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주의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L.L의 하는 일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C의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기에 기어스에 대한 일은 C.C.에게 의지한다. 그녀가 고전하고 있을 때 한때 세계를 정복했던 악역 황제의 지혜를 빌려준다.
이 근처의 명물이라고 하는 음식을 사서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텔레비전을 본다. 세계는 평화롭고, L.L.는 그 평화로움에 대해서 만끽할 뿐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저런 일이 있었다,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브리타니아 공화국, 초합중국, 흑의 기사단,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로는? 슈나이젤 보좌관의 의견에 따르자면 제로는 아마….
C.C.는 먹은 걸 스스로 치운다. L.L.로써는 몇 년을 봐도 신기한 장면이다. 밤이 되면 잠을 잔다. L.L.은 오늘도 평화로운 세계, 그리고 미미하게 이 평화를 깨려는 이레귤러들을 떠올린다. 기어스의 조각이 아마 그 이유일 거다. C.C.는 그렇게 말했다. 내란이 갑자기 잦아진 이 지역에서 누군가 세상을 손에 넣으려는 왕이 되려고 한다. 기어스 때문이겠지.
오늘도 제로도, 나나리도, 각자 서 있을 곳에서 역할을 다한다. 킹이 움직이지 않으면…. L.L.은 습관적으로 하는 말에 쓰게 웃었다.
이제 누가 킹이란 말인가? 킹이 없는 세계에서 무엇을 움직이고 싶어하는지?
제로에게도, 나나리에게도, 흑의 기사단에게도 연락은 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사라진 사람이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C.C.는 어느날 아침에 그렇게 물었다. L.L.는 모르겠네, 라고 대답했다. 여자가 죽었다 살아나면 마녀다. 남자가 죽었다 살아나면 성인이다. 마녀와 성인이 한 식탁에 앉아, 건배. C.C.는 싸구려 와인으로 건배를 했다.
C.C.는 흑의 기사단과 자주 연락을 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일에는 그들의 힘이 필요하다. 너도 얼굴을 비추는 게 어때? 카렌이나, 오우기, 타마키…. 그 녀석들은 너에 대해 아니까. L.L.는 거절했다.
나는 마음을 남기지 않아.
C.C.는 웃기만 했다. 세인트 L.L.이라고 불러드려야겠네. 그녀의 조롱에 L.L.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로는 오늘은 어디에, 나나리 명예고문, 초합중국, 흑의 기사단. L.L.은 키워드만 읽고 내용은 모두 거른다. 무사히 끝났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늘 중요했다. 마음을 남기지 않는다면서, 이런 건 대체 왜 하고 있는 걸까. L.L.는 보고 있던 텔레비전의 화면을 꺼버렸다.
쓰고 있던 태블릿이 고장이 났다. 고치려고 했지만 너무 낡아서 쓸 수가 없었다. 내용물이 남지 않게 모두 초기화 시켜버리고 나니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태블릿을 보고 L.L.은 한숨을 쉬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지역에 갈 때에는 이것으로 늘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좋아도 세상 모든 언어를 다 알고 있을 순 없다. 모르는 언어의 신문은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초조한 L.L.의 기색에 C.C.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고물상에 갖다 팔아야겠네. 이 나라에는 그런 골동품 매니아는 없으니 헐값에 팔릴 거 같지만. L.L.은 겨우 대답했다. 그래야겠다. C.C.는 말했다. 괜찮아, 그게 없어도 우리의 목적은 이룰 수 있으니.
이젠 공범자도 아니면서, 둘이 함께 이루어야 할 목적.
L.L.은 켜지지 않는 태블릿을 손에 쥐고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가다듬으며 말했다. 다음에 갈 지역에서…네 피자값은 벌었네. C.C.는 그거 잘 된 일이라고 말했다.
고물상에서 태블릿을 팔았다. 피자 한 조각 값도 안 나왔다. 고철덩어리를 들고 다녔나. L.L.은 손에 들어온 푼돈에 한숨을 쉬었다. C.C.는 해가 지고 있는 거리 사이로 갑자기 들리는 총성에 눈을 크게 떴다. 평화로운 이 세상에서 들릴 수 없는 총성. 달리기는 질색인데. L.L.은 뛰어야한다는 사실에 미간을 찌푸렸다.
총성이 울렸던 골목으로 추정되는 곳에 다다르면 한창 싸움판이 벌어진 이후였다. 누군가 밀수한 총을 쓸 정도의 몸 싸움이면 이쪽이 끼어들지 않는게 낫다. L.L.은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어둑한 골목의 그림자는 홀로 우뚝 서있는 사람을 가렸다. C.C.에게 가자고 말하려던 L.L.은 좀 더 빨리 그녀를 붙잡고 달아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가면을 쓴 남자. 피투성이의 손으로 손에 들린 총의 넘버를 확인하고 있는 남자. 몇 명을 때려눕혔는지 스스로도 가늠이 안 되는지 숫자를 세어보고 있는 한심한 모양새. L.L.은 둥근 가면이 노을에 비춰지는 것을 보았다.
“관광 중이었나. 미안하지만 여기는 흑의 기사단이 지금 업무 중이라 빨리 가줬으면 해.”
“…….”
“아니면 위협이라도 받았나? 그렇다면 이쪽에서 보호를 하겠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이 곳에서 L.L.은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가면의 남자—제로는 조용한 두 사람을 보고서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는 C.C.와 다르게 L.L.의 발은 도망치고 싶어했다.
달아나야 한다.
여기서.
이 곳에서!
제로의 발은 어느 순간 멈추었다. C.C.는 제로에게 다가갔다. 제로는 가면을 벗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얼굴이 희미한 빛 사이로 드러났다. 나이가 들어도 그 눈빛은 변하지 않는다. 를르슈 앞에서는 늘 흔들렸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눈은 여전히 그리운 것을 본 듯한 얼굴로.
“오랜만이네. C.C., 를르슈.”
“…함부로 가면을 벗지 마라, 쿠루루기 스자쿠. 천하의 제로가 이렇게 훌렁훌렁 가면을 벗어서야.”
“C.C.는 잘 지내는 걸 알고 있었지만, 를르슈는 연락도 없어서 걱정했어.”
“…….”
“만나서 반가웠어. 이제 가야돼. 여긴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와서…. 위험해지니까 민간인은 피난을 미리 가는 게 좋겠지?”
“…….”
다시 가면을 쓰는 제로는 L.L.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말을 한 마디도 주고 받지 않았는데도, 제로는 그저 스쳐지나간다. C.C.는 굳어있는 L.L.의 몸을 붙잡고 숙소로 끌고 갔다. 제로가 움직일 정도면 흑의 기사단의 녀석들 대부분이 왔다는 거야.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너지? C.C.의 말에 L.L.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텅 비어있는 거리를 걷는다. 얼굴을 숨기고. 이름도 숨기고.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세상에서 이제 모두가 진짜가 되고 내가 거짓으로 남아….
기어스라고 하기 보다는 그냥 쿠데타 때문이군. 인간들의 본질은 그런거야. C.C.는 짐을 쌌다. 오늘 밤 안으로 이 나라의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나가야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배를 타야하니 샤워는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을 거 같고…. L.L.은 오랜만에 꼬인 머릿속에 모든 말을 흘려들었다. 들리는 것이 없다.
이 나라에 사람이 별로 없었던 이유는 이미 흉흉한 분위기가 예전부터 가득했던 것이다. 배편을 겨우 잡았다. C.C.가 짐칸이라도 좋으니 태워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호화 크루즈의 배삯을 요구한 놈들에게 태블릿을 판 푼돈마저 빼앗겼다.
새벽에 뜨는 배였기에 항구에서 한정없이 기다려야 했다. 눈에 띄는 커다란 짐을 들고 있는 두 관광객은 어떻게든 뜯어먹기 쉽게 보였기 때문에 몸을 숨겨야했다. 뱃고동도 들리지 않는 항구의 버려진 컨테이너 사이에 몸을 숨겼다.
“아, 여기에 있었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밤이 빠르게 흐르길 바라는 마음에, 이 나라를 빨리 떠나고 싶은 생각 중에 갑자기 들이치는 공격에 L.L.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C.C.도 놀란 눈치였다.
“지금은 스자쿠야. 제로는 지금 흑의 기사단에서 싸우고 있는 중이니까.”
거침없이 L.L.과 C.C.의 옆에 선 스자쿠라는 남자는 C.C.에게 잠시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했다. C.C.는 때리지만 말라고 말했다. 얻어맞은 남자를 업고 다니는 취미는 없으니까. 스자쿠는 이제 그럴 생각도 없다고 했다. C.C.는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랑 말 안 할거야, 를르슈?”
“…나는 L.L.이다.”
“그렇게 부르면 말할거야?”
아이를 달래고 어르는 달콤한 말투에 L.L.은 흔들렸다. 그렇게 불려야한다. 이제, 를르슈는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은 몰라서,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너랑 할 이야기는 없어.”
“그럼 기어스를 써. 할 이야기가 없으니 꺼지라고.”
“…….”
“아마 너의 기어스는 나에게 먹히지 않겠지. 나는 를르슈의 기어스에 걸린 채로 계속 살아왔으니까. 네가 를르슈가 아니라면 기어스를 써.”
“…나이가 들었더니 헛소리하는 재주도 늘었군, 스자쿠.”
“제로로 살다보면 허세가 기본이라. 드디어 대답해주는구나, 를르슈.”
L.L.은 오랜만에 를르슈가 되었다. 스자쿠는 아직도 어린 소년 같이 웃었다.
“제로의 일이나…쿠데타라고 했었지, 어떻게 된거야?”
“카렌이 잘 진압하고 있겠지.”
“나나리의 옆에는.”
“나나리는 이제 제로가 없어도 돼. 원래부터 정치에 관여하고 있지 않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나리는 이제 제로를 이은 평화의 기호이자 상징이지.”
“…….”
“너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
“…모르지.”
“기어스에 대한 조사는 지금은 로이드 씨가 하고 있지만, 니나가 이어서 하겠지. 니나가 로이드 씨처럼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취미는 없어서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는 어려울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변하겠지.”
“…….”
“미안해.”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사과했다. 갑작스러운 그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들었다.
“너를 두고 가는구나. 를르슈.”
“…!”
“나한테 기어스, 걸어도 돼. 이미 풀렸어.”
“설마 제레미아가…!”
“아니, 제레미아 씨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어. 너를 배신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훌륭한 기사도에 나이트 오브 제로였던 내가 부끄러워지더라.”
“…….”
“그립네. 그런 이름도.”
“…….”
“너는 예전에 기어스가 간절히 바라는 소망과 닮았다고 했었지. 간절히 바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어.”
너를 만나서, 나는 이렇게 살아있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는데, 그 시절을 떠올렸어.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에는 쿠루루기 겐부의 외아들로, 그 이후에는 명예 브리타니아인으로 군인으로, 유피의 기사로, 황제의 기사로, 너의 기사로, 제로로 살아오는 시간 동안.
너를 만나서.
그렇게 변해서.
“이제 와서 책임이라도 지라는거냐, 스자쿠.”
“어린애한테 책임을 물게 하는 어른은 없어. 나는 그런 무책임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나를 그냥 스자쿠로 살게 했던 시간은 그 여름의 해바라기 밭에서가 고작이었구나.
“그 고작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고, 그러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뭔가가 끊어진 거 같았고…. 일어나니까 동맥 절단 직전에 과다 출혈 혼수상태로 수혈 받고 깨어났다는 결말?”
“뭐?”
“그 사이에 문을 박박 긁던 아서 주니어가 도망을 가버려서 이제 어떻게 되버렸는지 모르지만…. 아서 주니어가 설마 제로의 정체가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떠들고 다니진 않겠지? 고양이니까.”
새끼 때부터 키웠는데도 계속 깨물고 할퀴어서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안하는 거 같긴 하더라고. 스자쿠는 뒷목을 주무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를르슈는 저보다 훨씬 어른이 된 스자쿠를 바라보기만 했다.
“…죽을 생각을 했어?”
“다시 태어날 거야. 죄를 이렇게 많이 짓고 살았는데,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리가 없겠지. 그때는 사람보다 더 못한 걸로 태어날 지도 모르겠구나.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그냥 스자쿠로 살고 싶었어. 그래, 스자쿠로 살려면…지금을 끊어내는 수 밖에 없다고. 그렇다고 기어스가 풀릴 줄은 몰랐지.”
“…….”
“이제 곧 가야 될 시간이네, 를르슈.”
“…죽지 마.”
스자쿠는 눈을 감았다. 이제 너의 기어스는 질렸어. 어른이 되어도 싫어. 낮은 목소리가 를르슈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만약 다시 태어나서 만난다면, 그때는 를르슈는 이름을 숨기고 L.L.라고 말하겠지. 내가 아는 를르슈는 그래.”
“눈을 떠, 스자쿠! 바보! 너는 제로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를르슈는 스자쿠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저보다 훨씬 어른이 된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아졌네, 를르슈. 너 나보다 크지 않았나? 더 마른 거 같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면서 스자쿠는 웃음을 지었다.
“나는 스자쿠야. 제로는 지금 흑의 기사단과 함께 싸우고 있어.”
“그래, 스자쿠. 스자쿠, 내 말을 들어, 너는….”
“잘 가, 를르슈.”
“싫어! 눈을 떠라! 내, 내 명령을 들어…. 너는, 너는 제로로… 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야 돼!”
눈을 감고 있던 스자쿠는 끌어안고 있던 를르슈를 떼어놓았다. 어둑한 그림자 사이로 몸을 숨기던 스자쿠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기어스를 쓸 생각으로 그의 인기척을 쫓았던 그 순간이었다.
한 발의 총성. 를르슈는 제 가슴팍을 물들이는 뜨거운 감각에 비명도 못 지르고 무너졌다. 멀어지는 소리 사이로 스자쿠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를르슈. 그 이후 들리는 또 한 발의 총성.
다시 기계적으로 회복하는 몸과 돌아오는 정신 사이에서 를르슈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둠 뿐이었다. 그리고 익숙해지는 시야에 C.C.의 그림자가 보였다. 를르슈가 눈을 뜬 것을 알고 있을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무거운 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쿠데타 중에 죽을 뻔했다고 해서 부랴부랴 배에 탔어. 상처는 다 나았겠지만 뱃멀미는?”
“…….”
“멀쩡한가보군.”
“…쿠데타에 휩쓸린 게 아니잖아. 스자쿠는?”
“그게 누구지?”
“…C.C.!”
“아픈 척이나 해라, L.L. 넌 총에 맞은 중환자였으니.”
“스자쿠는 어떻게 됐냐고 묻잖아! 대답해라!”
“나한테 명령하지 마, L.L. 네 기어스는 어차피 나한테 통하지도 않으니.”
“휴대폰을 줘. 흑의 기사단과 연락을…!”
“내가 했어. 제로는 살아있다.”
“제로가 아니라 스자쿠가!”
“쿠루루기 스자쿠는 예전에 죽었잖아. 제로 레퀴엠도 전에 죽은 그 남자를 이제 와서 찾는 이유가 뭐지?”
“…….”
L.L.은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모든 것이 정리되기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한 가지의 일 밖에 안 일어났지만. 스자쿠는 죽었다. C의 세계는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기어스의 조각에 대한 일은 이제 시작될 뿐이다. 그렇다면 스자쿠를 이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C의 세계에서,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는건가.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신을 죽여놓은 주제에 또 다시.
다시 태어난다고.
그때는 스자쿠로 살고 싶다는 스자쿠에게 내가 다시 만나는 건. 그때의 나는 를르슈도 아니야. 나는 L.L.로 만나서…….
“죽고 싶다.”
“…….”
“죽어버리고 싶어.”
“……왕의 힘은 너를 고독하게 만든다고 했어, 난.”
“꺼져. 입 열지마. 닥쳐라. 너 때문에!”
“내 탓을 하지 마. 나는 기회를 줬어.”
“그때 죽게 했어야지! 일본에서도, 제로 레퀴엠에서도!”
“나를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네가 멋대로 L.L.로 살겠다고 했으면서 이제와서 어리광이야?!”
“너 때문에 스자쿠가!”
“네가 죽인 거다! 악역 황제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기사로써 죽었어! 그게 우리의 계획이었잖아!”
C.C.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L.L.은 갑자기 흔들리는 배 안에서 헛웃음과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스자쿠를 죽였다. 이제껏 무고한 사람을 다 죽여왔으면서, 마지막에는 스자쿠까지 내가 죽였다. 나는 네가 살았으면 했는데. 이름이 무엇이든, 네가 부정 당하던 이 세상에서 인정 받고 살아갈 방법으로….
나나리는 이제 제로와 함께 세계를 계속해서…. 스자쿠도 를르슈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없어지고 L.L.만이 그들의 상냥함을 기억하면서.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정말 이기적인 마음일 것이다.
거짓말은 누가 하는 걸까. 무엇이 거짓이고. 기적은 일어나도 진실로 취급받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 기적도 거짓말일 수도 있겠구나.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보내버린 L.L.은 뉴스도 신문도 보지 않는다. 세상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든 의미 없는 것이다. 거짓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기어스의 조각을 찾아나간다. 때때로 다시 태어날거야, 라고 말한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영혼을 알아보는 능력도 없다. 세상을 떠돌며 스쳐 지나간 많은 인연 중에 를르슈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돌아보아도 없다. 그런 건 없는거다. 죽어버리고 싶네. L.L.의 습관적인 중얼거림에 C.C.는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번에 들린 나라는 배를 타고 들어온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몸을 숨길 곳이 필요해서 들린 곳이다. 아시아계 사람들이 많다. 여름인지 습도가 높아 짜증도 치민다. 흑의 기사단은 해체된지 오래이고 의지할 곳도 없다. 짐은 적어서 다행이다. 호텔 같은 곳에 들어갈 수도 없다. 여관에 들어가면 침대는 C.C.한테 빼앗기고 바닥에서 자야되서 싫다. 기어스를 써서 편의를 누리자니 뒷처리가 곤란하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몇 백년 전엔 사소할 범죄도 중범죄 취급이다.
노숙하던가, 기어스를 쓰던가. C.C.의 말에 L.L.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어스를 썼다가는 흔적이 남아서 귀찮아질 것 같았다. 노숙해야지. C.C.는 미간을 찡그렸다. 침낭을 버리고 왔는데 어떻게 노숙을 해? 담요가 있으니 적당히 드러누워. 전직 노예 주제에 바라는 게 많군. 오호, 황제 폐하께서 노숙을 하시는 취미가 있을 줄이야. 대화를 더 하다가는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밤이 되면 공원은 문이 닫혔고, 머물 곳이 없었다. 도시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을 보며 C.C.는 방법은 하나 뿐이라고 했다. 적당히 마을 뒷산 같은데서 자는 수밖에. 안내도를 보며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에 들어섰다. 산줄기가 이어진 곳에 생긴 주택가는 꽤나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더 귀찮아지기 전에 산이 있는 곳으로 갔다.
원래 길이 있던 곳이었는지, 가파른 경사만 아니면 그럭저럭 밟고 올라갈 수 있는 야밤의 등산길에 L.L.은 헐떡거렸다. 업어줘? C.C.의 조롱에 L.L.은 닥치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터는 마치 두 사람을 기다린 것 같았다. 벌레나 안 물리면 좋겠다. 회복되는 몸이지만 간지러운 건 질색이다. 서로 두 장의 담요를 나눠서 덮고 잠을 잤다.
아침의 새 소리.
평화.
지겹다.
L.L.는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담요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미간을 찡그렸다. 담요를 걷어내는 손길에 C.C.가 벌써 일어났나 싶었다. 귀찮은 녀석, 통조림이나 먼저 꺼내서 먹으란…. L.L.의 습관적인 잔소리는 끊어졌다.
“…아, 아, 아픈 사람일까 싶어서 나도 모르게. 아니, 그, 여긴 원래 우리집 땅이라서! 아무도 안 올라와야 하는데!”
“…….”
“외, 외국어, 모르는데. 브리타니아 사람?”
“……스자쿠.”
L.L.는 그 이름을 불렀다. 소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경계하는 눈이었다.
“나는 이렇게 멍청하게 잠복하고 있는 납치범한테 당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야! 어디서 왔어!”
“아, 아니, 나는.”
“내가 여기에서 자주 올라오는 정보는 누구한테 들었어?!”
“그, 납치를 왜, 아니, 그냥, 잘 못 말한 거다.”
“거짓말 하지 마! 내가 쿠루루기 총리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온 거잖아! 저 녀석도 한 패냐?!”
“아니야, 나는!”
너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아.
L.L.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땅바닥에서 잔 몸이 제대로 일어설 리가 없었다. 소년은 한 걸음 뒤로 더 물러섰다. 날카롭게 날이 선 초록색 눈동자가 반가웠다. 그래, 그때도 이런 눈이었지.
“너는 누구야!”
—만약 다시 태어나서 만난다면, 그때는 를르슈는 이름을 숨기고 L.L.라고 말하겠지. 내가 아는 를르슈는 그래.
“나는….”
L.L.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뺨을 뜨겁게 가로지르는 것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울고 있는 L.L.에게 소년은 더 이상 날을 세우지 않았다. L.L.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를르슈다.”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아.
* * *
우는 를르슈를 보고서 소년은 가만히 서있었다. 두 사람의 소란에 일어난 C.C.는 조용할 뿐이었다. 침묵만이 한참을 흐르고, 소년은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쿠루루기 스자쿠.”
어린 목소리로 불려지는 그 이름이 반가웠다. 그리웠다.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이름 알고 있는 거 아니였어? 나를 그렇게 불렀잖아.”
“네, 네가…네가 알고 있던 사람을…닮아서.”
세계를 호령했던 악역황제의 두뇌는 비상하게 돌아간다. 이 스자쿠는 그 때의 스자쿠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래도 스자쿠를 만났어. 나는 너에게 계속 거짓말을 했는데. 너는 나에게 그 약속을 지켜준거야.
다시 태어날거라는 그 약속을.
“알고 있던 사람을 닮아서…납치하려고 했어?”
“나, 납치범이 아니야! 나는!”
“우리는 떠돌이 신세다. 며칠동안 여기서 머물게 해주면 안 될까?”
가만히 있던 C.C.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스자쿠는 경계하는 시선으로 C.C.를 쳐다보았다. C.C.는 태연하게 두 사람의 짐을 가리켰다. 담요 두 장, 통조림 깡통으로 만든 음식 몇 개, 수중이 돈이 있으면 땅바닥에서 자고 있을 리도 없지? 이런 후줄근한 납치범이 어디 있어? 납치범에게도 나름의 품격이 있을 텐데. C.C.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스자쿠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믿지 못해? 우리는 너와 관련 없는 사람이야. 어쩌다가 여기에 와버린 것 뿐.”
L.L.와 스자쿠는 관련이 없다. C.C.와 스자쿠는 관련이 없다.
그 사실이 를르슈를 울게 만들었다.
“애 앞에서 그만 울어, L.L. 놀라잖아.”
“L.L.?”
“그래, 이 녀석의 이름….”
“를르슈라고 했어. 설마 거짓말을 한거냐! 역시 납치범이었어!”
“아니야, 나는 를르슈다! L.L.은…!”
C.C.는 L.L.이 자기를 를르슈라고 말하는 걸 아주 오랜만에 들었다. 밤의 항구에서가 마지막이었던가. 그때 배 위에서의 쿠루루기 스자쿠의 죽음을 듣고 나서가 마지막이었나. 기억도 흐릿해져간다. L.L.은 스자쿠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L.L.은 원래 이름의 이니셜이다. 를르슈 람페르지, 그게 원래 이름이야.”
“…….”
“자기 이름을 밝히는 납치범이 어디 있겠어. 나를 믿어줘, 스자쿠.”
“……너는 이름이 뭐야?”
스자쿠는 C.C.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내 차례인가. C.C.에게 있어서 L.L.은 최악의 악수를 두었다. 를르슈 람페르지를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C.C.다.”
“진짜 이름은?”
“……치즈 크러스트.”
“거짓말!”
“부모님이 치즈 피자를 좋아하셔서 이런 이름으로 평생 살게 된 내 처지를 위로해주던가, 아니면 놀리던가 해라. 어린애.”
“…진짜야?”
다시 를르슈에게 돌아온 시선에 를르슈는 C.C.를 노려보았다. 스자쿠에게만큼은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방금 전이었는데. 이 망할 마녀가.
“그래. 치즈 크러스트라고 밖에서 부르는 건 외국에서도 부끄러우니까 C.C.라고 부르고 있어.”
“외국? 원래 어디에서 왔는데?”
“브리타니아.”
“……관광?”
“…관광 겸 겸사 겸사.”
“겸사 겸사는 뭐야?”
“넌 아까부터 계속 질문 뿐이네.”
“납치범일 수도 있으니까.”
“너를 납치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뭘까….”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이번엔 자기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 있나. 를르슈는 스자쿠의 얼굴을 살폈다. 스자쿠는 허탈한 한숨을 쉬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어린 아이가 지을 표정이 아니었다.
“…날 납치해서 얻을 이득은 없지. 납치범이 아니구나, 정말로.”
“총리 아들이라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믿어줄 사람도 없고.”
“뭐?”
그러고보니 스자쿠라고 해도 어린 아이가 이 산중턱에 있는 공터에 올라올 일은 뭐가 있을까. 를르슈는 담요를 정리했다. 두툼하게 깔아놓은 담요 위로 스자쿠를 앉혔다. 얼떨결에 담요로 만들어진 방석 위에 앉혀진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린애가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앉아서 쉬는 게 낫겠지. 그 담요는 그냥 담요다. 어이, C.C. 통조림 중에 과일이 남았던가?”
“네가 확인해라.”
“지난번 나라에서는 네가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것 처럼 산 할라피뇨 밖에 안 보이던데.”
“어쩌라고?”
“…….”
“몇 없는 식량을 총리 아드님한테 대접하는 L.L.가 나랑 상의도 없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데 협력해야하는 이유는?”
“……스자쿠, 이 근처에 피자 가게가 있을까? 테이크아웃 전문점으로.”
“있기는 한데, 나는 위치만 알려줄 수 있어.”
가만히 앉아있던 스자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는 관광객이라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런데, 안내를….”
“관광 겸 다녀오면 되잖아.”
“……총리 아들이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해서?”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 위험하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어린데도 차분한 스자쿠는 무언가 낯설었다. 방금 전처럼 납치범이라고 몰아세울 때가 오히려 를르슈가 알고 있던 스자쿠에 가까웠다.
“내려가면 듣기 싫은 소리 뿐이라서.”
“……어린애는 정치나 그런 거랑 관련 없는데 말이야. 네 아버지 때문에 괜히 네가 잔소리를 듣는구나?”
“그런 건 아니야. 아버지는 잘하시고 계셔. 지지율도 높다고. 외교 수완도 훌륭하시고!”
“그래? 그럼 왜 너한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거지?”
“정말 납치범이 아니구나.”
를르슈는 짐을 뒤적이며 하나 남은 복숭아 통조림과 그나마 멀쩡한 일회용 포크를 찾았다. 뚜껑을 까서 스자쿠에게 건네주었다.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독은 없어. 를르슈가 먼저 한 입 먹었다. 아니면 할라피뇨를 먹을래? 너무 많아서 문제거든. 납치범은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 그 말에 스자쿠는 복숭아 통조림과 포크를 받았다.
“사실 너네들이 납치범이라도 상관 없어.”
“왜?”
“아버지의 지지율이 올라가게 되는데 도움이 되겠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젖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동정표를 사는구나.”
“그래서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응?”
“어른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
“여기에 독이 들어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냠, 하고 먹는 스자쿠는 복숭아 통조림을 퍼먹기 시작했다. 어린애라면 지금 간식을 먹거나 군것질을 해도 당연할 시간이었다.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 때이기도 하도. 를르슈의 기억 속에 이 무렵의 스자쿠에게는 를르슈와 나나리가 있었다. 정치가 집안의 외아들로 오만방자하게 컸던 스자쿠였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
“왜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어?”
“…맞는 말이라서.”
“뭐?”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 누구와도 안 닮았고. 밖에 나가면 사생아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살고 있고. 학교에서 성은 쿠루루기도 아니고….”
“쿠루루기 스자쿠라면서?”
“……납치범이라면 내 이름을 미리 알거라고 생각했거든.”
“아, 학교에서는 그럼 다들 너를 뭐라고 부르는데?”
“선생님은 스메라기….”
“친구들은 스자쿠?”
“……친구가 있으면 여기에 혼자 올 리도 없지.”
를르슈는 자기가 알고 있던 스자쿠와 눈 앞의 스자쿠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별해나간다. C.C.는 이 시절의 스자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 테니 도움이 되지 않을 터.
“그럼 나는 너를…스메라기 스자쿠라고 불러야하나,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불러야하나?”
“…계속 스자쿠라고 불렀으면서.”
“그렇게 계속 부를게. 이런 비탈길을 올라올 정도면 체력이 좋다는건데, 운동은 안해?”
기억 속의 스자쿠는 검도를 하고 있었다.
“했었는데, 어느새 소문이 나버려서 아버지가 그만두라고 했어.”
“무슨 소문?”
“…대회 같은 데에 출전하게 되면 스메라기가 아니라 쿠루루기로 나가야하니까, 그때는 곤란해지고. 도장은 학교랑 다르게 아버지 입김이 들어가도 소용이 없고.”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네.”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야.”
쿠루루기 겐부가 그런 사람이었나. 하긴, 그때의 스자쿠도 아버지를 존경했다.
“어머니는?”
그 시절 스자쿠에게는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별거 중.”
“…응?”
“나를 보기 싫다고 해서. 작년부터 나가서 살고 있고…. 이혼은 아직 안했어. 총리 임기가 끝나면 할 것 같기도 하고.”
“어, 어머니가 너를 왜 보기 싫어해?”
“말했잖아. 아무도 안 닮았다고.”
“…….”
“나를 낳고 나서,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버림 받고, 아버지는 배신 당했다는 생각에….”
“겉모습은 중요한 게 아닌데.”
알고 있던 스자쿠가 아니면서, 스자쿠랑 똑같이 생겼다고 제 이름을 덜컥 밝혀버린 주제에 할 소리는 아니지만.
“계속 여기에 있어도 돼. 어차피 아무도 안 올라와.”
“고, 고마워. 머물 곳이 없어서 곤란했거든.”
“복숭아, 맛있어.”
“더 주고 싶은데 이제 없네.”
“……어디가서 이야기 해도, 아무도 안 믿어줄 거니까 말해도 소용 없어.”
“절대로 말 안 한다. 너에게 거짓말은 안 한다고 약속했지?”
“를르슈는 상냥하네.”
그렇게 말하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겨우 웃었다. 어린애한테는 이게 기본이니까. 노골적인 애 취급에도 스자쿠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알고 있던 스자쿠라면 이럴 리가 없는데. 괴리감이 심해진다. 를르슈의 당황이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 C.C.는 피자를 사러 가자고 말했다. 스자쿠는 번화가에 있는 피자 가게 위치를 알려주었다. 자세한 설명에 를르슈는 고맙다고 했다.
“네가 좋아하는 피자는 뭐야, 스자쿠? 그걸로 사와서 같이 먹고 싶은데.”
“…피자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이번엔 C.C.가 놀란 눈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이 다 있나. C.C.의 말에 를르슈도 놀랐다. 집안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다. 보통의 의식주만 해결되어서 키워서 그냥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총리의 아들이 이런 험난한 산중에 올라오는 것도, 모두 다 스자쿠가 방치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를르슈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던 스자쿠는 왜 세상에서 없는 취급을 당해야하지.
“알겠어. 그럼 내가 고른 메뉴로 사올 테니 짐 좀 부탁하지.”
C.C.는 를르슈를 끌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스자쿠한테 허락도 안 받고 떠맡기고 오면 어떡해! 를르슈는 C.C.에게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려라, L.L.!”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모르겠어? 저건 쿠루루기 스자쿠가 아니야. 어린애한테는 미안하지만 짐은 버리고 그냥 내려가자, 다음 나라로….”
“쟨 스자쿠야!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기어스의 조각이다!”
“…!”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날 리가 없지?! C의 세계는 아직 복구되지 않아서 정확히 확인할 수 없고, 지금까지의 형태와 달라서 몰랐지만 저건 기어스의 조각이야. 세상에 있어서 안 될 애다.”
“…그게 뭐야.”
“네가 알던 쿠루루기 스자쿠의 얼굴로, 쿠루루기 스자쿠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적 같은 건 없어. 그런 기적 같은 일을 찾아서 우리는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잊은 거야?”
“스자쿠는 기어스 같은 걸 쓰지 않았어, 왕이 될 생각도 없어보이고….”
를르슈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만난 스자쿠인데.
“저런 형태는 처음이니까 다시 회수할 방법을 찾아서…. 지금은 떠나야 돼.”
“스자쿠를 혼자 내버려 두라고?! 스자쿠는 그냥, 어린애다. 아무것도 몰라!”
“모를 때 떠나야 돼.”
“스자쿠한테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어. 돌아간다고 했단 말이야.”
“…….”
“그때의 스자쿠에게도, 지금의 스자쿠에게도 나 밖에 없어! 어떻게 버리고 가란 말이냐!”
결국 무너져서 우는 를르슈를 보며 C.C.는 한숨을 쉬었다. 이 제멋대로인 자식이 울면 다 되는 줄 알아. 결국 멱살을 붙잡고 번화가로 끌고 내려왔다. 납루한 차림의 관광객 두 명은 피자 가게로 들어갔다. L.L. 주문해라. L.L.은 망할 피자 여자라고 중얼거리며 기어스를 썼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L사이즈로 콜라 세 개까지 테이크 아웃할 테니 준비해라.”
L.L.의 손가락이 메뉴판을 훑는 것에 C.C.가 미친놈이라고 헛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 많은 걸 누가 다 먹어. 네가 다 먹겠지. 스자쿠도 많이 먹는 편이고. 그럼 그 많은 걸 누가 들고 가? 네가 들어라. 가녀린 여자에게 바라는 게 많군. 돌아가는 길에 네 등에 업혀서 갈 테니 그것도 기대하시길. 남자로써의 자존심도 없어? 남자로써의 자존심을 세워본 적이 없어서. 세인트 L.L.의 동정 경력은 상당하지.
“그래서 어떻게 할거야,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이름까지 밝히고. 설마 그 녀석이 다 클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자고 할 생각은 아니지? 우리는 불로불사다. 늙지도 않는 우리가 신기해서 그 녀석이 네 이름 알아내려고 했다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알아내는 순간에는 어떻게 할 거지?”
“…너, 산을, 타고, 있는, 와, 와중에, 피자도, 그렇게, 많이, 들고.”
“대답해.”
“헉, 허억, 숨, 고르고.”
“시간은 넘쳐나지만 기어스의 조각이 이 평화를 언제 깰 지 몰라. 쿠루루기 스자쿠에게만 매달려 있을 시간은 없어.”
“애, 애초에 네 가설이 진짜라는, 증거도 없잖아.”
L.L.은 나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C.C.는 피자 네 판과 콜라 1.5리터 페트 세 병을 들고 성큼성큼 올라가고 있었다. 기다려, 같이 가, 이 제멋대로인 자식이…! L.L.은 헐떡거리며 뒤따라갔다.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기어스를 써.”
“…으, 응?”
“기어스가 먹히지 않으면 기어스의 조각이라는 게 증명 완료된다. 그때는 내 방식에 따라서 회수한다.”
“……스자쿠를 죽일거냐.”
지금까지 그렇게 기어스의 조각을 가진 사람들을 죽여왔으니.
“지금의 쿠루루기 스자쿠는 죽지 못해 사는 모양이던데. 우리가 죽여주면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데리고 도망가면.”
“유폐된 듯이 크고 있어도 학교도 제대로 다니고 있는 어린애가 갑자기 사라지면 곤란한 건 이 세계다. 오히려 평화를 깨는 건 우리가 돼.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거고,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너는 있어서 안될 애라고 말할 자신은 있어? 같이 떠나자고 하면 승낙을 받을 자신은? 기어스도 안 먹히는 상대에게?! 나는 이제 새로운 계약자도 만들 수도 없어. 협조할 공범자를 늘릴 수도 없다고!”
생각을 하고 살아, L.L!
C.C.에게 최악의 욕을 먹은 L.L.은 내딛던 발 걸음을 삐끗하며 무너졌다.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가는 C.C.는 넘어진 L.L.을 돌아보지도 않고 공터가 보이는 중턱까지 올라갔다.
“생각을 해라, 를르슈 람페르지….”
를르슈는 중얼거리며 구르고 있던 땅바닥에서 일어섰다. 생각을 해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스자쿠가 만약에 기어스의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특이한 능력이 발현된 것 같지 않다. 그저 스자쿠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수를 해야하나. 회수의 방법에 대해서는 나머지 기어스의 조각을 모아서 더 단서를 모으고 C의 세계의 룰을 따라서 평화롭게…. 그럼 그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켜야 한다. 그때까지 스자쿠를 홀로 내버려두고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 스자쿠는….
스자쿠는 그때도 살아있을까.
살아있어도, 불로불사의 두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홀로 크는 그 과정에서, 날 때부터 부모에게 부정 당하고, 세상에 설 곳 없이, 거짓된 이름으로 살면서, 언제까지나,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는 듯이, 죽는 것만이 자기의 가치라고 말하면서 살아간다고.
“그때랑 달라진 게 없어.”
기적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믿는 사람에게는 진실로,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거짓으로.
세상은 평화롭다. 제로 레퀴엠의 평화는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그 평화에 일조한 스자쿠가 다시 태어나서도 똑같은 삶을….
“달라진 게 없어.”
어차피 거짓말쟁이의 남자가 만들어놓고 간 세상의 평화가 진실로 남을 수가 없는데.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데 신기할 지경이다. 꿈이었으면. 그렇다면 이건 누가 꾸는 꿈이지. 를르슈가 바란 세계가 이런 걸까. 스자쿠는 아직도 이런 악몽을? 여동생을 핑계로 이제껏 제 복수를 이룬 남자는 변함없는 세상을 다시 돌아보았다.
세계는 가식으로 가득차고…거짓말이 난무하며…이것은 평화인가.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고 부정하면서 이루고 있는 평화.
그 평화의 세상에 있어서 안 될 사람을 다시 만나러, 를르슈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었다.
“피자는 원래 이렇게 많이 먹어야하는 거야?”
“아니, 기분을 냈어.”
“이렇게 피자를 많이 살 돈이면 그냥 숙소를 구하는 게 좋을 텐데.”
“…음, 그러네.”
기어스의 힘으로는 음식점에서 무전취식을 하는 게 덜 골치아픈 일이었다. 어차피 몸만 숨기려고 온 나라였기 때문에 크게 바라는 것도 없었고. 를르슈는 피자를 먹는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C.C.는 한 판을 혼자서 다 먹고 졸리다며 담요 위에 드러누웠다.
“스자쿠.”
아직 젖살이 덜 빠진 어린 소년이 저를 쳐다보았다. 를르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스자쿠를 마주보았다.
“우리를 만난 걸, 잊어줄 수 있을까. 아예, 너의 기억 속에서.”
스자쿠가 응, 이라고 말하면 그는 기어스에 걸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기어스의 조각이 아니라 그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다. 언젠가 태어나, 성장해, 죽는 보통의 인간. L.L.이 간섭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스자쿠가 아니, 라고 대답하면 그는 기어스의 조각이다.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그를 지워내 C의 세계로 보내서, 이제 두 번 다시 못 만나게 된다. L.L.에게는 C.C.처럼 죽은 사람을 살려낼 능력은 없다. 그리고 성공할 자신도 없다.
이제 스자쿠는 다시 태어난다는 약속도 해주지 않은 채로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 건가. 어떤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하는거지. 늙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답을 고르는 사이에 스자쿠는 입을 열었다.
“C.C.는 몰라도 를르슈 같은 상냥한 사람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스자쿠는 그때 보았던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두 사람을 만난 건 어디에 가서도 이야기 하지 않아.”
너는 기적처럼 만난 나의 사람인데.
“어차피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지만.”
나는 왜 너를 배신해야하는걸까.
를르슈와 L.L.은 피자 한 조각을 더 먹는 스자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스자쿠는 제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떨리는 것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또 울어? 이 피자가 매웠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었으면.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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