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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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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데이

master 2019.05.10 22:14 read.346 /

현대 패러렐

쿠루루기 스자쿠 X 를르슈 람페르지

 

 

 

 

 

 

 작년의 크리스마스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한 분위기로 가족들끼리 모인다거나, 동창들끼리 모여서 모임을 가지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는 를르슈와 단 둘이서만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남자 둘이서 어디를 가겠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여자친구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밤새도록 한다고 떠난 나나리로 외로워진 를르슈를 위로하기 위해 그의 집에 가는 경우도 있고, 아무도 없는 나의 집에 를르슈가 오는 경우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나나리는 이제 우리와 노는 것보다 여자친구들이랑 노는 게 즐거워진 것이다. 

 언젠가 한 번 쯤은 를르슈가 너무 외로워하는 거 같다고 넌지시 말해본 적이 있었지만, 나나리는 입가를 가리며 웃기만 했다. ‘저에게 그런 멋진 오라버니와 오라버니의 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 피곤해지는 건 제가 아니라 오라버니와 스자쿠 씨일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몫까지 열심히 를르슈를 위로해주라고 했다. 

 말이야 쉽지, 위로라는 것. 하지만 스자쿠에게 있어 를르슈를 위로해주고 싶은 방식은, 를르슈가 나에게 위로 받고 싶은 방식과 다를 것이다.

 

 친구로써의 위로는 어떻게 하는 거였지?

 

 다시 작년의 크리스마스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하자면. 스자쿠는 아버지가 아끼는 와인을 슬쩍해서 를르슈네 집에 왔다. 성실하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며놓은 거실에서, 를르슈가 정성들여 만들어놓은 나나리 취향의 케이크. 하지만 접시와 포크는 단 두 쌍이었다. 텔레비전을 켜놓고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나나리는 친구들이랑 노느라 바빠서 연락이 안 될거야…. 별일 없을 거고.”

 “알고 있어. 재미있게 놀고 오라고 카드도 줬으니까.”

 “…….”

 “사용 내역이 계속 휴대폰으로 오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

 

 스자쿠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고작 이런 것 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스자쿠는 를르슈를 친구로써 보는 걸 아주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연애 대상으로 변질된 스자쿠의 감정에 대해서 스자쿠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무언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생일 같은 날 말고는 준비하지도 않을 정도이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의 행사 수준으로 보내기 위해서 노력한다.

 

 “스자쿠는 다른 모임 같은 데 없어? 여자친구라던가….”

 “나? 글쎄. 잘 모르는 모임에 가서 괜히 분위기 띄우는 재주도 없고. 여자친구는 뭐, 연애는 당분간 쉬는 걸로.”

 

 사실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소꿉친구였던 를르슈에게 일편단심으로, 여자친구가 있던 경력은 화려하지만 대부분 섹스 위주의 관계였다. 감정이 오가는 연애를 하다가는 서로에게 못할 짓을 하는 느낌이라 섹스로 진도를 다 빼놓고 그 다음에 쓰레기 소리를 들어가며 헤어졌다. 그때마다 를르슈는 ‘너는 이렇게 상냥한데 왜 그러지?’라는 말을 해주며…친구로써 있는 힘껏 위로해줬다. 십중팔구는 차이는 게 스자쿠의 역할이었으니, 스자쿠가 연애를 쉬는 건 아마 타당한 사유일 것이다. 

 

 “내년부터는 학생회 모임 다시 해보자고 할까?”

 “이 나이 먹고 세일러복 입는 벌칙은 싫어….”

 

 아마 마지막에 했던 학생회 송년회 때 여자아이돌 댄스를 강요 받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스자쿠도 고개가 저어졌다. 예쁘게 잘라놓은 케이크 조각을 짓이기며 를르슈는 와인을 마셨다. 텔레비전 속의 연인들은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이 흩날리는 사이로 일루미네이션 밑을 지나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깔고 앉은 러그의 부드러움을 만지작거리면서 스자쿠는 건너편에 앉은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얼굴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보지 않아도 나나리의 일이라는 걸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슬슬 그만둘까.”

 “뭘?”

 “짝사랑.”

 “짜, 짝사랑?!”

 “나나리한테도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이야기 들었고…. 나도 이제 한계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폭탄에 스자쿠는 눈을 굴렸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 조각을 한입 베어 물고는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계속 붙잡아 놓을 수도 없고, 다들 눈치껏 피해주고 있는 걸 알고는 있지만 본인만 모르고 있다면 이건 모두에게도 민폐고….”

 “아, 다, 다들 를르슈의 짝사랑을 응원하나봐?”

 “다들? 다들이라는 말에 너는 동의해?”

 “음….”

 

 를르슈의 짝사랑이라니 솔직히 응원할 수 없다. 를르슈가 짝사랑을? 그것도 놀랍다. 짝사랑하는 를르슈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스자쿠는 대체 짝사랑을 건성으로 한 걸까.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를르슈가 티를 냈는데 스자쿠가 적당히 넘긴 걸 수도.

 솔직하게 말하자. 스자쿠는 를르슈의 짝사랑 같은 걸 응원할 수 없으니까. 

 

 “그러네…. 동의할 수는 없네. 를르슈를 짝사랑하게 만드는 사람은 좋겠지만, 를르슈가 마음 아픈 일을 하는 건 별로야.”

 “별로 마음이 아프진 않았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진작에 납득하고 있었으니까.”

 “…짜, 짝사랑이 즐거워?”

 “제한된 조건 안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얻는다면 나쁘지 않은 사랑이지…. 그쪽에게 기대할 것도 없고, 그쪽도 나한테 기대할 것도 없으니 손해도 이익도 발생하지 않으니까.”

 

 를르슈다운 연애관이다. 그래도 그것도 귀엽다고 느끼는 스자쿠는 뭘까. 스자쿠는 스자쿠 몫의 케이크를 먹으면서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대답을 고르고 있었다. 

 

 “정말로 응원 안 해?”

 “…내가 아는 사람이야?”

 “글쎄.”

 “그 사람은 내가 너랑 크리스마스 단 둘이 보내는 거 알아?”

 “응.”

 “뭐라고 그래?”

 “딱히 말해본 적은 없는데…. 스자쿠는 어때?”

 “를르슈와 크리스마스 보내는 거? 나는 좋아.”

 “좋다고 그러는데?”

 “…그런 사람 왜 좋아해? 너한테 별로 관심 없는 거 같아.”

 

 를르슈는 케이크의 딸기를 푹 찌르며 키득거렸다. 아무래도 내년까지 더 고민해봐야겠어. 짝사랑? 응. 를르슈는 와인잔을 둥글게 흔들며 웃었다. 스자쿠, 내가 짝사랑하는 게 마음에 안들어?

 인형 같이 생겨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는 그런 무자비한 성격으로 짝사랑을 하는 나의 짝사랑 상대. 테이블에 몸을 기대는 를르슈는 곧 이어 시작한다는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에 시선을 돌렸다. 나나리가 어렸을 때 셋이서 보러 간 적 있는 가족 코메디 영화였다.

 간간히 를르슈가 웃었지만, 스자쿠는 웃지 못한 채로 화면과 를르슈를 번갈아 보았다. 짝사랑을 하고 있는 를르슈는 이상하게도 예전과 별다른 점을 못 느꼈다. 

 

 스자쿠는 제일 먼저 나나리를 불렀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매번 브리타니아로 가서 여행을 하는 나나리를 알고 있어서 그녀와의 일정을 잡는 것이 촉박했다. 나나리에게 주말에 시간이 있냐고 묻자 나나리는 꺄르르 웃었다. 

 

 ‘오라버니가 아니라 저랑요?’

 “어차피 를르슈에 대한 일이라서.”

 ‘크리스마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비슷해.”

 ‘오라버니의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겠죠?’

 

 시내에 있는 카페에서 나나리와 만나기로 했다. 코트를 입고 있는 나나리는 스자쿠를 알아보고는 바로 손을 흔들어 스자쿠가 있는 테이블까지 왔다. 

 

 “짐 챙기느라 바쁠텐데 불러서 미안.”

 “아니에요. 스자쿠 씨도 바쁘실 텐데요.”

 “를르슈는?”

 “오라버니는 슈나이젤 오라버니랑 말씨름 하느라 바쁘시죠. 슈나이젤 오라버니가 이번에 같이 오라고 비행기 표를 두 개나 보내셨거든요.”

 “를르슈도 그럼 같이 가는 거야?”

 “글쎄요, 오라버니는 안 가고 싶어하시는 거 같아서.”

 

 하지만 나나리가 가자고 하면 를르슈는 기꺼이 따라가겠지. 를르슈의 일은 인터넷만 되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스자쿠처럼 출퇴근이 딱히 필요한 일도 아니다. 스자쿠는 괜히 의기소침해진 마음으로 눈앞의 커피를 홀짝였다. 

 

 “아마 안 가실 거예요.”

 “…짝사랑 때문에?”

 “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는 건 금방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보통은 그렇지?”

 “스자쿠 씨도 그런가요?”

 

 를르슈가 브리타니아로 가서 짝사랑 상대와 헤어진다면 좋겠지만…. 이건 반대로 스자쿠가 를르슈에게서 떠나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건 싫다. 를르슈에 대한 마음은 접을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고백할 마음 같은 건 또 들지도 않지만. 그냥 혼자서 만족하는 것도 스자쿠는 나쁘지 않았다. 

 

 “모르겠네…. 나는 사랑에 거리가 그렇게 중요한 지는 잘 모르겠어. 를르슈는 그렇게 생각하나봐?”

 “줄곧 같이 있던 사람이라 가늠을 잘 못하시는 거 같아요. 제가 가자고도 해봤지만, 오라버니는 싫어하시는 거 같고.”

 “같이 있던 사람?”

 “네.”

 “나나리도 알고, 를르슈의 계속 같이 있던 사람이 짝사랑 상대? 왜 나는 몰랐지?”

 

 나나리는 제 몫의 아이스티를 마시며 웃기만 했다. 

 

 “오라버니는 자존심이 강하시니까, 스자쿠 씨한테는 들키고 싶지 않으신 게 아닐까…. 제 추측이에요.”

 “이럴 때 의지하는 게 친구 아니야?”

 “제가 봤을 때 오라버니는 그 분을 정말 좋아하는 거 같아요. 저도 겨우 알아차릴 정도였으니까요.”

 “……나는 의지가 안 되나.”

 “의지가 안 된다면 크리스마스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셨을 리가 없죠?”

 

 그 이후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를르슈는 꽤나 길게 짝사랑을 해왔고, 그걸 나나리에게 들킨 것도 최근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 최근도 연 단위의 최근이었기에 나나리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를르슈가 나나리를 아끼는 만큼, 나나리 역시 를르슈를 아끼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곧 를르슈에게 연락이 와서 나나리는 가보는 수 밖에 없었다.

 를르슈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하려고 하는 날에 를르슈는 거절을 했다. 일이라도 생겼어?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를르슈의 일이란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생기는 일이기에 일 때문이라는 무난한 변명을 기대했지만 를르슈는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당분간 브리타니아에 가게 됐어.’

 “응?!”

 ‘어차피 일하는 데에는 지장은 없지만…. 가족끼리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아, 나나리랑 같이 가는 거야?”

 ‘응. 스자쿠, 브리타니아에서 필요한 거라도 있어? 기념품이라도 사갈까?’

 

 돌아오긴 돌아오는구나. 스자쿠는 내심 안도했다. 

 

 “글쎄, 유로 브리타니아 쪽으로 가게 되면 술?”

 ‘비싼 거만 찾네. 알겠어. 적당히 추천 받아서 가지.’

 “…네가 짝사랑하는 사람도, 를르슈가 브리타니아에 가는 거 알아?”

 ‘응.’

 “…그 사람한테도 뭔가 사줄거야?”

 ‘응. 그러기로 했거든.’

 “뭔데?”

 ‘술.’

 

 취향이 나랑 비슷하군. 스자쿠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언제 올거야?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가 전화 너머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없으면 보고 싶을 거 같아?’

 “당연하지. 를르슈가 해주는 저녁이 맨날 맨날 그리울 거라고.”

 ‘…저녁만?’ 

 “당연히 를르슈도 나나리도 그립지.”

 ‘말은 듣기 좋게 잘한다니까. 알겠어. 못해도 2월에는 돌아갈거야.’

 “2월?! 그렇게 길게 있어?!” 

 ‘브리타니아는 넓잖아. 모처럼 가는 고향인데 구석구석 둘러보고 오게.’

 “전화 자주 해줘. 엽서도 보내주고. 편지도 써줘.”

 ‘요구사항이 많은 자식이군. 휴대폰 확인이나 잘해.’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나나리를 배웅하러 공항에 가고 싶었으나, 그때는 일하는 시간이라 그저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게 고작이었다. 잘 다녀와. 스자쿠의 풀이 죽은 목소리에 를르슈는 묘하게 텐션이 높았다. 일본을 떠나는 게 사실 좀 무서운데, 네 전화를 받으니 기운이 난다. 뭐야, 고소 공포증이라도 생겼어? 

 

 “짝사랑 상대가 배웅이라도 나왔어?”

 ‘응? 걔가 왜?’

 “기분이 좋아보여서.”

 ‘방금 전에 너랑 전화해서 기운 난다는 말은 뭐로 들었어?’

 “기분 좋아서 해주는 립 서비스인 줄 알았지….”

 ‘짝사랑 상대, 일이 바쁜 것 같아서 못 오는 거 같아. 오늘은 평일이니까 일 안하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도착하면 전화 줄 거지?”

 ‘시차 때문에 힘들걸.’

 “기다릴게.”

 ‘내가 떠나는 게 불안해?’

 

 스자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안 돌아올 거 같단 말이야. 징징대기 시작하는 스자쿠의 목소리에 를르슈는 이제 가야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스자쿠도, 를르슈도 짝사랑을 하는 주제에 늘 초조한 것은 스자쿠인 것 같았다. 

 나는 를르슈 만큼 어른이 아니라서 그런걸까. 내가 를르슈에게 기대하는 게 있어서 그런 걸까? 사실 크게 기대하는 것도 없다. 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연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현상 유지만을 지키고 싶은 게 진심이었는데. 를르슈가 짝사랑을 한다는 말을 한 이후부터 뭔가가 고장난 것 같았다. 를르슈에게도 그런 마음을 품을 상대가 있었다는 것과,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 좀 불안해졌다. 스자쿠는 일을 건성으로 하는 와중에도 를르슈 생각을 꼭 잊지 않았다. 

 그 다음날 새벽에 를르슈로부터 전화가 왔다. 캔맥주를 마시며 새벽의 성인영화를 보고 있던 스자쿠는 음소거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잘 도착했어?”

 ‘응, 비행기가 너무 흔들려서 속이 메슥거려.’

 “약 먹었어?”

 ‘쉬어서 괜찮아. 너는 안 자고 뭐해?’

 “를르슈 전화 기다렸어.”

 ‘……내일도 회사가야지.’

 “괜찮아. 어차피 낙하산이라 일을 못해도 욕먹고 잘해도 욕먹어.”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니까 문제야. 이제 호텔 체크인하고 시차적응 할 때까지 연락이 안 될거야.’

 “그렇구나….”

 ‘너는 어땠어?’

 “를르슈가 없으니까 외롭고 쓸쓸하고 컵라면은 맛이 없네.”

 ‘내가 있든 없든 컵라면은 맛이 없지. 돈이 들어도 식당 가서 챙겨 먹던가 해라. 본가에 가도 되잖아?’

 “를르슈가 빨리 돌아오면 되잖아.”

 ‘안 돼. 유로 브리타니아에 가야 돼.’

 “왜?”

 ‘…이 바보 멍청이. 거기에서 살 게 있으니까 가야 되는 거야. 이제 끊는다.’

 

 그 다음에 만난 것은, 만인의 첫사랑—유페미아였다. 

 만인의 첫사랑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우선 를르슈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스자쿠는 유페미아를 만나기로 한 이유가 그것이기도 했다. 예전에 셋이서 모여서 만났을 때에도 를르슈가 유페미아는 자기 첫사랑이라고 소개했다. 유페미아는 웃으면서 를르슈의 신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며 소녀처럼 웃기도 했었다. 그 자리가 유페미아와 스자쿠의 소개팅 자리였다는 거만 빼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결말을 말하자면, 스자쿠와 유페미아는 잘 되지 못했다. 둘이 서로를 소개받은 이유도 를르슈의 스자쿠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봤을 땐 집안일 못하는 점 빼고는 남자로써 빠지는 구석도 없고 성격도 모나지 않고 좋아. 너무 둥글고 그런 게 아니라 자기 강점이 뚜렷한 남자고. 유페미아는 제 앞에서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남자의 칭찬을 늘어놓는 이복 오빠의 말에 웃었다. 알겠어요, 를르슈가 그렇게 말하니 한 번 만나볼게요.

 그리고 한 번 만나보고서 스자쿠는 유페미아가 자기에게 얼마나 과분한 여자인지 알게 되었다. 천하의 를르슈가 첫사랑으로 삼은 여자였다. 이 여자 저 여자가 다 뒹굴고 다니는 스자쿠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리고 유페미아는 셋이서 모인 자리에서 모든걸 파악했다. 스자쿠는 저에게 사심 하나 없는 친구 동생과 노는 자리에 온 것이라고.

 

 “며칠 전에 를르슈의 출국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설마 했는데, 오늘의 스자쿠를 보니 정말이네요.”

 “왜? 뭐가?”

 “얼굴이 상했어요, 스자쿠. 를르슈가 없다고 이렇게 티를 내고 다니면 안 되죠.”

 “…티를 내도 알아봐줄 사람은 유피 밖에 없고.”

 “스자쿠는 아직도 인가요?”

 “뭘?”

 “를르슈를 좋아하는거요.”

 

 나나리와 만났던 카페에서 유페미아는 아주 태연하게 스자쿠의 마음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유페미아를 바라보았다. 유페미아는 잘 우러난 티백을 건져내고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둘이 잘 되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안 불렀는데.”

 “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나는 를르슈를 좋아하는건… 변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런가요? 그럼 를르슈는 브리타니아에 왜 간거죠?”

 “…모르겠어. 가족들과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던데?” 

 “브리타니아에 있는 가족들이랑 사이가 좋을 리가 없을 텐데요? 뭘까요, 설마 새로운 사랑을 찾으러 떠난 걸까요?”

 

 컵을 감싸고 있는 유페미아에게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유피는 를르슈의 짝사랑 상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네?”

 “나나리는 이미 알고 있고, 또 주변에서는 다 알고 있나봐. 그런데 나는…를르슈가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크리스마스에 알아서. 아마 친구로써 의지가 안 되나?”

 “…친구로써요?”

 “아니면 내가 를르슈를 너무 좋아하는 게 티가 났나…?”

 “아….”

 

 스자쿠를 멍하니 쳐다보던 유페미아는 결국엔 한숨을 쉬었다. 를르슈가 브리타니아로 떠난 이유를 알 거 같아요. 그리고 스자쿠가 가지 말라고 한 마디도 안하고 보냈을 거라는 추측도 해봅니다. 를르슈의 짝사랑 상대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스자쿠와 를르슈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유페미아의 말에 스자쿠는 또 주눅이 들었다. 

 

 “만약 를르슈의 짝사랑 상대를 알면 어떻게 하게요? 응원해주실 건가요?”

 “응원…. 모르겠네. 그냥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싶어.”

 “알면요?”

 “…나는 를르슈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기니까, 그 사람이 를르슈랑 어울릴 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겠지.”

 “만약 그 상대가 스자쿠 못지 않은 사람이라면요?”

 “…….”

 “스자쿠처럼 를르슈와 같이 보낸 시간도, 추억도 많은데다가 완벽하게 를르슈의 취향이면요?”

 “…….”

 "나나리의 인정에, 우리 가족의 모든 인정을 다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피는 그 사람 편이야?”

 

 그 말에 유페미아는 웃기만 했다.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가 없네요. 

 이 대화에서 얻은 것은, 를르슈의 짝사랑은 온 가족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자쿠한테는 허들이 높았다. 스자쿠는 아이스커피를 쭉 빨아들이며 유페미아를 노려보았다. 이름 한 글자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스자쿠의 마음을 짓밟고 있는 유페미아는 여전히 만인의 첫사랑 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 를르슈가 왜 아직까지도 고백하지 않았을까요?”

 “…….”

 “거절 당하면 모든 관계가 끝나는 게 무섭다고 그러더군요.”

 “유피한테 그랬어?”

 “제가 먼저 물어봤으니까요. 그래서 그때 알았죠. 를르슈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보통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

 “스자쿠가 과연 상대가 될까요?”

 

 얼음을 와그작 씹으며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처럼 감정으로 난도질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본인이 아니라 본인의 이복 여동생에게. 스자쿠는 고백도 전에 차여본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유페미아는 곧 코넬리아가 올 테니 빨리 도망가는 게 좋을 거라며 스자쿠를 카페에서 내쫓았다. 돌아가는 길에 스자쿠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왕창 샀고 대낮부터 술을 들이부었다. 

 

 ‘낮술을 마셨어? 안주는?’

 “우선 푸딩일까—.”

 ‘푸딩은 디저트지! 안주도 없이 빈 속에 술을 어떻게 마시는거야?! 당장 계란말이라도 해먹어!’

 “싫어. 귀찮아. 를르슈 언제 와?”

 ‘오늘은 펜드래곤에서 머물거고. 다다음주 쯤에 패스를 사서 유로 브리타니아에 갈 예정인데….’

 “가지 말고 그냥 빨리 오면 안 돼?”

 ‘사야할 게 있다고 했지? 너도 갖고 싶다고 한 게 있고.’

 “…술?”

 ‘응. 적포도주가 좋아, 백포도주가 좋아? 아님 그냥 보통으로 추천 받아서 살까….’

 “난 적포도주. 햄버그랑 먹으면 좋아.”

 ‘누가 햄버그랑 적포도주를…. 알겠어.’

 “…를르슈.”

 ‘응?’

 “짝사랑 상대한테는 무슨 술 사줄거야?”

 ‘그걸 왜 너한테 말해야 돼?’

 “친구잖아. 의지해줘!”

 ‘…적포도주. 그게 그 사람 취향인 거 같아. 아, 이제 끊을게. 형님이 오셔서.’

 

 완전 를르슈의 짝사랑 상대의 덤으로 사는 기념품 취급이네. 스자쿠는 다른 캔맥주를 따면서 미간을 구겼다. 나도 그냥 브리타니아나 가버릴까. 회사 열심히 다닌다고 칭찬해주는 를르슈도 없는데. 스자쿠는 소파에 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1월의 평일은 거의 죽은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업무 실수를 하나도 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죽은 눈으로 피트니스 클럽도 열심히 다녔다. 1월 내내 본가에서 지냈다.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으며 주말에는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매일 매일 를르슈의 전화를 기다렸다. 

 

 ‘본가에서 지낸다고? 회사랑 좀 멀지 않나?’

 “밥 주고 빨래해주니까.”

 ‘이제 그 정도는 스스로 해라.’

 “싫어….”

 ‘그럼 결혼을 하던가.’

 “…….”

 

 스자쿠는 고등학생 때부터 계속 써왔던 자기 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를르슈가 자주 오기도 했었고, 친구들이랑 놀기도 했었고. 많은 추억이 있던 곳이다. 그 많은 추억의 대부분이 를르슈였다.

 모든 추억 속에 를르슈가 있다는 건 스자쿠에게는 기쁜 일이기도 했고 슬픈 일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연애감정, 사랑으로 스며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스자쿠는 저에게 결혼을 말하는 를르슈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집안일 해달라고 결혼하자고 하면 상대한테 너무 심하지 않아?”

 ‘그럼 가정부를 구해.’

 “신입사원 월급으로 어떻게 가정부를 구해, 낭비야.”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어?’

 “잘 챙겨먹고 청소 잘 하면 칭찬해주는 를르슈가 있어서?”

 ‘멍청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에 칭찬을 왜…. 됐다.’

 “그리고 나 결혼 안 해.”

 

 부모님이 들으면 경을 칠 소리를 하며 스자쿠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왜? 또 여자한테 차일 거 같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도 짝사랑 하거든.”

 ‘…그래?’

 “응.”

 ‘짝사랑하면 이루면 되잖아. 너는 괜찮은 남자니 할 수 있어.’

 “이뤄도 결혼을 못 해. 우선 일본에서는 그래. 브리타니아에 가면 결혼 할 수도 있겠다.”

 ‘…….’

 

 이제 ‘그 사람이 너야’라고 말만 하면 고백 완성이겠지만. 스자쿠는 우선 제일 큰 산인 커밍아웃을 했다는 점에서 한 템포 쉬어가기로 했다. 전화기 너머의 를르슈는 조용했다. 그리고서는 ‘놀랐어’라는 말을 했다. 

 

 ‘너는 여자랑만 사귀었으니까.’

 “티 안내려고 했거든. 그래서 모르는 거 같아.”

 ‘그래.’

 “불편해?”

 ‘별로. 그래봤자 넌 쿠루루기 스자쿠니까.’

 “응.”

 ‘계속 친구인 건 변하지 않아. 네가 누굴 좋아하건.’

 “를르슈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좋다. 아직 누구한테도 말해본 적은 없거든.”

 

 유페미아한테는 어쩌다보니 들켰지만. 를르슈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술을 샀어. 미리 시음했는데 괜찮아. 비행기 안에서 코르크가 잘 버틸지…. 스자쿠, 또 필요한 건 없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딱히 필요한 건 없다고 했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건?’

 “…응?”

 ‘고백, 안 해?’

 “안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 사람한테 내 감정이 기분 나쁠 수도 있고.”

 ‘…좋은 배려다. 그래도 선물 정도는 나쁘지 않지?’

 “그래? 그렇지만 괜찮아. 를르슈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나나리는?’

 “나나리도 보고 싶어, 라고 나나리의 오빠가 빨리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쿠루루기 스자쿠가 대신 전해드립니다.”

 ‘바보 자식. 이제 끊는다.’

 

 2월이 되었다. 를르슈와 나나리는 브리타니아에서 자주 사진을 찍어 보냈다. 스자쿠도 주말마다 산이니 신사니 나가며 사진을 보냈다. 언제쯤 도착하냐고 묻자, 오후 4시 쯤에 도쿄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절찬 업무 중일 그 시간에 데리러 가는 건 무리였다. 시차 적응도 해야할 테고, 스자쿠는 아쉽지만 나중에 시간을 맞춰서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했다. 

 본가에서 머무는 동안 옮겼던 짐을 다시 맨션으로 옮겨놓았다. 오랜만에 청소를 하면서 스자쿠는 를르슈가 빨리 돌아오길 기다렸다. 를르슈와 나나리가 도착하는 12일에는 메시지가 한 건 왔다. 잘 도착했고 시차 적응  때문에 자느라 연락이 안 될 거 같다는 이야기였다. 알겠다고 이모티콘을 보냈다.

 오랜만에 자기 집에서 자는 기분은 이상했다. 텔레비전을 켜놓고 소파에서 드러누워서 잤다. 구겨져서 잔 몸은 욱씬거렸지만 그래도 기분은 한참 나았다. 일본에 를르슈와 나나리가 있다니. 공기부터가 질이 다르다. 

 

 [를르슈: 14일 예정은?]

 [스자쿠: 없습니다!]

 [를르슈: 우리 집으로 와.]

 

 아침에 기분 좋은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스자쿠는 헤벌쭉 웃었다. 회사에 가면 여직원들이 초콜릿을 잔뜩 줬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구나. 남자들에게 욕을 먹을지는 몰라도 스자쿠에게는 익숙한 연례행사였다. 가방 안에 다 들어가면 좋겠는데. 나나리한테서도 초콜릿을 받겠네. 절반은 를르슈가 만든거겠지만….

 퇴근을 앞두고서 여직원 몇몇이 스자쿠에게 한 잔 하자고 말했지만, 스자쿠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러자 누군가가 쿠루루기 씨한테 오늘 같은 날에 선약이 없으면 이상한거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봤자 소꿉친구들이랑 같이 밥 먹는 건데요, 뭐, 라고 말할 순 없다. 

 매일 돌아가던 본가도 아니고 혼자 사는 맨션도 아닌 를르슈와 나나리의 주택. 정말 오랜만에 들린 이곳에 스자쿠는 초인종을 눌렀다. 를르슈의 낮은 목소리가 반겼다. 누구세요? 스자쿠! 아, 열어줄게. 

 

 “오랜만이야, 를르슈!”

 “그러네. 살이 좀 빠진 거 같아?”

 “제대로 먹긴 했는데 너무 움직였나?”

 “적당히를 모르지. 하여간.”

 “를르슈도 살이 빠진 거 같은데?”

 “말도 마, 브리타니아에서 하루의 절반은 멀미 중이었다.”

 

 스자쿠가 좋아하는 햄버그와 샐러드에 갓 지은 밥까지 를르슈는 능숙하게 세팅했다. 그리고 코르크 마개를 따지 않은 와인과 크리스탈 잔 두 개까지. 두 개?

 

 “나나리는?”

 “유피랑 같이 놀러 갔어.”

 “그래? 그럼 오늘은 를르슈랑 나랑 단 둘인가?”

 “그래, 모처럼 발렌타인인데 남자랑 단 둘이라 미안하게 됐네.”

 “괜찮아. 맛있는 걸 모처럼 먹는 날이고!”

 

 브리타니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를르슈는 식사를 하는 도중에 짧게 짧게 이야기했다. 지금도 일본에서 일을 돕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일본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그런 어중간한 방식으로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고 혼났다고. 일본 사업을 하기에는 를르슈의 기반이 아직 탄탄하지 못해서 힘들 것. 그러니 본사가 있는 브리타니아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마 유로 브리타니아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

 “나나리랑 유피랑 코넬리아 누님도 다 귀국할 거 같고.”

 “…….”

 “일본에서 비자 연장도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스자쿠는 제 몫의 햄버그를 다 먹었다. 를르슈는 절반 정도 남겨 놓고 한숨을 쉬었다. 무거운 이야기만 잔뜩 늘어놔서 미안하다. 스자쿠는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를르슈는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긴 대학을 졸업한 지도 꽤 되었고, 원래 를르슈는 브리타니아 사람이니까. 뭐라고 붙잡아야 할 지 모르겠다. 그리고 스자쿠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도, 솔직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스자쿠는 와인 잔끼리 부딪히며 청명한 소리를 내는 것에 단숨에 들이킨 후에 를르슈에게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은 안 해?”

 “…아. 그렇지.”

 “뭐야, 를르슈. 벌써 마음이 식었어?”

 “최근에 충격을 받을 일이 조금 생겨서…. 마음이 식었다고 하기 보다는, 그냥 금이 갔다?”

 “…….”

 

 그 마음 빨리 깨졌으면 좋겠네. 스자쿠는 괜히 중얼거릴 뻔했다. 

 

 “스자쿠는 어때?”

 

 이쪽은 깨지기 일보 직전이거든. 스자쿠는 와인을 콸콸 따르며 씩 웃었다. 

 

 “포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역시.”

 “…남자끼리라고 포기하는 건 좋지 않아.”

 “를르슈가 좋아하는 여자는 어떤데?”

 “여자가 아냐.”

 “…응?”

 “여자가 아니라서 계속 망설였는데…. 아, 이런 내가 남자끼리라고 포기하는 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군. 그래, 개인의 역량 차이다. 연애도 그런 거겠지. 내 연애는 여기까지다.”

 

 를르슈의 잔에도 따르고 나서 둘은 다시 잔을 부딪혔다. 초콜릿 먹을래? 회사에서 받았거든.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지조가 없는 녀석이라고 웃었다. 

 

 “어떤 남자야?”

 “…남들이 다 눈치챌 정도로 티를 내며 좋아했는데 자기 혼자 내가 좋아하는 걸 모른다.”

 “그 사람, 둔하구나.”

 “그리고 멍청하게 나는 그 남자한테…유피를 소개시켜줬어.”

 “응? 왜?”

 “그 녀석, 같은 남자가 봐도 괜찮은데 왜 여자한테 그렇게 형편없는 평가를 받고 사나 싶어서…. 그리고 만약 유피랑 결혼하게 되면 가족이 되니까 평생의 인연이 되는거고.”

 “…코넬리아 씨가 괜찮을까?”

 “그 녀석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좋게 보니까. 우리 가족한테는 평가가 나쁘지 않거든.”

 “좋은 사람인가보네.”

 “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니까.”

 

 초콜릿 가져와. 먹고 싶어. 접시들을 치우는 를르슈의 말에 따라서 스자쿠는 초콜릿을 뜯었다. 꽤나 비싸고 고급스러운 초콜릿 포장을 뜯어내며 를르슈는 한 조각 베어 물었다. 

 

 “여기에 진짜 사랑의 초콜릿이 있으면 어떡해?”

 “화이트데이에 천 배 갚아드려야지, 뭐.”

 “같이 갚는 걸 도와주지. 너의 사랑하는 남자는 어때?”

 “음…. 약간 걸즈 토크 같은 느낌인데 이거.”

 “소꿉친구끼리 연애 이야기도 못 하겠어?”

 “너무 오랫동안 좋아해서, 이제 어떻게 좋아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마도…?”

 “리발?”

 “리발보다 천 배 머리 좋고 억 배 미인이고.”

 “나나리?”

 “나나리는 네 여동생이야, 를르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남자고.”

 “그렇지. 흠. 일본인? 브리타니아인?”

 

 다행히도 를르슈와 다녔던 학교는 애쉬포드 학원으로 브리타니아인이 절반이 넘는 학원이었다. 사실을 말해도 거짓말처럼 들리겠지. 스자쿠는 대담하게 사실만을 말하기로 했다. 

 

 “브리타니아인이야.”

 “고등학교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나리가 아니야?”

 “나나리랑 닮았긴 해도 나나리는 아니야.”

 “닮았어? 귀여운 남자야?”

 “…하는 행동이 귀여워. 귀여운 쪽보다는 쿨한 쪽이고.”

 

 를르슈는 초콜릿을 와구와구 씹어먹었다. 포장지를 네모 반듯하게 접는 것도 그 다워서 스자쿠는 웃음이 났다. 

 

 “근데 멀리 떠날 거 같아.”

 “…….”

 “엄청 외로워질 거 같아.”

 

 스자쿠는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를르슈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반듯하게 접은 포장지들을 다 동그랗게 구겨서 스자쿠의 이마에 집어 던졌다. 

 

 “나한테 고백하는 거 같잖아, 스자쿠.”

 “아….”

 “그 남자랑 나를 겹쳐 보지마. 실례다.”

 

 를르슈는 멀리 떠날거고, 나는 엄청 외로워진다. 나는 곧 그렇게 된다.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앞의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앞으로 크리스마스도 같이 못 보내고, 그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가 되겠지. 그러면서 멀어지겠지. 

 연인이 되지 않는 이상 이대로 끝이 난다. 어차피 연인이 안 되어도 끝이 나는 관계. 스자쿠는 보라색 리본으로 묶인 초콜릿을 를르슈에게 내밀었다. 뭐야, 까서 먹여달라는거야? 를르슈는 즐겁게 웃으며 리본을 풀었다. 

 

 “나, 를르슈를 좋아해.”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소리에도 스자쿠는 멈추지 않았다. 

 

 “네가 누굴 좋아하던, 나는 신경쓰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야.”

 

 한참의 정적 끝에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동그란 볼 모양의 초콜릿을 씹어먹으며, 스자쿠는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도 네 짝사랑이 안 이루어지면 좋겠어. 그건 끝까지 응원 못해주겠어. 신경 안 쓴다는 건 거짓말. 정말 싫어.”

 “…….”

 “미안.”

 

 를르슈는 보라색 리본 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했어.”

 

 마주친 두 눈에는 열기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