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잠을 깬다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다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도, 사람의 인기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스자쿠로 여겨지는 사람의 발소리가 L.L.가 머물고 있는 방 앞에서 멈추었다. 똑똑, 나뭇살을 두드리는 소리에 L.L.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자쿠의 목소리가 들렸다.
“를르슈, 일어났어?”
“…응, 일어났어.”
“아침 먹을거지? 나츠미 씨가 준비하고 있는데.”
완벽한 손님 대접에 L.L.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벌써 준비를 다 마친 모양인지 스자쿠는 옷차림을 다 갖춘 모양새였다.
“아, 목욕 먼저 할거면 안내해줄게.”
아침 식사를 돕겠다는 이야기였지만, 스자쿠의 손님 대접이 계속 이어지는 마당에 흐름을 끊기가 어려웠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고 그를 따라나섰다.
“잠은 잘 잤어?”
“아, 잘 잤어. 너는?”
“나도 잘 잤지.”
“스자쿠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렇게 일찍은 아니야. 가끔 일찍 일어나면 나츠미 씨를 따라서 새벽장을 보러 다니기는 하는데, 요즘은 저녁 일을 돕고 있으니까 그럴 여유가 없네.”
욕실에 다다르면 스자쿠는 수건을 갖다주었다. 갈아입을 옷도 가져다줄까? 그의 지극정성에 L.L.는 고개를 저었다. 부엌은 어제 설명했떤 곳에 있어. 세 명이 앉아도 충분하니까 꼭 와야 돼, 나츠미 씨 밥은 맛있으니까. 스자쿠의 당부에 L.L.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멀리 사라지는 스자쿠의 소리를 들으면서 L.L.는 욕실에 들어갔다. 찬물로 머릿속을 비우듯이 끼얹고 샤워를 했다. 아침을 꼭 먹어야한다고 말하는 스자쿠의 당부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다음에야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스자쿠와 나츠미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이거 좀 가져다 줄래? 그리고 이것도.
냉장고에 있는 새우장도 꺼낼까요?
아, 를르슈 씨가 못 먹는 거일수도 있을 텐데.
그럼 물어보고 꺼낼까요?
도란도란 들리는 그 소리가 꽤나 아늑하게 들렸다. 그 평화로운 광경에 자신이 끼는 것이 불안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그것이 몹시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 치더라도, L.L.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기분에 혼자서 멍하니 빠져있을 무렵에, 발걸음은 어느덧 부엌에 닿아서, L.L.는 나츠미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닿자마자 나츠미는 L.L.에게 ‘를르슈 씨!’하고 다정하게 불러주었다. 밥그릇을 놓고 있던 스자쿠도 바로 고개를 돌려 L.L.를 보았다.
“를르슈 씨, 새우 좋아해요?”
“새우요? 좋아합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스자쿠 군, 새우장도 꺼내줄래?”
“알겠어요.”
셋은 낮은 식탁에 둘러 앉았다. 일인분의 양만큼 덜어져 있는 음식들은 맛있어 보였다. 스자쿠의 밥이 제일 많았고, 나츠미의 양이 제일 적었다. L.L.는 자신이 평소 먹는 양보다 많은 밥을 보면서 기합을 넣으며 반찬과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밥은 맛있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했다. 느껴본 적 없는 이 분위기의 기시감이 L.L.를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맛있는 밥을 먹어놓고도 얹힌 속에 L.L.는 마당에 앉아서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앉아있게 되었다.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식사 후반부터 안색이 안 좋은 L.L.의 모습에 나츠미와 스자쿠가 극구 말렸기 때문이었다. 스자쿠는 설거지를 하고, 마당에 L.L.를 앉혀놓은 나츠미는 L.L.가 먹을 소화제를 사러 가겠다고 나가버렸다.
코드가 참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제는 열이 오르는 감기, 오늘은 소화불량이라니. L.L.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등 뒤를 툭툭 건드리는 손에 뒤를 돌아보면, 스자쿠의 손가락이 뺨울 콕 찌르고 있었다.
“헤헤, 걸렸다.”
“애 같기는.”
“나츠미 씨는?”
“소화제 사러 다녀온대.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나츠미 씨는 보살피는 걸 좋아하니까.”
속은 괜찮아? 스자쿠 역시 나츠미와 비슷한 목소리로 L.L.에게 물었다. 뒤집힐 것 같았던 속은 가라앉은 지 제법 되었고, 바깥바람을 쐬고 나니까 확실히 기분도 개운해졌다.
“좀 나아졌어.”
“여기 있는 거, 불편해?”
“응? 아니.”
“솔직하게 말해. 내가 마음대로 데려온 거라서, 죄책감 정도는 느끼고 있거든.”
“솔직하게 말해도 하나도 안 불편하고 오히려 잘해줘서 고마울 지경이라고 하면 믿을거냐?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이유가 뭐야?”
“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어.”
“뭘?”
“…를르슈는 왜 나를 찾아왔어?”
나는 를르슈 같은 손님 본 기억도 없는데. 소문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나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잖아.
스자쿠의 말에 무어라 핑계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스자쿠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L.L.는 알 수도 없고, 그거셍 관여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질문에 대답해주고 싶은 것은, 스자쿠가 듣고 싶어하는 정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정답을 말하는 것은 어려웠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그럴싸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스자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 결론에 달하는 순간, L.L.는 말했다.
“전생의 인연 정도가 아닐까?”
“너, 점쟁이야?”
“뭐? 아니야,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이상한 소리만 하네…”
“거짓말보단 낫지?”
“를르슈는 안 그렇게 생겨서 이상한 말이나 하고, 거짓말도 구닥다리 작업 멘트처럼 하네. 여자한테 인기 없지? 왠지 그럴 거 같아,”
“사실을 말해줘도 안 믿는 건 자기 손해야.”
L.L.는 스자쿠의 볼을 쭉 잡아당기면서 그의 괴상해진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L.L.의 웃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자쿠는 아무말이 없다가, 현관에서 사람 들어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나, 나츠미 씨가 온 거 같으니까, 가봐야 돼!”
“그래. 아, 나츠미 씨랑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무슨 이야기?”
“여기 머무는 동안 하는 게 없으면 좀 그러니까….”
“나츠미 씨 시, 시중은 내가 들 거야!”
“응? 아니, 스자쿠 일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내가 간단하게나마 도울 일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이래보여도 너보단 어른이니까.”
마지막 ‘어른’이라는 말에 스자쿠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돌아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가 멀어지는 소리 사이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아들을 순 없었다.
스자쿠가 마중을 나간 나츠미는 곧 물 한 잔과 소화제를 들고 L.L. 앞에 나타났다.
“뭔가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스자쿠 군의 손님이니까 잘해주고 싶거든요.”
“아뇨, 충분히 잘해주셔서.”
“그래요? 아니면 오늘 밥이 별로였을까요?”
“그냥 오랜만에 사람들이랑 밥을 먹는 거라 좀 긴장했나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L.L.가 약을 먹고 물로 삼키는 것을 본 나츠미는 저에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무전취식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간단하게 도울 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사실대로 말하고 나면 나츠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를르슈 씨는 무엇을 할 줄 아시죠?”
“뭐든 알려주시면 어지간하면 다 할 줄 압니다. 아, 몸을 쓰는 건 좀 형편없지만요.”
“힘쓰는 일이라면 차라리 스자쿠 군에게 맡기는 게 낫겠죠?”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후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를 찾아온 정적은 웃음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로 그 자체만으로도 침묵을 만들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L.L.는 자기 소개 같은 말을 더 늘어놓아야만 했다.
요리는 어지간해서는 재료를 다 다룰 줄 알고, 장부 정리도 꼼꼼하게 하는 편이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나츠미가 훌륭한 인력이라고 감탄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말한 요리 실력을 오늘 봐도 괜찮을까요?”
“맡겨주시면 좋겠네요.”
“그럼 오늘 저녁에 스자쿠 군이랑 저녁 장을 같이 보는 것까지 부탁드릴게요.”
“네,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 해보죠.”
의기양양한 L.L.의 목소리에 나츠미는 가디건의 소매 끝자락으로 입을 가린 채로 웃었다. 저녁이 기다려지네요, 하고 나츠미의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나츠미를 찾는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나츠미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저녁에는 외출을 하게 되었다며 미안해했다.
“제가 마중 나갈까요?”
“아냐, 스자쿠 군은 를르슈 씨랑 저녁 먹고 일찍 자렴. 내일이면 또 일이 많아질 수도 있잖니.”
나츠미와 스자쿠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이 대화를 나누었다. 나츠미의 괜찮다는 말에 스자쿠는 어딘가 의기소침해졌지만, 곧 밝은 얼굴로 나츠미에게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햇살이 따갑지도 않게 부드럽게 내리쬐는 오후가 될 무렵에는 다같이 어제 널어둔 빨래를 걷었다. 솜씨 좋게 마른 옷가지들을 개키는 L.L.의 손놀림에 스자쿠도, 나츠미도 의외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래보여도 자기 할 일은 스스로 할 줄 아니까.”
어제 열이 난 여파로 아직까지도 몸이 나른했던 L.L.는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옷을 정리하러 간 나츠미를 스자쿠와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구 들뜨지도 않았다.
스자쿠에게 돌아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이 부드러운 공간에서 스자쿠가 웃을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L.L.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모처럼 다시 만났지만 그를 위해서 해야할 말이나, 하고 싶었던 말이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마음이 홀가분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서 L.L.는 떠나는 때가 오길 바랐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머물 L.L.의 방을 청소하는데 모두가 힘을 썼다. 바닥과 창틀, 보이지 않는 곳의 구석구석까지 다시 한 번 훑고 닦았다. 검게 먼지투성이가 된 걸레를 나츠미와 L.L.가 빨고, 스자쿠가 꽉 짜서 마당에 널어두었다.
바람이 회색빛의 천조각을 흔들고 가는 것을 세 사람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잔잔한 시간이 흐르던 중에, 나츠미를 찾는 전화는 한 번 더 울렸고, 나츠미는 전화를 받고 나서 나갈 준비를 위해서 자리를 비웠다. 나츠미는 자리를 뜨기 전에 스자쿠에게 오늘 저녁 장을 볼 돈을 맡기고 갔다.
“나 없다고 너무 맛있는 거 해먹으며 안 돼, 스자쿠 군.”
“안 그래요.”
“그럼 를르슈 씨도 약속해줄래요?”
“물론입니다.”
나츠미의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작아졌다. 스자쿠는 묵직해진 주머니를 들고서 L.L.에게 저녁으로 무얼 먹고 싶냐고 물었다.
“네가 해주게?”
“아니…. 음, 그래, 를르슈는 손님이니까 내가 해줄까?”
“됐어. 오늘 나츠미 씨한테 내가 요리한다고 했으니까, 내 실력도 보여줄 겸 해주지.”
“정말? 뭐 할 수 있어?”
“레시피가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오늘은 해보고 싶은 게 있긴 있어.”
“해보고 싶은 거?”
스자쿠의 되묻는 말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햄버그 좋아해?”
“응! 를르슈도 햄버그 좋아해?”
“너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지. 나츠미 씨는?”
“냐츠미 씨도 좋아해. 그런데 손이 많이 가서 힘들다고 그랬어.”
“그럼 나츠미 씨 몫까지 만들어둬야겠네.”
“이정도 돈이면 셋이서도 충분히 햄버그 먹을 수 있어.”
자랑스럽게 돈을 늘어놓는 스자쿠를 보면서 L.L.는 소리 없이 웃었다. 웃는 L.L.를 보던 스자쿠가 물었다.
“그래서, 를르슈는 햄버그 좋아해?”
햄버그, 한번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자신이 만든 햄버그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스자쿠의 얼굴을 보는 것이 기분이 좋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흘렀고, 지금의 스자쿠는 예전의 스자쿠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꽤나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L.L.는 거짓말을 했다.
“응, 좋아해.”
L.L.의 거짓말이 들킨 것인지, 스자쿠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어딘가 헤메는 것 같은 시선으로 L.L.에게서 눈을 돌렸다. 어디를 쳐다보는지 모르는 그런 얼굴로 스자쿠는 저녁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아마 거짓말이 들킨 게 아닐까. L.L.는 입맛이 썼다.
화장을 하고 난 나츠미는 그 붉은 등이 걸렸던 거리에서 보았던 여자들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옷은 안 들고 가도 되나요? 스자쿠는 그 모습이 익숙한지 나츠미의 옷을 보고서 그렇게 말했다. 가슴이 깊게 파인 옷 위로 가디건을 걸쳐 입은 나츠미는 괜찮다고 말했다.
“오늘은 얼굴만 비춰달라고 했으니까.”
“정말 안 데리러 가도 괜찮아요?”
“그럼. 걱정하지 마”
나츠미는 스자쿠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가볍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까지 부드러웠다.
“하여간, 스자쿠 군은 걱정이 많다니까. 를르슈 씨, 스자쿠 군.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환하게 웃으며 나가는 나츠미를 배웅하고 나면, 스자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아냐…. 나츠미 씨 말대로 난 걱정이 엄청 많거든.”
걱정이 많은 것은 스자쿠 답지 않다.
예전에 느꼈던 그 이질감이 익숙해지지 않은 느낌으로 다시 와닿았다. 나츠미가 떠난 후의 스자쿠는 웃고 나서도 쓸쓸한 느낌이었다. 햇살 같이 웃던 나츠미의 부드러움이 없는 스자쿠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L.L.는 그 위태로움을 받아줄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L.L.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덜 흔들고 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지금의 스자쿠에게는 를르슈가 알고 있었던 ‘쿠루루기 스자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 장 보러 갈까?”
나츠미가 떠난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스자쿠가 L.L.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나이에 남과 손을 잡는 것이 부끄러운 나이일 텐데도, 스자쿠의 손을 잡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그 손은 기억 속에 있던 스자쿠의 손보다 작았지만, 그 따뜻함은 변하지 않았다.
나가기 전에는 들어왓을 때와 똑같이 얼굴에 긴 천을 둘렀다. 스자쿠는 꼼꼼하게 얼굴을 가리는 L.L.의 모습을 보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이 간지러워서, L.L.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가 궁금해할 질문의 답을 해주었다.
“극악무도한 황제를 닮았다고, 나름 험한 꼴을 많이 봤거든.”
“뭐? 아, 그 를르슈 황제? 그러고보니 이름도 똑같네.”
“부모의 악취미지.”
일전에도 했던 거짓말은 유용했다. 스자쿠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현관으로 튀어나갔고, L.L.도 그가 기다리지 않게 서둘러 나갔다. 스자쿠가 향한 시장은 L.L.가 머물렀던 호텔이 있던 곳과 반대 방향에 있었다. 한참을 걸어야 끝이 나오는 시장에 스자쿠는 길을 헤매지 않고서 들러야할 곳을 찾아냈다. 그는 의외로 흥정도 잘했다.
햄버그를 만드는 것은 오랜만이었지만, 이전과 그랬듯이 크게 어렵진 않았다. 스자쿠는 손재주가 좋은 L.L.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말없이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만 들리는 부엌은 평화로웠다.
그저 지금에만 충실한 느낌이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 지경이었다. 실수하지 않을까, 긴장하게 되는 것은 L.L. 밖에 없었다. 햄버그에 끼얹을 소스는 적당히 통조림에 든 것으로 고름으로써 끝이 났다.
스자쿠와 L.L.만 있는 저녁 식사 자리는 나츠미의 빈자리 만큼의 침묵이 있었지만, 그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L.L.는 스자쿠의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햄버그 스테이크를 먹고 맛있다고 말했고, 나머지 반찬들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양만 덜어서 입에 넣는 모습까지도 그가 어딘가 흐트러진 곳 없이 잘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정작 요리를 하면서 가장 배고팠을 L.L.는 많이 먹질 못했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스자쿠의 행복과 안녕에 대해서 집착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하나 남은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이것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그 아쉬움도 가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꿈속의 스자쿠가 했던 말들이 떠오르곤 했다.
나의 무의식은 나나리도 아니고 왜 스자쿠를 선택하는 걸까.
생각에 잠기면 먹는 것도 잊은 채로 눈앞의 스자쿠만 한정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좀 이야기라도 할까? 나는 원래 말주변이 없어서, 잘 말하지는 못하지만.”
“굳이 어려운 이야길 꺼낼 필요는 없어. 그냥, 좀 헛생각이긴 해.”
“물어보면 안 돼?”
“안 될 건 아니지만.”
“그럼 무슨 생각했어?”
무슨 생각을 했냐니, 솔직하게 말하면 믿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스자쿠와 나츠미에게 L.L.는 꿈 이야기와 전생 이야기를 하는 정신 나간 나그네로 비춰질 지도 모른다. 그런 비웃음을 사고 싶진 않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그렇게나마 기억이 된다면 또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L.L.가 떠나고 나서도, 그들이 L.L.의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제법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물어볼 수는 있지만,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군.”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나나리와 스자쿠,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이라 쉽게 입 밖으로 내기가 어려웠다. 그 둘과 관련해서 거짓말은 몇 년이 지나도 힘들었다.
“뭐야, 대답해줄 것처럼 말하더니.”
이번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웃기만 했다. 스자쿠도 두 번을 물어보진 않았다.
설거지는 스자쿠가 혼자서 했다. 어제에 이어서 물소리를 들으면서, 부른 배를 겨우 꺼트리기 위해 L.L.는 부지런히 마당을 돌았다. 마당에는 책과 신문이 구석에 쌓여있고, 안 쓰는 물건들도 차곡차곡 모여진 채로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화분도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나츠미의 취향 같았다.
설거지를 마친 스자쿠는 어디론가 가더니, 곧 를르슈의 앞에 방금 전 외출할 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를르슈, 나 나츠미 씨 마중 나갈게. 집에 혼자서 있을 수 있지?”
꼭 어린애한테 하는 말 같았다. 생긴 모습을 보면 L.L.보다 스자쿠가 훨씬 어린애지만.
“나도 같이 갈게.”
“아냐, 를르슈는 이상한 사람이 꼬일 수 있잖아.”
“이상한 사람이라니.”
“지난 번엔 대놓고 남창 취급 받았잖아. 나야 여기서 나츠미 씨한테 팔린 애라는 걸 다들 알아서 넘어가긴 하지만.”
“너는… 음, 유명인사인가?”
“유명하다면 유명해. 돈벌이는 못하면서 돈 나가게 하는 애라고.”
미묘한 자기비하다. 스자쿠는 집을 잘 보고 있으라고 당부하듯이 말해놓고 벌써 어두워진 밖을 향해 걸어갔다. 다시 한 번 같이 나가자고 하려다가 스자쿠가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어지간해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고 나니 포기하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텅빈 집을 혼자서 지키는 건 지루한 일이었다. L.L.는 마당을 빙글빙글 도는 것도 그만두고, 저에게 주어졌던 손님 방으로 걸어갔다. 가는 복도에 활짝 열려있는 스자쿠의 방이 보였지만, 안을 구경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해서, 애써 호기심을 억누른 채로 방으로 향했다.
달이 뜨지 않는 밤인데도 빛은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L.L.는 제대로 닫히지 않은 미닫이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에 눈을 떴다. 복도의 건너 건너로 느껴지는 작은 불빛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 것은 어떤 소리 때문이었다.
소리는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였다. 새된 비명을 내지르기도 하면서, 무엇보다 그 목소리는 낯선 색을 감은 채로 스자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L.L.는 성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다. 오히려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인간들에 대해서 더 잘 알면 알았지, 그들의 욕구에 대해서 모를 수는 없었다. L.L.에게도 성욕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성욕을 들게 하는 대상이 없었다. 그 결과 기계적인 행위로 전락해버린 자위는 성욕과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흔적처럼 남아버린 불필요한 욕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 밖, 복도 너머에서는 그 성욕에 대해 휩쓸리고 있는 여자가 있다. 나츠미의 목소리라고 깨닫는 것은 미닫이문을 반쯤 열고 나서였다. 스자쿠의 잠긴 목소리가 나츠미 씨, 하고 부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턱을 넘는 것은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한다는 의무감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L.L.를 괴롭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L.L. 안의 무언가가 그것을 확인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늘 열려있던 스자쿠의 방문이 반쯤은 닫혀있었다. 마치 엿보기를 종용하는 것 같았다. 안에서는 두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질척한 소리, 옷자락이 살갗에 구겨지는 소리, 입술과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 빨아들이는 소리, 삼키는 소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L.L.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그렇게 순진무구하지도 않다.
하지만 스자쿠는 어리잖아. 아직 열네 살이잖아.
나츠미 씨는 스자쿠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스스로가 얼마나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가늠할 수 있었다. 섹스를 하고 아이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나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으며, 쾌락 역시 그것에 관계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니 ‘스자쿠는 어리다’는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가.
L.L.는 스자쿠와 나츠미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츠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그녀의 피부를 혀로 덧그리고 있는 스자쿠는 그런 일에 능숙해보였다. 나츠미를 맛보면서 연결된 허리 아래를 움직이는 것, 그 소리가 방 안의 모든 것들을 녹여버릴 것처럼 질척거렸다.
둘은 섹스를 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츠미는 스자쿠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스자쿠, 스자쿠 군, 좀 더, 세게, 아, 아, 아아아…! 그녀의 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스자쿠도 나츠미의 이름을 불렀다. 나츠미, 씨, 으읏, 하, 하아. 숨을 고르면서 혀를 섞으면서 서로의 타액을 삼키는 모습까지, 둘은 꼭 하나처럼 얽혀있었다.
“스자쿠 군, 좋아해, 좋아해….”
스자쿠의 사정은 나츠미의 배 위에서 이루어졌다.
L.L.는 스자쿠가 사정하는 순간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완벽한 어른처럼 인상을 썼다. 그리고 그는 사정하는 순간에, 나츠미가 하는 좋아한다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츠미가 사랑한다고 말하자, 이번엔 스자쿠는 키스를 해주었다. 그 모습은 사랑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어서 연인에게 답하는 키스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꼭 듣기 싫어서 나츠미를 밀어내려고 하는 키스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스자쿠의 모습에서 제가 알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본 것 같아서, L.L.는 어딘가 기뻤다. 그 감정을 깨닫자마자 스스로를 떨쳐내기 위해서, 훔쳐보았던 문틈에서 벗어나서 빠르게 방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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