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물입니다~
오리지널 캐릭터가 나와요!
를르슈의 아침은 스자쿠의 기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자고 있는 순간 어느새 썰렁해지는 감각에, 스자쿠가 먼저 일어난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옅어지는 수마 사이로 스자쿠가 없는 것을 깨닫고서 를르슈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다. 파자마 차림으로 욕실 앞까지 가면 물소리가 들렸다. 잠시 멍하니 그 앞에 서있다가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아있었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채로, 잠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뺨에 촉촉하게 젖은 느낌이 와닿았다. 스자쿠였다.
위에서 쏟아지는 시선과 함께 입술을 떨어졌다.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지만 상쾌하게 느껴졌다.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아쉽긴 했지만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스자쿠를 보내고 나서, 를르슈도 이어서 욕실에 들어갔다.
쏟아지는 물 줄기를 맞으면서, 오늘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몸을 개운하게 씻고 나오면 모든 것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엌으로 나가면 졸린 눈으로 2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세이류가 있고, 그런 세이류에게 인사하는 스자쿠가 있었다.
남은 아침은 스자쿠와 함께 요리를 하면서, 그리고 다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스자쿠가 먼저 출근하고, 세이류가 조금 아슬아슬하게 등굣길에 오른다. 를르슈는 남은 식기들을 정리하고서 오늘의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출판사에 가서 번역된 원고를 보내고, 나서는 김에 나나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쇼핑을 하기로 했다. 쇼핑까지는 좀 무리일까. 를르슈는 가방을 챙기면서 집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 * *
새로운 집에서 나오는 길은 이제 익숙해질 것 같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 향하는 곳, 그리고 집을 나온 목적을 떠올리면 더 떨려서 그런 것 같았다. 를르슈는 휴대폰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면서 장소와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후 2시, 역 앞에서. 이모티콘으로 마무리된 스자쿠의 메일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나기로 한 곳은 전철을 타고 가면 15분 걸리는 역이다. 새로 생긴 영화관에서 최근에 유행하는 영화를 보고서, 근처에서 밥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누가 들어도 흔한 데이트 코스였지만 를르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데이트이다. 상대는 심지어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이루어지지 않을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은 여전했다. 졸업식장에서 그대로 헤어지지 않고, 연인으로써 서로를 인식하게 된 것은 기적과 같았다. 그리고 나서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근 1년동안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음에도 현실성이 없게 느껴졌다. 차라리 상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철에 탄 를르슈는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을 확인했다. 무난하게 입어야하는지, 아니면 조금 꾸며야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하다 고른 옷이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하얀 셔츠에 검은색 가디건은 사람이 어두워보이는 것 같았다. 갈아입으러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를르슈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기분으로 전철에서 15분을 보냈다. 길면서도 짧은 시간이었다.
“람페르지! 여기!”
역에서 를르슈가 나오자마자, 그에게 손을 흔드는 남자는 스자쿠였다. 커다란 벚나무는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인 것 같았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쿠루루기 스자쿠는 눈에 띄었다. 검은색 웃옷과 데님 자켓이었음에도, 그의 밝은 분위기가 눈길을 끌었다.
그런 스자쿠가 사람들 틈바구니 사이에서 헤매고 있던 를르슈를 바로 알아본 것은 신기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옆에 섰다. 막상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려니 어딘가가 부끄럽고 속이 베베 꼬이는 것 같았다. 어색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 스자쿠는 붉어진 뺨으로 말했다.
“영화 시작하려면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밖에서 좀 걷다가 들어갈까?”
“그래? 나는 상관 없어.”
“이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가 괜찮다는데, 조금 있다가 거기도 갈까?”
“응….”
를르슈는 스자쿠가 하는 말들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답할 때마다 스자쿠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골라서 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응’ 같은 단답이 고작이었다. 그때마다 스자쿠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혹시 마음이 상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스자쿠는 그런 기색 없이 를르슈를 정성껏 에스코트했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를르슈가 두 사람 몫의 팝콘과 콜라를 샀다. 예매는 스자쿠가 했으니 그 정도는 자기가 해야할 것만 같았다. 를르슈가 재빠르게 주문과 값을 지불하는 거에 스자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하고 기가 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조차 귀엽게 보여서, 를르슈는 스스로 중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는 둘이서 하는 거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쿠루루기만 내는 건 불공평하고. 나도 사주고 싶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순간 팝콘에 얼굴을 묻을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으아, 하고 작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영화관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스자쿠가 빠르게 를르슈의 손을 잡고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손을 잡고서.
손을 잡고서.
손을 잡고서, 둘은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얼음이 든 콜라를 쥐고 있는 손이 미지근해질 정도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았다.
* * *
그때의 영화가 재개봉을 한다는 포스터를 보면서, 를르슈는 어딘가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멀티플렉스 전광판에 큼지막하게 걸린 티저 영상은 그때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정작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스웠다. 그때는 스자쿠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서, 아무것도 기억이 남지 않았던 영화였다.
이번주 주말에 다시 보러 가자고 해볼까. 를르슈는 세이류와 스자쿠의 주말을 생각했다. 셋이서 보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 전에 아이가 볼 만한 내용인지도 확인해야겠다. 를르슈가 휴대폰으로 검색하려는 찰나에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람페르지 씨! 오래 기다리셨죠?”
“아, 방금 전에 왔어요.”
“정말 죄송해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전철 하나를 놓쳐서.”
“괜찮습니다.”
담당자는 정말 미안한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뭐하고 계셨나요, 하는 말에 를르슈는 전광판을 가리켰다. 때마침 그 영화의 광고가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저 영화, 다시 볼까 생각 중이었어요.”
“아, 유명하죠. 감독이 엄청 큰 영화제에서 저걸로 상을 탔으니까. 그게 다시 재개봉 하네요.”
“그런가요?”
“내용은 람페르지 씨 취향은 아닐 거 같았는데, 의외네요.”
“내용은… 솔직히 기억이 안 나서요. 다시 보긴 봐야할 거 같네요.”
기념비적인 첫 데이트의 영화니까. 를르슈의 기억이 안 난다는 말에 담당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두 사람은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원고를 확인한 담당자는 만족스러운 OK 사인을 보냈다. 역시 람페르지 씨네요, 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의 칭찬에 를르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노트북과 짐을 정리해 넣은 담당자는 요즘의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길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의 아들이 요즘 들어 사춘기라서 그런지, 짜증이 늘고 그 반항을 받아주는 것도 슬슬 한계라는 이야기였다.
“람페르지 씨도 결혼 했죠? 애도 있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네, 딸이 하나.”
“몇 살이랬죠?”
“중학교 3학년이에요.”
“람페르지 씨도 한창일 때네요.”
“뭐, 아직까지는 어린애라 반항기까지는 아니고.”
“애들 크는 건 금방이에요. 정말 어느 순간에 갑자기라고요.”
손을 내두르며 그녀가 하는 말은 어딘가 과장이 섞여있는 것 같으면서도, 를르슈도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어느 순간에, 갑자기, 모든 것이 닥쳤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담당자와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되고 나면 그녀와 헤어졌다. 를르슈는 나나리에게 가기로 한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을 했다. 괜찮다는 답장이 오면 안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에 스자쿠에게 연락이 왔었다. 그와 잠깐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무심코 전화 해도 괜찮을까, 하고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전화가 울렸다. 이럴 때의 행동력이란.
“여보세요?”
‘를르슈? 일 다 끝났어?’
“응. 잘 끝났어. 너는? 지금 바쁠 때 아니야?”
‘아냐, 한숨 돌리고 있어. 오늘은 담당자 만나고 나나리랑 약속 있다고 그랬던가?’
“맞아.”
‘늦게 들어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를르슈는 웃음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저녁 시간에 맞춰서 들어갈 거야.”
‘헤헤, 더 오래 있다가 와도 되는데. 나나리랑은 오랜만에 보잖아.’
방금 전까지는 늦게 들어오나 노심초사 했으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그것을 지적할까, 고민을 하다가 관두었다. 그보다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우리 첫 데이트 했을 때 봤던 영화 기억나?”
스자쿠는 곧장 영화 이름을 댔다. 근데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 하긴,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니까. 그게 아니라, 그때 너무 긴장해서 뭘 봤는지 기억이 안 나거든. 스자쿠의 낯간지러운 말에 를르슈는 제 뺨을 긁적거렸다.
“그 영화, 다시 보러 갈까?”
‘재개봉 한대?’
“응. 주말에 세이류랑 같이 와서 볼까 싶은데.”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기대에 들뜬 목소리가 벌써부터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럼 시간 확인해보고 예매할게. 를르슈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하늘은 아직 높고 새파랬고, 를르슈는 그 아래를 걸어가면서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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