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오브 세븐 X 브리타니아 황자
휴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급한 사안이라며 들이닥친 서류들을 대강 처리하고 나왔다. 를르슈는 집무실에서 나오면서 한숨을 쉬었다. 슈나이젤 형님은 분명 일부러 이런 거야. 주변에 를르슈를 쥐고 흔드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슈나이젤처럼 노골적인 사람은 드물었다. 스자쿠를 갑자기 데려가더니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만들 때부터 싫었다. 그렇지만 재상 보좌의 역할을 맡은 이상, 를르슈가 반항이라도 하면 슈나이젤은 스자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오늘처럼 간단하게 휴일에 일거리를 주는 것이랑 비교도 안 되게.
대체 나를 괴롭혀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를르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아리에스의 손님이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오늘의 손님은 나이트 오브 식스, 아냐 알스트레임으로 나나리의 소꿉친구였다.
“…지노를 진심으로 만드는 건 아마 스자쿠 뿐일거야.”
“정말로요? 그 정도인가요?”
“그리고 스자쿠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건 아마도 지노가 유일하고.”
“대단해요!”
나나리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져야하는데 를르슈의 굳은 미간은 펴질 수가 없었다.
스자쿠를 7년 전, 일본에서 만나 다시 브리타니아에서 만나 아리에스에서 기사 견습으로 두었다가, 기사와 주군의 인연보다 더 강한 애인 관계가 되었다. 슈나이젤만 아니었다면 스자쿠는 를르슈의 기사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주종관계에서는 몰라도 애인 관계에서는 스자쿠에게 를르슈가 유일하지 않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군. 알스트레임 경, 나도 그 이야기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오라버니, 지금은 아냐잖아요.”
“…를르슈 전하에게는 재미 없을 텐데.”
원래 앉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를르슈는 아냐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린듯한 로열 스마일에 아냐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말하지 않는게 좋겠어.”
“나를 가지고 놀지 말아라, 아냐. 스자쿠랑 지노가 어쨌다고?”
“그러지 말고 오라버니께도 알려드려요, 아냐. 별로 숨길 일도 아니잖아요?”
“…….”
아냐는 웃기는 웃지만 눈이 웃지 않는 를르슈를 보며 정말 별거 아니라며 운을 뗐다.
“정기적으로 KMF 조정 겸 시합을 하는데, 트리스탄과 랜슬롯이 매번 박빙이야.”
“그래, 지노와 스자쿠가 박빙이다, 이거군.”
“원래 지노가 지는 게 일상인데, 최근엔 집안에서 명예 브리타니아인에게 지지 말라고 압박도 들어오고…. 또 지노의 이것저것의 사정이 겹쳐서, 요새 진심으로 하고 있어.”
“…….”
“스자쿠는 적당히 져주는 지노가 싫었는데, 최근에는 지노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니까 가끔 둘 다 한계를 모르고 시합에 열중해. 서로 리미터를 올리는 느낌. 재미 없지?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이야기니까.”
를르슈는 홍차를 마시면서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다. KMF에 관심이 많은 나나리는 트리스탄이니 모드레드, 랜슬롯의 활약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모드레드는 어땠나요? 스자쿠랑 한 번 붙었다가 박살나서 지금 수리 중이야.
정원에는 산들산들 부는 바람과 같이 흔들리는 꽃잎. 를르슈는 떠오르는 잡념에 겨우 홍차를 다 마셨다.
“모처럼 휴일이었는데 못 와서 미안!”
“어쩔 수 없지. 랜슬롯 조정은 급한 일이니까.”
밤에는 스자쿠가 찾아왔다. 를르슈는 침실로 스자쿠를 들였다. 나나리는 자니까 조용히. 그거 를르슈가 조용히 해야하는 거 아니야? 스자쿠는 웃으면서 망토를 풀었다. 하얀 정장 차림의 스자쿠는 옷을 벗다 말고 갑자기 휴대폰을 꺼냈다.
“잠깐, 나 이거 확인 좀 할게.”
“뭔데?”
커다란 화면 너머에는 KMF 두 대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트리스탄과 랜슬롯이었다. 아마 낮에 아냐가 말한 시합인 것 같았다.
“…여기서 잘 못 된건가. 아니, 이쪽? 아, 맞아. 여기서.”
“지노랑 시합을 한다며?”
“아, 응. 낮에 아냐가 말해줬다며? 이거도 아냐가 찍어준거야.”
“이겼어?”
“아직까지는 계속 이겼는데…. 지노 녀석. 가면 갈수록 끈질겨.”
화면을 한참이나 들여다본 스자쿠는 결국 머리를 한 번 제 손으로 훑더니 휴대폰을 꺼버렸다. 전략전이 아니라 일대일로 맞붙는 싸움에는 를르슈가 조언할 것이 없었다. KMF의 순수한 조종 실력의 시합에 를르슈의 조언은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괜히 시무룩해져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스자쿠는 정장을 벗으면서도 계속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침대로 오는 발걸음도 건성이었다. 를르슈는 입을 맞춰오는 스자쿠를 밀어냈다.
“키스 안 해. 섹스도 물론.”
“…응?”
“다른 생각 중에 대충 할 거면 상대하지 마.”
를르슈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서 등을 돌렸다.
“나가.”
그 말에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화났냐고 물어보는 건 지금 상황에 기름을 붓는 꼴이라는 걸 알기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머리카락 끝에 입술을 맞추었다. 대충할 생각 없어. 그렇지만 를르슈가 오늘은 할 기분 아닌 거 같으니까….
다시 옷을 갖춰입고 들어왔던 곳으로 소리 없이 나갔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완전히 나간 기색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짜로 가버렸어, 스자쿠.
* * *
“긴급속보를 받고 왔습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
“뭐야, 지노.”
“아냐한테 시합영상을 달라고 했다며?! 모니터링이라니 비겁하다! 스자쿠! 를르슈 전하로도 모자라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대기실에서 휴대폰으로 시합 영상을 보던 스자쿠는 활기찬 지노의 등장에 쓰게 웃었다. 지노는 스자쿠의 소파 옆에 앉았다. 지노의 손에는 쿠키가 가득 들어있는 바구니가 있었다.
“웬 쿠키?”
“약혼녀가 만들어준거야. 나이트 오브 라운즈끼리 먹으래.”
“……잘 먹겠습니다.”
겉모습은 멀쩡해보이니 먹어도 되겠지. 바인베르그 가와 약혼을 맺을 귀족 영애 치고는 잘 만든 거 같기도 하고. 독은 없겠지. 스자쿠는 쿠키를 한입 베어물었다.
이 맛은…!
“세실 씨랑 결혼해?!”
“아, 역시 맛 없을 줄 알았어. 스자쿠가 제일 먼저 먹어서 다행이다.”
“진짜 세실 씨?!”
“아냐, 연상이긴 한데 나를 많이 싫어해서…. 왜 갑자기 멀쩡해보이는 쿠키를 줄까 생각했는데 역시나군! 스자쿠에 대한 복수도 성공했다!”
어제 져서 엄청 분했거든. 스자쿠도 좀 적당히 해주면서 봐줘야지! 너 혼자 계속 전승이면 다른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어떡해?
스자쿠는 소금맛이 진하게 나는 쿠키를 다시 되돌려놓으며, 대기실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상상치도 못한 맛이었다.
“다들 분발하면 돼. 나는 를르슈의…, 아니 를르슈 전하의 명성에 누가 안가게 노력하고 있을 뿐.”
“그럼 를르슈 전하의 기사가 되었어야지, 왜 나이트 오브 라운즈야?”
“…….”
“와, 집안에서도 엄청 쪼이고 있어서 미치겠다구! 스자쿠, 다음 시합에서는 져주는 거 어때?!”
“미안. 그럴 순 없어.”
대기실에 누군가가 또 들어왔다. 아냐였다. 아냐, 쿠키 먹을래? 지노의 말에 아냐는 됐다고 말했다. 지노가 섭섭한 표정을 짓자 아냐는 쿠키 한 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물기 전에 지노에게 물었다.
“누가 만든거야?”
“…내 약혼녀.”
“안 먹어.”
“아! 너무해!”
지노의 약혼녀가 대체 누구길래. 스자쿠는 알아도 자기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다음 시합에서는 좀 더 빠르게 지노를 제압할 방법을…. 지난 주에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서 겨우 이긴 것도 힘들었다. 힘을 덜 들이게 로이드 씨랑 세실 씨에게 의논을….
“새 휴대폰을 샀어.”
“응? 지난번 거 벌써 고장났던가?”
“군사용으로 3 테라바이트 저장 가능.”
“…….”
사진을 찍으며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아냐에게는 새 휴대폰의 이점이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샀구나. 할 일도 없으니 지노와 스자쿠도 아냐의 새 휴대폰을 구경했다. 가장 오래된 저장기록에는 를르슈와 나나리가 있었다. 그것도 엄청 어린. 일본에 오기 전에 찍은 사진인 것 같았다.
“나나리랑 처음 친구가 된 날에 찍은거야.”
“그랬구나. 아냐, 나 이 사진 메일로 보내주면 안돼?”
“개인기록인데.”
“…….”
“다음 시합에서 모드레드에게 져준다면.”
“…됐어.”
전승 기록을 사진 하나에 팔기엔 너무 아까웠다. 를르슈한테 원본이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나나리 밖에 없겠지. 이 시절의 를르슈 사진은 거의 없고. 나랑 찍은 것도 열 장이 안 되는데.
이제껏 무패의 기록을 달려온 랜슬롯, 그리고 함께 달려준 카멜롯의 사람들에게….
“모드레드에게 티 안나게 져줄테니까 사진 보내줘!”
“녹음 완료. 스자쿠는 너무 쉬워. 메일 전송 완료. 확인해.”
“확인했어!”
죄송하지만 어릴 때의 를르슈는 귀여우니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승부조작 하지 마, 현장 검거야, 둘 다.”
“지노만 입을 다물어주면 돼.”
“입 다물어줄테니까 트리스탄한테도 져주기!”
“지노 말을 믿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네가 를르슈 전하도 아니고 별로 져줘야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아냐! 지금 나이트 오브 세븐의 망언을 녹음했어?!”
“미안, 지금 건 기록 못했어.”
모드레드가 이겼는데 왜 나한테 졌냐고 또 그러겠지. 형편 없는 기사라고 암암리에 소문 나고 결국 약혼녀한테 파혼 당하고.
지노는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며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비장의 카드가 필요해.
* * *
“를르슈 전하! 저한테도 귀여운 사진 주세요!”
“다짜고짜 와서 인사도 안하고…. 시간이 넘쳐나나보군, 나이트 오브 스리.”
지노가 응접실에서 기다린다는 말에 오늘따라 여유로운 업무도 다 끝난 겸 문을 열었다. 그러자 넙죽 달려들어서 사진을 달라고 하는 지노에 를르슈는 냉정하게 밀어냈다. 하루 24시간 중에 나랑 스자쿠랑 있는 시간보다 너랑 스자쿠랑 있는 시간이 길겠지. 빌어먹을 나이트 오브 라운즈….
“앗, 인사를 안 했네요. 나이트 오브 스리, 지노 바인베르그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황자전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앉아라.”
“전하! 귀여운 전하 사진 주세요!”
“닥쳐라!”
메이드가 미리 준비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심신의 안정이 올까말까 하는 와중에 폭풍처럼 들이닥친 나이트 오브 스리, 대체 왜 왔는가.
“진짜 용건이 뭐야?”
“귀여운 전하의 사진… !”
“이제 때려야 말을 할 건가?”
“저, 정말로 그걸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우선 네 말의 오류가 있다. 내 사진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올거야. 그리고 난 원래 귀엽지 않아. 따라서 귀여운 전하의 사진이라던가, 전하의 귀여운 사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내 사진에 고양이를 적당히 합성하면 귀여운 고양이 사진이 인공지능 검색에 걸리겠지만….”
“전하는 귀엽습니다!”
“내 말을 좀 들어!”
결국 테이블을 쾅 내리쳐야 지노는 침착해진 듯 했다. 를르슈는 다시 빈 잔에 차를 따르며 인내를 다지며 물었다.
“여기까지 먼 걸음 행차하신 이유는?”
“어린 시절 전하의 사진을…. 어떤 각도에서도 귀여우니까요.”
“아직까지도 헛소리냐!”
“이쯤되면 전하께서 제가 왜 사진이 필요한 이유를 물어봐야죠!”
“아.”
지노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를르슈는 자존심이 상했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지노의 논리를 따져보지 못했군.
“그래, 왜 필요하지?”
“스자쿠 때문입니다! 스자쿠가 전하 사진에 승부를 조작하고 있어요!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할 일입니까, 그게! 전하 사진 한 장에 승패를 바꾸다뇨!”
“…나한테 따지지 말고 아버지께 말해라.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서 제명되게.”
“그럴 순 없죠! 그렇게 되면 스자쿠는 전하의 기사가 되잖아요!”
“넌 뭘 말하고 싶은거야?!”
“그렇게 마음껏 두들겨 패도 죄책감 안드는 상대는 스자쿠가 유일하다구요! 물론 한 대도 안 맞아서 짜증나지만!”
“이 자식이 지금!”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노가 대성통곡만 안했어도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전하까지 너무하세요! 세상에 제 편은 아무도 없는 거 같아요!”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는 지노를 두고 나갈 수 없어서, 를르슈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선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지노는 눈물을 훔치며 감사합니다, 하고 훌쩍거렸다.
“스자쿠를 이기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거기에 내 사진이 왜 쓰이는지….”
“어제 아냐가 사진 정리하면서 전하의 어렸을 적 사진을 보여줬는데, 스자쿠가 그 사진을 받는 대가로 모드레드에게 한 판 져주기로 했어요.”
“형편 없는 놈들이구나. 그래서 너도 똑같이 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기고 싶어요!”
“……그냥 아버지께 스자쿠를 제명하는 걸로.”
“그러면 스자쿠랑 두 번 다시 대련할 수 없잖아요!”
“아리에스에 와서 해라. 내 허락 하에 대련하면 되잖아.”
“저는 귀족에 나이트 오브 라운즈인데, 일개 황족의 기사가 저를 진심으로 상대할까요?!”
“일개 황족이라 미안하게 됐다.”
바인베르그도 힘들겠어. 아니, 오히려 막내라고 오냐오냐 키워서 이 모양이 된건가. 뚫린 입이라고 마구 지껄이는 지노에게 과자를 먹이면서 를르슈는 한숨을 삼켰다.
“내 사진이면 돼?”
“네! 아, 최대한 어렸을 적 사진으로 부탁드립니다.”
“어느 정도?”
“음, 아냐를 만나기 전 정도로 부탁드립니다.”
“…우선 앨범은 뒤져보지만 없을 수도 있어. 큰 기대하지 마라. 메일로 보내면 돼?”
“네, 전하!”
“…스자쿠한테 그렇게 이기고 싶어?”
지노는 방금 전의 울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
“당연하죠! 이건 남자의 자존심입니다!”
남자의 자존심을 왜 스자쿠한테 이기는 걸로 찾지?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스자쿠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이레귤러인데다가, 외국인이라서 귀족사회에 대해 딱히 눈치보일 것도 없고, 솔직히 KMF 조종 실력은 아마 비스마르크 경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남자랑 아군인 건 나쁘지 않지만, 진심으로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 아쉽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정기 시합 같은 걸로 부딪히면 실제로 엄청난 박력…!”
“스자쿠 본인에게 가서 떠들어라.”
“물론 말했죠.”
“…….”
좀처럼 솔직한 말을 하지 못하는 를르슈는 스자쿠를 직접적으로 칭찬하는 일은 드물었다.
“말했더니 아부해도 소용없고, 시끄럽다고. 약간 이런 점은 를르슈 전하랑 비슷하죠?”
“…스자쿠는 스자쿠다. 그래, 얼른 찾아볼 테니 너도 돌아가도록 해.”
“Yes, your highness!”
사진을 찾아야하나, 말아야하나. 를르슈는 응접실을 나가면서 괜한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지노는 스자쿠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고, 스자쿠는 그거에 지지 않게…. 그렇지만 스자쿠는 지금 내 연인이란 말이다.
기분 나빠. 아니, 질투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좀처럼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를르슈!”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시선을 한 번 주고 다시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노크는 왜 안하고 들어와?”
“긴급사안이니까!”
“슈나이젤 형님께 받은 일 중에서는 그런 건 없었는데.”
“지노가 왜 네 사진을 가지고 있어! 그것도 내가 본 적도 없는 거!”
“너는 요새 입만 열면 지노, 지노, 지노…. 지노랑 친한 건 알아도 네 1순위가 누군지 기억은 해?”
“를르슈잖아! 를르슈야말로 내가 1순위가 아니야? 어째서 지노한테!”
“1순위는 나나리다!”
“공동 1위라고 작년 생일 선물로 승급시켜줬잖아!”
“오늘 노크 안하고 들어온 시점에서 넌 2위다.”
“…….”
그 말에 스자쿠가 비겁하다고 중얼거렸다. 스자쿠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똑, 똑, 똑 하고 세 번 다부지게 문을 두드린 스자쿠는 를르슈의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을 정중하게 열고 들어갔다.
“무슨 일이지, 나이트 오브 세븐.”
“나이트 오브 스리가 전하의 사진을 불법 경로로 입수한 것 같습니다. 그의 경질을 황제 폐하께 아뢰려고 합니다.”
“내가 준 거다. 불법 경로가 아니다. 아버지께 사사로운 일을 알리지 마라.”
“…전하께서 직접 주신거라고요?”
“메일로 보냈으니 간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
“전하께서 그 아무리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고 하더라도 대가 없이 남에게 뭔가를 베풀지 않았겠지요. 바인베르그 경과 무엇을 할 작정이십니까?”
“난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닌데. 가끔은 대가 없이 베풀 줄도 안다.”
를르슈는 자기가 앉아있는 의자 근처로 다가오는 스자쿠의 발걸음에 뒤로 물러설 새도 없이 일어나야만 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이렇게 험하게 다루어진 적 없건만. 스자쿠는 를르슈의 멱살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지노에게 베풀 만큼의 친분이 있었나?”
“…놔라, 스자쿠.”
“무슨 일이 있어도 지노한테는 안 져. 그렇게 얻은 네 사진도 필요 없고.”
입술에 맞닿고 떨어지는 거에 키스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 키스를 하다니. 어지간히 나를 좋아하는군. 그걸 또 좋아하는 나도. 를르슈는 스자쿠가 멱살을 놓으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스자쿠는 그대로 집무실 밖을 나갔다.
그 주의 휴일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리에스는 드물게 평온했다. 나나리도 밖으로 외출을 나갔고, 를르슈는 혼자서 서재에 틀어박혀 시간을 죽였다. 식사도 대충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왜 스자쿠가 찾아오지 않는지 궁리했다. 원래라면 메일이라도 보내면서 오늘의 일정에 대해 말을 해줄 텐데.
사진을 준 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지노랑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도 지칠테고, 모드레드랑은 한 번 져준다고 했으니까 트리스탄이랑도 어깨에 힘을 빼고 싸우면 좋을 텐데. 그리고 갖고 싶어하는 내 사진도 갖고? 직접 주면 좋겠지만 동료들끼리 사이 좋게 지내는 것도 좋잖아.
내가 KMF를 타도 스자쿠의 상대는 될 수 없고, 아무튼, 난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스자쿠에게 다시 연락이 오지 않은 채로 일주일, 나나리는 어머니를 따라 여행을 떠나 텅 비어버린 아리에스에는 손님도 없었다. 나나리가 있었으면 아냐라도 불러서 스자쿠의 안부를…. 여동생을 수단으로 여겨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를르슈는 두 배로 일을 했다. 오전에 몰아서 일을 하면, 오후는 거의 어거지로 봤던 서류를 또 보는 일을 하던 중이었다.
“슈타트펠트 가의 영애가? 나를?”
“예, 전하.”
“그래, 우선 응접실로 모시도록.”
스자쿠도, 지노도, 아냐도 아닌 귀족가의 영애가 홀홀단신으로 아리에스에 찾아온 이유가 뭘까. 를르슈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드레스 차림의 제 또래의 아가씨가 다소곳한 인사를 하는 것에 를르슈는 괜찮으니 앉으라고 했다.
“카렌 슈타트펠트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슈타트펠트 가에 영애가 있다는 건 처음 들었는데.”
“뒤늦게나마 작년에 사교계에 데뷔하였습니다.”
“…뭐, 자세하게 알아서 뭘 하겠어.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는?”
“제 약혼자가 지금 일주일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
를르슈는 차를 마시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슈타트펠트 양, 난 황자야, 탐정이 아니다만.”
“아, 이미 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올해 초에 나이트 오브 스리인 지노 바인베르그 경과 약혼을 하게 되어서….”
“지노의 약혼자였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있었던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정기 시합 이후로 돌아오지 않고…. 그 이전부터 나이트 오브 세븐과의 시합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거 같았는데, 이번에도 그런 걸까요?”
“…….”
“전하께서 나이트 오브 세븐과 친하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나이트 오브 세븐께 너무 과한 시합은 삼가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선 정략이긴 해도 약혼을 했으니까요.”
지노도 돌아오지 않고, 스자쿠도 오지 않는다. 약혼녀가 걱정할 정도면…. 를르슈는 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전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이 귀족가의 영애가 원하는 것, 그리고 를르슈가 원하는 것. 이렇게 하면 해결될 지도 모른다.
“나이트 오브 스리의 실종에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군. 안 그래도 스자쿠…나이트 오브 세븐도 좀처럼 연락이 안 되어서 말이야. 지노도, 스자쿠도 소중한 아리에스의 인연이다. 바로 수배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카렌을 돌려보내면서 를르슈는 보던 서류들을 다 정리했다. 이제 일할 기분이 아니다. 어차피 급한 일도 없고. 급한 일은 지금부터니까. 를르슈는 [오늘 밤엔 나의 침실로 와라]라고 메일을 보냈다.
지노에게.
“전하, 들어가도 되나요? 저 빨리 가봐야 돼요.”
약혼녀의 연락엔 답이 없고 나에게는 바로 온다. 를르슈는 괜한 치정 싸움에 끼어든게 아닌가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들어오라는 말에, 꼬질꼬질한 차림의 지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왜 침실로 부르셨나요? 죄송하지만 140자 내로 간결하게 명령만 해주시고 저 빨리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왜 빨리 가야되는데? 내가 알기론 너의 일정은 앞으로도 비어있겠지만.”
“이제 스자쿠가 오니까요! 이러다가 죽어요, 저!”
억울해요! 스자쿠 한 번 이기겠다고 전하 도움 받았는데 이게 일주일 내내 싸울 일이냐고요! 저는 전하보다, 스자쿠보다 한 살이나 더 어린데 이 양심없는 사람들아! 지노의 속사포 같은 말에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진을 달라고 한 건 너잖아?”
“스자쿠한테 뭐라고 하셨길래 스자쿠가 사진도 필요없고 제 목숨이 필요하다는데요?!”
“…일주일동안 스자쿠랑 있었나?”
“저는 같이 있기 싫었거든요?! 근데 쫓아와서 패는데 어떡해요!”
“피하면 되잖아! 그리고 너, 슈타트펠트 양이 나를 찾아올 정도로 걱정하고 있는데!”
“카렌이…?”
지노의 눈동자가 그렇게 빛이 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감동젖은 눈동자는 눈물 한 방울 떨구기도 전에 박살이 났다. 정확히는 를르슈의 침실 문이 박살이 났다.
“를르슈! 내가 아니라 지노를 부르다니!”
“으악! 전하, 살려주세요!”
“비겁하게 를르슈 뒤에 숨지 마라, 지노!”
“비겁한건 스자쿠지! 이제 휴전! 종전합시다!”
총까지 들이미는 스자쿠도 만만치 않게 꼬질꼬질했다. 를르슈는 멀쩡한 얼굴과 다친 곳 없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완벽한 정리를 위해 우선 서로의 요구사항을 들어보자. 스자쿠, 지노에 대한 요구사항은?”
“죽었으면 좋겠는데요.”
“…지노, 스자쿠에 대한 요구?”
“살려줘요.”
“그럼 내 요구사항 물어볼 사람.”
“제가 하겠습니다. 전하.”
“그럼 그 총을 내려.”
“…….”
스자쿠는 총을 내렸다. 그리고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전하의 요구사항은 무엇입니까?”
“쿠루루기 스자쿠, 지노 바인베르그 너희 둘에게 묻는다.”
“네, 전하.”
“네, 전하.”
“둘이 사귀냐?”
스자쿠는 말없이 총구를 입에 물었다. 지노는 스자쿠가 쓰고 나도 쓸게, 하고 중얼거렸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에서 총을 아예 빼냈다. 그래, 너희 둘이 건전한 관계라는 건 알겠다.
“건전한 관계고 뭐고 그냥 동료입니다, 직장동료! 저는 곧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요!”
“그래, 알겠어. 자, 우선 나의 요구사항은 이미 해결됐어. 너네 둘은 사귀는 게 아니라고. 그럼 하나씩 풀어가자. 스자쿠, 지노가 죽었으면 하는 이유는?”
“를르슈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그리고 를르슈도 여지를 자꾸 주잖아!”
“억울합니다! 전하는 아름다우시지만 남자잖아요! 막말로 전하를 천만트럭 줘도 저는 싫어요!”
“그럼 스자쿠를 천만트럭 주면?”
“스자쿠도 남자인데…. 스자쿠가 천만트럭이면 뭐, 브리타니아의 군대는 앞으로 거뜬하겠네요.”
“스자쿠에 대한 호감은 있다는 거군. 그리고 넌 스자쿠에 대한 집착도 있다.”
“약혼녀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기 시합을 왜 그렇게 형편없이 지고 오냐고 자꾸…. 전하, 전 정말, 스자쿠를 한 번만 이겨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 마음이…제 사랑에서 오는 마음이 물론 스자쿠에 대한 사랑은 아니고요, 아무튼 결혼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살아야합니다.”
지노는 결국 바닥에 주저 앉았다. 집에 가고 싶어요. 씻고 싶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맛없는 과자를 주더라도 카렌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정말 를르슈에 대한 호감은 없어?”
“난 여자가 좋아…. 전하가 알몸으로 벗고 달려들어도 나는 여자가 좋아!”
“를르슈의 얼굴에 여자면?”
“미인에 나쁘진 않지만 우선 나는 약혼을 했어! 스자쿠! 그만해! 이 지긋지긋한 전하 바보야! 사진도 그냥 줬잖아!”
“…….”
“여자가 좋다고! 카렌이 좋아! 스자쿠도 전하도 이제 그만하세요! 둘이서 사랑하라고요!”
를르슈와 스자쿠 사이에서 엉엉 우는 지노는 바인베르그 가문의 차를 타고 돌아갔다. 스자쿠는 오랜만에 보는 를르슈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지금 좀, 더러우니까…. 빨리 씻을게.”
“…….”
“아니면, 오늘도 기분이 아니야?”
“침실 문이 박살이 났는데 하고 싶겠어?”
그제서야 스자쿠는 제가 부순 침실 문을 보며 아, 하고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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