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물입니다~
오리지널 캐릭터가 나와요!
방과후. 세이류는 또 교무실로 불려갔다. 모델이라고 적은 것이 진심이냐는 말이었다. 대답하는 것을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혼나고 말았다. 새로운 진로희망서를 받은 세이류는 한숨과 함께 또 반으로 접어 가방에 그것을 넣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혼자서 정리하고 말 것이다. 모델이라고 어제 홧김에 쓴 것은 무리수였으니까.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 아빠와 아버지도 정작 필요할 때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 세이류는 어딘가 들릴 곳도 없이 교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쿠루루기, 하고 어딘가 끝이 늘어진듯한 목소리는 같은 반 친구의 것이었다.
“이제 집에 가는 거야? 같이 가자.”
“너는 역 쪽으로 가지 않아? 난 반대방향인데.”
“그럼 직전까지만 같이 가는 건?”
“상관없어.”
두 개의 발걸음은 서로 보폭을 맞추어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이야깃거리는 친구 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세이류는 적당한 대답을 하면서 오늘의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그래서 진짜로 모델 할 거야?”
“…적당한 걸 쓴 거 뿐이야.”
“근데 쿠루루기는 모델 해도 어울릴 거 같아.”
“뭐?”
“예쁘고 귀엽잖아. 안하면 오히려 더 손해 같아. 아, 근데 공부도 잘하니까…. 굳이 모델이 아니어도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예쁘고 귀엽다는 말엔 늘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모르겠다. 세이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갈림길 앞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가면 세이류의 집이 있는 골목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전철 역까지 향하는 길이었다. 잘 가, 쿠루루기! 친구의 손흔듦에 따라서 세이류도 인사했다.
세이류는 혼자 걸어가는 길에, 건물 유리벽에 비치는 제 모습을 살폈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부터 하얀 피부, 위로 올라간 눈꼬리는 모두 아버지를 닮았다. 어렸을 때부터 다들 아버지를 닮았다고 이야기를 했으니까, 자기 자신의 외모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다른 것은 눈동자 색 정도 뿐이었다. 그 부분은 아빠를 닮았다.
하지만 모델도 단순히 예쁘고 귀엽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한 노력과 열정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일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진로란 대체 무엇일까. 세이류는 사춘기 소녀다운 고민을 하면서 다시 집으로 향해 걸었다.
그래서 오늘도 진로희망서를 들고서 소파에서 뒹굴고 있는 세이류에, 아버지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다며 손을 뗐다. 그러나 어제도 그렇게 고민했음에도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오늘이라고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저녁 준비가 끝나고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이 되면, 아버지의 옆에 앉아서 결국 SOS를 쳤다.
“글쎄…. 요새 애들은 뭐가 되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는데.”
“그냥 선생님, 공무원 반복해서 적을까?”
“네가 하고 싶으면 해. 책임지는 건 너니까.”
“그런 말 들으면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진로는 고민하면서 정하는 게 좋은 거야. 너무 생각없이 사는 것보단 낫잖아.”
정론이다. 세이류는 종잇조각을 들여다보다가 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이류의 시선에 아버지는 의아한 듯이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야, 하는 얼굴에 세이류는 무심코 말을 꺼냈다.
“아버지, 나 예뻐?”
“예쁘지.”
바로 나오는 즉답은 세이류를 조금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예뻐.”
“이럴 때면 아빠랑 똑같아, 진짜로….”
이번엔 아버지 쪽이 조용해졌다. 사랑하면 닮으니까? 세이류의 확인하듯 쐐기를 박는 말에 아버지의 손끝이 잠깐 떨린 것 같았다.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 하고, 빨리 해. 저녁 먹기 전까지는 끝내두는 게 좋잖아?”
“알겠어, 알겠어.”
“대답은 한 번만.”
“알겠습니다!”
“그래.”
세이류는 진로희망서 끝을 접으면서 펜을 손끝으로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운동 선수를 써볼까 했지만 무슨 종목이든 잘 해내니까 특별히 좋아하는 스포츠도 없었다. 군인 같은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남의 명령을 따르는 건 질색이다. 경쟁하는 것도 싫어하고, 그렇다고 모두가 일률적인 것도 싫다.
골치 아픈 제 성정을 떠올리다가 세이류는 어떤 직업을 떠올렸다.
“아버지, 나 변호사는 어때?”
“변호사?”
“응. 적당히 괜찮은 거 같아.”
“네가 좋으면 됐지.”
“그럼 변호사 적어야지.”
변,호,사. 세이류는 또박또박 적어놓은 글자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 물음에 아버지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 네가 이럴 때 보면 스자쿠 딸인 거 같아서.”
“갑자기?”
“그러게. 뭔가 그러네.”
아버지의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표정을 짓는 아버지는 보통 아빠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것을 깨달으면, 세이류는 사이가 좋은 두 아버지들이 그러려니 싶었다. 그래도 조금 낯부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아빠랑 아버지는 고등학생 때부터 계속 그랬어?”
“뭐가 그런데?”
“음…. 사이 좋은 거?”
“아니.”
딱 잘라 말하는 아버지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상하네. 세이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졸업식 직전까지도 안 친했어.”
“…아빠한테 이야기 들은 거랑 좀 다른데. 아빠는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했다고 그랬어.”
“좋아하는 거랑 친한 거랑은 별개였어.”
“왜? 그럼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거잖아?”
“그때 우리는 그랬어.”
좀 이상했지만, 아무튼 그랬어. 아버지의 반복되는 말에 세이류는 결국엔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본인들이 그랬다는데 뭐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결국 잘 만나서 세이류의 부모가 되었으니까.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지만,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두 사람은 마중을 하러 나갔다. 저녁을 먹고 수다를 떠는 사이에 세이류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은 기억 저편으로 묻어두게 되었다.
다행히 진로희망서는 무사히 정리되었다. 선생님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세이류는 기분 좋게 여자 테니스부의 대타를 뛰러 갔고, 저녁이 조금 늦어졌지만 평소보다 더 맛있는 식사를 했다.
완벽한 하루였다.
* * *
스자쿠는 회사에, 세이류는 학교에 가고 난 집안에는 를르슈 혼자 남아있었다. 집안일을 해치울까 했지만 오늘은 좀 여유롭게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근 들어서 스자쿠가 밤마다 집요하게 구는 탓에 몸이 항상 이상으로 나른했기 때문이었다.
소파에 걸터 앉은 를르슈는 아침 햇살이 드리우는 것에 눈을 감았다. 따끈해지는 몸이 수마에 점점 빠져들어갔다.
* * *
진로희망.
를르슈는 눈앞에 놓인 하얀 종이를 보고서 한숨을 쉬었다. 매년 돌아오는 이 시기마다 적어내야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많고, 하고 싶은 것은 없는 를르슈에게는 꽤나 귀찮은 작업이었다. 올해는 수험생이라는 이유로 이 진로희망이 한층 더 중요하다고 선생님은 강조했다.
두 배로 더 귀찮아지겠네. 를르슈는 종이를 반으로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집에 가서 더 고민할 생각이었다. 종례를 마친 아이들이 각각 할일을 따라 흩어졌다. 부 활동을 가는 아이들은 그곳으로, 학원을 가는 아이들은 학원으로, 집으로 가는 아이들은 집으로. 를르슈는 제일 마지막 그룹에 속했다.
느릿하게 짐을 싸서 교실 문턱을 넘으면, 복도 끝에는 ‘그’가 보였다. 를르슈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손에 들려있던 종이는 친구들 손에서 한 바퀴 구르다가 어느새 바닥에 떨어졌고, 그 종이의 주인은 그것을 모르는지 그것을 뒤로 한 채 걷고 있었다. 그건 를르슈의 가방 안에도 들어있는 진로희망서였다.
쿠루루기 스자쿠, 라고 적혀있는 진한 글씨 아래로는 모든 것이 텅 비어있었다. 를르슈는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 앞서간 그를 부르기엔 거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뛰어가서 이 종이를 전달해주는 것은 를르슈의 장르가 아니었다.
내일 전해주자. 를르슈는 종이를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그 종이는 졸업식 날이 되도록 를르슈의 가방 안에 있었다.
그에게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는 것은, 를르슈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결국 쿠루루기 스자쿠가 어느 대학에 가는 지도 모르고, 무엇이 될 지도 모르는 채로 일 년이 지나갔다. 모처럼 같은 반이 되었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가 되지도 못했다.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어 본 것도 드물었다.
아쉬움과 미련은 를르슈에게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칠 것 같았다. 친구들과 뒤엉켜서 사진을 찍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를르슈는 제가 가야할 곳으로 돌아갔다.
그때였다.
“람페르지! 잠깐만!”
뒤에서 부르는 소리는 믿을 수 없게도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다급하게 를르슈의 곁으로 뛰어오는 그는 상기된 얼굴로 를르슈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근데 지금 아니면 이야기 하기가 힘들 거 같아서.”
“무슨, 이야기?”
목소리가 잠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쿠루루기 스자쿠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를르슈를 떨리게 만들었다.
“그, 저기, 나, 람페르지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그래?”
나도, 라는 말을 겨우 삼켰다. 를르슈는 이 대화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결심과 다르게 계속해서 이 시간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잡을 수가 없었다.
“친하게 지내고, 친한 친구도 되고….”
“응.”
“더, 잘 알고 싶었는데. 결국엔 이렇게 되고 말아서.”
“…응.”
“그러니까, 나는, 음, 람페르지랑,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맞추었던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깔다가 결국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기합을 한 번 넣은 눈을 반짝이며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친구 말고도, 람페르지의 남자친구도 하고 싶었어. 아, 그, 연인으로써의 남자친구야. 라이크like가 아니라 러브love. 혹시나 해서.”
“……남자친구?”
“너를 좋아해.”
횡설수설한 그 말을 함축해주는 한 문장에 를르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표정을 본 스자쿠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아하며 말했다.
“미안. 놀랐지?”
“…엄청.”
“농담은 아니야. 장난도 아니고. 진심이야.”
“…….”
“들어줘서 고마워. 대답은 솔직히 듣고 싶은데. 신경쓰지 않아도 돼.”
뒤돌아 서는 스자쿠는 씩씩하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그대로 달아날 것만 같았다. 를르슈는 그가 더 멀어지기 전에 스자쿠를 불렀다. 쿠루루기, 하는 아주 작은 소리였고, 목이 잠겨서 형편 없는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자쿠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나도 좋아해.”
를르슈는 그 이상의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스자쿠의 커다란 눈이 일순 반짝인다 싶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남들이 다 헤어지는 졸업식장에서, 새로운 연인 관계로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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