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기도 전에 느껴지는 이물감과 통증에 L.L.는 이불 안에서 몸을 한 번 웅크려야 했다. 이불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마도 온갖 체액들이 다 섞인 그런 냄새일 것이다. 기분이 나빠져서 내치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상대는 스자쿠였다. 그것도 원래 알던 스자쿠가 아니라 다시 태어난 스자쿠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다시 태어난 스자쿠와, 그것도 어린 스자쿠와 섹스를 했다.
정정한다. 섹스가 아니라 강간을 당했다.
L.L.는 자신의 첫 경험이 스자쿠의 강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섹스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법한 청소년기에는 테러 활동 중이었기에 성적인 관심사에 대해서는 무관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생각했지, 누군가에게 강간당함으로써 자신이 동정도 아니고 처녀를 잃게 될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무거운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엉덩이 사이에서 무언가가 흐르는 끔찍한 기분을 모르는 척 하고 싶어지는 마음까지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는 바닥이 짓눌리는 발소리가 들렸고, 아마 스자쿠, 운이 나쁘면 나츠미일 것이다. 스자쿠여도 싫고 나츠미여도 싫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꼴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를르슈, 일어났으면 씻어.“
스자쿠였다.
어딘가 명령조로 말하는 그 어투가 기분이 나빠서 L.L.는 덮고 있던 이불을 집어 던지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섹스 후에 처음으로 격하게 움직인 탓에 허리와 골반이 덜덜 떨리는 통증이 이어졌다. 뭐라고 쏘아붙이려던 입은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와서 화를 내주겠다는 마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아파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만 절로 들었다.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면 아플 거야. 못 움직이겠으면 내가 업고 가줄까? 아니면 안아줘?”
“아, 안아주다니. 됐어! 떨어져!”
스자쿠가 받아주는 품 안에서 나자빠진 L.L.는 급하게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스자쿠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로 일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어젯밤을 생각하면 드러누워 있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이 흘러내리는 것 같아서 괜히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스자쿠가 귀찮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제 더한 것도 했잖아. 이제 와서?”
“…너 말이야, 강간범이 뻔뻔하게 구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강간범?”
“그래!”
“나?”
“그럼 너 말고 누가 있어!”
강간범이라는 말에 스자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를르슈도 좋아했잖아. 중간에 기분 좋다고 말하기도 했고.”
“시끄러워!”
때마침 욕실에 들어가면 L.L.는 자기를 부축하고 있던 스자쿠의 팔을 내치려고 했다. 그러나 L.L.의 힘은 스자쿠를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스자쿠의 팔에 붙들려서 미끄러지려는 몸을 매달리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젠장.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그런 L.L.가 짜증날 법만도 한데, 스자쿠는 더 이상의 짜증을 받아치기보다는 정중하게 그의 몸을 붙들면서 돕겠다고 했다.
“됐어, 필요없어.”
“솔직하게 말하면 배 안에 있는 정액 빨리 긁어내야 돼. 안 그러면 배 아프니까.”
“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꺼.”
“제대로 할 것 같지도 않은데. 도와줄게.”
“싫다니까!”
“아픈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게 말하는 스자쿠는 사람의 섬세한 부분을 마구잡이로 헤집어놓았던 사람치고는 조금은 상냥한 손길로 닿아왔다. 찬 욕실 바닥에 서있으면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어 몸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L.L.의 그런 반응에 스자쿠는 한숨을 쉬면서 그가 모양만 걸치고 있는 옷가지들을 벗겼다.
섹스할 때와 같은 기류는 느껴지지 않았다. 스자쿠는 정말 L.L.를 씻겨주기 위해서 들어온 사람 같았다. 스자쿠는 L.L.를 벗겨놓고 나서 욕조 안으로 그를 밀어넣었다.
“미안.”
갑자기 튀어나온 스자쿠의 사과에 L.L.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자쿠의 시선은 L.L.의 가슴팍에 박힌 채로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한 번 사과가 이어졌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했는 줄 몰랐어.”
“…정도에 대해서 사과하는 게 아니라 사고 자체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지. 이 발랑 까진 자식아.”
“그러네, 사과를 한다면 그래야 하겠지만….”
뭐랄까, 를르슈랑 한 건 사과하고 싶지 않아. 나쁘다면 나쁜 채로 있는 것도 좋을 거 같아.
스자쿠의 말장난 같은 말에 L.L.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자쿠는 따뜻한 물이 L.L.의 몸 위로 쏟아지게 했다. 스자쿠가 남긴 흔적 위로 물이 닿자 따갑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자기 가슴팍을 보니 스자쿠가 사과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울긋불긋한 데다가, 유두는 퉁퉁 부어있어서 쓰리기까지 했다.
“입으로만 사과할 게 아닌 거 같은데….”
“때린다면 맞아는 줄게.”
그 말은 L.L.가 저를 때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 같았다. 때릴 마음도 없었지만 괜히 얄미워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여전히 밀리지도 않았다.
“나츠미 씨가 오기 전에 빨리 하고 나가야 돼.”
“나츠미 씨는 내일 모레에나 올 걸.”
“…….”
“나츠미 씨한테 인사는 하고 가. 자기 손님도 이렇게 잘 대해주시진 않으니까.”
“네가 전해주면.”
“싫어.”
“…….”
“를르슈는 빨리 가고 싶어?”
비눗물을 묻힌 샤워 타월이 L.L.의 몸을 훑고 갔다. 스자쿠의 손길은 그때처럼 집요하기 보다는 건조하게 씻기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L.L.는 어깨에 줬던 힘을 빼면서 긴장을 풀었다.
“빨리 가려고 하지 마.”
“너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런 말을 하네.”
예전에도 그랬지.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L.L.는 뒷말을 삼켰다. 저에게 다 상처가 되고 낫지 않는 흉터가 되었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괴로웠다.
“알려주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야.”
“알고 싶어?”
“물어봐도 돼?”
고개를 끄덕이면 스자쿠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했다.
“나를 왜 찾아왔어?”
“내 친구가 너를 닮았어.”
“……부모님과 닮았을까? 내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죽었어.”
“네 부모와 관계 없어. 아마 내 친구는 너일거야.”
“나는 를르슈를 만난 적이 없어.”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건…이상하잖아.”
스자쿠의 손은 허벅지를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제는 팽팽하게 발기했던 성기를 가볍게 물로 씻기고, 그 뒤로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부어있는 입구를 따뜻한 물로 풀어서 안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은 뱃속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있잖아, 를르슈의 친구는 어땠어?”
“흐으, 이, 런 짓은 안 했지.”
L.L.는 정액이 허벅지 사이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스자쿠의 손가락이 일부러 내고 있는 소리에 낮게 신음했다.
“그 사람이랑 섹스 안 했어?”
“섹스, 가 아니라, 강간이지. 이건.”
“처음을 친구랑 했네, 를르슈.”
“이런 건, 노 카운트다!”
“실컷 즐기고 나서 그런 말을 하면 별로, 소용 없지 않을까?”
스자쿠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L.L.가 느꼈던 안쪽을 콱 찍어눌렀다.
“친구랑 사이 좋았어?”
“아아, 그럭, 저럭….”
“섹스할 정도로 좋진 않았고?”
“시끄러워, 너…!”
“뭐라고 불렀어, 그 친구.”
“……스자쿠.”
“이름도 똑같네.”
“너는 그 녀석이니까.”
그것은 L.L.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적의 존재를 인정하고 말아버린 문장이 되어버렸다. 를르슈가 제가 아닌 ‘그 녀석’을 봐버리는 것에 기분이 상한 스자쿠는 기분 좋게 문지르고 있던 를르슈의 안에 손가락을 마구잡이로 두 개를 더 넣었다. 세 개가 된 손가락이 안에서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난잡하게 움직이는 것에 L.L.는 허리를 덜덜 떨면서 발기한 아래를 감추려고 손을 뻗었다.
“나는 나야, 를르슈.”
“흐응, 응, 그만, 아, 움직이, 지, 마, 하아, 아아!”
“를르슈가 긁어내는 거에 이렇게 느끼게 만드는 건 내가 하고 있는 거야.”
“하앗, 알겠으니까, 그만, 그만…!”
가볍게 또 가버리고 마는 를르슈의 정액을 손으로 휘감으면서 스자쿠는 그것을 흐르는 물에 씻었다. 타액이 흐르고 있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L.L.에게 키스를 하면 L.L.는 그의 혀에 휩쓸리듯이 키스에 응했다. 스자쿠의 옷이 젖는 것도 모르는채로, L.L.는 스자쿠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아줄 거면서 왜 계속 밀어내려고만 하는 걸까.
스자쿠는 L.L.를, 를르슈를,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스자쿠와 L.L.의 섹스는 끝이 났다.
도중에 L.L.가 한 번 기절하고 나서, 스자쿠는 힘이 빠진 그의 몸을 끌어안고서 이유 없이 눈물을 한바탕 쏟았다. 왜 울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를르슈와 한 섹스는 기분이 좋고, 나츠미와 하는 섹스보다 더 사람을 깊게 끌어안아 를르슈의 안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끌어안고, 안에 사정을 하고 그를 자신의 것으로 가득 채워도 나오는 것은 눈물뿐이었다. 스자쿠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스스로도 왜 울고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울만한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스자쿠가 아쉬운 것은, 를르슈가 기절했다는 것과 기절한 를르슈를 안고 있는 것은 깨어있는 를르슈를 안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 두 가지 밖에 없었다. 를르슈가 하는 말들은 전부 다 이상하고, 스자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친구를 닮아서, 친구와 나는 같으니까, 그러면서 섹스를 했더니 강간범이라고 하고, 설령 강간이라고 하더라도 두 번째 섹스는 섹스였다.
아귀가 맞지 않는 를르슈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냈다. 잠에 빠진 를르슈는 정액을 긁어내는 손길에 작게 신음만 할 뿐이었지 일어나지 않았다. 스자쿠도 더 이상 흥분하지 않았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손의 크기는 비슷했다. 체온은 스자쿠가 더 높았다. 하지만 키는 아직까지 를르슈가 훨씬 컸다.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싫긴 했지만, 를르슈가 나이가 더 많은 것은 확실했다. 나이를 물었을 때, 열네 살이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 말투가 생각나서 괜히 입술 부분을 툭툭 건드렸다.
를르슈의 입술은 키스로 인해 부어있었다. 스자쿠의 입술이 드나들었던 곳은 거의 다 부어있었다. 스자쿠는 손끝으로 만지던 를르슈의 입술에 고개를 가까이했다. 그의 벌어진 입술이 무언가를 소리내어 말하고 있었다.
스자쿠,
라고 말하고 있었다.
—왜 자면서 내 이름을 불러?
—나를 왜 찾아왔어?
많은 질문들이 스자쿠의 안을 가득 채우고 그의 입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했지만 스자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를르슈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스자쿠는 색색 소리를 내며 자는 를르슈를 보고만 있었다.
“를르슈.”
“…….”
“너는 누구야?”
스자쿠의 목소리에 를르슈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나츠미와 섹스가 끝나면 스자쿠는 씻으러 가고, 그 사이에 나츠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기에, 스자쿠는 섹스가 끝난 이후로 자기 옆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어색하고 신기했다.
그것이 를르슈라고 생각하면 더 묘한 기분이었다.
누구냐고 물어도 를르슈는 를르슈일 뿐이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잡으면서 잠을 잤다. 정말로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 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
| 12 | Re:play Re:peat 4 | 2020.05.28 |
| 11 | Re:play Re:peat 3 | 2020.05.28 |
| 10 | Re:play Re:peat 2 | 2020.05.04 |
| 9 | Re:play Re:peat 1 | 2020.05.04 |
| 8 | Re:play Re:dial 8 (完) | 2020.05.03 |
| 7 | Re:play Re:dial 7 | 2020.05.03 |
| 6 | Re:play Re:dial 6 | 2020.05.03 |
| 5 | Re:play Re:dial 5 | 2020.05.03 |
| 4 | Re:play Re:dial 4 | 2020.05.03 |
| 3 | Re:play Re:dial 3 | 2020.05.03 |
| 2 | Re:play Re:dial 2 | 2020.05.03 |
| 1 | Re:play Re:dial 1 | 2020.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