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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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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

수성의 마녀 / DOZI 2026.04.01 03:17 read.11 /

슬레타 머큐리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은 고등학교 3학년의 겨울이었고, 슬레타의 대학 합격 소식이 들리기 전이었다고, 미오리네 렘블랑은 말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슬레타는 조금 말을 더듬긴 하더라도 자기 의견을 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누군가 슬레타의 귓가에 거짓말의 유혹을 던지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정의를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슬레타는 달라졌다. 말을 더듬을 때면 베시시 나오는 웃음도 짓지 않았고, 의견을 말할 때면 입부터 다물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녀의 거짓말은 놀라만치 허점 투성이라, 누구도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는데, 슬레타 자신만은 그것이 진실인 것마냥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슬레타의 거짓말은 진실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슬레타는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미오리네는 생각했다.

 

“어, 엄마가… 이제 혼자서도 살아보는 게, 좋을 거래요.”

 

슬레타의 거짓말이 일상처럼 시작되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와중에, 제일 거짓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엄마를 떠올렸다. 다정하게 웃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웃는 그 여자, 프로스페라 머큐리가 슬레타를 혼자 내버려둔다는 게 가능한가? 미오리네가 알고 있는 정보는 적지만, 프로스페라 머큐리에게는 슬레타는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키Key였다. 그녀는 미오리네 렘블랑이라는 확실한 신원을 가진 딸의 친구를 못마땅해했던 여자다.

그런 중요한 슬레타를 이렇게 쉽게… 멀리 가게 내버려 둔다고?

 

“그게 말이 돼? 너네 어머니,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

“너 요새 이상해. 말도 자주 안 하고, 바보 같이 웃지도 않고. 너 답지 않아.”

“…미오리네 씨.”

 

슬레타는 자주 입는 옷을 몇 벌 챙겨서 보스턴 백 한 개에 몰아넣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는 것은 미오리네였다. 덤덤하게 짐을 싸는 슬레타의 뒷모습에 뭐라고 악다구니를 더 질러줄 생각에 미오리네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버려진 거예요, 저.”

“뭐?”

“버려진 거니까, 더러워요. 미오리네 씨는, 깨, 깨끗하니까… 이제 같이 놀면, 좋지 않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어?”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냐고, 그런 진부한 말이 차올랐다. 하지만 울지도 않고, 고요한 슬레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가 느끼고 있는 우울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졌다.

슬레타는 그날로 미오리네의 옆집을 떠났다. 

그녀가 대학교 근처 고급 맨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오리네와 같은 대학을 썼고, 그리고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미오리네는 마음만 먹으면 슬레타를 찾아가거나, 혹은 우연인 척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오리네는 슬레타를 만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된 슬레타의 애인은 자주 바뀌는 듯 했다.

처음엔 남자였다가, 두 번째는 여자였다가, 세 번째는 남자, 다음은 여자, 여자, 여자, 남자, 남자, 여자, 남자… 아무튼 난잡하게 얽힌 관계인 듯 했다.

하지만 모두 슬레타가 차였다는 결말이었다. 누군가는 슬레타가 애인을 못 알아보고서 뒹굴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미오리네는 그것이 근거도 없는 거짓말임을 단숨에 파악했다. 하지만 그 다른 누군가는 그 이야기에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슬레타 머큐리는 쉬워, 진짜로. 

걘 자기한테 좋다고 해주면 다 해준다니까?

돈도 있지, 몸매도 되지, 얼굴도 귀엽고. 끝내줘!

 

슬레타가 쉽다고 말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미오리네는 토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런 거짓말에 자신이 흔들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슬레타는 정말 쉬운 여자처럼 굴고 있었기 때문에 타 학과에 다니는 자신에게까지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차여도 싸, 슬레타 머큐리. 천만 번은 더 차여라!

 

미오리네가 속으로 욕지기를 퍼붓고 있을 때, 미오리네의 앞에는 짧은 스커트 차림의 여자가 나타났다. 아, 이 익숙한 느낌, 익숙한 분위기, 설마… 하며 올려다보면, 정말 설마 싶었던 인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 미오리네 씨?!”

 

둥근 눈매에 짙은 눈 화장, 예쁘게 칠한 립까지 완벽하게 조명으로 빛이 나는 그 여자는 오랜만의 상봉에서 아름답게 성장하면 성장했지, 역겨워보일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미오리네는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을 수가 없어서, 슬레타의 힐 위로 토사물을 뱉어냈다.

그 다음의 기억은 흐릿했다. 미오리네를 알아본 슬레타가 그녀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바로 자신의 일행들과 헤어졌다. 토하는 미오리네를 본 미오리네의 일행들은 그녀와 같이 가기를 꺼려한 듯 싶었다. 차라리 슬레타에게 맡겨서 좋을 거라고, 그런 말까지 했던 것 같았다.

슬레타는 미오리네를 편의점 앞에 앉혀두고서 잽싸게 물과 숙취 해소제를 사오고, 그것을 다 먹이고 나서 속이 괜찮냐고 열 번도 넘게 물었다. 미오리네는 대답 대신에 쓰러져서 잤고……

 

미오리네는 지난 밤을 떠올리며, 옆에서 신나게 퍼질러 자고 있는 슬레타 머큐리를 바라보았다.

슬레타는 자고 있어서 그런가, 망가진 사람 같아보이진 않았다. 누가 이 천진난만 너구리를 희대의 팜므파탈이라고 말했을까. 그냥… 자기들 멋대로 이용하기 좋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겠지. 미오리네는 슬레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밖으로 나오니 그제서야 바뀐 자신의 옷이며, 누가 봐도 슬레타의 옷을 주워입은 자신의 꼬락서니에 미오리네는 크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내, 내, 내 몸에 슬레타가 손을…!

 

“미, 오리네 씨… 토했잖아요. 그, 그래서, 그거 입히고, 침대에서 재울 순 없어서.”

“바닥에서 얼어죽게 내버려두지!”

“어, 어떻게 그, 그래, 요!”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얼어죽든 말든!”

 

미오리네는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실수했다는 자각이 바로 들었다.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먼저 절교한 건 그쪽이잖아. ‘이제 같이 놀면, 좋지 않아요.’ 라고.

미오리네의 말에 돋친 가시가 그 뜻임을 알고 있는지, 슬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수긍하는 듯 했다. 미오리네는 또 순순히 제 뜻을 따르는 슬레타의 모습에 속이 터질 거 같았다. 하지만 한 마디도 튀어나오지 않는 이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미, 미오리네 씨를… 화나게 했군요, 저.”

“그래. 네가 뭔데 내 죽느냐 사느냐 문제에 끼어드는지 모르겠다. 빨리 내 옷이나 내놔. 돌아가게.”

“아, 아직… 세탁기에서 건조 중이에요. 금, 금방 꺼내올 테니까. 그, 전까지… 차라도, 한 잔.”

“차?”

“아, 아, 아, 아, 아이스티로! 아이스티로 할게요! 시원하게, 금방 마시고 갈 수 있게!”

“…….”

 

멍청하게 말을 더듬으면서, 차라도 한 잔 하지 않겠냐는 개수작은 착실하게 부리고 있는 슬레타의 모습에, 미오리네는 어딘가 맥이 빠질 거 같았다. 

 

“그래, 차라도 내와.”

 

그 말에 웃어 보이는 슬레타는 어딘가 어색해보였다. 그렇게 웃으라고 학습된 안드로이드나 다름 없는 표정이었다. 예전의 너는, 좀 더, 뭔가, 꽃이 피듯이 웃었는데. 미오리네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가도, 겨우 뚜껑을 닫은 마음에 무슨 짓을 하는건가 싶어 말을 삼켰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에게 아이스티를 내밀었다. 복숭아 과육까지 착실하게 동동 띄운 것은 꽤나 감동적이었다. 정작 본인의 앞에는 아무것도 내밀지 않고서, 슬레타는 미오리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미, 오리네 씨는… 제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 기, 기억, 하시나요…?”

“무슨 말?”

“……그, 말해도… 모르겠지만….”

 

이제, 같이 놀면, 

좋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그때는, 내가, 내가 너무, 모자라고, 못나보이고, 더럽고… 그, 그래서.”

“…….”

“지금도, 나는, 모자라고, 못났… 고, 더럽…고, 그렇지만…….”

 

미오리네는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와 슬레타의 숨소리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천천히, 한 호흡씩 어떠한 여유의 격차도 두지 않고서 꽉 맞물리는 이 소리의 하모니는, 슬레타의 집에서 난다고 하기에는 너무 끔찍했다.

 

“그래도… 이, 이렇게 미오리네 씨랑, 차 한 잔, 정도는… 하고 싶, 다고, 욕심이, 나서요.”

“그러니까, 네 맘대로 절교해놓고, 이제 와서 다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고 싶은 거야?”

“……아, 안 되겠죠.”

“…….”

“와,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미, 오리네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슬레타는 정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대로 세탁된 미오리네의 옷을 들고 나타났고, 미오리네가 옷을 갈아입고 나면, 예쁘게 닦아놓은 구두도 내밀었다. 슬레타의 그러한 시중에 미오리네는 당연하게 굴었다.

이제 슬레타의 집에서 나가기만 하면 되는 때에, 미오리네는 뒤를 돌아 말했다.

 

“나 말이야, 다음에는 레모네이드가 좋아. 그래도 설탕 대신 꿀을 넣어서.”

 

미오리네는 쾅, 하고 보란 듯이 문을 닫았다. 미오리네의 말을 들은 슬레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재미없는 안드로이드 같은 얼굴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랐다.

레모네이드 약속은 언제인지 정하진 않았다. 다만 미오리네는 다소 억지를 부려보기로 했다. 아무때나, 그 집에 문을 두드렸을 때, 슬레타가 받아준다면 그날은 레몬이에드 약속을 지키는 날이라고.

그 사이에 슬레타가 미오리네를 찾아올 수도 있었고, 미오리네가 슬레타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미오리네는 평소와 같이 대학을 다녔고, 슬레타는 평소와 같이 애인에게 차이는 날들이었다. 이번에는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상태로,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집으로 찾아갔다.

 

“꾸, 꿀을 많, 많이 샀어요. 종류별로. 어, 어떤 게 좋으세요?”

“적당한 거.”

“저, 적당한 거라면?”

“뭐, 대충 이거?”

“그, 그건 제일 싼 거예요!”

“그럼 제일 비싼 거 넣어주던가.”

“그, 그렇, 지만, 그건 호불호가 너무 심해서…!”

 

미오리네는 레모네이드에 넣을 꿀 하나 정하지 못하는 이 어리숙한 숙녀를 위해서 꿀만 다섯 스푼 넣은 레모네이드를 마시게 되었다. 얼음에 꿀이 엉겨서 제대로 휘저어지지도 못하는 것을 억지로 먹고 있자니 속이 시큰거렸다.

이번에도 미오리네에게만 마실 것을 내밀고, 제 앞에는 아무것도 놓지 않은 슬레타는 웃고만 있었다. 예의 그 얼굴이었다. 미오리네의 속을 벅벅 긁고, 괴롭게 만드는, 어떤 것에도 웃을 수 없다는 얼굴.

미오리네가 시선을 피하며 달기만 하고 건강에는 도움도 되지 않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을 때, 슬레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니었, 어요.”

“응?”

“절교하자는… 말이 아니라, 나는, 미오리네 씨가 정말 걱정 되어서.”

“…….”

“나는… 시, 실패, 했으니까. 그래서… 어, 엄마도… 나를.”

“…….”

“그, 때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못나서, 미오리네 씨도, 옆에 있으면… 분명, 혼났을 거예요. 그, 래서… 호, 혼자서, 해보려고 했는데.”

 

미오리네는 손에 들고 있던 레모네이드 잔을 툭 밀쳤다. 처음엔 미오리네를 바라보던 슬레타의 시선은 서서히 테이블 위의 바닥으로 떼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그러한 시선으로 엎질러진 걸쭉한 레모네이드를 알아차리는 것은 너무 늦은 일이었다.

 

“호, 혼자서도, 사랑 받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이제, 괘, 괜찮…! 아, 미오리네 씨, 자, 자, 잔이 엎질러졌…!”

“일부러 그런 거야.”

“……화, 화나게 했어요, 제가?”

“모르겠네.”

“미, 오리네 씨.”

“맛없었어, 최악의 레모네이드야.”

“…….”

 

미오리네의 말에 슬레타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뭐가 혼자서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거야, 뭐가 이제 괜찮다는 거야. 넌 하나도 안 괜찮고, 사랑도 못 받고 있고, 뒤에서 널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너는… 쉬운 여자가 됐어. 좋다고 하면 다 들어주는 그런 애가 되었다고.

 

내가 좋아하던 너는, 그런 여자가 되었다고.

미오리네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현관까지 단숨에 걸었다. 슬레타가 뒤늦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 다음엔, 뭐로….”

“다음엔 안 와.”

“왜, 왜요?! 제, 제가 뭔가 잘못 한 게 있다면….”

“없어.”

“그, 럼… 왜?”

 

미오리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슬레타에게는 언제나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무엇 하나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구두를 구겨신고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오리네 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도 뒤돌아보지 않고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마구 누르고 마구 달려나갔다. 한참을 달리고 나면 그 같잖은 레모네이드를 먹은 속이 괴롭다며 부대끼기 시작했다.

 

망가진 슬레타 머큐리를 실제로 보는 것은 꽤나 큰 역경과 고난인 것이다. 적어도 미오리네 렘블랑에게는 그랬다. 누군가에게는 흔해 빠지고 쉬운 여자를 만나는 일과 다름없겠지만, 미오리네에게는 그런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오리네가 그 레모네이드를 엎질렀던 그날 이후로, 미오리네는 하루 종일 슬레타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마치 그녀에게 처음 사랑에 빠졌던 날처럼.

이제 뚜껑을 덮어두었던 그 마음이 또 다시 차오르고, 흘러넘쳐서,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을 무렵에야… 미오리네는 자기 발밑을 적시고 있는 좋아한다는 마음에 울어버리고 말았다. 엎질러진 레모네이드 같은, 엉망진창의 맛으로… 더 이상 되담을 수 없는 것.

 

슬레타 머큐리, 너는 이런 나를 알고 있어? 영원히 모를 테지만.

 

슬레타가 눈부시게 빛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미오리네의 진창 같이 망가진 가슴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기억이다.

그때의 햇살을 떠올리면, 눈이 부시는 흰색. 슬레타의 하얀 셔츠가 흙탕물에 구겨져서 엉망진창이 되었음에도, 그때는 모든 것이 하얬다.

한 여름의 녹음 속에서, 미오리네는 아버지와 다투고 험악한 산길을 오르고 올랐다.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 씨—! 하고, 뒤에서 쫓아오던 슬레타가 걱정이 되어 제 이름을 드높여 부르는 소리가 귀찮을 정도로, 미오리네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오리네가 산길에서 미끄러지면서, 원피스 자락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구르고 굴렀다. 절벽 끄트머리에서 겨우 멈춘 미오리네를 보고서 슬레타는 겁도 없이 뛰어내려 미오리네를 끌어안았다. 

 

“괘, 괜찮아요?! 다친데는 없어요?!”

“이 바보야! 너까지 여기에 내려오면 누가 우릴 구하러 와!”

“아, 아… 아, 그러네요. 그, 그렇지만, 미오리네 씨가 다쳤을까봐!”

 

미오리네의 옆자리에 겨우 앉은 슬레타는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다친 게 아니니까 다행이에요.”

“…이제 어쩔 셈이야? 난 휴대폰도 안 들고 왔다구.”

“음… 어, 엄마가, 저녁 시간이 되면 찾으러 나오지 않을까요? 이, 이상하게도 저희 엄마는, 제가 있는 곳을 잘 찾거든요. 이, 이전에 했던 숨바꼭질에서도…!”

 

미오리네는 슬레타를 자기 멋대로 굴리는 프로스페라를 떠올렸다. 그래, 그런 이상한 아줌마라면 이 험악한 산중에서도 슬레타를 찾고도 남을 것이다. 아마 위치추적기라도 슬레타에게 붙여두고 있는 게 아닐까? 미오리네는 그 끔찍한 아버지도 자신에게 그런 짓은 안하지만, 프로스페라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다리를 삔 미오리네를 위해서, 슬레타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더 움직이면 위험해지니까요, 라고 드물게 침착하게 말하는 슬레타를 보면서 미오리네는 이번엔 답지않게 자신이 훌쩍거렸다.

우, 울어요, 미오리네 씨?! 슬레타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난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이 아니야….”

“그, 그럼요. 미오리네 씨는 인형이 아니에요. 이, 인형처럼 예쁘지만.”

“마지막 말은 필요 없어. 너한테 들어도 안 기뻐.”

“그, 그럼, 누구한테 들으면 기쁠 거 같아요? 저는… 미오리네 씨가 귀엽다, 예쁘다, 해주면 기쁜데.”

“……딱히 누구한테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지금은 그냥, 그런 말이 필요한 게 아니야.”

 

미오리네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몰랐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같은 진부한 말을 원하진 않았다. 더 나아질 거야, 같은 낙관적인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뭘 원하고 있는 걸까… 미오리네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슬레타가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왔다.

상처투성이로 거칠어진 슬레타의 손은, 미오리네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서 뭐라고 내빼기도 뭣했다. 미오리네는 뭐야, 라고 툴툴거리면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

 

“무, 무슨 말이 필요할진 모르겠지만… 아무말도 안 하고 있을 때보다는 이게 나을 거 같아서요.”

“우선 해놓고 본다?”

“도, 도망치면…하나.”

“전진하면 둘이니까?”

“그런… 거죠.”

 

슬레타는 저보다 한참은 작은 미오리네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무사히 집으로 갈 거고, 가서 조금 혼나겠지만… 또 내일 놀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는 무사태평하게 또 내일 놀자, 를 약속하고 있는 슬레타의 모습에 이젠 대놓고 웃어버렸다. 엉망이 된 원피스와 셔츠. 다 까진 손바닥과 무릎. 그러면서도 꼭 붙잡고 있는 두 손바닥의 온기.

그 말은 슬레타와 프로스페라가 줄곧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서 하나이고, 무엇으로부터 전진해서 둘인지, 그것을 알 수 없음에도 그 말은 미오리네의 마음에서 고요하게 빛이 났다. 미오리네와 슬레타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에야, 정말로 슬레타에게 붙여놓은 위치추적기 때문에 두 사람은 프로스페라에 의해 구조되었다.

사이 좋게 한 달간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 두 사람이 태평하게 ‘내일 놀자’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의 아쉬운 점이었지만.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서 하나, 무엇으로부터 전진해서 둘?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확실해졌다.

모두 슬레타로부터 도망쳐서, 슬레타로부터 전진해서.

슬레타를 좋아하고 난 뒤로부터는.

 

미오리네는 금요일 밤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면, 잠을 뒤척이다 결국 눈을 뜨기로 결심했다. 미오리네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붙잡고서, ‘슬레타 머큐리는 쉬워, 진짜로.’ 같은 말을 했던 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미안한 마음이 안들게, 그놈은 한창 술자리 중이었다.

 

“슬레타 머큐리의 전화번호, 알려줄래?”

‘뭐어? 미오리네, 너 그쪽이었어?’

 

그쪽이라면 모르겠다. 나는 슬레타 머큐리 밖에 좋아한 적이 없어서.

미오리네는 대답 대신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슬레타 머큐리의 전화번호를 손에 넣었다.

 

‘사실 그때 슬레타 머큐리가 널 데리고 간 걸 보고서 그쪽인 걸 눈치 챘지.’

“그러던가 말던가.”

 

미오리네는 전화를 거칠게 끊어버렸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그놈에게는 영구차단을 박을 생각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쉽다’ 같은 말을 하는 거야. 슬레타 머큐리는 쉬운 적 없어, 단 한 번도.

새로 받은 전화번호의 숫자를 누른다. 슬레타는 뭐하고 있을까, 자고 있을까, 아니면 시끄러운 사람들 한복판일까, 아니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여, 여보세요?’

“나야.”

‘미, 오리네 씨.’

“그래. 할 말이 있어.”

‘……전 없어요.’

“그래? 그럼 내가 하는 말이나 들어.”

‘지, 금요?’

“그래.”

 

전화기 너머의 슬레타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미오리네는 겁이 났다. 하지만 허세를 부리기로 했다. 

 

“너 지금 이 이야기 못 들으면, 평생 후회해.”

‘…할 후회도 없어요, 이제.’

“진짜?”

‘네.’

 

하지만 슬레타라는 사람은 이런 구석에서 단단했다. 미오리네의 허세에 쉽게 속아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이건 비겁하다. 미오리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떼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나는 슬레타가 멋대로 하는 절교도 받아들이고, 일 년 동안 숨어지내고…!

 

“넌 항상 이기적이야, 그런 식으로 도망치고!”

‘…아, 알아요. 이기적인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미오리네 씨는.’

“내가 언제 그랬어! 너 혼자, 너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아도.’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말란 말이야! 절교도 네 맘대로 해놓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며!”

‘그렇지만 미오리네 씨가 레모네이드를…!!’

“다시 맛있게 해놔! 지금 당장 갈 거니까!”

 

미오리네는 선물 받은 이후로, 거의 쓸 일이 없는 차를 끌고 새벽의 도로를 달렸다. 동도 터오지 않은 그 도로를 어떤 정신으로 달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주차를 할 때 실컷 긁어먹었지만 사람을 안 쳤으니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레타의 맨션 주차장에 대충 박아버렸다.

슬레타가 사는 층까지 금방 올라갔다. 없는 체력으로 잠도 안 자고 새벽에 운전까지 했으니 미오리네의 HP 게이지는 거의 제로0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건 정신력 싸움이다. 

문을 열어, 슬레타 머큐리. 열지 않으면 문을 발로 차줄 테다. 그러나 미오리네의 발소리가 꽤 크게 울렸는지, 슬레타는 발로 차주기도 전에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한숨과 함께. 하지만 미오리네는 그 맨션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너한테 선택지가 두 개 있어, 슬레타 머큐리.”

 

무슨 소리를, 이라고 얼굴에 써붙인 슬레타에게 미오리네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도망쳐서 마음의 평화, 이거 하나를 얻을 것인지—”

 

슬레타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진해서 나랑 너, 이 둘을 얻을 것인지, 네 선택이야.”

 

미오리네의 말에 슬레타는 머뭇거렸다. 바닥을 향한 시선이 쭈뼛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슬레타는 손을 잡고 싶어하는 듯 하면서도, 안된다고 망설이는 사람 같았다.

뭐를 망설여? 나와 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네 손을 잡을 텐데. 답답함에 미오리네가 손을 흔들면, 슬레타는 우물쭈물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 오리네 씨… 저는, 이제 예전 같지 않아요.”

“알아.”

“어, 엄마랑도, 이제… 이제, 쓸모가 없어져서.”

“알아.”

“그리고, 미, 오리네 씨랑… 마음이 다를 거예요.”

“뭐가 다른데?”

 

미오리네의 직설적인 질문에 슬레타는 얼굴을 붉혔다. 무슨 뺨을 붉혀, 네가 뭐하고 다니는지 이미 다 아는데. 미오리네는 그걸 다 알고 있는게 속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레타는 고개를 저으면서 미오리네를 앞에 두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

아, 문을 닫으시겠다고?!

 

“적당히 하고 내 손을 잡아!”

“그, 그, 그치만!”

“나는 널 좋아해, 슬레타, 이 바보야!”

“…그, 그래도!”

“네가 누구랑 뭘 했던 간에 이제 앞으로 나랑만 하면 되잖아!”

 

분노의 위력으로 슬레타의 문을 뜯어버릴 기세였던 미오리네는 헉헉거리면서 슬레타의 품에 기댔다. 겨우 돌아온 자신의 자리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슬레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뀨흑, 하고 슬레타가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미오리네는 더 때려주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미, 미오, 리네 씨. 진짜로… 저랑, 같은… 마음, 이신가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모르겠어? 진짜 바보야?”

“아, 아니에요, 알아요. 아는데… 뭐랄까….”

“뭐랄까, 뭐?”

 

슬레타는 고개를 저었다. 뭐랄까, 꿈만 같네요, 같은 말이 나올 뻔 했어요. 슬레타의 말에 미오리네는 쿡쿡 웃었다. 결국 그런 말 한거잖아, 너. 이번엔 슬레타의 뺨이 붉어졌다. 슬레타는 시선을 피하다가 떠오른 게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 레모네이드, 만들었어요. 드실래요…?”

“…꿀 몇 번 넣었어?”

“다, 다섯 번?”

“안 마셔.”

“그, 그치만 마신다고 하셨는데.”

“그 단 걸 어떻게 마셔? 너나 마셔.”

“…….”

“이번 한 번만 마셔주는 거니까.”

 

앞으로 너랑 많은 걸 할 거야. 고장난 너라도 있는 힘껏 사랑할 거야.

미오리네는 달기만 한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레몬맛 첫키스를 앞두고서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