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기말고사도 끝이 났다. 이번 학기는 운이 없게도 발표도, 발표 대체 레포트도, 그리고 시험까지 봐야하는 과목이 골고루 섞여있었다. 스자쿠는 엊그제는 발표 준비로 날을 새기도 했고, 또 어제는 레포트로 밤을 샜고, 그리고 오늘은 시험을 위해서 밤을 샜다. 시험을 칠 때에는 답안지에 기억나는 만큼 적어놓고 빠르게 교실 밖으로 나왔다. 오늘로 모든 기말고사가 끝이 난다는 생각에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정을 가로지르면서, 를르슈를 만날까 했지만 사흘 연속으로 밤을 새운 탓에 피곤함에 지쳐있는 지라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다. 체력적인 여유가 아니라,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마음에 두고 있지 않으려고 했지만 계속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난 너랑 결혼 안 해.’
‘현실적으로 말이야.’
‘좋은 배우자가 될 자신은 없어.’
‘굳이 결혼이 아니어도 지금까지도 나쁘지 않잖아, 우리.’
다시 그 말들을 떠올리고 나면 저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를르슈의 이런 곳에서 자신 없는 모습이나 방어적인 모습을 볼 때면 괜히 초조해졌다. 그런 점이 귀엽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 다시 떠올리고 나면 울컥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도 여전할 정도로.
“다녀왔습니다.”
“어서오세요, 도련님.”
저를 맞이해주는 나이가 지긋한 사용인에게 인사를 한 스자쿠는 금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식사는 하셨나요? 다정한 물음에 스자쿠는 괜찮다고 말했다. 이제부터 잘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스자쿠는 자기 방에 완전히 문을 걸어잠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침대에 누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던 수마에 몸을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를르슈의 생각으로 한 번 접어들고 나면 잠은 싹 달아나고 말았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지 않고, 멍하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를르슈와의 대화 내용을 쓱 훑어보면서 스자쿠는 생각에 잠겼다.
그날 이후로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있지만 어딘가 예전보다 더 멀어진 기분이었다. 스자쿠와 를르슈의 말에서는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찝찝함이 느껴지는 것은 이상하기만 했다. 애써 그것을 모른척하면서 이제껏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걸 느끼고 있는 게 스자쿠 뿐이고, 를르슈는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러면 괜한 것에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속이 좁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계산하는 것은 스자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런 기분으로 떠나고 싶진 않은데….”
스자쿠는 휴대폰 화면을 끄면서 중얼거렸다. 여행은 8월 한 달 내내 이어질 예정이었고, 그 말은 를르슈와 하루도 떨어지는 날 없이 30일 가량을 붙어살아야한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마냥 좋았지만, 이제는 벌써부터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를르슈가 싫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껏 사귀어왔으니 그런 말 한 마디로 무너질 관계는 아니었다. 여전히 좋은데, 그런데도 싫은 건 싫은 거다. 그래, 난 상처를 받은 거야. 스자쿠는 그 결론에 도달했다.
를르슈, 나 상처 받았어. 달래줘. 스자쿠는 침대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달래줄까, 하고서 짓궃게 웃는 를르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떠올리고 나면 또 받은 상처가 아무렇지도 않게 낫는 기분이었다. 정말, 나는 너를 너무 좋아하나봐.
* * *
를르슈는 창고로 쓰는 방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어머니 마리안느였다. 더스트 백으로 감싸져 있는 캐리어들을 읏차, 하고 꺼내면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마리안느의 말을 잘랐다.
“어머니, 캐리어 좀 빌릴게요.”
‘내 거는 너무 낡지 않았어? 그냥 새로 사.’
“낭비에요.”
를르슈의 말에 마리안느는 크게 웃었다. 너는 남자애가 무슨 그렇게 쪼잔하니! 설마 가계부라도 쓰고 있는 건 아니지? 실제로 가게부를 쓰고 있는 를르슈는 욱하며 전화기를 붙들었다.
“쪼잔한 게 아니라 계획적인 소비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가계부를 쓰고 있는 게 뭐가 어때서…!”
‘아니, 뭐, 나쁜 건 아닌데… 너무 꽉 막힌 애 같잖니? 가끔 지를 땐 질러야지.’
“됐어요. 그래서 언제 일본에 오실 건데요?”
‘그러게. 너네 여행 가기 전엔 꼭 봐야할 텐데. 한 달은 너무 길지 않니?’
“길다면 길죠….”
‘한 달이면 무조건 싸우게 되어있어.’
“그렇겠죠.”
‘응? 안 싸워요!—이렇게 말 안하네. 이런 데에서는 또 냉정하다니까.’
어렸을 때부터 치고 박고 싸운 것이 스자쿠이다. 사귀고 나서도 심하게 다툴 때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성격이 다른데 여행 한 달 동안 싸우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애들 앞에서 안 싸우고, 싸우더라도 빨리 화해 하는 방법을 모색해야지….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캐리어의 상태를 살폈다. 물건을 험하게 다루는 마리안느의 것 치고는 비교적 멀쩡했다.
‘그래, 언제 출발이라고 했지?’
“다다음주요. 로로랑 나나리 방학식하고 다음날이요.”
‘알았어. 그럼 지금은 쌍둥이들은 시험 기간?’
“네.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잘 부탁해.’
“네, 네. 언제 오시는 거에요, 그럼?”
를르슈의 물음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리안느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니, 왜 말을 안 해주는데! 를르슈는 이를 악물면서 캐리어를 쾅하고 내리쳤다. 그러나 아픈 것은 자기 손이었고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오라버니, 저녁 준비 다 됐어요.”
“아, 금방 갈게.”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꺼낸 캐리어들을 복도에 세워두었다. 한 번 닦아놓고 나서 물건을 넣던가 해야겠다. 나나리는 줄을 서서 세워진 캐리어를 보면서 설레는 얼굴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여행 갈 준비 하는 거죠?”
“응. 캐리어 정도는 미리 꺼내놔야 할 거 같아서.”
“기대되네요! 한 달이라고 했죠?”
“그래. 그치만 시험 못 보면 꼼짝없이 보충수업이야.”
“…음,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의 저녁 담당은 로로와 나나리였다. 카레 접시를 내려놓고 있던 로로가 두 사람을 보고서 환하게 웃었다. 오늘 저녁은 카레야! 두 사람이 만든 카레는 먹음직스러워보였다. 를르슈도 덩달아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너네 시험기간에는 내가 해도 되는데.”
“형 시험기간에도 형이 하잖아. 우리도 우리가 하는 거야.”
로로의 말에 맞다면서 고개를 다부지게 끄덕이는 나나리의 모습에,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잘 먹을게, 하는 를르슈의 말에 쌍둥이는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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