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로 스자쿠와의 대화는 어딘가 어색해졌다. 를르슈는 휴대폰으로 이제껏 스자쿠와 나눈 대화를 살펴보았다. 눈에 띄게 피한다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구는 것은 없지만 무언가 거리를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거리를 두고 있는 건 내 쪽인가? 그런 생각이 들고 나면 괜히 그런 말을 한 것이 후회가 되는 것이었다. 그냥 분위기에 맞춰서 대답하는 것이 좋았을까. 그렇지만 스자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내키지가 않았다.
를르슈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미래는 단순했다. 로로와 나나리가 있고, 조금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가정을 아낄 줄 아는 어머니가 있고, 스자쿠도 제 옆의 적당한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미래. 그 사이에서 관계라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스자쿠와는 연인으로서도 좋고, 친구로서도 좋다. 배우자로서의 관계를 맺는 것도 어쩌면 좋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굳이 결혼 같은 형식이 필요할까, 라고 생각하면 를르슈의 대답은 No였다. 타당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하자고 하면 피하기 위해 내세울 명분 같은 것도 없었다. 막연하게 싫은 것은 이유가 될 수 없겠지. 를르슈는 휴대폰의 화면을 끄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를르슈가 지금의 거리감을 느끼는 것과 다르게 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다면, 두 사람의 애정전선에는 크게 이상이 없는 것이다.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형, 바빠?”
“로로.”
“숙제하다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나나리도 모르겠대.”
“그래? 그럼 같이 봐줄게.”
타이밍 좋게 분위기를 바꿀 일도 생겼다. 를르슈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쌍둥이 동생들의 공부를 봐주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 둘러앉아서 책을 늘어놓고 있는 쌍둥이들은 꽤나 고전한 흔적이 역력했다. 를르슈의 등장에 혼자서 끙끙거리며 문제를 붙들고 있던 나나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라버니!”
“모르는 게 있다면서?”
“네. 이 문제랑 이거에요. 아, 그리고 뒤에도 있어요.”
“어디 보자….”
를르슈가 펜을 쥐고서 문제를 훑어보면, 로로와 나나리가 그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집중하고 있었다. 썼다 지웠다한 흔적이 남은 노트 위로 를르슈의 단정한 글씨로 새겨진 수식이 남았다. 그래서 정리하고 나면 a 값이 나오고, 그걸 다시 수식에 대입하면. 를르슈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필기도 끝이 났다. 다음 문제도 비슷했다. 빠르고 명쾌한 해설에 쌍둥이들은 금방 이해했다.
“숙제는 이게 전부야?”
“아니, 이거 말고도 고전 문학도 있어서…. 아, 그리고 세계사랑. 하나 더 있었지?”
“물리랑 화학이었던가? 아무튼 좀 많아요.”
“설마 이제껏 안 하다가 한꺼번에 하는 거야?”
를르슈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날지언정 거짓말은 안하는 쌍둥이의 솔직한 모습에 를르슈는 한숨 대신에 열심히 하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괜찮으면 케이크라도 사다줄까? 머리 계속 쓰면 당 떨어지니까.”
“케이크?”
“와!”
근데 케이크는 형이 해주는 게 더 맛있는데. 맞아요, 오라버니표 수제 케이크가 좋아요. 를르슈는 금방 간식을 조르는 동생들을 보며 웃었다. 케이크 만들려면 부엌에서 계속 왔다갔다 해야 되니까, 너네 집중할 때 방해되잖아. 를르슈의 말에 또 두 사람은 시무룩해지면서도 알겠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를르슈가 진짜로 케이크를 만든다면 집중을 못하고 숙제를 또 미뤄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를르슈는 다시 한 번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럼 다녀올게.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해.”
를르슈의 외출에 로로와 나나리는 현관 앞까지 배웅을 했다. 나는 초코케이크. 저는 치즈케이크요. 착실하게 메뉴까지 고르는 모습에 를르슈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 * *
“형 말이야, 뭔가 우울해 보였어.”
다시 자리에 앉아서 수학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중에 로로가 말했다. 나나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샤프를 쥐고 있는 손을 움직였다.
“아마도 스자쿠 씨랑 관련된 일이겠죠.”
“…으.”
나나리의 대답에 로로는 질색을 했다. 그 반응에 나나리는 의아한 듯이 쳐다보았다.
“로로는 스자쿠 씨가 싫어요?”
“그 사람이 좋을 건 없잖아.”
“하지만 싫을 이유도 없잖아요.”
“나나리는 좋아?”
“좋아요.”
아, 물론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인 의미로. 나나리의 덧붙여지는 말에 로로는 ‘어느 쪽이든 별로야.’라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별로인가. 나나리는 로로의 결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자쿠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를르슈의 친구였다. 나나리도 어렸을 적엔 제 오빠를 쌍둥이들로부터 낚아챈 스자쿠를 질투하기도 했으나, 스자쿠가 로로와 나나리에게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것에 저도 마음을 열게 되었다. 로로 또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샤프 끝을 흔들면서 ‘진짜 별로야.’라고 재차 말하는 로로의 모습을 보자니 아무리 쌍둥이여도 그 속마음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나나리는 형이 그 사람이랑 사귀는 거 괜찮아?”
“저는 오라버니가 좋아하면 그걸로 좋아요. 그리고 로로는 오라버니가 누구랑 사귀어도 다 마음에 안 들어할 거잖아요.”
“그, 그렇진 않아!”
저 못지 않은 로로의 질투심을 알고 있는 나나리는 태연하게 말했다. 수학 문제는 슬슬 끝이 나고 있었다. 마지막 한 문제를 노트에 옮겨적으면서, 나나리는 로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자쿠 씨는 좋은 사람이고, 오라버니도 좋아하고, 로로도 별로라고는 하지만 그럭저럭 좋아하잖아요?”
“그럭저럭 좋다니, 그런 적 없어. 형이 좋아하니까 적당히 맞추는 거지.”
“적당히 맞추는 것도 마음이 따르니까 하는 거잖아요. 솔직해져봐요, 로로.”
“…….”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이고는 있어도 로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제 앞에 놓인 교과서를 쭉 끌어당겨서 같이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로로의 모습에 나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을 조용히 서로 문제만 풀고 있던 중에 로로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오늘 형을 우울하게 만들었잖아.”
로로의 말에 나나리는 음, 하고 고민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문제를 설명하는 를르슈의 모습에서는 평소와 같은 활기를 느낄 수 없었다.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그것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를르슈의 우울한 모습은 속상하기는 했지만, 나나리는 그것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로로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괜히 심통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저도 마음에 안 들지만… 뭐, 연애에는 제3자가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나나리의 정론에 로로는 또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했다. 하나 뿐인 형의 연애 사건에 대해서 자신은 제3자 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은 속상한 일이었지만, 그것 또한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이래가지고 여행을 같이 갈 수 있으려나. 나나리는 턱을 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로로는 머리를 비우려고 애를 쓰는 듯 했고, 나나리는 로로가 던진 말 한 마디에 심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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