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의 쿠루루기 스자쿠는 우울과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제로는 그 기능을 하는 것에 있어서 무리가 없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았으며, 언제나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도 그가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연설을 하고 있는 나나리의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스자쿠는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는 자신이 왜 여기에 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올바른 이야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따분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것에 대해서 감회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자신은 얼마나 고장이 났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나는 고장나버렸어.
제로는, 이제,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세상은 아직도 이 가면을 쓴 남자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 우스울 뿐이다.
어두운 가면을 통해서 보는 세상은 찬란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이런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스자쿠는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나나리가 하는 연설 중의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려고 했다.
나나리의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그 내용은 어느 것 하나 공감되지 않았다. 스자쿠는 나나리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고장난 제로에게 등을 맡긴 채로, 평탄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나리가 보이는 제로에 대한 신뢰는, 마치 어렸을 적 를르슈가 스자쿠에게 보였던 유대감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가끔 스자쿠는 나나리에게서 를르슈를 찾고는 했다. 아, 그녀와 그는 닮을 수밖에 없지. 서로가 하나 뿐인 남매였으니까. 그래서 스자쿠는 나나리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를르슈가 맡긴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라도 를르슈에게 닿고 싶은 자신의 미련 때문일까, 둘 다인가.
사람은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로. 제 연설, 어땠나요?”
어느새 연설을 마친 나나리는 저에게 말을 걸며 웃었다. 나름의 긴장을 했던 모양인지, 하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날이 더웠지, 참. 한여름의 땡볕에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나나리에게 스자쿠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후후, 영광이에요.”
나나리는 스자쿠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주었다.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나나리는 다시 스자쿠에게 휠체어를 맡겼다. 스스로 운전할 수 있지만, 무언의 어리광이다. 나나리는 여유롭다. 고장난 스자쿠와 다르게,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고, 살아가야 할 목적이 있었다.
나나리의 휠체어를 끌면서, 스자쿠는 그녀를 이 계단 너머로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힘쓰는 그녀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그녀의 자리는 누구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런 것을 다 따져들면서 나나리를 욕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알 수 없는 파괴 욕구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 그녀를 안전한 곳까지 에스코트했다. 나나리의 고맙다는 인사를 흘려들으면서, 나나리의 이름을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스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말은, 나나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스자쿠는 그녀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프레이야의 원죄? 그것은 나나리가 를르슈에게 닿기 위한 핑계였다. 또 나나리 만큼이나 상냥하고 희생적인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 혼란 속에서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고 다투려고 할 때, 나나리는 오로지 평화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던졌다.
다 버린 그녀가 고른 것은 제로 하나 뿐이었다. 어쩌면 제로가 가장 완벽한 패로 보였기 때문에, 나머지를 다 버리고도 제로를 선택할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나리는 그런 계산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평화를 위한 수단은 제로 뿐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에게 선택을 ‘당한’ 제로— 스자쿠는 이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제도 오늘과 같았으며, 오늘도 내일과 같을 것이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평화를 찾으며 안식을 나눈다.
하지만 그 안식은 스자쿠에게만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의 손은 피투성이인 채로,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다. 반복되는 일상도, 평화도, 어제도, 오늘도, 모두 스자쿠를 비껴나간다.
세상의 인간들과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건, 생각보다 쉬운 방법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자신의 이름이 스자쿠라는 것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누구도 그를 그의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게 되었으니까. 제로라고 불려도, 스자쿠는 한참이나 늦게 반응했다. 그는 너무 어린 아이처럼 불안해하면서도, 너무 늙은 사람처럼 굼뜨게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나리, 너마저도.
하지만, 너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아름다운 그녀는 자신의 오빠처럼 당당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다정하게 세상을 끌어안던 자신의 죽은 이복 언니처럼 상냥한 세계를 만든다. 그녀에게 죄가 없음에 감사했던 과거가 떠오르지 않아서, 스자쿠는 억지로 죽은 사람들을 끌어올려 나나리에게 덕지덕지 과거를 덧입혔다.
그러면 나나리의 까맣던 그림자가 다시 색을 입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렇게라도 버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된다. 모든 것을. 자신의 죄도, 를르슈의 죄도, 전부 다.
죽은 사람을 통해 산 사람을 지탱한다는 것은 기이하지만, 스자쿠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때로는 먹혀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가 찾아오면, 스자쿠는 자신이 죽여버린 사람들의 원통함을 떠올렸다. 자신의 억지에 의해서 죽어버렸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있었을 오늘과 내일에 대해서 떠올리고 나면, 스자쿠에게 도망칠 곳은 다시 사라지고, 멈췄던 생각의 톱니바퀴는 삐그덕대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들의 비명을 억지로 떠올리며, 손끝에서는 를르슈의 가슴을 갈랐던 검의 무게가 떠나지 않은 채로, 죽은 자들의 망령 속에서 쿠루루기 스자쿠는 가면을 쓰고 서있었다.
한여름의 태양이 스자쿠의 목을 조르며 타오르고 있었다.
스자쿠는 어느 것도 담지 못하는 눈으로 23살의 생일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