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사흘 동안 서로 꼭 붙어다녔다.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오리네의 프롬 이야기, 두 사람을 이어줬던 진짜배기 큐피드 에리크트에 대한 이야기, 슬레타가 길 한복판에서 뺨을 얻어 맞았던 그날 이야기. 그 외의 많은 이야기를, 쉬지 않고,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나누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흘이라는 시간은 부족했다.
“왜 하필 미오리네는 사흘만 있다가 간 거야?”
에리크트는 오랜만에 찾은 쌍둥이 여동생의 표정이 모처럼 밝은 것에 만족스러워하며 물었다. 슬레타는 며칠 만에 사람 꼴로 갖춰 입은 것이 어색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면서 에리크트의 말에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미오리네 씨가 사는 아파트의 에어컨이 고장났었대. 근데 그 수리기사님이 때마침 내일 오신다고 하셔서.”
“아아…. 너도 따라가지 그랬어?”
“미오리네 씨가 집이 더러워서 초대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래서 여기서 집 보고 있는 거야? 하긴, 뭐 멀쩡한 꼴은 아니긴 했어. 아파트는 좋은데 살림은 정말 꽝인 느낌.”
“…미오리네 씨가 집안일을 느슨하게 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꽝은 아니야.”
“편 들 걸 들어. 너네 둘은 나한테 빚을 진 거야, 알지?”
에리크트의 말에 슬레타는 으응, 하고 소파에 대충 기댔다. 에리크트는 모처럼 찾아와준 언니에게 물 한 잔 대접하지 않는 슬레타가 괘씸했으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연인을 되찾아 그 기쁨으로 행복한 것을 보니 됐다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긴 했지만, 그만큼 재미를 보여줬으니 에리크트에게도 영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근데 에리는 미오리네 씨 집에 가봤어?”
“뭐, 불가항력이었지.”
“부럽다. 나도 가보고 싶어.”
“집 주소 알려줘?”
“흐음, 궁금하기는 한데. 미오리네 씨가 초대해 줄 때까지 모르고 있을래.”
“둘 다 똑같군.”
에리크트는 자신이 내밀었던 비행기 티켓을 북북 찢어버렸던 미오리네를 떠올렸다. 미오리네의 집 주소를 알고 싶어도 꾹 참고 있는 슬레타. 서로 닮긴 닮았다. 슬레타는 ‘미오리네 씨, 보고 싶어’라고 중얼거리면서 휴대폰을 톡톡 두드렸다. 미오리네와 함께 메시지를 주고 받고 있는 중인 듯 싶었다.
“전화를 하지 그래?”
“그러면 에리가 듣잖아.”
“내 앞에서 새삼스럽게.”
때마침 에리크트의 휴대폰도 울렸다. 이제 곧 회의에 가야 한다는 알림이었다. 에리크트가 ‘이제 가볼게’라고 말하는 것에, 슬레타는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에리크트의 배웅에 나섰다. 에리크트가 타고 내려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에, 슬레타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있잖아, 에리.”
“응.”
“에리는 왜 우리를 도와준 거야?”
“인과관계는 확실하게 해야지, 슬레타. 너네는 나 때문에 헤어졌잖아.”
“그건 딱히… 에리의 잘못은 아니었어. 내 문제였지.”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럼 왜 물어봐?”
“……에리가 뭔가 바라는 게 있나 싶어서.”
방금 전에도 빚이 어쩌고, 그랬으니까. 슬레타의 우물쭈물하는 목소리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뒤섞였다. 슬레타는 에리크트가 대가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슬레타가 그 대가—에리크트의 표현으로는 슬레타와 미오리네가 진 빚—를 갚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단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내가 바라는 게 있으면 들어줄 거야, 슬레타?”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딱 한 번 누르고, 에리크트는 슬레타에게 질문했다. 슬레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헤어지라는 거 말고 다 들어줄게. 자신만만하면서도 장난끼 넘치는 슬레타의 대답에 에리크트는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문이 닫히려고 할 때, 에리크트는 말했다.
“그럼 조카는 두 명 정도가 좋을 거 같아.”
에리크트의 말에 슬레타는 ‘조카는 두 명?’이라고 되물었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은 닫힌지 오래였다. 슬레타는 혼자 남아 현관문을 지나가고, 혼자 다시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을 무렵에야 그 뜻을 이해했다.
* * *
미오리네 렘블랑이 사랑하는 연인 슬레타 머큐리를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하게 된 것은 1주일 후의 일이었다. 슬레타는 그동안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왜 1주일이나 걸린 거예요?! 에어컨 수리가 그렇게 오랜 시간 걸릴 일이에요?!’
슬레타가 가장 최근에 보낸 분노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미오리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오리네는 비행기 도착장에서 슬레타를 기다리며, 그간 나누었던 메시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미오리네가 슬레타를 에어컨을 고쳐놓고도 바로 초대하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슬레타 때문이었다. 슬레타를 찾기 위해 떠났던 시간들 만큼 비워져 있던 미오리네의 아파트는 엉망이 되었다. 가장 엉망이 되었던 것은 미오리네가 키우고 있던 토마토 화분이었다. 또 제때 따지 못한 토마토는 미오리네가 아파트를 비웠던 그 시간만큼 썩어 문드러졌고, 그곳에서 벌레들이 창궐했다. 미오리네는 수리기사를 부르기 전에 벌레들을 해치우느라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나서도 곳곳에서 알을 깐 벌레들 때문에 미오리네는 방역업체를 부르고, 내친김에 대청소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 사이에 긴장이 풀려 몸살도 났었다. 미오리네에게는 지난 1주일이 쏜살 같았지만, 슬레타에게는 영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미오리네는 금방 또 들어오는 새로운 슬레타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 도착했어요.’
그러고 보면 전광판에 비친 슬레타의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문구로 바뀌었다. 슬레타는 한 차례 더 메시지를 보냈다.
‘빨리 보고 싶어요.’
미오리네도 답장을 했다. 나도. 짧고 간결하지만, 슬레타에게는 이미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지루한 기다림마저도 슬레타를 위한 것이라면 미오리네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지, 사람 한 명으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미오리네는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슬레타를 바라보았다. 미오리네는 환영의 의미로 들고 있던 꽃다발이 망가지는 건 생각도 안하고 슬레타에게 달려갔다. 꽃잎이 흩날리면서 슬레타와 미오리네의 주변에 떨어졌다. 서로를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두 사람의 포옹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뷰티풀, 브라보!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그제서야 부끄러움을 느낀 미오리네가 슬레타로부터 떨어지고, 슬레타는 엉성해진 꽃다발을 받고서 히죽 웃었다.
“저 많이 보고 싶었죠, 미오리네 씨?”
차마 장난으로라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미오리네는 주변 시선만 아니었다면 여기서 입을 맞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미오리네가 입술만 달싹거리고서 슬레타를 빤히 쳐다보는 것에, 슬레타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미오리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또 어딘가에서 ‘뷰티풀, 브라보!’ 소리가 들렸다. 박수 소리도 방금 전보다 길게 울렸다. 미오리네는 사람 많은 공항에서 반가운 연인의 재회를 생중계 했다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바보, 바보 슬레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미오리네는 뚝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슬레타를 꽃다발째로 때렸다. 슬레타는 앗, 아파요, 장미 꽃잎이 아파요, 하는 소리와 함께 그러고 싶었다는 말을 뻔뻔하게 했다.
두 사람은 공항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번에는 사랑의 술래잡기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또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뷰티풀, 브라보!
* * *
사랑하는 연인을 싣고 달리는 자동차 치고는 미오리네의 운전은 조금 난폭했다. 슬레타는 처음에는 운전하는 미오리네를 보는 것이 즐거워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지만, 이내 미오리네의 아파트에 다다를 무렵에는 정말 생존을 걱정하느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난폭 운전을 한 미오리네또한 자신의 형편 없는 운전 실력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미오리네의 계획대로라면, 자신이 부드럽게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엘가’의 ‘사랑의 인사’ 정도 틀어 주고서 슬레타와 다정한 소회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나니 미오리네는 오기 밖에 남지 않았다.
두 손으로 들기에도 묵직한 슬레타의 캐리어를 미오리네는 질질 끌고서 자신의 아파트로 안내했다. 슬레타가 들겠다고 했으나, 미오리네는 자신이 초대한 손님에게 짐을 들게 할 수 없다는 말을 갖다 붙이면서 이거 하나라도 해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미오리네는 캐리어를 끌다가 넘어졌다. 꽈당, 우당탕, 꺄악!—하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고, 미오리네는 가벼운 찰과상이지만 영광의 상처를 얻었다. 결국 미오리네의 집에 들어갈 때에는 슬레타가 캐리어를 들었다.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온 거야?”
“미, 미오리네 씨랑 방학 끝날 때까지 계속 같이 있으려고요.”
“…바보 슬레타.”
“미오리네 씨가 좋다면 바보여도 좋아요.”
슬레타의 캐리어는 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 정말 바보야? 부족하면 여기서 옷을 사면 되잖아. 미오리네의 부잣집 딸의 자본과시적인 대사에도 슬레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별 이야기를 다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빨래할 시간도, 옷 고르느라 쇼핑하는 시간도 아까워요.”
“이런 체력 낭비는 너나 할 수 있어, 진짜.”
미오리네는 그렇게 툴툴 대면서도 슬레타에게 1주일 동안 열심히 쓸고 닦아 광을 낸 집안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자, 여기가 거실이고 저기가 부엌. 이쪽이 침실, 반대편이 서재, 하나는 드레스룸. 화장실은 저기, 욕실은 더 뒤에…. 신이 난 미오리네의 목소리를 따라 옆을 걷던 슬레타가 거실의 창가에 덩그라니 서있는 토마토 화분을 가리켰다.
“미오리네 씨, 이거 설마…?”
“맞아, 그때 이사장실에 있었던 토마토야.”
“……결국 못 먹어 봤네요.”
“안타깝게도 올해도 그렇게 됐어. 내년에 다시 키울 거니까 그때 기대해.”
“내년이면 금방이죠!”
슬레타는 씩씩하게 웃었다. 미오리네도 지지 않을 정도로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내년이면 금방이다. 지난 1년은 너무 길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모든 것이 최악이었는데도,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났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음에 ‘내년이면 금방이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그런 감상을 입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 대신에, 서로를 한 번 꼬옥 끌어안을 뿐이었다.
“미오리네 씨의 집, 생각보다 상상했던 거랑 느낌이 달라요.”
“열심히 청소했으니까 그런 거지.”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음, 뭐랄까.”
슬레타는 말을 고르는 듯 하더니 이내 말하지 않았다. 뭐야, 너도 나한테 살림 못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미오리네가 삐죽이듯 말하자, 슬레타는 겨우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 못했던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뇨, 생각보다 외로운 느낌이라…. 미오리네 씨가 이 집에서 혼자서 쓸쓸해 했을 것 같아서요. 아, 물론 이제는 외롭지 않게 제가 노력할게요.”
“…맞아, 외로웠어. 그랬으니까 이제 네가 책임 지는 거야, 슬레타.”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미오리네에게, 슬레타는 사랑스럽다고 중얼거리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볼 키스를 받으면서 미오리네는 얌전히 슬레타와 시선을 주고 받았다.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슬레타는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헤헤, 아예 학교도 편입해 버릴까요? 미오리네 씨랑 캠퍼스 데이트 해보고 싶어요.”
“캠퍼스 데이트만?”
“어떤 데이트도 나쁘지 않아요. 아, 말 나온 김에 짐 정리하고 영화라도 같이 볼까요?”
“아니, 오늘은 피곤해. 어디 나가고 싶지도 않고.”
“날씨도 좋은데.”
“내일도 맑을 거랬어.”
“그럼 이 주변 산책이라도 해볼까요? 미오리네 씨가 자주가는 카페라던가.”
“…슬레타, 내가 왜 1주일 내내 집 청소만 한 줄 알아?”
미오리네의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슬레타는 저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글쎄요? 왜요? 슬레타는 다 알아 차릴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이렇게 가끔씩 눈치없게 굴 때가 있었다. 이게 천연이라면 천연이겠지만, 미오리네는 가끔 슬레타가 일부러 모르는 척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알고서도 당해주는 게 연애의 의리이자 도리 아니겠는가. 미오리네는 낮은 목소리로 슬레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랑 집 데이트 하려고.”
그럼 미오리네의 사랑스러운 슬레타는 붉어진 얼굴로 미오리네에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와. 저 진짜 몰랐어요.”
“괜찮아, 이제부터 알아가면 돼.”
미오리네는 슬레타를 소개했던 침실로 이끌었다. 암막 커텐이 꼼꼼하게 쳐져 있고, 부끄러울 만큼만 빛이 나는 앙증맞은 조명 소품이 놓여져 있는 협탁, 그리고 두 사람이 뒹굴기에는 넉넉하게 넓은 침대. 미오리네가 1주일 동안 집 청소를 하면서 아예 새롭게 꾸민 곳이었다. 혼자 쓰던 침대를 갖다 버리는데 힘을 쓰느라 팔다리가 근육통으로 시달렸던 것은 비밀로 하고 싶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준비한 ‘집 데이트’에 최선을 다했다. 분명 침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해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집 데이트가 끝나고 나니 캄캄한 밤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침실에서 나오기 위해 서로 겨우 꿰어입은 티셔츠와 팬티 한 장 차림으로 거실의 소파에서 앉아서 달 구경을 했다.
미오리네 씨를 위해서라면 저는 달도 따다 줄 수 있어요. 슬레타가 자신의 품에 기댄 미오리네에게 말했다. 미오리네는 한껏 사랑을 나눈 뒤의 필로 토크가 이렇게 유치한 거라면, 얼마든지 유치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달도 따오고 토마토도 따와, 슬레타. 미오리네의 말에 슬레타는 으음, 하고 고민했다. 너 뭔데 왜 대답을 빨리 못해? 미오리네가 다그치자, 슬레타가 그렇지만요—라고 말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달에서 토마토가 자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걸요. 슬레타의 말에 미오리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 * *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많은 데이트를 했다.
영화관에 가서 그저 그런 오락영화를 보면서 불 같은 토론을 나누었다. 그러니까 그 돈을 받고서 영화 티켓을 파는 주제에 영화를 그렇게 만들면 안 되지! 미오리네가 화를 냈다. 그러자 영화에 감동을 받은 슬레타가 미오리네에게 너무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주인공이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멋있었어요! 진짜 행복은 가까운 곳에서 소소하게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였어요! 전 이 영화 좋았어요! 이번에는 미오리네가 어처구니 없어하면서 ‘너 지금 나보다 그 영화가 좋다는 거야?’라고 말했다. 유치찬란한 대사를 먼저 친 것은 미오리네였고, 그런 것에 넉 다운 당해야 하는 것은 슬레타였어야 했는데, 정작 당한 것은 미오리네였다.
“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미오리네 씨가 당연히 더 좋죠. 영화도 그런 내용이었잖아요. 멀리 있는 미오리네 씨보다 가까이 있는 미오리네 씨를 사랑하라, 라고.”
평소에는 말도 더듬으면서, 이번 만큼은 확신에 차있는 슬레타가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대사에 미오리네는 넉 다운 당하고 말았다. 그, 그런 교훈을 어디서 얻는 거야? 알겠으니까 떨어져서 걸어. 미오리네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못 들자, 슬레타는 어디 아프냐며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왔다.
두 사람은 에리크트와 미오리네가 만났던 골목길도 걸었다.
햇살이 뜨겁게 늘어지는 골목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일렁거리는 거리를 거닐면서 서로에게 부채질을 해주면서 걸었다. 그 골목의 끝자락에는 바람이 잘 통하는 자리에 헌책방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헌책방을 구경하면서,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어렸을 적에나 보았던 그림책을 펼쳐보고 반가워했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다면 서로에게 선물하자는 이야기도 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무엇을 좋아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슬레타가 먼저 계산을 끝냈다면서 내미는 책을 받았다. 아기자기한 색감의 작은 책이었다. 표지 일러스트도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제목이었다.
“‘별자리 유형별 연애 백과사전’? 이게 뭐야?”
“우리 데이트 할 때 참고해요!”
“아… 아예 혈액형 유형별 연애 백과사전도 사지 그랬어?”
“그럴까요? 같이 세트로 있긴 했는데 우선 한 권씩 고르기로 했으니까….”
“…….”
그래서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세트로 구매를 염두해 두었던 ‘혈액형 유형별 연애 백과사전’을 샀다. 두 사람 다 철 지난 별자리와 혈액형 연애점을 치면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매일 밤 자기 전에 서로의 별자리와 혈액형에 어울리는 가상의 데이트 코스를 짜주었다. 그러면 잠들고 나면 꿈속에서 그런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가끔 비슷한 꿈을 꾸면 ‘우리 꿈에서도 만났네’라며 기뻐했다.
근처의 대형 쇼핑몰에서 쇼핑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햇볕이 쨍쨍한 한낮의 놀이공원 데이트를 하면서 더운 줄도 모르고 붙어다니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슬레타와 미오리네가 제일 좋아하는 데이트는 카페 데이트였다. 미오리네가 자주 갔던 아파트 앞의 카페였다.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두고,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서로 한쪽씩 나눠 낀 무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미오리네가 보았던 연쇄살인마 다큐멘터리 시리즈도 보기도 했다. 서로 키득거리면서 얼굴만 봐도 즐거웠다.
그런데 그날은 무선 이어폰을 까먹은 날이라서,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아이스 커피 두 잔을 시켜놓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카페에서 나오는 라디오를 들을까요? 미오리네는 바로 앞에 집이 있었지만 그날따라 손 하나 까닥하기 싫은 날이었고, 슬레타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가 퍽 마음에 들어서 가만히 앉아만 있기로 헸다.
딴, 따라란, 따라라란….
슬레타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알고 있는지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며칠 전에 슬레타와 함께 다운 받았던 휴대폰 게임을 건성으로 하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게임 캐릭터들이 반쯤은 죽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슬레타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좋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슬레타의 노랫소리가 끊겼다. 미오리네는 시선은 게임이 켜진 휴대폰 화면에 던져둔 채로, 슬레타를 불렀다. 왜 노래 부르다 말아, 슬레타? 슬레타는 잠시만요, 라고 미오리네에게 말한 뒤에 일어섰다. 미오리네는 게임 캐릭터가 다 죽기 일보 직전에서야 부활 아이템을 써야만 했다. 이 타이밍이 중요한데, 라는 생각에 미오리네는 일어난 슬레타를 잡지 않았다.
게임의 한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무렵에야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제법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레타? 미오리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슬레타는 카페의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야, 저 친화력. 지금 나랑 데이트 중에 누굴 꼬시는 거야? 미오리네는 자리에 휴대폰을 내려두고서 슬레타 쪽으로 걸어갔다. 슬레타는 주인장과 이야기를 하다가 휴대폰을 이내 만지작거리더니 ‘우와, 연결됐어요!’라고 말하며 기뻐했다.
“낡아서 안 될 줄 알았는데 되는구만.”
“후후, 정말 괜찮을까요?”
“물론, 손님도 없는데 마음껏 써.”
주인장은 그대로 무심하게 주방 쪽으로 돌아섰고, 홀로 남은 슬레타가 미오리네 쪽을 눈치 챈 것은 그 뒤였다. 심통이 난 표정의 미오리네가 다가오는 것에 슬레타는 속도 모르고 환하게 웃으면서 ‘미오리네 씨!’하고 불렀다.
미오리네는 그런 환한 미소에도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 미오리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한 손을 잡고서 천천히 미오리네 쪽으로 다가왔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와 마주 보는 손을 잡고서 카페의 홀 중앙까지 영문도 모른 채로 이끌려 걸었다.
순간 천장 어딘가에 매달려서 치직거리는 스피커 소음이 잠깐 울렸다. 그리고 얼마 안가 희미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오리네는 귀에 익은 리듬과 멜로디에 놀랐다. 방금 전까지 슬레타가 흥얼거리던 음악이었다. 라디오 보다는 더 깨끗한 음질이었지만, 연결된 스피커의 고질적인 낡은 음질은 어쩔 수 없었다. 슬레타도 그걸 알았는지 어색한 듯 뻣뻣하게 웃고 있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 손을 잡고서 사람이 없는 홀 중앙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는 게… 뭘 하고 싶은 거야, 슬레타? 미오리네가 시선으로 물으면, 슬레타는 대답하는 대신에 맞잡은 미오리네의 손끝을 살짝 꺾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중한 자세로 깊숙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 미오리네에게 댄스를 청하는 자세였다. 미오리네는 이 귀에 익은 노래가 어느 파티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석적인 사교댄스 음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제서야 미오리네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이 카페는 슬레타와 미오리네만의 프롬이었다.
다정하고 정중한 에스코트를 해준 슬레타. 그리고 그녀가 청한 댄스에 응하겠다고 고개를 숙인 미오리네는 천천히 손끝을 모으고 서로의 손바닥끼리 닿도록 손을 잡았다. 스텝을 맞춰서 천천히 음악에 맞춰서 걷기 시작하면 슬레타도 보폭을 맞추어 따라왔다. 여자들끼리만 추는 이 춤은 놀이를 하듯 과감하게 턴을 하거나 화려한 스텝을 밟으면서 흥을 돋우었다.
가끔 두 사람은 같은 발이 나가거나, 엇갈린 손을 잡으려고 할 때가 있었다. 한 번도 맞춰보지 않은 호흡 치고는 제법 적은 실수였음에도, 그 실수가 어리숙하고 어딘가 귀여워서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소리내어 웃었다.
음악은 꽤 길었지만 아쉽게도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엉성한 마무리 자세로, 서로에게 벅찬 감동을 전하려고 입을 막 열려고 할 때였다. 슬레타의 자동 플레이 리스트에 들어간 최신 음악이 엉뚱하게 여운의 맥을 끊어놓았다. 우당탕 들리는 힙합 음악 소리에 주인장이 ‘이건 아닌 거 같은데….’라면서 슬레타를 찾았다. 슬레타가 허둥지둥 음악을 끄기 위해서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고, 홀에 혼자 남은 미오리네만이 숨을 헐떡대고 있었다.
거짓말 같았다.
프롬에서 못 추었던 슬레타와의 춤을 추다니. 미오리네는 그 감동에 젖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또 혼자서 훌쩍거리고 있는 건 창피해져서 겨우 눈물을 참으려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을 들고 돌아온 슬레타가 홀에 멍하니 서있던 미오리네의 옆에 다가왔다.
“어땠어요, 미오리네 씨?”
“…어땠을 거 같아?”
“전 너무 좋았는데요.”
“나도 좋았어.”
“그냥 좋기만 했어요?”
슬레타가 더 표현해보라고 부추기는 것에 미오리네는 바보, 라고 중얼거렸다. 그 바보라는 말에 많은 뜻이 담겨져있다는 것을, 슬레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다 알고 있는 주제에, 슬레타는 미오리네를 빤히 쳐다보면서 시선을 깊게 맞추었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시선 속에 서로를 가두고, 전하지 못하는 말들을 눈빛으로 주고 받으면, 먼저 피하는 것은 언제나 미오리네였다.
“그만 쳐다 봐, 슬레타.”
“…그, 그럴까요?”
너무 둘만의 세계가 아니었는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밍밍하게 다 녹은 아이스 커피를 절반씩이나 남겨두고서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주인장이 멀리서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더 견디기 어려워서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아파트까지 전력질주를 했다.
엘리베이터까지 다다르는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때마침 1층에 내려와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서로에게 키스를 했다. 슬레타에게 키스하고 싶어, 미오리네 씨에게 키스하고 싶어. 그런 마음들이 입술 끝에서 끝으로 흘러넘치면서 서로에게 넘어갔다.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침실에서 몸을 맞댔다. 암막 커텐도 치지 않고, 환한 햇빛이 들어치는 침대 위에서 서로를 계속해서 탐했다. 각자의 시선 아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도록 견고한 우리를 만들어서 길들이고, 길들여지고. 그런 과정 속에서 서로 그렇게 원했던 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누가 먼저 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키스를 하면서 서로의 눈물이 묻어나는 것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울음으로 흐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서로가 너무 좋아서, 마냥 좋아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슬레타와 미오리네라는 것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북받쳐 올랐다. 이런 마음이 엇갈린 채로 지나갔던 시간들이 안타깝기도 하면서, 그 애절했던 순간들이 지금 다시 빛나는 현재가 된 것에 대해서 감격에 겨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오리네였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계속 샘솟아 나는 이 사랑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 못 버틸 것 같았다. 미오리네는 신음과 교성으로 쉬어버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슬레타에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 슬레타.”
“네, 미오리네 씨.”
“나 말이야, 너랑 정말 춤추고 싶었어.”
“……알아요.”
“그래서 지금이 너무 믿기지 않아.”
미오리네는 알몸이 된 슬레타를 끌어안으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믿기지 않아. 내 마음을 알겠어, 슬레타? 아니, 넌 모를 거야. 미오리네의 말들을 들으면서 슬레타는 저도 알 거 같아요, 같은 진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미오리네가 그 감동에 깊게 젖어들도록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팔에 힘을 단단히 주고 끌어안을 뿐이었다.
이렇게 견딜 수 없는 가슴 벅찬 사랑을 너와 하고 있다니.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말없이 그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너무 투박하고, 순진하고, 금방이라도 쉽게 더럽혀질 것 같은 말이었는데, 두 사람이서 그 말을 속삭이고 나면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이 사랑을 영원히 맹세할 각오를 세우고서,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마주보고 웃었다.
너와 만났다 헤어졌다, 헤어졌다 만났다.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난 다시 한 번 너와 함께 사랑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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