얼굴은 제발 혼자 가게 해달라고 빌고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확인해야할 것이 있었다. L.L.는 스자쿠가 놓아버린 손을 다시 잡았다.
“그럼 잠깐 돌아갈까?”
“으, 응? 를르슈, 여기 길 모르잖아.”
“바닷가, 더 보고 싶거든.”
“…….”
“스자쿠는 잘 알고 있지?”
스자쿠는 잡힌 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 전 아이들을 때려눕힌 곳에서 반대로 돌아가도 바닷가가 나왔다. 아스팔트가 반쯤은 깨진 도로 근처에서는 파도가 치고 있었다. 아직까지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나 여기 길로는 처음 와봐.”
“그래? 그런 것치고는 멋진 곳을 잘 찾아냈는데.”
“나중에 혼자서도 와야겠다.”
“…친구랑 같이 오면 되잖아.”
“친구?”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는 식으로 L.L.를 올려다본 스자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엔 L.L.는 발끈하지도 않았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스자쿠는 길바닥의 돌멩이를 걷어차고는 중얼거렸다.
“친구가 있을 리가 없잖아.”
“어린애들은 주먹 다툼하면서 친구가 되는 법이야.”
“그럼 친구가 벌써 백 명도 넘었어.”
스자쿠는 수평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번쩍 치켜드는 것이 꼭 눈물을 참는 것 같았다.
“친구는 를르슈 뿐이야.”
“…….”
“아, C.C.도 친구로 쳐줄게.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녀석이랑 친구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
“둘이서 친하지?”
스자쿠는 부럽다고 말했다. 나도 그런 친구 갖고 싶어. 다시 만나도 언제든지 반갑고, 그런 친구. L.L.는 7년 만에 만났던 쿠루루기 스자쿠를 떠올렸다. 오랜만이야, 를르슈. 그렇게 말했었지. 왠지 그리워지는 그때에 스자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예나 지금이나 머릿결의 감촉은 여전했다.
“친하지 않아. 그저 계약 관계일 뿐이다.”
“계약? 무슨 계약?”
“그건 비밀이야.”
“나도 비밀 말해줄게.”
“일주일 아직 안 지났는데? 규칙은 중요하잖아.”
“그런가…. 그럼 더 큰 비밀을 일주일 되고 알려주고, 지금은 를르슈한테 비밀 이야기 하는 건 작은 비밀이니까 들어주면 안 돼?”
또다시 그 눈이다. 외로운 눈.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에 L.L.는 주먹을 곽 쥐었다.
“아아, 그럼 들어줄게. 일주일 후의 즐거움이 줄어들겠지만.”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스자쿠와 L.L.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스자쿠는 어둡게 변하는 하늘을 보고서 빨리 이야기 해야겠다면서 스스로를 재촉했다.
“나는 사람들 많은 곳에 못 가, 를르슈.”
“그래?”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다 들리거든. 나 예전에도 말했는데, 부모님이 나 별로 안 좋아하거든.”
“자기 자식인데?”
“그러니까 더…. 이건 일주일 후에 이야기! 아무튼, 사람들이 다 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거 같고, 근데 이야길 들어보면 다 내 이야길 하고 있어. 근데 난 그 사람들 잘 모르고, 그렇게…나쁜 짓도 해본 적은 없어. 방금 전처럼 시비 걸면 싸우는 것 밖에 안했는데! 아, 물론 이것도 나중에 엄청 혼나.”
“폭력은 나쁜거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왜 나한테 싸움을 거는지 모르겠어.”
“그러게, 너는 강한데.”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자꾸 숨도 못 쉬겠고, 그래서 가끔은, 좀 창피한데, 막 쓰러지기도 해.”
“뭐…?!”
“아, 그래도 여기로 올 때는 방법이 있어!”
스자쿠는 가방에서 모자와 길다란 천을 꺼냈다. 천을 돌돌 말아서 얼굴을 가리면서 모자를 뒤집어쓰면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짠!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
“바보야,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너무 해맑게 괜찮다고 말하는 모습에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속상하다. 모처럼 만난 스자쿠는 상처를 받는 것에 익숙하고, 그러면서도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지 못한 채로 혼자서 우는 것이 일상이다. 네가 왜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아야 돼. 너는, 너는…. 이제껏 만나온 스자쿠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으면서, 그 신뢰에 있는 힘껏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 근간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왜 세상은 스자쿠를 이렇게 몰아세우는지.
“나도 몰라.”
더 큰 비밀 이야기, 그냥 할래.
스자쿠는 하늘이 보랏빛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쿠루루기 집안에서 만나, 서로를 사랑해온 천생연분. 쿠루루기 집안은 예전에는 나이트 오브 제로라는 악인(惡人)이 나온 집안이었지만, 그걸 반면교사로 삼아서 오히려 그 이후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고 했다. 그래도 ‘스자쿠’라는 이름은 여전히 쓰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 집안의 누구도 나이트 오브 제로에 심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해서 처음으로 가진 아기가 스자쿠였다고 한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채로 태어났다. 당연히 아버지는 어머니의 외도를 의심했고, 자신의 정조를 의심받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심에 상처를 받고, 하지만 주변의 눈과 지금까지의 정 때문에 헤어지지 못한 채로, 쿠루루기 스자쿠를 키우게 되었다고 했다.
원래 붙이려던 이름도 있었다고, 스자쿠는 누군가에게 들었지만 스자쿠가 태어나는 날에 아이의 모습을 보고, 스자쿠의 단명을 바란다는 마음에서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빨리 죽어서 이 집안의 불행까지 가져가거라.
할머니도 폐인이 되어버린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스자쿠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스자쿠가 정말 불행을 몰고 온 아이처럼 태어난 이후로 집안은 빠르게 몰락해서, 전란 중에 겨우 수복 중인 도시로 밀려날 정도였다고 했다.
부부의 잦은 싸움은 마을에서도 소문이 나서 스자쿠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길거리에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친구도 없고, 부모도 거의 없다시피 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스자쿠는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L.L.는 그가 받았을 학대가 어땠을지 알 수 있었다.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키워주는 것이다. 애정을 주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를르슈는 어디로 가?”
“그건 C.C.가 알고 있어. 나는 잘 몰라.”
“나도 데려가면 좋겠다.”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L.L.가 놀라서 쳐다보면, 스자쿠는 장난이었다는 듯, 씩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이야.”
그 농담 같은 말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L.L.는 스스로가 비참해져서 아아, 하고 웃으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린애 앞에서 무슨 꼴이람. 돌아가는 길에는 아주 멀리 돌아가더라도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서 다녔다.
해가 졌고, 그래도 가족이 있는 스자쿠는 호텔에 들리지 못하고 다시 천을 두르고 모자를 둘러쓰고 버스를 탔다. 내일 봐, 를르슈. 스자쿠는 손을 흔들면서 버스에 탔다.
호텔에 돌아온 L.L.는 장도 안보고 돌아왔다고 C.C.가 집어던진 베개로 베개 싸움을 한창 하다가, 지쳐서 뻗어버렸다. C.C.는 데이트를 하라고 보낸 게 아니었다고 투덜거렸지만 대꾸할 힘이 나지 않았다. 피자를 시키는 C.C.를 말리지 못한 채로, 40분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배달부에게 기어스를 걸고 돌려보내는 것도 피곤했다.
“눈 하나 깜빡하면 될 일을 왜 그렇게 귀찮아하는 거야?”
그 말에, 너는 친구가 없으니까 모르겠지, 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된 것도 그녀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니 가여워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 * *
호텔에는 L.L.와 스자쿠만 남겨두고 온 C.C.는 으슥한 골목을 걷고 있었다. 주머니에는 며칠째 들고 다니는 낡은 권총이 있었다. 들고 다니는 이유는 언제든지 그 결심을 감행하기 위해서였다.
결심은 늘 사람 옆에 있으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이 나이를 먹고도 사람에게 휘둘린다니. C.C.는 무너져가는 벽을 손으로 짚으면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질릴 것 같았다.
이번 기어스의 조각은 어느 때보다 회수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았다. 원인은 정이다. L.L.에게 남아있던 미련이나, C.C.가 가지고 있는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모두 그런 정 때문이었다.
L.L.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또 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나타난 지금, 이번에야말로 L.L.는 스자쿠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아닐까. C.C.에게는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혼자였던 시간이 제일 길었는데, 그 시간이 익숙해지기는커녕 가장 두렵고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마리안느처럼 나를 떠나가는게 아닐까….
C.C.는 오랜만에 그 이름을 떠올리며 바닷가 근처를 걸었다. 어둑한 골목의 그림자 밖으로 나오면 오렌지색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무너진 해안도로가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요즘 C.C.의 일상이었다. 무너진 도로 끝을 달려도 땅은 꺼지지도 않고, 꺼진다고 해서 죽지도 않는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고 있으면 꼭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날씨가 좋은 걸 즐겨도 되고, 배고프면 밥을 먹으러 돌아가면 되는 이런 일상이 당연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일상이다. 그리고 이 일상이 아름답고 따뜻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사람이 죽어야지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주머니 속의 권총이 딱딱하게 느껴졌다. 오늘이야말로 결단을 내릴 때였다. L.L.가 도망을 가더라도 상관없었다. C.C.는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긴 시간동안 그와 함께 있으면서 알게 되었다.
L.L.의 마음은 여기에 없다.
를르슈의 마음은 여기에 없다.
그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언제나 돌아갈 곳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곳에 C.C.는 없었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해바라기 밭, 웃고 있는 스자쿠와 나나리, 손짓하는 어머니.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를 하는 를르슈. 그리고 거기에 C.C.의 자리는 없었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을 갖고자 했으니 얼마나 멍청했는지. C.C.는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제 머리에 겨눠보았다. 이것을 쏜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니, 괜한 총알 낭비겠지.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기분전환은 없을 것이다. 방아쇠에 손을 걸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L.L.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여전히 무섭다. 그의 마음이 여기에 없다는 걸 알고 있어도 무서운 일이었다.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혼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마음이 비어있는 L.L.와 함께 있는 것과, 빨리 C의 세계를 되돌려서 스스로의 죽음을 완성하는 것이다.
전자는 고통뿐이었고, 후자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래도 고통 밖에 없는 것보단 낫겠지.
C.C.는 외로운 것이 싫었다. L.L.의 옆은 외로웠다. 미움을 받는 것과 별개의 일이었다.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을 기다리는 것은 외로웠고, 그 마음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을 보는 건 괴로웠다.
바닷바람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C.C.를 휩쓸고 갈 것처럼 불어댔다. 쓸려나가고 싶은 것을 겨우 버티면서, C.C.는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L.L.를 만나고 나서부터 소리 없이 운다거나, 알게 모르게 울어버리는 것이 습관이 들고 말았다.
이런 결말은 원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를르슈를 되살려낸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 * *
“C.C.! 늦었네!”
“더 늦었으면 다 치워버리려고 했는데.”
“그럴 것 같아서 슬슬 돌아왔지.”
C.C.는 부은 눈이 가라앉을 때까지 바닷바람을 맞고 들어왔다. 훌쩍거림도 없이 태연하게 식탁에 앉아서, 며칠 내내 나오고 있는 햄버그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마 이전의 쿠루루기 스자쿠가 좋아했던 음식이고, 지금의 쿠루루기 스자쿠도 좋아하는 음식인 햄버그 스테이크는 지금 C.C.는 질릴 지경이었다.
모처럼 L.L.의 요리를 먹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좋은 것과 별개로 한 가지 음식을 계속 먹으면 질리는 건 당연한거겠지. 그래도 음식을 남기는 것은 사치였기에 우선 자리에 앉아서 먹기는 먹었다.
스자쿠와 L.L.는 스자쿠의 숙제를 봐주느라 작은 과외 수업 중이었다. 연신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L.L.의 모습에 C.C.는 입술을 삐죽이며 포크로 스테이크를 콱 소리가 나도록 찍었다.
C.C.가 밥을 다 먹을 즈음에는 과외 교실도 끝이 났다. 왜냐면 해가 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C.C.는 ‘이제 가야겠다’라고 중얼거리는 스자쿠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어디 가?”
“내가 데려다 줄게, 쿠루루기 스자쿠.”
"C.C.가?“
“스자쿠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내가 여기를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녔다고 생각해? 마을로 돌아가는 길 정도는 외우고 있어.”
금방 나갈 준비를 마친 C.C.를 보고서 L.L.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C.C.가 무슨 짓을 저지를 것처럼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일을 안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그의 의심은 합당했다. C.C.는 그런 것을 모르는 척,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가자. 데려다줄게.”
스자쿠는 멀뚱히 그 손을 쳐다보다가 덥썩 잡았다. 스자쿠…! L.L.의 소리에 스자쿠는 한 번 뒤를 돌아보고서는 괜찮다고 말했다. C.C.로써는 조금 의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뭐가 괜찮다는거지?
“C.C.랑 갈게. 잘있어, 를르슈.”
스자쿠는 L.L.가 대답하기 전에 C.C.의 손을 잡고서 먼저 앞장을 섰고, 오히려 C.C.가 뒤를 돌아보며 L.L.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스자쿠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오로지 쿠루루기 스자쿠 한 사람 뿐이었다. 그것에 입맛이 써서 바로 문을 닫고 돌아선 C.C.는 스자쿠와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자쿠도 입을 열지 않았다.
폭풍전야와 같은 침묵이었다. C.C.는 호텔 밖으로 나오자마자 스자쿠가 말을 거는 것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C.C.?”
“…맞아. 눈치는 빠르네.”
“응. 그런 것 같았어.”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
“오늘은 아무도 없어.”
그렇다면 자고 가도 괜찮은 것 아닌가. C.C.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쿠루루기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집에 돌아가기로 를르슈랑 약속했으니까, 돌아갈 거야.”
“약속?”
“응.”
“성실하네.”
“친구끼리 약속이니까. 아, 물론 C.C.도 친구야.”
“하하…. 누가 어린애랑 친구를 해?”
“C.C.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자주 한다고 를르슈가 그랬어. 그렇지만 쓸데 없는 소리는 안한다고.”
“둘이 엄청 친해졌나보네.”
“응!”
스자쿠는 C.C.에게 바다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바다를 보면서 울었던지라 지겨울 법한데, C.C.는 바다를 좋아했다. 멀리 뻗어있는 수평선, 그리고 지고 있는 노을이나,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것은 늘 새로운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다에 가자. 스자쿠는 를르슈와 걸었던 그 곳으로 걸어갔다.
그 곳은 C.C.가 혼자서 울었던 곳이기도 했다.
반나절 만에 돌아온 원점. 사람들은 아무도 오가지 않는 어둑한 골목을 지나서 스자쿠는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바닷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고 있지만, 소리를 전하기에는 부족함 없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C.C.는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물었다.
“쿠루루기 스자쿠, 요새 사는 건 어때?”
그 물음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선 더듬더듬 말을 했다.
“뭐, 별로, 좋은 일은 없었지만…. 요즘엔 를르슈랑 C.C.가 있어서 외롭지 않아.”
“좋은 일은 이제 없을거야.”
“왜?”
“좋아서 태어난 게 아니니까.”
C.C.는 가엾은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는 기어스의 조각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기적처럼 다시 태어난 쿠루루기 스자쿠.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미련과 마음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소망이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어스는 점점 다른 힘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힘까지 도달했지만, 그 사람을 완벽하게 다시 만들어낼 수는 없는 불완전한 힘. 하지만 누군가를 다시 소생시키는 힘이란 보통 인간이 품을 수 없는 힘이었다.
를르슈는 너를 다시 만나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제 마리안느에 대한 미련을 떠올리는 것이 아프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C.C.에게는 를르슈와 스자쿠 사이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다시 를르슈로 돌아가서 스자쿠와 만나면, 뭐가 달라지는 걸까?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나? 삶이 즐거워질까? 이 끝없는 시간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을 추억을 만들 뿐인데.
이제 더 이상 계약자도 만들 수 없고, 따라서 코드를 계승할 방법도 없는 지금에 쿠루루기 스자쿠는 기어스의 조각으로, 지금 끝을 내지 않아도 언젠가 끝나는 보통 인간의 삶을 산다. 지난 닷새는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정말 휴식을 위해서 보낸 시간이었다. C.C.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머니 속의 권총을 꺼냈다.
제 머리를 겨누는 총구에 스자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죽일 거야?”
“믿을 수 없겠지만, 우리는 존재해서 안되는 것들을 찾으러 다니고 있어.”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너는 다시 태어났어, 쿠루루기 스자쿠.”
아마 를르슈가 남겨 놓은 마음이 너를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겠지. C.C.는 담담하게 말했다.
“원래의 너는 죽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하지만 너는 어떤 경우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태어났어. 기적은, 기적은 때로는 불행의 시작이기도 해. 믿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너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여기서 죽는 편이 좋을 거야.”
“…….”
“어떤 말도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없어. 확실한 건.”
“를르슈랑 C.C.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어. 하지만 나를 위해서 죽고 싶진 않아. 나는 아무것도 없거든.”
스자쿠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가 외로움에 지쳐있는 것은 알았지만 자기 자신을 이렇게까지 부정할 줄은 몰랐다. 번거로운 남자. 를르슈를 골치 아프게 했던 그 성격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C.C.는 총을 아래로 내리면서 스자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 C.C.의 말을 들을니까 알 것 같아. 친구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를르슈랑 C.C.가 친구가 되어주면서 무언가 생긴 것 같아.”
“…그래?”
“응. 그리고 조금 기뻐.”
스자쿠는 까맣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더니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원래부터 를르슈의 친구였구나.”
“…….”
“C.C.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
“그래.”
“를르슈랑 친했어?”
“정말 친했어. 너네 둘이서, 뭐든지 할 수 있었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C.C.는 뒷말을 삼키면서 스자쿠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을 했다.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탁이 있다고 입을 열었다.
“무슨 부탁?”
“를르슈한테는 내가 집에 갔다고 해줘. 약속했으니까.”
“좋아.”
“그리고, 총은 무서우니까.”
“…….”
“어떤 방법이든 좋아. 하지만 총은 싫어.”
그림자가 겨우 지는 캄캄한 공기 속에서 C.C.는 스자쿠의 목을 쥐었다. 어린아이의 갸날픈 목을 힘주어 누르고 있었다. 스자쿠는 몸을 축 늘어뜨린 시체처럼 반항하지 않았다.
“잘 가, 쿠루루기 스자쿠.”
C.C.는 손에 힘을 주었다. 스자쿠의 숨소리가 점점 죄여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왜 자기 죽음에 이렇게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렇게 원하는 친구를 만들었으니 이제 여한이 없는 것일까
L.L.는 다시 스자쿠의 죽음에 슬퍼하게 되겠지
나는 그를 달래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떠나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대신해서 죽고 싶어
내가 죽으면 좋을 텐데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스자쿠였던 시체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C.C.는 낡은 권총에 총질을 한 번 했다. 얼굴이 터져나갔다. 이전의 쿠루루기 스자쿠가 죽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속보에 L.L.가 떨어뜨린 그릇의 숫자까지 생각이 났다. 깨진 그릇의 무늬까지 떠올랐다.
만신창이가 된 시체를 바닷가에 던졌다.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이니 금세 사라질 것이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질 무렵 쯤에 발견될지도 모른다.
어느 때보다 뒤처리가 엉성한 살인이었다. 마치 처음 사람을 죽여본 사람처럼 굴었다는 것에 C.C.는 헛웃음이 나왔다.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출 수가 없어서, 울음과 절규로 바뀔 때까지 계속 웃는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웃고 울고를 반복하다가 호텔로 돌아갔다.
* * *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 돌아온 C.C.에게 대체 어디를 다녀왔냐고 물어도 C.C.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대답헌 것은 ‘스자쿠는 집에 잘 갔어?’라는 질문 뿐이었다. 잘 갔어. 어떻게 된 일인지 목이 다 쉰 목소리로 대답한 C.C.에게 무언가 언짢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무턱대고 그녀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C.C.를 기다리느라 결국 L.L.도 늦게 잤던 탓에, 오후가 되어서야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C.C.가 짐을 싸고 있었다. 이동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뭐야, 저녁에 가도 되잖아?”
“아니. 지금 움직인다.”
“기어스의 조각…아니, 스자쿠는?”
“이제 됐어.”
“뭐가?”
이제 됐다는 말이 왜 이렇게 불길하게 들리는지, L.L.는 다시 되물었다. 하지만 C.C.는 다른 대답을 들려주진 않았다. 그저, 이제 됐으니까 가자는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반복되는 ‘됐다’라는 말에 L.L.는 그녀가 들고 가려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제대로 말해, 너 어제 무슨 짓 했어?!”
“무슨 짓이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럼 왜 이래!”
“일주일만 준다고 했잖아! 이제 기다려줬으니 된 거 아니야?!”
“아직 스자쿠랑 인사를…!”
“필요 없어!”
가방을 다시 빼앗아 든 C.C.는 L.L.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내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에 L.L.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감이 잡혔다. 그걸 아는 순간 아악, 하고 소리를 지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L.L.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악!
머리를 감싸며 소리를 지르는 L.L.의 옆에서 C.C.는 눈을 감으면서 그 소음을 견뎌냈다. 머리를 울리는 그 절규는 어제의 미동도 하지 않았던 스자쿠의 시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하는 죄의 무게와 비슷했다.
C.C.의 손에 들린 가방이 떨어지면서, C.C.의 몸도 동시에 무너졌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L.L.의 다리에 매달렸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를르슈….”
너무 오랜만에 부르는 그 이름은 낯설지도 않았다. L.L.라고 부른 세월이 더 길 것인데도,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으로 불러온 것처럼 입술에 익어있었다. C.C.는 를르슈가 영원히 L.L.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L.L.라고 불러왔으며, 속으로는 그가 를르슈인 것을 알고 있었다. 눈에서 보이는 현실만큼은 속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더 이상의 거짓말은 힘들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 역시 무의미했다. 진실과 마주해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일주일이라고 했잖아…!”
“미안해.”
“스, 스자쿠를….”
“죽였어.”
L.L.는 더 이상 소리도 내지 않고 이를 악 물었다. C.C.의 작은 목소리로 이어지는 사과에 그는 할 말을 잃고 자리에 주저 앉았다. 서로 몸을 기댄 채로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눈물을 쏟고 있었다.
낮아진 몸 사이로, C.C.의 주머니 속에 있는 권총이 보였다.
L.L.에게는 아직 를르슈의 마음이 남아있었다. 그 미련이 그 권총을 들게 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게 만들었다. 하나 남은 총알이 C.C.의 가슴을 꿰뚫는 것도 순식간이었고, 기절한 C.C.의 몸을 내던지고 L.L.가 호텔 밖으로 나가는 것도 순간의 일이었다.
거짓말, 세상은 모두 거짓말투성이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진실도 모두 거짓이다.
달리고 달린다. 바닷가를 향해서 달렸다. C.C.가 언제 쫓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배를 타고 땅을 벗어나서 도망쳤다.
나를 살려낸 마녀, 이 지옥에 나를 밀어넣은 마녀…!
L.L.는 자신이 그 마녀의 손을 스스로 잡은 것도 잊어버린 채로 그렇게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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