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미오리네 렘블랑에게 있어서 굴욕적인 날이었다.
그날은 7월 5일이었고, 아침 이슬에 젖은 토마토가 붉은빛을 탐스럽게 빛내는 여름이었고, 슬레타 머큐리가 미오리네를 떠나간 날이었다. 내일 봐요, 라고 말했던 슬레타가 자퇴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미오리네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쓸렸다.
슬레타를 만나고 나서 갱생이라도 한 것마냥 열심히 들었던 수업도 모조리 다 빠졌다. 미오리네는 이사장실에 틀어박혀서 토마토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학교를 떠나간 슬레타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 슬레타가 이 학교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좋아했던 토마토만 쳐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미오리네는 잘 익은 토마토를 금방 따내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빨리 쉽게 상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슬레타가 떠나버린 미오리네도 그 토마토 꼴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버려진 거야.’
미오리네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직시했다. 그 사실은 곧 아프게 다가와서 미오리네를 괴롭게 했다. 스스로를 끌어안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그 아픈 사실을 잊으려고 해도 한 번 마주한 진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버려진 거야. 차라리 피할 수 없는 이 고통을 계속 되뇌면 덜 아프게 될 것 같아서, 미오리네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버려진 거야. 슬레타가 나를 버리고 간 거야.”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한 번 입밖으로 꺼낸 말은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미오리네는 어머니를 잃었을 때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너만은 나를 계속해서 봐줄 줄 알았는데, 어째서 너마저 그렇게 나를 버리는 거야? 슬레타를 향한 물음은 계속해서 솟아났지만, 미오리네에게 답을 줄 슬레타는 이미 떠난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 슬레타는 대답하지 않겠지. 미오리네는 눈물로 퉁퉁 부은 자신의 몰골을 거울로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옆에 있어도 슬레타는 대답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미오리네를 버린 이유, 미오리네를 떠난 이유, 미오리네를 혼자 두는 이유. 모두 다. 그 고집불통이 뭘 대답해주겠어. 자기 뜻이 있다면 그걸로 끝인 거겠지.
그렇다면 미오리네도 이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슬레타는 죽은 것도 아니고, 그저 알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낙관은 미오리네의 성격상 맞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뒤쫓아 가더라도 슬레타가 자신을 다시 봐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다를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이별을 받아들여, 미오리네. 그리고 다시는 사랑을 하지 말자.
* * *
슬레타 머큐리가 전학을 온 것은 토마토가 아직 붉게 무르익기 전이었다.
슬레타 머큐리, 라고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하게 적어둔 칠판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녀는 멀리서 보아도 잘게 손을 떨고 있었다. ‘자, 자,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외치듯이 말하는 목소리 끝도 어딘가 잠기는 느낌이라, 그녀가 어지간히 긴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새로운 학생의 등장에 작게 술렁거렸다. 머큐리라면, 그 머큐리? 프로스페라 머큐리의?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것에 슬레타 머큐리는 당황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애매하게 닿은 시선의 끝은 미오리네 렘블랑에게 닿았다. 미오리네 렘블랑은 슬레타 머큐리가 이 교실에 들어오고 나서, 동급생을 상대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출 때까지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슬레타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사람 한 명 없는 이 교실에서 홀로서기를 해야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슬레타의 ‘머큐리’라는 성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는 삭막했다. 열심히 하겠다고 했는데도, 그건 쉽지 않네. 여기선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구나, 하고 슬레타가 낙담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 머큐리는 렘블랑 옆에 앉도록 하자. 미오리네 렘블랑, 손 좀 들어줄래?”
“…네.”
“그래, 지금 손을 든 렘블랑 옆이 머큐리의 자리다. 자자, 머큐리도 이런 시기에 전학을 와서 힘들테니 다들 많이 도와주도록 해라. 수험 앞두고 날이 서 있는 건 알지만 친구를 도울 줄도 알아야지.”
“네.”
선생님이 그렇게 떠들고 있고, 아이들은 설렁설렁 대답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슬레타는 자신이 앉을 때까지 손을 들고 있어준 미오리네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걸어두고서 옆자리의 미오리네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자 미오리네의 시선이 겨우 슬레타에게 닿았다. 어딘가 딴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던 시선이 저에게 향하는 것은 꽤 매서웠다. 감사의 인사를 전했을 뿐인데 어딘가 잘못 말했던 걸까, 하고 슬레타는 고민에 빠졌다.
“뭐가 감사해?”
“네? 음, 그게, 손 들어주신 거요?”
“딱히 인사 받자고 한 건 아니야. 그런 거에 일일이 감사할 필요도 없어.”
“아….”
미오리네의 말에 슬레타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선생님의 종례는 끝나버렸다. 왁자지껄하게 흩어지는 학생들은 슬레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느새 슬레타를 포위하는 질문들은 한두 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너 정말 그 머큐리야?’라고 묻자 다들 기세를 타기 시작했고, 슬레타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미오리네는 자리를 옮겨 교실 뒤쪽에서 그런 슬레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엉성하게 굴고 있는 모습이 속이 터졌지만, 미오리네가 그녀를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내일도 저 모양이겠지? 그럼 내 자리가 시끄러워지는 거잖아. 그건 못 참지. 미오리네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서 슬레타의 뒤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들 왜—들 이러실까? 전학생 처음 봐?”
타악, 하고 등 뒤에서 책상을 내리치며 말을 하면 슬레타가 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주변이 화들짝 놀란 기색에 미오리네는 자신이 너무 과하게 움직였나 싶었다. 적당히 마무리를 해야했다.
“뭐든 적당히가 좋은 거야. 슬레타 머큐리도 놀라잖아.”
“가, 감사합니다.”
“너 좋으라고 한 거 아니야. 내 옆자리니까 시끄러워서 그런 거지.”
“그, 래도요.”
“…….”
미오리네는 그렇게 말해놓고서 슬레타를 바라보았다. 당황하는 눈빛이 미오리네에게 SOS라도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오리네는 더 이상의 친절을 베풀 생각은 없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책상에서 손을 치우고서는 말했다.
“내일부터 점심 약속이라도 잡고서 슬레타 머큐리를 꼬셔보던가. 이렇게 대놓고 하는 것도 촌스러워.”
그렇게 말한 미오리네는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미오리네가 빠지고서 아이들은 약간 주눅이 들었다가, 다시 또 활기차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러네, 그럼 점심 우리랑 같이 먹을래? 아니면 지금 기숙사로 가는 길이라도 같이 갈래? 나 머큐리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많아서 말이야. 괜찮아? 괜찮을 거 같지?
슬레타는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에, 에, 하면서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약속이 있어서요! 가볼게요!”
그리고 슬레타는 미오리네를 따라잡았다. 갑자기 붙들린 미오리네는 무선 이어폰을 막 꽂으려고 하던 찰나였다. 렘블랑 씨! 미오리네는 저를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가방을 겨우 챙긴 슬레타가 급하게 다가왔다. 목소리는 어찌나 컸는지, 주변의 학생들이 슬레타와 미오리네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들에 슬레
“뭐야?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내, 내일 점심… 같이 먹는 거 어때요?”
“내일 점심? 무슨 소리야? 너 나 알아?”
“아, 알아요.”
“오늘 처음 봤잖아.”
“미오리네 렘블랑, 3-A, 제 옆자리….”
“…그걸 안 다고 하는 거야, 너?”
“이 정도면 아, 는 거죠.”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뻔뻔한 건지 아님 순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슬레타는 시선을 굴리면서 저보다 작은 미오리네의 시선에 따라가기 시작했다. 황당함에 놀란 미오리네가 그녀와 시선이 닿았다. 푸른색 눈동자가 기대와 희망, 약간의 좌절, 부끄러움을 내비치면서 미오리네에게 있는 힘껏 닿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미오리네는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슬레타 머큐리의 점심 약속 같은 것에 어울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어떠한 변덕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심경의 변화인지 모를 것이 느껴졌다. 굳이 명명하자면, 머큐리라는 이름 아래에 놓이자마자 시끄러워졌던 그 교실 속의 아이들에게 잡힐 슬레타 머큐리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라는 이유로 달아두기로 했다.
“좋아. 내일 점심 같이 먹지, 뭐.”
“저, 정말요? 렘블랑 씨, 감사합니다!”
“그렇게 부르지도 마. 미오리네라고 해.”
“저도 슬레타라고 불러주시면… 아, 근데 렘블, 아니,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는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와중에 곤란한 표정을 짓는 슬레타를 돌아보았다. 뭐야, 또. 점심 약속 해줬잖아. 미오리네의 당연한 대꾸에 슬레타는 그게요오, 라고 말끝을 늘이면서 말했다.
“기숙사, 이쪽… 방향 아니지 않아요? 들어왔던 길이랑 정 반대인데….”
“맞아, 이쪽 방향 아니야. 잘 아네.”
“네에, 교내 지도는 잘 외우고 있거든요. 길 안 헤매게! 아, 그, 그럼 여기로 가면…?”
“기숙사랑 정 반대로 가게 되는 거지.”
“네에?! 그럼 저는 어떡해요?”
“네가 알아서 가야 하지… 않을까?”
어딘가 속이 터질 것 같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미오리네의 말에 슬레타는 고개를 부웅부웅 소리가 날 것 같이 저었다. 알아서 어떻게 가요? 저는 이 학교가 오늘 처음인데! 슬레타의 말에 미오리네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방금 전에 교내 지도는 다 외우고 있다며?”
“그렇지만 실전은 다를 수도 있잖아요….”
“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똑바로 말해, 답답하니까!”
“미오리네 씨가 데려다… 주세요.”
‘내가 왜?!’라는 소리를 절로 하게 만드는 대사였다. 미오리네는 길 가는 학생 한 명을 잡아다가 ‘얘가 그 유명한 프로스페라 머큐리의 딸인데 인맥 만들고 싶으면 지금이 기회야! 빨리 얘를 기숙사로 데려다 주고 친구가 되어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톡 쏘아붙이기도 전에 슬레타의 축 처진 눈썹이나 정말로 곤란해 보이는 푸른 시선 속에서 모든 말들이 사라졌다.
미오리네는 가던 발걸음의 방향을 돌리고는 슬레타를 스쳐 지나갔다. 아, 음, 저기. 슬레타가 엉성한 소리를 내면서 저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미오리네를 불렀다. 미오리네 씨…? 슬레타의 부르는 소리에 미오리네는 발을 쾅 구르며 외쳤다.
“빨리 따라 와, 슬레타!”
“…네!”
그러자 슬레타가 빠르게 미오리네의 옆에 붙었다. 이쪽으로 가니까 방금 전에 보였던 풍경이 보여요. 해가 지니까 더 낭만적이에요. 슬레타는 긴장을 해서 말이 많은 건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 말이 많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종례 시간에 떨었던 그 모습은 연기였나. 미오리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방금 전에… 이름으로 불러줘서 기뻤어요, 미오리네 씨. 사실 좀 자신 없었거든요. 미오리네 씨가 그냥 가버리면 어떡하나. 그런데 미오리네 씨가 데려다주니까 너무 좋아요. 역시, 엄마 말대로 하길 잘 한 거 같아요.”
슬레타의 수다를 대꾸 없이 받아주던 미오리네는 수성이라는 불모지에서 굴지의 기업 신세를 만든 여자의 말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시큰둥한 톤으로,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물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는데?”
“부, 부끄러워요.”
“그럼 말하지 마.”
“아니, 말할 수 없는 건 아닌데… 음, ‘슬레타는 귀여우니까 조금 억지를 부려도 친구가 금방 생길 거야’라고 하셨어요. 헤헤, 좀 부끄럽네요.”
“그러네, 부끄럽네. 본인 입으로 귀엽다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 그렇죠? 그래서 부끄럽다고… 했는데.”
어딘가 막 나가는 것 같은 그 행동기세에도 자신의 마더 컴플렉스에 대한 부끄러움은 일반적으로 느끼는 듯 하는 슬레타 머큐리. 미오리네는 그런 그녀와 조금 떨어져 걷고 싶어서 빠른 걸음으로 앞질렀다. 그러면 슬레타가 힘들이지 않고 보폭을 조금 넓혀 따라잡았다. 뒷 배경만 조금 좋을 뿐, 자기 주관이라고는 전혀 없어보이는 이 여자애랑 말하는 것은 미오리네에게 골치 아픈 일이라서, 미오리네는 걸음을 더 빨리 했다. 그러면 슬레타도 빠르게. 미오리네는 더 빠르게. 슬레타는 더 더 빠르게. 이윽고 미오리네가 숨이 차오를 만큼 빨리 걸으면 헉헉거리는 소리도 없이 잘 따라오던 슬레타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며 물었다.
“혹시… 화장실 급하세요, 미오리네 씨?”
“아니야! 허, 허억, 흐윽, 너무 많이 빨리 걸었어.”
“아니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너 정말 바보야?”
“바, 바보라뇨, 친구를 걱정하는 거 뿐이잖아요!”
“친구?”
택도 없는 소리를 하는 슬레타를 보고서 어이가 없어졌다.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미오리네는 가까워지는 기숙사 건물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자, 도착했어. 미오리네의 말에 슬레타는 와아, 하고 아이처럼 소리를 냈다. 해질녘에 보니까 건물이 더 예뻐보여요. 슬레타의 감상에 미오리네는 아아, 그러셔, 하고 말아버렸다. 이제 도착했으니까 난 간다. 슬레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 기숙사는 이쪽인데요?”
“난 거기 안 살아.”
“그럼 어디 살아요?”
“알 바야? 내버려 둬.”
미오리네의 딱 자르는 듯한 말투에 슬레타는 에에, 하고 고개를 숙였다. 내버려 두는 게 맞는 건가? 슬레타의 당혹스러운 표정에는 그것이 느껴졌지만 미오리네는 경보를 한 탓에 두 다리가 욱씬 거렸다. 기숙사가 있는 곳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이사장실까지 가는 게 막막했다. 미오리네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슬레타를 지나쳐 다시 걸어보려고 할 때였다.
“…미오리네 씨, 내일 점심 같이 먹는 거예요!”
대체 내가 왜, 라는 얼굴이 보였을까. 석양을 등진 미오리네의 표정은 제대로 읽히지 않아도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싫어, 귀찮아, 짜증나. 그런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는 미오리네에게 슬레타는 굴하지 않았다.
“우, 우리는 오늘부터 친구니까요!”
그렇게 외치는 슬레타는 후다닥 소리가 날 것 같이 기숙사를 향해 달렸다. 우리는 오늘부터 친구?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한 자각이 있긴 있는 걸까? 그래서 저렇게 뛰는 걸까? 미오리네는 어이가 없어서 걷는 것도 멈춰버렸다. 슬레타는 어느새 멀어져서 기숙사 현관 앞에서 서서 미오리네에게 손을 부웅부웅 흔들고 있었다. 미오리네 기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그 거리를 질주한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슬레타가 기숙사로 돌아가고, 미오리네는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이사장실로 돌아가기 위해서 걷기 시작했다. 지끈거리는 종아리나 발목, 아랫배의 통증이 왜인지 웃겼다. 평소라면 그렇게 뛰는 듯한 속도를 낼 일이 없는데.
우리는 오늘부터 친구. 미오리네는 초등학생도 안 할 법한 소리를 하는 슬레타가 우스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런 소리를 하는 고등학생이 어디 있어? 친구 선언이라니, 부끄러워. 그리고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생각만으로 피식대며 이사장실에 도착했다.
들어오면 보이는 아직 설익은 토마토를 확인하고, 흙의 상태를 살펴서 물을 줄지 말지 고민하다가 아직까진 표면이 촉촉하다는 생각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입고 있던 교복을 하나 둘 벗어던져 방 구석에 처박아 놓고, 미오리네는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아늑한 기분에 미오리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 줄기를 따라 풀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미오리네는 슬레타를 생각했다.
어딘가 주눅 들고 눈치 보는 주제에, 할 말은 다 하면서 제 고집대로 구는 그 슬레타 머큐리. 정말 웃기는 여자애야.
* * *
다음날 미오리네가 학교에 갔을 때에는 슬레타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물어물 하면서도 열심히 대답하고 있었다. 미오리네가 교실 뒷문으로 들어오는 것에 ‘미오리네 씨!’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미오리네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터벅터벅 걸어서 슬레타의 옆자리에 앉은 미오리네는 슬레타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제는 웃기기만 했는데, 슬레타 머큐리는 생각보다 피곤한 설정을 가진 여자애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떠오르는 신성으로 손꼽히는 기업 신세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한 명이자, 얼굴도 나름 나쁘지 않고, 건강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이 여자애는 성격이 조금 귀찮은 거 말고는 누구나 친해지고 싶을 정도로 메리트가 많은 인물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과 엮이면 피곤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오리네는 그녀와 멀어지는 편이 훨씬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제와 다르게 도움을 줄 구석이 보이지 않는 미오리네를 보고 슬레타는 당황했다. 있잖아, 부활동 정했어? 혹시 생각하고 있는 동아리 같은 거 있다면 육상은 어때? 그 사이에 쏟아지는 질문들에 슬레타는 눈을 굴리면서 엉성한 대답을 했다. 유, 육상은, 그, 달리기는,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요. 슬레타의 건성인 대답에도 아이들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아침 조회를 위해 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 슬레타는 비슷한 질문 속에서 시달려야만 했다.
선생님이 들어오고, 슬레타의 주변에 있던 아이들도 모두 돌아갔다. 슬레타는 그제서야 겨우 미오리네에게 말을 붙여볼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안심했다.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 씨…. 슬레타가 시선으로 몇번이고 미오리네를 불렀지만 미오리네는 반응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무어라 길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슬레타는 거의 듣지 못했다. 거의 미오리네에게 돌아간 고개에도 미오리네는 한 번의 반응도 없었다.
미오리네의 무관심한 태도에 슬레타는 의기소침해졌다. 눈에 띄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된 슬레타는 미오리네 쪽을 빤히 쳐다볼 용기도 내지 못한 채로, 힐끔거리며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선생님의 조회가 늘어지면서 수업시간이 바로 이어졌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에게 말을 붙여보겠다는 시도도 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갔다.
미오리네는 그런 애처로운 시선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썼다가는 피곤한 일에 얽히게 되는 것은 자신이니까. 안 그래도 난이도 극악으로 어려운 미오리네 렘블랑의 인생에 더 피곤한 일을 늘리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차갑게 굴면 어제 어거지로 했던 점심 약속에 대해서 슬레타는 말도 못 꺼낼 것이 분명했다.
분명했는데, 그럴 것이 분명했는데도, 슬레타는 말을 걸었다.
4교시까지 슬레타는 주변에서 몰아치는 질문들에 대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오리네는 도와주지 않았고, 요령이 없는 슬레타는 전부 다 대답하느라 점심시간까지 미오리네에게 말 한 번 붙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잘 되어가는 중이라고 미오리네가 자신만만하게 여기고 있을 때였다.
“미, 미오리네 씨! 학생 식당 데려가서 밥 먹여주세요!”
4교시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슬레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미오리네를 붙잡았다. 슬레타에게 다가오려던 아이들도 멈칫할 수준의 목청이었다. 시종일관 무시해왔던 미오리네도 이렇게 큰 목소리에는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쏟아지는 그 시선들 속에서 슬레타를 무시하는 것은 미오리네도 불가능했다. 미오리네는 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태연하게 말했다.
“너… 바보야? 그렇게 크게 말 안 해도.”
“그치만, 미오리네 씨, 계속 제 쪽을 봐주지도 않았고… 이렇게 말 안 했으면 또 저를 두고.”
“야, 약속 했으니까 지킬 생각이었어!”
“진, 짜요? 근데 왜 계속…….”
“계속 뭐? 뭐했는데, 내가?”
“아… 아무것도 안 해주셔서. 어제처럼, 뭐랄까, 기대했는데.”
미오리네에게 투덜거리기 시작하는 슬레타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없는 편 같았다. 어제부터 했던 친구 선언이니, 학생 식당 가서 밥 먹여달라고 하는 것부터가 미오리네 렘블랑을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인물 같았다. 미오리네는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이들이 수군대며 ‘미오리네랑 머큐리가 친한 가봐’ 라는 소리를 하는 것에 교실을 박차고 나왔다.
미, 미오리네 씨?! 어디 가세요?!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숨가쁘게 박차고 나와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따라나왔다. 나름 빠른 걸음이었다고 했는데, 키가 큰 슬레타는 보폭이 넓은 것인지 금세 따라 잡고서는 미오리네의 팔목을 잡았다.
“아파, 잡지 마!”
“세, 세게 안 잡았는데!”
“알 바야? 내가 아프다는데!”
“근데 왜… 도망 가세요?”
“도망 안 가! 학생 식당 가는 중이잖아!”
“거, 거기는 교무실, 가는 방향, 인데요.”
“…….”
슬레타는 정말로 세게 잡지도 않았고, 미오리네는 있는 말을 막 내뱉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대화 수준이었다. 미오리네는 교무실 방향이라고 적혀있는 교내 안내표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학생 식당은 반대방향이었다. 슬레타가 팔목을 놓아주고, 미오리네는 얌전히 뒤돌아서 학생 식당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교내 지도 다 외우고 있다고 했지?”
“네? 네.”
“그럼 학생 식당 어딘지 알 거 아니야? 아니, 애초부터 이 학교에서는 너 같은 애를 혼자 내버려두진 않았을 텐데. 너 여기 처음 왔을 때 이미 다 소개 받지 않았어?”
“……맞, 아요. 사실 알고 있었어요.”
“그럼 나한테 이러는 건 뭐야? 델링 렘블랑 딸 한 번 놀려보고 싶어서?”
“예?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전, 미오리네 씨랑 친, 해지고 싶어서, 그, 그런 건데요.”
미오리네는 학생 식당까지 도달하는 마지막 반층 계단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슬레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친해지고 싶어서, 라는 낯부끄러운 말을 하는 슬레타가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속물적으로 구는 게 미오리네에게는 속이 편했다. 그럼 이쪽에서 걷어차주면 그만이었는데.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친해지고 싶어서, 친구여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취향이 맞지 않았다.
너의 그런 점들이 짜증나, 라고 말하기에는 미오리네는 그렇게 막되먹은 편도 아니었다. 기숙사를 나와서 이사장실에서 멋대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제멋대로인 여자애이긴 해도, 친해지고 싶다는 사람에게 모질게 굴 수는 없었다. 미오리네는 반층의 계단을 내려가고, 학생 식당 앞까지 말없이 걸었다.
“알고 있겠지만… 여기가 학생 식당. 밥은 진짜로 안 먹여줘도 되지?”
“가, 같이 안 먹어요?”
“나는 사람들 앞에서 밥 먹는 거 싫어해.”
“그, 그거 식이장애의 한 증상인데. 미, 미오리네 씨.”
“이제는 별 희한한 소리를 하네. 아무튼 데려다 줬으니까 난 간다.”
떠나려는 미오리네를 슬레타가 붙들었다. 이번에는 팔목이 진짜 지잉, 울릴 정도로 아팠다. 너무 아파서 소리도 안 나올 정도였다. 슬레타는 힘의 가감을 하지 않은 자신을 알아차리고선 화들짝 놀랐다. 죄, 죄송해요. 빠른 사과에도 팔목은 욱씬거렸다.
“식사 안 하시면 걱정이 돼요.”
“왜?”
“……여기 기, 기숙사에서는 아침에 맛있는 밥이 나오더라고요! 그, 근데 미오리네 씨는 기숙사에서 안 사시는데 아침은 어떻게 드시는지.”
“아침이든 점심이든 내가 알아서 챙겨 먹으니까.”
“…치, 친구는 점심 같이 먹는 거랬어요.”
“누가?”
“그, 그건 말하면 부끄러우니까 비밀.”
이에요, 라는 말을 썩둑 잘라먹은 슬레타는 미오리네에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을 비쳤다. 그녀도 나름대로 미오리네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미오리네는 모질지 못헸다. 고개를 떨구려고 하는 슬레타의 자조하는 모습에 앞장서서 학생 식당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학생 식당에 들어서면 모두가 미오리네와 슬레타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런 시선이 숨막혀서, 미오리네는 이 식당에 들어선 것을 일순 후회했다. 그러나 슬레타가 앞서서 메뉴를 구경하는 것에 주위의 시선은 미오리네가 아닌 슬레타를 향했다.
“와, 런치A세트는 토마토 스파게티래요. 미오리네 씨, 토마토 좋아하시나요?”
슬레타는 메뉴판에 적힌 것을 읽으면서 미오리네에게 감상을 물었다. 그건 꼭 미오리네가 대답하지 않으면 메뉴판에 있는 모든 음식의 감상을 물어볼 것 같았다. 미오리네는 대충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슬레타를 앞질러서 식권을 뽑았다. 런치A세트 토마토 스파게티였다.
“자, 나는 시켰으니까 너도 시켜. 어떻게 시키는지 시범은 보여줬지?”
“음… 네! 저도 골랐어요.”
슬레타는 런치B세트의 오렌지 주스와 토마토 바질 크림치즈 베이글 샌드위치를 골랐다. 두 사람은 음식이 나오기까지 비어있는 아무 자리에 앉았다. 전교생을 수용할 수 있도록 넓게 지어진 학생 식당은 자리가 널널했고, 그리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슬레타와 미오리네 주변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람 눈치를 덜 봐도 된다는 것이 미오리네에게는 달가운 이야기였다.
스파게티와 샌드위치를 받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미오리네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슬레타에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도 제멋대로 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녀석 앞에서는 기는 정도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슬레타는 두툼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고서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맛있게 먹는 모습이 썩 나쁘진 않았다. 미오리네도 스푼에 덧대어 포크를 돌돌 말아 스파게티를 먹었다. 토마토 소스가 좀 연하긴 하지만, 이정도면 만족스러웠다. 미오리네는 오랜만에 먹는 학생 식당에서의 음식이 썩 나쁘진 않았다는 인상을 줬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면서 슬레타의 앞에서 천천히 음식을 해치워 나갔다.
“이 샌드위치 말이죠, 토마토가 맛있어요. 미오리네 씨 스파게티는 어때요?”
“그럭저럭.”
“맛있어 보여요.”
“그래봤자 소스에는 샌드위치랑 같은 토마토를 썼을 텐데.”
“그, 그럴까요? 맛이 궁금해요.”
“…….”
미오리네는 그러냐고 대꾸하려다가 슬레타의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시선을 맞추었다. 키 차이가 제법 나다 보니까 앉은 키로도 슬레타가 훨씬 커서, 올려다보는 시선이 어딘가 열이 받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심정으로 미오리네는 스파게티 한 입을 밀어넣었다. 그러자 슬레타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하, 한 입 주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왜? 네가 시켜 먹어.”
“그렇게 많이는… 못 먹는 건 아니지만, 딱 한 입만 먹어보고 싶은데요.”
“…있잖아, 네가 신세의 후계자라는 거 애들 다 알거든?”
미오리네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슬레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요, 라는 표정이었다.
“네가 스파게티 한 입만 달라고 하면 진짜 주고 싶어서 줄 서는 애들이 여기에 정말 많아.”
“…….”
“너한테 잘 보이고 싶은 애들이랑 친해지는 게 더 재밌지 않겠어?”
미오리네는 이렇게까지 밥맛 떨어지는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방금 전에 먹었던 스파게티가 조각조각 나면서 까끌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게 맞았다. 처음 했던 점심 약속까지는 억지로 지켰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힘들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정을 완전히 떨어뜨리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슬레타는 예상 외의 강적, 최악의 이레귤러였다는 것이다.
“저는 미오리네 씨랑 친해지고 싶은 건데요. 한 입도 안 줘도 좋으니 미오리네 씨랑 친해지고 싶어요.”
“왜 그렇게 나한테…….”
‘집착해’라는 말은 뭔가 자의식과잉 같아서 부끄럽고, ‘질척대’는 지금 사이에서는 쓸법한 말은 아닌 거 같고, ‘달라붙어’는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불순한 의미 같고. 미오리네가 말을 고르는 사이에 슬레타는 치고 들어왔다.
“미오리네 씨가 그냥 좋아서 친해지고 싶으면 안 되나요?”
그냥 좋아서, 라는 말은 미오리네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녀에게 이유가 붙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은 순수한 호의는 미오리네에게 주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러나 눈앞의 슬레타 머큐리는 뻔뻔하게 ‘그냥 좋아서’라는 이유로 미오리네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는 미오리네에게 포기하지 않고서 ‘집착’하고 ‘질척’대고 ‘달라붙고’ 있는 슬레타에게 미오리네는 머리 한 구석이 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그냥 좋아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는데.
미오리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얗게 질린 미오리네의 사고회로가 사실은 백기를 흔들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고서였다. 슬레타가 샌드위치를 다 먹고서 미오리네의 반쯤 남은 스파게티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에 미오리네는 저도 모르게 스파게티를 먹었던 포크로 면을 끌어모아 스푼을 받쳐 돌돌 말아서 슬레타 쪽으로 넘기고 있었다.
“자, 먹어.”
“진짜요?”
“떨어지니까 빨리.”
하얗게 질리다 못해 반짝거리는 패배의 백기가 흔들린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에게 스파게티를 먹여주는 자신이 어딘가 낯설고, 이상하고,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슬레타에게 먹여주기로 하는 시점에서 미오리네는 패배한 것이다.
그냥 좋아서 친해지고 싶다는데 내가 어떻게 해? 미오리네는 그렇게 인정하고 말아버리는 자신이 어딘가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두 슬레타 머큐리에게 풀어버리기에는 어른스럽지 못하고, 또 유치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화를 내는 대신에 슬레타에게 절반의 스파게티를 다 먹여주었다. 오렌지 주스로 입가심하는 슬레타는 맛있는 걸 배부르게 먹었다며 미오리네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미오리네 씨?”
이 좁은 학교에서, 어디로 갈 지에 대한 선택지는 무척이나 좁은데도, 슬레타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웃었다. 미오리네는 발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슬레타는 더 묻지 않고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미오리네 씨,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는 경쾌한 울림이 있었다. 미오리네는 이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결국 자신의 곁을 내어주게 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 * *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그렇게 친해졌다.
슬레타와 가까워진 만큼, 미오리네는 생각했다. 이런 관계는 비정상적이라고. 좋지 않은 것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호의 같은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미오리네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오리네는 슬레타와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학생 식당도 같이 다니고, 매점도 같이 다니고, 이동 수업도 함께 다니다 보면, 슬레타를 이사장실로 불러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사장실은 미오리네에게 있어서 그녀가 오롯하게 그녀다울 수 있는 공간이었음에도, 미오리네는 그 공간에 슬레타를 있게 했다. 그러면 안 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미오리네는 슬레타를 그곳에 있게 했다.
처음에는 제멋대로 늘어놓은 살림살이들을 치우고, 정리하며, 먼지까지 탈탈 털어내면서까지 슬레타를 이곳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되는 부분이 있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를 델링 렘블랑의 딸이 아니라 미오리네 렘블랑으로써 봐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호의를 베풀어주는 슬레타 머큐리. 그런 슬레타에게 받고 있는 신뢰에 대해서 답해주고 싶어하는 인지상정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쓰레기를 세 묶음이나 버리고 나서 나름 깔끔해진 이사장실에 슬레타가 들어왔을 때, 미오리네는 어림짐작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몹쓸 것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고, 기뻐했으며, 미오리네의 토마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여전히 친근하고 친밀한 친구였다. 처음 사귄 친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얼굴로 미오리네에게 다가선 그 얼굴이 미오리네는 무서웠다.
알 수 없는 공포.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미오리네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정말 알 수 없는 곳에서 느껴지는 공포라서 미오리네는 그 공포를 인식하는 것이 무척 늦었다. 심지어 미오리네의 이사장실에 슬레타가 여덟 번째 오는 날까지도 미오리네는 알지 못했다. 둘은 느긋하면서도 멍청하고, 내용 없고 비효율적인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에게 실없는 웃음을 나누었다.
“미오리네 씨, 여기에 있는 토마토는 언제쯤 빨갛게 변하나요?”
“보통 익을 때가 되면 빨갛게 되는데… 올해로써는 7월 쯤이나 되려나.”
“7월. 뭔가 멀게 느껴지네요.”
“그런가?”
지금은 이제 숨이 가빠지는 5월 중순이었다. 7월은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게 느껴질 시기였다.
“그때 쯤이면 기말고사도 끝나고 여름방학이 코앞이네요. 미오리네 씨는 방학 때 어디 가시나요? 피서라던가.”
“……딱히 갈 곳은 없어서, 아마 계속 학교에 있을 거야.”
“왜요?”
“그 망할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어디 파티에 데려가거나 할 바에야 학교에 처박혀 있는 게 훨씬 나아.”
미오리네의 ‘망할 아버지’라는 말에 슬레타는 쓰게 웃었다. 가족에 대해서 험한 말을 하는 미오리네를 이해할 수 없는 듯한 슬레타는 비교적 화목한 가정에서 큰 모양이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저를 미묘한 시선으로 쳐다볼 때면 속이 답답해졌다. 어딘가 뒤틀린 사람이 되어서 슬레타의 눈에 비치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헤집어 내색할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부 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슬레타의 배경이 되어주는 신세 기업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미오리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슬레타에게 신세나 신세의 후계자 구도에 대해서 물어보곤 했다. 너도 피곤하겠다, 그런 집안이라서. 슬레타에게 그런 식으로 툭 던져놓으면 슬레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그런 집안’이 뭐냐고 물었다. 저는 엄마랑 언니한테 망할, 이라는 말은 안 하는데요. 슬레타는 가족 문제에 있어서는 말 한 번 더듬지 않고 똑부러지는 대답을 했다. 가진 게 많을 수록 척박하다고 생각했는데, 슬레타의 가족들은 가진 게 많아도 화목한 모양이었다.
“저는 파티에 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 어차피 지루한 곳이야. 재미도 없어. 여기서 토마토 보는 게 더 재밌을 걸?”
“뭘 하길래 재미가 없다고 그래요? 저는 꽤 동경하고 있어요. 예쁜 드레스를 입는다거나, 멋진 음악을 듣는다거나… 다 같이 춤을 추는 거 같은 거요.”
슬레타의 꿈꾸는 듯한 표정에 미오리네는 ‘그거도 리스트에 있는 거야?’라고 물었다. 리스트는 슬레타가 이 학교에 오기 전에 만들어둔 ‘하고 싶은 일’ 리스트였다.
중학교 과정까지는 슬레타는 집안에서 쌍둥이 언니와 함께 가정교사를 불러서 공부를 마쳤다고 했다. 고등학교는 밖에서 다녀보고 싶다고 한 슬레타를 이해해준 가족들 덕분에 지금의 학교로 올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은 아니라서, 슬레타는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만들어서 엄마와 언니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지금 차곡차곡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대부분 미오리네와 함께 이루고 있다는 것이 미오리네에게는 꽤 자부심이 느껴지면서도, 때로는 초조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맞아요, 리스트에 있어요. 언젠가 파티에 가고 싶어요.”
“이 학교는 졸업식 때마다 파티를 크게 열어. 프롬이라고도 부르는데.”
“아, 프롬! 알고 있어요. 학교 설명 영상에서 봤어요. 맞아, 다들 멋진 옷을 입고서, 음악에 맞춰서 춤을 췄어요! 미오리네 씨도 프롬에서 춤 추셨겠네요!”
“…….”
“아, 안 췄어요?”
미오리네는 초등부, 중등부 시절에 있었던 프롬을 떠올렸다.
초등부 때에는 미오리네를 괴롭히던 남자애들이 에스코트를 하겠답시고 미오리네의 발을 밟고 춤을 추다가 흔들리는 드레스의 리본을 북 뜯어버리는 등의 만행을 보였다. 엉망이 된 드레스 자락을 끌어안고서 혼자 기숙사로 돌아가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죽여 울었다. 중등부 때에는 여자애들이 드레스 코드를 엉뚱하게 가르쳐줘서, 미오리네는 프롬 연회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델링 렘블랑의 딸이라는 위치는 미오리네를 늘 이렇게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그녀의 옆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받아먹고 싶은 사람들을 미오리네가 밀어내고 나면 아무도 남지 않았다. 미오리네는 아무도 없는 자신의 주변이 익숙해지는 게 싫으면서도,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 버텨냈다. 그래, 돌이켜보면 슬레타를 만나기 전까지는 모두 ‘버텨온’ 시간들이었다.
“별로 좋진 않았어. 알잖아, 내 취급.”
“취급이라니, 미오리네 씨가 뭐 어때서요?”
“나한테 그렇게 말해주는 건 너뿐이야.”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어깨에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파티에 가는 슬레타를 떠올렸다.
어떤 남자에게 에스코트를 받을까. 어떤 드레스를 입고 누구와 춤을 출까. 우스꽝스러운 그 얼빠진 말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여전하겠지? 아니다, 프롬이 열릴 때 쯤이면 슬레타도 성장했으려나. 어쩌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서 당당한 매너를 보여주는 프롬의 퀸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좀 싫은데….”
“뭐가요?”
“아니, 그냥 한 소리야. 아무튼 파티는… 난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 프롬이 아닌 다른 파티는 거의 아버지 체면 치레로 나간 자리라서 즐길 것도 없었고. 어른들 이야기에 어린애가 재롱이나 부리는 수준이었지.”
미오리네가 씁쓸한 표정을 짓자, 슬레타는 우웅, 하고 볼을 부풀렸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듯 했다. 슬레타는 혼자서 우웅, 음,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말했다.
“그럼 이번 프롬에서는 진짜 즐겨보도록 해요, 미오리네 씨!”
이번 프롬이라는 말에 미오리네는 머리가 굳었다. 그러고 보면 수험이 끝나면 졸업이고, 슬레타와 미오리네의 프롬이 열리는 해는 내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내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면 금방이겠지만, 당장 토마토가 익어가는 7월도 멀게만 느껴지는데.
“같이 예쁜 드레스를 입고! 멋있는 음악에 맞춰서! 함께 춤을 춰요!”
“…너랑 내가 춤을 추자고?”
“네! 저, 연습 열심히 할게요!”
“너 진짜 바보구나.”
슬레타의 멋진 발상에 미오리네는 바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자 둘이서 춤을 춰서 뭐할 건데? 에스코트 해준 남자애는 어디다 두고?”
“…아, 에스코트를, 해주시는 분을, 잊… 었네요.”
애써 말한 답이 오답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슬레타는 틀렸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으음, 그냥 우리끼리 춤을 추는 방법은 없을까요? 열심히 고민하던 슬레타가 미오리네에게 솔직하게 정답을 물었다.
슬레타는 이런 식으로 질문의 정답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모르는 수학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미오리네에게 바로 물었고, 놓치거나 잘 모르는 교칙이 있으면 미오리네를 찾았다. 미오리네는 그때마다 툴툴 대면서도 친절하게 풀이과정을 알려주거나, 슬레타와 함께 정답을 찾아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런 질문을 하는 방식과 닮아있으면서도, 슬레타의 간절함은 여느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원하는 그림을 상상했다. 예쁘게 맞춘 드레스를 입은 여자 둘이서, 남자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엉성하게 세워두고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 우습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으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선곡을 바꾸면 돼. 여자끼리만 춤추는 사교댄스가 있어. 선곡 리스트를 그걸로 맞추면 돼.”
“그런 방법이! 역시 미오리네 씨에요!”
“너 그렇게까지 나랑 같이 춤추고 싶어?”
“……아, 안 될까요?”
“너야말로 에스코트는 안 받고 싶어?”
“미오리네 씨는 에스코트… 받고 싶겠죠?”
“왜 자꾸 질문에 대답 안 하고 질문으로 말하는 거야?”
“미, 미오리네 씨도 대답 안 해주시잖아요.”
슬레타도, 미오리네도 대답을 미룬 채로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같이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슬레타를 보고 있으면 미오리네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나랑 같이 춤을 추고 싶어? 그렇게 물어봐도 슬레타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으로 응수할 뿐이었다. 그것이 싫었다. 왜 대답해주지 않는 건지. 하지만 확실하게 더 짚고 넘어갈 용기도 없었다. 슬레타가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그냥’이라는 말로 대답하면, 그것에 실망할 자신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실망? 실망한다고? 미오리네 렘블랑이 사람한테 실망한다고?’
미오리네는 서서히 뚜렷해지는 감정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스파게티를 처음 먹여줬을 때 들었던 낯설고, 이상하고, 이질적인 이 감정. 미오리네의 안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이 감정은 모두 슬레타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에게 실망한 것은 아주 오래 전이라서 이제 와서 실망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슬레타를 만나고 나서, 슬레타의 대답 하나에 실망이 아니라 낙담까지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의 대답이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봐 두려워서 떨고 있는 것도 싫었다. 미오리네는 스스로에게 질릴 것 같았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부정적인 모든 감정에 한 번에 휩쓸리는 것이 자신 답지 않았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미오리네가 말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얼굴이 어느새 미묘하게 바뀐 것에, 슬레타는 어딘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프, 프롬에서 미오리네 씨를 에스코트 하는 건 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싫으시겠죠?”
“계속 질문 뿐이네, 넌.”
“미오리네 씨, 혹시 화, 나셨나요?”
“…아냐, 그냥 내 자신이 질려서 그래.”
“왜요?”
미오리네의 속도 모르고 슬레타는 계속 다가왔다. 미오리네는 이제 이 감정을 싫고 불편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똑바로 마주해야 해. 이 감정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내야 해. 미오리네는 다가오는 슬레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이마에 손을 뻗는 것에 무심코 그 손을 잡았다. 열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걱정한 거겠지.
손과 손끼리 얽히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촉촉한 손끝의 살결이 느껴졌다. 미오리네의 차가운 손과 다르게 따뜻한 손이었다. 미오리네는 조금 거칠게 그 손을 마주잡고서 손끝으로 손바닥을 문질렀다. 슬레타는 미오리네 씨, 하고 미오리네를 불렀지만 미오리네는 그 손바닥을 힘주어 잡아당기면서 슬레타와 더 가까워졌다.
미오리네가 거의 슬레타에게 안겼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서 미오리네는 슬레타와 눈을 맞추었다. 시선이 오고가는 깊이가 깊어지고, 미오리네는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무언가가 일렁일렁 흔들리고, 고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 느끼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미오리네가 슬레타를 바라보는 눈에는 무언가가 가득했을 테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미오리네도 모르지만.
“저는 미오리네 씨가 그런 말 하는거 별로 안 좋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
“스스로에게 질린다거나, 안 좋은 말 같은 거요.”
“…왜?”
“미오리네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생각 하는 게 속상해요.”
“그러니까 왜 속상하냐고. 그냥 친구끼리도 할 수 있는 말이잖아.”
미오리네의 마지막 말은 도박이었다. 친구끼리, 라는 말로 모든 감정을 밀어넣고서 해결할 수 있다는 비겁자의 선택지였다. 미오리네는 이제 이 감정이 무엇인지 가닥이 잡혔다. 하지만 그 가닥의 끝을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 끝에 슬레타는 없고 자신만이 남아있게 되는 것은 두려웠다. 차라리 친구라면, 친구끼리 느끼는 흔한 감정이라면 슬레타가 남아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레타가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미오리네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도 열어두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든 기대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모른척 하려고 했다.
“친구라서 그런 생각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럼 내가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 같아서?”
“뭐, 그런 것도… 있겠지만요.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거 같아요.”
슬레타 머큐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처음 다니는 학교, 마음에 드는 또래 친구, 처음 즐기는 집안 밖의 자유 같은 것에 만끽해서 흔들리는 감정을 알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오리네는 달랐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와 가까워진 거리만큼 고개를 치켜들고 슬레타에게 말했다.
“너랑 키스하고 싶어, 슬레타.”
“…네?”
슬레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멍하니 있다가 어디다가요, 라고 물었다. 미오리네는 이 천연인지 아니면 멍청한건지 모를 슬레타에게 대답하는 대신에,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갖다댔다. 슬레타의 떨리는 숨결 같은 것이 느껴졌고, 미오리네는 눈을 감고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듯 슬레타의 멱살을 쥐고서 쿵 들이받았다.
들이받았다는 그 표현이 딱 적절했다. 입술에 찡하게 울리는 부딪친 통증이 슬레타에게 제대로 닿았다는 것의 증거였다. 눈을 감고 있던 미오리네는 입술을 천천히 부볐다가 떼어내고서 두 눈을 뜨고 슬레타를 쳐다보았다.
키스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에는 떨리지도 않았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키스를 끝내고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이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슬레타가 이제 자신을 보기 싫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다시 이런 시간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슬레타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나 혼자서만 이런 거라면. 미오리네는 속으로 절규를 내지르는 것을 삼키느라 새빨개진 얼굴로 슬레타를 바라보았다.
“이, 입술에… 키스하셨어요, 미오리네 씨.”
슬레타는 멍청한 소리를 했다. 미오리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하셨어요? 슬레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 입술에 하는 건 저도 놀란다구요. 슬레타의 말에 미오리네는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심장과 같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친구끼리는 입술에다가 키스 안 해, 슬레타.”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슬레타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미오리네의 뺨을 어루만졌다. 슬레타의 손이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제 얼굴이 그렇게 뜨거워졌던 것을 깨달은 미오리네는 더 이상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슬레타와 가까워졌던 몸을 떼어내고서, 멀어지고, 같이 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할 뿐이었다. 슬레타는 멀어지려는 미오리네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 억센 힘이었다. 미오리네는 일어서다 말았던 힘의 반동으로 침대 위로 미끄러졌고, 슬레타는 그녀를 붙들고 있는 팔을 아래로 깔아뭉갰다.
미오리네는 자신의 위에 있는 슬레타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 전개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슬레타의 일렁일렁 흔들거리는 눈동자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파랗게 빛이 났다.
“무슨 뜻인지 알아요,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가 잡아당긴 감정의 가닥, 그 끝에는 슬레타가 있을까. 그 도박은 끝이 나는 듯 했다. 미오리네가 원하는 방향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저, 조금 무섭거든요.”
내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게 뭐지? 미오리네는 너무 많은 생각의 과부하로 말이 다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하지만 슬레타는 침착하게, 일렁거리는 푸른 눈동자의 지긋한 시선으로 미오리네를 내려다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이랬어요.”
슬레타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미오리네에 점점 다가왔다. 기세 좋게 입술을 들이받았던 처음과 다르게 미오리네의 사소한 숨결까지 천천히 들이마시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망설이는 듯, 그러나 거리는 점점 좁혀오는 슬레타에게 미오리네는 눈을 감아버렸다.
“둘이서라면 무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미오리네 씨?—하고 말을 맺는 것 같은 것은, 진짜로 들었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슬레타의 마음의 소리가 그렇게 와닿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오리네는 자신의 돌진형 키스와 다르게 부드럽게 표면에 와닿고, 떨리는 그 진동을 서서히 삼켜가는 슬레타의 입술 표면을 느꼈다. 입술이라는 얇은 살갗에 남의 살이 닿고 있다는 느낌은 생경해서, 미오리네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입술만 맞대고 있는 키스를 하고,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로의 눈동자에서 일렁일렁거리던 것이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서 저에게 떨어지는 것에 입맛이 썼다. 왜 우냐고 타박하기에는 미오리네도 자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슬레타가 미오리네의 위로 넘어졌고, 슬레타의 무게 만큼 묵직해진 중압감에 미오리네는 훌쩍거리면서 바보, 무거워, 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미오리네는 알고 있었다. 바보는 자신이고, 무거운 것은 이제 막 자각하기 시작한 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지금만큼은 그 모든 것을 슬레타와 함께 끌어안고 싶어서, 미오리네는 슬레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 *
슬레타 머큐리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있다.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 미오리네랑 만나고 나서부터 슬레타는 ‘전진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을 확실하게 잡아갔다. 슬레타가 프로스페라와 에리크트의 품에만 있었을 때에는 알지 못했을 것들을 미오리네는 알려준다. 다정하고 상냥한 미오리네 씨. 나를 전진하게 만드는 미오리네 씨. 슬레타는 미오리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미오리네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슬레타의 다가오는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키스를 했다. 처음에는 입술 표면끼리의 맞닿는 키스였다면, 그 다음은 서로를 맛보는 키스를 했다. 닿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라고 말하는 키스였다. 가장 많이 키스한 장소는 미오리네가 머무는 이사장실이었다. 그녀가 머무는 침대 위에서 키스를 하고 있으면 슬레타는 형편 좋은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슬레타의 키스에 녹아가는 미오리네는 밀어내지도 않았고, 곧잘 툴툴거리는 말투도 하지 않은 채로 오히려 더 해달라고 조르거나 보챘다.
슬레타, 슬… 레타. 미오리네가 고양되는 흥분감으로 끊어지는 듯한 숨을 내쉬며 자신을 부를 때면 슬레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었다. 그저 미오리네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서, ‘바보, 힘 조절 하라고!’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몸을 부대끼고 싶었다.
하지만 본능은 키스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오리네 또한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슬레타를 부추기는 것 같았다. 슬레타는 자신의 체온으로 실컷 녹진해진 미오리네의 손바닥을 꼬옥 붙잡고서 숨을 골랐다. 어떠한 선을 넘어가는 것은 전진이겠지. 도망치지 않고 전진하는 것을 선택해온 슬레타는 그 선을 넘는 것이 어딘가 불안했다.
키스로 얼굴이 붉어진 미오리네를 놓아주고, 슬레타는 흐트러진 교복을 다듬고서 이사장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미오리네가 아쉬운 표정으로 자고 가라고 했지만, 슬레타는 ‘기숙사에 외박 신고 안 해서요.’라는 이야기로 마무리지었다. 규칙에 있어서 올곧고 정직한 슬레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미오리네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접으면서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 기숙사로 돌아온 슬레타는 오랜만에 들어온 에리크트의 연락을 받았다. 슬레타와 다르게 여전히 가정교습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에리크트는, 잘 지내고 있는 슬레타의 모습에 안심한 듯 하면서도 슬레타에게 고민을 던졌다.
에리크트에게 미오리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미오리네 씨와 친구가 됐어요, 라는 보고를 한 것도 한참 전이었다. 에리크트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미오리네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오리네와 키스하는 사이라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어딘가 현실의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가족도, 친구도 아닌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슬레타는 알고 있었다.
그저 에리크트에게 미오리네와 가까워질 수록 무섭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미오리네 씨가 저랑 프롬에서 같이 에스코트를 해주고 춤추기로 했는데, 만약에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난 너무 슬플 거 같아. 그때의 슬픔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져. 슬레타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에리크트는 이렇게 말했다.
‘슬레타는 그런 게 괜찮다고 생각해?’
그런 게 괜찮냐니, 뭐가 그런 거고, 뭐가 괜찮냐는 거지?
슬레타가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굳어있으면, 에리크트는 후후, 하고 웃으며 말했다.
‘미오리네라는 애를 좋아하잖아. 그래서 독점하고 싶어지는 거고.’
“……독점, 같은 게 아니야.”
‘아니야, 맞아. 미오리네를 좋아하니까 계속 의심하고 싶어지는 거야, 슬레타.’
듣고 보면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에리크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슬레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슬레타도 알고 있지? 파티 같은 데서 춤을 출 때에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추는 거야. 여자와 여자끼리 춤을 추는 건 친구까지만 가능한 거고. 하지만 너와 미오리네는 친구로써 춤추고 싶은 게 아니잖아?’
“…….”
‘미오리네와 도망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어?’
“……에리. 너무 어려워.”
슬레타는 중얼거렸다.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 이 간단한 공식 속에서 슬레타는 키스를 나누는 미오리네와 함께 도망치지 않을 자신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미오리네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똑같이 가져달라고 말할 자신 있어?’
“미오리네 씨한테?”
‘그런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슬레타에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는 네가 곤경에 처하거나 곤란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니까.’
에리크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자야 할 시간이네, 슬레타. 에리크트는 슬레타에게 큰 고민을 던져놨으면서 태연하게 자러 가겠다고 말했다. 어두워지는 화면을 보며, 슬레타는 그 화면에 거울처럼 비친 자신을 응시했다.
슬레타 머큐리, 너는 미오리네 씨에게 같은 마음을 가져달라고 말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 마음은 너무 무겁고, 불쾌하고, 끈적하고, 질이 나쁜 독점욕이다. 도망치면 하나지만 전진하면 둘이라는 공식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것이었다.
이런 마음을 미오리네 씨한테 전하면, 미오리네 씨는 여전히 나와 같이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할까? 미오리네 씨한테는 어쩌면 나와 같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멋진 연미복을 입은 남자에게 에스코트를 받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 나와 친구로써 춤추는 것보다, 그런 게 더, 형편 좋은 일이 아닐까.
어차피 나는 미오리네 씨 옆에 있어도 친구로 보이겠지? 우리는 서로를 엿보는 깊은 키스를 하지만, 얄팍한 수를 쓰지 않으면 춤조차 같이 출 수 없는 상대구나.
“각오가 서지 않아요, 미오리네 씨.”
슬레타는 소등시간이 다 되어 어두워진 방 안에서 중얼거렸다. 침대 위에 홀로 앉아서 무릎을 끌어안고서 다시 한 번 고민해도 답은 똑같았다. 미오리네 씨와 전진해야 하는데, 어째서 계속 도망치고만 싶어질까. 미오리네의 부드러운 입술과 긴장으로 질끈 감았던 두 눈가, 붉어진 볼 같은 것을 떠올리면 슬레타는 더욱 망설여졌다.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인데. 둘이 어떻게 해야 같이 전진할 수 있을까.
* * *
요즘 슬레타가 이상했다.
기말고사 내내 시험공부를 해도 건성이었고, 미오리네가 불러도 한 박자 늦게 돌아보았다. 너 어디 아파? 미오리네가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면, 슬레타는 화들짝 놀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평소라면 바보 같이 헤헤 웃는 낯으로 ‘괜찮아요, 전 건강하니까요!’라고 걱정한 사람 속을 들쑤셔놔야 정상인데, 요즘의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닿기만 하면 놀라면서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단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미오리네의 이사장실에서도 슬레타는 어딘가 내외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렇다고 미오리네와 하는 키스를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애정의 파도에 휩쓸리듯 퍼붓지도 않았다. 어딘가 살금살금 눈치를 보는 듯한 키스를 하면서 미오리네를 감질나게 만들었다.
이게 소위 말하는 연애의 밀고 당기기라는 걸까. 이 바보가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워온 걸까. 미오리네는 자신의 턱에 늘어진 타액을 닦아주는 슬레타의 손길에 호흡을 고르며 생각했다. 미오리네가 눈을 감고 턱을 살짝 치켜들면, 슬레타가 볼을 감싸면서 키스를 해주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습관이었다. 이 습관은 여전히 먹혔고, 슬레타는 미오리네에게 키스를 해주었고, 그런 슬레타에게 몸을 내던지듯 키스를 조르는 것도 미오리네였다.
변한 것이 없다면 없겠지만, 이 미묘하게 느껴지는 격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오리네는 일관적이었고, 변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달라진 것은 슬레타일 것이다. 슬레타의 어디가 달라진 것인지 궁금했지만, 만약 좋아하는 마음이 달라진 것이라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았다. 그래서 미오리네는 이 미묘하게 달라진 키스도, 그 키스를 해주는 슬레타도 모두 참고 견디기로 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대신에, 조금 실없는 소리를 하며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없애기로 했다.
“슬레타, 곧 있으면 토마토를 먹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럼 토마토가 이제 빨개지겠네요.”
“그렇겠지. 익었다는 표현이 맞겠지?”
“벌써 7월이네요.”
“응.”
“그리고 곧 방학이고요.”
“맞아. 근데 너 보충수업은 괜찮은 거야? 시험공부를 엉망으로 했잖아.”
“……뭐, 괜찮아요.”
계속 참고 들어주면 마지막의 그 말은 하나도 안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았다. 미오리네는 불끈 솟아오르려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그으래, 하고 말끝을 늘렸다. 그럼 바보 같은 슬레타는 말을 왜 그렇게 하냐면서 귀여운 앙탈을 부려야만 했는데, 슬레타는 이사장실 바깥 쪽에 있는 토마토가 방울방울 달려 있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너 요즘 이상해.”
이제 참을 수 없어지는 것은 미오리네였다. 평소 답지 않은 슬레타를 참아주는 것도 한계였다. 그러나 슬레타는 그런 미오리네의 지적에 ‘아, 아니에요!’라고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그저 울컥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미오리네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일렁일렁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오랜만에 보였다.
그 눈을 마주해도,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무엇을 참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낯설게 느껴지기만 했다. 평소의 미오리네라면 어쩌면 그것을 읽어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한계에 다다른 미오리네는 읽을 수 없었고, 눈앞의 분노에만 급급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게 없는데 왜 그렇게 쳐다봐?”
“…….”
슬레타는 무언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포기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싫어서 미오리네는 ‘말하라고, 이 바보야!’라고 외쳤다. 실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미오리네의 큰 소리에도 슬레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맞잖아! 너 나한테 계속 이럴 거야?! 대답해, 슬레타 머큐리!”
미오리네는 대답이 없는 슬레타를 보고서 몇 번이고 소리를 질렀다. 대답해, 변명이라도 하라고! 슬레타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오리네는 벌떡 일어나는 슬레타를 보고서 당황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앞서나갔다. 그래,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나갈 거라면 그냥 가버려. 나도 이제 필요없어. 너 같은 거, 이제 알 바도 아니야. 멋대로 꼬이는 미오리네의 사고회로는 슬레타를 붙잡지 않았다. 슬레타는 로퍼를 갖춰 신고는 미오리네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미오리네 씨. 내일 봐요.”
이번에 입을 다문 것은 미오리네였다. 슬레타가 나가는 발 소리에도 미오리네는 바깥을 쳐다보지 않았다. 괜한 오기가 생겨서 미오리네는 실내 전등을 모두 꺼버리고 바깥에서 들이치는 불빛마저 커텐을 닫아 어둡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슬레타와 함께 키스했던 침대에서 혼자 드러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슬레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일 봐요’라고 말했던 것에, 미오리네는 다음날 아침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그날은 7월 5일이었고, 슬레타에게 말한 것이 진짜라도 되기라도 한듯 아침 이슬에 젖은 토마토가 붉은빛을 탐스럽게 빛내는 여름이었다. 그리고 슬레타가 학교를 그만두고 미오리네의 곁에서 떠난 날이기도 했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미오리네가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결론으로 마무리 된다.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만났고 헤어졌다. 슬레타의 일방적인 이별이었지만, 미오리네의 일방적인 사랑이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서, 예쁜 드레스를 입은 미오리네 렘블랑은 프롬에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남학생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드레스 코드도 완벽하게 숙지해서 갔기 때문에 실수 하나 없었고, 그간의 프롬에서 겪었던 치욕을 생각하면 완벽했다. 아름다운 드레스 끝자락을 흩날리며 춤을 추는 미오리네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저에게 춤을 추자고 했던 그 슬레타 머큐리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헤어진 상태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미오리네는 이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현실이 다 깨어지고 박살나기를 바랐다. 슬레타 머큐리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런 고통 쯤은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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