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이든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는 곳은 초여름이어도 후텁지근한 바닷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바다의 짠내를 맡으면서 그와 함께 오랜만에 뱃멀미를 한 L.L.는 도쿄로 들어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고, 그만큼 안정된 듯 보였다. 평화로운 공기, 깨끗한 차림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L.L.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항구의 분위기가 이방인을 조금 너그럽게 봐주고 있었으나, 도쿄 시내로 들어가면 아무래도 눈에 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역사를 앞당기기도 하고, 뒤로 후퇴시키기도 한다.
과거에 일본이었던 이 나라는 지금은 나라 이름도 바뀌었고, 국가를 이루는 인간의 규모도 달라졌지만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한 듯 했다. L.L.는 이 나라에 처음 왔었을 때를 떠올렸다. 나나리 밖에 믿지 않겠다던 소년이었던 저를 다시 마주하는 것은 꽤 고통스러웠다.
이번에도 스자쿠를 만날 수 있을까? 나중에는 나나리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차는 부드럽게 곡선을 따라가며 덜컹거림도 일정한 박자를 맞춰서 소리를 내었고, L.L.는 미식거리는 속을 붙잡고서 어딘가 낯설어진 도쿄 안팎을 내다보면서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잠에 막 빠져드려고 할 찰나였다.
“아빠, 저 사람 정말 닮았어요, 그 극악무도한 황제와….”
“그러게, 박물관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것 같잖아?”
극악무도한 황제. 그 단어에 눈이 절로 떠졌다. 를르슈 황제의 이름은 세계의 역사에서 사라진지 오래라고 생각했지만, 도쿄는 를르슈 황제의 치하에서 가장 고통 받았던 곳 중 하나였으니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었다.
아직도 이름이 ‘도쿄’인 것을 보면 더더욱.
L.L.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들고 있던 짐 주머니에서 겨울 이후로 써본 적 없는 목도리로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때까지 둘둘 싸맸다. 초여름이지만 어차피 옷차림은 이방인 그 자체였다. 어중간한 종교인처럼 보이면 다행이련만.
L.L.는 기차의 다음 칸으로 넘어가면서 비어있는 자리에 아무데나 앉았다. 자유석이라서 그나마 편히 갈 수 있었다. 때마침 운좋게 이름 모를 역에 도착했고, 저를 알아보았던 소년과 그의 아버지는 금방 내렸다. 그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쓸데 없는 의심이 생겨났다.
왜 나를 알아봤지?
모습을 바꾼 스자쿠였을까. 영혼은 그대로이고 모습은 바뀐 누군가일까. 를르슈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면 기어스의….
거기까지 이어지는 사고는 곧 멈추었다.
모처럼 C.C.에게서 벗어난 보람이 없어지는 시간이었다.
‘—이번 역은 도쿄입니다.’
무기질한 목소리가 알리는 도쿄 역에서 내렸다.
기억 속의 도쿄 조계와는 낙후된 모습이긴 했지만 그것이 보기 흉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애정도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만날 수 있을까?
꿈속, 정확히는 꿈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L.L.가 만났던 스자쿠가 한 말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도쿄 역에서 내렸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도쿄 자체는 넓었다. 조계와 조계가 아닌 곳으로 나뉘어졌던 시대에도 제법 넓었던 면적이 이젠 그 경계조차 없어졌으니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 L.L.의 시선을 이끈 것은 몇 개의 표지판이었다.
‘제로 광장’
‘제로의 거리’
‘제로 동상’
모두 하나의 길목에 있는 표지판이었다. 제로? 내가 알고 있는 그 제로? L.L.는 호기심에 이끌리듯 그 거리를 향해 걸었다.
초여름의 습기가 목도리 사이사이를 파고 들었지만, 제로의 동상과 마주하는 순간, 그 더위까지 잊을 정도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제로의 동상은 L.L.가 기억했던 스자쿠의 모습보다 컸고, 그의 위압감은 정의의 사도라고 하기보다는 사도로 떨어진 악당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이게 나였다고?
제로의 낡은 동상을 가운데로, 그 옆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고, 광장을 따라서 상점가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상을 뒤로 하고서 상점가를 걷고 있으면 맛있는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배가 고팠다. 기어스를 써서 무언가를 먹을까 했지만 그 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정말 알 수 없는 곳에서 튀어나왔다.
여전한 이레귤러였다.
L.L.보다 나이가 있어보이지만 충분히 젊고 예쁜 여자와 그의 곁에는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의 스자쿠가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자쿠였다. 해바라기 밭에서 보던 10살의 스자쿠도 아니고, 자신을 죽였던 18살의 스자쿠도 아니었다. 10살보다 많고, 18살보다 어리다. 그런 스자쿠는 처음이었다.
그 스자쿠는 여자의 손을 잡고서 길거리를 걸었다. 노점에서 파는 과자를 사는 여자를 기다리고, 그녀가 내미는 한입 크기의 과자를 물고서 맛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친척인가 싶었지만 L.L.가 아는 한, 스자쿠의 친인척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사람들은 다 죽었을 것이고, 다시 태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생판 남이 분명한 여자의 손을 잡고서 그것이 익숙한 듯이 걷고 있는 스자쿠는 낯설었다. 그 나이대의 스자쿠를 보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그의 옆을 내주는 모습도 모두 어색했다.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L.L.는 노골적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초여름이 다 된 시기에 목도리로 얼굴을 둘둘 싸맨 L.L.를 괴상한 것 보듯 쳐다보고 갔지만, 스자쿠가 모르면 됐다고 생각했다.
여자와 스자쿠는 마을 변두리에 있는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집으로 들어갔다. 제법 길이가 되는 담장을 따라 걸어야하는 집을 보면서 쿠루루기 가문의 집인가 싶었지만, 명패에 걸린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아마 여자의 성이나 될 것 같았다.
여기서 끝인 건가….
L.L.는 한숨을 쉬면서 담장의 벽에 기대었다. 들어갈 만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저 스자쿠가 여기 있길래 왔다고 하면 쫓겨나기 십상이다. 머리를 써야하는데. L.L.가 고전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문이 열렸다.
예기치 못한 고민의 원인과 마주했다.
“뭐야, 너. 아까부터 계속 쫓아오고.”
“아, 그게.”
“여기까지 오다니 나츠미 씨한테 관심이라도 있어?”
“나, 나츠미? 아, 그 여자인가.”
“뭐야, 나츠미 씨도 모르면서 그냥 온거야?”
“아니, 나는 그 여자가 아니라 너를….”
“나?”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남자랑 하지 않아.”
“뭐, 무슨 소리야, 그게!”
“그리고 너처럼 수상하게 생긴 녀석은 돈을 줘도 싫어.”
“수상하다니, 실례잖아!”
“그럼 그 감춘 얼굴이나 보여주던가.”
“못 보여줄 줄 알고?!”
“아니, 진짜 보여달란 이야긴….”
L.L.가 목도리를 확 끌어당겨 내리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보다 낮은 스자쿠의 시선에 L.L.는 괜히 간지러워서 흠, 하고서 헛기침을 했다.
“멀쩡하게 생겼네.”
“하, 사람이 얼굴을 보여줬는데 그런 감상이라니.”
“멀쩡하게 생겨서 왜 남자를 찾아?”
“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문을 알고 온 거 아니야?”
무슨 소문, 이라는 눈으로 쳐다보면 스자쿠는 시선을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나츠미 씨한테 팔린 남창이라는거.”
“뭐?!”
그것이 열네 살 남창 스자쿠와의 만남이었다.
남창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나서 스자쿠는 ‘나는 남자는 상대 안 해’라고 말했다. 딱히 나도 남자를 즐기는 건 아니야! L.L.가 바로 대답했지만 스자쿠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남색가처럼 생겼는데.”
어떤 나이를 하던간에 스자쿠는 원래부터 무례하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그게 스자쿠다운 점이라고 생각하면 그리운 느낌이 더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실수 없이, 누군가의 방해도 없이 스자쿠를 지켜내고 말겠다. 스스로의 다짐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으면서 L.L.는 스자쿠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안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스자쿠 군, 손님이니?”
나츠미일 것이다. 스자쿠의 험악했던 인상이 순식간에 유하게 풀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으로 보아 그러했다.
“아뇨, 잡상인이에요. 돌려보낼게요.”
스자쿠는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서고는 문을 닫았다. 졸지에 잡상인이 되어버린 L.L.는 스자쿠를 보고서 잠깐만, 하고 입을 열었지만 문이 닫힌 이후부터는 문밖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뒤로 돌아서 가버리는 스자쿠의 매정한 뒷모습에 다시 입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스자쿠가 어디 사는지 알아냈으니, 뜻밖의 행운 아닌가.
L.L.는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면서, 발이 닿는대로 마구잡이로 걸었다. 몸은 기억하고 있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고, 어느새 처음으로 걸었던 제로 광장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저녁이 되어 해질녘도 한참 지나 어둠이 내려 앉은 거리에는 붉은 등이 걸려 있었다. 광장을 지나서 한 블록만 더 가면 그 붉은 빛이 넘실거리는 거리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야밤에 불을 켜놓고 장사를 하는 곳의 의미는 대체로 비슷했다.
L.L.는 얼굴에 두른 천을 단단하게 둘렀는지 확인하고서는 광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이 얼굴로 사는 동안 얻은 경험이, 여기에서 걸린다면 높은 확률로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걸어도 조마조마했다. 제로 광장을 지나서 스자쿠가 머무는 곳까지 가는 동안에는 호텔이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반대방향에 호텔이 있을 것이다. 호텔이 과연 멀쩡한 호텔인지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순 없지만, 이런 곳에서 노숙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L.L.가 붉은등의 거리를 지나가기 전에 호텔 하나를 발견했지만, 아무래도 불길해보이는 호텔이었다.
‘러브♥︎파라다이스 호텔’
하트마크의 네온사인이 거의 꺼지기 일보 직전으로 간판 조명은 너덜거리고 있었다. 낡아빠진 호텔 주변엔 스쳐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과연 여기로 들어가도 괜찮을까.
L.L.는 두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근육의 이완을 돕는 심호흡을 두세 차례 하고서 호기롭게 문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아마 어쩐 남자가 L.L.의 손목을 잡지 않았다면 분명 들어갔을 것이다.
“오! 나는 이정도로 마르고 키 큰 여자랑 하고 싶었는데~ 장사하는 중이야? 얼굴이 안 보이는데 보여줄래? 좀 예쁘면 서비스 많이 줄게.”
누가 여자라는 거냐,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용이 너무 황당해서 상대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손목을 뿌리치고 걸으려고 하면 남자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뭐야, 비싸게 굴지 마, 창녀 주제에!”
“이거 놔!”
“이런, 젠장. 남자야?!”
목소리 한 번으로 남자인 걸 알면서 남자는 실망한 기색은 그대로임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으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L.L.의 손목을 꽉 쥔 채로 다시 흥정에 들어섰다.
“남자라도 좋아. 오늘은 누굴 박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기분이니까 숙박비는 내가 내주지.”
“누가 기분을 내달래?! 꺼져!”
“근데 진짜 남자인가…?”
L.L.에게 ‘박아보겠다’고 말한 남자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무방비해진 틈을 타, 남자는 L.L.의 사타구니 사이를 손으로 헤집었다. 우와, 진짜 남자네. L.L.의 성기를 한 번 손으로 훑은 남자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다시 말을 덧붙였다. 망할 자식이, 누구 좋으라고! L.L.는 손목을 빼내려고 했으나 몇 달 사이에 마른 몸에 체력이 돌 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L.L.는 눈만 내놓고 있던 천을 살짝 끌어내려 시야를 확보했다. 남자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에 기어스를 걸었다.
“지금 당장 나를 놔!”
기어스는 강력한 힘이다. 나름 왕의 힘이라고 불리던 것을 이런 색마에게 쓸 줄은 몰랐지만. L.L.는 느슨해지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호텔로 달려들었다. 호텔 로비에서도 기어스를 쓰고서 별 무리 없이 열쇠를 받아낸 뒤에 방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타고 오르는 동안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상한 녀석에게 붙잡혔다는 것과 남창 취급을 받았다는 것, 그것에 기어스가 없었더라면 어떤 꼴을 당했을지 떠올리고 나면 기분이 나빠서 구토감이 들었다. 하지만 토하는 대신에 기절을 하고 말았다.
멀어져가는 의식 사이로 그래도 오늘은 스자쿠를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나니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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