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나이젤과 제로의 사이는 완벽한 상하관계가 존재했다. 그것은 를르슈가 만들어놓고 간 장치로써, 스자쿠가 제로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필요했다. 를르슈는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세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두었고, 슈나이젤은 그 시나리오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치가 높은 것의 선택지를 골라가며 제로에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제로— 스자쿠는 맹목적으로 저에게 충성을 다하는 슈나이젤을 볼 때면 기분이 묘했다. 저와 그 사이에 완벽한 상하관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가끔은 믿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가 다시 살아났다는 걸 확인했을 때만큼이나 떨떠름한 사실이었다.
스자쿠는 슈나이젤이 보고하는 말들을 흘려들었다. 어차피 그는 제로가 쓴 가면과 어긋나는 이념에 관심을 둘 수 없을 것이다. 슈나이젤은 를르슈가 걸어둔 기어스를 깰 수 있을 만큼, 그만한 자기 확신이나 철학이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마치 죽지 못해 살아있는 자신처럼. 스자쿠는 화상회의 중인 슈나이젤이 송신하는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는 확인했다. 그럼, 그대로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제로.”
화면 속의 슈나이젤은 제로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로에게 도움이 되어 기쁘군요, 라는 말이 흘렀다. 슈나이젤의 말에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자쿠는 지금 몹시 예민한 상태였다. 평소라면 정말 흘려들었을 그 말에 대해서, 스자쿠는 신경을 곤두세우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기쁘다는 감정은 자기가 느끼는 것이 아니면서… 그건 를르슈가 당신에게 새긴 기어스 때문이잖아.’
스자쿠는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제로? 슈나이젤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통신을 끊어버리면 되는 일이었음에도, 스자쿠는 종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슈나이젤에게 이런 꼴을 보여서는 안 되는데.’
슈나이젤은 이상한 제로의 모습에도 침착하게 몇 마디 더 묻다가, 답이 없는 제로에게 더 이상 묻지 않고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완벽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어린 아이를 타이르듯 쳐다보는 시선 속에서 스자쿠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스자쿠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그대로 들켜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을 다 따지고 들고 싶어지는 충동이 일었고, 그것을 겨우 억누르면서 스자쿠는 종료 버튼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제로. 당신이 죽였던 를르슈 황제를 기억하십니까?”
스자쿠는 갑자기 나오는 그 이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최대한 당황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자연스럽게 호흡을 시도하면서, 책상 아래로 굳어있던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그 를르슈는 제 동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달라도,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었죠.”
“…….”
“당신의 손에 를르슈가 죽었을 때….”
슈나이젤은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했거든요. 그 를르슈가 자신의 나이트 오브 제로를 잃었다던가, 그런 상황 속에서 무리하게 움직였다던가. 마치 꼭… 당신을 기다린 사람처럼…… 아니,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다린 사람처럼 그렇게 구는 아이였던가, 싶었죠.”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한편 그런 순간 알았습니다. 그렇게 구는 ‘아이’였던 거죠. 아이였고, 어렸고, 어리석었던 를르슈를 당신이 끝내버렸을 때에는, 당신 또한 그 를르슈와 다를 바 없는 아이와 같다는 것도, 저는 알아버렸습니다.”
제로, 라고 부르는 부드러운 울림 속에서 스자쿠는 자신이 왜 종료 버튼을 누르지 못했는지 후회하고 있었다. 슈나이젤이 하는 말은 모두 맞았다. 아이였고, 어렸고, 어리석었던 두 사람의 제로레퀴엠이 이렇게 낱낱이 파헤쳐지는 상황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제로, 당신의 각오는 생각 이상으로 굳건하고… 또 시간은 흘러서, 이제 아이의 판단착오라고 실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도 끝났습니다. 제로도 어른이 되어버렸으니까요.”
“…….”
“그러나 요즘 들어 세상이 평화로워져서 그런 탓인지, 아니면… 당신의 책임감이 해이해져서 그런 건지. 예전의 당신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게 곤란합니다.”
아니, 세상은 평화롭지 않다. 언제든 전쟁의 기회를 노리고 서로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며 총을 겨누고 있다. 그럼에도 스자쿠가 제로로써 평화롭게 활동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슈나이젤의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제로와 슈나이젤의 역할이 커지면 안되는데… 세상의 평화는 자립하는 자들이 자유로운 대화 속에서 성립되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스자쿠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화면 속의 슈나이젤을 쳐다보았다.
슈나이젤은 스자쿠의 가면 너머를 꿰뚫어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기어스에 걸린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서늘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 속에서, 자신만의 속죄를 위해서 웅크리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마주할까봐, 스자쿠는 겁이 나서 종료 버튼을 급하게 눌러버렸다.
슈나이젤의 말처럼, 스자쿠의 책임감은 거의 바닥이 났다. 솔직히 말하면 한계가 와서 그런 거라고, 스자쿠는 생각했다. 제로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정의의 기호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상은 가면을 쓴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모른척 눈감아주는 것은 를르슈의 기어스라는 장치 덕분이다. 그것마저도 언제까지나 영구적이지 못하고, 또 한계를 맞이한 쪽은 기어스가 아닌 스자쿠이기 때문에…….
스자쿠의 생각은 올곧게 이어지질 못했다.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눈을 감아버렸다. 깜깜해진 시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도 저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먹먹해지는 귓가, 올라오는 구토감 같은 것들이 스자쿠를 뒤흔들어 놓았다.
“…스자쿠, 스자쿠!”
재차 스자쿠를 부르는 목소리에 스자쿠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카렌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스자쿠를 마주보았다. 책상 위에는 흩어진 서류조각이 보였다. 스자쿠는 힘없는 손으로 그것들을 끌어모으며 말했다.
“미, 미안…. 보고하려고 온 거지? 정신이 없었네.”
“너 괜찮아?”
“괜찮지, 나쁠 게 뭐가 있어.”
“아니, 너 진짜 상태 안 좋아보이거든?”
“피곤해서 그래.”
“네 입에서 피곤하다는 소리도 나올 정도면 위험한 거야, 그거.”
카렌은 스자쿠의 손에 들린 서류들을 빼앗았다. 내일 다시 정리해서 올게. 너 멀쩡할 때! 카렌의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말에 스자쿠는 쓰게 웃을 힘조차 나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스자쿠의 반응에 카렌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상태가 안 좋은 것도 맞지만… 무슨 일 있어?”
“응?”
“아니면 여름이라서 더위라도 먹었나?”
카렌의 손바닥이 스자쿠의 이마 위에 닿았다. 기분 좋은 사람의 체온이 닿아오는 것에 스자쿠는 가만히 있었다. 얼마 만이지, 사람을 이렇게 만질 수 있다는 게.
“열은 없는 거 같고….”
카렌의 손이 떨어지려는 것에 스자쿠는 그 손을 저도 모르게 덥썩 잡아버렸다. 멀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뭐, 뭐하는 거야. 징그럽게. 이거 놔.”
“…사람의 체온이, 뭐였더라, 눈물을 그치게 만든다고.”
“너 안 울거든?!”
“알아.”
“그럼 손 놔!”
누군가의 손을 이렇게 잡아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사람의 체온에 의존하게 되는 것도, 그 위로를 얻고 싶은 것도, 이 감정들이 모두 다 사치스러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자쿠는 더 이상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차오르는 감정들을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그런 것들을 갈구하는 것은 나에게는 이제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고 알고는 있는데. 스자쿠가 그런 말들을 꾹꾹 눌러 삼키는 사이에, 카렌은 손을 놓아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스자쿠에게 다가왔다.
“힘들어?”
“……아마도.”
“도와줄까?”
카렌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스자쿠는 빛을 본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덜덜 떨리는 스자쿠의 손에 카렌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스자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떤 방식이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방금 전에 말했잖아.”
“……뭘?”
“사람의 체온이, 눈물을 그치게 만든다고.”
스자쿠는 소리 없이 제 뺨을 적시는 눈물을 깨달았다. 카렌은 스자쿠의 가슴팍에 기대면서 조심스럽게 그를 끌어안았다. 저보다 작은 카렌이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며 끌어안는 힘에 스자쿠는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아버렸다. 그 웃음소리에 카렌은 중얼거렸다.
“우는 남자는 징그러운데, 너는 고생하고 있으니까 봐주는 거야.”
“…….”
“제로가 울면 되겠어?”
“……카렌.”
“응.”
“제로는… 를르슈지, 내가 아니야.”
“아니, 제로는 너야.”
그 말에 스자쿠는 숨을 죽였다. 누가 뭐라해도, 천지가 바뀌어도, 카렌의 제로는 언제나 를르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를르슈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를르슈의 제로를 진짜 제로라고, 지금의 쿠루루기 스자쿠가 하고 있는 제로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눈속임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쿠루루기 스자쿠 본인 스스로도 그런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스자쿠에게 있어서 도망칠 비상구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제로 같은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으니까. 단 하나 밖에 없는 설 자리는 결국 도망칠 방법도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이니.
그런 스자쿠를 알기라도 하듯, 카렌은 스자쿠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를르슈라는 녀석은 이제 없잖아.”
“…카렌도 봤잖아, 를르슈는 살아서—.”
“그 녀석이 살아있는 걸 봤다고 해서 네가 제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너는 애한테 그 책임을 돌릴 만큼 무책임한 어른이 아니잖아.”
“…….”
그녀의 입에서 나온 어른이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를르슈에게 주어진 코드는 그를 영원히 아이라는 틀에 가둬놓았다. 영겁의 시간이 흘러도 그는 죽지 않는 이상 아이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스자쿠는… 그런 무거운 시간의 무게를 지고 있는 를르슈를 두고 가는 어른이 되어버릴 것이다.
“제로가 되는 거… 어른이어도 힘든 거 같아.”
“아무래도, 어렸을 때는 오기로 버티기라도 하지. 어른이면 오기도 뭣도 없어지니까. 고생하고 있다, 제로.”
“…그거, 예전에도 들은 거 같아.”
스자쿠의 말에 카렌은 씁쓸하게 웃었다.
고생하고 있다니.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것에 칭찬을 받으면서 기쁘다고 느끼고. 스자쿠는 오랜만에 차오르는 감정들에 대해서 새삼스러움을 느끼며, 카렌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아파!”
“미안, 미안….”
스자쿠는 어렴풋이, 이제 어딘가의 한계도 끝이 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카렌은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스자쿠를 따뜻하게 보듬었다. 못 본 사이에 스자쿠는 키가 더 커서, 카렌을 끌어안고도 남았지만, 여전히 눈물이 많은 바보라서 그녀의 어깨를 흠뻑 적시고도 남을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