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냈던 웹재록본 <아리에스의 호위>입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 X 아리에스의 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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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아리에스의 호위 2
후기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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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에스의 호위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써 어느 정도 전장에서 활약했다 싶을 무렵에, 쿠루루기 스자쿠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예전에 테러리스트의 습격이 있었던 아리에스 궁의 호위로 주 근무지가 바뀐 것에 스자쿠는 의아해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동원될만큼의 전투가 줄어들었다는 거니까 좋게 생각하라는 주위 사람들 말에 겨우 동의했다.
이름만 들었던 아리에스 궁까지 가는 길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사전조사를 한 바로는 이 궁의 주인이었던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가 다른 황후들과 다르게 나이트 오브 라운즈 출신이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녀의 자식들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점 말고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 일레븐 출신인 스자쿠를 꺼려할지는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의 명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들여보내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각오를 한 것과 다르게 아리에스 궁에 들어가는 건 수월했다. 집무실까지 단숨에 안내하는 메이드를 보며 스자쿠는 이제껏 안 하던 긴장을 하게 되었다. 문을 두 번 두드린다. 들어오라는 목소리에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오느라 고생했네, 나이트 오브 세븐.”
홍차를 따르고 있는 황자가 아마 이 아리에스 궁의 주인일 것이다. 스자쿠의 또래로 보이는 황자는 여유롭게 눈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하지.”
“예, 전하.”
자리를 권하는 것에 앉으면, 황자는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단정한 몸가짐과 다르게 수려한 외모가 스자쿠의 입을 다물게 했다. 아리에스 궁에 사는 황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드물었다. 지금 살고 있는 황족이 두 명 뿐이라는 이야기 말고는. 그 이름도, 그들이 하는 일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즉, 스자쿠는 지금 눈앞에 있는 황자 전하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저는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합니다.”
“경의 이름은 잘 알고 있지. 이례적인 넘버스의 출세로 유명하니.”
“…실례가 안 된다면 전하의 존함을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스자쿠의 정직한 질문에 황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입가를 가리면서도 호쾌하게 웃는 모습에 스자쿠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변명이 줄줄 나왔다. 저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아리에스 궁에 대해서는 대부분 기밀사항인지 알려진 것도 없고…. 스자쿠의 말에 황자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아, 너무 웃었나? 미안하군. 비웃은 건 아니었으니 나이트 오브 세븐의 넓은 아량에 기대어봐도 될까?”
“괜찮습니다.”
“나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라고 한다, 쿠루루기 경.”
“다른 한 분은?”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나의 여동생이지. 지금쯤 학교에서 열심히 부활동을 하고 있겠군.”
나나리는 어머니를 닮아서 운동신경이 뛰어나지. 황자—를르슈는 빈 찻잔에 다시 찻물을 부으며 키득거렸다.
“서민의 피가 섞인 황족 따위 펜드래곤에서는 취급도 안 하고 싶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군.”
“저에게 있어서는 존귀하신 분입니다.”
“말은 고맙군.”
“나나리 전하는 학교에 다니시나요?”
“응. 등하교 때에는 제레미아가 호위를 맡고 있고, 다른 귀족도 다니고 있는 학교이니 보안은 철저하다. 어떻게 보면 아리에스 궁보다 더 안전하지.”
스자쿠는 좋은 향이 나는 홍차를 들이켰다. 를르슈는 앞에 놓인 과자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모셔야 할 황족이 어떤 황족인가 싶었는데 큰 걱정은 덜어낸 기분이었다.
“를르슈 전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권력 끝자락의 황자라 하는 일은 드물지. 보통은 슈나이젤 형님께 온 심부름을 한다거나….”
“정무를 보시는군요.”
“그렇게 거창하지도 않아.”
를르슈는 다리를 꼬았다. 아직 딱딱하게 굳어있는 스자쿠를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리에스는 어떤가?”
“아름다운 궁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아는 것은?”
“아는 것이라고 해도…마리안느 님의 일 말고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
스자쿠의 대답에 를르슈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를르슈는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스자쿠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쿠키, 내가 구운 건데 한 번 먹어보는 게 어떤가? 방금 전부터 계속 먹어보라고 했는데. 그 말에 스자쿠는 허겁지겁 쿠키를 먹었다. 차도 마셔가면서 먹는 게 좋을 거다, 쿠루루기 경. 그 말에 이번엔 홍차를 단숨에 비웠다.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맛있습니다, 전하.”
“그래.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군.”
“…아리에스 궁의 호위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지. 한가롭게 티 타임이나 가지려고 온 게 아니니.”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아리에스 궁의 호위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제레미아가 지휘하는 부대가 궁의 후원부터 현관까지 다 살피고 있으며, 나나리의 등하교나 를르슈의 외출 시에는 제레미아가 함께 따라나선다는 것.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 암살사건 이후로 경비가 삼엄해지긴 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졌다는 것까지. 후원하고 있는 귀족들도 있고, 다른 연줄도 있으니 아리에스 궁의 재정상황 역시 썩 나쁘지 않다는 점도 를르슈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래도 제레미아가 불쌍하지. 혼자서 둘이나 돌보는 건.”
“그런가요…?”
“쿠루루기 경이 호위를 맡게 된다면 어디를 호위하고 싶은지 물어봐도 될까?”
하루 종일 후원을 살피는 것도 괜찮을거고, 현관 앞에서 누가 오나 안 오나 살피는 것도 재미있겠네. 를르슈의 말은 그럴듯 하면서도 그저 하는 말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도리어 를르슈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해드렸으면 좋겠습니까?”
그 말에 를르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하고 벌어지는 동그란 입술은 다시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당연히 나를 호위해줬으면 하지. 나이트 오브 세븐의 호위를 받을 기회가 어디 흔한가.”
그리하여 나이트 오브 세븐—쿠루루기 스자쿠의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호위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선 아리에스의 경호를 대대적으로 맡고 있던 제레미아와 인사를 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오다니 한 시름 놓았다는 제레미아의 말에 그동안 힘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나리 황녀 전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발랄한 황녀 전하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오라버니를 끌어안으려 달려들었다. 뒤에서 스자쿠가 를르슈를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를르슈와 나나리는 바닥에 뒹굴었을 것이다.
“혹시 이 분이 오라버니의 기사가 되신건가요?”
“아닙니다. 나나리 전하. 저는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 당분간 아리에스 궁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군요. 잘 부탁드려요.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입니다.”
자, 자. 나나리, 오늘도 숙제가 있을 거고, 하다가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를르슈는 나나리를 자기 방으로 올려 보냈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러 갈게요, 오라버니!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시작하고 10분 있다가 바로 내려올 거야.”
를르슈의 말처럼 나나리는 10분 있다가 바로 집무실에 내려와서 수학 문제를 물어보았다. 스자쿠는 집무실 한 구석에서 두 남매가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전쟁터에서 죽느냐 사느냐로 있는 것보다 더 피곤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일은 스자쿠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멍하니 나나리의 숙제를 돕는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게 되었다. 슈나이젤 재상 각하의 일을 돕고 있을 정도면 머리도 좋고 수완도 나쁘지 않다는 건데. 서민 출신 황후의 소생이라 그런가? 하긴 이 나라는 혈통을 따지는 게 도가 지나치지. 여동생이랑 단 둘이 단란하게 사는 것이 를르슈 황자의 목표인걸까? 욕심이 적다고 해야하나 무난하다고 해야하나. 어머니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출신이면 KMF을 다루는 능력도 나쁘지 않을 텐데. 코넬리아 전하처럼 전선에 나갈 생각은 없나? 뭔가 확실하게 입지를 굳히는 편이 더 안전할 텐데…. 그러고 보니 전임 기사가 없으신 것 같았고……. 유페미아 전하보다 나이가 많지 않으셨던가? 기사 후보로 지원할 사람이 없을 리가 없고…….
“쿠루루기 경, 내 얼굴에 구멍이 나겠어.”
“…아, 전하. 죄송합니다.”
“나나리, 나머지는 응용문제이니까 혼자서 풀 수 있을 거야.”
“네, 오라버니.”
나나리가 나가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는 기지개를 켰다. 조금 있다가 저녁을 먹을 거니 스자쿠에게도 같이 먹자는 이야기를 했다. 황족의 명령에는 대꾸할 수 없다.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사이에 아리에스 궁의 건물 내부를 구경시켜주겠다면서 를르슈는 스자쿠를 끌고 나갔다.
이쪽이 식당, 더 들어가면 파티 홀. 어차피 파티는 잘 안 열어. 테라스로 가면 티파티를 열 수 있는 공간. 더 이어지는 복도는 우리들이 사는 곳.
그리고…. 를르슈는 초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분이 마리안느 님이시군요.”
“대단한 사람이었지.”
“그러고보니 를르슈 전하는 마리안느 님을 많이 닮으셨군요!”
“…나는 왜 그 말을 들으면 칭찬으로 안 들리는지 모르겠어.”
“정말 미인이십니다. 두 분 다.”
“그런 칭찬은 나나리한테 해줘.”
“나나리 전하도 아름다우십니다.”
“…쿠루루기 경은 대체 어떻게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된 거야?”
입에 발린 말만 하는 거 같아. 를르슈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생활공간 쪽으로 들어가면서 를르슈는 문 하나를 열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이었다. 그러나 누가 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쿠루루기 경이 살 곳인데, 어때?”
“네?”
“호위를 맡는 동안 계속 출퇴근 할 생각이었어?”
“그런 게 아닌가요?”
“비효율적이야. 임시라고 해도 호위로 머무는 이상 여기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야. 폐하께 하사받은 저택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황족이 사는 곳이니 불편한 건 없을 거고.”
“전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나야 호위가 가까이 있을수록 안심이 되지.”
다음날 아침, 스자쿠는 별 것 없는 짐을 꾸려 아리에스 궁으로 출근했다. 제일 먼저 스자쿠를 반기는 것은 나나리였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아리에스 궁 주변을 열심히 뛰는 나나리의 주변에는 군인들이 따라 뛰고 있었다. 쿠루루기 경~ 좋은 아침이에요~ 나름 속도를 내면서 뛰면서도 소리 높여 스자쿠에게 인사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나나리 전하,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일과 중이십니까?”
“네. 학교 가기 전에 잠깐이에요. 오라버니는 안에 계실거예요.”
“같이 운동 하시는 게 아닌가요?”
“오라버니는 체력이…….”
“아아…….”
마저 러닝을 하겠다고 뛰어가는 나나리의 뒷모습에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어제 안내 받았던 대로 생활 공간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식당 쪽이 분주했다. 스자쿠는 식당보다 더 안 쪽,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무 고기만 넣는 거 같지 않아, 사요코?”
“나나리 전하는 성장기잖아요, 전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영양불균형……쿠루루기 경!”
“안녕하십니까, 전하. 그리고…….”
“메이드인 사요코입니다.”
“사요코 씨.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면 를르슈의 한숨이 이어졌다. 스자쿠에게 물었다.
“나나리의 점심 도시락인데, 고기가 너무 많지 않아?”
“어제 듣기로는 나나리 전하께서는 부활동도 하신다고 하시니 이 정도는 먹어야 힘이 나지 않을까요?”
“하긴. 덜 먹어서 군것질하는 것보단 낫지. 참, 쿠루루기 경은 아침 식사는 하고 온 건가?”
“아, 아직입니다.”
“그럼 같이 들지.”
따로 먹을 줄 알았는데 나나리와 를르슈, 그리고 스자쿠까지 셋이서 같이 먹었다. 나나리와 를르슈는 고기와 야채의 비율이 8:2인지 6:4인지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제레미아의 중재로 끝이 났다. 학교에 가는 나나리에게 다녀오라는 키스를 해준 를르슈는 집무실로 향했다.
무언가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황자와 꿔다놓은 보릿자루인 나이트 오브 세븐. 황제의 기사라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황제를 보필해본 적도 없기에 스자쿠에게는 를르슈가 첫 호위대상이었다. 뭘 하고 있어야한담. 멍하니 앉아있으면서 스자쿠는 를르슈를 관찰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이다보니 개선연회 같은 이유로 많은 파티에 불려 다니는 경우가 잦았고, 덕분에 많은 황족과 만났다.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인 슈나이젤을 필두로 그의 수하들과 얽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슈나이젤과 결이 다른 분위기의 황족들도 만날 때가 많았다. 눈에 보이는 기싸움부터 더럽고 추잡한 진창싸움까지 다 봤다. 그런 곳에 나다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황족은 아주 강력한 실권을 쥐고 있거나, 아니면 그런 곳에 나타날 가치도 없을 만큼 하찮은 황족이라던가.
눈앞의 를르슈는 슈나이젤의 선에 섰으니 실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왜 연회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사정을 알 수 없는 황자가 사는 궁의 호위로 갑자기 불려나간 것도 이상하고. 그리고 이렇게 평화로운 와중에 라운즈를 호위로 내보내는 것도….
“쿠루루기 경은 유로 브리타니아 전선에 나가본 적이 있다 그랬나? 내가 듣기론 그쪽에서 왔다고 하던데.”
“아, 네. 주로 그쪽에서 있었습니다.”
“역시. 명성이 자자하더군.”
“별로 좋은 의미의 명성이 아닙니다.”
“지금은 마무리가 어떻게 되었지?”
“아마 나이트 오브 스리와 폐하께서 직접 군사를 보내어 해결하신 걸로 압니다.”
“폐하께서 직접…?”
“네.”
흐음. 황자는 펜을 굴렸다. 종이를 넘기며 서명하는 를르슈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브리타니아의 황실 문장이 아닌 다른 문장이 새겨진 서류조각에 스자쿠는 의아했지만, 그것이 무엇이냐고 따로 묻기에는 호위가 하는 일 이상의 참견인 것 같았다.
“쿠루루기 경은 지루한가?”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다른 할 일이 있지 않나? 경은 특파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이잖아.”
“지금은 전하의 호위 중이니까 쉬어도 됩니다.”
“성실하군.”
특파의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니. 그렇다면 슈나이젤 재상 각하와 정말 긴밀한 사이라는거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스자쿠의 시선이 거슬릴 수도 있을 텐데, 를르슈는 태연하게 자기 일을 보았다.
초상화 속의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를 빼닮았다고 하더라도, 남자인 를르슈 쪽이 더 기품이 넘쳐보이고, 더 섬세하다고 해야하나. 아름다움을 따지자면 감히 비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마리안느 님보다는 를르슈 전하 쪽이….
“쿠루루기 경,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보인다.”
“…!”
“나이트 오브 라운즈 생활은 어떤가?”
“네?”
“지노나 아냐한테 경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별로 좋은 소리를 못 들어서. 그러니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면 어떨까 싶은 게 나의 생각인데.”
낯익은 이름들에 스자쿠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어서 어떻게 살았더라? 기억나는 건 전쟁터에서 뒹굴고 싸우고 그런 기억 밖에 나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지노와 아냐를 알다니.
“전하께서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와 친분이 있으십니까?”
“전원은 다 아니고, 원, 스리, 식스, 그리고 쿠루루기 경까지 세븐. 이 정도?”
“그럼…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대충 어떻게 사는지 다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자쿠는 파티장에서 여자 없이 혼자 나간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모녀를 쌍으로 유혹할 수 있는지 비결이 궁금하다.’ ‘잘 모르겠다고 웃으면서 손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수법이 능수능란.’”
“전하!”
“이건 지노가 한 말이다. 쿠루루기 경.”
지노! 스자쿠는 입을 뻐끔거리며 할말을 골랐다.
그러나 황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죄다 사실이었다. 파티장에서 여자 없이 나가본 적도 없고, 모녀가 쌍으로 꼬여서 스자쿠를 두고 치정싸움을 한 적도 있었고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손으로 이미 온갖 짓을 다해본 건 사실이었다.
결국 할 수 있는 변명은 하나 밖에 없었다.
“이젠 손 씻었습니다, 전하. 젊었을 때의 치기라구요.”
“뭐, 쿠루루기 경의 혈기왕성함을 탓하는 건 아니지. 같은 또래인데 신기해서 그래.”
“피곤할 일이 늘어날 뿐입니다.”
“너무 기죽지 마. 그냥 사실이 궁금해서 그랬을 뿐.”
황자는 서류를 다시 보면서 키득거렸다. 쿠루루기 경은 재미있는 사람이야. 칭찬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아리에스 궁. 하는 일이라고는 일하는 황자 전하를 보는 것이 전부인 호위 임무.
하지만 이 황자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이다.
* * *
월요일. 를르슈 황자는 마카롱을 만들었다. 파는 것보다 더 맛있었다. 더 먹으라는 말에 노력했지만 너무 달아서 몇 개 못 먹고 포기했다. 쿠루루기 경은 근성이 부족하군! 남은 마카롱을 포장하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 그런 고칼로리 간식을 근성으로 다 먹었다가는 몸이 둔해집니다! 를르슈는 대꾸하는 스자쿠를 보며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보듯 했다. 학교를 마치고 온 나나리가 마카롱이 있다는 소식에 교복을 벗지도 않고 바로 티타임을 가졌다. 그 단 것이 물리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나나리의 입에 들어가는 마카롱이 신기했다. 옆에서 찻잔이 비지 않도록 봐주던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나나리, 그런 고칼로리 간식을 다 먹었다가는 몸이 둔해진다고 쿠루루기 경이 그러는데.”
그 말에 나나리는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아니, 저는, 그런, 아니, 전하! 를르슈에게 도와달라는 듯이 쳐다보면 를르슈는 강 건너 불 구경이었다. 나나리는 먹을 거로 그렇게 면박주는 거 만큼 치사한 게 없다면서 스자쿠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나나리 전하는 활동량이 많으시니까 더 드셔도 됩니다. 저야 하는 일이 없어서 많이 먹어도 소용이 없다는 뜻에서….”
스자쿠의 첨언이 마음에 드는지 나나리는 다시 기분 좋게 마카롱을 먹었다. 오라버니가 만든 과자를 먹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가끔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나눠먹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다들 부러워해요. 나나리의 를르슈 자랑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화요일. 를르슈가 주방에서 나나리의 도시락을 만드는 동안 할 일이 없어서 나나리와 조깅을 함께 뛰었다. 전하를 혼자 둬도 되냐고 물어보았더니 사요코도 훈련받은 SP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오랜만에 몸을 풀었다. 나나리의 페이스에 맞춰서 뛰느라 조금 느린 속도였지만 나쁘진 않았다. 수분 보충 중에 나나리가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이정도로 뛰었으면 어제 먹었던 마카롱은 살로 안 가겠죠?”
“맛있게 드셨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왜 맛있는 건 먹고 나면 살이 찔까요? 쿠루루기 경은 어떻게 관리하나요?”
“저는 군인이니까 나나리 전하와는 또 경우가 다릅니다.”
수요일. 아리에스 궁에 손님이 찾아왔다.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의 등장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대동하는 다수의 호위가 아닌 카논 말디니 한 명 뿐이었다. 슈나이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은 아니지만, 대부분 연회에서 스쳐 지나가듯 하는 대화가 고작이었다. 를르슈의 명령으로 차를 마실 트레이를 준비한 스자쿠는 긴장으로 몸이 굳어버릴 것 같았다. 슈나이젤의 일을 돕고 있다고 할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라니. 노크를 두 번 하고 들어오라는 말에 들어섰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이트 오브 세븐은 아리에스에서 잘 적응하고 있나?”
“쿠루루기 경은 훌륭한 인력입니다.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다행이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를르슈가 홍차를 내오고, 슈나이젤은 여전히 훌륭한 솜씨라고 칭찬해주었다. 칭찬을 들은 를르슈는 별로 기뻐보이지 않았다.
“유로 브리타니아에서의 일이 완전히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아, 쿠루루기 경이 알려주었나?”
“예.”
“그래, 그곳은 나이트 오브 세븐의 전장이었으니 숨길 것도 없지.”
원래 자신이 있던 곳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긴 했다. 스자쿠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이트 오브 스리도 활약한 듯 했지만 사실상 킹슬레이 경의 공이 컸다.”
“…그렇습니까?”
“귀국하면 그를 위한 축하 연회가 열릴 것 같은데, 를르슈는 이번에도 참석하지 않겠지?”
“할 리가 없죠.”
“나나리도 못 오게 할건가?”
“형님은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찻잔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슈나이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돌아가는 길까지 정중하게 배웅한 스자쿠는 응접실에 남아있는 를르슈를 떠올렸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가 참석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유로 브리타니아의 일을 생각했다. 지지부진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던 와중에 스자쿠는 본국 귀환이라는 명령을 받고 돌아왔고, 스자쿠를 대신해 지노와 새로운 군사가 투입되어 상황이 종료가 된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공적을 치하하는 자리가 될 터이니 스자쿠에게도 참석 명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럼 아리에스의 호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스자쿠는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으니.
목요일. 진짜로 초대장이 들이닥쳐서 스자쿠는 머리를 싸맸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서 참석할 때에는 정복을 입고 참석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에 따르는 수많은 피곤한 일들을 생각하면 스자쿠는 한숨부터 나왔다. 스자쿠는 초대장을 대충 품에 넣고서는 를르슈가 있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할 일이 별로 없다고 해놓고서는 황자는 시간만 나면 일을 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제 몫으로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또 무슨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이 시작되었다.
“쿠루루기 경.”
“네, 전하.”
“심심하지?”
“네?”
“알고 있어. 여기 오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들은 지루해서 미치려고 하는 걸.”
를르슈는 서명하고 있는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 말을 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와 친분이 있는 건 다들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아줬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암살 사건 이후로 나이트 오브 원이 오랫동안 아리에스를 지켜주었지. 그리고 나이트 오브 스리, 식스…….”
“그 다음은 저였군요.”
“어차피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격이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지키고 있다 한들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지 않아.”
“…….”
“이렇게 아리에스는 평화로운데 어떻게 암살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리에스 궁에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드나든다는 소문이 돌면,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또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그래서 아리에스 궁에 사는 황족에 대한 것은 다 기밀사항처럼 다뤄졌다는 걸, 스자쿠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서류 작업이 끝난 것인지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자쿠도 덩달아 일어났다. 어디로 가십니까? 후원 산책 좀 할거야. 따라가겠습니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쿠루루기 경.”
“네?”
“나이트 오브 스리의 축하 연회가 있지 않나? 참석하지 않아도 돼?”
“아, 알고 계셨군요.”
“모르고 싶어도 들리는 소식들이 너무 많아서.”
“…참석해야겠죠.”
“파티장에 여자 없이 혼자 나온 적이 없다는 쿠루루기 경이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전하, 이제 그만 놀리세요.”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한숨에 뒤를 돌아보았다.
“가게 되더라도 귀찮은 일이 엄청 많을 거고, 또 제가 없는 동안 아리에스의 호위는 누가 합니까?”
“원래 쿠루루기 경의 일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였고, 아리에스의 호위는 제레미아가 원래대로 다시 해줄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
“아냐가 말하기로는 쿠루루기 경은 춤도 엄청 잘 춘다는데, 스텝도 한 번도 틀린 적 없고.”
“창피를 당할까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가기 싫은가보군.”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놓고 치근덕거리는 인간들과 일레븐 출신이라는 경멸, 동시에 사람을 신기한 짐승 보듯 하는 호기심 섞인 시선.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는 지위를 등에 업으면서 더욱 심해지는 그런 것들에 스자쿠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를르슈가 연회가 열리는 토요일에 스자쿠에게 무언가의 임무를 맡긴다면 스자쿠는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를르슈는 정말 싫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스자쿠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참석해. 재미있는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금요일. 를르슈와 집무실에 있는 중에 사람이 들어왔다. 멍하니 있는 것보다 책이라도 읽으라면서 를르슈가 소설책을 쥐어주었기에 책을 읽고 있던 스자쿠는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족의 집무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불경을 넘어서 목을 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스자쿠가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를르슈는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마른 세수부터 했다.
“를르슈, 내가 왔다. 피자를 대령해라.”
긴 머리의 아름다운 미녀가 황자의 집무실에서 피자를 먹는 모습에 어떤 감상을 남겨야할까. 스자쿠는 책을 읽는둥 마는둥 하며 그 미녀를 바라보았다. 나잇대는 를르슈와 제 또래 같았고, 황족이라고 하기에는 경박하고, 그렇다고 해서 황족인 를르슈를 마음대로 부리는 건…황족이라는 건가? 하지만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알아야 하는 황족 중에 이런 여자는 없었다.
“너는 이번에 새로 온 나이트 오브 라운즈구나.”
여자는 피자 한 조각을 금세 해치우고는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
“나는 C.C. 우선은 마녀.”
“……?”
“유로 브리타니아는 피곤하더군. 황족 전용 열차를 타도 피자 굽는 화덕이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를르슈? 앞으로 개선하도록 건의해.”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 대화였다. 스자쿠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를르슈는 또 새로운 피자가 담긴 피자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내가 건의한다고 열차 내부가 바뀌겠어?”
“너는 슈나이젤이 물고 빠는 동생이니 가능할 것이다.”
“내가 살아있을 때 너를 황실 모욕죄로 감옥에 하루라도 가두고 싶다.”
“감옥이라니 를르슈의 취향은 고약한 걸. 그런 취향 받아주는 여자는 찾기 어려울 텐데.”
“한 마디만 더 하면 여기에서 쫓겨날 줄 알아.”
“여자가 아니면 남자인가?”
“당장 나가!”
진짜로 복도로 쫓겨난 C.C.와 덩달아 쫓겨난 스자쿠는 멍청한 얼굴로 서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쫓겨난 것이 익숙한지 C.C.는 피자 박스를 들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를르슈 전하의 지인인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아리에스의 외부인이니 감시는 해야겠지.
스자쿠는 C.C.의 손에 들린 피자 박스를 같이 들어주었다. 눈치가 빨라서 좋군, 나이트 오브 세븐. 우선은 칭찬 받았다.
“전하와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샤를이랑 맞먹는 사이다.”
“…황제 폐하랑요?”
“그리고 를르슈네 엄마랑 친한 사이고, 뭐, 사정을 말하면 복잡하고 길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알아도 소용없고.”
“…그렇습니까. 방금 전에 듣기로는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오신 것 같았는데, 혹시 황제 폐하가 새로 뽑으신 군사님이 혹시.”
“난 아니다.”
복도 한 중간에 있는 문을 연 C.C.는 ‘여기라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처음 들어오는 방이었다. 사용인이 쓰는 방이라고 하기에는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구조도 낯익었다. 스자쿠는 피자 박스를 내려놓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여기는…를르슈 전하의 방과 비슷하군요.”
“쿠루루기 스자쿠.”
“네?”
“피자를 더 가져와. 아, 오는 김에 피클도. 목이 막히니까 콜라도.”
또 쫓겨났다. 스자쿠는 피자를 어디에서 조달해야할지 몰라서 우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늘 여유로운 를르슈 전하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흠, 의외의 모습. 스자쿠가 식당까지 걷고 있으면 맞은편에서 를르슈가 나타났다.
“쿠루루기 경, 방금 전엔 미안해.”
“아닙니다, 전하. 특이하신 분이네요. 전하의 지인이십니까?”
“어머니의 친구인데…오랜 사정이 있어 아리에스에 묵는 경우가 많아.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아. 같이 말을 섞고 있으면 이쪽도 질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고…….”
“전하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
“흉한 꼴을 보였네. 그래서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어?”
를르슈에게 그녀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자, 를르슈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방에 있단 말이지? 를르슈는 자기 집무실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피자는 식당에 있을거야, 원하는 만큼 갖다주도록 해. 내 호위는 제레미아를 부를 테니 너는 C.C.의 시중을 들어. 방금 전보다 더 가라앉은 를르슈의 분위기에 스자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식당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토요일. 오전까지만 아리에스에서의 호위를 하고, 오후부터는 중앙 연회장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해야했다. 오랜만에 걸치는 망토가 걸리적거렸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제대로 된 정복 차림이 오랜만이라 신선한 듯 했다. 스자쿠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스자쿠는 예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를르슈 전하께서는 파티나 연회를 별로 안 좋아하십니까?”
“내가 나타나면 격이 떨어진다고 하는 놈들이 태반이라 가고 싶지도 않아.”
“나나리 전하는요?”
“친한 황족이나 귀족의 파티에만 참석시키고 있어.”
“철저하시네요.”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을 뿐.”
오늘의 주역이 누구인지 알아? 스자쿠는 읽고 있는 소설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대답했다.
“지노랑…이번에 새로 폐하께서 뽑으셨다는 군사님이시죠. 아마도 그 군사님을 위한 자리인 거 같습니다.”
“그 군사에 대해서 아는 건?”
“없습니다. 사실 어제 C.C.씨가 그 군사님이 아닌가 했는데, 아니시라고….”
“다른 말은?”
“피자를 엄청 드시던데요.”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나나리한테는 오늘 연회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줬으면 하는데. 황족의 부탁은 곧 명령이었다. 스자쿠는 알겠다고 말했다. 를르슈는 오늘따라 더욱 더 길게 정무를 보았고, 스자쿠가 가보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 서류를 붙잡고 있었다. 제레미아가 조금 늦게 도착한다는 말에 스자쿠는 더 있다 가겠다고 했지만 를르슈는 극구 스자쿠를 보내버렸다.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제레미아가 아리에스에 잘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자쿠는 안심했다. 중앙 연회장은 몇 번을 가도 어지러운 곳이었다. 끝도 없이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는 자체가 거부감이 들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의 등장에 회장은 잠시 조용해졌다. 파트너 없이 홀로 참석한 스자쿠는 오늘의 주역에게 다가갔다. 멀리서 봐도 우뚝 서있는 커다란 키 덕분에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었다.
“스자쿠!”
“지노, 귀환을 축하해.”
“하하하, 고마워. 스자쿠가 열심히 밥상 차려 놓고 우리들은 숟가락만 얹은 느낌이었지.”
“숟가락만 얹은 것 치고는 빠르게 끝냈던데.”
“아, 그건….”
“네가 쿠루루기 스자쿠?”
스자쿠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흑발, 자안, 낮은 목소리, 수려한 외모와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 지지 않는 기백. 여유롭게 웃는 그 모습까지. 다른 점이라고는 왼쪽 눈의 안대 말고는.
“줄리어스 킹슬레이다.”
“…소문의 군사님이시군요.”
“쿠루루기 스자쿠, 네가 열심히 싸워왔던 덕분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 드디어 감사의 인사를 하는군.”
“아닙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써 할 일을 했을 뿐.”
“브리타니아의 하얀 사신은 겸손하기도 하군.”
줄리어스 킹슬레이?
황족의 특징인 자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닮은 황자가 아리에스에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둘이나 있을 수 있나?
스자쿠는 인사를 마쳤다는 명목으로 연회장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킹슬레이라면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이고, 또 황족과 연관이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하대하는 모습이나 그런 것은 완벽한 황족의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스자쿠.”
“…아냐, 오랜만이네.”
“아리에스 궁의 호위를 맡았다며?”
“응.”
달라진 것 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냐는 드물게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스자쿠의 얼굴, 엄청나. 그 말에 스자쿠는 겨우 얼굴을 매만져서 표정을 풀었다. 조금 놀라서 그래. 놀랐어? 아냐의 차분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줄리어스랑 를르슈 전하는 쌍둥이니까.”
“…?”
“누가 형이었는지는 기록을 봐야 돼.”
“잠깐만, 쌍둥이?”
연회장의 가장 중앙에서 건배사를 외치기 시작하는 줄리어스. 스자쿠는 떨떠름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오늘 같은 날 연회를 베풀어주신 황제 폐하께! 줄리어스의 건배사는 황제에 대한 열렬한 고백이었다. 나도 저런 건 못하는데. 스자쿠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누가 형인지 기록을 보겠다던 아냐는 어느새 사라져있었고, 스자쿠는 눈앞의 줄리어스와 머릿속의 를르슈를 분리하는데 온갖 힘을 썼다.
* * *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에 스자쿠의 혼란스러움은 절정을 찍고 있었다. 미친듯이 부어라 마셔라를 하고 있는 줄리어스 킹슬레이의 모습과 아리에스 궁의 부엌에서 열심히 타르트 반죽을 빚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분리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안되겠다. 이제 진짜 한계다.
들어간 술도 술이지만 정의할 수 없는 이 혼란스러움은 대체. 평소라면 같이 있는 지노와 아냐는 또 어디로 갔는지. 그 녀석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말을 안 했다는 건가? 스자쿠가 시종을 불러 돌아가겠다고 하자 금세 차가 도착했다. 오늘의 주역인 지노와 줄리어스 킹슬레이에게 말을 하지 않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 혼란 속에 예의를 차릴 정신이 없었다.
아리에스로 향하는 차는 부드럽게 움직였고, 스자쿠는 아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줄리어스와 를르슈는 쌍둥이. 쌍둥이라면 황족이라는 것이고, 둘은 형제라는 뜻인데. 분위기는 닮았어도 그래도….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지노나 아냐를 붙잡고 물어봐야겠다. 전하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무언가….
“쿠루루기 경? 많이 취했나?”
언제 열린건지 모를 차 문과 고개를 숙이며 저를 부르고 있는 것은 를르슈 황자였다. 스자쿠는 예의 반사신경으로 바로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죄송합니다, 전하. 괜한 일을 하시게 만들어서….”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밤 공기를 쐬고 싶어서 나왔는데.”
“제레미아 경은 어디에….”
“제레미아 몰래 나온거니 비밀로 해줘.”
아침부터 도시락을 쌀 때 황족답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한 번 테러리스트의 습격이 있었던 궁의 주인으로써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스자쿠는 저를 보며 반갑게 웃는 를르슈의 얼굴에 결국 한숨만 쉬었다. 스자쿠는 왼쪽 무릎을 굽히며 경례의 자세를 갖추었다. 를르슈의 하얀 손등에 입을 맞추며 예를 갖추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 지금 아리에스 궁에 돌아왔습니다.”
“쿠루루기 경은 참 고지식하지. 취했을 때까지 이렇게 하다니.”
“전하께서 너무 느슨하신겁니다. 좀 더 경계를….”
“나이트 오브 세븐이 돌아왔으니 경계할 것이 또 뭐가 있겠어?”
스자쿠는 셔츠 한 장 차림으로 밖을 나온 황자를 보았다. 밤 산책은 더 하실건가요?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자쿠는 제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복과 다르게 고정할 곳이 없으니 그냥 담요처럼 두르고 있어야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셔츠 차림보다 훨씬 따뜻할 것이다.
“전하께서 감기 걸리시면 안 되니까요.”
“그럼 경은?”
“저는 지금 술도 마셨고 원래 체온이 높아서 걱정 없습니다.”
“……돌아가면 바로 돌려주지.”
“편하실 때 돌려주셔도 됩니다. 아마 연말까지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대동되는 식은 없으니까요.”
두 사람은 밤의 후원을 걷기 시작했다. 희미한 풀 냄새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스자쿠에게 그 정취를 즐기는 것은 어려웠다. 줄리어스 킹슬레이,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똑같은 두 얼굴에 다른 이름, 다른 신분. 스자쿠가 말없이 를르슈의 보폭에 맞춰 걷고 있는 와중에 를르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이트 오브 스리와 황제 폐하의 새 군사는 어땠어?”
이 황자는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스자쿠는 미간을 찡그렸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할 지 몰라서 말을 고르고 있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진지해지는 얼굴에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고민하지 마, 쿠루루기 경. 스자쿠는 저에게 하는 를르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줄리어스 킹슬레이 때문에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를르슈 전하랑 정말 똑같이 생기신 분이라 놀랐습니다.”
“내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런 일은 미리 언질을 주시면 좋겠는데요.”
“왜인지 모르지만 다들 비밀로 하고 있길래, 나도 비밀로 했을 뿐.”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후원을 돌아본 두 사람은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아냐가 두 분이 쌍둥이 형제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나나리 전하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지. 그런데 어째서 킹슬레이 경과 전하는 다른 성과 신분을…. 그 놈은 그렇게 하고 싶어했고, 나는 이러고 싶었을 뿐. 아리에스 궁에 머무른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까? 지노와 아냐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 이전부터 아리에스 궁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지.
“저만 몰랐던 거군요.”
“이제 알게 되어서 속이 시원하지?”
이제라도 알려줘서 고맙다고 해야하나. 스자쿠는 황족 앞에서 감히 한숨을 쉬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를르슈는 망토를 세탁해서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스자쿠는 편하신대로 하시면 된다고 말했다. 쿠루루기 경, 그럼 이거 내가 가져도 되나?
“촉감이 맘에 드십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가지셔도 됩니다.”
어차피 정복은 몇 벌이고 있으니. 스자쿠는 를르슈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연회장에서의 혼란스러움과 아리에스 궁에 도착했을 때 한 명의 호위도 없이 혼자서 밤 산책이나 하고 있는 황자 때문에 술 기운이 돌다가도 다 깨버렸다. 씻어야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스자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일요일. 황족도 쉬는 일요일이다. 호위의 임무도 쉬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어제의 술기운 때문에 몸이 무거웠다. 스자쿠는 겨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직 스자쿠를 찾으러 오는 메이드가 없는 걸 보니 호위해야 할 를르슈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복도를 걸으며 기지개를 길게 켜고 있는 중에 의외의 인물을 마주했다. C.C.였다.
“쿠루루기 스자쿠, 전할 말이 있다.”
햇빛이 잘 드는 후원. 티타임을 위해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피자가 두 조각. 를르슈가 아끼는 찻잔에는 얼음 동동 띄운 콜라. 차를 잘 내리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스자쿠는 그냥 맹물을 마시기로 했다. 스자쿠를 이 자리에 불러낸 C.C.는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를르슈가 어느덧 이렇게 커서 남자를 데려올 줄이야….”
“네?”
“마리안느가 갑작스럽게 죽고 나서 평생 나나리랑만 살겠다고 할 때는 정말 놀랐지만, 나름 마음에 드는 남자도 고르고…. 를르슈는 성격은 나쁘지만 얼굴만큼은 마리안느를 닮아서 훌륭한 미인이니 질리진 않을 거고. 나이트 오브 세븐의 소문을 들어보니 남자도 개발시킬 만큼의 기술은 있…”
“대체 무슨 말을…!”
누가 들으면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황실 모욕이다. C.C.는 황제와 막역한 사이일지라도 스자쿠에게는 모셔야할 주군이었다. 제발 아무도 안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스자쿠는 컵 속의 물을 단숨에 비웠다.
“알아보니까 지금까지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들은 아리에스 궁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는데, 너는 아니더군.”
이제야 좀 정상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저는 황제폐하의 명을 받고 온 것뿐이라…킹슬레이 경의 이야기도 어제 겨우 알았습니다.”
“줄리어스도 손이 많이 가는 아이라 샤를이 고생하고 있지. 이번 유로 브리타니아에 나까지 다녀왔으니.”
“킹슬레이 경은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된건가요?”
“무엇이? 왼쪽 눈? 아니면 황위 계승권을 반납한 것?”
그러고 보니 그 안대도 인상적이었다. 스자쿠는 둘 다라고 대답했다. C.C.는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가 다 먹을 때까지 스자쿠는 마른 침을 삼키며 기다려야만 했다.
“왼쪽 눈은 예전에 다쳐서 그런 것이고, 황위 계승권은 샤를이 너무 좋아서 버렸다, 라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다.”
“…네?”
“황족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될 수도 없으니 포기한다고 황위 계승권을 버렸지. 황제폐하의 수족이 되어서 누구보다 가장 마지막에 살아남는 것이 그 녀석의 비열한 속셈이다.”
마지막 말은 를르슈였다. 를르슈는 자기가 아끼는 그릇으로 또 피자 따위를 먹는데 쓴다고 C.C.에게 잔소리를 했다. 를르슈의 등장에 스자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C.C.는 피자로 아침을 먹는다고 치더라도, 쿠루루기 경은 물 한 잔으로 아침이 될까?”
“아, 그건 좀….”
“모처럼 날씨도 좋으니 여기서 식사를 하기로 했어. 나나리도 곧 내려올 거니까.”
“준비를 돕겠습니다.”
“고맙군.”
“를르슈, 피자를 더 가져다줘.”
C.C.의 말은 식당으로 같이 돌아가는 길에 를르슈가 이를 갈게 만들었다. 스자쿠는 줄리어스 킹슬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괜히 입을 다물었다. 트레이에 아침식사를 옮겨 담으면서 후원 쪽으로 같이 걸어가게 되었다. 평소보다 간소한 차림의 를르슈를 보고 있자니 일요일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C.C.가 하는 말은 귀담아 듣지 마. 대부분 헛소리다.”
“아, 조금은 인정합니다.”
방금 전에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면 남자도 개발시킨다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떠올리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그 녀석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그 녀석?”
“나랑 똑같이 생긴 놈.”
줄리어스 킹슬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진짜 직접 물어봐도 되나. 스자쿠는 눈을 굴리다가 를르슈와 눈이 마주쳤다.
“궁금한 게 있잖아.”
“있긴 합니다만….”
“뭔데?”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신 건가요?”
“남은 가족들을 다 버리고 혼자 출세하겠다는 놈을 왜 좋아해?”
아하.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싫어할 것 같진 않은데. 스자쿠는 그런 것을 따지려다가 후원에 다 도착한 것에 질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노란 원피스 차림의 나나리가 밝게 인사했다. 음식을 나누며 햇살과 함께 맛보는 일요일 아침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 * *
남은 하루는 왜인지 모르지만 다 같이 모여서 보드게임을 했다. 를르슈가 산 땅의 주가가 폭등해서 스자쿠는 빚더미에 올랐다. 주사위에 무슨 장치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스자쿠가 굴리는 주사위는 죄다 를르슈의 땅에 걸려들었다. 진짜 돈으로 게임을 했다면 랜슬롯을 고물상에 갖다 팔아야할 정도로 참패를 당한 스자쿠를 나나리가 위로했다. 오라버니는 게임에 강하시거든요. 그렇지만 쿠루루기 경 덕분에 꼴찌는 면했네요! 마지막 말은 위로가 아닌 것 같았다.
얌전히 글만 읽는 황자인 줄 알았는데, 비록 게임이었지만 투기와 도박에 도가 튼 것 같았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공격적인 자세에 놀란 나머지 줄리어스 킹슬레이에 대한 것도 잊어버렸다. 고작 보드게임이었음에도 스자쿠는 랜슬롯의 조종석 장갑을 뜯어서 고물상에 파는 꿈까지 꿨다.
월요일의 해가 밝았다. 군대 내 비리를 저지른 꿈을 꾼 스자쿠는 나나리와 함께 달리면서 청렴한 나이트 오브 세븐의 마음 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축을 더 해야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언제 를르슈 전하에게 빚을 질 지 모른다.
“오늘 쿠루루기 경 속도가 너무 빨라요!”
“죄송합니다, 나나리 전하.”
“내일도 이렇게 뛸건가요?”
“내일은 전하의 속도에 맞춰서 뛰겠습니다.”
“아니에요. 경의 속도에 내가 맞출게요. 승부욕이 생기거든요.”
제가 진심으로 달리면 전하는 심장이 터져 죽습니다, 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 했다. 아리에스 궁의 황족들은 사람을 묘하게 풀어지게 만들었다. 스자쿠와 나나리는 궁 안으로 들어가며 오늘의 아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식당을 지나가면 를르슈가 사요코와 함께 나나리의 도시락을 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기가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샐러드를 더 넣으면 안 되나? 그럼 너무 많아? 정말이네, 뚜껑이 안 닫혀. 를르슈의 목소리가 진지해서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다 같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C.C.는 며칠 간 자리를 비울 테니 울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대체 누가 운다는 이야기인지 몰라서 스자쿠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입을 연 것은 를르슈였다.
“나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는데 대체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거냐.”
“마리안느가 나갈 때마다 울었으면서.”
“그건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동안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게 를르슈의 인성을 망쳐놓은 느낌이 든다. 미리 사과하지, 쿠루루기 스자쿠.”
를르슈의 손이 분노로 덜덜 떨리는 것에 스자쿠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지 나나리는 제 몫의 식사를 마치고 등굣길에 나섰다. 를르슈의 다녀오라는 키스를 받고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아리에스 궁을 나서는 황녀의 모습이 진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오늘의 황자 전하는 또 무슨 일을 하실까. 스자쿠는 를르슈가 집무실 쪽으로 가는 것을 뒤따랐다. 나는 또 뭘 하지. 지난 번에 읽었던 소설책은 또 어디까지 읽었더라. 스자쿠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를르슈가 말을 걸었다.
“오늘은 일하지 말까, 쿠루루기 경.”
“…네?”
“할 일도 없고, 읽고 싶은 책도 없고.”
“그러십니까….”
“요리나 할까.”
식당 쪽으로 몸을 돌리던 를르슈는 다시 몸을 돌렸다.
“아침을 먹은지 얼마 안 되서 뭘 만들고 싶지도 않아.”
“…….”
“과자를 만들어도 쿠루루기 경은 단 걸 많이 먹는 편도 아니라서 보람도 없고.”
“…많이 못 먹어서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진짜로 할 일이 없어. 를르슈는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스자쿠는 외출이라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나가서 따로 해야할 일도 없다. 쇼핑하는 취미도 없고.”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아쉽네요.”
“날씨가 좋긴 해.”
피크닉이라도 갈까. 를르슈는 말을 그렇게 꺼내놓고는 아예 작정한 듯 했다. 방금 전까지는 외출은 안 한다고 했으면서 피크닉이라니. 스자쿠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를르슈는 아리에스의 후원이라고 말했다.
“전하 혼자서요?”
“쿠루루기 경도 따라와야지. 지금은 나의 호위가 아닌가?”
“저랑 피크닉을 가신다고요?”
“의외로 말이 많구나, 쿠루루기 경.”
사요코에게 돗자리를 받아온 스자쿠는 앞장 서는 를르슈의 뒤를 따랐다. 지난번 밤 산책에서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선 를르슈는 돗자리를 폈다. 워낙에 스스로 하는 일을 잘하는 황자라 스자쿠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신발을 벗고 자리에 앉은 황자는 길게 숨을 골랐다.
“피곤하다.”
“얼마나 걸으셨다고….”
“C.C.의 그 경망한 말버릇이 옮은 건가, 쿠루루기 경.”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하의 체력은 정말 상상 이상이군요.”
“괘씸죄로 한 대 때리게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스자쿠는 웃으며 사과했다. 그 웃는 얼굴에 를르슈도 넘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스자쿠에게 앉으라고 하는 건 진심인듯 했다. 왜 앉지 않아?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애매한 얼굴을 지었다.
“저는 지금 전하의 호위 중이니까요.”
“나는 경이랑 피크닉을 즐기고 싶은데.”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계속 거기 서 있을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다리 안 아파?”
“저는 군인입니다. 몇 시간이고 보초를 설 수 있어요.”
를르슈는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았다. 집무실에서의 상황과 반대가 되자 스자쿠는 그 시선이 왜인지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를르슈의 빤한 시선에 결국 고개를 돌린 것은 스자쿠였다. 를르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쿠루루기 경은 정말 인상이 좋아.”
“칭찬 감사합니다.”
“사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아리에스 궁에 온다고 했을 때 좀 놀랐어.”
이쪽의 특수한 상황을 아는 사람들만 아리에스의 호위로 왔으니. 나이트 오브 스리가 유로 브리타니아로 갔었고, 임무가 끝난 나이트 오브 식스가 다시 올 줄 알았는데….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를르슈에게 물었다.
“전하는 제가 와서 싫으셨습니까?”
“아, 싫은 게 아니라, 이쪽의 귀찮은 사정을 어떻게 볼까 싶어서. 줄리어스라던가, C.C. 같은 이상한 사정.”
“그렇게 따지자면 일레븐 출신인 저를 전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쾌하지 않으십니까?”
“그냥 나이트 오브 세븐이지.”
“저에게도 그렇습니다.”
바람이 한 번 두 사람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를르슈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모양에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다시 넘겨주는 손길에 를르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사심 하나 없는 목소리로 머리를 만져주기 위해 굽혔던 몸을 다시 핀 스자쿠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쿠루루기 경.”
“네, 전하.”
“…나는 지금부터 낮잠을 잘 거니, 무슨 일이 있으면 깨우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누워버리는 황자의 모습에 스자쿠는 입맛이 썼다. 내가 테러리스트였으면 목표물이 저래서 황당한 나머지 자폭해버릴지도…. 새근새근거리는 숨소리와 간간히 작은 바람이 풀밭을 흔드는 소리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집무실이었으면 그 소설책이라도 읽을 텐데. 그러고 보니 랜슬롯에 탄 것도 일주일이 넘었구나. 정기적으로 조정 테스트를 하러 가야하는데 이제 곧 그 무렵이었던가? 로이드 씨한테 연락하면 언제든 좋으니 그냥 오라고 하니 그 날짜를 제대로 알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한 번 붙잡히면 며칠을 내보내지 않으니 아리에스 궁의 호위가 힘들어지니까….
스자쿠가 나름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도 두 명? 황자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건 아리에스 궁 안에 내부 스파이가 있다는 뜻? 스자쿠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이 나기 무섭게 상대는 눈 앞에 나타났다.
“스자쿠, 또 무서운 얼굴 하고 있네.”
“…지노?”
“를르슈 전하는 낮잠 중? 깨우면 불쌍하니까 조금 떨어져서 이야기하자.”
“나는 지금 전하의 호위 중이야.”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둘이나 있는데 별 걱정을.”
스자쿠를 거의 끌고가다시피하는 지노의 손길은 억셌다. 딱 열 걸음만 떼어낸 스자쿠는 더 이상 멀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지노는 스자쿠에게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연회에서 봤는데 뭘 오랜만이야.”
“그때는 급하게 인사만 했잖아. 유로 브리타니아에 간 사이에 네가 아리에스의 호위가 된 줄은 몰랐어. 를르슈 전하는 여전하신 것 같고, 나나리 전하는?”
“잘 지내시고 계시는데….”
“응?”
“지노, 여기에 왜 왔어?”
전하의 안부를 물어보고 싶으면 직접 전하께 가면 되잖아. 나를 만나러 왔다면 미리 연락을 줬으면 됐고. 스자쿠의 낮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지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은 말이야, 라고 지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바로 등 뒤에서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쿠루루기 경—!!”
를르슈의 목소리였다. 스자쿠는 급하게 그가 있을 곳으로 달려갔다. 방금 전의 인기척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지노,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은 누구? 설마 전하를 습격한 것이 그 한 명이라는건가.
누워있던 를르슈는 상체를 겨우 일으킨 채였다. 소리를 내질렀던 입술 주변에는 빨갛게 피가 묻어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해 놀랐는지 헉헉거리는 를르슈를 감싼 스자쿠는 눈앞의 괴한을 노려보았다. 를르슈의 반격에 몸을 웅크린 채로 있었던 사람은 짧게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스자쿠는 제 품을 더 파고드는 를르슈의 손보다, 눈앞의 상대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해야할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혀를 깨물다니, 너무하잖아. 를르슈.”
줄리어스 킹슬레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얼굴은 를르슈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떨어져있던 지노가 뒤늦게 나타나며 줄리어스의 등을 받쳐주었다.
“전하와 감동의 상봉은 다 하셨습니까, 킹슬레이 경.”
“두 번 했다가는 혓바닥이 잘려나갈 거 같군.”
왼쪽 눈의 안대 끝에 달린 자수정이 반짝거린다. 줄리어스는 를르슈를 품은 채로 저를 적대하는 스자쿠를 보며 낮게 웃었다.
“뭐야, 를르슈. 나이트 오브 세븐이랑 섹스라도 했어?”
줄리어스의 말에 를르슈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져라, 쿠루루기 경. 를르슈는 스자쿠를 떼어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발을 신은 를르슈는 지노와 줄리어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스자쿠에게 명령했다.
“지노 바인베르그와 줄리어스 킹슬레이를 나에 대한 암살 혐의로 즉시 체포해라, 나이트 오브 세븐.”
“우와, 전하 그거 진짜 너무합니다. 킹슬레이 경이라면 몰라도 제가 어떻게 를르슈 전하를 죽여요!”
“닥쳐라, 지노!”
“나에게 손을 대는 건 황제 폐하의 권력에 반역하겠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겠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황족도 아닌 놈이 황족을 모욕하는 것도 적당껏 해야지.”
“친애하는 형님께 키스 좀 했을 뿐.”
를르슈는 마지막 줄리어스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를르슈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양새에 스자쿠는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나이트 오브 스리, 그리고 킹슬레이 경은 오늘처럼 초대 없이 아리에스 궁에 오는 건 황족에 대한 불경죄입니다. 아리에스 궁의 주인이신 를르슈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도 사과를 하십시오.”
“죄송합니다, 를르슈 전하.”
지노는 사과했지만 줄리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를르슈는 그의 사과를 바라지도 않았는지 그저 자리에서 벗어나서 성큼성큼 걸어 나갈 뿐이었다.
“킹슬레이 경을 모시고 빨리 아리에스 밖으로 나가, 지노.”
“그래야겠지. 미안, 스자쿠.”
스자쿠는 빠르게 앞질러 나가는 를르슈를 쫓아갔다. 전하, 를르슈 전하. 스자쿠가 부르는 말에 를르슈는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궁 안에 들어가서도 를르슈의 뒤를 열심히 쫓아갔지만 를르슈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는 순간에 스자쿠도 그만두었다. 복도의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밝은 것이 괜히 속상했다.
* * *
잠겼던 문이 열린 것은 두 시간 반이 지나고 나서였다. 스자쿠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문이 열리는 것에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를르슈 황자는 스자쿠를 보고서 한숨을 쉬었다.
“계속 여기에 있었어?”
“전하를 호위하는 건 저의 일이니까요.”
“내가 방 안에 있는 거 알면 그냥 다른 일을 보는 게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상태의 전하를 두고서 어떻게 다른 일을 하나요?”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건 쿠루루기 경답군.”
혼자서 시간을 보낸 를르슈는 기운을 되찾은 듯 했다. 어디로 가나 싶더니 테라스 쪽으로 갔다. 나나리가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고, 일은 여전히 하기 싫었고, 독서는 물렸으니 티 타임을 갖겠다고 했다. 사요코가 트레이를 갖고 오겠다고 말하자 를르슈는 스자쿠와 함께 테이블 쪽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저도 함께 하나요?”
“나의 호위를 성실하게 해야지.”
“전하가 원하신다면 그래야죠.”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사요코가 차와 다과를 준비해주었다. 를르슈가 일어나서 홍차를 내렸다. 제가 하겠습니다. 스자쿠는 예의상 그렇게 말했다. 를르슈가 웃으며 진짜로 하겠냐고 물었다. 음, 사실 할 줄 모릅니다. 나중에 알려줄 테니 그때는 쿠루루기 경이 해줘. 같이 나온 과자는 애쉬포드에서 선물로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애쉬포드요? 가니메데의? 아, 그러고 보니 마리안느 님과 애쉬포드 가문은 관련이 깊었죠.”
“알고 있었어?”
“제가 타는 KMF를 연구할 때 애쉬포드 쪽에서 자료 협력을 많이 받았고 마리안느 님의 지원이 컸다고 들었거든요.”
“아, 랜슬롯.”
를르슈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기체 이름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고 계시지?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기체 이름이야 관심을 가지면 알 수는 있지만 세상에 초연한 듯 살고 있는 이 황자가 그런 걸 알고 있다니. 아, 이례적인 넘버스 출신이라서? 스자쿠가 열심히 추리하는 동안 를르슈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대답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지금의 랜슬롯 이전에 랜슬롯의 데모 시스템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게 있었어.”
그렇다면 엄청 오래 전의 일이다. 스자쿠가 아직 적합 검사도 받기 전이다.
“그때부터 이름은 랜슬롯으로 정해졌고…. ‘섬광의 마리안느’의 자식들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로 로이드한테 고문당했지.”
“네?!”
“어머니도 옆에서 보고 있으면서 ‘어라, 왜 못하는 거지?’ 하고 신기해하면서 오히려 더 부추기고. 나는 나중에 멀미하다가 토했어.”
얼마나 버텼더라, 6분? 기억도 안나. 끔찍하다. 그런 거에 올라타서 싸우는 코넬리아 누님은 대단해. 를르슈는 태연하게 말했다. 스자쿠는 매번 데이터를 외치며 조금만 더 해달라고 조르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인 제 상사를 떠올렸다. 자기야 일레븐이고 명예 브리타니아인이니까 상관없었지만 황족한테까지 그랬다니 상상초월이다.
“뭐, 랜슬롯은 만든 사람이 보통이 아니니까 특이하고 그러니 기체가 사람을 가리긴 하죠. 코넬리아 전하께서는 아마 퍼스널 커스터마이징된 기체를 쓰실 겁니다.”
“그런가? 만난 것도 너무 오래 되어서 그런 것도 잘 몰라.”
“사이가 안 좋으신가요?”
“아니, 그냥 만나지 않아.”
“슈나이젤 재상 각하와는 만나시면서….”
“슈나이젤 형님과는 거래 때문에.”
“…….”
“이런 저런 사정이 많아서 엮이면 귀찮은 곳이 바로 ‘비’ 가문이라.”
차가 식어 가는데, 그래도 한 잔 더 하는 게 좋겠지?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 전보다 미지근해진 차를 마셨다.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무는 를르슈를 따라서 스자쿠도 마들렌을 먹었다. 방금 전보다 차분해진 분위기의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나나리가 열여덟 살이 되는 해에 나나리와 함께 아리에스 궁을 나갈거야.”
“…네?”
“황족으로써의 권리도, 의무도 모두 포기하고 브리타니아를 떠날 생각이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죠?”
“쿠루루기 경이 보기에는 멀쩡한 복을 걷어차는 것 같나?”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어떤 경위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됐는지….”
찻잔을 내려놓은 를르슈는 그저 날씨가 좋다는 듯이 아주 평온하게 말을 했다.
“서민 출신 황후라는 이유로 테러를 당하고 어머니는 죽고 남동생은 다치고, 살아남아도 서민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테러를 당하고, 몇 번이고 죽을 뻔하고.”
“…….”
“내가 열일곱 살에 기사 후보를 들인 날에 그 후보가 자살 폭탄 테러. 덕분에 죽다 살아났다.”
“…그런 일이.”
“누군지 배후를 밝히겠다고 하더라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을 대고 또 다시 자살, 테러가 끝이 안 나고, 언제 죽을 지도 모르고.”
“아리에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다들 알고 있나요?”
“알고 있으면 테러와 암살이 더 은밀하게 이루어질 뿐이다. 코넬리아 누님과 유피와 친하게 지낼 때도 있었지. 그랬더니 두 사람에게도 테러 위협이 있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한때는 황족으로써 책무를 다하고 싶었던 꿈도 있었지. 하지만 그건 살아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를르슈는 스자쿠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마주하는 그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음에도 그 입술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나왔다.
“나는 무력하다, 쿠루루기 경.”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호위를 받아야지 아리에스 궁을 지킬 수 있다. 슈나이젤 형님의 힘이 없다면 그나마의 황족 행세도 할 수 없다. 줄리어스 킹슬레이처럼 다 버리고 뛰쳐나가 나만을 위한 삶을 살 용기도 없다.
“그래서 경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미친듯이 부러웠지.”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 오르다니. 아무리 운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넘버스가, 일레븐이, 명예 브리타니아인이,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않나. 제국 최강의 기사가 되다니.
“전하께서는 저보다도 더 엄청난 분이 되실 수 있을 텐데,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위로하지 않아도 돼, 쿠루루기 경.”
“위로가 아니라, 그, 아! 킹슬레이 경과 쌍둥이 형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전하는 킹슬레이 경만큼 머리가 좋으실 겁니다. 군사보다 황자가 더 기회가 많을 것이고…!”
“자랑은 아니지만 머리는 좋긴 해.”
그렇지만 머리가 좋은 서민의 피가 섞인 황자가 두각을 드러내면 더 빨리 죽지 않을까? 그러면 나나리도 위험해지지 않을까? 이제서야 조용해진 아리에스에 또 다시 테러가 일어나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찻잔을 기울여 겨우 한 모금 마시고 떠올린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하지만 전하, 잃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를르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자쿠는 자기가 한 말에 재차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그래. 그래서야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식은 찻잔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가라앉은 를르슈의 분위기에 스자쿠는 당황했다. 눈을 굴리며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를르슈가 눈을 휘며 웃었다.
“갑자기 맞는 말을 들어서 잠깐 놀랐을 뿐이야. 쿠루루기 경이 그냥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된 게 아니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내 이야기만 해서 지루했을 텐데.”
“아닙니다. 저는 말재주도 별로 좋지도 않고….”
“여자들은 나이트 오브 세븐의 말을 그렇게 기다린다는데?”
“그거 또 지노가 한 말이죠? 아니면 아냐인가요? 지노든 아냐든 제가 한 말이 아니면 믿지 말아주세요. 어떤 여자들도 제가 하는 말은 별로 안 좋아하세요. 저는 그냥 아니오, 오늘은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만 말하는 뿐이고 취하신 것 같은 분들을 잡아주는 정도인데 왜 다들 그런…!”
스자쿠의 길게 이어지는 말에 를르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쿠루루기 경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이제 안 할게. 스자쿠는 식은 찻물을 들이키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전하도 연회에 나가시면 인기 엄청 많으실 것 같은데요. 애쉬포드도 혼담이 오가는 사이 아닌가요?”
“인기? 이 얼굴로? 그럴 리가. 연회는 열다섯 살 이후로 나간 적 없어. 애쉬포드는…미레이는 그냥 후원자 정도지? 근데 미레이는 로이드랑 맞선 보지 않았나? 편지로는 그렇게 들었는데.”
“아, 확실히 로이드 씨 최근에 맞선 봤다고는 했긴 했지만 그게 애쉬포드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연회는 안 나가신지 한참 되셨네요, 그럼.”
“얼굴이 똑같은 놈이 활개치고 있는데 나가봤자 재미가 있을 리가.”
“킹슬레이 경…말씀하시는 거죠? 확실히 엄청 마시고 건배사도 엄청나고.”
하나 남은 마들렌을 먹으라고 손짓하는 를르슈 때문에 스자쿠는 마지막 하나를 입에 물었다. 잘 먹는군. 를르슈의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름답게 반짝반짝거렸다. 스자쿠가 열심히 마들렌을 씹어먹고 있을 때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쿠루루기 경의 나라에서는 친해지면 이름을 부른다고 하잖아?”
브리타니아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씹어삼킨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선 일본—그러니까 에리어11은 이름보다 성을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황궁 같은 경우는 다들 성이 브리타니아니까 이름과 전하를 같이 부르는 편이 많네요.”
“응. 사요코가 쿠루루기 경과 같은 나라 사람이라 알고 있어. 나도 예전에는 사요코를 성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편해져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네. 아, 저도 그러고 보니까 사요코 씨를 이름으로 부르네요. 뭔가 실례가 되려나. 동향 사람이니까 살짝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아마 봐주겠지. 반가워서 서로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겠군.”
“그러면 좋겠네요!”
다 비워진 접시와 찻잔, 찻주전자. 스자쿠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서 치워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를르슈가 더 마시고 싶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이 빈 찻잔을 잡고 있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그저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스자쿠.”
응?
거의 불릴 일이 없는 자기 이름이 지금 어디서 불렸나 싶었다. 스자쿠는 저를 엄청난 눈으로 쳐다보는 를르슈와 마주했다.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물든 를르슈는 더듬거리며 얇은 입술을 떨고 있었다.
“이, 이제 우리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름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예?”
“아리에스의 일들이나 나의 향후 계획이나 이런 것도 다 알고 있고 이런 거 원래 남들한테 잘 말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리고 뭔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 직후니까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만약 경이 싫다면 나는 그냥 다시 쿠루루기 경이라고 부를 테니 그래도 괜찮다면 스자쿠라고……부르고 싶은데.”
“…….”
“지노랑 아냐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는 건 전우여서 가능한 건가? 역시 같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도 되어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그런 걸까…?”
저 얼굴로 지금 무슨 엄청난 귀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스자쿠는 우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름으로 부르게 하는 그게 고작 뭐라고. 자기는 를르슈 전하라고 실컷 부르고 있는데. 스자쿠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를르슈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지금부터 스자쿠라고 부를게, 스자쿠!”
“예, 전하. 편하게 부르세요.”
“사실 피크닉 때 이런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겨우 여기서 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오늘의 목표 달성이다, 스자쿠.”
앗, 그러고 보니 돗자리 어떻게 됐지?! 나나리가 아끼는 건데…. 를르슈가 당황하며 물었다. 스자쿠가 부랴부랴 사요코를 찾아가서 물으니 지나가던 메이드가 찾아서 잘 갖다 두었다고 했다. 를르슈에게 소식을 전하니 무척이나 안심했다.
티 타임 세트도 다 정리되어 있고 곧 있으면 나나리가 올 시간이 되었다. 제레미아의 차가 언제 들어오려나. 스자쿠와 를르슈는 후원 벤치에 앉아서 두 사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보다 들떠보이는 를르슈의 옆모습에 스자쿠는 괜히 시선이 갔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를르슈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아뇨, 그냥…전하가 예뻐서요.”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지 않나?”
“그럼 귀엽다?”
“스자쿠는 지금 나를 놀리고 싶은 건가?”
“저는 감옥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뭐야, 그럼.”
“그냥….”
를르슈의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면서 스자쿠는 순수하게 떠오른 감상을 말했다.
“를르슈 전하가 아름다워서요.”
손을 매섭게 내치는 손길에 스자쿠는 고양이한테 할큄을 당한 느낌이었다. 를르슈는 자기 머리를 다시 넘기면서 중얼거렸다. 스자쿠는 C.C. 옆에 독방에 가둬놓을거야. 아, 너무합니다. 를르슈 전하. 피자 냄새 엄청 날거 같아요. 그게 벌이니까.
* * *
저녁을 먹을 무렵에 나나리도 ‘그럼 저도 이름으로 부를래요!’라고 말했다. 스자쿠는 편하신 대로 부르라고 말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신분이어도 황족 밑이니 스자쿠라고 불러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나나리는 ‘스자쿠 씨’라고 부르면서 아무래도 쿠루루기 경이라고 부르는건 발음이 조금 어려웠다며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이야기에 스자쿠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나나리는 오늘의 부활동이 조금 힘들었다며 일찍 들어가서 자겠다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를르슈의 굿나잇 키스를 받고 돌아가는 나나리에게 스자쿠는 고개를 숙였다. 나나리는 를르슈를 닮은 보랏빛 눈을 부드럽게 휘면서 손을 흔들었다. 잘 자요, 스자쿠 씨!
를르슈의 집무실에는 전체 조명은 껐지만 부분 조명만이 불이 은은하게 들어와서 뭔가 낭만적이었다. 를르슈는 쌓아놓은 책들을 책장에 꽂아두고 있었다. 스자쿠는 멍하니 손 안에 쥐어진 소설책을 뒤적거리면서 궁금했던 말을 했다.
“나나리 전하의 부 활동은 맨날 맨날 바뀌는 거 같아요.”
“학생회 겸임이라 어떤 부도 다 할 수 있나봐.”
“를르슈 전하는 어떤 부였나요?”
“나는 학교에 안 다녔어. 위험해서.”
“킹슬레이 경도 안 다녔나요?”
“응.”
“나나리 전하는 그럼…?”
마지막 한 권을 다 책장에 꽂아넣은 를르슈는 책장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이트 오브 스리, 그러니까 지노가 왔었을 때 일인데.”
“네.”
“그때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아니라 사관생도 시절이었을 거야. 학교에 웃기는 애가 하나 있는데, 명예 브리타니아인 주제에 운이 엄청 좋아서 미친 메카닉 공학자한테 걸려서 엄청 출세가도의 길을 달리게 된 거 같은데 역시 사관학교라 그런가 이벤트의 스케일이 확실히 커서 달라서 좋다고 떠들어 대는거야.”
“…그거 저 아닌가요?”
“나나리는 그런 재미있는 일이 있는 곳에 가보고 싶었던 거지.”
“사관학교는 그런 곳이 아닌데….”
“당연히 그렇게 가르쳤지. 군인을 가르치는 학교라고 말하니까 그럼 자기는 어떤 학교를 갈 수 있냐고 물어 보길래……사실 우리는 학교를 안 가도 된다고, 나도, 줄리어스도 안 갔다고 하니까 엄청나게 실망한 얼굴로 애써 웃는데.”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를르슈의 심정을 스자쿠가 감히 상상할 수가 있을까. 를르슈는 이번엔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중얼거렸다.
“아무튼 다음부터는 지노한테 학교 같은 이야기 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다음 해에 아냐가 사관학교에 지원하더군.”
“…….”
“나나리의 소꿉친구로 계속 아리에스 궁에 남아주길 바랐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고….”
“복잡하게 되었네요.”
“나이트 오브 원이 자기 관할 구역을 돌보는 일을 잠깐 미루고 아리에스 일을 맡아주면서 여유가 생기고, 나나리를 학교에 보내게 되었고, 제레미아의 경호도 믿을 수 있고.”
깔끔해진 책상에 를르슈는 손을 대며 한숨을 쉬었다.
“나의 계획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브리타니아를 떠나는 계획 말이죠.”
“눈엣가시 같은 우리가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스자쿠는 자기 전용 의자에 소설책을 내려두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밤이 늦었네요.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러가야지. 를르슈의 침실까지 걸어가는 복도에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하얀 셔츠를 입은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자처럼 가느다랗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단단하게 받아줄 만큼 단단해보인다고 하기에는 조금 거짓말이라고 하는…. 미묘한 감정이 드는 그 등을 보고 있다가 침실에 다다랐다.
“오늘도 고생했어, 스자쿠.”
“를르슈 전하.”
“응?”
“전하가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보다 전하가 푹 주무시지 못하시면 걱정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선 최소 여섯, 아니 일곱 명입니다.”
“…무슨 근거로 일곱 명이나 돼?”
“나나리 전하랑 저, 지노, 아냐, 제레미아 경, 사요코 씨, 그리고 C.C.씨 입니다.”
“마지막은 빼라. 그 놈은 내 침실에서 피자나 안 먹고 있으면 다행이지.”
웃으면서 문을 닫으려는 를르슈의 모습에 저도 마주보며 웃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문을 잡게 되었다. 순식간에 이해한 말이었다.
“C.C.씨가 전하의 침실에 들어간다구요?!”
“워낙에 신출귀몰하는 녀석이라…너도 봤잖아?”
“그렇지만 침실은…특히 밤에 황족의 침실에 들어간다는건!”
“무슨 의미인데?”
“르, 를르슈 전하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그 녀석이 먹은 피자 박스를 분리수거한다.”
“보통은 섹스의 상대를 하려고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그러니까 오해되지 않게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면, 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려는 찰나에 를르슈가 문을 벌컥 열었다. 사람이 아니라는 수준의 반사신경을 가진 스자쿠도 피할 수 없을 속도로 벌컥 열린 문이 스자쿠의 얼굴을 강타했다. 퍽, 하고 박히는 소리에 스자쿠가 신음하는 사이에 를르슈가 달빛에 봐도 붉어진 얼굴로 스자쿠를 붙잡고 말했다.
“나, 나는 엄마 친구랑 그런 짓을 하는 취미는 없다, 스자쿠!”
“아, 아파요, 전하.”
“문을 갑자기 연 건 미안하지만, 너의 이야기를 듣고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아무튼 앞으로 조심하시면 됩니다.”
“조심한다. 그런 오해를 사면 나나리를 볼 면목이 없어지니까.”
그럼 진짜로 안녕히 주무십시오.
를르슈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때에 등 뒤에서 스자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목소리는 를르슈의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면 를르슈가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저를 보고 있었다.
“스자쿠는 밤에 황족의 침실에 불려간 적이 있는가?”
“…네?”
“그러니까 그런 걸 알고 있는 거지?”
또 무슨 생각을. 여성 편력이 화려한 나이트 오브 세븐의 소문에 대한 이야기인가? 이제 해명하는 것도 귀찮다. 스자쿠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황족 앞이지만 그래도 이런 황당무계한 전개에 한탄하는 거 정도는 되겠지.
“일레븐과 자고 싶어하는 황족은 없습니다, 전하.”
“하지만 스자쿠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잖아.”
“그래도 출신이 안 좋으니 질도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저에게 잘 대해주신 황족 분은 드물고요. 를르슈 전하, 나나리 전하, 유페미아 전하. 슈나이젤 재상 각하는 능력으로 사람을 봐주시는 분이라 운이 좋았죠.”
“유피…?”
“전하, 이제 안 주무시면 진짜로 감기 걸리십니다. 들어가세요.”
스자쿠는 를르슈를 침실 문 안 쪽으로 밀어넣었다. 잠시만, 스자쿠, 잠깐! 안에 C.C.씨가 계시나요? 아니, 없지만, 그래도! 그럼 얼른 주무세요! 내일 아침도 나나리 전하의 도시락을 싸셔야 하잖아요! 마지막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가 포기하는 것이 느껴졌다. 문 너머로 힘없이 ‘잘 자, 스자쿠.’라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아침에 나나리와 조깅을 했다. 지난번보다 천천히 달리자 나나리는 뭔가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스자쿠 씨는 저를 얕보고 있군요!”
“제가 나나리 전하를 얕보면 황궁 지하감옥에서 울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 를르슈 전하가 그 사실을 아시면 저는 이미…….”
“아하하, 알겠어요. 스자쿠 씨는 제가 알고 있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 중에서 제일 성실한 거 같아요!”
“그렇습니까?”
“지노 씨도 아냐도 아침에 운동은 안 하거든요. 나이트 오브 라운즈까지 됐는데 운동을 또 해야 되냐고 하면서. KMF만 잘 타면 됐지, 이러면서.”
“혹시 녹음 해두셨나요? 경질로 다 같이 영창 좀 가야할 거 같은데.”
나이트 오브 라운즈도 군법재판소에 가나요?! 황제 폐하의 직속 기사인데?! 나나리의 들뜬 물음에 스자쿠는 아직 거기까지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말했다. 원하는 대답을 못 듣자 나나리는 만약에 가게 되면 알려달라고 했다. 무서운 소리를 하는 황녀 전하 말씀에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오라버니는 도시락을 싸고 계시고, 오늘은 제레미아 경이 늦네요.”
“나나리 전하께서 학교에 늦지 않게 오셔야 할 텐데….”
“저도 아리에스의 간단한 업무 정도는 도울 수 있으니 제레미아 경의 일을 도와볼까요!”
뭘 하나 했더니 우편 업무였다. 우편 업무라고 하기에는 그냥 어디에서 오는 초대장을 다 골라내는 일이었다. 를르슈의 앞에 오는건 를르슈 것으로, 나나리의 앞으로 오는 것은 나나리의 것으로. 나나리 앞으로 오는 것은 대부분 스포츠 대회 팜플렛 같은 것이었다.
“나나리 전하, 운동 엄청 잘 하시나봐요.”
“이래보여도 전국대회 우승재원입니다!”
“를르슈 전하랑은 완전히 다르네요.”
“예전에 말이죠,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놀리기 시작하고 제가 도망치기 시작하면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먼저 쓰러져서, 를르슈 오라버니가 놀라서 사람을 부르고 저는 그때까지 우느라 정신이 없고. 근데 그때까지도 저는 달리고 있었어요! 줄리어스 오라버니는 쓰러질 정도였는데.”
“그건 아마…킹슬레이 경도 체력이….”
“아, 지금은 그렇게 부르죠. 줄리어스 오라버니를.”
킹슬레이 경, 킹슬레이 경, 킹슬레이 경. 이름을 외우듯이 나나리는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봉투 하나를 붙잡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나리가 무엇을 보나 스자쿠도 보려고 하자 나나리는 급하게 감추었다.
“스자쿠 씨!”
“네?”
“저 오늘 아파보이나요? 아니면 앞으로 아파보일 것 같나요?”
“…꾀병인가요?”
방금 전까지 열심히 후원을 뛴 사람이 아파보일 수가 없다. 혈색은 좋을 거고 아침을 먹으면 보기 좋게 맛있게 먹을 테고. 를르슈를 속일 수는 없다. 스자쿠는 솔직하게 말했다.
“를르슈 전하는 나나리 전하가 솔직하게 말하면 다 들어주실 겁니다. 꾀병 같은 거 부리시면 더 걱정하실 거예요.”
“…오라버니가 걱정하는 건 싫은데.”
“그렇죠? 솔직하게 말씀드리세요.”
“그러면 오라버니가 더 싫어하실 거 같아서요.”
“무슨 일인데요?”
고민을 하던 나나리는 조심스럽게 품고 있던 편지봉투를 스자쿠에게 내밀었다. 처음 보는 봉납은 둘째치고 그 위로 화려하게 적힌 이름. 줄리어스 킹슬레이. 받는이는 를르슈가 아니라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였다. 스자쿠의 미묘하게 변한 표정에 나나리는 봉납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오늘 오후 2시에 나이트 오브 스리와 함께 아리에스 궁에 오고 싶은데 괜찮냐는 뜻이었다. 당일 통보하는 편지가 세상에 어디 있담. 그것도 황족에게!
“오후 2시면 학교에 있을 때인데 그래도 오랜만에 줄리어스 오라버니를 보고 싶어요. 오늘 학교는 딱히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쉬어도 되고….”
“그렇지만 를르슈 전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를르슈 오라버니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실 게 틀림 없어요!”
“그렇다고 나나리 전하가 거짓말을 하면 더 슬퍼하실 겁니다.”
“스자쿠 씨…!”
저를 바라본다고 무슨 계책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스자쿠는 머리를 거칠게 넘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조깅은 끝났으니까 돌아갑시다. 때마침 건너편에서 제레미아가 허겁지겁 다가오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쿠루루기 경. 아닙니다, 나나리 전하와 운동이 막 끝난 참이었습니다. 우편 업무를 보는 흉내를 잠깐 내봤는데 제대로 했는지 몰라서 우선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시오. 스자쿠는 제레미아에게 편지들을 다시 섞어서 내밀면서 그런 와중에 몰래 나나리에게 줄리어스의 편지는 쥐어주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나나리가 원하는 일이 있다면 들어주고 싶었다.
“나나리 전하, 를르슈 전하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먼저 식당으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 그 전에 샤워가 먼저죠. 몸 식지 않게 빨리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편지를 들고 바로 방으로 갈 것. 스자쿠의 말귀를 알아들은 나나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에게 나쁜 짓을 하는 느낌이지만, 줄리어스는 나나리의 또 다른 한 명의 오빠니까. 머리가 복잡하다. 성실하게 편지를 분리하고 있는 제레미아를 등 뒤로 하고서 스자쿠도 궁 안으로 들어왔다.
나나리는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고, 스자쿠도 샤워를 하러 가야할 때였다. 순간 주머니 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 주인인 스자쿠 본인도 엄청 놀랐다. 어지간해서 울릴 일이 없는 이 휴대폰에 전화?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에 복도에 사람이 나와보기 전에 급하게 받았다.
“여보세요?”
‘스자쿠 군~? 우리 아이가 아빠 얼굴을 잊으려고 해~!’
“…로이드 씨.”
‘정—답!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매정하게 얼굴을 안 보여주다니, 랜슬롯이 얼마나 속상해하면서 아빠를 찾고 있는 줄 알아?’
“아리에스의 호위 중이니까 랜슬롯 조정은 한동안 쉬어도 된다고 한 건 로이드 씨잖아요.”
‘그렇지만 이렇게 긴 방치 플레이는 흑흑, 몸 뿐인 관계여도 몸 정이 들어버린 건 어쩔 수 없다구~!’
내가 랜슬롯의 디바이서니까 데이터 조정에 참여하라는 말을 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앗, 로이드 씨! 그렇게 말하는 거 혼자만 재미있으니까 그만두랬잖아요. 스자쿠 군, 미안. 아리에스의 호위는 어때?’
“세실 씨!”
모처럼 말이 통하는 상대다. (요리 면에서는 상식적으로 통하는 상대가 아니지만.)
‘아리에스의 호위가 장기임무인 거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랜슬롯 조정은 정기적으로 해줘야 해서. 슬슬 그 시기거든. 괜찮다면 특파에 와줄 수 있어?’
“아, 를르슈 전하의 호위 중이라 지금은….”
‘전하와 함께 특파로 온다거나?’
“글쎄요, 저 하나 때문에 그렇게 움직이는 건 전하의 리스크가 너무 크고….”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되니까, 날짜 조정되면…음, 이번 주 안으로만 와 줬으면 좋겠어! 슈나이젤 재상 각하께도 연락드려볼게!’
“네!”
‘그럼, 좋은 하루 보내, 스자쿠 군!’
끊긴 전화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기운이 빠진다. 그래, 슬슬 랜슬롯 조정을 해야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기지개를 길게 켜고 있으면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식당 쪽에서 나온 앞치마 차림의 를르슈였다.
“전하.”
“방금 전은 여자친구?”
“네?”
“딱히 내 호위 때문에 데이트를 거절한다거나 그런 일은 안 해도 되는데. 그런 사정을 안 봐줄 정도로 아리에스는 야박한 직장은 아니야.”
“네?”
“나이트 오브 세븐은 나이트 오브 세븐이었어. 지노와 아냐가 맞았던 거야.”
또 무슨 소리를.
운동 후라 조금 끈적거릴 수는 있지만 이상한 오해를 한 채로 를르슈를 보낼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여자랑 몇 번 잤다고 염문에 시달리는 것도 사절이다. 스자쿠는 돌아서는 를르슈를 붙잡았다.
“방금 전은 특파 사람들이에요! 로이드 씨랑 세실 씨!”
“…로이드 아스플런드랑 세실 쿠루미?”
“네! 전하에게 랜슬롯을 태운 그 로이드요! 제 KMF인 랜슬롯은 정기적으로 테스트를 해서 조정을 해야하는데 원래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기 전에는 전투에 나가서 그때마다 데이터를 얻어서 해결했지만 지금은 전하의 호위 중이라 랜슬롯에 탈 일이 없었고…!”
“알겠어, 잠깐, 내가 오해했군. 그래, 숨 쉬면서 말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랜슬롯 조정 테스트에 언제 올 수 있냐는 특파의 호출이었습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 이전에도 계속 했던 일이라 조정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전하의 호위는 어떻게 할까도 고민 중이었고.”
앞치마를 하고 있는 차림으로 턱을 괸 를르슈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스자쿠가 없어지면 아리에스의 호위가 비어버리는데. 그럼 또 위험해진다. 그렇다고 로이드가 있는 특파에 내가 따라가면 거기가 위험해지는 게 아닌가? 제레미아는 나나리의 호위를 계속 하고 있어야하고. 다른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부르기에는 이미 다들 할 일이 있고. 혼자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를르슈의 앞에 샤워를 마친 나나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교복이 아닌 아끼는 분홍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나나리? 오늘 학교는 쉬는 날이었나?”
“아, 아니에요. 그냥…오늘은 학교에 가기가 싫어서요.”
“뭐?”
를르슈는 놀란 얼굴로 나나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학교에서 누가 너를 괴롭히거나, 아니면 위험한…그런 일이 있었던거야?”
“아니에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러면 왜 갑자기 학교에 가기가 싫어진거지?”
“그냥, 오늘만….”
나나리는 우물쭈물 대답을 하다가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스자쿠로써는 뭐라고 대답하기가 난감하였다. 사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피크닉에 줄리어스 킹슬레이와 마주했다가 피를 본 를르슈가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봤는데, 줄리어스를 정식으로 아리에스에 들이자고 하는 나나리를 어떻게 도와주고 응원해줘야 한단 말인가.
를르슈는 를르슈대로 대답이 없어진 나나리가 스자쿠를 쳐다보는 것에 둘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나리가 나에게 비밀을 만들고 스자쿠에게 의지하다니. 오빠로써 자존심도 상하지만 호위 주제에 나에게 비밀을 만드는 스자쿠도 괘씸하다.
“스자쿠가 대답해봐.”
“아, 전하. 저로써는 정말…. 저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나나리?”
“오라버니….”
“스자쿠.”
“전하….”
“나나리?”
“오라버니….”
“스자쿠.”
이대로는 끝이 안 난다. 스자쿠는 총대를 맡기로 했다.
“사실 오늘 아침에 나나리 전하 앞으로 킹슬레이 경으로부터 오늘 오후 두 시경에 아리에스 궁에 오겠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아, 물론 혼자서가 아니라 나이트 오브 스리, 지노 바인베르그 경과 함께.”
“그 미친놈이 나나리한테 편지를 보내? 잔머리를 썼지만 기각이다. 거절하도록 해라, 나나리.”
“그렇지만 저는 줄리어스 오라버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는걸요. 오라버니를 보고 싶어요. 그리고 지노 씨도 보고 싶어요.”
“줄리어스랑 똑같은 얼굴이 여기에 있으니 오래 안 봐도 아쉬울 것 없지? 그리고 그 놈은 있어봤자 널 괴롭히기나 하는 악질이다. 혼자 살겠다고 아리에스를 뛰쳐나간 놈을 뭐가 그렇게 그리워 하는건지. 나나리, 네 상냥함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원피스 자락을 붙잡고 있던 나나리의 손끝이 덜덜 떨리더니 결국 나나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떨면서 우는 나나리는 기어코 를르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소리를 했다. 몰라요, 오라버니 마음대로만 하고! 미워요! 발이 빠른 나나리는 자기 방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가 문을 쾅 닫았다.
“저 상태면 학교도 안 가겠군. 제레미아도 할 일이 줄었네.”
를르슈는 앞치마를 벗으면서 오늘 도시락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식당으로 돌아가려는 를르슈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스자쿠는 갑자기 드는 생각에 다시 를르슈를 붙잡았다.
“전하, 킹슬레이 경을 여기에 초대하십시오.”
“스자쿠, 머리가 이상해졌어? 무슨 헛소리야?”
“아니, 킹슬레이 경이 오면 지노도 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레미아 경도 여기를 지키고 있으니 아리에스의 호위는 안심입니다. 제가 특파에 다녀와도 별 일 없을 것이구요.”
“…그 놈이 아리에스에 들어오는데 내가 별 일 없이 있어줄 것 같아?”
“그래도 킹슬레이 경 역시 나나리 전하의 오라버니이시지 않습니까?”
“너, 줄리어스가 나나리를 얼마나 괴롭혔는지…아니, 이 이야기는 됐어.”
“그렇게 괴롭혔어도 보고 싶다는데. 그리고 킹슬레이 경도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니 나나리 전하를 괴롭히지 않으시겠죠.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나나리 전하가 숙녀가 된 모습에 감격하여….”
“나를 설득하려고 아주 소설을 쓰는군.”
스자쿠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땠습니까, 제 소설?”
“형편없다.”
“그래도 나나리 전하는 좋아하실 겁니다.”
“…….”
등을 돌린 를르슈는 식당 쪽으로 들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스자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시 그를 불렀다. 스자쿠. 스자쿠는 아침부터의 설전으로 살짝 지쳐있었다. 논리로 싸우는 건 역시 좀 버겁다. 피로감에 짧게 전하, 대답하고 있으면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샤워를 하고 특파에 가. 그리고 나나리의 도시락, 쓸 일이 없게 됐으니 네가 가져가서 먹도록 해. 아, 그래도 그 녀석과 지노가 오기 전까지는 내 호위를 하고 있고 녀석들이 오고 나서 특파로 가는거야. 샤워 끝나고 청결한 차림으로 나나리의 방에 가서 정중하게 오늘의 일정을 알려주고, 오늘 하루 아리에스의 호스트로서 어떻게 행동할 건지 나에게 상담을 할거라면 언제든 내 집무실에 와도 좋다고 전해. 그리고 나나리의 방에 갈 때는 아마 울음 때문에 부어 있을 테니까 얼음 찜질기 정도는 들고 가. 그래, 이 정도면 됐지. 얼른 움직여.”
학교에는 내가 연락해둘 테니까.
를르슈의 다정한 목소리에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시끄럽게 대답하지 마.”
스자쿠가 빨리 샤워를 하러 달려가는 사이에, 를르슈는 특파에 우선 두 명이 더 있으니 그 두 사람 몫을 만들겠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제레미아한테도 오늘 바뀐 일정에 대해서도 말해야 되고. 할 일이 너무 많아. 새로운 반찬을 만들면서도 를르슈는 귀찮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나나리는 좋아하는 원피스에서 드레스로 곧 갈아입었다. 를르슈가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뭘 입어도 예쁘지만 그래도 황녀로써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니까. 를르슈의 말에 따라서 나나리는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또 를르슈가 시킨대로 스자쿠가 갖다 준 얼음 찜질을 하고 부은 눈을 가라앉혀서 울었던 자국은 남지도 않았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응접실을 살피고, 나나리에게 일정을 물어보았다. 줄리어스의 편지에는 그저 오후 두 시에 방문하겠다는 내용만 있을 뿐 따로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선 점심은 무리여도 티 타임 정도는 준비해야겠네. 스자쿠는 언제 돌아오지?”
“여기서 못해도 두 시 반에 출발한다면, 아마 일곱 시 쯤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길게도 하는군.”
“사실 얼마나 더 길어질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전하의 호위를 해야하니까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할게요.”
“그러던가. 나나리, 녀석들을 저녁 식사까지 붙잡아 놓을 수 있어?”
그러던가, 라니. 믿을 수 없다는 뜻이군요. 저는 조금 슬픕니다, 전하….
나나리는 저에게 주어진 임무에 눈을 반짝였다. 줄리어스 오라버니와 지노 씨와 저녁 식사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힘내겠습니다!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은 어느덧 한 시 반. 삼십 분이 남은 애매한 시간에 나나리는 온실 근처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무실에 남은 스자쿠와 를르슈는 딱히 하는 것 없이 그저 책장의 구경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역사, 정치, 물리, 수학 등 다방면에 걸친 지식에 대한 책들이었다. 스자쿠한테 준 책이 소설책인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뭔가 스자쿠는 이론서적 같은 거 잘 읽는 이미지가 아니라서.”
“아, 어떻게 아셨어요? 사관학교 시절에도 이론서를 보느니 몸으로 직접 깨우치는 게 빠르다고 생각해서….”
“…해서?”
“엄청 혼날 일이 많았습니다. 지노가 말 안 했나요?”
“응. 지노가 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뭐, 대부분 네가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들이지.”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으셨습니까? 다 믿어버리시고.”
“소설 속에나 있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그런데 실존 인물이라니까.”
“그 소설이 이 소설이란 말이죠.”
“아니, 그건 아니야. 그건 되게 건전한 소설이야.”
하긴. 지금까지 스자쿠가 읽은 부분만 해도 주인공들끼리 서로 같은 책을 읽으며 감상을 나누는 부분 밖에 없다. 스자쿠는 의자에 앉아서 뒷부분을 대충 훑어보았다. 입술이 마주쳤다, 같은 부분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손 잡는 것이 고작인 이 건전한 연애소설이 를르슈의 집무실에 있는 유일한 소설책이었다.
“재미없네요.”
“역시 나이트 오브 세븐.”
“어떤 의미에서 나이트 오브 세븐입니까?”
“전장에서의 경험이 많다?”
놀리지 말라는 듯이 인상을 쓰면 를르슈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난 그 소설 좋아해. 낭만적이야.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생각을 나누고, 그러면서 뜻을 함께 나누는 관계. 를르슈가 말하는 건 굳이 연인 관계가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상관과 부하만 되도 할 수 있는 일을 낭만이라고 말하는 전하…. 스자쿠는 그것에 따로 대꾸하지 않았다.
“스자쿠는 그런건 별로인가?”
“저요?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장에 연인이 없어도 누구와도 할 수 있겠죠. 황제의 기사 신분이니 연인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아쉽긴 하지만요. 연인이라면 좀 더 깊은 관계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스자쿠.”
연인이 없어도 누구와도 할 수 있겠다니 그런 파렴치한 말을 내 앞에서…. 그런 사고방식을 하고 있으면서 자기 소문에 대한 부정을 하고 있었다니…!
“아니, 전하! 대체 하루에 몇 번씩 저를 매도하시는 겁니까!”
스자쿠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해명했다. 제가 말한 건 전하께서 말씀하신 같은 의견을 공유하거나, 생각을 나누고, 뜻을 함께 나눈다는 그런 관계를 말한 거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건 연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으니까요. 동료가 되어도 할 수 있고. 저와 전하의 관계에서도 가능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를르슈는 뭔가 고민하는 얼굴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나와 스자쿠 관계에서도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고, 공감하고.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
“감히 말하자면, 전하가 제 이름을 부르고 싶다고 하셨을 때,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충분히 답변이 되셨나요? 스자쿠가 물어보는 말에 를르슈가 대답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뺨이 붉게 상기된 나나리가 손님들이 오셨다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계를 보면 두 시가 되기 오 분 전이었다.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우선은 응접실로 모시라고 했고, 오랜만에 세 명에, 나이트 오브 라운즈도 둘이나 있고, 정말 기뻐요! 나나리는 정말로 즐거운 것 같았다. 서서히 가라앉는 를르슈의 기분을 아는 사람은 스자쿠 밖에 없을 것이다. 를르슈는 나나리 모르게 제 기분을 숨기고 있긴 했지만 육감이 예리한 스자쿠는 알 수 있었다. 를르슈의 기분은 지금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오셨습니까, 를르슈 전하, 나나리 전하.”
“오랜만이군.”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반기는 소리는 지노와 줄리어스였다. 한 명은 귀족 출신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 정중한 태도지만 다른 한 명은 구 황족이면서 군사라는 애매한 신분이면서 경어조차 쓰지 않는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기분을 바로 살폈다. 이대로 홍차에 독을 타서 죽여버리고 싶군, 이라고 얼굴에 적혀있지만 상대방인 줄리어스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나이트 오브 스리, 그리고 킹슬레이 경. 편지를 더 일찍 주고 왔다면 많은 준비를 했을 텐데. 급하게 준비를 하느라 조촐하네요.”
“나나리 전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오늘은 지노 씨와 줄리어스 오라버니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렇죠, 를르슈 전하?”
지노는 약삭빠르다. 그렇게 말하면 를르슈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서 하는 말이다. 스자쿠라면 감히 할 수도 없는 말을 지노는 웃으면서 한다. 귀족이라서 그런 게 가능한걸까? 서로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줄리어스와 지노, 를르슈와 스자쿠, 그리고 상석에는 나나리가 앉아있다.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중에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삼 남매의 상봉인데, 아무렴. 그리고 지노도 원래부터 아리에스의 손님이었으니 편하게 있어도 상관없지.”
“지난번이랑 태도가 다르네, 를르슈. 역시 나나리 앞이라?”
“지난번은 무슨 소리지? 네가 아리에스에 온 적이 있던가, 줄리어스?”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산뜻함이란.
맞춘 듯한 타이밍으로 메이드가 트레이에 다과와 차를 싣고 나타났다. 다섯 사람 분의 찻잔이 내려지고 예쁘게 잘린 바움쿠헨이 각자의 몫으로 놓여졌다. 찻주전자는 나나리의 앞에 놓였다. 오늘의 호스트는 나나리. 나나리는 기세 좋게 모두의 잔에 찻물을 부었고 기분 좋게 웃었다.
“오라버니들만큼은 잘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요.”
“마음가짐이 중요한거야, 나나리는 이미 훌륭해.”
“찻잎이 덜 우러나고 끝맛이 떫은걸 봐서 기술은 부족하구나.”
를르슈와 줄리어스가 나나리를 어떻게 대하는지 대충 감을 잡았다. 지노는 이 분위기가 익숙한지 웃는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스자쿠는 이제 어느 시점에서 발을 빼고 특파로 빠져야하는지 각을 재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이트 오브 세븐은 아리에스의 뒤치다꺼리 중?”
“스자쿠는 나의 호위를 맡고 있다.”
“벌써 이름으로 불러? 를르슈, 하룻밤 사이에?”
“스자쿠 씨는 저랑 아침에도 운동해요!”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에 나나리가 끼어든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스자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나리 전하랑 스자쿠랑 같이 뛴다구요? 전하 달리기가 그렇게 빨랐어요?”
“아, 아뇨. 저는 그냥 평범하게 뛰는데요.”
“아, 역시. 스자쿠가 천천히 뛰는거군요. 예전에 나이트 오브 라운즈끼리 달리기를 했던 때가 있었는데 스자쿠 혼자서 KMF 속도로 달려서 다들 눈을 의심했다구요.”
“사람이 어떻게 KMF 속도로 뜁니까, 나나리 전하, 지노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지노, 너는 왜 아리에스의 황족 분들한테 나에 대한 거짓말만 늘어놓고!”
지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열이 받은 스자쿠는 말이 길어졌다.
“를르슈 전하도 나보고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등 그런 이야기를 믿고 계시고. 나이트 오브 세븐은 손이 빠르고 능수능란? 네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지어내지 마!”
“지난번 남작가의 아가씨랑 하룻밤 자버린 건 스자쿠가 아니라…스자쿠의 옷을 입은 다른 미친놈이었을까, 그럼?”
“그냥 한 번 하고 나온 거 가지고 하룻밤 잤다고 하지 마, 끝나고 바로 나왔으니까! 파티 홀에 다시 나와서 인사했잖아!”
“너네, 나나리를 앞에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느덧 나나리의 귀를 막고 있는 를르슈는 제 빨개진 얼굴은 가릴 생각은 없어보였다. 지노와 스자쿠는 죄송하다며 뒤늦게 교양있는 척 홍차를 들이켰다. 오라버니의 손, 따뜻했습니다. 귀가 풀려난 나나리가 해사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를르슈는 별 거 아니었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니 차도 술술 넘어가는군.”
이 자리의 시한폭탄, 줄리어스 킹슬레이.
안대 끝의 자수정이 소리 없이 찰랑이며 움직인다. 나나리는 오랜만에 보는 줄리어스의 얼굴에 반갑게 미소지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즐거우셨다면 기뻐요. 나나리의 다정한 말에 줄리어스는 너도 여전하구나, 하고 웃을 뿐이었다.
“내 잔이 비었는데.”
나나리가 찻주전자를 잡으려고 하려는 때에 줄리어스가 입을 열었다.
“스자쿠, 물을.”
를르슈와 똑같은 목소리로, 를르슈가 부르는 방식으로 그렇게 불리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뭐라고, 말을, 행동을. 머리가 순간 굳어버려서 대답을 못하고 있는 와중에 나나리는 제가 찻주전자를 쥐고 있는데 왜 스자쿠를 부르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지노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걸 눈치챈 듯, 늘상 생글거리는 웃음이 멈췄다.
그리고 를르슈는.
“스자쿠. 가야 될 시간이다.”
“아, 네. 전하. 다녀오겠습니다.”
“나나리, 줄리어스의 잔에 차를.”
“네, 오라버니. 줄리어스 오라버니도 차를 마시고 싶으시면 제게 부탁하세요.”
“워낙에 제멋대로인 놈인건 알고 있지만 친하지도 않은 나이트 오브 세븐의 퍼스트 네임을 그렇게 막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황제 폐하의 군사라고 하더라도 무례한 모습을 보이는 건 과거의 황족으로써도 부끄러운 일이고.”
를르슈는 천재다.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응접실의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까지 분위기를 주도하는 를르슈의 화술에 놀랐다. 줄리어스 역시 를르슈의 대응에 말없이 나나리에게 차를 받고 조용해졌다. 지노도 한숨 놓은 듯 스자쿠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특파로 가는 길은 멀다. 스자쿠는 오랜만에 차를 타고 움직였다. 그때의 연회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테스트에 빨리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얻고 나와서 빨리 아리에스로 돌아와야지. 왜냐하면…를르슈 전하가 걱정되니까. 스자쿠는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에 탄 랜슬롯은 괜히 긴장이 되었다. 거의 보름 가까이 타지 않았지.
결과가 나쁘면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써 부끄러울 수도. 그러면 아리에스의 호위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겠지. 집중해야지!
가상의 적들과 이상하게 흐트러지는 공간 감각에 정신을 바짝 차리며 집중한 끝에 밖에서 로이드가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한 걸까? 오랜만에 입은 파일럿 수트도 조금 답답했다. 긴장한 탓에 땀에 젖은 데다가 갈증까지 나서 페트병 째로 물을 마시고 있으면 세실이 달려왔다.
“스자쿠 군, 정말 그동안 랜슬롯에 안 탔던 거 맞아?”
“네? 네. 계속 아리에스에 있었으니까요.”
“98.7%야! 실전에서도 이런 경우 없었는데!”
“네?”
“로이드 씨도 감격이지만 나도 감격했어. 어떻게 된 거야? 역시 평화가 최고야? 아리에스에서 따로 특훈이라도 해?!”
하는 운동이라고는 아침에 나나리랑 조깅하는 것 밖에 없는데.
를르슈의 정무 시간에 소설책 읽기?
이런 걸 말했다가는 로이드와 세실 둘 다 실망할 것이다. 딱히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로이드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스자쿠 군이 이렇게 좋은 성적 나온 이유, 나는 알고 있지, 세실 군~!”
“뭔가요, 로이드 씨?!”
“그건, 바로, 스자쿠 군이 있는 곳, 그곳은 ‘섬광의 마리안느’ 님이 있었던 아리에스니까! 그 기운을 받아서 이렇게 된거라고!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어!”
로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자쿠는 다 마신 페트병을 로이드의 머리통으로 날려버렸다. 어차피 직급은 이쪽이 높으니까 상관없다. 뭐야, 스자쿠 군. 너무하잖아. 로이드가 울상을 짓는 것에 스자쿠는 미간을 찡그렸다.
“를르슈 전하한테 들었습니다! 랜슬롯의 데모 버전에 황족을 태우고 고문을 하셨다구요!”
“아, 데모 버전! 확실히 있었지. 지금의 랜슬롯이 스자쿠 군 아니면 안 되게 된 이유가 마리안느 님의 도움도 있어서 그렇지만 ‘섬광의 마리안느’ 님의 자식들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다구!”
“그래서 를르슈 전하가 토할 때까지….”
“아아아, 쌍둥이 전하는 솔직히 도움 안 됐어. 이거 말하면 황실 모욕죄로 잡혀가나? 아아~ 근데 한쪽 쌍둥이는 이미 황족 아니라는 이야기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아무튼, 어느 쪽의 쌍둥이도 데이터에 도움이 안 됐어!”
“…….”
“적합도도 12%였다구? 나는 엄청 기대했는데.”
“일반인한테는 엄청 높은 거예요, 그래도.”
그 말에 로이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섬광의 마리안느’의 자식들이라구! 이쪽으로써는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된다구~?”
“그래서 어느 쪽도 도움이 안 됐다면서 랜슬롯이 이렇게 되었다는거예요?”
“그 댁에 막내따님 계시잖아.”
싱글벙글 웃는 로이드의 말을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막내따님이라니. 막내따님이라니. 막내고 따님이고 그 아리에스에 있는 막내에 따님은 한 명 밖에 없다. 아침마다 조깅을 즐겨하고 전국 스포츠 대회에 나가는 걸 좋아하며 체력이 엄청 좋은….
“나나리 전하요?!”
“경이적인 기록이었지, 5살에 56%였어! 아, 그때 황제 폐하께 들키지 않았으면 랜슬롯은 아마 황녀 전하의 것이 되지 않았을까? 아, 물론 지금처럼 스자쿠 군처럼 98.7%라는 기적을 맛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래도 ‘섬광’에 이은 또다른 ‘섬광’ 이런 낭만 같은…!”
“5살을 랜슬롯에 태워요?!”
마리안느 님, 당신은 대체….
스자쿠가 멍한 얼굴로 쳐다보자 로이드가 뭔가 변명하듯이 대답했다.
“아니, 그때 오빠들은 해주면서 왜 자기는 안 되냐고 하면서 황녀 전하가 떼를 써서 한 번 태워봤던 것뿐이었고 그리고 그건 마리안느 님의 동의하에 있었던 일이라 합법적이었던 것~ 스자쿠 군, 인상 풀어, 풀어, 그래, 그래.”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지만 다음 테스트까지 삼십 분 정도 남았으니 밥이라도 먹는 게 어떠냐는 세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 전하께서 도시락을 싸주셨어요. 먹음직스러운 도시락의 등장에 기계에 매달리던 로이드까지 테이블에 달라붙어서 식사를 했다.
먹으면서 다들 아리에스의 안부를 물었다. 를르슈가 말했던 사건 사고들을 말하는 건 조금 그렇지만 그냥 호위 일은 나쁘지 않다는 말만 했다.
“황녀 전하는 여전하시고?”
“새로운 KMF에 태우고 싶으신거죠?”
“아하, 들켰나?”
“아마 를르슈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긴, 그 어렸을 때에도 어머니도 가만히 있는데 쌍둥이 오빠가 소리를 지르면서 싫어하더라고. 여전하시군.”
“덕분에 맛있는 도시락을 먹고 있는 겁니다.”
“앗, 감사하다고 전해줘, 스자쿠 군.”
입가심으로 다같이 차 한 잔이나 할까 하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특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특파에 들리는 사람은 대부분 슈나이젤이나 그쪽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사람들이 스자쿠를 찾으러 온 사람이던가.
그러나 눈앞의 사람은 예상했던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스자쿠의 인생에서 얽힐 일도 없을 것 같은 사람 넘버 원 정도에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랑 관련된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우연에 가까운 수준으로 한 번 만난거고. 그 사람을 떠올리니 정말 분위기가 정반대라는 것이 다시 느껴진다. 아니, 애초에 이 집안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갭이 심한가?!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가 코넬리아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코넬리아 리 브리타니아는 낯선 특파의 내부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스자쿠를 찾아내 손등의 키스를 받았다. 스자쿠가 알기로는 넘버스 출신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기꺼이 손을 내밀고 키스까지 받는다는 건 나이트 오브 라운즈여서? 예상 밖의 인물이기 때문에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다.
로이드는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고 세실은 차를 내올 물을 다시 끓이겠다며 커피포트로 달려갔다. 홀로 남은 스자쿠가 코넬리아를 상대해야했다. 방금 전부터 벅차다. 줄리어스 킹슬레이부터 코넬리아 리 브리타니아까지. 우선 자리에 앉혔다. 코넬리아는 불쾌하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자쿠는 더 곤혹스러웠다.
“유피와도 한 번 만났다지?”
“아, 네. 예전에 자선 파티에서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 파티에 자주 가는 편인가?”
“원래 파티나 연회, 이런 곳에는 익숙하지가 않지만 그래도 초대장이 온다면 참석하려고 합니다. 특히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써 참석해야할 때는 제국의 영광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 노력합니다.”
“…….”
세실이 덜덜 떨리는 손길로 티백을 담근 찻잔 두 개를 내어주었다. 코넬리아는 그것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또 저멀리 가버리는 세실. 데이터의 수치를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는 로이드. 아무도 스자쿠를 도와줄 생각은 안 하는 것 같다.
“나와 함께 전투에 참전한 적은 없던 것 같더군.”
“저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 황제 폐하의 기사이기 때문에 아마 코넬리아 전하와 함께 움직이는 일이 드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뭐하는 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
“사교계에서는 적당히 예쁘장한 여자만 있으면 하룻밤을 테라스에서도 보낼 수 있는 놈이라고 소문이 나서 확인을 하려고 하니, 유피는 네가 이야기를 해보면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아리에스에 가서 직접 확인해보려고 초대장을 보내면 를르슈가 죄다 거절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자니 그 걱정 많은 아이가 또 겁을 먹을 까봐 못하겠고!”
코넬리아는 티백을 휘휘 저으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던 나이트 오브 라운즈 녀석들은 호위를 맡던 중에 단 한 번도 아리에스 밖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오는 순간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써 임무를 맡을 때 말고는 없었지. 그런데 너는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고 있는 와중에 연회에 참석하고, 특파인지 뭔지, 그런 조잡한 KMF 조정에 호위를 내팽개치고 나와? 아리에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거냐?! 를르슈가 전임 기사를 갖지 못할 정도로 불안한 상태인데 호위를 비우다니. 사교계의 소문 따위 이제 어찌되든 좋다. 너는 나이트 오브 세븐 실격이다.”
“자, 잠시만요, 전하.”
“아버지께 말씀드려 나이트 오브 세븐 지위를 박탈시키고 너는……. 그래, 네 주제에 맞는 명예 브리타니아인으로 사는 게 나을 거다. 에리어11 출신이라고 했던가? 고향으로 보내주지.”
“코넬리아 전하!”
잠시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스자쿠는 펄펄 끓고 있는 뜨거운 물을 꿀꺽꿀꺽 삼키며 말했다.
“사교계에 도는 제 소문은 솔직히 어떻게 수습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넘버스 출신이라 더 그런 염문이 도는 것 같아 죄스럽습니다. 연회에 참석했던 건 를르슈 전하의 명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솔직히 그때도 자리를 비워도 안됐지만, 다행히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리에스의 호위를 내팽개친 것이 아니라, 오늘 킹슬레이 경과 나이트 오브 스리가 아리에스를 방문하는 날이었고, 마침 나나리 전하와 제레미아 경도 함께 하고, 당연히 를르슈 전하도 같이 있기 때문에 저 말고 다른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있다면 몇 시간 정도 자리를 비워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삼십 분 후면 바로 아리에스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목구멍이 홀라당 데어버렸지만 침착해졌다.
흥분한 것 같던 코넬리아도 차분해진 것 같았다. 오해를 하면 폭주하는 건 집안 내력인가. 스자쿠는 따끔거리는 목을 겨우 침을 삼켰다.
“특파의 일은 슈나이젤 재상 각하 소속이고, 나이트 오브 라운즈 이전부터 했던 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KMF 특성상 정기 조정이 필요하기에 를르슈 전하께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브리타니아의 하얀 사신’은 매번 그런 번거로운 조정을 한단 말이지?”
“제 주제에 그 별명은 조금 부끄럽네요.”
“명성은 자자하니까.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거의 밀어버린건 네가 한 일 아닌가? 나머지는 줄리어스와 나이트 오브 스리가 대충 공을 세웠지만.”
“두 사람이 확실하게 마무리를 해줬기에 안심입니다.”
“유피한테 들은 대로인 거 같기도 하고.”
코넬리아는 이제 반쯤 식은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스자쿠는 이미 마실 것이 없는 찻잔을 그냥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던데.”
“유페미아 전하의 과찬이십니다.”
“하긴, 유피는 사람을 너무 좋게 보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닌데. 그래서 기사를 골라줄 때 걱정이 돼. 그래도 전임 기사를 고르는 건 황족의 특권이니까 내가 마음대로 골라주는 건 너무한 거 같아서 직접 고르게 할 건데….”
“코넬리아 전하의 안목이라면 믿고 맡기실 수 있는 분이시겠죠.”
“유피가 기분이 상할까봐 걱정인거지.”
이제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를르슈가 나나리의 걱정을 하듯이 코넬리아 전하의 유페미아 전하의 걱정? 집안 내력에 동생 걱정이 있는 것도 신기한 브리타니아 문화. 스자쿠는 찻잔 속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코넬리아의 시선을 느꼈다. 를르슈 만큼이나 진한 보랏빛 눈동자가 선연했다.
“예, 전하.”
“를르슈와 나나리는 잘 지내?”
“두 전하 모두 잘 지내십니다.”
“줄리어스는 킹슬레이라는 성을 받고 나서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활약하는 이야길 듣고 나서 오히려 안심을 했는데. 를르슈와 나나리 소식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래. 아리에스의 호위 임무 중에 나오는 놈을 작위 박탈시킬 생각으로.”
“…….”
호로록. 코넬리아의 차 마시는 소리에 한 템포 쉬어가는 대화. 조금 누그러진 대화 분위기에 세실과 로이드의 손짓도 여유로워졌다. 오늘 적합률 높았으니까 나머지 테스트 안하고 그냥 아리에스로 돌아가면 좋겠는데. 그럼 부르는 날짜가 빨라질까? 그건 좀 싫은데….
“를르슈 전하는 슈나이젤 재상 각하의 업무를 돕는 듯합니다. 자세한 일은 저도 잘 몰라서…. 그리고 나나리 전하는 운동을 잘하셔서 학교에서도 대회를 나가십니다.”
“를르슈는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군. 나나리는 마리안느 님을 닮아서 운동신경이 좋은 건 예전부터 그랬지.”
“…를르슈 전하는 초대장을 보내도 다 거절하시나요?”
“응. 내 것도 그러고, 유피 것도 그러고, 모두한테 다 그래.”
“…….”
“마리안느 님 사건 이후부터지. 그리고 줄리어스가 아리에스를 나가고부터 더 그래.”
아버지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보내는 특단의 대책을 세웠지만 그럴수록 를르슈는…. 코넬리아는 말끝을 줄였다. 찻잔의 내용물 절반을 비운 코넬리아는 그제서야 특파 내부를 둘러보았다. 내가 가진 연구실이랑 비슷하네. 짧막한 감상을 남긴 코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네, 쿠루루기 경.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동생들의 안부를 묻고 싶어서 말이야. 유피도 걱정하고 있고. 아, 유피한테도 이야기를 전해도 될까?”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네.”
코넬리아의 구두소리가 출입문 밖에서 끊기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스자쿠는 찌릿찌릿 아파오는 목 때문에 미간을 찡그렸다. 테스트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요? 스자쿠의 물음에 로이드가 손을 내저었다. 안되겠어, 코넬리아 전하 때문에 긴장 풀려서 손이 떨린단 말이야—.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까!
슈나이젤과 묘하게 라이벌 관계인 코넬리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슈나이젤 직속 기관인 특파는 긴장을 안할 수가 없었다. 스자쿠도 인정했다. 다리가 풀린 세실이 자기도 무리라면서 스자쿠에게 조심히 돌아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장으로 갈아입은 스자쿠는 를르슈가 싸준 도시락통을 챙겨들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스자쿠의 인사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바닥에 흐느적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를 부르고 돌아가면 일곱시 반이었다. 어라. 테스트도 덜 했는데 왜 늦었지? 생각해보니까 코넬리아와의 대화가 길어졌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황녀 전하였다. 도착했다는 운전기사의 말에 바로 내려서 아리에스 궁으로 달려갔다.
“다녀왔습니다.”
스자쿠의 등장에 왜인지 모르게 침체된 분위기의 메이드들이 고개를 숙이며 반겼다. 궁의 분위기 자체가 아예 가라앉았다. 잠깐 삼십 분 늦은 사이에 무슨 일이?! 스자쿠는 도시락통을 식당에 맡겨놓고 우선 를르슈의 집무실 쪽으로 달려갔다.
“를르슈 전하, 저 왔습니다.”
노크를 두 번. 그러나 대답이 없다.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들어오라는 말도 안하는데 들어오는 놈은 어디서 배워먹은 기사도냐?”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
“그, 들었습니다. 원래 아리에스의 호위 중에는 자리를 비우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없었다고.”
“그래서?”
문 안쪽의 를르슈는 어떤 조명도 켜지 않은 채로 그저 저녁노을에 의지하여 책 한 권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스자쿠에게 읽으라며 줬던 소설책이었다. 팔랑팔랑 넘기는 종이소리에 스자쿠는 따끔거리는 목을 무시하며 침을 삼켰다.
“오늘 같은 일은 이제 없도록 하겠습니다.”
“스자쿠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지?”
“네.”
“나이트 오브 세븐?”
“…네.”
“특파는 슈나이젤 형님 소속?”
“그렇습니다.”
“나랑 관련도 없는데 내 호위를 하느라 애를 쓸 필요 없다. 그냥 하루 두 번 내 생사나 확인해. 필사적으로 지킬 필요도 없다. 스자쿠가 내 전임 기사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소속 친위대인 것도 아니고.”
소설책을 덮은 를르슈는 책상 위에 그것을 아무렇게나 두었다. 긴 앞머리가 를르슈의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전하.”
“오지 마.”
“죄송합니다.”
“…뭐가?”
“제가 약속한 시간에 늦었잖아요.”
를르슈는 다가오는 스자쿠의 팔을 붙잡았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하얀 정장에 붙잡힌 하얀 손끝이 노을빛에 젖어들었다. 고개를 숙인 를르슈가 중얼거렸다.
“네가 오지 않은 삼십 분 동안.”
“…….”
“지노와 줄리어스에게 나와 나나리의 목숨을 구걸했다.”
“…….”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 진짜로 미안하다면.”
그저 식사 시간을 늘리고, 스자쿠의 귀환을 기다려달라고 말했을 뿐이었겠지만, 를르슈의 자존심은 박살이 났을 것이다.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가 쓴웃음을 짓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그 맹세를 할 수 있을까.
스자쿠는 제 팔을 붙잡고 있는 를르슈의 왼손을 잡았다. 황족에게는 익숙할 수 있는 충성과 경애의 키스. 손등에 닿는 스자쿠의 입술에 를르슈는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손등의 키스를 받은 를르슈는 이제 귀찮으니 나가보라고 했다. 스자쿠가 머뭇거리자 를르슈는 말투에 가시를 세웠다.
“안 그래도 귀찮은 것들을 두 명이나 상대해서 피곤한데 너까지 그러면 나는 쓰러질 지도 모른다. 스자쿠는 내가 쓰러졌으면 좋겠어? 어쩌면 그런 편이 호위하기엔 편하겠군.”
“아,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주무실 시간이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고작 침실까지 호위는 없어도.”
“계속 아리에스를 비워서 저도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그것에 대한 벌충도 하게 해주시고요.”
그 말에 를르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당겨 웃는 그 모습에 스자쿠는 마음이 놓였다.
“벌충을 고작 그걸로 하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알겠어, 어차피 잘 시간이 되면 나나리가 여기로 올 테니 너도 오겠지. 그래, 호위를 하도록.”
이제 진짜로 혼자 남아서 쉬고 싶다고 말하는 를르슈의 말에 등 떠밀려 나온 스자쿠는 홀로 복도를 걸었다. 저녁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하늘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 크게 화를 안 내셔서 다행이다. 아니, 오히려 내주셨으면 더 좋았을 지도…. 아닌가? 스스로도 잘 정리가 안 되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고민 중에 바깥 풍경에 걸리는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스자쿠는 빠른 걸음으로 후원으로 나갔다.
“나나리 전하! 거기서 혼자서 뭘 하고 계십니까?!”
후원에는 지금 제레미아도, 메이드도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나나리 혼자서 벤치에 앉아있었다. 이 ‘비’ 가문의 황족들은 왜 이렇게 주변 신변에 대해서 경각심이라는 게 없는거지? 무방비한 상태가 디폴트인 것도 적당히 해야지! 스자쿠는 나나리의 주변을 두어 번 다시 살폈다. 아무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알 수가 없었다.
“스자쿠 씨, 이제 돌아오셨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에요. 오늘 떠나기 전에도 생각보다 늦을 거라고 먼저 말한 것도 스자쿠 씨였잖아요. 그리고 그것도 오라버니의 예상대로였기 때문에 저녁 식사도, 그 이후의 디저트 타임도 괜찮았어요.”
“그래도 삼십 분이나 늦었는걸요. 나나리 전하, 저에게 화를 내셔도 됩니다.”
“어머, 저는 화나지 않았어요.”
정말로요, 화낼 일이 없는걸요.
나나리의 평온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다르게 가라앉았다. 계속 같이 있지 못했던 스자쿠로써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라서 눈을 굴리다가 나나리의 옷이 아직도 드레스 차림인 걸 보고서 입을 열었다.
“전하의 드레스, 정말 귀엽네요. 평소에는 교복이나 간소하게 입으시는 모습만 보니까 좀 색다른 느낌이기도 하고요.”
“를르슈 오라버니가 골라주신 거예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드레스이기도 하고요. 스자쿠 씨한테 칭찬까지 들으니 오늘 기합 넣어서 입은 보람이 있네요.”
“를르슈 전하께서 골라주신 건가요? 를르슈 전하는 그런 쪽의 감각도 뛰어나시네요.”
“사실 줄리어스 오라버니도 센스가 좋거든요. 그러지만 를르슈 오라버니랑은 좀 반대의 스타일이라서…. 두 분이서 제 옷이나 드레스를 고를 때에는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어요.”
“킹슬레이 경도 그렇군요.”
“‘나나리의 피부가 너무 많이 드러난다!’하는 를르슈 오라버니라던가, ‘이 정도의 과감함도 감당하지 못할 패기도 없느냐, 를르슈?’하면서 저한테 옷을 들이미는 줄리어스 오라버니라던가….”
를르슈와 줄리어스의 성대모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나나리라니. 이럴 땐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청 유명한 대사를 떠올리며 스자쿠는 애매하게 웃었다. 결국 적당히 골라서 말을 했다.
“세 분이서 사이가 좋았군요.”
“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나나리는 아리에스 궁의 입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대요.”
“…네?”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어떤 때에도 셋이 함께라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셋이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도 좋다고 생각해서…친했던 코넬리아 언니나, 유피 언니랑도 만나지 못하게 되어도 저는 좋다고 생각했어요. 를르슈 오라버니랑 줄리어스 오라버니가…더 소중하니까요.”
“…….”
“그런데 셋이 함께 있던 때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오늘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말씀하시더라구요.”
과연 오늘의 시한폭탄은 그 이름값을 해준듯 했다. 스자쿠는 아픈 목구멍이 새삼 쓰려오는 것 같았다. 나나리는 울적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축 처진 어깨를 마구 두드릴 수는 없어서 스자쿠는 힘없이 놓인 나나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를르슈 전하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웬일로 맞는 소리를 다하는 거지?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더니 사실인가보군.’이라고….”
를르슈 전하!
스자쿠는 이 자리에 없는 를르슈를 마음 속으로 있는 힘껏 크게 불러보았다. 나나리는 상냥하게 잡아오는 스자쿠의 손에 힘주어 맞잡아왔다.
“두 분 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닐 겁니다.”
“진짜로 그럴까요?”
“…음, 사실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황족 밑의 신분이라 함부로 황족 분의 마음을 단언하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전하를 위로하고자 를르슈 전하의 마음을 추측하는 건 위험한 일이죠.”
“뭐예요, 위로하다가 말고 갑자기 예법을 따지시다니.”
나나리는 허탈한듯 웃었다. 스자쿠는 겨우 웃는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주며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직언은 할 수 있습니다. 를르슈 전하와 킹슬레이 경이 사이가 안 좋으시고, 나나리 전하께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나나리 전하께서 그것을 바꾸어 나가시면 되는 겁니다. 저는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나리 전하는 저를 이름으로 부르실 정도로 친한 사이니까 이정도 직언 정도는 들어주실거죠?”
생긋 웃는 스자쿠를 따라 나나리도 웃었다. 네! 경쾌한 대답에 스자쿠는 안심했다. 나나리는 제 손과 이어진 스자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신기한 듯이 외쳤다. 손이 굉장히 딱딱하네요.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군인이니까요. 여러가지 운동도 하고 있고, KMF 훈련을 하려면 여러가지 조정도 필요하고.
“저, 나나리 전하.”
“네?”
“오늘 아리에스는 어땠나요?”
“저의 활약이 듣고 싶나요?”
나나리 전하의 5살 때 활약이라면 듣고 왔다고 말하면 무슨 말을 하실까. 스자쿠는 아무튼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나리는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고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죠. 저도 소식을 들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랬더니 를르슈 오라버니가 그런 보여주기식 전략을 써서 소모적으로 굴지 말라면서 줄리어스 오라버니를 도발하더니 갑자기 체스판이 열리기 시작한거예요.”
“…네?”
“이제 담판을 지을 때가 왔다면서 두 분이서 블랙과 화이트를 나누시고 있는 와중에 지노 씨가 자기는 우선 줄리어스 오라버니에게 걸겠다면서 바인베르그 가문의 문장이 박힌 반지를 걸었고,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저에게 를르슈 오라버니한테 걸 것이 없냐고 말하길래….”
“네?”
“저도 를르슈 오라버니가 지는 게 싫어서 우선 를르슈 오라버니가 작년에 생일 선물로 사주신 아메시스트 팔찌를 걸었어요.”
“나나리 전하도 걸었다고요?!”
“를르슈 오라버니한테 다시없을 소중한 팔찌니까 제발 이겨달라고 응원했어요. 그래서 를르슈 오라버니가 이겨서,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진 대가로 저는 바인베르그 가문의 문장이 박힌 반지를 받았고….”
지노 녀석, 집에 가서 엄청 깨지겠군.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나나리의 청천벽력에 스자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저녁 식사를 만들었어요.”
“네?!”
“아, 방금 전에 말을 안 했네요. 지는 사람이 저녁 식사 만들기도 들어갔어요.”
“…….”
“스자쿠 씨 것도 남겨두긴 했는데. 지금 먹기엔 좀 늦었으려나….”
이젠 뭐가 어떻게 되는지. 줄리어스가 만든 걸 먹어도 되나? 스자쿠는 그래도 디저트는 를르슈와 자기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나나리의 말에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 삼 남매는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요리를 했으면 독이라도 타서 죽일 정도는 아닌건가?! 체스를 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건데 서로 저녁 식사 당번이나 정하는 걸로 내기하는 사이?!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특파는 어땠나요? 슈나이젤 오라버니가 만든 부서인데 또 아버지의 기사가 있는 곳이라서 아주 특이한 곳이잖아요.”
“그렇게 들으니까 또 특이하게 느껴지네요. 그곳이 일상이었던 저로써는 별로…. 아, 나나리 전하가 드셨어야 할 를르슈 전하의 도시락을 저와 특파 사람들끼리 먹었어요. 정말 맛있더라구요. 나나리 전하가 정말 부럽습니다.”
“오라버니의 도시락은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부러워한다구요. 저의 자부심입니다!”
“그리고 오늘 조정 테스트 결과가 아주 좋았어요. 다들 아리에스의 기운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냐는 농담을 하더라구요.”
“‘섬광의 마리안느’가 있던 아리에스니까요!”
나나리는 아주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많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들이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으면서 우리 어머니의 기운을 얻고 갔으니, 틀림없이 스자쿠 씨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죠! 역시나, 저의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마리안느 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으니까요.”
“가끔은…어머니가 그냥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 남고, 황후가 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벤치에서 일어나며 드레스의 주름을 펴기 시작하면서 나나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황후가 되지 않으셨더라면, 테러로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거라고….”
아랫입술을 깨문 나나리의 모습은 꼭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겠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힘든 날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 갈무리 되지 못한 채로 오늘까지. 스자쿠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저는 를르슈 전하도, 나나리 전하도 만날 수 없겠네요. ‘섬광의 마리안느’라는 전설적인 황후의 소문도 못 듣고. 그런 멋진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실력이 있어도 절대로 나이트 오브 세븐도 못 되었을 겁니다.”
“…….”
“마리안느 님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두 전하를 만난 일은 저에게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고, 기쁜 일입니다.”
“…정말로요?”
“나나리 전하, 잠시 귀를 가까이 해도 되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지도 몰라서요.”
나나리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스자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를르슈 전하와 나나리 전하를 만나는 것이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 작위를 받고 황제 폐하를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습니다. 이건 폐하께 들키면 목이 잘려나가니까 비밀로 해주세요.”
진짜로요. 스자쿠는 나나리와 눈을 맞춰 웃으며 떨어졌다. 나나리의 만연한 미소에 다시 안심이 되었다. 스자쿠 씨는 저한테 지금 빚을 진거예요.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면…. 나나리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그녀가 기운을 차린 것이 느껴졌다.
“궁으로 가실 거죠? 아직 주무시긴 이른데….”
“오라버니는 아마 쉬고 계실 테니까 방해하고 싶진 않아요. 저도 방에서 그냥 쉬겠습니다. 호스트로써 손님을 맞이하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네요.”
“그러던가요?”
“네, 그리고 오랜만에…줄리어스 오라버니가…엄청 놀려서…. 이런 이야기는 스자쿠 씨 앞에서 말하긴 좀 부끄러우니까요. 그래요, 자기 전에 다시 인사하러 오라버니 집무실로 갈게요.”
나나리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스자쿠는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워낙에 사람이 없는 궁이라 적적하다 못해 적막할 지경이었다. 나도 내 방에 갈까? 아니 그래도 호위를 해야 하는데. 근데 전하가 쉬고 싶다고 하셨으니까.
뭘 할까 고민하며 복도를 걷던 중에 습관적으로 를르슈의 집무실 앞으로 와버렸다. 근데 전하는 어떻게 쉬시는 거지?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두 번 노크를 할까,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 두 번의 노크로 를르슈의 휴식이 끝나게 되면 그건 또 못할 짓인 것 같았다. 만약에 그냥 자는 게 휴식이면 노크는 정말 최악이잖아.
인기척을 죽이는 것에는 도가 텄기에 스자쿠는 집무실 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이젠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비치는 집무실 창문과 책상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를르슈가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주무시고 계셔서! 문 열면서 순간 잠을 안 자면 불경죄로 작위 박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자쿠는 철저하게 발소리를 죽이며 제 전용 의자에 앉았다. 를르슈는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었다. 누가 보고 있다면 잠깐 생각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손에 걸린 것은 책이 아니라 앨범 같았다. 어렸을 적 사진인가? 보고 싶지만 가까이 가면 인기척 때문에 깰 것이 분명하니까 참는 수밖에.
앨범을 왜 보고 계시지?
역시 말씀은 그렇게 하셨더라도 어렸을 적의 우애가 그리우신건가. 나나리 전하를 끔찍이 아끼시는 걸 보면 킹슬레이 경도 지금은 그렇지만 옛날에는 사이가…좋…좋…지 않았을 것 같아, 방금 전 나나리 전하 말씀을 들어보면 별로 안 좋았던 거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정말 킹슬레이 경과 쌍둥이 형제는 맞긴 맞구나. 낮에 봤었을 때도 정말 거울을 보는 느낌이었지. 우아함과 기품은 둘 다 지지 않지만 요염함은 뭔가 킹슬레이 경이 우위라고 치면, 청순함은 를르슈 전하가…. 그래봤자 둘 다 남자라 소용이 없지? 귀여움은 나나리 전하가 압승이지만. 아니 어쩌면 를르슈 전하도 지지 않을 귀여운 구석이 있으니까…. 쉽게 승부가 안 나네.
근데 를르슈 전하도, 킹슬레이 경도 둘 다 요리를 잘한다니 의외야. 황족은 그런거 오히려 더 안하지 않나? 독살에 대한 대비를 하려면 독에 대한 면역을 기르는 훈련을 하는 걸로 아는데. 나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었을 때 그 훈련을 받았지, 요리를 배우진 않았어….
를르슈 전하는 쉬신다고 하시면서 매번 앨범을 보고 그러시는구나. 왠지 귀엽다. 사실 귀여운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진짜 아름다운 편이니까. 마리안느 님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 시절부터 미모로 유명했다고 했는데 황후가 되고 나서도 총애를 받는 이유가 미모 때문이라는 이유가 많았지. 그런 마리안느 님을 빼닮은 를르슈 전하는 오히려 더…근데 이거 지난 번에도 생각한 것 같지만, 마리안느 님보다 를르슈 전하 쪽이 더 내 취향….
“너는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 자는 사람 얼굴을 뭘 그렇게 구경 난 것처럼 쳐다보고 있어?”
“…네?”
“뭐가 ‘네?’야. 쉬고 싶다고 말한 거 같은데, 왜 또 들어왔어?”
“아….”
“왜 대답이 없지?”
“…….”
“스자쿠.”
“할 말이 없어서요….”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 살면서 지금까지 했던 대답 중 제일 형편 없는 대답이다. 를르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고개를 숙였다. 를르슈는 앨범을 닫았다.
“됐어, 호위 중에 맘대로 자리나 비우는 녀석에게 이제 뭘 바라겠나.”
“그건 벌충하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말대꾸나 하는 괘씸한 놈이…. 나나리는?”
“오늘 일 때문에 피곤하시다고 방에서 쉬신다고 하십니다. 주무시기 전에 인사하러 다시 내려오신대요.”
“멍청이랑 미친놈 상대하는데 안 피곤할 수가 없지.”
“멍청이는 지노일 테고, 미친놈은…킹슬레이 경인가요?”
“그래.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스자쿠, 손을.
를르슈의 말에 두 손을 내밀면 반지 하나가 똑 떨어졌다. 하얀 반지에 하늘색으로 복잡한 문장이 박혀있는 것이 어딘가 익숙했다. 이거 설마.
“이거 체스에서 걸었다는 지노의 반지입니까?”
“그래. 지노를 만나면 돌려줘.”
“전하가 이겨서 따신 거잖아요.”
“바인베르그의 후계자만이 가질 수 있는 반지를 내가 가져서 뭐해? 그리고 그게 없으면 곤란한 건 지노다. 멍청이 자식. 그걸 진짜로 걸 줄이야. 이쪽만 피곤하게 됐어.”
우선 주머니에 넣어두었지만, 넣으면서 스자쿠는 의문이 들었다.
“지노가 다시 아리에스에 옵니까?”
“미쳤어? 지노도, 줄리어스도 여기에 이제 두 번 다시 안 부른다. 그것이 설령 나나리의 부탁이라고 하더라도.”
“그럼 제가 어떻게 전해주나요?”
“연회에서 만난다거나, 야회나, 특파에 가는 김에 전해달라고 하던가 그래.”
“그럼 아리에스를 비워야 하잖아요. 오늘 코넬리아 전하께 제가 얼마나 혼났는지 아십니까!”
“코넬리아 누님이 왜?”
를르슈에게 코넬리아와 있었던 일을 전해주자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부쩍 우리한테 계속 신경을 쓰시더니 너한테까지. 지노랑 아냐는 원래부터 아리에스 궁에 자주 드나드는 애들이라 안 그러셨던 모양이야. 괜한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 스자쿠. 를르슈의 나직한 목소리에 스자쿠는 괜찮다고 말했다.
“지노랑 아냐는 원래 아리에스 궁에 자주 왔었나요?”
“응. 지노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기 전에 아마 내 기사가 될 수도 있었을 거야.”
“…….”
“그렇지만 그 바인베르그 가문에서는 황위 계승권도 떨어지는 데다가, 테러로 죽은 황후의 소생의 기사를 하면 집안의 격이 떨어진다고 지노를 말렸다고…뭐,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네.”
그래서 들인 기사 후보는 자살 폭탄 테러로 를르슈를 죽이려고 했었다.
“아냐도 나나리의 기사가 되려고 했었지만…. 마찬가지로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 근데 스자쿠도 알다시피 우리는 브리타니아를 떠날 거니까. 이쪽과 이제 얽히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해. 아리에스의 호위도 사정을 전혀 모르는 나이트 오브 세븐인 스자쿠까지 올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지. 아직 세상을 믿을 수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우습게도 황제는 나이트 오브 원 다음으로 지노와 아냐, 그 둘에게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긴다. 를르슈는 시계를 보더니 이제 슬슬 나나리가 내려올 시간이라며 문을 열어두라고 했다. 커튼을 스스로 닫는 황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스자쿠는 주먹을 쥐었다.
저렇게 상냥한 사람에게 세상은 왜 이렇게 가혹하기만 할까. 자신의 다정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한 황자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참. 스자쿠, 뜨거운 차를 급하게 마셨다고 했지? 사요코한테 약이라도 달라고 해. 상비약 중에 적당한 게 있을 거야. 당분간 찬 물도, 뜨거운 물도 금지야. 미지근한 것만 마시고. 맵고 쓰고 달고 짠 것, 금지.”
“를르슈 전하, 저는 전하랑 동갑입니다. 소아과에 온 어린이가 아닙니다.”
“이론서 안 보고 몸으로 깨우쳐서 많이 혼났던 사관생도였다며? 이 정도는 해야 말을 들을 것 같은데.”
열어둔 문으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나리가 들어왔다. 오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는 나나리를 무릎에 태우고서 를르슈는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이가 아니니까 의자를 달라고 하는 나나리에게 를르슈는 아침에 울린 게 미안하니까 한 번만 안아주고 의자에 보내주겠다고 한 것에 그대로 서로 끌어안았다. 참으로 사이좋은 남매였다.
“홍차를 내리는 걸 더 연습해야겠어요. 오라버니, 도와주세요.”
“그럼 티 타임을 더 자주 가져야겠네.”
“디저트는 없어도 되니까요!”
“진짜로 없으면 실망할거잖아.”
“음…. 하나?”
“디저트의 종류가?”
“갯수입니다!”
“알았어. 나나리가 학교에 간 사이에 준비할게. 대신 스자쿠가 먹고 싶은 것까지 합쳐서 준비하면 안 돼?”
“좋아요. 스자쿠 씨도 제 홍차 연습에 도와주실 거죠?”
갑자기 저를 끼우는 대화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기꺼이요.”
“스자쿠가 먹고 싶은 디저트가 열 종류면 열 종류 다 만들 거야.”
“그럼 홍차를 백 번이고 내릴거예요!”
“저는 디저트도 홍차도 그렇게 많이 못 먹으니까 두 분 다 그만하세요.”
까르르 웃는 나나리의 웃음소리에 를르슈도, 스자쿠도 기분 좋게 웃었다. 나나리의 뒷머리를 쓸어내려주며 를르슈는 이제 자러 가야지, 하고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상냥한 오라버니의 굿 나잇 키스에 나나리도 를르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오라버니.”
“나도 사랑한다, 나나리.”
나나리의 발소리가 방까지 무사히 닿고, 그리고 방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스자쿠는 를르슈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를르슈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평소답지 않은 아리에스의 일정에 지친 것이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휴식 중이었는데 스자쿠가 멋대로 들어와서 방해까지 했으니. 스자쿠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스자쿠.”
“네, 전하.”
“말한 대로 침실까지 호위해라.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이젠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
앞장 서는 를르슈보다 두세 걸음 늦게 따라 걸으며 스자쿠는 그의 등을 살폈다. 오늘은 나나리가 드레스를 입을 정도의 손님이 왔으니, 그의 오빠인 를르슈도 나름 황자처럼 갖춰 입었다. 그래봤자 스자쿠가 왔던 첫날에 입었던 모양으로 단순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평소의 셔츠 차림에 비하면 무겁고 피곤할 수도 있겠다.
그런 와중에 삼십 분이나 지각하고. 나는 정말…. 목이 붙어있는 게 신기해. 코넬리아 전하가 살려두신 건 어쩌면 를르슈 전하 손에 죽으라고 그런 걸지도 몰라….
“그래서 벌충은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 생각도 안했습니다.”
“방금 전부터 계속 그렇게 대답하는 건 상대가 나니까 만만해서 그렇게 대답하는 거냐, 스자쿠?”
“아닙니다, 전하.”
“너는 어떻게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된 건지….”
“운이 좋았습니다.”
“뻔뻔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럼 벌충은 내가 정해도 돼?”
“그럼요.”
“아무거나?”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만 가능합니다.”
“뒤늦게 조건 붙이지 마.”
약은 자식. 그러고 보면 를르슈는 은근히 입이 험했다. 나나리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오라버니라서 잘 몰랐을 뿐이었다. 킹슬레이 경과 함께 있을 때의 전하께서는……장난 없지. 그래. 나한테 이러시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내일 먹고 싶은 디저트는?”
“네? 디저트요?”
“나나리가 홍차 연습 한다고 했잖아. 종류가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너의 리퀘스트도 들어야 하니까. 차는 못 마셔도 디저트는 먹을 수 있을 거고.”
“음…. 저는 디저트 종류를 잘 몰라서, 솔직히 뭐든 좋은데요.”
“그럼 무난하게 치즈케이크로 할까….”
“전하께서 직접 만드시는 겁니까?”
“그럼 누가 만들어?”
“…보통 파티쉐가 따로 있지 않나요?”
“그런 놈들을 어떻게 믿어. 그리고 요리나 베이킹은 시간 죽이기엔 아주 최적인 취미라고.”
침실 앞에 다다랐다. 침실 문 앞에서 를르슈는 문을 열고 들어섰고, 스자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전하, 안녕히 주무십시오. 좋은 꿈을. 스자쿠의 밤 인사에 를르슈는 숙여진 갈색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갑작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놀라서 쳐다보면 를르슈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저도 따라서 밤 인사를 했다. 잘 자, 스자쿠.
침실 문이 닫히고, 스자쿠는 혼자서 복도를 걸으며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중에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달이 유난히 밝고, 별이 유난히 총총 뜬 밤하늘이었다. 약간 보랏빛이 도는 것이 더 감동적인 게, 왜인지 를르슈가 더 생각나는 밤이었다.
* * *
아리에스 궁에서는 아침에 나나리와 조깅이 끝나고 샤워, 그리고 식사를 한다. 황족과의 겸상이 이제 익숙해졌다고 하면 불경하다고 할까. 스자쿠는 아침식사인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황족 남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주에 있을 시험에 대해서 나나리가 불안해하면, 를르슈가 도와줄 테니 주말에 각오하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시험 안 봐서 다행이다.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안도했다.
“참, 나나리. 홍차 연습하자던 티 타임은 일주일 후부터 할 수 있을까?”
“상관없지만 무슨 급하신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스자쿠가 지금 입에 화상을 입어서 나을 때까지 시간이 걸리거든.”
“스자쿠 씨,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나나리에게 스자쿠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 것 아닙니다. 그냥 뜨거운 걸 빨리 마시느라 그럴 뿐이고…. 티 타임도 안 미루셔도 되고요.”
“아니에요, 사람이 아픈데…. 왜 어제 말하지 않았나요? 속상합니다.”
“나나리 전하를 속상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말씀 드릴 타이밍을 놓쳐서….”
“스자쿠도 어제 바빠서 아리에스를 비운 와중에 화상 입은 걸 말할 정신이 있겠어? 나나리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 네가 속상해하면 나는 어떻겠어?”
“…죄송합니다, 오라버니. 스자쿠 씨도 빨리 나으세요.”
제레미아가 곧 나가야할 시간이라고 다가오자 나나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를르슈에게 뺨 키스를 주고 받고 나가는 나나리에게 스자쿠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를르슈와 단 둘이 남은 식당. 를르슈는 난데없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스자쿠가 놀라서 쳐다보면 를르슈는 다리를 꼬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또 뭘하지.”
“……밖으로 나가시는 건.”
“무슨 봉변을 당할까 무서워서 못 나가겠다.”
“그렇다면 책을….”
“아리에스 궁 안에 있는 책은 다 읽었다. 스자쿠가 원한다면 암송도 해주지. 아니면 흥미롭게 읽었던 책의 구절이라도 읊어줘?”
암송이라면 외웠다는 뜻이다. 집무실의 책장도 엄청 큰데, 예전에 둘러봤던 서고도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그 모든 책들을 다…. 스자쿠는 살짝 겁먹은 모양새로 다시 도전했다.
“저랑 보드게임이라도….”
“스자쿠는 내 상대가 안 돼. 나나리 정도가 되면 한 수 접고 들어가주는데 너한테 그럴 아량을 베풀어줘야 할까.”
“전하는 킹슬레이 경의 쌍둥이 형제가 맞군요.”
“왜 갑자기 욕이야? 황실 모욕죄로 감옥가고 싶어?”
때마침 메이드가 다가와서 접시를 치우고 있었다. 를르슈는 차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오늘은 귀찮아서 내가 내올 기분이 아니니까. 메이드가 기다려 달라고 하며 나갔고, 식당엔 다시 둘이 남았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랑 브리타니아 제국의 제11황자랑 법정공방을 하면 누가 이길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전하.”
“만약에 우리가 서로에 대한 모욕죄로 싸운다면 말이야. 누가 이길까?”
“전 전하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전하를 모욕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보고 줄리어스 킹슬레이랑 쌍둥이 형제라며.”
“사실이지 않습니까!”
“…사실적시에 따른 명예 훼손이다.”
“그럼 민사로 들어가게 되나요? 나이트 오브 세븐의 자금력으로 끌어 모은 변호인단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비겁하구나, 돈으로 명예를 회복하려고 해봤자…….”
“를르슈 전하, 나이트 오브 세븐, 차를 준비했습니다.”
메이드장인 사요코가 나타났다. 식사를 하신지 얼마 안 됐으니 다과는 간단한 걸로 준비했습니다. 나긋한 그녀의 말투는 지금까지의 멍청한 대화를 못들은 척 해주겠다는 뜻이 다분했다. 다갈색의 따끈따끈한 홍차가 김이 모락모락. 스자쿠는 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스자쿠.”
“네?”
“너, 화상 입었으니까 더 식은 뒤에 마셔라. 아직은 뜨거우니까.”
“솔직히 이 정도 화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셔도 괜찮….”
“내가 안 괜찮아!”
“…….”
“자꾸 그렇게 굴면 내가 마실 때까지 너도 마시지 마. 이건 명령이다.”
팔짱을 끼고 기고만장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를르슈에게 스자쿠가 할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Yes, Your Highness.”
그렇게 말하면, 를르슈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홍차를 마시면서 다시 오늘의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사요코는 오늘 온 페이퍼 나이프와 우편물을 내밀었다. 를르슈는 발신인의 이름만 보고서 뜯지도 않고 한쪽으로 편지들을 몰아넣었다. 대부분 연회에 대한 초대장인 것 같았다.
“이 미친놈은 어제부터 왜….”
“무슨 일입니까?”
“줄리어스 킹슬레이다. 안 보면 안 봤다는 핑계로 뭔 짓을 할 지 모르니….”
페이퍼 나이프로 깔끔하게 뜯어내며 를르슈는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후우. 를르슈의 한숨에 스자쿠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스자쿠, 라이터 있어? 지금 당장 이 편지 태워버리고 싶은데.”
“없습니다만….”
“그럼 잠깐 식당에 다녀오겠다.”
“네? 갑자기요?”
“이놈의 편지 태우러. 이 부정한 것이 아리에스에 있다니, 편지를 뜯은 나도 나다. 정화 의식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래, 오늘의 일정은 정화 의식이다. 스자쿠의 나라에서는 소금을 뿌려서 악한 기운을 내쫓는다지? 식당부터 후원까지 전부 다 소금을 뿌리자. 제레미아한테 연락해서 오는 길에 소금을 1톤 사오라고 해.”
“전하, 잠시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침착하세요, 침착. 를르슈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자리에 앉혔다. 차라도 다시 드세요. 저는 식을 때까지 마시지 않을거지만 전하는 따뜻할 때 드세요. 다행히 찻주전자에 들어있는 건 아직 식지 않았다. 스자쿠는 안심하며 차를 따랐다. 를르슈는 한 모금 들이키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잠깐 이성을 잃었다.”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황자로써 부끄러운 꼴을 보였군.”
“방금 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죠.”
진짜 부끄러운 건 당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까. 스자쿠는 뒷말을 삼키며 애써 웃었다. 오늘의 일정은 그럼 진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스자쿠의 묻는 말에 를르슈는 손에 들고 있던 줄리어스의 편지를 내밀었다.
[사랑하는 를르슈
어제 만났지만 그간의 쌓인 그리움을 다 풀기에는 아쉬운 것 같아.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나의 저택에 한 번 와줬으면 좋겠어.
나이트 오브 스리도 너가 와주길 기대하고 있어.
나나리도 오면 좋겠지만 사실 형제들끼리의 우애를 깊이 다지는 시간을 갖고 싶어.
오게 된다면 연락을 줘.
어차피 할 일 없는 거 슈나이젤 재상 각하께 이야기 들어 알고 있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게.
P.S. 요새 유행하는 로즈핑크라는 립스틱 색깔이래]
왜 입술 도장이 찍혀있나 했더니 서명 대신에 키스를 보낸 것이었다. 줄리어스답다면 줄리어스다운 것이지만…. 불태우고 싶은 를르슈의 마음도 알 것 같은 것이다. 아무튼 편지를 읽은 감상은 해야할 것 같아서 스자쿠는 입을 열었다. 진부한 말이 나오겠지만…난 머리가 좋지 않은걸!
“전하와 킹슬레이 경은 사이가 좋군요!”
“아무래도 나이트 오브 세븐은 나를 암살하러 온 자객인 걸로 제레미아에게 말해야겠다. 그동안 고마웠다.”
“앗, 전하…!”
“그따위 말 좀 하지 말아라. 네가 C.C.냐?”
“저는 정말 말주변이 없어서요……. 그럼 그냥 떠오르는 생각대로 말해도 됩니까?”
“차라리 그 편이 낫다.”
“황실 모욕죄로 감옥….”
“안 보내.”
“C.C.씨 옆 피자 냄새 나는 독방….”
“안 보낸다고! 오히려 줄리어스와 사이가 좋다고 말하는 게 나한테는 모욕이다!”
그렇다면 안심이다. 미지근한 홍차를 한 모금 들이킨 스자쿠는 진짜 솔직한 감상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지노는 왜 자꾸 킹슬레이 경 옆에 붙어있나요?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지금 여덟 명 밖에 없고, 아리에스 궁의 호위로 제가 전선에서 빠지면서 전력이 부족할 텐데. 유로 브리타니아 일 말고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일은 많은데 말이죠.”
“…아마 줄리어스 때문일거다. 아버지는 줄리어스가 아리에스 밖에서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하는 게 걱정이 되어서 그러시는 거겠지.”
“그러면 오히려 킹슬레이 경을 황자로 계속 두시는 게 낫지 않았나요? 전임 기사를 두고…아.”
아, 라는 말이 바로 나온 것은 를르슈의 기사 후보가 자살 폭탄을 달았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스자쿠가 바로 이해한 것에 를르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는 줄리어스가 킹슬레이라는 성을 받고 아리에스 밖을 나간 것에 안심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군사라는 작위를 내리고, 그리고 호위라는 이름으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계속 붙여 놓을 수 있으니까. 어지간한 황족보다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살아도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고 하면 다들 아무 말 못하지 않나?”
“…그렇긴 하죠.”
“그래도 이 녀석이 나를 초대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집 나가서 잘 사는 내 모습 봐달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내 일정을 꿰고 있는 것도 기분 나빠. 슈나이젤 형님이 이 녀석한테도 잘 해주는 이유가 뭔지 알아? 뭘까요? 궁금하네요. 나랑 닮아서 잘해주고 싶대. 어이없지? …음, 쌍둥이니까 닮았죠? 그리고 이복형제여도 형제니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게 아닐까요?
“나는 줄리어스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데?”
“…대체 왜 그렇게 킹슬레이 경을 싫어하나요?”
“너무 오래 전부터 싫어해서 기억은 안 나는데, 최근 일부터 하면 피크닉 때일까?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은 키스로 깨우는 거라면서 키스를 하는데 혀를 넣지 않나, 예전부터 자기 첫 번째는 나라고 하면서, 나의 첫 번째도 자기여야 한다고 강요하고.”
응?
“아, 생각났어. 나나리가 네 살 때, 정말 세상 어느 공주보다 귀여웠을 때였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사람은 누구게요!’
‘당연히 우리 나나리지!’
‘그럼 예쁜 사람은?’
‘나나리!’
‘…줄리어스 오라버니는요? 나나리가 아닌가요?’
‘듣자 듣자하니까 를르슈, 너 바보 아니야?’
‘뭐?’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사람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도 다 너잖아! 나나리는 너, 나, 어머니, 그 다음, 네 번째 정도라고! 유피까지 합하면 다섯번째, 코넬리아 누님까지 합하면 여섯번째, 아니 더 하면, 솔직히 나나리는 세계 레벨 급으로 귀엽지도 예쁘지도 않아!’
“나나리가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그 천사 같은 아이가 울면서 나랑 줄리어스를 구별 못해서 나한테 밉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정말….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나리한테 밉다는 소리를 들은 날이라 일주일 동안 푸딩이 입에 안 넘어갔어.”
푸딩 말고 다른 건 다 넘어갔다는 말이군요….
여기를 짚고 넘어가면 안 되겠지. 줄리어스의 남다른 를르슈 사랑만큼은 알 수 있었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홍차를 다 마신 스자쿠는 를르슈와의 대화를 떠올리다가 순간 흘려들은 것을 떠올렸다. 아니, 흘려 들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지.
“키스를 하다가 혀를 넣었다고요?”
“아, 응. 예전부터 계속 그러지만, 이젠 나이도 있으니 그런 천박한 짓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예전부터?”
“나한테 동정도 처녀도 다 바치고 싶다는데, 우선 형제고 쌍둥이고 무엇보다 남자끼리. 하,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나나리가 들을까 노심초사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리에스를 나가줘서 정말 고맙다고 해야 하나….”
편지의 키스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지만 동정과 처녀를 바치고 싶다니. 스자쿠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는 것에 를르슈는 질 나쁜 농담을 해서 미안하다며 손을 내저었다.
“C.C.가 어려서부터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래.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처음을 줘야한다고 그래서. 덕분에 이쪽이 고생이다.”
“음….”
“나를 위로할 말을 고민 중?”
황실 모욕죄로 감옥도 안 보내고, 독방도 안 보낸다고 했으니까 사실대로 말해야지.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민 끝에 할 말은?”
“제 고향에서는 가족끼리는 노 카운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흠.”
“그러니까 킹슬레이 경의 그런 키스나 발언들은 모두 무효라는 것이지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은 를르슈는 곧 사요코를 불렀다. 식당 좀 정리해주겠어? 나는 스자쿠와 함께 잠시 후원으로 나가보겠다. 고개를 숙인 사요코를 뒤로 하고 스자쿠와 를르슈는 밖으로 나왔다. 스자쿠는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따라서 흩날리는 를르슈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자쿠.”
“네?”
“방금 전은 엄청나게 큰 위로가 되었다.”
“…엄청나게 큰 정도입니까?”
“사실은 그게 줄곧 신경 쓰여서…. 첫 키스를 남동생이랑 하면 좀 그렇잖아.”
“…첫 키스가 아직이신가요?”
“당연하겠지? 연회는 안 나간 지 한참 되었으니 연애는 해볼 틈도 없고, 혼담이 오가는 상대도 없으니. 사랑 같은 거 할 수도 없다. 키스는 당연히 해볼 기회도 없고.”
“…….”
“그러면서도 첫 키스는 사랑하는 상대랑 하고 싶었는데, 다행이다.”
그 화려한 미모와 우아한 기품으로 첫 키스가 아직이라고 하는 황자는 반칙이었다. 스자쿠는 저를 돌아보며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를 했다고 말하는 를르슈의 수줍은 얼굴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스자쿠? 를르슈가 두어 번 부르는 소리에 겨우 소리 내어 대답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런가?”
“아, 아뇨…. 그냥. 아닙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인 스자쿠는 소문이 엄청나니까 나 같은 쑥맥이 어리숙해 보이겠지.”
“사랑하는 사람만 상대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쑥맥입니까? 상대에게 진지한 거죠.”
“……그런가.”
“그리고 그 소문 같은 거 안 믿어주시기로 했잖아요.”
“어제 지노랑 하는 말로는 장난 아니던데.”
지노, 지노, 지노! 킹슬레이 경, 지노를 제발 죽여주세요!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빌어보았다. 옛 황족의 손에 죽는 것도 귀족다운 죽음이겠지,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죽어라, 지노!
순간 지노의 반지가 바지 주머니 안에 걸리는 것에 스자쿠는 이것을 지금 부숴버릴까 생각했다. 이거만 없으면 지노는 정통성을 의심 받고 집안에서 쫓겨나게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지노는 나쁜 놈이 아니다. 그런 염문이 흐를 정도로 놀았던 스자쿠가 행실이 나빴던 거고.
지노의 반지를 꺼내서 만지작거리다가 스자쿠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를르슈 전하, 특파에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뭐?”
“사실 어제 코넬리아 전하께서 오셔서 조정 테스트도 다 끝까지 하고 오지 못했고, 안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시 전하들을 두고 아리에스를 비우기엔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지노와 킹슬레이 경을 두 번 다시 안 부르신다고 하셨고, 아냐는 에리어8에 나가있는 중이라 오기가 힘들고요. 나이트 오브 원께 손을 빌리기도 그렇죠.”
“내가 따라가서…특파 사람들이 암살 위협을 받으면 어떻게 할 생각인건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나리 전하도 알고 계시던데요. 특파는 슈나이젤 재상 각하의 관할부서입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기사인 제가 있는 곳이죠. 위협을 하겠다는 것은 브리타니아 권력의 정점에 도전하겠다는 뜻이죠. 아무리 전하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무모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리고 원래 를르슈 전하는 특파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고, 슈나이젤 재상 각하와 재상부의 일만 조금씩 도울 뿐이지 잠깐 들렀다고 테러 위협이 생기겠습니까? 설령 생긴다고 한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군인입니다. 테러에 대한 대책은 다들 숙지하고 있어요.”
“…….”
“아니면 킹슬레이 경의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환하게 웃지는 않아도 그래도 그것은 스자쿠가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다. 알겠어. 오늘은 특파에 가보겠어. 내가 따로 준비할 일은?”
“전하께서 하실 일은 없습니다. 편한 복장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어제처럼 번거롭게 안 차려입어도 돼?”
“물론요. 군사시설이니까.”
“…로이드가 나를 또 이상한 거에 태우진 않겠지.”
“제가 로이드 씨보다 계급이 높으니까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면 로이드 씨를 때려눕힐게요.”
“백작이랑 법정공방?”
“나이트 오브 세븐의 변호인단의 힘을….”
“하하, 알겠어.”
“특파에 전하가 오신다고 연락하겠습니다. 전하의 준비가 끝나시면 집무실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휴대폰을 꺼내서 세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의 나머지 조정 테스트 말인데요. 네, 간단하지만 아직 안 끝난 게 마음에 걸려서요. 지금부터 하러 가도 될까요? 네, 아리에스 쪽은 괜찮아요. 네, 죄송하지만 의자 하나 더 준비해주시겠어요? 를르슈 전하도 함께 가십니다. 네.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나나리의 등교 호위를 마치고 온 제레미아도 만났다. 죄송하지만 특파까지 운전을 부탁해도 될까요? 제레미아가 를르슈를 두고서 또 호위 자리를 비우냐며 잔소리를 하려는 것에 겨우 설명했다. 전하께서 다른 업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건 모시는 자가 된 도리로써 기쁘다. 제레미아는 전하를 모시러 가라며 스자쿠의 등을 떠밀었다.
를르슈의 집무실에 노크를 두 번 했다. 들어 와. 를르슈의 낮은 목소리는 평소보다 들떠있었다. 검은 자켓와 은색의 단추가 반짝거리는 상의. 살짝 드러나는 셔츠 자락의 커프스도 아메시스트가 반짝거렸다. 차려입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름 멋을 낸 를르슈의 옷차림에 스자쿠는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전하의 옷이 멋져서요.”
“…’섬광의 마리안느’의 자식이 후줄근하게 입고 가면 웃음거리가 될 지도 모르니까.”
“제레미아 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른 가시죠.”
를르슈가 자질구레한 업무에서 벗어나서 특파라는 새로운 특수군사시설과 KMF에 관심을 가진 것에 군인인 제레미아는 크게 감격한 듯 했다. 운전하는 동안 제레미아의 신나는 수다에 를르슈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전하의 뛰어난 재능을 이렇게 썩히는 건 아깝죠, 군사적으로 써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역시 마리안느 님의 장남다우십니다, 특파라는 곳에서도 전하의 왕림을 기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만해라, 제레미아…. 듣는 내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왜 부끄러워하십니까! 전하, 줄리어스 전하의 유로 브리타니아 활약을 듣고 있으면 저는 를르슈 전하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스자쿠는 그저 제레미아와 를르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긴장을 다잡았다. 전하께서 내가 일하는 곳에 온다. 그것을 자각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의 적합률 퍼센트는 어떻게 되나요?! 휴대폰에 어플이 있다면 확인해보고 싶었다. 꽃점이 있다면 그것이라도! 최고였으면 좋겠다. 최저라면 전하를 모시고 기껏 갔는데 부끄러운 꼴을 보이게 되는 거잖아! 쿠루루기 스자쿠,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데려온 거냐? 브리타니아 역사상 유일한 넘버스 출신으로 제국 최강의 기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 진짜 운 좋게 된 거라고 나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데려온 거냐? 아닙니다, 전하, 전하, 저는 원래 랜슬롯을 잘 탑니다. 안 되겠다, 아리에스의 호위를 바꿔달라고 아버지께….
“스자쿠? 여기가 특파인가?”
“…네? 네?! 네! 여기가, 어, 벌써 다 왔군요.”
“제레미아, 여기가 맞는 것 같다. 돌아갈 때에는….”
“아리에스 궁으로 돌아갈 때에는 제가 따로 특파 쪽 사람을 불러서 가겠습니다. 보안도, 호위도 완벽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레미아 경. 안심하고 나나리 전하의 하교 호위를 하고 오세요.”
를르슈를 감싸고 나오며 차에서 내렸다. 제레미아의 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에 스자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늘상 본 특파 건물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를르슈 전하, 손을.”
“응?”
“올라가는 계단이 많잖아요.”
“……나는 힐 같은 건 안 신었는데.”
“뭐, 그래도 기분이죠.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신 건 오랜만이시니까 에스코트 하겠습니다.”
내밀어진 스자쿠의 손에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 손을 맡겼다. 사실 얼마 되지 않은 계단이지만 손을 같이 잡고 오르면서 스자쿠는 왜인지 두근거렸다. 연회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직장에 가서 일을 하러 가는 것뿐인데. 그것도 엄청 높은 상사랑. 특파의 현관 앞에 도착하면 를르슈의 얼굴은 엄청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스자쿠가 할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전하 체력은 정말…상상 이상입니다.”
“시끄럽다!”
“특파에 휴게실이 있으니 거기서 쉬었다가….”
“너는 나를 얼마나 약골로 보는 거냐, 스자쿠. 안내를 빨리 해.”
이제 계단은 끝났으니까 손은 놓고! 를르슈의 떨어지는 손에 스자쿠는 괜히 아쉬웠다. 문을 먼저 열어주고 를르슈를 들여보냈다. 아이디 카드를 입력하던 중에 다른 외부인인 를르슈의 소개를 하자 놀란 세실이 데스크에서 뛰쳐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괜찮은 거 맞는 건가? 이쪽은 일상이지만, 를르슈에게는 낯설겠지. 스자쿠는 아마 괜찮지 않을까요, 하며 적당한 대답을 하며 마중을 기다렸다.
“전하가 현관까지 오셨으면 미리 방문증을 들고 마중을 나갔을 텐데 데이터 오류가 발견되어서 그걸 수정하느라, 괜히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먼저 스자쿠 군이 연락까지 줬는데도, 아, 정말, 드릴 말씀이….”
“아니, 괜찮다. 원래 나는 특파의 외부인이니까.”
“그래도 슈나이젤 재상 각하와 함께 하시는 분이니 특파와 아주 연관이 없는 분은 아니시잖아요?”
“그렇다면 그런 건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는 일은 아주 적고 보잘 것 없으니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 스자쿠의 일이 먼저가 아닌가?”
“앗, 그렇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로이드 씨, 를르슈 전하께서 오셨는데 왜 인사도 안하시는 거예요!”
거의 무늬만 응접실인 곳에 세실과 스자쿠, 를르슈는 앉아있었다. 급하기 기자재를 밀어넣을 때나 열어보는 곳이었는데 오늘 를르슈가 온다고 치운 모양이었다. 세실은 밖에 있던 로이드를 끌고 오며 제 옆자리에 앉혔다. 늘상 마이페이스의 로이드가 놀랍게도 를르슈의 눈치를 보았다.
“로, 로이드 아스플런드가 를르슈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심지어 인사까지!
연회장이 아니기에 손등의 키스는 없어도 됐지만 기회가 있다면 할 기세였다. 스자쿠와 세실이 놀란 얼굴을 했지만 를르슈는 놀라기 보다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이제 와서 나를 랜슬롯에 태운 걸로 황실 모욕죄에 잡혀갈까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냐?”
“아핫, 조금 그렇다고 말하면 형량이 줄어 들까요, 전하~?”
“됐다. 어차피 그 자리에 있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같이 있던 동생들은 관심도 없을 테니.”
“그렇다면 당사자인 전하께서는?”
“나도 관심 없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하, 살았다. 세실 군, 스자쿠 군, 나 계속 특파에 있을 수 있어!”
이제야 제 얼굴을 되찾은 로이드는 아하핫, 하고 경쾌하게 웃었다. 차라리 방금 전처럼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을 때의 로이드가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스자쿠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긴장했다.
“아, 차라도 한 잔 내올까요? 티백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말이죠.”
“상관없다.”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스자쿠가?”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이드와 세실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코넬리아와 저를 단 둘이 남겨두었을 때의 복수이다. 그리고 그때와 다르게 상대는 를르슈니까 오히려 복수 측에도 들어가지 않는데 뭘 그렇게 무서워하시는지.
“네, 어차피 파일럿 수트로 갈아입고 와야 하고, 탈의실에 가는 김에 탕비실에서 커피포트에 물을 올릴 뿐이에요. 전하, 혹시 차 말고 커피는 어떠신가요? 특파에는 차 종류보다 커피 종류가 더 많거든요.”
“커피? 아, 나는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렇다면 그럼 평소대로 차로 준비하겠습니다. 로이드 씨랑 세실 씨는 커피가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하니 커피로 하겠습니다.”
“네, 네, 나이트 오브 세븐님의 말씀을 따라야죠~ 전하, 정말 스자쿠 군은 제멋대로라서 곤란합니다~ 제 고초를 알아주시는 분이 오늘 와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응접실을 나가기 전에 로이드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스자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라앉은 목소리의 스자쿠는 무섭다. 무서운 스자쿠에게 로이드는 덜덜 떨며 대답했다.
“제가 다녀오는 사이에 전하의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로이드 씨. 늘 저 때문에 고초를 겪으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호, 호, 호위는 백작인 내가 아니라 군인인 세실 군에게…!”
“특파 자체가 군 소속이니까 로이드 씨도 군인이잖아요!”
이럴 때만 귀족이죠, 정말!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는 를르슈의 웃음소리에 모두가 의아한 듯이 쳐다보자 를르슈는 입을 가렸다. 별 거 아니다. 그냥 웃겨서 웃었을 뿐…. 를르슈의 웃음기가 섞인 그 말에 로이드가 장난스럽게 받았다.
“흐음, 어렸을 때부터 경계심 많던 전하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원래 너는 두 번째 보는 거니까 나에 대해 처음인 게 많을 터인데, 로이드.”
“그런 논리 정연한 모습은 에상 내라서 오히려 더 재미없네요!”
“전하에게 무례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아, 스자쿠 군, 차랑 커피 멀었어~?”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무례합니다!”
“직접 하겠다고 한 건 스자쿠 군이잖아….”
이러다가 끝이 안 나겠네. 세실은 상황 정리를 하며 스자쿠를 탈의실로 보냈다. 스자쿠는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며 전하, 전하, 하고 를르슈를 불렀다. 세실이 스자쿠를 탈의실로 밀어 넣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못할 짓 하는 느낌이잖아, 스자쿠 군! 그녀가 못할 짓을 하는 건 요리하는 거 말고는 없는데, 스자쿠는 반성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순간 드는 생각에 ‘커피랑 차는 제가 내갈게요!’하고 문 밖으로 외쳤다. 세실이 물만 올려뒀다고 하는 소리에 겨우 안심했다. 를르슈가 마실 것에 몹쓸 것을 내가고 싶진 않았다. 파일럿 수트로 갈아입고 거울을 한 번 보았다. 평소랑 다를 것 없지만 를르슈 앞에 처음 보이는 모습이라 괜히 긴장되었다.
갈아입고 탕비실로 들어섰다. 쟁반을 꺼내고, 한입에 넣기 쉬운 과자를 박스 채로 꺼냈다. 블랙커피 두 잔. 머그잔에 티백으로 홍차 두 잔. 이 정도면 되겠지? 스자쿠는 쟁반을 들고 나서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지만 뭔가가 애매한 분위기였다.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를르슈의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그의 기색을 살폈다. 별 일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방금 전보다 가라앉은 기색이….
“전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응? 별 일 없었다만.”
“로이드 씨.”
“아무런 말도 안했어? 그냥 특파의 역사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 했다구.”
“세실 씨, 진짜인가요?”
“응, 그냥, 특파가 어떻게 펜드래곤에 시설까지 갖추게 되었나, 그런 이야기? 를르슈 전하께서 특파의 보고서를 잠깐 본 적이 있으셨는데, 그때 가능성이 있는 군수사업이라고 보셔서 예산 확충에 조금 힘을 보태주셨다는 정도?”
“그래. 고작 그 정도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네가 옷 갈아입는 그 짧은 시간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도 길게 하겠어?”
정말 별 일 없었다고 말하는 를르슈는 티백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스자쿠에게 한 마디 보탰다. 더 식혔다가 마셔라, 스자쿠. 스자쿠는 얌전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둘의 대화에 세실이 무슨 일이 있냐고 스자쿠에게 물었다.
“어제 코넬리아 전하가 오셨을 때, 차를 급하게 마셔서 데였거든요.”
“아, 그랬구나. 미안, 그땐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뭐랄까, 정공법으로 싸우지 않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 드디어 코넬리아 전하께 찍혀서 짤려나가나, 그러면 랜슬롯 디바이서는 누가 해주지, 그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울 뻔했다구, 스자쿠 군!”
“로이드 씨,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하시는거죠?”
“직급으로 찍어누르면 파워 헤러스먼트라구, 스자쿠 군?”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기 이전엔 자기가 파워 헤러스먼트였으면서! 스자쿠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걸 참으면서 브리타니아는 실력주의, 브리타니아는 실력주의를 되뇌었다. 차가 다 우러났는지 티백을 빼낸 를르슈가 스자쿠 몫까지 빼내주었다. 더 우리면 떫어질 테니까. 어차피 넌 식은 걸 마셔서 향도 날아가겠지만. 스자쿠를 챙겨주는 를르슈의 모습에 로이드와 세실은 또 의외의 모습을 보았다는 듯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 테스트라는 건 얼마나 걸리지? 나나리의 하교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어서….”
“아마 테스트 자체는 삼십 분 정도 걸릴 거고, 샤워랑 데이터 간단 점검까지 합하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겁니다. 근데 이것도 스자쿠 군의 컨디션에 따라서 다른 거라….”
“스자쿠는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해?”
세실은 한 시간 반이라고 그랬다. 그보다 짧게 말하면 자신감 과잉 같아 보이겠지. 그리고 만약에 한 시간 반 보다 더 걸리면 진짜 자신감 과잉이고. 그렇다고 그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아 보이면 자신감이 없어 보이잖아. 하지만 또 한 시간 반이라고 말하면 남의 예상대로인 녀석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근데 이런 생각해도 난 머리가 나빠서 전하께서 형편없는 놈이라고 생각할 지도…! 뭐라고 대답하면 좋지?! 적당히?! 많이?! 적게?!
“한 시간….”
“한 시간?! 스자쿠 군, 오늘 컨디션 그렇게 좋아?!”
“이십팔 분…정도일까요?”
“…스자쿠의 예상은 애매하구나. 뭐, 나나리의 하교까지는 여유로우니 괜찮다. 나는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
로이드가 낄낄거리며 스자쿠를 조롱하는 모습을 보면서 를르슈는 세실이 안내하는 자리로 갔다. 로이드와 스자쿠의 대화가 여기까지 들리지 않아 아쉽지만 그래도 스자쿠가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라서 나쁘지 않았다.
세실이 안내한 준비된 의자와 간이 테이블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투명한 창으로 이루어진 방 안에 스자쿠만 들어간다. 들어가기 전에 스자쿠는 머그잔 속의 차를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약간 긴장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는 스자쿠를 보면서 를르슈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전하, 정말 죄송하지만 저도 이제 스자쿠 군의 조정 테스트에 데이터 수치를 확인하러 가봐야합니다. 로이드 씨 혼자만으로는 변수 계산이 힘들어서요. 불안하시겠지만 그래도 특파는 슈나이젤 재상 각하의 직속 관할부서이고, 또 황궁 내부의 특수 군 시설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저희 셋 밖에 없어 보이지만 여기 테스트 시설만 그런 것이고, 바로 밖에는 다른 군인들이 있고, 나이트 오브 세븐의 호위도 있습니다.”
“이미 스자쿠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나는 혼자서도 괜찮아. 오히려 신경 쓰일까봐 미안하군.”
“아닙니다. 이해해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세실의 뒷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를르슈는 오랜만에 낯선 곳에 홀로 남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이유는 바로 앞에 보이는 투명한 방 안에 스자쿠가 있다는 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KMF의 조종석 내부를 본따 만든 것 같은 기계의 안에 들어선 스자쿠는 한동안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로이드와 세실이 확인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연결된 모니터가 화려하게 번쩍거리는 걸로 봐서는 스자쿠는 확실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모니터가 이쪽에서도 제대로 보이면 좋겠는데. 가상의 적과 가상의 지형에서 균형을 맞추며 싸우는 걸로 얻은 데이터로 늘 새로운 조정을 해서 최고의 기동력을 얻어낸다는 랜슬롯. 그 귀찮은 조정 테스트를 성실하게 해내는 스자쿠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를르슈는 간이 테이블에 놓인 차를 홀짝거리며 심심한 맛의 과자를 한 입 먹었다.
‘원래 특파는 에리어11에 있었어요. 디바이서는 사관생도 중에서 찾았지만.’
‘……그래?’
‘운명의 장난 같죠? 그 사관생도가 에리어11 출신의 명예 브리타니아인이라니!’
‘그런 낭만적인 말을 그렇게 쓰지 마라, 로이드.’
‘더 운명의 장난 같은 거라고 하자면…스자쿠 군이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된 그 공적이죠.’
‘로이드 씨!’
‘…그 공적이 뭔데?’
‘에리어11의 일본 독립을 외치는 테러리스트를 랜슬롯 단 한 기로 전멸시켜버린 것이죠.’
‘…….’
‘덕분에 에리어11에서 나이트 오브 세븐의 인기는 곤두박질. 천하의 다시없을 매국노가 되었지만 브리타니아 본국에서는 그 공적을 높이 사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 취임, 제국 최강의 기사를 배출한 특파는 평가가 좋아져서 다행이죠!’
‘저, 전하. 로이드 씨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말이니까 곧이곧대로 들으시면 안 됩니다. 스자쿠 군이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될 수 있는 공적은 에리어11의 테러리스트 진압도 있었지만 다른 일도 잘했기에….’
‘…그렇겠지. 다른 일도 잘했을 거야. 아리에스의 호위도 훌륭하게 해내니까. 그래, 이쯤에서 이 이야기는 그만두지.’
항상 상냥하고 다정하기에, 정말 실력으로 순수하게, 동경을 품은 마음으로 별 탈 없이 제국 최강의 기사로,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된 줄 알았다. 사람에게 다정한 말만 해줘서 다정하게만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는데.
를르슈는 눈앞의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보다 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안 보이는 안쪽에서의 로이드의 감탄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로 봐서는 뭔가가 어렵지만 잘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항상 저 두 사람과 전투에 나가는 걸까? 피곤하겠네.
스자쿠의 과거 같은 것은 사실 를르슈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누군가를 죽였던 것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지금 를르슈에게 적인가. 나나리에게 위협이 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 손이 아무리 거칠고 딱딱하더라도 상냥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나온 스자쿠는 를르슈가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면 분명 싫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조국을 배반한 주제에 황자에게 기세 좋은 소리만 늘어놓아 죄송했다고 사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다.
어차피 나는 브리타니아를 떠날 사람이고….
“너는 여기 남을 사람이니….”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리며 를르슈는 다시 차를 마셨다. 다 식어가는 차와 맛없는 과자. 아리에스에서 너무 호화롭게 먹고 살았나. 를르슈가 혹시 자기가 사치스럽게 살았나 고민하고 있는 중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정말 여기가 어디지? 여기요~ 아무도 없나요?”
발소리가 들린 쪽은 출입구 쪽이다. 아이디 카드가 있어야만이 들어올 수 있는데. 아이디 카드는 군정청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고, 그래야지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 를르슈도 외부인으로 들어와서 세실이 방문증을 쓸 정도였는데 마음대로 들어왔으면서 아무도 없냐니. 아니, 무엇보다 여길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서 여기가 어디라던가, 아무도 없냐고 물어보는 건 처음 왔다는…!
“코넬리아 언니의 아이디 카드 최근 기록은 이쪽이 맞는데…. 어라, 어라?!”
“…유피?!”
“를르슈!”
평소 ‘리’ 가문의 황녀 전하가 입는 것보다 간소한 드레스 차림의 유페미아였다. 를르슈는 자객이 아닌 것에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칠 년만이었으니. 유페미아는 를르슈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덥썩 안겨들었다.
“를르슈, 보고 싶었어요!”
“유피,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오랜만에 만난 이복 여동생을 꼭 끌어안고 살짝 놓아주었다. 얼굴을 살피면 예전보다 더욱 아름답게 성장한 서로의 모습에 반가운듯이 미소를 지었다.
“코넬리아 언니가 를르슈와 나나리의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둘 다 잘 지내고 있다고. 언니만 만나는 건 치사하다고 저도 아리에스 궁에 편지를 보냈는데 또 거절을 당했어요. 생각해보니 언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리에스에서 만난 것 같진 않았고, 그럼 어디였을까…. 언니가 주무실 때 몰래 아이디 카드를 빼돌려서 기록을 추적하고 들고 와서, 앗, 이건 길 포드 경에게도, 언니한테도 비밀이에요. 이쪽에 언니가 왔다는 걸 알아서, 그럼 여기서 를르슈나 나나리의 소식을 직접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무모하구나.”
“군 시설이라서 조금 겁을 먹었지만, 슈나이젤 오라버니의 소속이라고 해서 미리 연락드리고 왔답니다! 그래도 너무 화려하게 입는 건 민폐일까봐 수수한 드레스를 입었는데…. 드레스는 역시 좀, 그랬을까요?”
“언제 어디서든 황족의 기품을 보여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유피다워서 좋아.”
“를르슈도 오랜만에 보는데도 여전히 멋져요.”
레이디를 계속 세워두는 건 예의가 아니지. 를르슈는 자기가 앉던 의자에 유페미아를 앉혔다. 여전히 신사다워요, 를르슈. 유페미아는 앉으면서 간이 테이블의 과자와 머그잔을 보며 이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음, 그냥 안 먹는 게 좋아. 나중에 궁에 돌아가서 따로 티 타임을 가져. 를르슈의 말에 유페미아는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아리에스에 가도 되는 건가요?”
“…그건 좀 힘들 것 같네. 미안.”
“그럼 이거 먹겠습니다.”
“맛없을걸.”
“그럼 아리에스로 초대해주세요! 아니면 저희 궁에 와주세요!”
“둘 다 안 돼.”
“그럼 이거 먹을 거예요.”
“유피….”
“를르슈, 아리에스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도 있고 괜찮잖아요? 저희 궁도 예전처럼 테러 위협 같은 건 없다구요. 어머니의 사병도 있고, 코넬리아 언니의 친위대도 더 늘려서 호위를 하고 있으니….”
를르슈는 테이블 쪽의 과자 포장을 뜯었다. 한 입 사이즈로 쪼개서 유페미아의 입 앞까지 대령했다. 아. 를르슈의 말에 유페미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벌렸다. 맛없을 그 과자를 여동생에게 먹이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것보단 나았다. 유페미아는 그 과자를 다 먹고 나서 감상을 말했다.
“우와, 엄청 맛없어요.”
“말했잖아. 유피는 고집불통이야.”
“를르슈 만큼 할까요? 이 차도 맛없나요?”
“티백이라 그냥 그래. 식었고 내가 마시던 거라 안 마시는 게 좋을 걸.”
“입가심이라도 하겠습니다.”
조금 살 것 같네요. 유페미아는 진짜로 그런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뭐하는 곳인가요? 유페미아를 친동생으로 두고 있을 코넬리아는 하루하루 어떤 기분일까. 자고 있는 사이에 자기 군정청 아이디 카드 기록을 추적해서 심지어 몰래 들고 와서 군 시설에 몰래 들어오는 여동생이란…. 그래도 귀여우니까 뭐 어쩔 수 없으려나.
“지금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아주고 있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 일하고 있는 곳이야.”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면…. 스자쿠가 지금 아리에스의 호위군요. 다행이에요. 잠시만요, 를르슈! 설마 스자쿠를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고 부르는 건 아니겠죠?!”
“제대로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
“쿠루루기 경이라고 부른다거나?”
“아니야, 스자쿠라고 불러.”
“다행이에요. 둘이 친하군요.”
그래,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친하다구. 를르슈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유페미아는 자기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코넬리아가 들으면 경을 칠 소리를 자연스럽게 하고 있어서 를르슈는 잠시 넋이 나갔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면 아리에스에 갈 수 있잖아요.”
“…차라리 황제나 재상이 되는 건 어때? 그럼 아리에스에 올 수 있는데.”
“아버지나 슈나이젤 오라버니 정도가 되어야지만 아리에스의 손님으로 받아주는 건가요!”
“농담이야. 유피는 황제나 재상이 되어도 위험해서 안 돼. 난 유피가 위험해지는 걸 못 봐.”
“를르슈…!”
“오늘 여기에 내가 없었을 확률이 높았을 텐데, 그럼 누구한테 우리 소식을 들으려고 했어?”
그 말에 그제야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유페미아의 모습에 를르슈는 이마를 짚었다. 하아. 한숨까지 절로 나오는 와중에 유페미아가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나나리는 어떤가요?”
“여전히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지.”
“사진 같은 건 없나요?”
“도청의 위험 때문에 휴대폰 같은 건 안 만들어.”
“카메라 정도는 괜찮잖아요!”
“내가 쓸 전자기기에 테러리스트들이 무슨 짓을 해놨을지….”
“나나리의 귀여운 모습, 저도 보고 싶다구요! 아니면 아리에스에 초대해주세요!”
“…….”
“나나리의 학교에 가서 구경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제레미아 경한테 쫓겨났다구요.”
“줄리어스는 안 궁금해?”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지노랑 한탕 했다던데요? 코넬리아 언니가 정신 나간 전략 쓰는 건 걔네 둘 밖에 없다고….”
“유피가 그런 말투 쓰면 코넬리아 누님이 우실 지도 모르니까…. 앞으로 그런 단어 쓰지 말자. 한탕 했다던가, 정신 나간 거라던가….”
줄리어스는 예전부터 를르슈 바보였던 주제에 감히 아리에스 밖을 나가고! 를르슈 걱정만 끼치고! 그래서 제가 아리에스 초대를 못 받는거죠?! 유페미아의 제멋대로 논리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나나리가 한탕 했다는 말을 하는 날이 오면 목욕 수건 한 장이 다 젖을 때까지 울지도 모른다.
“뭐가 끝났나봐요. 스자쿠가 나오네요. 우와, 땀 엄청나네요.”
시계가 없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는 모르지만 벌써 끝이 났다. 기계 밖으로 나온 스자쿠는 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투명한 벽 밖으로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를르슈의 옆에 있는 유페미아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 알아, 나도 놀랐어. 스자쿠가 방 밖으로 나오면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와 함께 세실이 우당탕거리며 뛰쳐나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페미아 전하?! 여긴 어떻게…?! 언제 오셨습니까?! 아, 이런, 연락을 주셨다면, 아니, 그전에, 어떻게, 아무것도, 아무도, 아, 죄송합니다! 를르슈 전하도! 의자를 더 준비했어야! 차를!”
“아니, 괜찮아. 유피가 마음대로 온 거고. 나도 기다리면서 이야기하던 중이었고.”
“맞아요. 오히려 여기에 마음대로 온 제가 더 민폐를 끼친걸요. 놀라셨을 모두에게 죄송해요.”
“스자쿠의 테스트는 끝났나?”
“네, 이제 샤워를 하고 데이터 점검까지만 하면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를르슈는 여기서 계속 기다리면 되냐고 물었다.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세미나 룸 쪽에서 이야기를 할 예정이라…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함께 하시는 게 어떨까요?
“나도, 유피도 외부인인데 괜찮겠어?”
“모두 브리타니아를 위한 일이니 전하들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를르슈 전하의 의견을 꼭 들어보고 싶다고, 로이드 씨가 그러던걸요.”
“’섬광의 마리안느’의 자식이라?”
“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전하의 영특하시기에 저희 특파가 아직도 건재하는 거죠. 먼저 이동하실까요?”
더 이상의 거절의 말이 없다.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며 유페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나나리 이외의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것이라 어떨지는 모르지만 유페미아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을 잡는 걸 보니 아직까지 매너는 몸에 익은 듯 했다. 세실이 복도를 오가면서 오늘 대체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언제쯤 끝날까? 시계가 없어서….”
“그러네요, 앞으로 삼십 분 정도일까요?”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나?”
“네? 아뇨. 스자쿠 군의 테스트는 십오 분 안에 끝났습니다.”
“……?”
“너무 뛰어난 결과라 오히려 더 길게 회의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우선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임무가 우선이니까요. 아, 다시 차를 내올까요, 다과는 더 필요하신 거라던가?”
“차도, 다과도 괜찮다. 그래. 스자쿠가 컨디션이 좋았나보네.”
세실이 두고 간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같은 페이지를 읽던 유페미아는 지루해서 못 읽겠다며 를르슈 혼자 읽으라고 했다. 를르슈가 눈여겨 본 부분은 적합률 부분이었다. 평소 컨디션에 따른다고 했지. 80%일 때도 있지만 좋을때는 90%대 초반. 가장 좋을 때가 최근에 있었던 때. 아니…가장 좋을 때는 이제 그 때가 아니다.
99.9%
오늘 날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를르슈 전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유페미아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하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장 차림의 스자쿠가 들어왔다. 유페미아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스자쿠! 여전히 멋있어요. 과찬이십니다. 를르슈의 옆자리에 앉은 스자쿠는 제 자료를 읽고 있는 를르슈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를르슈는 스자쿠를 보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너는……KMF 그 자체냐?”
“네? 그럴 리가 없죠. 사람입니다.”
“99.9% 이 수치가 말이 돼?”
“진짜요? 어쩐지 로이드 씨가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그리고 십오 분 만에 끝났다고.”
“…를르슈 전하께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요.”
“응?”
“제가 없으면 전하 혼자서 계셔야하는데. 불안하실 테고 빨리 돌아가야지 싶어서, 기합을 넣었는데…. 유페미아 전하께서 함께 있으셨다면 어깨에 힘 좀 빼고 대충 할 걸 그랬나봅니다.”
“기운 빠지는 소리 하지 마라,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제국 최강의 기사가 그런 소리 하면 황족은 무슨 소리를 해줘야해?”
“그리고 전하가 계시는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순 없죠. 자존심 상하니까요.”
풋. 유페미아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의 스자쿠와 를르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정말 좋아하는군요. 자존심까지 챙길 정도로!”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고 를르슈가 물으려는 찰나에 ‘핫핫핫핫—!!’하며 로이드가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스자쿠 군은 나의 사랑, 나의 최고의 디바이서, 내 인생에 다시없을 최고의—! 열렬한 로이드의 고백을 가로 막은 것은 세실의 빔 프로젝터였다. 지금부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 결과를…….
* * *
“—에리어5 쪽이 조금 오래되었어도 그쪽 자료를 한 번 보면 다음 모의 전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있는 자료로 봤을 때에는 너무 기습공격 쪽으로만 치우친 면이 없잖아 있는데, 전쟁이란 원래 정공법이 먹히는 법이니까. 에리어5의 자료를 쓰면 좋을거야. 스자쿠가 지금까지 나간 전선과도 다른 지역일테니 색다른 데이터도 나올 거고.”
“과연, 를르슈 전하의 의견을 듣길 잘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에리어5!”
“그래봤자 외부인의 이야기니까 귀 기울여 들을 필요 없다.”
“아니에요, 전하. 저도 동의합니다. 에리어5의 자료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역시 를르슈에요. 자랑스럽습니다.”
“전하…!”
마지막 스자쿠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를르슈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다들 를르슈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무슨 말을 해도 좋다고 소리를 지를 얼굴들이라 를르슈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 돌아간다.”
“전하께서 돌아가신다고 하신다~! 나이트 오브 세븐, 준비해주세요~!”
“제가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를르슈 전하께서 돌아가신대요!”
“를르슈가 아리에스로 돌아……가는….”
같이 들떠서 떠들던 유페미아가 갑자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애써 못본척 하며 를르슈는 스자쿠를 불렀다. 네, 전하. 기분 좋은 얼굴로 다가온 스자쿠는 예의 바른 대답을 했다.
“유피가 돌아갈 수 있게 따로 사람을 불러주겠어? 나랑 같은 차를 타고 돌아가면 위험하니까.”
“저랑 함께 있는데도 불안하신가요?”
“방심하고 싶지 않은거다.”
“…알겠습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 쪽의 호위를 부르겠습니다. 괜찮나요?”
“그래. 그 편이 더 안심할 수 있고.”
스자쿠는 오랜만에 제 부하들에게 연락을 했다. 전화를 거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침울한 얼굴의 유페미아에게 다가갔다. 세실과 로이드는 서로 특파의 직원을 부르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녀를 살피지 못했다.
“유피.”
“…를르슈.”
“스자쿠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줄 거라니까,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저래보여도 황제 직속 기사니까.”
“를르슈랑 함께 돌아가는 게 아니군요….”
“나랑 함께 하면 위험하잖아.”
“…….”
“전임 기사를 아직도 안 뽑은 모양이네. 아니면 뽑았는데도 혼자 여기까지 왔으면 그 기사는 코넬리아 누님께 엄청 혼나겠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유피답지 않아.”
“전임 기사는 아직 없어요…. 언니는 전임 기사 있어도, 없어도 늘 걱정하실 테니까 그건 상관없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그리고 를르슈도 아직 전임 기사가 없잖아요.”
기사 후보라는 이름을 달고서 자살 폭탄 테러를 당하고서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예전부터 신원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최소한의 인력 말고는 아리에스 궁의 사람들도 모두 한 번 갈아엎었다. 를르슈는 끔찍했던 그 일을 떠올리며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다.
“나한테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있지. 지금은 스자쿠가 있고.”
“모두 아버지의 기사일 뿐, 를르슈의 기사가 아니에요. 를르슈에게도 전임 기사가 아직 없는데 여동생인 제가 어떻게 기사를 가지나요?”
“…너는 ‘리’ 가문의 황녀잖아. 그런 소리를 하면 코넬리아 누님께서 속상해하실 거다.”
“를르슈야말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있어서 안심이라면 저를 아리에스에 초대하세요.”
“또 그 소리를….”
를르슈의 팔을 잡아오는 유페미아의 손을 잡는 것은 스자쿠였다. 스자쿠는 별 것 아닌 일처럼 유페미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유페미아 전하, 전하를 모시고 갈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제가 아래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를르슈 전하, 제가 돌아올 때까지만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안될까요?”
“…그래. 유피를 잘 부탁한다, 스자쿠.”
“예, 그럼 가시죠, 유페미아 전하.”
“…….”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스자쿠의 손을 꽉 잡는 유페미아는 놀랍게도 울지 않고 특파 밖까지 나왔다. 스자쿠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손을 잡고 내려가는 와중에, 특파에 올 때 를르슈와 손을 잡고 올라온 것이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우습나요?”
왜인지 날이 서있는 유페미아의 말에 스자쿠는 둘러 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오늘 여기 올 때, 를르슈 전하와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던 게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를르슈와 여기를 자주 오나요?”
“아뇨,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은 아마 이제 없겠죠. 있어도 정말 비밀리에 이루어질 것 같고.”
“비밀로 하지 마세요!”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면서 유페미아는 스자쿠의 팔을 붙들었다.
“제발 비밀로 하지 마세요. 저한테라도, 아니 최소한 코넬리아 언니한테라도 알려주세요. 를르슈나 나나리가 온다거나 할 때면 더 좋겠지만, 스자쿠가 올 때도 알려주세요. 연회나 그런 자리에 나갈 때에 저한테 연락을 주시면 안 될까요? 스자쿠, 제발 부탁이에요.”
“…유페미아 전하. 제가 아리에스 밖을 나간다는 정보가 새어나가면 아리에스의 두 전하가 위험해지십니다. 알고 계시죠?”
“를르슈는 나와 코넬리아 언니가 위험하지 않게 다시는 만날 일이 없도록…심지어 나나리까지 못 만나게 연회에서도 만날 일이 없도록 하고 있는데, 오늘 같은 기적이 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저는 견딜 수 없어요.”
스자쿠, 하고 부르는 가련한 목소리에 스자쿠는 입맛이 썼다. 안타깝기는 했으나 유페미아의 부탁은 이기적이었다. 그리고 스자쿠의 임무에 어긋났다.
“죄송합니다, 유페미아 전하. 이제 더 늦어지시면 코넬리아 전하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얼른 돌아가세요.”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으나, 우선은 그녀를 돌려보내는 것이 우선이다. 스자쿠는 유페미아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유페미아는 떨어지는 손을 다시 한 번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그럼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본격적으로 정무를 맡으러 나오라고 하면 안되나요?”
“…저는 황제 폐하의 기사이지, 황제 폐하가 아닙니다.”
“황족에게 직언을 하는 것도 기사의 본분 아닌가요!”
“…….”
“를르슈가 그렇게 자기를 아리에스에 가두고 있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요. 를르슈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요. 오늘 회의에서 봤잖아요. 를르슈는 자기 출신이나 배경이 부족해도 실력으로…마리안느 님처럼, 스자쿠처럼 해낼 수 있어요. 스자쿠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를르슈를 알 수 있지 않나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고만 있는 스자쿠를 유페미아는 이내 노려보았다. 마주보는 보랏빛 시선에 정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페미아는 결국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더니 난폭한 걸음걸이로 차까지 다가갔다. 열려있던 차문에 뛰어들듯 탔고, 문이 닫혔다. 저에게 인사를 하는 부하에게 잘 부탁한다는 경례를 하고 그녀의 배웅을 마쳤다.
울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를르슈가 아끼는 여동생처럼 보였으니까. 일전에 만났던 파티에서와 다른 강단 있는 모습이 그녀가 황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었다. 황족에게 직언을 하는 것도 기사의 본분…. 직언은 나나리에게도 했었다. 형제 사이가 좋아지도록. 를르슈에게도 직언 같은 걸 한 적도 있다. 잃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야 얻을 순 없다고.
그렇지만 브리타니아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브리타니아를 위해서 일해달라고 말하는 건….
“유피는 잘 데려다줬어?”
“예. 호위까지 두 명 붙였으니 무사히 도착하실 겁니다.”
“오랜만에 떠들썩했다~ 세실 군, 내일부터 다시 우리 둘 뿐이라니, 조금 적적해지겠네.”
세실이 그럴 때가 아니라며 오늘의 데이터 프린트를 들이밀었다. 하긴, 오늘의 기적에 가까운 경이로운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해서 다음 시뮬레이션을…. 자기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로이드에게 스자쿠는 주머니 속의 반지를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스자쿠 군과 나랑 그런 사이였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잘 보세요.”
“바인베르그 가문의 문장이잖아?”
“네. 나이트 오브 스리, 지노 바인베르그의 것인데 어쩌다보니 제 손에 들어왔어요.”
그 ‘어쩌다보니’를 설명하면 로이드가 천년만년 웃어댈 것 같아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를르슈는 로이드가 보다 말던 데이터 프린트를 읽고 있었다. 일반인이 본다고 알까? 하긴 방금 전의 회의에서도 프린트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셨지.
“로이드 씨는 백작이죠?”
“뭐, 우선은 그렇지.”
“제가 듣기로는 이번 주 주말에 바인베르그 가문 주최의 연회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로이드 씨네 집안에도 초대장이 갔을 겁니다.”
“아아, 요새 집에 잘 안 가서 모르겠는데~ 초대장이 오는 거야 한두 개가 아니라서 별 거 아니겠지. 그래서?”
“이 반지, 그 연회에서 지노한테 돌려주세요.”
“내~가?”
로이드는 질린 얼굴을 했다. 남자가 남자한테 반지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주는 거 어떻게 생각해, 세실 군? 음, 사랑하는 사이라면 로맨틱하네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보석상과 손님 정도의 사이겠죠. 세실은 건조하게 대답하며 를르슈가 질문하는 부분에 대해서 성실하게 대답했다.
“나는 바인베르그 경이랑 보석상과 손님의 사이도 아닌데~?”
“그럼 어쩔 수 없죠.”
“흐음?”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써 명령입니다. 지노 바인베르그에게 이 반지, 돌려주고 오세요. 그 김에 연회에 참석하셔서…뭐 지노의 트리스탄 이야기도 들으면서 스파이 노릇도 하고 오세요. 군인이니까 하실 수 있죠?”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파워 헤러스먼트!”
“전하, 이제 사람이 도착했을 테니 가시죠.”
를르슈에게 손을 내밀며 가자고 말하자, 를르슈는 프린트를 다시 세실에게 넘기며 아쉬운 듯이 스자쿠의 손을 잡았다. 계단을 손을 잡고 내려가도 를르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생각에 잠겨있다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면서 앗, 소리를 냈다.
“또 손을 잡았어!”
“제가 에스코트 하고 싶다니까요.”
“나는 약골도, 어린애도 아니야!”
“그러고 보니 계단을 내려오는 건 안 힘드시나봐요. 올라가실 때는 얼굴이 빨개지셨는데.”
특파의 로고를 단 사람이 스자쿠에게 인사를 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아리에스까지 모시겠습니다. 스자쿠는 뒷문을 열어 를르슈를 먼저 태웠다. 그 옆에 앉았다. 운전기사도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를 보며 예상보다 모든 것이 일찍 끝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피가 또 무슨 생떼를 썼어?”
차 안에서, 를르슈는 느긋하게 몸의 긴장을 풀며 물었다. 스자쿠는 생떼, 라는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를르슈는 솔직하게 말하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모한 건 알았지만, 설마 코넬리아 누님의 아이디 카드를 훔쳐서 군 시설에 무단 침입이라니. 유피는 황녀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애야. 그런 애가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무슨 생떼를 썼을 지 궁금해서.”
“유페미아 전하는…….”
생떼라고 하기보다는 소망 같은 걸 스자쿠에게 바란 것이다. 스자쿠가 이루어줄 수 없는 소망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걸 입 밖으로 내기엔 그래서 스자쿠는 적당한 단어를 고르다가 그냥 둘러댈 수 있는 말을 골랐다.
“를르슈 전하께서 마리안느 님이나 저처럼 대단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저처럼, 이라는 말은 조금 웃기지만요.”
“제국 최강이 되는 건 대단한 거지…. 유피는 옛날부터 나에 대한 평가가 후해.”
“유페미아 전하의 를르슈 전하에 대한 평가는 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확합니다.”
“너도 제레미아한테 옮았어? 왜 그래?”
“제레미아 경이 들으면 섭섭하겠습니다, 전하.”
차 창문에 기대어 한참이나 밖을 쳐다보던 를르슈는 조용해졌다. 오랜만에 나온거니 바깥 구경이 신선하겠지. 스자쿠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얌전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침묵을 깬 것은 를르슈였다.
“오늘 나간 건 나나리한테 비밀로 해. 유피를 만난 것도. 다른 것들도 다.”
눈을 감으며 말하는 를르슈는 오늘 하루의 모든 것들을 다 잊고 싶다는 듯이 말했다.
“Yes, Your Highness.”
스자쿠의 단호한 대답에 를르슈는 작게 웃었다. 창문에 기댄 를르슈는 바깥을 보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너무 들떴어, 그러다가 방심하면 모두 잃어버리지. 그러지 말아야 돼.”
를르슈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스자쿠는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쥘 뿐이었다. 유페미아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를르슈가 그렇게 자기를 아리에스에 가두고 있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요.
황자가 아리에스에 자기를 가두고 있는거라면, 지키고 있는 스자쿠는 뭐가 되는 걸까. 내가 하는 일은 무의미한 짓인걸까. 그렇다면 뭐가 의미가 있는 걸까. 하지만 가두고 있는 건지, 지켜지고 있는 건지, 구별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건 를르슈 스스로도 구별하지 못하기에….
아니, 오히려 그는 브리타니아를 떠날 각오를 할 정도로.
“도착했습니다, 전하.”
“아, 졸아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자버렸군. 미안.”
“아닙니다, 바로 일어나셔서.”
아리에스의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가는 를르슈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나나리의 하교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았다. 스자쿠는 후원을 가로질러 가는 를르슈에게 이제 무엇을 하실 거냐고 물었다.
“글쎄, 사실 밖을 나간 건 오랜만이라 조금 피곤한데. 낮잠을 자도 될까?”
“그렇다면 집무실 말고 침실에서 주무세요.”
“그래야지. 집무실에서 자면 네가 언제 노크 없이 들어올지 모르니.”
“…이제 안 그러겠습니다.”
“나나리가 오기 삼십 분 전에 깨우러 와. 낮잠 잤으면 나갔다 온 걸 눈치 챌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궁 안으로 들어가면 제레미아와 사요코가 마중을 나왔다. 를르슈가 피곤하니 낮잠을 자러 간다며 침실로 돌아가는 모습에 시무룩한 제레미아에게 스자쿠가 말을 걸었다. 오늘 특파에서 전하의 활약이 엄청났습니다. 제레미아 경에게 말하지 말란 말은 안했으니 해도 되겠지.
사요코가 저희들끼리 티 타임을 가지자며 거실에서 가까운 살롱으로 갔다. 이쪽이면 를르슈의 침실이랑도 가까우니 호위의 문제도 없다. 를르슈의 당부대로 뜨거운 차가 식을 때까지 가만히 냅두면서 스자쿠는 오늘의 를르슈의 활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레미아가 뜨거운 충의의 눈물을 보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3분이었다.
“그래도 나나리 전하께는 비밀이에요. 를르슈 전하는 걱정이 많으시니까요.”
“알겠다, 쿠루루기 경. 이 미담을 널리 알릴 수 없다는 게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사요코 씨도요.”
“알겠습니다, 스자쿠 님.”
를르슈가 말한 삽십 분 전이 되어서야 이야기가 끝이 났다. 제레미아는 를르슈의 전략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지만 스자쿠의 KMF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도 군인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다보니 서로 무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SP로써 활약한 경험이 있던 사요코도 자기 무용담을 꺼내면서 분위기가 조금 뜨거워졌다.
티 타임이 아니라 약간 회식 느낌이었지. 를르슈의 침실에 노크를 두 번 했다. 들어와. 를르슈의 잠긴 목소리에 스자쿠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를르슈는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난 이래서 외출이 싫어….”
“오늘 제가 괜한 짓을 했군요.”
“아냐, 오늘 특파 방문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다만….”
“다만?”
“…나의 체력이 상상 이상일 뿐이야.”
주로 스자쿠가 하는 말이 를르슈의 입에서 나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전하, 그래도 일어나셔야지 나갔다 온 티가 안 납니다. 내가 몰라서 누워있는 줄 알아? 그렇죠…. 스자쿠는 누워서 천장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스자쿠.”
“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모르겠습니다.”
“일으켜달라고.”
빨리 잡아. 를르슈의 늘어진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게 웃겨서 스자쿠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어버렸다. 아, 전하. 너무 웃겨요. 를르슈의 손을 잡으면서 그의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를르슈는 평소에는 잘 빗어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잠버릇이 남아 뻗쳐 있는 것이 귀여웠다. 스자쿠는 제 손으로 그 머리카락을 대충 빗겨내리며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내 머리가…그렇게 엉망이냐?”
“뭐, 그렇게 심하지 않습니다. 흠, 아니, 다시 보니 심하네요. 엉망입니다.”
“낮잠도 이래서 싫어…. 다시 샤워를 해야 하잖아.”
나나리한테 흉한 꼴을 보일 순 없어.
를르슈는 중얼거리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는 스자쿠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를르슈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낸 스자쿠는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받는 것을 쳐다보았다.
“전하는 샤워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나요?”
“물을 별로 안 좋아해. 그렇다고 더러운 걸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야.”
“전하는 꼭 고양이 같네요.”
고양이들이 물에 닿는 걸 엄청 싫어하잖아요. 앗, 그렇지만 전하가 진짜 고양이라면 이미 저한테서 멀리 떨어졌을 테니, 를르슈 전하 고양이 설은 가능성이 없는걸로. 스자쿠의 헛소리에 를르슈는 잠이 완전히 깨버렸다. 눈을 맞추며 웃는 얼굴인 스자쿠의 뺨을 쭉 잡아 늘리며 를르슈는 쥐고 흔들었다.
“내가 고양이면 암살당할 걱정도 안하고 알아서 잘 살았겠지. 황자를 고양이 취급하다니, 괘씸하다. 나이트 오브 세븐.”
뺨을 놓아주면 스자쿠가 울상을 지었다. 저 입안에 화상 입었다고 걱정해주실 땐 언제고 이렇게 막 꼬집으시고.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스자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어떠냐?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기분 좋네요. 를르슈는 피식 웃었다.
“체력도 좋고 활동도 많은데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하는 나이트 오브 세븐은 어쩌면 강아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스자쿠 강아지 설은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 반박할 주장을 내가 샤워하고 나올 동안 생각하도록.”
하는 김에 침대 시트도 정리해라. 명령이다.
욕실 쪽으로 가는 황자의 뒷모습에 스자쿠는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아니 머리를 쓰다듬어서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은 건 전하도 마찬가지면서 왜 저는 강아지 취급이고…. 근데 고양이들도 머리 쓰다듬으면 기분 좋아하지? 내가 쓰다듬어본 적이 없으니까 잘 모를 뿐이야. 동영상을 보면 다른 고양이들은 좋아하니까 아마 를르슈 전하 고양이설 유력한 주장의 첫 번째 근거로 내세울 수 있고…. 그나저나 나는 메이드가 아닌데 왜 전하의 시트를 정리하고 있지. 좋은 향기 나네. 향수 쓰시나. 주름 하나 가지 않게 정리하면서 스자쿠는 뒤늦게야 ‘스자쿠 강아지 설’ 반박 주장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개가 아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결국 ‘스자쿠 강아지 설’에 대해 반박할 주장과 근거를 준비하지 못한 채로 를르슈를 맞이했다. 봐라, 너는 역시 강아지다. 귀엽지, 멍멍하고 울어봐라, 스자쿠. 를르슈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웃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멍멍.”
침실 문 안쪽에서 를르슈가 크게 웃는 소리에 스자쿠는 자존심이 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를르슈 황자 고양이 설’만 떠올랐을 뿐,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양이 설은 오히려 보고서도 쓸 자신이 있는데….
옷을 갖춰 입고 나온데다가 머리까지 완벽하게 빗은 를르슈가 나타난 것은 얼마 안 지나고 나서였다. 나나리는 아직인가? 예,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하루는 뭘 하면서 보냈다고 말을 하지? 스자쿠, 머리를 굴려봐라.
“전하가 계시는데 제가 머리를 굴려봤자 별로 소용없지 않을까요?”
“맞는 말을 하는구나.”
“…….”
“농담이다.”
“…….”
“강아지를 걷어찬 나쁜 사람이 된 느낌이 드니까 나한테 사과해라, 스자쿠.”
“전하는 정말 제멋대로이십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느낌이 들게 해서.”
“살면서 나보고 제멋대로라고 하는 사람은 스자쿠가 처음인걸.”
책을 읽었다고 하면 무슨 책을 읽었냐고 물어볼 거고, 그 책을 또 왜 읽었냐고 물어볼 텐데, 대답할 293가지 이유가 이젠 진부하다. 293번이나 나나리 전하께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선의의 거짓말이다. 선의든 악의든 거짓말은 거짓말이죠….
“저한테 전하가 고안한 보드게임을 알려주셨다고 하는 거예요.”
“흠. 그래서?”
“근데 제 머리가 전하의 훌륭한 설명을 못 따라가서 전하가 피곤해져서 낮잠까지 주무실 정도였다고.”
“오, 만에 하나 있을 낮잠에 대한 의혹을 밝힐 이유도 완벽해.”
“저도 나름 쓸모 있죠?”
“그러네. 그럼 오늘은 그렇게 말을 맞추는데….”
집무실로 걸어가는 를르슈는 시계를 보더니 나나리가 오기까지 대략 5분 정도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네요. 5분이면 충분하겠지. 를르슈는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뭐하세요, 전하?”
“보드게임을 고안하고 있다.”
“네?”
“나나리는 분명 어떤 게임인지 설명해달라고 할 게 틀림없으니 그냥 진짜로 만들어두는 게 나아. 증거도 확실한 거짓말이 오히려 진짜가 된다.”
“…….”
심지어 스자쿠에게 설명한 흔적을 남기려고 낙서된 여분의 종이에 스자쿠 필적까지 요구한 를르슈의 치밀함에 스자쿠는 소름이 끼쳤다. 나나리는 십 분이 지나서 왔다. 어제 학교에 안 가서 보충 쪽지시험을 받느라 좀 늦었다고 했다. 를르슈는 오늘 하루 종일 게임을 만들었다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고, 스자쿠는 룰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으면서 ‘나나리 전하라면 분명 쉽게 플레이 할 수 있을거예요’라며 같이 말을 맞추었다.
* * *
스자쿠가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은 지 벌써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났다. 10월의 중순 무렵에도 스자쿠의 일과는 똑같았다. 아침에는 나나리와 조깅, 샤워, 를르슈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나나리를 배웅한다. 그리고 를르슈의 일정에 대해 고민하며 줄리어스의 편지를 어떻게 태워버릴지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가끔은 체력을 길러보자며 운동을 권했다가 헛구역질을 하는 를르슈를 보고 제레미아한테 멱살이 잡혔다. 특파에서는 어차피 스자쿠가 전투에 나갈 일은 드물 것 같고, 당분간은 99.9%의 데이터 분석 때문에 바쁘니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지노는 줄리어스의 폭주에 가까운 활약에 따라다니느라 바쁜 것 같고, 아냐는 홀로 본국에 남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써 잔일을 맡아서 피곤한 것 같았다.
나만 편하게 살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숨도 차지 않은 구보를 하며 스자쿠는 아리에스의 후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자쿠 씨.”
“네, 나나리 전하.”
“오늘 무슨 날인지 알고 있나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리에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모를 수가 없지. 스자쿠는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정말로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나나리 전하!”
스자쿠는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와! 진짜로 알고 있었네요! 나나리가 덥썩 안기려는 것에 스자쿠가 살짝 밀어냈다. 나나리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스자쿠는 급하게 말했다.
“제가 지금 땀 범벅이라, 나나리 전하께서 불쾌하실 겁니다.”
“아, 그렇게 따지면 저도 땀 범벅인걸요. 하마터면 스자쿠 씨를 불쾌하게 만들 뻔 했네요.”
“불쾌하기는요. 상관은 없지만 땀만 아니었어도 더 기꺼운 마음으로 전하와 함께 했을 겁니다.”
“쉬는 날이었으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초대장이라도 보냈을 텐데, 오늘은 다들 일하는 날이니까 스자쿠 씨랑 오라버니랑 저랑 셋이서 보내요. 오늘 제 생일 파티의 호스트는 저니까, 저의 저력을 보여드리죠!”
원래 황녀 전하의 생일 파티라면 후원하는 귀족도 오고, 가깝게 지내는 황족도 오는 호화로운 것이겠지만 아리에스의 경우는 다른 것 같았다. 스자쿠는 말하고 싶은 사실 하나에 입이 근질근질거려서 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겨우 아랫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아, 말하고 싶어, 말하고 싶어!
“생일 케이크는 어차피 오라버니가 만들어주실 테니까…. 선물은 뭘까요? 요새 손목시계가 갖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진짜로 손목시계일까요?”
“…나나리 전하.”
“네? 설마 스자쿠 씨도 시계를 준비하진 않았죠?”
“아뇨, 그것보다 잠시 귀를 가까이….”
말하고 싶은 내 마음을 누가 알아주겠어, 나나리 전하뿐이야!
저에게 귀를 가까이 하는 나나리에게 스자쿠는 드디어 사실을 속삭였다.
‘사실 오늘 아냐가 옵니다. 를르슈 전하께서 초대하셨어요. 저는 아냐한테 직접 연락을 받고 알게 되었습니다. 나나리 전하께는 비밀로 하라고 하셨지만…이런 기쁜 소식을 비밀로 했다가는 나나리 전하가 더 속상해하실 거 같아서.’
말을 다 마치고 나나리의 얼굴을 살폈다. 환하게 얼굴이 펴다 못해 정말 꽃이 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직 샤워를 하기 직전이라고 포옹을 거절한 게 방금 전인데 나나리는 스자쿠를 덥썩 끌어안았다. 스자쿠가 밀어내려고 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스자쿠 씨!”
“아닙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기뻐하실 줄이야.”
“어떡해, 얼른 학교가 끝났으면 좋겠어요.”
“학교에서도 많이 축하를 받으실 텐데, 즐거운 마음으로 가셔야죠.”
“너무 기뻐요. 이거 아직 비밀이라고 했죠? 그렇지만 저는 그런 걸 오라버니께 잘 못 숨기니까. 어떡하지, 아, 그래요, 스자쿠 씨, 제 생일선물로 뭘 준비하셨나요?”
“네? 아, 마, 마음에 드실지는 몰라도 아메시스트 브로치입니다.”
“좋아요, 그걸로 됐습니다. 오라버니께 들키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스자쿠 씨도 끝까지 비밀로 하는 거예요!”
샤워하고 올게요! 나나리가 활기차게 올라가는 모습에 스자쿠도 빨리 제 방으로 돌아갔다. 지금 이 상황을 를르슈에게 보이면 무슨 말이 오갔는지 분명 들킬 것이 뻔했다. 샤워를 마치고 평소처럼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장 차림으로 나오면 잔뜩 상기된 얼굴의 교복 차림으로 나오는 나나리와 마주했다.
“다시 한 번, 생신 축하드립니다.”
“…네! 고마워요, 스자쿠 씨.”
“오늘 아침이 기대되네요.”
“저는 도시락까지 기대됩니다!”
2주 전부터 나나리의 생일 케이크 연습이라면서 스자쿠에게 온갖 케이크를, 그것도 증거 인멸이라면서 홀 케이크를 다 먹인 를르슈가 대망의 생일 당일에는 어떻게 할 지 궁금했다. 식당 쪽으로 가면 벌써 도시락은 나와 있고, 를르슈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 뿐이었다. 괜히 스자쿠가 더 떨렸다.
식당에 들어가면 평소와 다를 것 없지만, 모두 나나리가 좋아하는 음식 밖에 없었다. 너무 달아서 스자쿠는 몇 입 못 먹는 음식들이 즐비했지만 나나리는 눈에 불을 켠 듯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를르슈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항상 사랑한다, 나나리. 생일 축하해.”
“오라버니…!”
“오늘은 너를 위한 날이다.”
를르슈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간 나나리는 그를 끌어안고 훌쩍거렸다. 오라버니, 저도 사랑해요. 를르슈는 울음소리가 나는 것에 황당한 듯이 웃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울면 어떡해? 아침도 별 것도 아닌 걸 차렸는데.”
“그렇지만 전부 다 제가 좋아하는 거잖아요. 오라버니가 다 신경 쓰신 거고.”
“…그렇게 좋았어?”
“저는 늘 오라버니가 좋아요. 저도 항상 사랑한다구요!”
“생일 선물로 큰 걸 받고 싶었나보구나, 고백을 남발하다니.”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생일 선물…. 오라버니만 있으면 뭐든 괜찮아요.”
나나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를르슈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요, 저는 오라버니만 있으면 돼요. 를르슈는 계속 울었다가는 학교도 못 가겠다며 나나리를 달래고 자리에 앉혔다. 스자쿠는 남매의 뜨거운 우애에 자연스럽게 감동하는 자신의 변화에 살짝 놀랐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선물을 주마.”
“무슨 선물일까요? 매년 기대됩니다.”
“…작년까진 줄리어스가 함께 있어서 선물이 두 개였는데, 올해는 이렇게 되었네. 조금 쓸쓸하지, 나나리?”
“괜찮아요. 줄리어스 오라버니 소식은 신문만 읽어도 알 수 있어요.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나나리는 정말 상냥하네.”
거의 설탕에 절인 계란말이를 어떻게 먹어야할 지 몰라서 모르고 있는 스자쿠와 다르게 나나리는 기쁜 얼굴로 그걸 맛있게 먹고 있었다. 에리어11 출신인 사요코에게 요리를 배운 를르슈는 일식에 능한 것 같지만, 이렇게 단 음식은 완전히 나나리 취향이라 스자쿠에게는 무리였다. 하지만 티를 내는 건 안 좋겠지. 스자쿠가 용기를 내어 계란말이를 한 입에 넣어 먹고 있을 때였다.
“생일이라 그런가, 기분이 유난히 좋아보이네, 나나리.”
“아, 그건…, 그건 스자쿠 씨의 선물 이야기를 들어서 그래요!”
“스자쿠의 선물?”
“네, 아메시스트 브로치래요.”
“아메시스트라면 나나리에게 어울리겠네.”
“아직 직접 보진 못해서, 디자인이 기대됩니다. 오라버니의 선물과 함께 받아보고 싶어요. 괜찮나요, 스자쿠 씨?”
“제 안목이 괜찮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요.”
준비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겨우 입 속을 헹궜다. 그래봤자 오렌지 주스도 달아서 문제였다. 스자쿠는 식사를 그만 마치겠다고 말했다. 나나리도 오늘은 주번이어서 학교를 일찍 가봐야한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를르슈와 뺨 키스를 나누던 나나리는 갑자기 저를 끌어안는 를르슈의 포옹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제일 먼저 아침에 이렇게 안아주고 싶었다, 나나리.”
“그럼 더 세게 안아주세요. 오라버니는 너무 힘이 없어요.”
“그러면 나나리가 부러질까봐. 아무튼 내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는데, 아침에 보니 스자쿠랑 껴안고 있는 걸 보니 오빠로써 기분이 상했어. 아메시스트 브로치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거야?”
그 모습은 이미 들켰구나. 나나리가 이미 좋은 내용으로 포장해 놓아서 별 탈은 없지만, 아니 오히려 더 큰일인가. 나나리도 뭐라고 할 말이 없는지 조용히 를르슈의 목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 같은 그 분위기에서 제레미아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중요한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나나리 전하, 곧 가셔야할 시간입니다.”
“앗, 그러네요. 학교에서도 다들 축하해준다고 했으니 기대됩니다. 다녀올게요, 오라버니, 스자쿠 씨.”
“잘 다녀와.”
“다녀오세요.”
나나리가 떠나고, 를르슈와 스자쿠만이 남은 식당에 스자쿠가 변명거리를 찾으며 눈을 굴리고 있을 때, 를르슈는 사요코를 불렀다.
“따로 만든 거, 그거 가져다주겠어?”
“역시 전하의 예상대로군요.”
“오히려 이게 스자쿠답지.”
사요코는 카트에 무언가를 담아서 왔다. 스자쿠가 평소에 잘 먹는 담백한 요리였다. 딱 스자쿠만 먹을 양으로 담겨진 요리들이 스자쿠 앞으로 놓여졌다. 스자쿠가 이게 뭐냐는 듯이 를르슈를 쳐다보면 를르슈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나나리의 입맛이랑 스자쿠의 입맛이랑 반대잖아. 아침부터 무리할 필요 없다. 2주 내내 홀 케이크 먹는 것도 고역이었을 텐데.”
“…고역이라는 걸 알면서 계속 그러셨습니까?”
“먹어줘서 고맙다. 덕분에 최고의 케이크를 만들 수 있었어.”
“나나리 전하의 생신이신데 저까지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를르슈 전하.”
“이정도 쯤이야.”
를르슈의 먹는 양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자쿠는 그의 식사가 끝난 걸 알고 있었다. 스자쿠는 허전했던 배를 겨우 채우기 시작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너무 달게 느껴졌던 오렌지 주스가 산뜻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자 아침이 만족스럽게 끝이 났다. 잘 먹었습니다. 스자쿠의 텐션 높은 인사에 를르슈는 미소를 지었다.
“아냐는 나나리의 하교 시간에 맞춰서 오기로 했고. 케이크는 어제 미리 만들어뒀다. 저녁 식사는…사실 내가 만들고 싶지만 주방장이 오늘 만큼은 자기가 일하게 해달라고 해서, 그의 솜씨를 발휘할 때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전하는 정말 모범적인 오빠이신 것 같습니다. 세상 그 어떤 오빠도 여동생을 그렇게 아끼지 않을 것 같아요. 아, 하지만 나나리 전하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런 마음? 스자쿠, 너 설마, 나나리를…!”
“아니, 불순한 마음이 아니라 그냥 아끼고 경애하는, 그러니까, 아, 전하, 저를 매도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이렇게 몰리니까 힘들잖아요!”
스자쿠의 당황하는 얼굴에 를르슈는 장난이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호위의 기간이 늘어나는 동안 두 사람 사이는 가까워졌다. 를르슈의 손이 제 딱딱한 어깨를 두드렸다 떨어지는 것에 스자쿠는 긴장이 풀렸다.
“자, 그래서 나나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아메시스트 브로치 좀 구경해보자.”
“…왜 전하께서 먼저 보시는 겁니까?”
“만약 네가 촌스러운 디자인을 골라서 나나리가 수습 못할 정도의 거짓말을 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걸 방지하고자 하는 거야.”
“저의 안목이 나쁘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사교계의 연회에서도 여성분들에게 선물할 때도 다들 센스가 좋다고 말씀해주셨고요…!”
“여성들한테 선물을 했다고?”
아차. 스자쿠는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를르슈의 눈은 이미 날카롭게 빛이 나고 있었다.
“여성에게 선물을 한다는 의미가 상당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너는 심지어 복수의 여성들에게 선물을 했고, ‘다들’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선물을 자주했다는 말은…!”
“저, 전하!”
“를르슈 전하, 죄송하지만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늘따라 구세주가 많아서 다행이다. 스자쿠는 갑작스럽게 식당 입구에서 나타난 사요코를 구원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찾아와주신 손님, 정말 감사합니다! 를르슈는 스자쿠를 노려보던 걸 그만두고 사요코 쪽으로 돌아보았다.
“아리에스에 손님이 어떻게 올 수 있지?”
“이미 를르슈 전하의 초대장을 들고 오신 분이라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초대장을 보냈다고?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띠롱띠롱. 귀여운 알림음이 스자쿠의 휴대폰에서 울렸다. 누가 보낸거지? 발신인을 확인하면 아냐였다. 급한 일이 생겨서 아리에스에 못 오게 되었나? 그런 내용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스자쿠는 메시지를 클릭했다.
“오신 분은 나이트 오브 식스, 아냐 알스트레임 경입니다.”
[문 열어]
“아냐가 벌써 왔다고?”
“아냐가 벌써 왔나봐요, 전하!”
거의 동시에 외친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너는 어떻게 알았어? 아, 지금 아냐한테 메시지가 와서요.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하교 시간에 온다는 말은 대체 왜 한거야. 를르슈는 사요코에게 아냐를 응접실로 부르라는 말을 했다. 식당에서 응접실까지는 바로였다. 사요코의 안내를 받으며 걷고 있는 아냐는 두 손 가득 서류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겨우 를르슈와 스자쿠를 보았다.
“오랜만, 를르슈 전하, 스자쿠.”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일찍이지 않나, 아냐? 여기도 일정이 따로 있을 거라는….”
“어차피 를르슈 전하의 일정은 없겠지? 슈나이젤 재상 각하도, 재상부도 지금 한가하니까.”
“……아냐, 전하는 황족이시니까 좀 더 존경을 담아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업무가 쌓여있어. 응접실이 아니라 전하의 집무실로 안내해줘.”
“뭐?”
“그리고 전하, 도와줘.”
“…….”
“살려줘.”
정말 건조한 말투였지만, 누구보다 절박해보였다.
스자쿠, 아냐의 서류 더미를 들어줘라. 사요코, 나의 집무실에 차와 다과를. 다과는 샌드위치가 좋겠어. 를르슈의 지시에 사요코는 고개를 숙이며 금방 식당 쪽으로 가버렸다. 스자쿠는 명령대로 아냐의 팔에 들린 것을 다 들어주었다. 줄곧 미간을 찡그리던 아냐의 표정이 펴졌다. 를르슈의 집무실로 향하는 와중에 스자쿠는 그녀의 옷차림이 정장에 그치지 않고 망토까지 단 정복 차림인 것이 신기했다.
“망토까지 했네, 아냐.”
“황족의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정복 차림은 기본.”
“아, 그럼 저도 좀 있다 옷차림을 다시 정비하겠습니다, 를르슈 전하.”
“그리고 를르슈 전하가 나나리는 내 정복 차림을 좋아하니까 입고 오라고 해서 한 것. 원래 망토는 귀찮아. 따뜻한 거 빼고 필요를 못 느끼…”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말아라, 나이트 오브 식스.”
“지노한테도 나나리의 생일 파티 초대장을 보냈는데 아프리카 지구의 전투가 아직 안 끝나서 거절당했다고 들었는데, 를르슈 전하. 줄리어스도 없는 생일 파티가 되겠네.”
“필요 이상의 말! 자, 집무실이다, 도와주고 살려줄 테니 이제 업무를 보자!”
지노한테도 초대장을? 그럼 줄리어스 킹슬레이도 올 텐데…. 를르슈는 정말 나나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를르슈만이 쓸 수 있는 집무실 책상 위에 나이트 오브 라운즈 서류가 잔뜩 쌓여있는 게 신기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호위할 때 옆에 있을 때 보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나는? 아냐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있었다. 그 짜증이 느껴질 정도로 지금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문 쪽에서 노크 두 번의 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사요코일 것이다.
“차와 샌드위치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의자가 필요하실 것 같아서 객실에서 하나 가져왔는데….”
사요코 씨, 당신은 정말 세상에 지상 최강의 메이드입니다!
를르슈는 우선 샌드위치를 아냐에게 내밀었다.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들어, 아냐. 아냐는 샌드위치를 덥썩 먹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차를 마셨다. 샌드위치 한 조각을 해치운 아냐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업무를 아리에스 궁까지 들고 오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최근에 나이트 오브 텐이 정직……. 사실상 작위 박탈을 당하면서 일손이 부족해졌다.”
“뭐? 나는 그런 소식 못 들었어.”
“스자쿠는 아리에스 궁의 호위 중이니까 그것에만 집중.”
“…….”
비어버린 나이트 오브 텐의 전력을 위해 스자쿠가 출전하게 되면 아리에스 궁의 호위를 맡을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없다. 그래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를르슈도 그걸 짐작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많은 에리어에서 테러가 발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모두 나가서 싸우고 있다. 지노도 아프리카에서 고전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
“……그래.”
“그래도 한 명이라도 황제 폐하의 호위를 맡아야하니까 내가 본국에 남아있는데. 다들 각자 에리어에서 전투를 하느라 보고 업무를 미룬 덕분에….”
“…….”
“본국 펜드래곤에 있는 내가 다 떠맡게 되었다. 최근에 기록도 새벽별을 찍는 것 밖에 못 할 정도로.”
새벽까지 업무를 볼 정도로 바쁘다는 이야기다. 아냐는 두 번째 샌드위치 조각에 손을 댔다. 스자쿠는 남아있는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를르슈가 쌓여있는 서류들을 살피더니 엉망이라고 말했다. 아냐는 수긍했다.
“나는 서류 업무를 보고 싶어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된 게 아니야, 전하.”
“…알겠어. 우선 너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 합류하도록. 스자쿠, 이 서류들을 에리어 별로 정리하지 말고 대륙 별로 정리해주겠어? 가능한 테러지수가 높은 순서로. 중복되면 에리어 넘버가 높은 숫자대로.”
“예, 알겠습니다.”
“나는 이쪽에 있는 군수품 내역 증빙자료를 보고 있을 테니까. 아참, 아냐. 그럼 지금 아버지의 호위는 누가 하고 있지?”
“C.C.”
“괜히 물었군.”
“덕분에 빨리 올 수 있어서 다행.”
스자쿠는 를르슈가 말한 대로 서류들을 분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를르슈는 형식대로 안 갖춰진 서류들에 분노하며 다시 작성하기까지 했다. 아냐는 차를 두 잔이나 비우고 나서야 제 몫을 하기 시작했다. 아냐가 하는 일은 스자쿠가 분류한 파일 내역을 살피면서 보고서 내역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명하는 것.
“나나리가 오기 전에 끝내자. 전하와 스자쿠가 아니었으면 오늘 오지도 못했을 것.”
“그랬을 것 같기도 해. 혼자서 이런 업무는 너무 많지.”
“참, 전하.”
“응?”
“나랑 결혼할 생각은 없어?”
“…….”
“우리 알스트레임 가문은 귀족이고, 나름 황후도 배출한 가문이니까 전하한테 피해는 없지?”
갑자기 프로포즈라니. 아냐의 사고를 따라갈 수가 없다. 를르슈도 그런 모양이었다. 잘 움직이던 만년필 끝이 세 명이 동시에 멈추었다.
“혼담이 들어왔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전하랑 결혼하면 혼담도 안 들어올 거고.”
“혼담을 거절하겠다는 이유로 나와의 결혼을 도구로 쓰지 말아라, 아냐. 나에 대한 모욕이다. 그리고 나나리한테도 결혼하자고 하지 마.”
“평생의 파트너.”
“그런 것도 절대 안 돼. 너는 나나리의 전임 기사로도 실격이다.”
뭐야, 그런 이유에서 프로포즈인가. 아냐답군. 스자쿠는 안심하며 남은 서류들을 열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우선 스자쿠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니까 서명할 수 있으니 아냐 대신에 서명할 수 있는 부분은 하고 있다.
“어차피 나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 황제 폐하의 기사.”
“…그래.”
“그나저나 아냐가 벌써 혼담이라니, 빠르네. 아직 어리지 않아?”
“브리타니아에서 17살에 귀족이면 혼담이 빠른 게 아니라 약혼을 해도 늦은 것.”
“…명예 브리타니아인이라 죄송하게 됐습니다.”
“도와줘서 고마워, 스자쿠.”
아냐가 드물게 웃었다. 스자쿠도 별뜻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아냐도 농담인 걸 알고 있다고 말했다. 둘의 대화를 듣는둥 마는둥, 를르슈는 더 집중하면서 서류를 보는 속도와 서류를 작성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쌓여있던 미결재 서류의 산이 처리되는 것이 정말 기적과도 같았다.
서류들이 다 서명되고 마무리 된 것은 나나리의 하교시간까지 딱 삼십 분 남은 때였다. 아냐는 휴대폰을 꺼내서 제 부하들을 아리에스로 불렀다.
“아냐, 네 맘대로 부르지 마, 를르슈 전하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잖아!”
“스자쿠, 시끄러워. 어차피 나도 아리에스의 호위를 한 번 했으니 이미 주의사항은 알고 있어. 서류들 빨리 보내야 돼. 안 그러면 나나리한테 들키니까. 여기에 오려고 무리한 걸.”
“나는 괜찮아, 스자쿠. 아냐의 말대로 빨리 서류를 치우는 게 낫다. 나나리한테 안 들키는 게 우선이다.”
아냐의 부하들은 금방 찾아왔다. 어차피 같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소속이기 때문에 스자쿠를 알아보고 또 경례를 붙였다. 를르슈에게 인사하는 것도 익숙해보여서 안심했다. 서류들을 다 차로 옮기면서 그들은 빠르게 돌아갔다. 아리에스에 길게 머무는 것은 아리에스의 전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요. 부하들 중 한 명이 그런 말을 했다.
예상외의 일정에 피곤해져서 잠시 살롱에서 다 같이 쉬기로 했다. 집무실은 당분간 가고 싶지 않아졌다. 사요코가 의자 하나를 치우러 가겠다며 집무실 문을 여는 소리에 그녀의 훌륭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아냐가 를르슈의 집무실에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 업무를 본 흔적을 지우는 것이 철저했다.
“평소에도 전하가 업무를 도와주면 좋겠다.”
“나는 황족이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아니야.”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일 말고, 그냥 정무.”
“…슈나이젤 형님의 일은 돕고 있지. 그것도 정무야.”
“잡일 말고.”
“…….”
“그럼 브리타니아 제국의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텐데.”
유페미아한테 부탁이라도 받은 것 같은 말을 하는 아냐와 그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다가 대꾸도 안 해버리는 를르슈. 스자쿠는 애매한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아냐는 풀었던 망토를 갖다달라고 살롱에 꽃을 두러 오가던 메이드에게 부탁했다. 그 모습에 스자쿠도 자기도 정복 차림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이드가 돌아와서 아냐가 정복이 되면, 잠시 호위를 맡기고 방에 다녀와야겠다.
“내 추측이지만. 황제 폐하, 줄리어스를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 만들지도 몰라.”
“뭐?”
“조건을 따지면 지금까지 받은 훈장들만으로도 줄리어스는 황제의 기사가 될 수 있어.”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 망토. 고마워. 스자쿠, 너도 망토, 입는 게 좋아.”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려놓고 스자쿠를 빨리 보내버리는 아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을 한 것처럼 태연한 무표정이었다. 스자쿠의 등을 살롱 밖으로 떠미는 손힘이 야무져서 더 황당했다. 아니, 아냐. 잠시만. 스자쿠가 말해도 아냐는 등을 떠밀었다. 나는 그럼 전하의 호위를 하러. 그러면서 잽싸게 살롱 안으로 돌아가는 아냐를 보며 스자쿠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홀린 것처럼 방으로 가서 옷장 속의 망토를 꺼내 입긴 했다.
얼른 정신 차리자, 쿠루루기 스자쿠! 빨리 살롱 쪽으로 달려가려고 하면 이미 현관에서 성대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냐! 아리에스에 어서와요!”
“오랜만, 나나리.”
“나이트 오브 식스의 정복 차림, 정말 귀여워요! 예전에도 봤지만 오랜만에 보니까 더!”
“나나리도 더 귀여워졌어. 를르슈 전하의 불안함이 이해가 가.”
“앗, 스자쿠 씨! 스자쿠 씨도 정복 차림이네요! 다들 제 생일이라서 이렇게 차려입은 건가요?!”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정말 멋있어요! 최고예요! 나나리는 를르슈까지 끌어안으면서 외쳤다. 그래도 오라버니가 제일 좋아요! 오늘 하루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나나리는 정말로 행복한 듯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스자쿠는 이제 아무래도 좋아졌다. 오늘의 산더미 같은 서류 작업도, 엄청나게 위험한 것 같은 세기말 소식도, 뭐 아무래도 좋다. 오늘의 주인공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 * *
아리에스의 주방장은 를르슈의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저녁을 준비했다. 그래도 최고는 를르슈가 만든 생일 케이크였다. 나나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나오자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홀 케이크를 보자 2주 전까지 꾸준하게 먹어왔던 홀 케이크들의 향연에 스자쿠는 속이 미식거렸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저도 맛있겠다고 말을 했다.
열일곱 번째 생일이니 촛불도 그 숫자에 맞추었다. 어느새 꺼진 조명에 이어지는 축하 노래와 함께 박수. 나나리는 소원을 빌고 촛불을 껐다. 가장 옆자리에 있던 아냐가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다. 나나리는 비밀이라고 말했지만 를르슈를 보고 웃고 있었으니, 아마 그와 관련된 소원일 것이라고 스자쿠는 예상했다.
“하긴, 소원은 말하면 소용없지.”
“그리고 저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변할 거니까요!”
“할 수 있어. 나나리는 강하니까.”
“아냐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만요.”
나나리는 케이크를 보기 좋게 잘라서 나눠주었다. 스자쿠 씨, 오라버니의 케이크는 귀한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나나리는 가장 많은 양으로 잘라주었다. 그 귀한 걸 제가 2주 내내 목구멍이 터져라 먹었습니다…. 그 말을 삼키며 스자쿠는 감사합니다, 하고 웃었다. 다행히도 케이크는 물리지 않고 맛있었다.
“나나리, 선물은 아직 열어보지 않는 거야?”
“음, 케이크를 먹고 나서…아직 시간도 이르니까 천천히 열어볼래요. 어차피 먹고 나서 할 일도 없고.”
“나이트 오브 식스와 나이트 오브 세븐이 둘 다 모처럼 정복 차림인데….”
아냐는 케이크 한 입을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나리의 생일 파티에는 댄스 타임도 없는 건가?”
댄스 타임? 스자쿠는 아냐의 화제가 뜬금없었다. 그러나 를르슈는 이미 눈치 챈 듯 무언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아리에스는 파티나 연회 같은 것이 열린 게 옛날 일이니, 파티 홀은 청소한지 오래 되어 먼지가 가득하거든. 모처럼 정복으로 나나리의 생일을 축하해줘서 기쁘지만 댄스 타임은 무리다.”
“지난주 주말에 아리에스 월 정기 대청소 날이었으니 파티 홀의 청소가 안 되어있을 리가 없어. 를르슈 전하, 거짓말은 나빠. 그것도 나나리의 생일에.”
확실히 지난주 주말에 정기 대청소라며 신나게 쓸고 닦았다. 안 쓰는 객실까지 청소했으니 파티 홀을 안 치웠을 리가 없다. 그러나 를르슈의 방어는 끝나지 않았다.
“거짓말은 한 건 미안해, 나나리. 그리고 아냐, 댄스 타임을 가지고 싶어도 지금 당장 악단을 부르기엔 힘들어. 아리에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잖아?”
“내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면 돼. 파티 홀에 스피커가 없던가? 여차하면 파티 홀의 피아노가 있잖아.”
“피아노를 칠 사람이….”
“를르슈 전하, 열 살 때, 다도회에서 피아노를 가볍게 쳐본다면서 브리타니아 황실배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한 백작가의 후계자를 울려버릴 정도로 감동시켜 버렸지.”
“내가 댄스 타임에 어울리는 곡의 악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악보, 지금 휴대폰으로 다운 받을 테니까 외우면 되잖아. 전하의 특기, 암기니까.”
“……나나리.”
애타게 부른 여동생은 케이크의 장식처럼 올라간 딸기를 맛있게 먹으며 밝게 대답했다.
“오라버니의 피아노, 기대됩니다!”
댄스도 오랜만이네요, 하고 꺄르르 웃는 나나리에게 를르슈가 할 말이 뭐가 있을까. 스자쿠는 완전히 패배한 를르슈를 씁쓸하게 쳐다보았다. 어떤 곡으로 춤추고 싶어, 나나리? 아냐의 말에 조곤조곤 대답하는 나나리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다 포기한 듯한 얼굴로 사요코를 부른 를르슈는 파티 홀의 샹들리에를 켜두라고 부탁했다. 사요코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지상 최강의 메이드. 아무렇지도 않은 자세로 고개를 숙여 알겠다고 할 뿐이었다. 샹들리에야 지난 번 청소하면서 한 번 점검했으니 큰 문제가 없겠지만….
“피아노 조율이 엉망일 수 있는데.”
“음정과 리듬만 있다면.”
“그러니까 그 음정이 문제라는 거야, 아냐.”
“저는 조율 같은 건 상관없어요. 오라버니의 피아노라니. 정말 오랜만이라서 춤추는 것도 까먹고 계속 피아노 소리만 들을 지도 몰라요.”
“나나리가 그렇게 말한다면….”
샹들리에가 빛나는 파티 홀에 오로지 네 사람 뿐이었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에 앉은 를르슈는 방금 전 아냐가 내민 휴대폰 속의 악보 내용을 보며 질린 얼굴을 했다. 나나리가 진짜 이걸로 추고 싶다고 했어? 나나리는 빠르고 경쾌한 곡을 좋아해, 전하. 내 손가락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뭔가 위험한 대화가 오갔지만 를르슈는 우선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스자쿠는 그의 등 뒤에서 네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서있었다. 나이트 오브 식스인 아냐와 그녀의 소꿉친구이자 아리에스의 단 하나 뿐인 황녀인 나나리가 손을 잡고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피아노의 경쾌한 음률에 를르슈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조율이 된 건지, 만 건지, 알 수가 없는 미묘한……. 그 어중간함이 기분 나쁜 피아노다.”
“하지만 전하, 오늘은 나나리의 생일.”
“그래, 그래.”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정복 차림에 걸맞게 저도 드레스로 갈아입겠다고 한 다음에, 를르슈의 추천대로 머리까지 예쁘게 땋아내린 나나리는 정말 한껏 멋을 냈다. 그것이 과하지도 않고,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냐의 분홍색 망토가 흔들림에 따라 나나리의 드레스 자락이 흔들거렸다. 소녀들끼리의 춤이 어떤지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귀엽고 아기자기할 수가 있나. 심지어 둘 다 아주 어린 나이도 아니고 열일곱이다.
기분 나쁜 피아노라고 했으면서도 를르슈는 피아노를 성실하게 쳤다. 악보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도, 연습한 적도 없는 곡이라고 했으면서, 처음 듣는 스자쿠도 를르슈가 지금 실수 하나 없이 잘 해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나리가 돌 차례야.”
“아하하, 잠시만, 아냐. 짠!”
“그럼 이제 내 차례.”
“제 손을 잡아요, 아냐.”
“짠.”
나나리가 한 바퀴 돌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휘날리는 것이 정말 아름다웠다. 아냐도 한 바퀴 돌 때마다 나이트 오브 식스의 망토가 흔들리는 게, 그녀도 황녀에 지지 않을 기품이 느껴졌다. 를르슈는 건반 위로 손을 놀리고 있으면서 두 사람에게 시선을 보냈다. 곡의 막바지에 다다른 모양인지 박자가 점점 느려지더니 두 소녀는 서로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트 오브 식스.”
“함께 해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황녀 전하. 오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드레스 끝자락을 붙잡고 황녀의 자세로 인사하는 나나리와 기사의 자세로 인사하는 아냐로 두 사람의 댄스는 마무리가 되었다. 소꿉친구로써 방금 전까지 떠들면서 춤을 추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스자쿠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나나리가 손짓했다.
“이제 스자쿠 씨 차례에요. 오라버니, 저는 왈츠가 좋아요!”
“전하, 왈츠의 악보 필요해?”
“왈츠 정도는 외우고 있지. 스자쿠, 나나리의 발을 밟지 마라.”
“스자쿠는 춤을 잘 춘다고. 매번 연회 때마다 여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장관…….”
“아냐!”
아냐의 말을 막기 위해 급하게 홀의 중앙으로 나가서 나나리의 옆에 섰다. 를르슈의 얼굴도 빠르게 살폈다. ‘스자쿠 네 이놈!’하는 얼굴이지만, 나나리 전하의 생일이라서 봐주시겠지! 제발! 스자쿠는 타고난 운동신경 덕분에 댄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제 운명이 오늘따라 얄밉게 느껴졌다.
왈츠의 익숙한 도입부,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그 시작에 스자쿠는 나나리와 눈을 맞추었다.
“나나리 황녀 전하, 저와 한 곡 추시지 않겠습니까?”
“기꺼이요, 나이트 오브 세븐!”
스자쿠는 원래부터 남의 발을 밟아가며 춤을 추지 않았지만, 나나리도 역시 그러지 않았다. 아냐와의 댄스를 보면서 여자들끼리의 춤은 익숙한가 생각했지만, 나나리는 원래 운동신경이 좋았다. 불경한 생각이지만, 를르슈보다는 저랑 닮은 구석이 많다고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를르슈의 피아노 한 대인데도 선율이 단조롭지 않고 오히려 풍부하게 느껴졌다. 텅 비어있는 이 파티 홀이 아쉽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었다.
마무리로 나나리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나나리와 스자쿠는 방금 전의 모습처럼 인사를 했다. 황녀로서의 나나리와 기사로서의 스자쿠로 인사를 하고 나니 서로 어색해서 웃음이 났다.
“스자쿠 씨한테 생일 축하를 벌써 다섯 번은 들은 것 같아요.”
“열 번은 더 해라, 스자쿠.”
“이제 를르슈 전하 차례.”
휴대폰을 만지고 있던 것 같던 아냐가 를르슈를 피아노 의자에서 일으켰다. 열일곱 소녀가 일으킨다고 해서 일으켜지는 를르슈를 보며 스자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를르슈도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심지어 아냐는 나나리와 동갑인 나나리의 소꿉친구인데, 어떻게 내가…!
“너한테는 휴대폰으로 음악을 트는 게 더 편하지 않나?”
“나는 나이트 오브 식스 이전에는 알스트레임 가문의 영애였으니 왈츠 정도는 악보 안 보고 칠 줄 알아. 전하. 그리고 를르슈 전하 혼자서만 나나리랑 춤을 못 추면 나나리가 속상해 할거야.”
아냐는 오늘 하루 나나리를 몇 번 팔아서 를르슈를 낙담시키는 건지. 스자쿠는 그녀의 뛰어난 수완에 박수를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스자쿠, 뒤로 나와. 아냐의 말에 스자쿠는 홀 중앙에서 나왔다. 왜인지 기세 좋게 나갈 것 같았던 를르슈가 나나리의 옆에 좀처럼 서지 못했다. 왜 저러시지?
“…오라버니? 저와 춤추는 게 싫으신가요?”
“아니야, 나나리. 나는….”
“그럼 왜 그러시나요?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아니….”
걱정하는 나나리의 이마에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겨주며, 를르슈는 말했다.
“오빠가 되어 고작 이런 생일 파티를 열어줘서 미안하다, 나나리.”
“…….”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이 나나리에게 어울리는데 말이야. 나와 나이트 오브 라운즈 뿐인 것도 나나리한테는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나나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자쿠와 아냐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나나리는 를르슈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소 과격한 기세였지만 그것은 왈츠의 시작 자세, 드물지만 여자 쪽에서의 권유 자세였다.
“저는 아리에스 궁의 황녀,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입니다. 저와 한 곡, 추시지 않겠습니까?”
“…….”
“레이디의 권유를 거절하는 남자는 신사가 아니라고, 오라버니께서 그러셨죠?”
“……그래.”
“아냐, 왈츠의 음악을 부탁해요.”
방금 전과 똑같은 음악의 도입부가 시작된다. 스자쿠는 늘 를르슈를 보며 마리안느를 쏙 빼닮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운동신경만큼은 나나리가 마리안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나리가 어머니를 닮은 것은 운동신경만이 아니었다.
“저는 아리에스 궁의 황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청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나나리의 손을 잡으며 춤을 추는 를르슈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나나리는 를르슈와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매번 상상 이상의 체력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지만 댄스나 매너 부분에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화려하게 빛이 나는 사람이라는 걸 실감했다.
“아침에도 말했죠? 저는 오라버니만 있으면 된다고.”
“…줄리어스가 없어서 속상하지 않아?”
“두 분 다 있으면 좋지만, 사정이 그런걸요. 를르슈 오라버니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나나리가 행복하다면 나도 좋아. 태어나줘서 고맙다, 나나리.”
“아직 댄스 중이니까 끝나고 한 번 더 말씀해주세요.”
“몇 번이고 말해줘야지.”
대부분 무표정인 아냐는 기분 좋은 얼굴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 남매를 보고 있으면 누구든 그런 얼굴을 짓게 되겠지. 왈츠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서로 황족의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고 있는 황자와 황녀가 있었다. 드레스 끝을 잡고 있는 나나리에게 한 걸음 떨어져 고개를 숙여 가슴팍에 손을 올리는 를르슈. 그림 같은 모습에 박수를 칠까 하다가 를르슈가 그 한 걸음을 좁혀서 나나리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나나리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미소를 지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나나리.”
“…오라버니의 여동생으로 태어나서 저는 정말 행운아인거죠. 축하 감사합니다. 파티도 열어주셔서 너무 기뻐요.”
“오히려 너를 여동생으로 둔 내가 행운아다.”
계속 두면 끝이 없을 대화의 고리가 느껴진다. 스자쿠가 그것을 느낀 것과 동시에 아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가락, 부러질 거 같아.”
“나는 두 곡이나 쳤어, 아냐.”
“나는 황족이 아니라 기사야, 전하.”
“아냐의 피아노, 훌륭했어요!”
“고마워, 나나리. 근데 저 피아노, 조율하는 게 좋겠어. 진짜 그 어중간함이 기분 나빠. 를르슈 전하의 기분을 알 거 같아.”
“…….”
샹들리에의 화려함 때문에 밖이 어두워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진 것에 나나리가 울상을 지었다. 내일도 학교를 가야하기 때문에 나나리는 자러갈 시간이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아쉽다며 나나리는 아냐를 붙잡았다.
“아냐, 혹시 자고 갈 수 있어요?”
“내가 아리에스에서 자고 가면, 황제 폐하의 호위가 위험해.”
“아버지를 위험하게 할 순 없죠.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곧 있으면 를르슈 전하의 생일이니까 꼭 올게. 모드레드를 타고서라도.”
“아리에스 후원을 망쳐놓을 생각인거냐, 아냐.”
“내가 오지 않으면 나나리가 슬퍼할 거야, 전하.”
“나나리 핑계 좀 그만 대!”
결국 참다못한 를르슈가 소리치는 것에 나나리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오라버니의 생일 파티에 꼭 아냐를 불러주실 거죠? 그렇게 믿고 자러 갑니다! 를르슈에게 볼을 내밀며 키스를 조르는 나나리에게 를르슈가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러자. 서로 볼 키스를 나누고 밤 인사까지 한 나나리는 침실로 들어갔다.
나나리의 침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 아냐가 중얼거렸다. 특유의 그 억양 없는 말투로 건조하게.
“나나리 선물, 주는 거 까먹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나나리 전하께 브로치를 드리는 걸 잊었어요!”
“…너희 둘 다 어떻게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된 거냐?”
“그러는 를르슈 전하는?”
“……내가 오늘 너희들의 서류 업무를 도운 걸 잊지 마라.”
“우리 핑계를 대며 도망가는 전하를 기록하고 싶지만…아리에스의 안전을 위해 참을게.”
지친다, 지쳐. 를르슈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진짜 황제 폐하의 호위를 하러 가야할 텐데도 아냐는 가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근데 아냐, 가지 않아도 돼?”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응?”
“를르슈 전하, 집무실에 잠깐.”
“나는?”
“스자쿠도 와도 상관없어.”
를르슈 전하를 혼자 보내는 건 싫다. 아냐도 분명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은 경험이 있을 텐데도. 를르슈는 집무실이 지겨울 법한데도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는 말에 긴장한 듯이 집무실까지 앞장섰다. 방금 전에 사요코가 의자를 치웠기에 아냐 몫의 의자는 없었다. 하지만 아냐는 의자가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은 듯 했다.
서류의 산더미 사이에서 언제 숨겨 놓았던 것인지 큰 박스가 나왔다. 어떻게 숨겨들고 왔지?! 이런 걸 보면 아냐도 과연 나이트 오브 식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야?! 또 서류?!”
“그런 거 아냐. 이건 황제 폐하의….”
아리에스를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무기? 호신도구? 스자쿠는 긴장하며 아냐의 손이 박스의 포장을 푸는 것을 보았다. 를르슈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나나리의 생일 축하주다.”
“……나나리는 아직 미성년자고, 성인이 되기까지 1년 남았는데.”
“내가 연회에서 술 마시는 걸 보고서 나나리도 그럴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신 모양으로….”
“너는 미성년자가 왜 술을 마셔!”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건 를르슈였다. 스자쿠는 아냐가 술에 강한 걸 알고 있어서 그냥 마시는가보다 싶었는데. 역시나. 브리타니아는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면 안되는구나. 아니, 원래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지? 그렇지만 아냐는 보통 미성년자가 아니니까 적당히 괜찮다는 생각으로…너무 방관했구나. 아, 반성하자. 쿠루루기 스자쿠.
“나는 미성년자지만 최연소 나이트 오브 라운즈. 작위는 나이트 오브 식스. KMF인 모드레드에 타서 사람도 죽인다. 브리타니아 군대는 아동학대?”
“……됐다.”
“좋은 와인이다. 우리 집안에도 내 생일을 기념하겠다고 작년에 들였지만 아직까지도 마실 정도로 아끼고 아끼는 술인데다가….”
“…….”
“나나리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와인이고.”
“…….”
“나도 그 해에 태어나서 이 와인을 맛본 적이 많은데, 그때마다 매번 감동.”
“그만해, 됐어! 미성년자의 음주 감상 따위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잔이 세 개 들어있으니 스자쿠, 나, 전하. 원래 나나리와 나, 전하겠지만. 나나리는 자고, 미성년자니까. 아냐는 아무렇지도 않게 딸려 있는 오프너로 와인을 따고는 크리스탈 글라스에 와인을 따랐다. 너는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거냐, 아냐. 어째 C.C.랑 대화하는 느낌이지?! C.C.는 같은 여자로써 좋은 선생님.
“벌써 취했어? 헛소리? 그 녀석이 좋은 선생님이라고?”
“…전하, 잔 들고. 스자쿠도.”
“와, 향 되게 좋다.”
달빛이 아름답게 들어오는 집무실 창가에서 셋은 잔을 부딪혔다. 청명한 소리가 공기 중을 오가는 것이 듣기 좋았다. 건배사는 ‘나나리를 위하여’였다. 모두 동의했다. 아냐가 한 모금 마시려는 것을 를르슈가 글라스를 빼앗았다.
“왜?”
“미성년자니까!”
“…내년이면 성인인데.”
“내년까지 참아.”
“그럼 전하, 빨리 마셔. 황제 폐하가 전하가 마시는 걸 보고 오랬어.”
“…….”
를르슈가 망설이는 모습에 스자쿠는 빠르게 잔을 비웠다. 아냐가 극찬을 하는 것이 아깝지 않을 맛이었다. 황제 폐하가 하사한 것으로 독은 없는 것 같고. 맛도 향도 최고다. 스자쿠는 최대한 긍정적인 얼굴로 를르슈에게 말했다.
“전하, 맛이 정말 좋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나나리 전하를 아끼시는 게 느껴지는 맛입니다!”
“…….”
“나는 안 마실 테니까, 전하. 얼른 마시고.”
“…….”
“독은 없습니다, 전하!”
를르슈의 한 손에 들린 아냐 몫의 글라스를 집무실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스자쿠는 빨리 마시기를 종용했다. 그래야 아냐가 돌아가고 를르슈도 쉴 수 있을 테니. 를르슈는 못 먹을 걸 먹는 느낌으로 글라스에 입을 대더니 내용물을 비우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하게 마시는 그 모양에 두 기사는 숨죽여 그 음미가 끝나길 기다렸다.
“다 마셨으니 이제 가라, 아냐.”
“…한 잔 더?”
“필요 없어.”
“나나리의 선물, 여기에 두고 갈게.”
“술이면 다시 들고 가라.”
“술 아니야. 부하를 부르고 현관에서 대기하다가 갈 테니 스자쿠랑 같이 있어, 전하.”
“초대한 손님을 배웅 없이 보낼 정도로 난 매정하지 않아. 대신 오늘 댄스니 뭐니…. 스자쿠, 아냐의 배웅을 나가라. 난 여기 있을 테니.”
아냐가 휴대폰을 꺼내서 부하에게 전화를 했다. 를르슈는 잔잔한 소음에 창밖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달빛에 젖은 아리에스의 후원은 넋을 놓고 볼 정도로 아름답긴 했다. 스자쿠는 잠시 떠버리는 시간에 품속에 계속 넣어두었던 브로치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를르슈 앞애 내밀었다.
“저는 오늘 이걸 나나리 전하께 선물하려고 했어요.”
“나한테 먼저 보여줘도 돼? 나나리의 선물이잖아.”
“…디자인이 촌스러워서 나나리 전하가 수습 불가능한 거짓말을 하시는 것보다 낫죠. 미리 검사 받는 거예요.”
“안목에 자신 있다며?”
“나도 볼래, 스자쿠.”
어느새 전화를 끝낸 아냐까지 왔다. 조금 떨리는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아메시스트라고 했지만 중앙에 페리도트와 옐로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는 나비 모양의 브로치였다.
“귀엽다.”
“그래?”
“응, 나나리한테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아.”
아냐가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 를르슈는 멍하니 손끝으로 그 나비 모양 브로치를 만져보고 있었다. 그리고서는 싱긋 웃었다.
“정말 안목에 자신이 있을 만하다. 나나리가 스자쿠의 선물을 제일 좋아할 것 같아.”
“전하가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안심입니다. 그래도 나나리 전하는 를르슈 전하의 선물을 제일 좋아하실 거예요.”
“나는…뭐, 평소에 시계가 갖고 싶다고 해서 정말 손목시계를 준비해서, 오히려 진부해서 기대도 안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진짜 손목시계를 사셨구나. 아니, 그래도 를르슈 전하의 시계를 좋아하실 거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아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밖으로 차의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쥬얼리 헤어밴드야. 머리카락에 안 걸리게 조심해서 쓰라고 전해줘. 사람 왔으니까 갈게.”
“스자쿠, 따라가.”
“전하, 아냐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인데.”
“이렇게 기쁜 날에 온 아리에스의 손님을 매정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배웅을 나가는 이런 경우를 뭐라고 불러야할까. 두 명의 상사에게 두 번씩이나 경례하는 부하들을 보며 스자쿠는 대충 인사를 받았다. 차에 타서 빨리 돌아갈 생각이었던 아냐가 갑자기 생각난 듯, 뒷좌석의 창문을 내려 스자쿠를 불렀다.
“중요한 거 까먹었어.”
“아냐, 오늘 까먹는게 많네.”
“그 술.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온 거야.”
“…유로 브리타니아.”
“줄리어스의 첫 승전식이 열린 지역의 술이니까, 황제 폐하가 전해두라고 명령. 나는 전했어. 스자쿠도 전하한테 전해야 돼.”
“……그 와인 깨지지 않을까?”
“비싸고 맛있고…황제 폐하의 하사품이고, 나나리의 생일 축하주니까 내년까지는 살려두는 게 스자쿠의 임무 아닐까?”
한 마디로 오늘 이 자리에 없는 줄리어스 몫까지 황제 폐하는 나나리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눈치가 없는 스자쿠라도 알 수 있었다. 하물며 더 똑똑한 를르슈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대로 전하면 와인이 깨질까, 아니면 애지중지 모셔질까….
이제 다들 자러 갈 시간이고,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둘이나 있기 때문에 제레미아까지 일찍 퇴근했기에 를르슈 홀로 있을 집무실로 돌아가는 스자쿠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노크를 두 번 하면 를르슈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평소보다 여백이 긴 것에 벌써 피곤하신가,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 보인건 바닥에 쓰러져서 책상 기둥에 겨우 기대고 있는 를르슈였다.
“전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뭐야, 스…자쿠잖아.”
“네, 접니다. 아냐의 배웅을 마치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바닥에…. 아니, 그 이전에….”
“더워….”
를르슈는 제 목에 걸린 스카프를 뜯어낼 것처럼 풀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달빛에 비치는 하얀 얼굴이 평소보다 붉었다. 와인에 독이 있었나?! 스자쿠는 책상 위에 놓였던 글라스를 확인했다. 세 잔이 모두 비어있다. 모두? 한 잔은 스자쿠가, 한 잔은 를르슈가, 나머지 한 잔은 아냐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마시지 못하게 해서 그냥 남았어야 했는데. 아냐가 전하의 목숨을 노리고 뭔가를 탔나? 그렇지만 그건 자기 몫의 잔이었으니 약을 탄다거나 하는 건 더 위험한데. 를르슈 전하의 성격을 안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도박이고, 애초에 를르슈 전하의 목숨을 노릴 만한 인물이 아니고!
“전하,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시, 끄러워. 나는 덥, 고.”
“죄송하지만 전하, 혹시 남은 잔 속의 와인은….”
“내가, 마셨…고. 맛있, 으니까. 그만, 말해. 너, 목소리…엄청.”
아냐와 나, 전하. 셋이서 마셨고 황제 폐하의 하사품이니 독은 없는데. 그렇지만 이 비정상적인 전하의 상태는….
“전하.”
“…그, 만 불러.”
“혹시 술이 약하십니까?”
“뭐…라는거야. 더, 우니까…옷이나, 벗, 기는 걸, 도와.”
와인 두 잔에 주정뱅이가 된 황자를 보며 스자쿠는 세상의 공평함을 느꼈다. 아무리 똑똑하신 전하라도 알코올에는 답이 없으시구나. 그렇구나. 자켓을 뜯어버릴 기세인 황자 전하를 겨우 달래며 같이 바닥에 주저 앉았다. 를르슈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스자쿠는 허탈하게 웃었다. 같이 마셨으니 그 와인이 엄청 도수가 세다는 걸 느낀 건 아니었으니, 그냥 를르슈는 술에 약한 것이다. 이렇게 쉽게 만취상태가 될 정도로.
“나나리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줄리어스는?”
“싸우고 계시겠죠.”
“어머니는?”
“마리안느 님은….”
“돌아가셨어. 알아. 아는데 물어봤어.”
셔츠를 반쯤 풀어헤친 를르슈는 중얼거렸다. 방금 전처럼 느릿해진 대답 대신에 취중진담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해야하는데, 왜인지 이 를르슈 황자와 엮이면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나 12월에 생일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아냐도 그때 다시 오겠죠.”
“…그날 밤에, 나나리한테 내년이 되면 브리타니아를 떠나자고 말할 거야.”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말도 안하고 혼자서 계획을 준비 중이었다. 이기적이지?”
“…….”
“상냥한 아이니까 나를 따라줄 거라고,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
“사실 브리타니아는 넓으니까, 본국을 떠나는 게 고작이겠지. 어느 에리어로 가는 게 고민일 뿐이야.”
“…….”
황녀의 생일 축하주로 내려온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맘대로 마셔도 되는 걸까. 모르겠다. 스자쿠는 일어나서 와인을 글라스에 부어 마셨다. 황족의 물건이라 그런지 입에 남는 잔향까지 완벽했다.
“줄리어스가 나나리의 초대를 받고 여기 왔었을 때…. 스자쿠를 이름으로 불렀잖아.”
“……그랬던가요?”
“스자쿠, 물을. 이렇게.”
아, 그렇지. 스자쿠는 이 별 것도 아닌 와인에 같이 취하는 느낌이라 겨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싫었어.”
“그러셨습니까?”
“스자쿠를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나는 얼마나…노력했는데.”
“……편하신대로 하시면 될 텐데.”
“그러면 나를 제멋대로인 황자라고 생각할 거 아니야?”
“지금은 제멋대로시잖아요.”
“지금은 우리 친하잖아.”
“…….”
“친구 아닌가?”
황제의 기사와 황자가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글쎄. 스자쿠는 를르슈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까워진 스자쿠의 얼굴에 를르슈는 평소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스자쿠는 내가 브리타니아를 떠난다고 해도 말리지 않아.”
“…태어나서 자란 조국을 떠날 정도로 힘들다는 게 뭔지, 저도 대충 알 수는 있으니까요.”
“지노랑 아냐한테 말했을 때는….”
“…….”
“둘 다 기사가 되어서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 그러던 와중에 테러랑…이것 저것…. 그러더니 자기네 집안에 양자와 양녀로 들어오라고 울면서 소리 질렀어. 그랬더니….”
“네.”
“지노는 나나리한테 결혼하자고 그러고…. 아냐는 나한테 결혼하자고 그러네. 그렇게 맥없는 프로포즈에 누가 넘어가냔 말이다. 아무리 서민 피가 섞인 황족이래도.”
“…….”
“한 번만 더 그따위 소리를 하면 아리에스에 발도 못 들이겠다고 하니까…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어서…모두에게 민폐지.”
스자쿠의 어깨에 기대오는 를르슈는 조용히 눈만 깜빡거렸다.
“그렇지만 나는 죽지 않아. 나나리도, 줄리어스도 지켜야하니까.”
“…전하께서는 강하신 분이죠.”
“그런가? 나이트 오브 세븐이 보기엔 내가 강해보이나?”
“네.”
“…충분히 잃을 각오를 할 사람으로 보여?”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당신은 충분히 강하고. 이 좁은 아리에스 궁에서 작은 천국을 필사적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름답다고?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하면 를르슈는 나는 결국, 이라는 말로 끝나게 될까봐 무섭다.
“그 정도 각오면 전하의 손에 원하시는 게 다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너는 황제의 기사가 맞긴 한 건지. 그거 반역죄로 몰릴 수 있는 발언이다.”
“지금의 전하는 어차피 기억하시지 못할 거 같아서요.”
“그럴까…….”
를르슈의 긴 속눈썹이 그림자가 진다. 그가 눈을 감은 것이다. 자는 것 같았던 색색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낮은 말소리가 들렸다.
“스자쿠가….”
“…….”
“떠나는 나를 붙잡지 않는 게 왜 속상할까….”
“…….”
“왜 스자쿠는 브리타니아에 남아야 하는 사람인걸까….”
이윽고 푹 고꾸라진 황자의 고개에 스자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전하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스스로 알고는 계실까. 를르슈의 목이 아프지 않게 받쳐주고 있다가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우선 전하를 침실로 옮기고, 그 다음에 집무실 정리를 하고…. 와인은 주방에 치워두자. 우선 눈에 안 보이게 하는 게 낫겠지.
를르슈를 안아 올리는 방법을 선택할 때 스자쿠는 조금 고민했다. 다친 병사를 옮길 때처럼 들쳐매는 건 를르슈가 토할 지도 모른다. 춤까지 추셔서 온몸이 불편하고 술을 드셔서 속이 불편할 수도 있으니…. 가장 편한 방법은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밖에 없다. 어차피 지금은 시간이 늦어서 보는 사람도 없으니 전하의 자존심도 안심. 를르슈의 자켓을 등에 걸치고 를르슈를 두 손에 끌어안고 들어올렸다. 현저하게 평균을 밑도는 체력을 볼 때부터 예상했지만 정말 말랐다. 요리가 취미라고 하면서 먹는 취미는 없는 이상한 사람….
벌어진 셔츠 사이로 하얀 가슴팍이 달빛에 아른아른거리는 것이 꽤나 위험했다. 스자쿠는 빨리 가면 를르슈가 깰 수 있다는 생각에 겨우 이성을 다잡고서 침실까지 걸었다. 예전에 낮에 한 번 왔었는데, 밤에도 올 줄이야. 품에 안긴 를르슈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스자쿠.”
“네.”
“왜 나는 침실일까….”
“…….”
“그리고 왜 스자쿠는 내 침실에 있어?”
“…….”
“밤에 황족인 나의 침실에 오는…스자쿠.”
“…….”
“나랑 섹스를 하려고?”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눈을 휘며 웃었다. 선명한 보랏빛이 가느다랗게 사라지는 모양새에 그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한참 뒤였다. 스자쿠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황자의 침실 밖으로 나왔다.
술기운이 올라오지 않은 것이 미친 듯이 후회된다. 그래, 술이 덜 취했어. 나는 지금.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게 너무 억울해. 스자쿠는 이를 악물었다. 미쳤어, 미쳤어, 쿠루루기 스자쿠. 너는. 상대는 브리타니아의 황자, 호위를 맡고 있는 아리에스 궁의 황자다.
그런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에 발기하냐고!
* * *
다음날. 머리를 덮치는 두통과 미식거리는 속쓰림에 를르슈는 최근 몇 년을 통틀어서 최악의 기상을 맞이했다. 심지어 온몸을 덮치는 근육통에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몸이 후들거렸다. 어제 대체 뭘했더라…. 나나리의 생일이라 아냐가 조금 제멋대로인 일을 했지만 나나리의 아주 어렸을 적부터 친구니까 그걸 다 들어주고…그래서…서류 작업, 환영, 저녁 식사, 나나리와 인사….
“설마….”
“술김에 쿠루루기 스자쿠와 해버린 모양이구나, 를르슈. 낭만의 조각도 없는 첫 경험이 그래서야 원.”
“…C.C.! 대체 어디로 들어오는 거냐?!”
“근데 쿠루루기는 처녀였던 너를 두고 한입 홀라당 먹고 가버린 것이냐? 아이고, 가엾구나, 를르슈.”
이 마녀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를르슈는 시트를 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저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을 뿐인데 왜 또 그렇게 진실을 호도하는 것인지. 그래, 스자쿠가 소문 때문에 억울한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부정이 없는 걸 보니 다 진실인 것 같아 무섭다, 를르슈. 놀리고 있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줄리어스가 들으면 진짜로 울면서 내 품에 안길지도 모른다. 너를 위해 아껴온 동정을 가져가라고 하면서.”
“이제 닥쳐라! 아침부터 헛소리 듣는 것도 지친다!”
“그래, 이제 를르슈답구나. 스스로 술이 약한걸 알면서 마신 이유는?”
“…나가라, C.C.”
“샤를이 하사한거라고 해도 너는 네가 성인이 되던 해의 하사한 축하주에 한 입도 안 댈 정도인데. 나나리의 때 맞지도 않은 생일 축하주를 마셨다? 선물을 전해준 아냐도 미성년자이니 마시는 걸 거절할 이유는 차고도 넘칠 텐데? 역시 쿠루루기 때문인가?”
이 자식이 지금 어디까지 제 마음을 읽고 있는 건지. 부모님의 친한 친구일 뿐이면서 주제넘게 어머니 그 이상으로 구는 그걸 참아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를르슈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바닥에 발을 딛고 나가려는데, 고작 그 왈츠 한 번에 근육통이 심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군….”
“뭐가 ‘그렇군’이냐.”
“쿠루루기 스자쿠…. 예상치도 못한 아리에스의 이레귤러다. 너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 정도라니.”
“스자쿠를 매도하지 마라.”
“이름 부르고 싶어서 안달 난 그 얼굴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이미 둘이 찰싹 붙어 다녀서 서로 술까지 마시는 사이라니…. 다 큰 딸을 시집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적적해지는구나.”
그나저나 옷도 안 갈아입고 자다니, 꽤나 불편했겠구나. C.C.는 바닥에 주저앉은 를르슈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스카프를 뺐을 뿐, 커프스와 다른 장식이 주렁주렁한 차림으로 그냥 자버렸으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몸의 불편이 심해서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를르슈는 지끈거리는 허리를 붙잡으며 욕실 쪽으로 들어갔다. 그 아무리 밤중에 침실에 막 들어오는 C.C.라고 하더라도 욕실까지 쫓아오진 않았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면서, 를르슈는 심호흡을 했다. 몸도 마음도 불편하다. 술이 약하다 못해 아주 구제불능 수준이라는 걸 안 것은, 마리안느가 살아 있을 때 ‘주량을 테스트한다’라고 하면서 술을 마셔보게 했을 때였다. 를르슈의 간곡한 부탁 끝에 나나리는 자리에 없었다. 마리안느는 아직 한참 어린 딸을 술을 마시게 할 정도로 상식 없는 어머니는 아니라고 를르슈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때의 결과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날 이후로 줄리어스는 를르슈에게서 한 층 더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줄리어스가 싫어하는 일인 나나리를 대놓고 편애하는 일을 해도 줄리어스는 뭔가 감동받은 얼굴을 하며 두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를르슈만큼은 아니지만 나나리를 좋아해.’라며 를르슈를 감격시켰다. 하지만 반면에 그런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나게 만들 정도로 술을 먹고 무슨 짓을 저지른 게 틀림없다. 그것이 무서워서 C.C.에게 솔직하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C.C.는 마녀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를르슈의 머리에 손을 댔다. 그때 처음으로 술의 위험과 동시에 마녀의 힘을 실감했다.
‘…나, 줄리어스를 미워하지 않아. 줄리어스가 나를 좋아해준다고 할 때 기뻐.’
‘진짜?’
‘어머, 를르슈 취했나봐. 아직 고작 한 모금인데.’
‘하지만 나나리는 정말 천사처럼 귀엽고 지켜줘야 하는 우리들의 보물이잖아. 줄리어스랑 함께 지킬 수 있다면 더 좋겠어…. 그렇지만, 줄리어스가 그러지 않은 거 같아서 속상해서, 괜히 나쁜 말만 나오게 돼.’
‘어머니, 를르슈 맨날맨날 술 마시게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알코올 중독이라는 무시무시한 병에 걸리게 된단다. 를르슈가 못쓰게 돼.’
‘…못쓰게 될 를르슈도 보고 싶은데.’
‘너는 형을 너무 좋아하는구나, 줄리어스.’
‘저는 를르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런 말도 그만 두라고 했잖아. 어머니가 속상해하실거고, 나나리도 얼마나 슬퍼하는 줄 알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고 해줘서 기쁘긴 하지만, 그건 우리가 쌍둥이니까 그런 거야. 계속 함께 했으니까…. 줄리어스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 전까지 나랑 같이 나나리를 제일 좋아해주면 안 돼?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이잖아.’
그리고 줄리어스의 뺨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나나리가 태어나기 전에야 일상처럼 한 것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나나리에 빠져 사는 를르슈가 그 일상을 잊어서 오랜만에 했었다. 줄리어스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를르슈를 끌어안았고, 를르슈는 저를 덮치는 뜨거운 아이의 체온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 기억들을 오랜만에 떠올리고 나니 를르슈는 한숨이 나왔다.
“다시없을 흑역사다….”
“설마 어제 잃은 기억을 자력으로 되찾았나?”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털며 나오던 중 한 말에 C.C.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왜 아직도 있는 거야. 를르슈가 싫은 얼굴로 쳐다보는 것에 C.C.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를르슈의 침대에 드러누워서 발이나 까닥거리고 있었다.
“아니면 예전처럼 한 번 도와줘?”
“…됐다. 이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어른이 되면 피하는 법이 익숙해지지. 를르슈,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무슨 말을 해도 그런 식이지, 너는. 아, 그래도 어제 아냐 대신을 해줘서 고맙다.”
“곤경에 처한 소녀를 돕는 것이 미소녀 전사가 할 일인걸. 오랜만에 황제 폐하 전용의 화덕에서 구운 피자와 샤를과 회포를 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나리한테 선물한 술, 나도 마셔봤는데 그거 정말 괜찮은 물건이더군. 아리에스에 아직 남아있으려나? 를르슈, 그 술 어떻게 됐어?”
앞에 마녀 주제에 미소녀 전사 어쩌고는 이제 모르겠다. 를르슈는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너한테 놀림 받을 이유도 없다.”
“아, 그렇지. 나이를 먹으면 이렇지, 당연한 사실도 까먹고.”
“어제부터 자꾸 뭘 까먹는 사람들이 많아…….”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면 시간은 얼추 평소대로 나가는 것이다. 피자를 구울 여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C.C.가 어제 하루 고생해줬으니 보답은 해야 할 테고. 를르슈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C.C.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를르슈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마녀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C.C.는 다양한 힘을 가지고 있다. 를르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신체 접촉이 없어도 읽어낼 수 있고, 그의 마음을 읽는 것은…사실 마녀가 아니어도 그와 시간을 갖고 친해지면 누구보다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침실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를르슈에게 C.C.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외쳤다.
“를르슈, 시계!”
“…아, 선물. 또 잊을 뻔 했다. 고맙다, C.C.”
“그래, 좋은 하루 보내거라.”
“너는 아침 안 먹어?”
“어제 황제 폐하만 먹을 수 있는 피자를 먹은 와중에 엉성하게 만든 네 피자가 입에 맞을 리가 없잖아? 내가 먹을 게 없어 아쉬워져서 조를 때까지 기다려라.”
“아무렴 기다려드려야지.”
“어제 힘 좀 썼더니 피곤하다. 여기서 잘 테니 사람은 부르지 말도록.”
정말 제멋대로인 녀석. 를르슈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뻐근한 몸과 무거운 머리가 아직도 숙취가 가시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분명 얼마 마시지도 않았을 텐데 숙취까지 심한 이유가 뭐냐고. 세상은 불공평하다. 를르슈는 식당 쪽으로 가며 주머니 속에 나나리의 선물을 잘 확인했다.
어제 술을 마신 것은 스자쿠 앞에서 술이 약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스자쿠야 그걸로 비웃는 일은 없겠지만. 커피를 거절했을 때에도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는데 술까지. 그리고 아냐가 고작 이정도도 못 마시냐고 따지듯 쳐다보는 시선에 화가 나서 결국 입에 대버린 것이다. 멀어지려는 의식을 겨우 다잡으며, 스자쿠가 나나리에게 선물할 브로치가 예쁘다고 말해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이후가 문제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오라버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천사가 아침 인사를 하는 것에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해졌다. 평소라면 운동을 하고 있을 시간의 나나리가 왜 여기에 있지? 를르슈는 나나리에게 잘 잤냐고 인사하고 그것을 의아해하며 물었다.
“사실 평소에는 스자쿠 씨가 같이 뛰어주시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오늘은 안 계시더라구요. 다른 호위 분들을 불러서 운동을 하는 건 그렇고, 그렇다고 혼자서 뛰는 건 위험할 거 같아서요.”
“그래, 잘 생각했다. 오랜만에 같이 요리할까?”
“제가 있으면 방해만 되잖아요. 줄리어스 오라버니도 제가 있으면 도움이 안 되니까 나가라고 쫓아내셨고….”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천천히 배워가면…음, 그러기엔 등교 시간을 맞추기가 애매하네. 제레미아도 아직 오지 않을 시간이고. 스자쿠는 정말 어디서 뭘 하는 거지?”
그 녀석도 숙취 때문에 못 나오나?
평소의 일과를 하지 못해서 기운이 없는 나나리가 안쓰러워 괜히 한 번 안아주었다. 를르슈는 주방 쪽으로 가서 주방의 사람들을 보았다. 주방장이 인사를 하며 오늘은 어떤 요리를 할까요, 하고 묻는 것에 를르슈는 대답을 못 했다. 평소라면 영양 균형을 맞춘 식단 43가지 정도 떠올릴 테지만 오늘 아직 스자쿠가 안 와서 나나리를 홀로 둘 수가 없다.
“오늘은 너희끼리 아침을 준비해줘. 나나리는 운동을 하지 않을 거니까 부담이 되지 않은 걸로. 그리고…나와 스자쿠가 어제 술을 마셔서 숙취로 조금 피곤하니까, 그것도 고려해주길 바란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식당에서 사요코와 함께 오도카니 저를 기다리고 있는 나나리는 어제 생일이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여운에 들떠있어도 모자라지 않을 텐데. 를르슈는 나나리와 손을 잡고 우선 최근에 가지 않았던 나나리의 서재에 가서 같이 책이라도 읽자고 그랬다. 나나리는 아침 독서도 좋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게 더 안쓰러웠다. 서재에 도착해서도 스자쿠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요코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는 걸 호위로 삼았다. 나나리와 를르슈는 서로 책상에 마주보고 앉았다. 스포츠교육 이론서를 고른 를르슈와 소설책을 고른 나나리는 서로 몇 페이지 넘기다가 한숨을 쉬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나리였다.
“스자쿠 씨, 어제 생일이라는 핑계로 제멋대로 군 저한테 정이 떨어지셔서….”
“그럴 리가 없다, 나나리. 스자쿠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데. 몇 번이고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네 선물인 아메시스트 브로치도 준비했잖아.”
“그렇지만 브로치는 아직 보지도 못했는걸요. 아냐랑 친해서 춤도 추고 그랬지만,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홀대한다고 생각하실 지도 몰라요.”
“나나리, 스자쿠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정말이야, 지금까지 함께 있던 스자쿠를 생각하면, 만약 스자쿠가 그런 사람이라고 했으면 진작에 그랬지 않았을까? 그리고 세상에 너를 미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어.”
“오라버니….”
“어제 아냐를 보내고, 둘이서 술을 마셨다. 나도 술친구 정도는 생겨도 된다고 생각해서 응석을 부렸는데. 오히려 스자쿠가 정이 떨어졌다면 네가 아니라 나겠지.”
적당히 거짓말을 섞었지만 둘이서 술을 마셨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를르슈가 술이 약하다는 걸 알 리가 없는 나나리는 그렇군요, 하고서 손뼉을 쳤다.
“스자쿠 씨, 지금 숙취군요!”
“그래, 그거일거야. 사실 나도 조금 괴로워.”
“얼마나 마신 거예요, 정말.”
“나나리의 생일이라 들떠버려서 조절을 못했어.”
이 오빠는 원래 알코올 분해가 조절이 안 되는 몸이란다. 다른 한쪽의 오빠인 줄리어스는 스자쿠의 말에 따르면 부어라 마셔라가 가능한 걸어다니는 실시간 알코올 분해 효소 분자 같지만. 쌍둥이인데 이렇게 다를 이유가 있나. 그것도 그 부분만.
“지금이라도 내 선물 받아주지 않겠어, 나나리?”
“좋아요, 오라버니의 선물!”
“뭐 일 것 같아?”
“음…. 최근에 손목시계가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손목시계요.”
“서프라이즈는 물 건너 갔군.”
“그건 어제 아냐의 등장으로 충분했습니다.”
보라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보며 나나리는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평소처럼 아메시스트가 장식일까요?”
“황실의 상징인 보석이라 너무 흔해서 좀 색다른 걸 준비했지.”
“핑크 사파이어?”
“아쉽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건 작년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나리에게 준 귀걸이에 쓰인 보석이었다. 분홍색도 잘 어울리는 나나리지만 이번에 준비한 시계에는 분홍색이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의 느낌일까. 너무 평소와 다른 느낌이라 나나리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열어보겠습니다.”
“긴장되네. 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걸 새로 해줄 테니….”
“오라버니가 저에게 해주신 선물인걸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어요.”
상자가 열렸다.
아직 학생인 나나리가 하고 다니기엔 힘들 수는 있어도 한 번 정도 그 손목에 걸렸으면 하는 게 보고 싶었다. 를르슈는 시계 주변에 알알이 박힌 장식으로 빛이 나는 블랙 오팔을 빤히 쳐다보는 나나리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장식으로 쓰인 건 블랙 오팔이다. 흔히 쓰이지 않은 보석이라 나나리는 모를 수도 있어.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나나리에게 어른스러운 느낌이 나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어.”
“신기하네요, 보라색도 보이고, 초록색도, 아, 주황색도!”
“오팔은 원래 하얀색이 흔하지만. 모처럼 곧 어른이 되는데 블랙 쪽이 더 어른스럽지 않을까 싶었고, 오닉스 쪽이 단정해보일 수 있지만 나나리는 화려한 것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나나리한테는 별로일 수도 있겠군. 괜한 오빠의 취향이다.”
“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치도 못한 보석이라 서프라이즈입니다!”
“평소에 하고 다니기엔 좀 화려할거야. 아직은 학생이니까.”
“그런가요? 그래도 오늘 하루 정도는 학교에 가서 자랑하는 건….”
“그건 위험할 것 같아.”
를르슈가 말하는 ‘위험’이라는 단어는 보통 사람들의 것과 무게가 달랐다. 나나리는 그 말에 기죽지 않고 손목에 시계를 찼다.
“위험하면 오늘 아침 식사 때까지만 하겠습니다. 어떤가요, 어울리나요?”
“나나리는 피부가 하얘서 대조되니까 더 예쁘네.”
“스자쿠 씨에게도 자랑해야겠습니다. 아, 얼른 브로치도 보고 싶은데 대체 어디 계신 걸까요?”
스자쿠 이야기로 빠지려다가 를르슈의 얼굴을 보니 뭔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술자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나나리는 더 캐묻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소설책의 이야기를 했다. 상냥한 오라버니라면 물어보면 다 대답해주겠지만 그래도 모처럼 사귄 믿을 수 있는 친구끼리의 일에 참견하는 여동생은 나라도 싫어. 나나리는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오라버니, 여기 나오는 주인공이 말이죠…….
그 시각, 메이드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스자쿠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쿠루루기 경, 전하들께서는 다 일어나셨습니다. 호위는 아직인가요? 메이드의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스자쿠는 급하게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바로 이어지는 대답에 안심한 메이드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에 스자쿠는 그제야 자기 방의 상태를 확인했다.
나 어제 자위를 아주 질펀하게 했소, 하고 티를 내듯 바닥을 굴러다니는 휴지. 마시고 죽자는 느낌으로 집무실을 정리하고 주방에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와인을 두고 오면서, 요리할 때 쓰일 와인을 죄다 들고 와서 방에서 다 마셔버렸다. 이거 모가지가 잘려나가는 거 아닌가, 아니 잘렸으면! 쿠루루기 스자쿠 죽었으면! 스자쿠는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저에게서 나는 술 냄새에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뭐가 섹스야. 첫 키스도 아직인 주제에.’
콸콸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맞으며 중얼거렸다. 황자를 침실에 데려다주고, 발기가 풀릴 때까지 여러 번 랜슬롯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을 떠올리고 나서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집무실 정리, 주방, 술, 샤워. 다시 그때를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서…또 발기.
욕실에서 무려 세 번이나 했다. 를르슈 전하가 마리안느 님을 닮아 미인이긴 하지만 그 분은 남자고 첫 키스도 아직이라고 방금 전에 나 혼자 말할 정도였잖아! 그런 분을 반찬 삼아서. 미쳤어. 죽어. 죽자. 스자쿠는 더 술을 마셔서 아예 발기하지 않을 정도로 취하자고 생각하고 남은 와인들을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 스자쿠의 생체시계는 보드카를 통째로 마셔도 다음날 칼기상이 가능했으니 다음날 일어날 자신이 있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생각나는 를르슈의 얼굴과 이 팔에 안겼던 몸,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 걸 알면서도 하던 유혹하는 대사. 스자쿠는 휴지를 갖고 와서 사관학교 시절에도 그저 정기점검 하듯 했던 자위를 미친듯이 해댔다. 내일 누가 침실에 들어와서 이 꼴을 볼지도 모른다는 이성이 위험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이미 머릿속은 황자랑 섹스하고 싶어서 안달난 생각뿐이었다. 스자쿠는 정액이 나중엔 나오다 못해 투명해진다는 걸 알 때까지 자위를 하다가 옷을 대충 껴입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다음날 아침인 오늘. 스자쿠의 생체 시계는 스자쿠의 기대를 배신했다. 누군가의 부름으로 일어나는 아침은 사상 처음이었다. 스자쿠는 굴러다니는 휴지를 치우고 쌓여있는 와인병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에 섹스를 못 해서 그런가?”
이제 가을이 한참 넘어가고 추워지는데도 스자쿠는 차가운 물로 씻었다. 빨리 씻고 나가야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장을 차려 입는 중에 혼자 무심코 그런 말이 나왔다. 우선 남자니까 욕실에서 샤워를 할 때 자위를 하면서 빼고 있긴 하지만, 그 이전에는 염문이 돌 정도로…그래, 나는 방탕하게 노는 놈이었지. 그게 몸에 배서 이 사단이 난건가. 그렇다고 섹스하고 싶다고 아리에스 밖을 나갈 순 없잖아.
“그 이전에 전하를…그런 식으로 봤다는 게 문제지, 이 바보야!”
거울 속의 저에게 소리를 지르고 스자쿠는 문을 닫고 나왔다. 어차피 체력 바보라서 머리 쓸 일이 전투 나갈 때 밖에 없는데, 평화로운 곳에 계속 있다 보니 머리도 안 쓰고 정신이 해이해진 것이 틀림없다. 지나가던 메이드에게 전하들은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나나리 전하, 조깅 혼자서 하시진 않으셨겠지. 호위를 데리고…사요코 씨는 어차피 를르슈 전하와 함께 아침을 준비하실 테니까 같이 뛰기는 무리일 거고. 어제 대체…아냐, 어제는 죄가 없다. 어제는 사랑스러운 나나리 전하의 생일이었을 뿐.
모든 건 술이 문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를르슈 전하, 나나리 전하.”
괜히 고개를 들 수 없어서 허리까지 숙여 식당 입구에서 사죄를 드리고 있으면 나나리가 반가운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게 들렸다.
“스자쿠 씨! 어서오세요. 어제 오라버니와 술을 그렇게 마셨다니,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전부 다 주당인가요? 설마 주방에 있는 와인까지 전부 다 마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라버니도 기억을 못하실 정도로 마셨다니. 오늘 아침에 못 나올 이유를 납득해버렸습니다.”
나나리의 말을 듣고 있으면, 를르슈가 뭔가 형편 좋은 거짓말을 해준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저는 전하를 상대로 어제…어제 미친 듯이 빼댄 미친놈인데 이렇게 잘해주시다니.
“나나리의 생일이라 들떴다고 했지? 스자쿠도 어쩔 수 없던 거야.”
“아침의 조깅, 못 가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늦어서…. 호위로써 실격이네요.”
“괜찮아. 나도 숙취 때문에 요리를 못해서 오늘 아침은 나나리의 서재에서 가볍게 독서를 했다.”
고작 와인 두 잔에 숙취까지? 전하의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인 것입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주방에 있던 와인 여덟 병을 다 마시고도, 새로 뜯은 와인 한 병까지 생각하면 상당한 양의 술을 마셔놓고 그렇게 정액을 싸질러댔던 저는 뭘까요? 성욕의 화신? 섹스하고 싶어 미친놈? 아니 반찬의 내용을 따지자면 를르슈 전하에게 미친놈? 피자 냄새 나도 좋으니 독방에 가둬놓고 물만 먹여도 할 말이 없네요.
“스자쿠 씨, 얼른 앉으세요. 오늘 오라버니가 선물을 주셨는데요, 보세요, 손목시계입니다!”
나나리의 재촉에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걸린 자랑의 시계를 보았다. 평소의 노란색이나 분홍색의 아이템을 달고 있는 그녀답지 않은 검은빛이 도는 시계였다.
“주변의 장식은…블랙 오팔인가요?”
“스자쿠 씨는 보면 바로 아나요? 맞아요, 블랙 오팔입니다. 이제 곧 성인이 된다고, 오라버니께서 어른스러운 시계를 선물해주셨습니다.”
“그렇군요. 나나리 전하와 잘 어울립니다.”
“그래도 평소에 하고 다니기엔 화려하니까, 좀 단정한 걸로 하나 더 선물해주마.”
“그럼 그건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해주세요!”
“그때는 방학이잖아.”
“방학이니까 매일 차고 다녀도 되겠죠?”
“단정한 걸로 학교에 갈 때 매일 차고 다니라고 사주는 거란다. 근데 학교에 가지 않는 방학이면 의미가 없지?”
“아, 그러네요. 오라버니의 선물이 너무 좋아서, 들떴나봐요.”
식당에 메이드들이 들어오면서 요리를 나르고 있었다. 주방장이 모처럼 아침을 맡았으니 기합을 넣은 요리가 줄줄이 나오는 것이 완전히 브리타니아식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심지어 숙취 해소에 좋은 요리도 나왔다.
“내가 부탁한대로군. 주방장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그리고 와인을 다 마셔서 미안하다고도….”
“네, 전하. 근데 남은 와인이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실링 마크가 남은 와인뿐이라, 이건 그냥 셀러에 보관해둘까요?”
“그 와인은 셀러에 보관해줘. 모처럼 아버지가 보내주신 것이니.”
스자쿠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를르슈는 지금 스자쿠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나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사요코와 대화를 나누던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스자쿠, 어제 마셔보고 싶다는 술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주방의 와인을 주문할 때 같이 주문할 생각인데.”
“…제가요?”
“어제 그랬잖아. 하여간, 너무 마시더니 다 잊었나? 주방장이 주문할 와인 목록을 정리해서 내 집무실에 갖다둬. 그리고 스자쿠 몫까지 내가 함께 목록을 다 완성하면 사요코가 주문을.”
“알겠습니다, 전하.”
허튼 소리를 하면 죽이겠다, 하는 시선이 쏟아졌다. 스자쿠는 반숙된 계란 노른자를 흐르지 않도록 솜씨 좋게 먹으면서 를르슈의 시선을 피했다.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나나리는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스자쿠 씨.”
“네, 전하.”
“제 선물은요?”
“…아!”
“거봐, 내가 잊었을 거라고 했지? 엄청 마셨다니까, 어제.”
“저와의 아침 운동을 잊을 정도니까 봐드립니다. 그리고 어제의 댄스도 너무 좋았으니까요. 방과 후의 기다림은 스자쿠 씨의 선물이 되는군요.”
웃고 떠드는 남매를 보면서 스자쿠는 괜히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술 먹고 정신이 좀 나가긴 했지만…. 모든 건 술이 문제고, 나나리 전하가 학교에 가시고 나서 를르슈 전하와 다시 사과를 하고, 어제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하를 제가 침실까지 데려갔는데 전하가 저랑 섹스를 아니 이게 아니라!
“아직도 술이 덜 깼어? 스자쿠?”
“…?”
저를 쳐다보는 날카로운 시선. 그렇지만 그 시선이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 파고들기 위해서 치켜뜨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안다. 그리고 누구보다 상냥하게 빛나는 눈빛이 사랑스럽고. 하얗게 빛이 날 듯한 부드러운 우윳빛 피부며, 제 이름을 발음하는 입술의 부드러움 같은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스자쿠?”
“…스자쿠 씨?”
키스도, 섹스도, 부족해, 전부 다.
그래, 예전부터 이상했어. 아름다운 외모인 건 알고 있지만, 황자라고 하더라도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거나, 고양이처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거라던가. 남자 가슴팍에 이성을 다잡는다거나. 그건 다 이상하잖아. 나는 여자랑 노는 일이 많았으니까 당연히 여자만 되는 줄 알았지. 남자도 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야. 남자도 되는 게 아니라.
나는 를르슈 전하가.
“아.”
“숙취가 심한가? 어지러워? 토할 것 같나?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갛지? 설마 고혈압? 사요코! 사요코!”
“제레미아 경! 스자쿠 씨가…!”
나는 를르슈 전하가 좋아.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순간,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무리하는 건 아니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를르슈의 보랏빛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든 것에 스자쿠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사요코와 제레미아가 다가와서 스자쿠의 기색을 살피겠다며 를르슈를 떼어놓아서 다행이었다. 때마침 나나리의 등교 시간이 다가왔고, 나나리와 를르슈의 일과를 보는 걸 할 수 없을 정도로 스자쿠는 상태가 안 좋았다.
그 입술에 저도 닿게 해주세요, 라고 빌고 싶은 마음은 뭐란 말이냐. 스자쿠는 스스로가 순정이나 순애를 품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독점욕도, 미칠 듯이 타오르는 마음도 이상하고 괴로워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스자쿠의 눈치를 살피는 를르슈에게 괜히 미안하면서도, 그런 그가 귀여워서 스자쿠는 어쩔 줄 몰랐다.
나는 닳고 닳은 놈인데 왜…! 를르슈 전하는, 를르슈 전하께, 죄송해서, 황제 폐하, 저를 죽이러 오세요!
* * *
두 사람만이 남은 식당. 뭔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 스자쿠를 보고 를르슈는 불안했다. 술 먹고 내가 무슨 짓을 했나? 하지만 어렸을 때 줄리어스에게 했던 일들은 그간의 섭섭함에 대해서 진실을 말했을 뿐이었고, 스자쿠에게 쌓인 불만이나 그런 불쾌한 감정은 없으니까 일부러 C.C.에게 도움을 받지 않을 자신도 있었는데…. 다시 C.C.에게 가봐야하나.
를르슈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사요코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그녀가 이렇게 급하게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제처럼 아냐가 온 것일까.
“를르슈 전하, 슈나이젤 재상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권력이 높은 사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슈나이젤이 아리에스 궁에 오는 건 익숙할 텐데 왜 이렇게 당황하고 있지? 멍하니 있던 스자쿠도 사요코의 당황한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매사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가 이렇게 놀랄 일이 있을까.
“그게……. 함께 오신 분이 카논 씨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있어서.”
“황족인가?”
“아닙니다. 그저 시중을 드는 분들이긴 한데, 신원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재상 각하께서 믿을 수 있으니 얼른 응접실로 안내해달라고 하셔서 저는 어떻게 해야할지….”
최근에 엮인 유페미아나 코넬리아가 아니라면 다행이다. 아리에스의 특이한 사정을 알고 있는 슈나이젤이 모르는 사람을 대거 대동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요코가 놀랄만 했다. 그리고 지금 시간. 슈나이젤이 찾아오기에는 너무 이르다. 평소에는 나나리의 등교 시간이 지나고 지루함에 미쳐가는 를르슈에게 소일거리를 주러 오는 때는 오후 세 시경 쯤이니.
“…그래, 우선 형님이 원하시는 대로 응접실로 모셔라. 현관에 재상을 세워두는 건 예의가 아니다. 나도 빨리 가보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스자쿠. 몸은 괜찮아? 무리라면 제레미아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아닙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전하.”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의 스자쿠다. 다행이다. 사실 를르슈는 겁을 먹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자쿠가 함께 있다면 안심이다. 현관으로 간 사요코를 보내고, 뒤늦게 식사의 정리를 도우러 오는 메이드들을 등 뒤로 했다. 제 뒤를 따라 걷는 스자쿠의 기척에 안도했다.
빨리 가보겠다고 했지만 진짜로 빨리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상대는 슈나이젤. 황위계승권으로 따지자면 제일 처음이 아닌데도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 그리고 나이트 오브 세븐인 쿠루루기 스자쿠와 특파를 만든 뛰어난 수완가. 를르슈가 준비하지 않고 덤비기에는 너무 강력한 상대다. 게다가 아침에 오다니. 오히려 슈나이젤 답지 않은 방법이라 를르슈는 당황하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를르슈가 응접실 앞에 나타나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요코가 노크를 두 번 했다. 를르슈 전하와 나이트 오브 세븐께서 오셨습니다. 안에 있는 상대는 슈나이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를르슈도, 스자쿠도 잔뜩 긴장한 채로 사요코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형님.”
“왔구나, 를르슈. 그리고 항상 수고하네, 쿠루루기 경.”
“아침부터 일찍 아리에스에 오시다니, 평소답지 않으셔서 이쪽은 놀랐습니다.”
“나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단다. 우선 자리에 앉을까? 를르슈도, 쿠루루기 경도.”
방 안을 한 번 살핀 를르슈는 사요코의 말 그대로를 실감했다. 항상 슈나이젤의 등 뒤에 서있는 카논 말고도 다른 남자가 두 명이나 서있었다. 불안한 기색을 비치면 슈나이젤은 어떻게 행동하지. 비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쪽은 나이트 오브 세븐의 호위를 받는 입장으로써 고작 재상의 끄나플 두 명에 주눅이 들면…. 자리에 앉은 를르슈는 제 옆에 스자쿠를 앉혀두고 슈나이젤과 얼굴을 마주했다.
“못 보던 얼굴들이 있군요.”
“걱정할 필요 없다. 재상부의 핵심 인물이고, 청렴결백과 황실에 대한 충성도로 따지자면 제레미아에게 뒤지지 않을 사람들이야.”
“……무슨 근거로?”
“마리안느 님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 시절, 마리안느 님의 친위대 대장 출신이라고 하면 믿어주겠어?”
“…….”
“브리타니아 제국 재상의 정보다. 를르슈. 세상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너를 알고는 있지만 어머니의 영광과 함께 했던 이들의 자부심까지 짓밟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오늘은….”
슈나이젤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총? 스자쿠가 급하게 를르슈의 상체를 팔로 밀아내며 그를 방어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의 훌륭한 방어 자세에 슈나이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꺼내든 건 투명한 상자였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상자 안쪽에 있는 것은—
“헤어 핀이네요.”
스자쿠는 꽃 모양으로 세공된 그것의 정체에 대해 말했다. 슈나이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스톤으로 만든 것인데, 나나리를 직접 본지 너무 오래 되어서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구나. 일찍 온 이유도 나나리에게 직접 전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란다. 자, 나나리 대신 를르슈, 네가 받아서 전해주거라.”
“…나나리의 생일 선물을 직접 주려고 아침부터?”
“그래. 매년 너를 통해 주긴 했지만, 내년이면 성인이 될 거고, 아이인 나나리의 모습을 보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니 오빠로써 아쉬운 마음에.”
“그럼 저 뒤에 있는 둘은?’
“유피와 코넬리아의 선물을 들고 오는데 카논 혼자서 하기엔 힘들어서 불렀다.”
“……유피랑 코넬리아 누님까지? 우편으로 보냈으면 제가.”
“받지도 않고 돌려보낼 것이 뻔하니 나를 통해 보낸 거겠지. 코넬리아, 그 아이가 나한테 부탁하는 걸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요코가 미리 내둔 차를 마시면서 슈나이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커다란 서류 상자를 들고서 뻣뻣하게 서 있는 뒤 쪽의 두 남자에게 그걸 가져오라고 지시하는 슈나이젤에, 스자쿠는 이번에는 를르슈를 지키는 손에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아무래도 저것도 나나리의 선물인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예쁜 포장지에 싸서 보냈겠지만, 그랬다가는 를르슈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테니. 조금 멋없는 서류상자여도 참아주거라, 를르슈.”
“…….”
“주름이 잘 안 가게 접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네. 우선 꺼내보도록.”
서류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드레스였다. 등 뒤로 끈을 조절해서 사이즈에 관계없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드러나는 레이스는 끝자락까지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커다란 리본으로 허리를 가볍게 묶는 형태로 입는 사람을 화사하게 빛낼 것 같았다. 한 번 덧대어진 투명할 정도로 가벼운 옷감에 끝에는 색색깔의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여자의 드레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스자쿠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유피가 직접 본지 너무 오래되어, 나나리의 키를 가늠할 수가 없어서 급한 대로 골랐다고 하지만, 역시 훌륭하지? 직접 보면 더 좋으련만.”
“유피가 주는 선물인가요?”
“응. 오랜만에 만났다고 들었다만?”
“…정말 우연한 기회로 만난 거라.”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해볼까? 다음은 코넬리아의 선물이다.”
다음 상자에서 나온 것은 케이스에 담긴 티아라였다. 백금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부드럽게 휘어지고 이어지는 곡선들이 아름답지만, 그 사이 사이에 틈을 자연스럽게 채운 아메시스트와 가넷, 다이아몬드가 조화를 이루면서 반짝이고 있었다.
황녀의 권위를 상징하는 티아라 하나 없는 나나리에게 늘 미안한 를르슈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코넬리아의 선물은 를르슈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가장 최고는 황제가 직접 자신의 딸인 황녀에게 티아라를 하사하는 것이지만…. 그건 그것대로 아리에스의 안전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무서운 일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황족끼리 나누는 것이라면 안심이다. 그것도 이렇게 비밀리에 나누는 선물이라면.
“나나리의 선물인데, 네가 감동을 받으면 어떡하지, 를르슈?”
“…두 사람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나나리도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래. 우선 선물은 다시 상자 속에 넣어둘게.”
“드레스에 주름이 가지 않게 정리할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를르슈는 사요코를 불러서 상자 속 내용물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겉보기에는 무거워보이지만, 사실은 옷이랑 티아라 밖에 없기 때문에 가벼워서 사요코는 놀란 눈을 했다. 내용물을 알려주자 사요코는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사요코가 나가기 전에 슈나이젤은 같이 왔던 두 사람과 카논까지 나가보라고 말했다.
“재상 각하의 호위는 그럼 누가….”
“여기에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 있지?”
“…스자쿠는 지금 제 호위를 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재상이 아니라 아리에스의 황자를.”
“알고 있어. 그래도 카논이 들어선 안 될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내보낸 것이다. 그리고 나이트 오브 세븐이 나를 죽일 이유가 있나? 무슨 재주로?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야. 다음 세대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 취임 때 내게 충성을 바칠 생각이나 하는 게 좋을 텐데?”
현 황제가 물러서고 나면 다음 황제는 자신의 기사들을 다시 고를 수 있다. 지금이야 운이 좋게 나이트 오브 세븐이지만, 다음 황제인 슈나이젤이 저를 또 골라줄 거라는 자신은 없다. 하지만 다음 황제가 누가 되는 것과 관계없이 지금은 를르슈의 호위 중이니까.
“…재상 각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아리에스 궁의 호위 중입니다. 재상 각하의 호위까지 할 여력까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재상 각하의 말씀대로 해칠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 너는 황제 폐하의 기사니까. 하지만 동시에 나의 특파 소속 부하이기도 하지.”
“형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요지가 뭡니까?”
그렇게 묻는 를르슈에게, 슈나이젤은 제 옆에 놓인 서류 봉투를 를르슈 앞으로 내밀었다. 계속 뒤쪽의 사람만 신경 쓰느라 서류 봉투를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몰랐던 를르슈와 다르게 스자쿠는 그 서류에 박힌 마크가 신경 쓰였다. 저건 특파에서 쓰이는 마크다. 그걸 왜 를르슈에게?
“유피를 만났던 특파에서 너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 모양이야. 로이드가 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더군.”
“…….”
“나이트 오브 세븐이 지금 전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KMF 훈련과 조정도 쉬고 있고, 그래서 현장감이 떨어질까 걱정을 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보면 95% 후반대의 적합률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이 매너리즘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네가 지난번에 에리어5에 대한 자료를 써보라고 조언했다지?”
“그곳은 어머니의 전장이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핑계는 뭐든 좋아. 지금까지의 쿠루루기 경의 데이터로 모의 전투 시스템에 넣어 계산한 결과 78%라고 하더군. 그게 사실일지 직접 시뮬레이션에 도입해보고 싶다고는 하지만, 지금 나이트 오브 세븐은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아리에스 궁의 호위 중이라서 직접 참가는 어렵고, 그렇다고 아리에스 궁에 특파 부시설을 짓는 건 예산의 낭비 뿐만 아니라, 나나리와 너의 목숨이 위험해지지.”
“…….”
“그들이 바라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합하여 말하자면 이렇단다, 를르슈.”
슈나이젤은 서류의 첫장을 넘기는 를르슈의 손이 굳는걸 보면서 말을 이었다.
“특파의 외부고문이 되거라, 를르슈.”
“…명령입니까?”
“그렇다고 하면?”
“형님께서는 지금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다. 제가 특파의 외부고문이 되면, 일이 생기는 한 특파로 나가야 되고, 주인이 없는 아리에스 궁을 호위하는 나이트 오브 세븐을 멍청이 취급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은 너와 함께 매일 특파로 나갈 것이니 아리에스 궁의 호위는 걱정 없다.”
“홀로 있을 나나리의 호위를 제레미아에게만 맡겨두고 가라는 말씀입니까?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아리에스의 황녀를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면 다시 위험해집니다! 지금 테러 발발 에리어로 모든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출전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새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아리에스에 들어오면 되지 않느냐.”
설마.
지금까지 특파의 외부고문이니 그런 것과 별개로 지금부터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었다. 를르슈는 서류를 내려두었다.
“어젯밤, 나이트 오브 텐이 죽었다.”
“…아냐의 말에 따르면 정직이라고 했는데.”
“아니다, 어젯밤 그는 자객에게 죽었어.”
“…….”
“지금 아프리카 지구에서 미친듯이 승전보를 울리고 있는 군사가 있지.”
“…줄리어스는 황족입니다! 기사 작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황족이었지. 그의 성은 ‘브리타니아’가 아니라 ‘킹슬레이’다. 줄리어스 킹슬레이를 군사로써 남기기에는 그의 공적이 아깝다. 황제 폐하께서는 오늘 약식으로나마 그를 나이트 오브 텐으로 취임시키실 예정이다. 아마 같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한테도 연락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밀리에 이루어진 일이고. 이 모든 과정은 아버지와 나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둘이나 있는 아리에스를 누가 위협할 수 있지?”
슈나이젤은 차를 마시며 맑은 날씨를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너에게는 애쉬포드 가문도 있고, 나이트 오브 라운즈도 벌써 다섯이나 함께 알고 있지 않느냐?”
“…….”
“특파의 외부고문이 되거라, 를르슈. 네 기량을 펼칠 기회다.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는 새로운 성장의 기회이고. 그렇지, 쿠루루기 경?”
“……저의 성장을 핑계 삼아.”
스자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트 오브 텐으로 취임하는 줄리어스 킹슬레이. 그가 아리에스로 돌아오고 나면 스자쿠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 되든 좋다. ‘브리타니아의 하얀 사신’이라는 이름으로 아리에스의 위험이 줄어들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다행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를르슈를 아리에스 밖으로 끌어내는 이 행위 자체는 싫다.
그건 그의 의지를 꺾는 행위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아리에스에 있는데.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이 자해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를.
“저의 성장을 핑계 삼아 를르슈 전하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재상 각하.”
무례한 언행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다. 좋은 기회가 되겠지. 특파에는 엄청난 성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를르슈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스자쿠의 낮은 목소리에 슈나이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브리타니아의 하얀 사신’이다.”
“저를 어떻게 부르시던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전하의 의지를 무시하는 행동은 그 아무리 재상 각하라도….”
“나라도?”
“지금 제가 호위를 맡은 를르슈 전하는 아리에스 궁의 주인이시고, 아리에스의 상징이십니다. 그런 아리에스의 상징의 호위를 저는 황제 폐하께 명령 받았습니다. 를르슈 전하의 의지를 무시하는 것, 그것은 황자 폐하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이고…. 재상 각하라도 벌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를르슈의 하얀 손이 제 옷자락을 끌어내리는 것 때문이었다. 스자쿠는 짧게 숨을 삼키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죄송합니다, 재상 각하. 기분이 나쁘셨다면 그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흐음. 아니야, 오히려 고맙네. 를르슈도 외부고문 일이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해도 된다. 이건 사실 명령이 아니라 권유니까. 로이드의 억지이기도 하고.”
를르슈는 그 말에 이 응접실에 들어와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서류를 다시 봉투 안에 넣으면서 슈나이젤 쪽으로 내밀었다.
“형님께서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기쁩니다만, 아직 본격적인 정무 보다는 어린 여동생과의 시간을 더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로 올 나이트 오브 텐도, 잠시만 보류를 부탁드립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둘이나 있으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알겠어. 이제 볼 일은 끝났으니…. 아침부터 미안했어, 를르슈.”
“괜찮습니다. 모두에게 나나리의 생일을 축하해주셔서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형님의 헤어 핀도 제가 잘 전해주겠습니다.”
재상이 오래 머물면 중대사가 오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여 또 위험해진다. 슈나이젤은 아리에스의 사정을 배려하며 늘 볼 일만 마치고 나섰다. 현관까지 스자쿠와 를르슈는 배웅을 나섰다.
조금 지친 기색의 를르슈가 스자쿠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부드러운 것이 닿는 느낌에 스자쿠는 몸을 굳혔다. 스자쿠가 그러거나 말거나, 를르슈는 중얼거렸다.
“특파의 외부고문…. 잠깐이지만 혹할 뻔 했다.”
“…KMF 쪽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쪽이라고 해야할까, 사실은 너의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 데이터 쪽이지. 어느 전투에 나가서 어떻게 해야 네가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는 게 즐겁다.”
계속 현관에서 서있는 건 그래서 살롱으로 옮겨갔다. 어제 아냐와의 대화가 생각나면서 새로 취임할 나이트 오브 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줄리어스 녀석, 체력도 나만큼 없으면서 어떻게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겠다는건지.”
“대부분 군인 출신이 많긴 하지만, 아냐처럼 KMF 조종이 뛰어나거나, 킹슬레이 경처럼 전략 면에서 훌륭하면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작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오면 황족의 특권으로 하루 다섯 번 두들겨 팰 거다.”
“전하의 체력이 과연….”
내 체력이 뭐, 또 상상 이상? 지겹다, 너의 패턴. 를르슈는 소파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스자쿠를 보면서 웃었다.
“평소와 다름없어서 다행이다, 스자쿠.”
“네, 왜요?”
“아니, 어제 술 먹고 기억이 끊겨서…. 뭔가 실수라도 해서 스자쿠가 날 싫어하게 됐나 싶었는데. 별 일 없었던 거지?”
그러자 이번엔 스자쿠가 고장난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왼손과 왼발을 같이 내밀면서 밖으로 나가 메이드에게 차와 다과를 부탁한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조금 부족한 건 알았지만 체력과 운동신경 면에서는 다시없을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멍청한 스자쿠는…?
뭔가 실수라도 했나….
진짜로?
근데 나 스자쿠한테 정말로 아무 생각 없는데?
“스자쿠!”
“네, 네, 네, 전하!”
“대답은 한 번만. 아니, 정말 뭔가…있었어?”
“아, 무런, 일…일….”
“무슨 일이냐, 빨리 말해라, 그래, 주방의 와인도! 무슨 일인지! C.C.에게 불러서 물어보면 다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확인해버리는 수가 있다. 비겁하게 알아내버려도 좋은거냐?!”
“안됩니다, 그건!”
제가 전하 때문에 사춘기 소년마냥 미친듯이 발정이 나서 자위했다는 걸 알게 되면 저는 목이 잘려나가는 게 아니라 브리타니아 중앙 광장에서 발가벗고 춤추는 일을 해야할 지도 모릅니다! 스자쿠는 다급하게 를르슈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아니, 어제….”
“어제, 어제 그래, 뭐가 있었길래 그러냐! 난 원래 술이 약해, 술이 약해서 안 마시고 연회에 나갔을 적에도 무조건 차만 마시고 그랬어.”
“어제도 그러시지….”
“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술을 못 마시는 한심한 황자는 보기 싫을 테니까……!”
아니 술을 마셔서 약해지시는 분이 무슨 소리를.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그냥…. 제가, 제가 그냥 좀….”
“네가 뭔가, 뭔가 좀 해버릴 정도로 내가 뭔가 해버렸어?!”
“아니, 전하는 아무것도 안 하셨습니다.”
“근데 너는 왜 그러냐고!”
“그게요….”
스자쿠를 있는 힘껏 흔드는 를르슈의 손이 따뜻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흥분은 어제 자기가 실컷 해놓고 나서 를르슈가 흥분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미웠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흔들리며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아예 노골적으로 피하다 못해 고개를 돌린 스자쿠 때문에 한참 불안해진 를르슈는 저주스러운 제 몸이 오늘따라 미운 적이 없었다. 술을 왜 못 마시냐고, 한 잔에 정신이 나가는 게 말이 되냐고!
“사랑싸움 중에 미안하다만, 를르슈, 피자. 치즈 크러스트에 페페로니로.”
“…C.C.씨! 아, 이런, 피자를 드셔야할 시간이군요. 전하를 번거롭게 주방에 보내실 수 없으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여기서 쉬시면서 C.C.씨와 담소를 나누세요. 저는 그럼 이만.”
발빠르게 빠져나가는 스자쿠와 기척 없이 다가와서 를르슈의 앞에 앉는 C.C. 를르슈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도와줄까, 를르슈?”
“…….”
“원래 네 기억은 네 것이니 따로 빚지는 것은 아니잖아.”
“……됐다.”
“방금 전까지 쿠루루기 스자쿠를 쥐고 흔들더니 왜 갑자기?”
“스자쿠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했으니까 그걸 믿을 거야. 그리고 저 녀석은 단순하니 네 도움 없어도 그 정돈 알아낼 수 있어.”
“과연 황자 전하의 뜻대로 될 것인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피자는 그걸로 됐고, 피클도 갖다주면 되는 거지? 아침에는 필요 없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화덕 다 식은 뒤에 찾는 그 못돼먹은 심보는….”
주방에 를르슈가 나타나자 흐에엑, 하고 울리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비명 소리에 모두가 놀랐다. 흐흠. C.C.는 키득거리면서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오랜만에 사람을 죽인 후라서 더 피곤에 찌들 줄 알았는데, 나쁘지 않았다. 사실 피자는 를르슈가 만든 게 제일 맛있다. 하나 밖에 안 남은 와인은 셀러에 있군. 그 술도 내가 다 마셔버려야지. C.C.는 셀러 쪽으로 가기 위해 살롱을 나섰다.
* * *
“C.C.씨 라고 부르는 건 나나리 정도가 되어야 귀엽게 들리지, 너처럼 다 큰 남자가 그렇게 부르면 징그럽다.”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C.C. 정도면 충분하다.”
“그럼 존칭을 떼고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저도 편하게….”
“그러도록, 쿠루루기 스자쿠.”
“풀 네임으로 안 부르셔도….”
“쿠루루기.”
“이름으로….”
“흠.”
치즈가 쭉 늘어나는 피자를 한 입 먹은 C.C.는 맞은 편에 앉은 를르슈의 얼굴을 살폈다. 피자를 내오고 피클과 셀러에 있던 와인까지 대령해준 황자는 C.C.와 스자쿠의 만담과 같은 대화를 들으면서 기분이 상한 듯 했다. 너만 오지 않았어도 더 알아낼 수 있었는데. 얼굴에 적혀있는 그 문장에 C.C.는 웃음이 났다.
“이름까지는 됐다. 너랑 나랑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내가 널 이름으로 부르면 를르슈가 질투에 눈이 멀 거다.”
“나는 질투하지 않아!”
“그럼 쿠루루기를 이름으로 부르면?”
“…나이트 오브 세븐에 대한 예의를 차리도록 해라, C.C.”
“귀여운 짓도 적당히 해야 귀여운 거란다, 를르슈.”
그리고 이 나라에서 내가 예의를 차릴 사람이 누가 있다고. C.C.는 말을 흘리며 피자를 먹었다. 확실히 이 맛이 아니면 안 되는 몸이 되어버리다니. 를르슈, 너는 천하의 마녀를 이렇게 홀리는 능력도 있나. 나름 자신감을 가지도록. C.C.의 칭찬 아닌 칭찬에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저 마녀의 입을 찢어 죽이라고 명령했다.
“저는 황제 폐하의 기사라서…. 전하의 심정은 알겠지만 그 명령은 무리네요.”
“젠장. 기사가 없어서 한 번도 아쉬운 적이 없었는데.”
“세상물정 모르는 동정처녀 를르슈라고 하더라도 요새 세계가 돌아가는 정세는 알고 있겠지?”
C.C.는 마지막 피자 조각을 해치우며 물었다. 손끝에 남은 끈적거림을 닦아내며 하는 말치고는 퍽 진지한 목소리였다. 동정처녀 를르슈라니, 스자쿠는 그녀의 단어 선택에 경악했다.
“브리타니아가 점령한 모든 에리어에서 테러가 발발하다니. 있을 수 없는 사상 초유의 사태다.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위험한 이 상황은….”
그 와중에 와인 한 모금. C.C.는 기묘한 색의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나와 샤를의 작품이다. 줄리어스의 공이 혁혁하게 빛날 수 있도록. 그러다가 진짜 놈들이 섞여서 정말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다 나갈 정도가 될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인간은 예측 불가능이라는 점에서 정말 흥미로워.”
“줄리어스를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샤를은 줄리어스를 아리에스 궁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하니까.”
“…….”
“아리에스의 호위라는 명분으로 줄리어스가 돌아오고, 이제 나도 두 번 다시 아리에스 밖을 나가지 않게 될 거다. 후원자인 애쉬포드까지 우편 서면으로만 연락하는 사이로 전락할 정도로 네가 불안한 게 샤를은 불만인거야. 적당히 아버지 걱정을 끼치지 그래?”
“네가 뭘 알아.”
“내년에 나이트 오브 텐이 호위로 들어오면, 너는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 를르슈. 예전처럼 연회에 나가도 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돼.”
줄리어스 킹슬레이가 아리에스 궁으로 돌아온다. 그것도 나이트 오브 텐. 아리에스 궁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 들어오면…스자쿠는 필요가 없어진다. 전선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명령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스자쿠의 주먹에는 힘이 들어갔다.
“너는 나의 계획을 알고 있잖아, C.C. 나에게 협력한다고도 했어. 그건 거짓말이냐?”
“그렇지. 협력한다고 말했지만……줄리어스가 애원했어.”
“…….”
“아리에스를 지킬 힘이 필요했기에 줄리어스는 자기를 버리고 나간거야.”
“……나와 나나리를 버리고 아리에스를 나간 건 사실이야.”
“너처럼 어리숙하고 요령을 잘 모르는 아이일 뿐. 쌍둥이 형인 네가 잘 알지 않나?”
“혼자 살겠다고 나간 놈에, 제멋대로에.”
“너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지. 마리안느가 죽었을 때에도, 그 옆에서 다친 사람이 네가 아니라 자기여서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로 너를 좋아한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아리에스를 버리고 나가서 힘을 얻고 너와 나나리 곁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해.”
“거짓말도 적당히 해라.”
“마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사실을 재미있게 전할 뿐. 그리고 를르슈, 너야말로 이미 줄리어스가 그러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지 않아? 거짓말은 네가 하고 있는 거란다.”
듣기만 해도 혼란스러운 내용. 를르슈는 식당 밖으로 거칠게 나갔다. 스자쿠가 따라 나가려고 하자 를르슈는 소리를 질렀다.
“집무실에 있을 거야! 따라오지도, 들어오지도 마!”
“전하, 전하의 호위는…!”
“오늘 아침 내내 늦은 녀석이 할 말이냐?! 따라오면 죽어버리겠어!”
죽여버린다는 말도 아니고 죽어버리겠다니. 아주 제대로 된 협박이었다. 스자쿠는 걸음을 멈추었다. 식당 입구라는 애매한 위치에서 집무실이 닫히는 모습까지 그냥 멍하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새 스자쿠의 등 뒤에 선 C.C.가 씩 웃으면서 스자쿠의 허리에 손을 댔다. 약간의 요염함이 담긴 몸짓은 유혹과도 비슷하지만, 스자쿠는 이런 것에 설레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어젯밤은 혼자였는데도 그렇게 뜨겁게 보내다니, 를르슈가 그리 좋더냐?”
“…C.C.는 사람 몸에 손을 대면 그런 걸 다 알 수 있습니까?”
“너에게만 알려주마. 손을 안 대도 알 수 있다.”
“……정말 마녀군요.”
“하나 더 알려줄까?”
“무엇을요?”
“나이트 오브 텐…. 그래, 전 나이트 오브 텐 말이다. 죽기 직전에 왜 그렇게 말이 많던지. 시끄럽고 정신 사나워 혀를 빼버렸더니 뒤처리가 곤란했다. 그러고도 쇼크가 오지 않아서 결국엔….”
“당신이 그를 죽였습니까?”
“그가 임종을 맞이할 준비를 도운 것뿐이야.”
를르슈의 침실에서 자고 있을 테니, 나나리가 오면 알아서 내려갈 거야. C.C.는 터벅터벅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를르슈의 침실을 드나드는 사이라고 하지만, 방금 전의 대화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사이기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질투가 난다. 나는 혼자였는데도 를르슈의 생각만으로도 혼자서 그렇게 뜨겁게 보낼 수 있는 파렴치한 사람이니까…. 스자쿠는 마른 세수를 하며 집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보초라도 서고 있을 생각이었다.
를르슈가 이렇게 틀어박혀 있을 때는 아주 예전의 피크닉 때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갈색의 문을 쳐다보면서 스자쿠는 제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전하를 좋아하는 마음은 연애의 감정이 틀림없다. 어젯밤이나 그간의 제 행동들을 떠올려보면 호의에서, 호감에서 비롯되어서 연정으로 번져버린 것이다.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기쁘다. 그렇지만 그는 브리타니아를 떠나고 싶어 하고, 이 아리에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도 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사랑은 어쩌면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가 같은 마음으로 스자쿠를 바라봐준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지는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일 수도 있지만, 를르슈가 불행하게 느낀다면 다 소용이 없었다.
절대로 들키지 않아야지. 오늘처럼 당황하는 일들도 없어야한다. 숨기는 일 자체는 아주 익숙하다. 나는 괜히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된 게 아니야. 최종 목표는 나이트 오브 원. 원하는 에리어를 받아…일본으로 돌아간다. 설령 일레븐이 된 사람들에게 돌을 맞을 지라도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것이다. 이 목표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 마음을 들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전하를 좋아하는 마음은 결국 이 정도 밖에 안 되니, 고백도 안 하는 게 낫다.
“…스자쿠.”
어느새 열린 문에는 퉁퉁 부은 눈의 를르슈가 서있었다. 스자쿠는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복도에서 계속 서있었기 때문에 손이 아마 차가울 것이다. 그 생각에 빨리 손을 거두려는데 를르슈가 스자쿠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왔다.
“눈이 많이 부었지?”
“…많이 우셨습니까?”
“조금 울다 잤더니 이렇게 됐어.”
“전하의 침실에는 C.C.가 있어서, 따로 어딘가에서 쉬시면서 얼음 찜질을….”
“응접실 소파에 누워있는 황자는…좀 보기 흉한가?”
“흉하기 보다는, 소파는 불편하실 텐데요. 그냥 빈 객실에서 잠시만 쉬시는 건 어떨까요?”
“스자쿠의 방은 안되나?”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숨을 못 쉴 뻔 했다.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내고 스자쿠는 애써 웃었다.
“어제 술 먹고 정리가 엉망이라…. 메이드한테도 못 보일 정도입니다.”
“그럼 그냥 줄리어스의 방에서 쉴게. 어차피 내 방이랑 비슷해서 거기가 그나마….”
줄리어스의 방이라고 하는 곳은 스자쿠가 C.C.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피자를 먹었던 방이었다. 를르슈가 들어가기를 꺼렸던 그 방에 오랜만에 들어갔다. 정기적으로 모든 객실의 청소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깔끔했다. 사요코에게 얼음 찜질을 할 것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고 스자쿠는 를르슈가 침대에 눕는 것을 살폈다.
“어제 내가 술 먹고 뭐했어? 이제 말해줘.”
“전하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제가….”
“네가?”
“생각나는 사람이…있어서 그냥 술이 더 마시고 싶어지더라고요. 주방의 와인은 죄송합니다. 제게 청구서를 주세요, 대금을 내겠습니다.”
“술을 마시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어제부터 술만 마시면 전하가 생각날 것 같아요. 스자쿠는 그 말을 겨우 억눌렀다. 사실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 그럴 것 같지만.
“나나리가 추천해줘서 읽었던 소설이 생각나네.”
“나나리 전하가요?”
“응. 술을 마시면 생각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던데. 눈물이 나면 못 만나는 사람이고, 웃음이 나면 만날 수 있는 사람….”
낭만적인 말이다. 스자쿠는 술을 마시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해본 적이 없다. 눈물이 나도록, 혹은 웃음이 나도록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가늘게 눈을 뜬 를르슈는 스자쿠를 보며 물었다.
“스자쿠가 생각나는 사람은 눈물이 나, 웃음이 나?”
“…웃음이 나는 사람입니다.”
“다행이네.”
“전하는 그러신 분이 계십니까?”
“나는 술을 먹으면 기억이 안 나서…. 울었는지 웃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생각나는 사람이 뭐가 있겠어. 그리고 예전에도 말했지? 첫 키스도 아직이라고. 첫사랑은 그럼 더 멀었겠지?”
여동생 바보라고 놀리지나 마라. 를르슈는 놀림 받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사요코가 들어와서 얼음 찜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숨을 내쉬는 를르슈의 옆 가까이에 앉은 스자쿠는 그가 불편하지 않게 베개를 고쳐주었다.
“줄리어스랑 나나리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이가 좋았어.”
“그러십니까?”
“나나리한테서 나를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나나리를 괴롭혔겠지. 짐작은 했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되서…. 그래서 자주 싸우게 됐어. 그러다가 작년에 황적을 버리고 나가버렸어.”
“…….”
“그 사이에 아리에스의 호위 자리에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공백이 생기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을 때 스자쿠가 와서 살았는데.”
“…….”
“줄리어스 녀석…. 이제 예전으로 못 돌아간다고 했으면서, 왜 돌아오는 거야. 겨우 여기서 벗어나게 됐으면,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얼마나 갑갑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해. 그 무력함에 미치게 되는 이 곳에. 겨우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제국 최강의 기사가 될 정도인데….”
를르슈의 호흡은 느려지더니, 그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집무실에서도 자도 얕은 잠을 잔 것 같았다. 그의 오르내리는 가슴팍까지 이불을 다시 올려주고는, 스자쿠는 시계를 확인했다. 나나리 전하가 하교하기 한 시간 전에 깨워드려야겠다.
그나저나 를르슈의 방과 닮았지만 생활감을 떠나서 분위기가 다른 느낌이 줄리어스의 방다운 느낌이었다. 서쪽의 복도 끝에는 아마 줄리어스의 집무실이 있을 것이다. 나나리의 집무실도 지을 것이면 지금부터 개축하는 게 편할 텐데…. 아리에스를 떠날 생각에 를르슈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자고 있는 를르슈를 두고 복도를 서성거렸다. 등교의 호위를 마친 제레미아가 를르슈를 찾았다. 줄리어스의 방에서 자고 있다고 하자, 나나리에게 아침에 못 풀고 간 시계를 급하게 받아서 이 황송함에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고 유난을 떠는 제레미아 때문에 겨우 웃음을 참았다. 고작 가지고 있는 걸로 되겠습니까. 오늘 슈나이젤 재상 각하께서 오셨는데요—. 스자쿠의 이어지는 말에 사요코가 여기는 전하의 오수에 방해될 수 있으니 살롱으로 가자고 했다.
오랜만에 각자의 전하 자랑 시간이었다.
* * *
나나리가 돌아오고 나서, 뒤늦게 생일 선물을 열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샤워까지 마친 를르슈는 낮잠을 잔 흔적도 없이 나나리의 선물 감상을 도왔다. 오랜만에 듣는 유페미아와 코넬리아, 슈나이젤이라는 이름에 나나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들 이렇게 축하해주다니, 너무 기뻐요. 를르슈의 목을 끌어안으며 기뻐하던 나나리는, 스자쿠가 조금 민망한 듯 내미는 나비 모양 브로치에 환호성을 질렀다. 오라버니의 시계랑 같이 하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나나리가 기뻐해줘서 다행이었다.
유페미아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한 바퀴 돌아보는 나나리는 정말 귀여워서, 를르슈는 몇 번이고 미소를 지었다. 주말에 이걸 입고 파티 홀에서 춤을 추고 싶다고 하는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가 내일 모레 조율사를 불러서 피아노를 조율하겠다고 말했다.
나나리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이루어주겠다. 이 아리에스 궁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를르슈의 견고한 의지가 비치는 것에 스자쿠는 소리 없이 숨을 죽이며 어색하지 않게 웃을 뿐이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이트 오브 텐이 된 줄리어스 킹슬레이가 아리에스의 호위로 들어오게 될까. 나나리의 생일은 10월이었고, 내년 10월에 브리타니아 본국을 떠나기에는 너무 늦을 테고. 그에 대비할 계획을 짜는 를르슈의 머릿속을 스자쿠는 읽을 수가 없다. C.C.처럼 기묘한 힘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알아내도 를르슈 전하는 기뻐하시지 않겠지.
조금이라도 당신을 알고 싶지만, 알아도 당신은 기뻐하지 않겠죠. 당신은 떠날 사람이니까. 스자쿠는 마음을 다잡으며 를르슈에게서 두세 걸음 뒤떨어져서 걸을 뿐이었다. 다정한 그와 다르게 세상은 가혹하다. 가장 옆에 있는 자신조차도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 이 곳에 왔던 우연한 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 * *
“다음 주에 벌써 오라버니의 생일이에요.”
일과의 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나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벌써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스자쿠도 걱정이었다. 나나리의 선물이야 여자들에게 자주 선물을 보내봤으니 익숙했지만, 같은 남자한테 선물을 보내본 것은 드물었다. 그나마 친한 지노한테야 술을 보내는 게 고작이지만, 를르슈에게 술은 독이었다.
“그러네요. 전하께서 생각하신 선물이 따로 있나요?”
“오라버니는 뭘 드려도 좋아하셔서….”
“그렇다면 더 편하지 않나요?”
“그래도 기쁘게 쓰실 수 있는 걸 드리고 싶어요. 작년에는 용돈을 모아서 만년필을 해드렸는데…. 듣기로는 아직도 집무실 서랍에 포장된 상태로 있대요. 쓰시지도 않을 거면 왜 받으셨는지.”
“나나리 전하의 예쁜 마음이 아까워서 못 쓰시는 겁니다.”
“스자쿠 씨는요? 뭔가 준비한 게 있나요?”
“저라면 보통 술을 선물하는데요….”
“스자쿠 씨는 술을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는 걸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런데 전하는 술을…. 나나리는 를르슈가 술에 취약한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앉았다. 추우실 텐데 괜찮으세요? 스자쿠는 제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으며 나나리에게 두르게 만들었다. 아주 예전에, 를르슈에게 정복의 망토를 주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부터 난 좀 정신이 나갔던 걸지도.
“스자쿠 씨는 춥지 않나요?”
“뭐, 매번 하는 말이지만 전 군인이니까요.”
“…빨리 고민을 끝내고 들어가죠. 스자쿠 씨가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지금까지 무슨 선물을 하셨나요?”
“꽃, 책, 노트, 만년필, 귀걸이…음, 오라버니가 용돈을 적게 주셔서 이게 고작이라구요.”
“귀걸이는 어떤걸로?”
“아메시스트로 장식된 걸로, 너무 심플했지만 오라버니는 기뻐하셨어요. 물론 같이 받던 줄리어스 오라버니는 재미없는 디자인이라고 하셨지만….”
“오빠 분들이 쌍둥이시니까 부담이 두 배군요.”
“네, 다른 걸 선물해드리면 두 분 다 반응이 미묘해져서…. 이번엔 를르슈 오라버니만 챙기게 되었지만.”
나나리는 적은 용돈으로 가치 있는 선물을 하는 건 이제 무리라고 말했다. 아직 어리고 학생이라는 핑계로 자질구레한 걸 주고 싶지도 않다고 입을 삐죽이는 나나리에게, 스자쿠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나나리 전하, 전하께서 선물을 고르시고 제가 계산을 하는 건 어떤가요?”
“네?”
“자랑은 아니지만, 전투에 나가서 받은 하사금도 있고 저는 돈이 많습니다. 사관생도 시절부터 저축해둔 돈도 있고요. 나나리 전하께서 선물하고 싶은 물건은 황실 납품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제 선에서 값을 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스자쿠 씨의 돈이잖아요. 제가 준비한 게 아니고.”
“하지만 제 고민을 들어주신 상담료라고 한다면요?”
“스자쿠 씨의 고민?”
“를르슈 전하께 무슨 선물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넘버스 출신이라 황족 분들과 전투 외에는 엮일 일이 없고 그러다 보니…. 또 를르슈 전하께서는 저와 동갑이시고, 술까지 같이 마실 정도로…좀 무례할지는 몰라도 친한 사이니까요. 좋은 선물을 하고 싶은데, 나나리 전하의 혜안을 빌리고 싶습니다.”
나나리는 고민을 하는 눈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습니다, 스자쿠 씨! 도와드리죠! 이래보여도 오라버니의 취향은 다 꿰고 있으니까요! 나나리의 활기찬 목소리에 스자쿠는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그럼 이제 들어가요, 전하. 저 춥습니다. 아하하, 군인이라면서요? 군인이어도 추워요.
샤워를 하고 다시 식당에서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춘추복이었던 나나리의 교복은 어느새 동복으로 바뀌었고, 스자쿠는 변함없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장 차림이었다. 를르슈는 주방에서 바쁜지 얼굴을 비치는게 늦었다.
“그럼 오늘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아이디어를 받아볼게요.”
“저도 전하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둘이 뭘 쑥덕거려. 스자쿠, 나나리와 거리가 가깝다. 급하게 먹으면 안 되니 스프부터 내오도록 했어.”
퉁명스럽게 말하는 를르슈의 등장에 나나리와 스자쿠는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라버니.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를르슈는 웃고 있었다. 스프가 나오고, 스자쿠는 맛있고 따뜻한 느낌이 좋아서 몇 번이고 더 달라고 할 뻔했다. 를르슈가 스프로 한 끼를 채울 생각이냐고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럴 뻔 했다.
나나리가 학교를 가고 나서, 를르슈는 집무실로 갔다. 오랜만에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재상부의 서류를 살피던 를르슈는 아주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야…. 한 번 받아주니 밑도 끝도 없군.”
“네?”
이제는 나나리에게 추천 받은 소설책을 읽던 스자쿠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다. 워터마크로 박혀있는 마크는 특파의 로고였다.
“로이드 녀석, 슈나이젤 형님한테 빌붙어서 나한테 시뮬레이션 전투 조언을 요구하는데. 이 자식과의 법정공방에 쓰일 변호인단 좀 구해주겠어, 스자쿠?”
“아스플런드 가문은 요새 권세를 얻고 있는 집안이라…. 넘버스 출신의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는 무리입니다.”
“나랑은 싸울 수 있다며?”
“그건 객기였습니다.”
“아는구나.”
“근데 정말 필요하시다면 구해드릴 수 있어요, 변호인단.”
“농담을 농담으로 못 받는군.”
하지만 성실하게 특파 서류에 글씨를 적어내리는 를르슈였다. 아리에스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자 랜슬롯의 디바이서를 빌리고 있는 입장으로써 이 정도는 해줘야지. 스자쿠는 소설책의 글자를 눈으로 좇으며 나나리 전하의 취향이 대충 뭔지 감이 잡혔다. 약간 이루어질까 말까 하는 그런 아슬아슬한 텐션의 연애 감성을 좋아하시는구나. 밀고 당기기가 확실한 고수들의 싸움보다는 순애보끼리의 어쩔 줄 모르는 그런…. 귀여우셔라.
“그 소설, 재미있어?”
“전 세계가 극찬하며 이 소설의 판권을 사려고 했다는 게 이해가 갑니다.”
“…어차피 사랑인 게 뻔한데, 이게 사랑일까 말까 고민하는 게 클리셰라서 지루하던데.”
“클리셰라서 사랑받는 거겠죠. 그리고 주인공들은 이게 사랑인지 모르고, 읽는 사람만 사랑인 것을 아니까……약간 답안지를 보고 문제지에 정답을 체크하는 쾌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연애 소설을 읽는데 그런 불성실한 감상은 뭐냐?”
“전하도 읽어보셨죠?”
“읽어는 봤지. 그냥 바보 같더군.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어쩔 줄 모른다는 그런 게….”
“그런가요? 하긴, 호불호가 갈릴 것 같습니다. 지독한 클리셰라는 생각이 들긴 해서.”
“그리고 난 문제지만 봐도 정답이 보이는 타입이라.”
“그렇지만 이건 연애 소설이라구요? 정답 같은 건 없어요.”
“…그런 방면에서도 정답을 읽어, 나는.”
자신은 있지만, 평소보다 가라앉은 느낌의 대답이었다. 그런 방면이라면 연애겠고, 연애에서도 정답을 읽었다는 건, 아직까지 사랑해보지도 않았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조 같은 걸까. 아니면….
“전하는 좋아하는 분이 계시나요?”
“부끄러운 걸 세 번이나 말하게 하는군. 첫사랑도 아직이라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다. 내 짝사랑은 아직 안심이다. 그래봤자 짝사랑이지만. 스자쿠는 소설의 다음 장을 읽었다. 갑자기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의심하게 되는데…. 아, 이럴거면 왜 사랑하고 사귄다고 말하지? 그냥 결혼하고 사귀지. 그게 낫겠다. 스자쿠는 소설을 읽었을 뿐이지만 잠깐 피곤해졌다.
“나도 술을 마시고 기억을 좀 했으면 좋겠어.”
“전하께서는 술은 약하시니까 도전하지 마세요.”
“나한테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웃거나, 울거나, 아무튼 그런 사람.”
“…….”
“이제 슬슬 물어볼 때라고 생각하는데, 스자쿠.”
를르슈는 펜을 돌리며 턱을 괴며 물었다. 어딘가 불량스러운 자세인데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한테 생일 선물, 뭘 줄 거야?”
“아….”
“내가 추리해보자면, 아침에 나나리랑 운동을 하면서 적당히 둘이서 같이 지혜를 모은답시고 네가 돈을 대고 나나리가 선물을 고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너는 지노나 아냐한테 선물 후보를 추천해달라고 물어볼 거고, 나나리는 학교에 가서 친구들한테 내 선물에 대한 추천을 받겠지. 그렇게 해서 뭘로 줄거야?”
“추리하신 게 아니라 도청하신 거군요.”
“아리에스 궁에 도청 같은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너는 단순하고 나나리는 순진하다. 아침부터 얼굴에 다 적혀있는데 모르는 척 해주는 이쪽이 민망할 정도였다.”
자, 얼른 생각해본 걸 말해라. 일도 다 끝나서 할 게 없다. 좋은 장난감을 얻은 얼굴로 스자쿠를 쳐다보는 를르슈의 재촉에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나나리 전하가 고르는 걸 무조건 살 생각이지만….”
“그렇지만 또 준비할 거잖아? 그건 나나리 만의 선물이고.”
“…전하는 대체 몇 수 앞까지 읽으시는 건가요?”
“이 비상한 머리는 내 유일한 장점이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단순한 건 네 유일한 약점이고.”
“시계, 손목시계요.”
결국 실토했다. 황실 납품 업자한테 카탈로그가 오기 전까지 말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선물을 할지 말지도 고민이었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다거나, 를르슈가 손목이 무거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안 살 생각이었다.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으니까 그 사실을 다 알아내서 준비할 생각이었다.
“손목시계?”
“네, 아직 정해둔 후보도 없고…. 진짜 생각만 했어요.”
“…….”
“이미 몇 개 있으시죠? 자주 쓰시는 물건도 있으실 거고.”
“아니, 있어도 잘 쓰지 않아. 시계를 찾아서 볼 정도로 바쁘게 일하지도 않으니까. 기껏해야 오븐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그런 거나 확인할 때 쓰고.”
“그럼 안 사길 잘했네요.”
“그렇지만 갖고 싶어졌다.”
“…네?”
“네가 준다니까 갖고 싶어. 나는 화려한 걸 싫어하니까 적당한 걸로 준비해줘. 포장도 간소한 게 좋다. 너의 안목을 다시 한 번 믿어보지.”
아, 전하, 당신은 정말 귀여운 말만 골라서 하시는군요. 미치겠네요. 스자쿠는 머리를 싸맸다. 나나리는 뭘 추천해줄까. 책상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를르슈의 다리가 즐겁게 흔들리는 거 같았다.
“케이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나나리 전하가 만드시나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천사 같은 나나리에게는 요리의 재능이 없다.”
“그럼 주방장이 만드나요?”
“원래 홀수년에는 내가 만들고, 짝수년에는 줄리어스가…. 음, 올해는 내 차례군. 내가 만들어야지.”
“생일의 주인공이 자기 생일 케이크를 만든다고요?”
“그럼 네가 만들어줄 거냐?”
“…사오면 싫어하실 거죠?”
“당연하지.”
또 오늘부터 케이크 수련인가. 혈당 수치가 미친 듯이 올라가겠군. 스자쿠는 목덜미를 만지면서 사요코에게 오늘 위장약을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홀 케이크 먹기, 6일 내내. 힘내자. 이것도 호위의 임무!
“걱정하지 마라. 전날만 만들 거야. 나나리 생일도 아닌데 거창하게 챙기고 싶지도 않아.”
“아, 그러면 손님들은 아냐랑….”
“아냐는 부르지 않아. 아무도 안 부른다. 내 생일에 아리에스의 사람들로도 충분해.”
“…….”
“꼴도 보기 싫지만 C.C.도 넣어주지.”
“…나나리 전하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내 생일이다. 이 정도는 나나리도 이해해줄 거야.”
를르슈의 계획대로라면, 아리에스에서의 를르슈 생일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성대하게 치러도 모자라지 않다. 스자쿠는 소설책을 덮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까. 손님을 더 부르세요, 이제 여기에서의 마지막 생일인데. 좀 더 행복하게 보내세요.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울 것 같은 스자쿠의 얼굴에도 를르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할 일도 없으면서 빈 종이에 이것저것 쓰는 를르슈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학교가 끝난 나나리가 오고 나서, 손목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나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디저트의 마무리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를르슈가 좀 늦게 테라스에 올 것 같다고 해서 둘이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를르슈의 옆에는 사요코가 있으니 안심이었다.
“그렇군요, 아냐는 오지 않는군요. 그럼 지노 씨도 오지 않을 거고…. 저희끼리라도 즐겁게 보내요!”
“네, 전하. 선물은 뭘로 할까요?”
“사실 친구들이 말해준 선물 목록들은, 저도 오라버니께 한 번씩 선물해드린 것들이라……. 크게 도움이 안 되었어요. 어떡하죠?”
“를르슈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건 뭔가요?”
“음. 요리를 좋아하시고, 베이킹에, 근데 이건 기본적인 도구들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 이론이나 전술에 대한 논문 읽기.”
“어려운 취미군요. 아니면, 혹시 나나리 전하가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신가요?”
“저요?”
나나리는 주변을 살피더니 스자쿠에게 귀를 가까이 해달라고 했다. 몸을 숙여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사실은, 저는 휴대폰을 갖고 싶어요.’
세상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는 영예로운 황족임에도 그녀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제국 최강의 기사 출신인 어머니를 서민으로 만들어버리는 황궁 안에서 그녀의 자유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티아라 하나도 없이 살아왔던 나나리에게 휴대폰은 더더욱 손에 넣기 힘든 것이었다. 스자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냐가 있었을 때 가끔 구경은 시켜주는데…. 그래도 자기 개인 기록이라고 다 못 보게 해요.”
“하긴, 웃긴 거 아니면 잘 안 보여주더라구요.”
“휴대폰은 사진도 찍을 수 있죠? 사실 카메라도 갖고 싶어요. 지금을 추억하는 데에는 사진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그렇지만 전자기기는…언제 위험해질 지 모르니까요.”
“아날로그 카메라도 있는데, 그것도 무리일까요?”
“저희의 모습이 기록에 남으면 위험하다고, 오라버니께서 그러셨거든요.”
나나리가 아무리 전국체육대회에서 상을 타더라도 사진 한 장 매스컴에 보도되지 않는 것도, 를르슈의 부탁으로 슈나이젤이 다 막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는 그렇습니다. 나나리는 애써 웃으며 를르슈를 기다렸다. 더 고민해봐요, 우리. 크게 상심했을 건 본인이면서 스자쿠의 손까지 잡으며 상냥하게 웃는 황녀는 슬픈 기색이라고는 비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나나리와 스자쿠는 선물을 고르다가 결국 밤에 밀회까지 할 정도였다. 를르슈한테는 자는척 하고 헤어졌다가 테라스에서 만나서 를르슈 선물 이야기를 하다가 나나리가 감기에 걸리기 직전에 정해졌다. 이어커프였다. 귀걸이랑 다르게 귓바퀴부터 귓볼까지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으니 예쁠 것이라고 나나리가 말했다. 색상은 어떤 걸로 할까요? 황실의 상징인 아메시스트죠! 둘은 어둑한 테라스에서 거의 너덜너덜해진 카탈로그를 살피며 골랐다. 생일 아침이면 아슬아슬하게 올 거예요. 그럼 저녁 때 선물하는 걸로! 좋아요! 얼른 주무시러 갑시다!
나나리를 침실까지 데려다주고 스자쿠도 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번 더 했다. 하면서 거의 습관적인 자위를 하며 오늘도 저를 죽여주세요 황제 폐하를 외쳤다. 개운한 건지, 꺼림칙한 건지 모를 마음으로 자고 일어났다.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한 일은 황실 납품을 전문으로 하는 보석상에 전화를 걸어 어제의 이어커프를 주문하는 거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 하나 더 전화를 했다. 전화를 막 마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 때였다.
“오늘도 열심히 달려 볼까요, 스자쿠 씨!”
분홍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나나리가 기합을 넣었다. 감기는 안 걸리셨습니까? 저는 오라버니가 아니라서 체력이 넘친답니다! 스자쿠는 나나리와 함께 달리면서 말했다. 감기는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면역력의 문제랍니다, 전하. 나나리는 지금의 스자쿠 씨는 꼭 오라버니 같았다며 크게 웃었다. 칭찬이겠지? 그녀가 기분이 좋다면 다행이다.
이어커프가 생각보다 일찍 와서 나나리와 밤중에 다시 테라스에서 달빛으로 확인하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운동을 하고, 아침을 먹고, 나나리를 학교에 보냈다. 이어커프도, 손목시계도, 그리고 다른 하나도 다 준비 되었다. 스자쿠는 제 방에 꽁꽁 숨겨진 그 물건들을 떠올렸다.
인간 휘핑기계 말고는 그다지 주방에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닌 스자쿠는 를르슈의 주문대로 휘핑크림을 마구마구 휘저으며, 를르슈의 생일 케이크를 만드는 일을 돕고 있었다. 오븐에 시트를 굽는 중인 를르슈는 어딘가 멍해보였다.
“전하? 크림에 뿔이 보이는데 그만 저어도 되나요?”
“…그래. 팔은 안 아파?”
“이 정도로 아프면 뭘 하겠습니까?”
“그 정도로 아픈 난 아무것도 못하는 놈이다 이거지?”
능숙하게 케이크를 만드는 를르슈는 곧 마무리까지 했다. 주방에 있던 사람들이 설거지만큼은 자기들이 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탓에, 를르슈는 집무실에 가있기로 했다.
책을 읽겠다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제 자리에 앉아서 소설책을 펼쳐들었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얼마만큼 삽질을 할 것인가. 뽀뽀 한 번으로 지구가 갈라질 정도의 충격을 느꼈다니, 섹스 한 번 하면 우주가 폭발하겠네. 불건전한 감상을 남기며 스자쿠는 책장을 넘겼다.
“스자쿠.”
“네, 전하.”
“좋아하는 사람은…요새 못 만나고 있지?”
“네? 좋아하는 사람?”
“술을 마실 때, 생각나는 사람 있다며. 그게 좋아하는 사람이지.”
“아, 네. 그랬죠.”
가니메데 기계 해부도가 딸려 있는 조종법과 가상 전투에 대한 시뮬레이터 적용 시스템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 치고는 뜬금없는 화제였다.
“못 만나진 않아요.”
“…뭐? 그럼 아리에스의 사람이야?”
따지고 보면 전하는 아리에스의 주인이니까, 아리에스의 사람이지. 그렇지만 평생 이 마음을 전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스자쿠는 조금의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더라도 살짝 드러내려고 했다.
“그렇습니다. 아리에스에서 만났어요.”
“……나나리?”
“설마요. 나나리 전하는 사랑스럽지만, 지켜드리고 싶은 황녀 전하이실 뿐입니다.”
“괜한 걱정을 했군. 그래, 아리에스에서 사랑을 해도 상관은 없다. 내 호위에 지장이 안 가기만 한다면.”
“그렇게까지 사랑에 목매진 않아요. 전하의 호위는 성실하게 해낼 겁니다.”
“……곧 내일이다.”
를르슈는 두꺼운 이론서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내일이 지나면, 이제 오늘과 같은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게 될 거다.”
“…….”
“사실 계획은 조금 바뀌었어. 줄리어스가 나이트 오브 텐이 된다는 변수는 계산하지 못해서….”
“…네.”
“줄리어스가 아리에스에 오는 건 내년이라고 했지.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나리가 성인이 되는 10월은 너무 늦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아리에스에 묶이게 된다. 평생.”
“…….”
“못해도 사흘 내에 황적을 버리고 아리에스를 떠날 거야.”
사흘?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을 해야하지. 그가 지금까지 했던 말들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갈 거라는 암시가 있었던 단어, 그런 것들, 떠올려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에리어11로 간다.”
“…….”
“스자쿠가 활약했던 곳이지. 네가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그 곳은, 이번에 발발했던 전 에리어 테러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고 빠른 시간 안에 진압될 정도로 안전하다. 브리타니아인들도 많이 살고 있고. 조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치안 면에서도 훌륭해. 애쉬포드의 사업체들도 사쿠라다이트 관련으로 진출해있기 때문에, 황적을 버려도 나와 뜻을 함께 해주겠다고 미레이가 약속해주었다. 미레이는 믿을 수 있어. 나와 나나리는 에리어11로 갈 예정이다.”
많은 에리어 중에서 굳이 에리어11을 고른 이유.
그것은 스자쿠가 오지 못할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에리어11로 올 수 없다.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모르지만,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눈 스자쿠가 에리어11로 돌아올 생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얻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는 작위를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넘버스로써 최고의 지위에 오른 그는 이제 내려올 수 없다.
그러니, 를르슈는 두 번 다시 스자쿠와 만날 수 없게 되는 건 당연해진다.
“…에리어11은 아름다운 곳이죠. 전하의 마음에 들 것입니다.”
가슴이 타들어간다. 스자쿠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에 겨우 입을 열었다. 를르슈는 그의 말에 아주 느긋하게 대꾸했다.
“조금 이르지만, 그동안 아리에스의 호위를 해줘서 고맙다. 스자쿠.”
* * *
별 말씀을요, 라고 하는 말끝이 떨리는 건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자쿠는 다시 소설책으로 시선을 돌렸고, 를르슈는 무언가를 따로 준비하는지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궁금했지만, 고개를 들어 그걸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사흘 후면 그를 못 본다. 이제 여기에서의 생활도 끝난다. 살면서 가장 따뜻했던 시절이 될 게 틀림 없다. 앞으로 평생, 지금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게 뻔했다. 그럼 이대로 끝내도 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를르슈를 지켜주겠다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렇지만 를르슈는 모두 거절했다. 스자쿠도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아무리 취중진담 중에 붙잡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그건 황자의 드문 투정이었을 뿐일지도 모르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아. 사람이랑 이별하는 건 익숙하다. 군인이니까. 보통의 이별이 아닌 사별이 더 익숙한 브리타니아의 하얀 사신이면서. 고작 반년도 안 된 시간동안 함께 했던 이 사람과의 이별에 눈물이 난다. 이런 내가 나이트 오브 원이 될 수는 있을까. 그 전에 전하께서 먼저 에리어11을 떠나면? 모르겠어, 나는 전하만큼 머리가 좋지 않으니까.
스자쿠가 책 사이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 를르슈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스자쿠는 자기 안의 감정을 추스르기 바빠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들었더라면….
“전하! 얼굴이 빨갛습니다!”
“…알고 있으니까.”
“손도 뜨거워요. 게다가 열이 엄청납니다…!”
“떨어져라…. 감기 옮는다.”
아침에 조깅을 하려고 나갔더니 눈보라가 몰아치다 못해 완전히 폭풍이었다. 심지어 해도 뜨지 않아서 어둑어둑했다. 여기서 뛰면 분명 얼어 죽습니다. 재난입니다. 그래도 역경과 고난을 해치고 나아가자는 나나리를 겨우 방으로 돌려보냈다. 주방에 가서 를르슈 전하를 도와야지, 하고 주방으로 가려던 찰나에 사요코가 다급하게 스자쿠를 붙잡았다.
전하께서 일어나시지 않습니다. 사요코의 말에 스자쿠는 바로 를르슈의 침실로 달려갔다. 문이 드물게 잠겨있었다. 이거 부수겠습니다. 수리비랑 청구서, 제 앞으로 달아두세요. 발차기 한 번으로 침실 문을 때려부수고 들어가면 를르슈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전하?! 설마 테러리스트가 여기에?! 스자쿠의 큰 목소리에 를르슈는 대답 대신에 인상을 쓰며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그러더니 겨우 나눈 대화가 저것이었다. 사요코가 해열제와 물수건을 가지러 가겠다고 자리를 비우면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침대 끝에 앉았다.
“갑자기 무리라도 하신 겁니까? 그렇지만 전하는 자기 컨디션 관리를 그렇게 소홀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너랑 나나리가.”
“저랑 나나리 전하요?”
“밤마다 밖에서 만나길래…. 네가 허튼 짓을 하면 두들겨 패줄 각오로 밤마다 나갔더니.”
“…그건 전하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 만난 거라고, 아마 전하는 진작에 아셨을텐데요.”
“내 패턴을 함부로 읽지마라, 스자쿠 멍멍이 주제에. 추운데서 감시하느라 혼났다. 긴장이 풀려서 이제…….”
덥다, 스자쿠.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줘. 감기로 멍해진 를르슈는 술에 취했을 때랑 비슷했다. 그나저나 생일의 주인공이 이래서야…. 를르슈의 손을 잡아주면서 스자쿠는 그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더울 때…뜨거운 거 닿으면, 기분이 얼마나 나쁜지 알아?”
“…그렇죠, 설상가상이란 느낌이죠.”
스자쿠는 제 손이 뜨겁다는 걸 알고 있다. 워낙에 운동량이 많다보니 다른 사람보다 높은 체온에 를르슈가 불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급하게 손을 떼어내려고 하면 를르슈가 없는 힘으로 더 세게 끌어당겨 잡았다.
“그러지만 스자쿠의 손은, 잡으면 잡을수록 기분이 좋네….”
“…….”
“더 많이 잡아볼걸.”
“…….”
“어머니가 왜 매일, 볼 때마다, 우리를 그렇게 안아주셨는지 알 거 같아.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걸, 아셨던거야….”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눈물이 글썽이는 모습에 울지 말라고 말하기도 전에, 를르슈는 눈을 감았다. 그의 빠른 행동에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부서진 문 밖에서 급하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교복 차림의 나나리와 약과 물수건을 들고 온 사요코였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나나리. 가까이 오지 마, 옮는다.”
“스자쿠 씨랑은 손도 잡으면서 왜 저만…! 저도 옆에 있을래요!”
“스자쿠, 손을 놔라. 나나리가 보고 배운다.”
약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킨 를르슈는 주변을 살폈다. 침실 문이 왜 저래.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제가 그랬습니다. 알아서 고쳐라. 알겠습니다. 알약을 삼키고 물을 마신 를르슈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나리는 스자쿠가 있던 자리에 앉았다. 스자쿠는 일어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방금 전에 보니까…날씨가 많이 안 좋던데.”
“네, 오늘 아침에 운동도 못 했어요.”
“…식사는 했어?”
“아직이에요.”
“그럼 하고 와, 나나리. 스자쿠도 같이 먹고 와.”
“오라버니는요?”
“…나는 지금 먹는 것보다 쉬는 게 필요해. 약기운도 돌 거고. 점심은 꼭 먹을게.”
“…….”
나나리는 머뭇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망설였다. 스자쿠는 제가 먼저 같이 식당으로 가자고 말을 해야하나,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를르슈가 잠긴 목소리로 나나리를 불렀다.
“나나리.”
“네, 오라버니.”
“…오늘 학교에 가지 말고, 나랑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생일이라고 여동생에게 억지를 부리는 오빠는 별로인가? 애써 웃는 를르슈의 미소에 나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랑 함께 있을 거예요. 사실 계속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오라버니가 학교에 가라고 할 까봐 더 걱정됐어요. 나나리는 를르슈의 손을 한 번 더 잡아주고 식당으로 가자며 스자쿠를 데리고 나왔다. 사요코가 바로 두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러 들어가는 것에 스자쿠도 안심하고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갔다.
밝은 모습으로 나왔지만 나나리의 식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직업병인지, 우선 먹어야 산다는 생각으로 스자쿠는 접시를 다 비우긴 했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나나리의 분위기에 스자쿠는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제 방에 다녀왔다. 식당에는 다른 메이드들도 오가니까 괜찮겠지. 그래도 빨리 다녀왔다.
스자쿠의 손에는 세 개의 상자가 들려있었다. 하나는 나나리와 함께 고른 를르슈의 이어커프, 하나는 제가 를르슈에게 선물할 시계, 나머지 하나는…나나리를 위해 산 카메라였다.
“나나리 전하, 식사가 끝나시면 선물을 어떻게 전해드릴 지 고민해봐요.”
“저는 이제 식사는 그만 됐어요. 스자쿠 씨는…다 선물인가요?”
“그렇습니다.”
메이드들이 접시를 치우고 깔끔해진 테이블 위로, 상자들을 내려놓았다. 나나리는 제가 골랐지만 이렇게 화려한 이어커프를 보는 건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스자쿠의 시계는 의외로 밋밋하고 오히려 황실 납품 업체에서 만들었다고 하기엔 조잡해보였다.
“이건 군인들이 자주 쓰는 시계입니다.”
“…그런가요? 약간 투박한 디자인이네요.”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좀처럼 이런 것과 접하실 일이 드물 테니, 아예 고급스러운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서, 머리를 굴려보았습니다.”
“오라버니는 그런 서프라이즈도 좋아하시죠. 저도 마음에 듭니다. 여성용도 있나요?”
“있습니다. 가격도 황실 물품에 비하면 훨씬 저렴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스자쿠 씨, 크리스마스 선물로 저에게도 이런 시계를 선물해주시면 안 될까요? 오라버니께는 손목시계 말고 다른 걸로 부탁드리고.”
크리스마스에 당신은 여기에 없을 거예요. 스자쿠는 그 말이 바로 튀어나오려는 걸 억눌렀다. 나나리는 를르슈의 뜻에 따라 같이 에리어11로 떠날 것이다. 아무리 자기 의지가 강한 소녀라고 하더라도, 를르슈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그를 홀로 내버려둘 나나리가 아니다. 대답 대신에 스자쿠는 다음 선물을 열어보았다.
“이건 뭔가요? 처음 보는 거예요.”
“이건 구하는데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요새는 기술이 발달해서….”
“아, 설마 이거….”
“카메라입니다.”
필름을 넣으면, 찍고 나서 바로 인화되어서 나오는 타입이에요. 최근에는 뷰 파인더도 좋아지고, 메모리 기능까지 있고 그래서 아주 구 버전을 구하느라 힘들었어요. 정말 즉석 인화 기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카메라입니다. 여기 보이는 곳이 뷰 파인더인데, 형편없을 정도로 초점도 맞추기 힘듭니다. 하지만 찍으면 알아볼 수는 있어요. 제가 테스트 삼아서 몇 번 찍어봤는데, 딱 한 번만 그 순간을 남길 수 있다는 점 빼고는 완벽한 카메라입니다. 저장 기능이 없어서 아쉬울 정도네요.
스자쿠의 긴 설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바로 상자 안에서 갈색 가죽가방을 꺼냈다. 여기에 넣고 다니시면 됩니다. 제가 필름도 넉넉하게 오백 장 달라고 했어요. 하루에 한 번씩 찍어도 1년 동안 다 못 쓰실 겁니다.
“오라버니께서 아시면….”
이제 전하께서는 카메라도, 휴대폰도, 뭐든 가질 수 있으세요. 당신의 오빠는 그 모든 걸 잃을 각오로 모두 손에 넣으실 생각이시기에. 넘쳐나려는 말들을 삼키며, 나나리의 손에 가방에 넣은 카메라를 쥐어주고 스자쿠는 웃었다.
“나나리 전하의 행복이 를르슈 전하의 최고의 선물이죠. 제가 아리에스의 호위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나나리 전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죠.”
“그렇지만 오라버니의 생일인데….”
“그렇다면 카메라는 조금 숨겼다가, 나중에 를르슈 전하께서 괜찮아지시면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혼날 때 같이 혼나죠.”
“혼날 걸 알면서 준비한 건가요? 스자쿠 씨도 참.”
카메라 가방을 만지작거리는 나나리는 자기 방에 갖다 두고 나서, 다시 를르슈의 침실에 가자고 말했다. 나나리의 방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침실로 향하는 와중에 이어커프를 나나리에게 내밀었다. 전하께서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제 시계 선물을. 나나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자고 그랬다.
침실로 가면 방금 전보다 상태가 좋아진 를르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방금 전에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생일 축하드려요!”
“전하,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다들 고맙다. 케이크는 만들어뒀으니 알아서 챙겨 먹고.”
“오라버니가 없는데 어떻게 먹나요?”
“크림이 상할 지도 모르니까 그래.”
전날 만든 케이크는 나나리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결국엔 자기 생일까지도 나나리를 위해서 열심이었던 황자에게 스자쿠는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을 준비했는데, 보실 수 있나요?”
“…스자쿠. 일으켜주겠어?”
마른 팔과 등을 받쳐 올리며, 스자쿠는 더운 숨을 몰아쉬는 를르슈를 보며 반야심경을 외웠다. 절찬 짝사랑 중에 이별이 코앞인 상황에서도 나는 뭐하는 사람인지. 를르슈는 나나리가 내미는 선물을 보고서 포장을 풀었다.
“예쁜 이어커프네. 너무 화려하지 않나? 주인을 잘못 만난 느낌인데.”
“아니에요, 오라버니랑 잘 어울릴 거예요! 너무 안 꾸미시니까 걱정이라구요.”
“…그래. 나중에 꾸미고 나갈 일이 있으면 무조건 하고 갈게.”
“약속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리에스 밖을 나가는 순간, 연회와 상관없는, 이제 황족이 아닌 사람이 되는 거니까. 를르슈는 그 사실을 고지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스자쿠의 선물에 를르슈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화려한 게 싫다고 그랬지, 그렇다고 전투에 나가서 쓸법한 이 시계는 뭐냐? 알람기능도 있어, 맙소사.”
“…그렇죠, 전하의 이런 반응을 기대했습니다. 남자한테 선물하는 건 어려워서 나름 생각했는데.”
“아니다, 스자쿠. 기쁘긴 한데, 상상 이상의 것이라 웃음이 나올 지경이라.”
“그걸 보통 비웃는다고 하죠….”
“기죽지 마라.”
“…….”
“사과해라.”
“강아지를 걷어차신 기분이 드십니까?”
“그래.”
평소라면 죄송합니다, 하고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겠지만.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기로 했다. 무릎을 굽혀 침대에 떨어진 그의 손을 잡아,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황족에게 모든 기사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경례였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의 무례함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를르슈 황자 전하.”
지금은 정복 차림도 아니고 그저 정장 차림이지만, 이것까진 봐주시겠지. 진지하게 사죄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이제 곧,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웃으면서 여기에 머물 수 없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빼내며 말했다.
“쿠루루기 경의 진중함을 아는데 이 정도 쯤이야, 내 아량으로 넘어가주겠다. 여동생과 단 둘만의 시간을 따로 가지고 싶은데, 문 밖에서 대기해주겠어?”
이제 곧.
아주 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에 스자쿠는 쓴웃음이 났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문이 다 뜯겨져 나간 상태라 방음은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를르슈는 스자쿠를 문 밖으로 보냈고, 스자쿠는 문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에 나나리는 당황한 듯 침대 가까이에 붙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 그렇지만 각오가 다부진 그 목소리가 스자쿠 말고 아무도 없는 복도에 들리기 시작했다.
“줄리어스가 나이트 오브 텐이 되었다, 나나리.”
“줄리어스 오라버니가요?”
“그리고 곧 아리에스의 호위로 올 생각인 것 같아.”
“다시 예전처럼 셋으로 돌아가나요?”
“…나나리는 그랬으면 좋겠지?”
“물론 저는 기쁘지만, 오라버니는…그런 생각이 아니신 것 같군요.”
“나나리에게 미안하지만. 줄리어스는 이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갈 수 있어. 아리에스 궁으로 돌아오면…. 이제 두 번 다시 나갈 수 없어. 우리 셋 다.”
“…….”
“네가 성인이 되어도 대학에 가는 것이, 그 아주 작은 자유의 고작일 뿐이다.”
“…오라버니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아리에스 밖을 나가지 않으셨죠. 위험하고, 위험해지고. 그건 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를르슈는 나나리의 손을 있는 힘껏 쥐었다. 세상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모두 이 아리에스를 부수는 말이 될 것이다.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이 있었던 만큼 즐겁고 따뜻했던 날들이 가득했던 세계.
“황적을 버리고, 에리어11로 갈 생각이다. 이제 황자로써 살고 싶지 않다.”
“…….”
“줄리어스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기로 한 내가 밉지?”
“오라버니가 아리에스 밖을 나가서 행복해지신다면…. 전 미워할 수 없어요.”
“나나리.”
“…….”
“나와 함께 같이 가줬으면 한다. 너를 홀로 여기에 두고 갈 수도 없어. 내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걸 안다. 여기는 어머니의 추억이 있는 곳이고, 너마저 없으면 아리에스 궁은 폐궁이 되어 버려질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
결국 말해버렸다. 스자쿠는 그가 고하는 소리에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를르슈는 나나리가 뭐라고 말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스자쿠는 알 수 있었다. 나나리는 를르슈를 선택할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천국을 버리고서라도 그녀는 자신의 오빠의 손을 잡고, 완전한 자유로 나아갈 것이다.
“오라버니가…저를 데리고 가지 않으실까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나나리.”
“저는 어디든 가요. 어디든. 에리어11이든, 그 어디든.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전 행복합니다.”
“……정말로 괜찮아? 아리에스 궁이 버려지게 될 텐데.”
“함께 있다면 어디든 아리에스인거죠.”
나나리가 를르슈를 끌어안는 듯 했다. 를르슈가 ‘감기에 걸린다’라고 살짝 말린 듯 했지만, 이내 그녀의 몸을 맞잡아 끌어안았다. 이제 모든 조건은 갖추어졌어. 를르슈의 손끝은 떨리지 않았다. 그는 사이드 테이블에 넣어둔 서류를 꺼내들었다.
“황적을 포기한다는 서류다. 어려운 문장은 없어. 서명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끝나.”
를르슈는 제 것을 보여주며 나나리에게도 다른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나나리는 거침 없이 서명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쓰일 일이 없을 이름이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내일 오전에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저녁에 에리어11로 떠나는거야.”
“너무 빠르군요. 오라버니. 감기는요?”
“금방 낫겠지. 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줄리어스가 쫓아올 수도 있어….”
이제야 서로 죽음의 문턱에서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럴 기회를 를르슈가 놓칠 리가 없었다. 를르슈는 문 밖에 있던 스자쿠를 불렀다.
“예. 전하.”
“미안하지만 나이트 오브 라운즈 소속의 사람들을 불러주겠어? 이 서류들은…황제 폐하께 바로 올려야 할 서류라.”
“알겠습니다. 제 부하들로 괜찮으십니까?”
“응.”
스자쿠는 서류를 받고 전화를 하러 나섰다. 황족의 남매들이 얼마 남지 않은 아리에스에서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이 서류가 황제 폐하의 손에 들어가고, 그러고 나면…. 만약 황제 폐하가 윤허하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를르슈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황적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황제도 막을 수 없다면, 그의 기사인 스자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밖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차의 불빛마저도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꼭 자기 마음 속 같아서 스자쿠는 입맛이 썼다.
를르슈가 침실의 문을 잠그고 잔 것은 그동안 짐을 싸기 위해서였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어머니를 두었던 탓에 남아도는 트렁크들은 를르슈의 침실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트렁크 중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만으로 를르슈는 짐을 꾸릴 수 있었다. 남은 트렁크들을 모두 나나리에게 주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에리어11에 가서도 사줄 수 있으니…. 꼭 가지고 갈 것만 챙기거라, 나나리.”
“네, 오라버니.”
하지만 나나리의 짐도 중간 사이즈의 트렁크를 절반을 겨우 채웠다. 그것도 전부 지금까지 선물 받은 것들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스자쿠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스자쿠 씨는 이미 오라버니가 하실 일들을 알고 계셨던거구나…. 걱정을 하게 만들까봐 계속 고민했을 오빠의 마음이 신경이 쓰여서 나나리는 빨리 를르슈의 침실로 돌아갔다.
침실에 베개를 세워서 앉아 있던 를르슈는 스자쿠의 보고를 받았다.
“황제 폐하께 빠른 시일 내에 직접 전해드릴 수 있도록, 재상 각하께서 힘을 보태주신다고 하십니다.”
“…슈나이젤 형님이? 곧 시끄러워지겠군.”
“전하의 생각과 다르게 황적을 버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재상부에서도 검토해야할 일들이 많고….”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암살 테러, 나의 기사 후보에 대한 자살 테러를 비롯하여…본인 스스로가 궁 안의 안전을 신용할 수 없어 황자의 자리를 버린 남동생을 둔 사람이다. 황적을 버릴 이유는 차고도 넘쳐.”
“…….”
“앞으로 성인이 될 나나리가 정무에 나서면 아리에스의 위험을 누가 책임진단 말이냐? 나야 자살 테러의 경우가 있어서 그 핑계를 트라우마로 삼아서 전임 기사가 없이 지낸다고 한들, 나나리를 전임 기사 없는 황녀로 만들라고? 유피는 ‘리’ 가문의 황녀니까 아직까지 그렇게 지내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만…! 언제까지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힘을 빌려 아리에스를 지켜달라고 구걸을…. 나를 구차하게 만들지 마라, 스자쿠.”
“…저는 전하를 붙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계획보다 일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알아. 내가 지금 아파서 예민할 뿐이다. 나가.”
어두워진 얼굴의 스자쿠가 침실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나나리와 눈을 마주한 그는 찌푸린 미간을 좀처럼 펴질 못했다. 스자쿠 씨…. 나나리가 가느다랗게 부르는 목소리에 스자쿠는 목례만 하고 그녀의 옆에 설 뿐이었다. 나나리. 아침에 뜯겨진 문 안쪽에서 를르슈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나리는 스자쿠가 신경 쓰였지만, 오빠의 부름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의 침대 곁에 다가가 앉으면 를르슈가 손을 잡아왔다.
“짐은 다 챙겼어?”
“네, 얼마 안 되어서 혼자서 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내가 들어줘야지. 이제 앞으로 둘이서 지내게 될 텐데….”
“네.”
“나를 의지하는 것에 망설이지 말아줬으면 한다. 상냥한 네가 나에게 참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내가 그러면 너는 무척 슬퍼하듯, 나도 그러니까.”
“…그럴게요.”
“에리어11에 가면 미레이가 우리를 기다릴 거다. 미레이 애쉬포드, 예전에 어머니가 계셨을 때 자주 왔었는데. 기억나?”
“글쎄요,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금방 떠올릴 지도 몰라요.”
“아직 학생이니까…나나리가 원한다면 공부를 더 해도 되고,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 해도 된다. 다만 황녀로써의 정무는 영원히 못 보게 되는 거지만.”
“황녀이든, 정무든, 저는 오라버니의 여동생이라는 점이 제일 중요해요.”
공항에 간 건 정말 오랜만이지. 어머니를 따라서 다른 에리어로 자주 구경을 갔는데. 를르슈의 옛날 이야기와 나나리가 기억하고 있는 추억들의 이야기가 오갔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남매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KMF를 타고 전장을 누비며 훈장을 가슴에 달 때보다 더 자부심이 넘쳤다.
좀 더 손을 잡아주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그러기엔 모두 늦어버렸겠지. 계산이 빠른 를르슈가 준비한 황적 포기 서류는 이미 재상부의 손을 넘어 황제에게 닿았을 것이다. 나는 지키고 있던 것이 맞았나? 아니면…지금 이렇게 보내는 것이 맞는 건가?
“케이크는 저녁에 사람들한테 나눠주도록 해. 두 사람도 챙겨 먹고.”
“오라버니는요?”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피곤해.”
“점심은 드신다고 하셨잖아요, 전하. 아무것도 안 드시고 약만 먹었다가는 속을 버립니다.”
“나는 군인이 아니니까 괜찮아….”
“군인이 아니니까 더 그렇죠!”
“시끄럽다, 스자쿠.”
“시끄럽게 안하면 들어주시지도 않을 거 아닙니까!”
결국 보다 못한 사요코가 환자의 안정을 위해 스자쿠와 나나리를 내쫓았다. 저는 왜요? 나나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것에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복도로 터벅터벅 걸아나온 두 사람은 방금 전보다 밝아진 분위기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스자쿠 씨와 사요코 씨는 에리어11 출신이죠. 어떤 곳인가요?”
“음, 저는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거의 열두 살 때 브리타니아 본국에 와서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사요코 씨한테 여쭤보고 싶긴 한데, 간호 중이시니….”
침략과 동시에 총리의 하나 뿐인 아들이라는 이유로 브리타니아 본국으로 호송되었다. 그러나 가치 없다고 판단되어, 목이 잘려 나가기 일보 직전에 군인이 되었다. 에리어11을 조국의 이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나이트 오브 원을 목표로 노력했다. 이걸 평생 잊을 리가 없다.
“그래도 나름의 운치가 있고, 전하의 말씀에 따르면 브리타니아인들도 많아서 크게 혼란스럽지도 않을 겁니다.”
“그럴까요?”
“그리고 를르슈 전하와 나나리 전하라면 어디든 잘 해내실 수 있어요.”
“과찬입니다, 스자쿠 씨.”
“진심입니다.”
살롱에서 점심 겸 티 타임을 가졌다. 오늘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쓸쓸하네요. 그 마지막에 를르슈가 아파서 앓아누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두 사람은 티 타임이 끝나고 아리에스에서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해보자고 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 끝인데요, 뭐. 스자쿠의 불경한 발언에도 나나리는 들뜨기만 했다.
“오라버니의 집무실에 있는 앨범이 보고 싶어요.”
“어렸을 적의 앨범 말씀하시는거죠? 예전에도 보고 계시던데.”
“…오라버니가 진짜로 보고 계셨나요?”
“무슨 사진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앨범을 보시면서 졸고 계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무단 침입을…. 뭐, 마지막이니 봐주세요.”
“아마 아리에스의 옛날 사진들일 거예요. 오라버니의 집무실에 있다는 거만 알지, 보여주시지는 않아서…. 아마 제가 어머니나, 줄리어스 오라버니를 그리워하고 슬퍼할까봐 그러셨던 거겠죠.”
주인이 없는 집무실은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가도 된다. 그런 생각에 나나리가 제일 먼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스자쿠가 뒤를 살폈다. 어차피 부족한 인력으로 돌아가는 아리에스에 보는 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살금살금 집무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불을 켰다.
환하게 들이치는 조명 아래에서 나나리는 앨범을 찾아냈다.
“와, 이거 보세요, 스자쿠 씨.”
“저도 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자, 어느 쪽이 줄리어스 오라버니고 어느 쪽이 를르슈 오라버니일까요?”
“…음, 이 분이 를르슈 전하이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를르슈 전하라면 어느 때에도 단추 하나 풀어지지 않게 행동하실 거 같고, 이쪽의 킹슬레이 경은 벌써 단추가 세 개가 풀어진 채로 엉망인 모양인 걸 봐서….”
“눈썰미가 좋군요. 맞아요, 이때는 아마, C.C.씨가 브리타니아의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는데 축복할 일이 많아 피곤하다고 하셨거든요. 그랬더니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왜 형제끼리는 결혼할 수 없냐고 하면서…. 이미 한바탕을 하고 난 다음에 어머니가 웃기다고 찍으신 걸로 알아요.”
체력 없는 두 사람이 싸워봤자 고작 단추가 풀어지는 정도인 것이다. 스자쿠는 자기가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비교도 안 될 만큼 거칠었던 지라 웃음이 나왔다. 이어지는 나나리의 퀴즈와 스자쿠의 65%의 정답률은 승부의 긴장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웃고 떠들던 중에 나나리가 말했다.
“이 앨범들이 여기 있다는 걸 보면…오라버니는 이걸 가져갈 생각이 없다는 거네요.”
“…….”
“그건 조금 슬프네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슴으로 기억하고 있어도….”
“…전하께서 챙겨가는 건 무리일까요?”
“오라버니가 두고 가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저는 그 이유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요. 저에게 기꺼이 따라오라고 명령할 수 있는데도, 제 의사를 물어봐주신 오라버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나나리는 앨범을 제자리에 돌려두었다. 집무실의 불을 끄고 나왔다.
나나리는 생일의 주인공은 없지만 그래도 주인공 대리로 열심히 해보겠다며 저녁 때 활기차게 케이크의 촛불을 밝혔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빈 다음에, 촛불을 끄는 그녀는 있는 힘껏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에스의 모든 사람들이 식당에 모여서 케이크를 나눠먹었다. 스자쿠도 한 조각 먹었다. 완전히 나나리 취향이었다. 올라간 딸기마저 시럽으로 범벅이었다. 케이크를 다들 먹고 나면 이제 자러 갈 시간이 되었다.
나나리는 를르슈 대신이라며 스자쿠에게 뺨 키스를 하고 갔다. 나나리에게 키스를 돌려주면서 스자쿠는 왜인지 부끄러웠다. 브리타니아의 키스 문화야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걸로 못된 짓도 많이 했던 주제에 나나리에게는 순수한 의도로 하는데…. 그냥 이 키스를 하며 사랑을 한껏 담았던 를르슈가 그리워지는 이 마음이 새삼 부끄러웠다.
그 사이에 줄곧 를르슈의 간호를 맡았던 사요코가 식당으로 왔다. 스자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를르슈 전하는 괜찮으신가요?”
“네,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실 정도로 입맛도 돌아오신 것 같아요. 워낙 아프시면 내색을 안하시는 분이신데…. 오늘은 얼마나 힘드셨으면.”
“뭐가 드시고 싶다던가요? 케이크라면 이미….”
“아, 케이크는 아닙니다. 전하는 지금 푸딩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요. 커스터드 푸딩. 어제 케이크를 만드시면서 몇 개 만들어뒀는데 그 중 하나를 갖다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아프신 와중에….”
“괜찮다면 스자쿠 님이 갖다주시는 게 어떨까요?”
귀여운 컵에 담긴 커스터드 푸딩을 내민 사요코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두 분은 친하시죠? 아직 헤어질 준비도 안 하셨을 거 같아요.”
“…전하와 제가 친해보이나요?”
“지노 님이나 아냐 님과 다른 친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꿉친구의 우정과는 다른 느낌이겠죠.”
사요코는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알 리가 없을 텐데도. 그래, 이건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사요코가 내민 것을 받으며 스자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푸딩만 갖다드리면 되나요? 약은 따로 드시지 않아도 됩니까?”
“네, 이제 열은 다 내리셨고, 하룻밤 자고 나시면 나으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다행이네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사요코 씨, 미리 안녕히 주무세요.”
“스자쿠 님도요.”
낮보다 더 어두워진 아리에스 궁은 음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침실 문을 뜯어낸 장본인으로써 어떻게 노크를 해야할 지 몰라 스자쿠는 조금 고전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똑똑.”
“…세상 어떤 멍청이가 노크를 그렇게 하냐.”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 전하. 푸딩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들고 왔는데.”
“사요코는?”
“사요코 씨 대신으로 제가 왔는데, 싫으십니까? 아니면 더 불편하시다던가.”
“…아니. 그냥.”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개를 덧대고 헤드에 기댄 를르슈는 방금 전보다 안색이 훨씬 나아보였다. 스자쿠는 의자를 끌고 와서 를르슈의 침대 가까이에 앉았다. 푸딩입니다. 드시겠습니까?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조해지지 않게 쌓인 얇은 비닐막을 걷어내고 한 스푼 떠서 를르슈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아, 하세요.”
“…….”
“어, 푸딩이 떨어집니다.”
“아.”
를르슈는 덥썩 그 스푼 위의 푸딩을 삼켰다. 맛있죠? 맛있을 겁니다. 전하가 직접 만드신 거니까요.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쓸데없는 수다. 스자쿠는 계속 해서 푸딩을 떠먹여주었다. 마지막 한 스푼을 다 먹여주고 나서야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을 만져주었다.
“하루 사이에 이렇게 야위시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제 앞으로 네가 나를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그건 그렇지만….”
“오늘은 뭐했어? 나 없이 보내는 아리에스의 하루는 처음이었을 텐데.”
나나리 전하와 함께 전하의 집무실에 갔습니다. 앨범을 구경했어요. 어릴 적의 전하는…상상 이상으로 귀엽더라구요. 나나리 전하께서 가끔 언니라고 부르고 싶었다는데 그 심정이 이해가 갔습니다. 근데 킹슬레이 경은 진짜 언니라고 부르게 했다면서요? 그건 정말 상상 초월이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해라. 정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말고.”
전하의 생일 케이크를 나나리 전하께서 다 잘라서 나누어주셨습니다. 그 전에는 촛불과 소원도 다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진행을 잘하시는지, 전하께서 나중에 한 번 크게 칭찬해주세요. 그리고.
“전하는…내일 황제 폐하의 알현을 마치고 가시겠죠.”
“그래.”
“…….”
“오늘이 마지막이니, 내게 하고 싶은 말이나, 쌓여있던 불만을 말해봐. 이제 감옥에 넣을 수도 없으니까 안심하고.”
가지 말아요. 내가 지켜줄 테니. 원한다면 황제의 기사 자리도 집어 던지고 당신의 옆에 있을 수 있게, 나를 버려서라도. 그러니 가지 말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저는…나이트 오브 세븐이 되기 위해서, 고향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
“브리타니아에 대한 충성을 하고 싶어서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된 것이 아닙니다. 브리타니아로부터 조국을 지키고자…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정점, 나이트 오브 원이 되려고 했습니다.”
“…….”
“사람들을 다 죽여 놓고 자기합리화를 한거죠. 이런 역겨운 과거를 가진 사람을 옆에 두고 계셨던 전하께 늘 죄송했습니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품어서 더 미안했다고.
스자쿠는 겨우 웃으며 말했다. 전하는 제가 이런 사람인 줄 모르셨겠죠. 스자쿠의 웃음에 를르슈는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부드럽게 닿는 손길에 스자쿠는 눈물이 났다. 줄곧 잘 참아왔는데, 왜 눈물이 이제야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눈앞의 사람은 이제 떠날 사람인데. 더 했다가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나는 너와 있어서 즐거웠어. 행복했다. 아리에스를 버리고 떠날 때, 너와의 시간이 제일 아쉬울 것 같아서 몇 번 망설일 정도였다.”
“…….”
“벌충, 아직 한 적 없지.”
“…무슨 벌충을 말씀하시는 거죠?”
“나와 나나리를 지노와 줄리어스에게 맡겨놓고 갈 때의 벌충 말이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아, 그거요. 스자쿠의 허술한 답변에 를르슈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죄를 지은 놈이 자기 죄를 기억을 못하면 어쩌자는 거냐? 스자쿠의 손에 들린 컵과 스푼을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둔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때리시게요?”
“내가 때려봤자 얼마나 아프겠냐. 생각을 해봐라.”
“…기꺼운 마음으로 맞겠습니다.”
“형편없을 수도 있다. 나는 처음이니까.”
사람을 처음 때려보시는구나. 전하께 맞아서 흉터라도 남으면 좋을 텐데.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이 제 뺨을 감싸는 것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감각에 떨리고 설렐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다. 이 익숙한 느낌은 키스다.
를르슈가 지금 키스를 하고 있다. 상대는 쿠루루기 스자쿠. 감기 때문에 살짝 건조해진 입술이 스자쿠의 입술을 물고 핥는 것이 느껴졌다. 매끄럽고 뜨거운 감촉이 를르슈의 혀라는 걸 알기 전까지 스자쿠는 한참이나 숨을 못 쉬었다. 키스가 처음이 아닌데. 스자쿠의 열리지 않는 입에 아무렇지도 않게 를르슈는 그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전하.”
“여자랑 해봤어도 남자랑은 처음이지? 그리고 상대는 키스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초보. 기분이 나빴을 테니 네놈의 벌충으로는 제격이다.”
“…….”
“이제 쉴 테니까 나가. 나는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까.”
스자쿠의 어깨를 밀어내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하는 를르슈를 이대로 두고 갈 수 없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몸을 제 쪽으로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를르슈의 눈동자를 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걸 느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으며 손을 밀어 넣고 입술을 깊숙하게 맞추었다.
방금 전의 키스와는 다른 느낌으로. 완전히 를르슈의 안을 파고드는 것처럼 봐주지 않고 그를 맛보았다. 혓바닥으로 치열을 훑고 약한 안쪽의 점막을 건드리며, 그가 안으로 흘리는 신음 하나 놓치지 않으며 모두 다 끌어안았다. 품 안의 몸이 녹을 것처럼 흔들리는 것에 허리를 꽉 움켜쥐고 그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스, 자쿠. 흩뿌려지는 호흡 사이로 불리는 이름에 스자쿠는 눈을 감았다. 전하. 를르슈 전하. 이대로 그를 안고 싶다. 마지막이니까 더욱 그 충동이 거세진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어떤 것도, 그가 만들어 놓은 이 선 안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술에 마지막으로 가볍게 키스하고는 떨어졌다. 를르슈의 몸이 이불 사이로 동그랗게 말아지는 걸 보면서 스자쿠는 그가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 모든 건 끝이 났다. 모든 조건은 다 갖추어져있고 이제 와서 망칠 수 없다.
“전하, 안녕히 주무십시오.”
“……너는.”
“저는 전하의 침실이 지금 온전치 못하니, 밖에서 보초를 서겠습니다. 마지막이니 호위다운 호위는 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걸 묻는 게 아니야.”
“…….”
“너는 그걸로 만족해?”
“…….”
그렇지 못한다고 하면, 당신은 남아주나요? 아니면, 내가 다 버리고 떠난다고 하면, 기꺼이 반겨줄 건가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아리에스의 호위일 뿐이죠. 나이트 오브 세븐입니다.”
“…….”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나가보겠습니다.”
만남보다 이별이 가까운 시기가 올 때에, 당신이 태어난 날이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 제일 속상하다. 그날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것조차 들어줄 수 없어서….
스자쿠의 그림자가 달빛에 깊어지는 밤이었다.
* * *
새벽 다섯 시. 를르슈는 잠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줄곧 침대에서 한 번의 뒤척임 없이 누워있던 를르슈가 욕실 쪽으로 걸어가는 것에 스자쿠는 손이 땀으로 젖어가는 걸 느꼈다. 한숨도 쉬지 않고 보초를 서는 거야 익숙하지만, 오늘처럼 긴장한 적은 처음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사실에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를까봐 그걸 억누르는 게 힘들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씻는 물소리가 멎어가면서, 를르슈의 발소리가 들렸다.
없는 문 사이로 스자쿠가 분명 있다는 걸 알면서, 를르슈는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옷을 입는다. 황족에게는 원래 드레스룸이 따로 있는 걸로 알지만, 인력이 부족한 아리에스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 침실에 옷장을 두고 있다. 보랏빛이 도는 검은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정장과 화려한 셔츠, 그리고 깔끔하게 두른 스카프로 를르슈는 갈아입었다. 어제 나나리에게 선물 받은 이어커프까지 하고서 그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스자쿠.”
“네, 전하.”
“오늘도 나나리와 함께 뛸 거냐?”
“…….”
“마지막이어도 평소처럼 해도 되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 모두와 인사를 할 시간을 갖고 싶어. 오늘의 운동은 쉬도록.”
이제 앞으로 다시없을 마지막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한 를르슈는 나나리의 방으로 갔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는 나나리는 아직 자고 있을 터였다. 자고 있을 여동생을 알면서도 노크를 두 번 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스자쿠가 나나리의 방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여자의 방에 초대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순수한 목적으로는 처음이었다. 를르슈는 불을 켜지 않고, 복도에서 새어들어오는 빛으로 나나리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나나리, 하고 이름을 불렀다.
“…오라버니?”
“일찍 깨워 미안하다. 알현 일정을 빠르게 잡아놓아서…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아서.”
“아니에요, 일어나겠습니다. 아버지도 괜찮으실까요?”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 이정도 어리광은 봐주시겠지. 그리고 나나리. 항상 예쁘지만, 오늘은 더 예쁘게 하고 나오거라. 유피가 선물한 드레스와 코넬리아 누님의 티아라까지 해주면 더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러려면 혼자서는 무리고, 사요코 씨의 도움이 필요한데….”
“불러줄게. 먼저 씻으렴.”
재상의 손에 들어간 황적 포기 서류는 아무렇지 않게 처리될 일이지만, 상대는 슈나이젤이다. 슈나이젤이 유페미아와 코넬리아에게 를르슈 남매에 대한 이야기를 안했을 리가 없다. 지난 번 줄리어스의 황적 포기 때도, 일 처리 후였음에도 두 사람이 장난 아니었다고 했으니, 이번엔 한 번에 둘이 하는 와중이니 알현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를르슈의 기상에 맞춰서 벌써 다 일어난 주방의 사람들과 사요코를 보면서 를르슈는 표정을 살폈다. 이미 다들 소식을 들은 후였다. 울 것 같은 사람들 앞에서 를르슈는 겨우 말을 꺼냈다.
“다들 고마웠다. 하는 일도 없이 놀기만 하는 황자가, 제멋대로 굴 때마다 받아줘서, 아리에스는 더욱 소중한 추억으로 남겠지.”
“를르슈 전하….”
“나나리와, 지금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어버린 멍청한 줄리어스, 나….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모두 너희들의 도움으로 아리에스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아리에스 궁의 황자로 태어나서, 세상에서 제일 큰 행복을 누렸다고 생각한다. 정말 고마워.”
를르슈는 주방장을 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니, 하고 싶은 요리를 해서 줬으면 해. 항상 내 주문에 맞춰서 하느라 네 자존심을 꺾는 것도 너무 미안했다.”
“아닙니다, 전하. 저는 늘 전하께 배우며, 전하께 요리를 가르쳐드리는 것도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제 두 번 다시 네 요리를 못 먹는 게 아쉽고…. 이 차림새로는 요리는 내가 힘드니 너에게 맡기겠어.”
그러고는 사요코에게 나나리의 단장을 도와달라고 말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사요코에게 그는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알현이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갈 거야. 그때 갈아입을 간편한 복장도 따로 준비해줘. 이건 말하는 걸 잊었어.”
“……바로 가십니까?”
모두 놀란 눈으로 를르슈의 말에 술렁거렸다. 스자쿠도 놀랐다. 분명 저녁이라고 했던 게 어제다. 사요코만이 동요하지 않은채 나나리의 방으로 향했다. 식당에 스자쿠와 를르슈, 두 사람만이 남아서 요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스자쿠는 방금 전에 물었던 것을 재차 물었다.
“정말 알현이 끝나자마자 바로 가시나요?”
“응. 안 그러면 줄리어스가 바로 올 거야. 우선은 전선에 참전 중이라고는 들었지만 그 녀석을 생각하면 다 때려치우고 여기에 KMF로 와도 이상하진 않아.”
“…킹슬레이 경은 섭섭해할지도 모릅니다.”
“홀로서기란 그런 것이지.”
“전하는 나나리 전하와 함께 떠나시잖아요.”
“근데 걔는 혼자니까 불공평하다?”
“…네.”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는 너도 있고, 아냐도 있고, 지노도 있다. 그리고 제레미아도 전선에 복귀하겠지. 그럼 외롭지 않지?”
그래도, 라는 말이 계속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참으면서,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새벽이라 할 일이 없었다. 밖을 걷기에는 추웠고, 짐이 정리가 된 집무실을 생각하면 들어가서 할 일도 없었다.
“전하께서 떠나시면 아리에스 궁은 어떻게 되나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첫 번째는 폐궁이 되어 헐린다. 황실에는 이미 궁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으니 새로 지을 땅이 필요하거든.”
“…….”
“두 번째는, 가장 최악이지만…. 줄리어스가 황적을 되찾고 아리에스 궁에 들어와서 주인이 되는거다. 황족이 주인인 궁은 극악무도한 죄를 짓지 않는 이상 황제라도 헐 수 없어. 하지만 내 생각에 줄리어스는 황자로서 복귀하지 않을 거야. 아마 배신감에…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방금 전 네가 말한 대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그럼 위험해지지 않습니까!”
“너는 용서하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만나자고 결투장을 내미는 게 효율이 좋아보이느냐, 아니면 죽을 때까지 소식 듣고 싶지 않으니 아는 척도 말라고 선을 긋는 게 나으냐?”
“…킹슬레이 경이라면 후자군요.”
“그래.”
제발 그랬으면. 를르슈는 조용히 읊조렸다. 드레스를 입은 나나리가 내려오고, 식당에 음식이 깔리기 전까지 스자쿠와 를르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은 어젯밤에 대해서 쉼없이 생각했다. 키스를 하는 두 남자. 그 와중에 한 번도 사랑에 대한 고백도 없이 혀를 나누기만 했지만…. 그걸로 마음을 확인해도 이미 정해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스자쿠는 속이 쓰렸다. 를르슈는 손톱 끝으로 테이블의 레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유페미아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은 나나리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발목이 살짝 드러나면서 큰 리본이 경쾌하게 흔들리는 것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연갈색 머리카락에 얹어진 티아라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를르슈의 차림을 살핀 나나리는 이어커프가 너무 잘 어울려서 다행이라고 좋아했다.
아침은 거창한 게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나온 것은 팬 케이크였다. 생크림까지 곁들어진. 황족의 마지막 식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조촐하지 않나 싶었다. 버터를 녹인 향과 동시에 메이플 시럽을 바로 뿌려드시라는 메이드의 말에 를르슈는 그 뜻을 알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어제 나는 생일이었지. 다들 이렇게라도 챙겨줘서 고마워.”
“아침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면 더 준비했겠지만….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 정도면 됐어. 나나리도 충분하지?”
“네, 사실 오랜만에 알현하는 거라 긴장이 되서, 많이도 못 먹습니다.”
“스자쿠는?”
“맛있습니다.”
마지막 아침을 먹었다. 제레미아와 스자쿠는 알현을 하기 위한 황제의 알현실이 중앙 본궁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싣기로 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트렁크 두 개 밖에 없어서 쓴웃음이 났다. 제레미아와 스자쿠는 한참이나 둘이서 아리에스 궁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제 주인이 없어질 아리에스 궁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것이 기분이 이상했다.
“쿠루루기 경은 준비하지 않아도 되나?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정복 차림으로 알현하는 걸로 아는데.”
“아, 맞아. 그렇죠! 감사합니다, 제레미아 경.”
“나한테 진짜 감사한가?”
“…네?”
“진짜 감사하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게.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무례한 부탁일 수는 있어도….”
알현이 끝나실 두 전하를 나대신 공항으로 데려다드려. 나는 마리안느 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불명예스러운 기사로, 를르슈 전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아리에스 궁에 있는 걸 허락하셨지만…. 이제는 전하께서 아리에스 밖으로 내쫓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죄스러운 마음에 공항까지 갈 수가 없어….
망토의 장식까지 잘 갈무리한 스자쿠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여기와도 안녕이다. 를르슈와 나나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이 방에 와서 정리를…. 어쩌면 아리에스에 마지막으로 남는 사람은 스자쿠가 될지도 모른다.
현관 앞에서 제레미아와 함께 남매들을 기다렸다. 각자의 방에서 나와 걸어 나오는 자세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태어나서 자란 고향, 그리고 그 집을 버리는 선택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임에도.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차 안은 고요했다. 본궁에 도착했습니다. 제레미아가 말했다. 스자쿠가 문을 열어주고, 를르슈는 나나리를 에스코트했다.
‘비’ 가문의 황자와 황녀 남매가 왔다고 고했다. 알현실 앞에 서있는 동안 나나리가 춥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안,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를르슈! 나나리!”
“…유피와 코넬리아 누님이군.”
“유피 언니랑…코넬리아 언니라구요?”
를르슈에게 있어서 군복 차림의 언니와 다르게 부드러운 레이스를 섞은 드레스를 입은 여동생 자매는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나나리는 너무 오랜만에 본 지라 낯선 사람을 본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살폈다. 코넬리아와 유페미아는 자신들의 선물을 한 나나리를 보고서 울음을 터뜨렸다. 를르슈는 자기 예상대로 자매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황족이 안다면 그 녀석도 알고 있다는 뜻이겠고, 그렇다면 시간 차이를 내가 얼마나 벌려놓았을까. 무사히 이 펜드래곤을 빠져나갈 수만 있으면 된다.
“내가 선물한 드레스죠? 정말 잘 어울려요. 키가 얼마나 컸는지 잘 몰라서, 디자인은 옛날에 정했는데 그래도 기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정말 예뻐요, 나나리.”
“유피 언니도, 변함없이 예뻐요. 매년 선물 고마웠어요. 저는….”
“안다, 를르슈가 우리를 생각해서 선물을 보내는 걸 못하게 했지. 나쁜 자식. 너 혼자 나나리를 독차지할 셈이냐!”
“‘리’ 가문의 안녕을 위한 저의 배려라고 말씀해주시죠.”
“황적을 버리고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를르슈와 너는 어디로 가니, 나나리?”
“……그건.”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면서 새벽에 가까운 아침임에도 환한 샹들리에 빛이 났다. 를르슈는 나나리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는 채, 이제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 건 미안하지만…. 이제야 서로 안전해지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오랜만에 들어온 알현실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때는 줄리어스의 황적을 버리던 때에 뜯어 말리려고 같이 들어가던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무거운 얼굴로 를르슈와 나나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설마 시공을 뛰어넘는 재주라도 있느냐, 줄리어스?”
“황제 폐하 앞에서 무엄하도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예를 갖춰 인사를 드려라.”
줄리어스 때문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를르슈와 나나리는 왼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닿기 직전까지 숙였다. 남자는 오른쪽 손을 왼쪽에, 여자는 반대로 하여 경례를 하였다.
“아리에스 궁의 황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리에스 궁의 황녀,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정중한 인사 끝에 황제는 입을 열었다.
“황적을 포기하여…어떻게 하고 싶은 것이냐?”
“황족으로써의 삶을 끝내고 싶습니다. 언제 어디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위협과, 그 위협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약육강식을 이해하지 못할 제가 싫습니다. 저는 황자로써 부족한 사람입니다. ”
“…….”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황제 폐하. 황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줄리어스는 마음에 안 드는지 두 사람의 옆에 섰다.
“폐하께서 아실 텐데요, 이 두 사람은 어느 황족보다 황족답고, 저는 두 사람을 위해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저의 목적을 위해서 노력한 결과가 쓸모없지 않게 해주십시오, 폐하.”
“킹슬레이 경…이 우리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압니다만, 그래도 저희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남동생을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그 녀석, 그 자식, 그리고 줄리어스라고 불러왔다. 줄리어스는 눈을 부릅뜨고 를르슈를 노려보았다. 를르슈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것에 속이 상한듯, 줄리어스는 입을 열었다.
“그래, 황적을 버리고 킹슬레이 가문에 들어오는 건 어떠냐? 나의 형제 자매로써 새로운 역사를 쓰는 귀족이 되는거다!”
“안타깝게도 킹슬레이 경의 가문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있으면 킹슬레이 경의 약점만 늘어날 뿐이니까요. 그는 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저희는 황적을 버리고…그저 를르슈와 나나리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를르슈! 나나리!”
“지금부로 두 사람은 황적에서 폐위시킨다. 원하는 대로 하도록. 황위 계승권에서 싸워서 이겨낼 마음이 없는 녀석들에게는 황족이라는 이름이 사치다.”
말은 저렇게 해도 마음껏 살아보라는 이야기다.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나리는 담담한 얼굴로 드레스 끝을 잡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족으로 태어나, 한 번도 황족다운 일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황제를 아버지로 둔 사람으로써, 제국 최강의 기사를 어머니로 둔 사람으로써 이곳을 사랑했던 때도 있었다. 알현실의 문을 닫고 나오면 스자쿠만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코넬리아 전하와 유페미아 전하는 아침의 군정청 회의와 재상부 회의가 있으시다고 하셔서 가보셨습니다. 그리고, 공항까지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상관은 없지만 그 화려한 망토는 빼고…. 아니 이미 나이트 오브 라운즈니까 소용이 없나?”
“사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얼굴을 외우는 건 군인들과 황족 분들 밖에 없습니다. 아주 크게 미움을 사지 않는 한…. 다른 옷을 챙겨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와, 지쳤어요…. 이제 이대로 공항인가요?”
“그래. 고생했다. 아주 의젓하던걸. 차 안에서 티아라를 정리해주마. 이제 걸리적거리겠지.”
스자쿠가 운전하는 차는 일부러 공항을 돌아서 가는 길이었다. 비행기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티아라를 빼낸 나나리는 예쁘지만 떨어질까봐 조금 무서웠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황궁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바깥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공항에는 황실 전용 게이트가 있었다. 비행기는 황족 전용기로 예약하셨죠? 그렇다면 이쪽으로 가셔야합니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브리타니아 본국을 나서기 전까지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호위를 받고 나가야만 했다.
짐을 꺼내 들고 다들 탈의실에서 한 바탕 옷을 갈아입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무난한 검은 수트 차림이었고, 나나리는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었다. 여권이나 다른 서류에 대한 수속은 에리어11에 도착하고 나서 시작할 거라는 를르슈의 설명에 나나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성 말인데.”
“네.”
“브리타니아라는 성은 너무 눈에 띄고, 킹슬레이는 좀 싫잖아?”
“줄리어스 오라버니가 들으면 속상하겠어요.”
“…람페르지로 하는게 어떨까 싶은데. 어머니가 결혼하시기 전에 쓰시던 성이야. 그리고 어머니를 존경하는 고아들이 자주 쓰는 성이기도 하고.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성이니까.”
“를르슈 람페르지, 나나리 람페르지, 어감이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정말로?”
“네, 마음에 들어요.”
담소를 나누고 있던 둘에게 스자쿠는 안녕을 말할 시간이 왔다고 말했다. 전하, 이제 가셔야합니다. 두 개의 캐리어를 들고 일어선 두 사람은 그것들을 끌고 게이트 쪽으로 갔다. 멀어지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만나요, 또 만나요, 다음번에…. 그런 말들이 모두 쓸모없는 이별이다.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고서 스자쿠는 이를 악물었다. 펜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헤어지면, 영원히 안녕인데. 어떡하지. 부르고 싶어. 그 이름을 불러서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스자쿠는 게이트와 반대방향으로 걸어 나왔다. 축 늘어진 어깨가 꼴사나워 보일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만 보며 터벅터벅 걷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스자쿠의 목을 조르듯이 멱살을 쥐었다.
“쿠루루기 스자쿠…!”
이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고 있다. 바로 게이트 건너편으로 넘어간 를르슈와 똑같은 목소리. 바로 줄리어스 킹슬레이다.
“줄리어스, 너는 체력도 없는 애가 왜 그렇게 나대는 걸 좋아하는지. 우선 멱살을 풀어. 쿠루루기가 마음만 먹으면 너는 박살이 난다.”
“…….”
“…고맙습니다. C.C.”
우선 대기실로 가볼까. C.C.의 빠른 정리와 동시에 줄리어스가 스자쿠를 노려보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근데, 줄리어스가 이제 와서 나이트 오브 세븐인 스자쿠에게 무슨 억하심정을 가지려고?
대기실에서 미적지근한 차를 마시면서 세 명 다 불만족스러워 했다. C.C.는 본론부터 말하겠다며,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지금부터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써의 작위는 정직 상태이다. 사실상 박탈이다. 언제 복직이 될지 모른다. 샤를은 그간의 공적을 생각해 너를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써는 정직이지만, 군인으로써의 준위라는 계급을 남겨두었다.”
“…네?”
“황자와 황녀, 그 둘이 동시에 황적을 버릴 만큼 끔찍한 호위를 했다는 것이 샤를이 내린 결론이다. 너는 옆에서 지켜주지 않고 뭘 했지? 아무리 공적을 세우고 쌓아도 황실의 자제 한 명 지키지 못한다면 쓸모가 없다.”
“…….”
“그걸로도 모자라 나이트 오브 텐이 아리에스 궁 호위의 임무를 가로채는 게 두려워서 일부러 ‘비’ 가문의 황족에게 압박을 넣었다는 의혹이 있다.”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안다. 지금까지 모든 내용은 다 핑계이자 명분일 뿐이다.”
줄리어스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그 서류를 열어본 스자쿠는 이내 곧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런 걸로 되나요? 물어보는 스자쿠의 말에 줄리어스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물이나 쳐먹고 정신 차려. 네가 좋아서 그렇게 된 거 아니니까. 황제 폐하의 지엄한 뜻을 그저 따를 뿐이다.”
“줄리어스, 예쁜 말을 써야지.”
“나를 애 취급 하는 것도 그만해라! 를르슈가 가고 나니까 나한테 이러는 거지?!”
“동정을 나한테 바친다며? 겉과 속이 다른 남자는 인기가 없단다.”
“그렇게 말하면 를르슈가 질투해 줄…됐어. 나나리로도 모자라서 쿠루루기 스자쿠까지 상대해야한다니.”
C.C.와 줄리어스가 무어라 떠들고 있지만 스자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 *
이제 곧이다.
를르슈는 창문 밖을 보았다. 장난감처럼 작아보였던 바깥도 어느새 큼직해졌다. 파란 하늘에 구름도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이 보기 좋았다. 스자쿠가 선물해주었다던 카메라를 만지며 사진을 한참이나 찍으며 좋아하던 나나리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이렇게 긴 비행은 처음이었으니까. 살짝 흘러내린 모포를 다시 덮어주었다.
스자쿠의 생각이 계속 났다.
처음엔 불안할 때 온 사람이라서, 의지가 더 되는 줄 알았다. 남의 것이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의 등을 지켜주는 망토를 갖고 싶어졌다. 함께 할수록 좋았다. 이름으로 부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람. 자기 과거에 대해서 누구보다 죄책감을 갖고 있지만, 그걸 속죄할 방법을 찾아서 노력하는 사람.
함께 떠나자고 말했으면, 기꺼이 따라와 줬을까? 하지만 그는 나이트 오브 원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빠른 시일 내에 더 많은 공을 세워도 모자란 때에 아리에스의 호위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떠나자고 해서 떠난다 하더라도, 를르슈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어제의 키스가 남아있을 리가 없는 입술 끝을 만졌다. 그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줄리어스가 장난처럼 밀어넣는 것은 그냥 기분이 나쁘기만 할 뿐이었다. 온몸으로 사랑받는다는 기분이 드는 키스는 처음이라서, 를르슈는 스자쿠를 잡고서 놓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 여기서 안아달라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하지만, 이제 떠나고 남을 사람은 정해져있으니—
“…오라버니, 도착했대요. 이제 내려도 된대요.”
둘 뿐인 승객을 열심히 배웅한 사람들 다음은 서류 소속을 위해 총독부 건물로 가야했다. 황적을 버린 황족이야 많지만, 굳이 먼 아시아의 에리어11까지 오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이 서류 절차를 밟는 것도 꽤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를르슈와 나나리를 설명을 다 듣고 새로운 서명을 하며 필요한 서류들을 만들었다. 미레이한테 연락을 해서 이쪽으로 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머~ 그거 하려면 시간 엄청 오래 걸릴 텐데. 조금 느긋하게 있다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미레이는 이제 를르슈가 황자가 아니라고 막나갈 예정인 것 같았다. 를르슈가 먼저 서류를 다 작성하고 제출했다. 나나리의 서류는 조금 시간이 걸리는 듯 했다. 왜 시간이 오래 걸리지? 를르슈가 묻자 직원이 더듬거리며 전산 상의 오류라고 그랬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저 이름 입력하고 숫자 몇 개 더할 뿐이고, 여기는 미레이 애쉬포드라는 신원이 보증된 사람도 있다.
나나리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를르슈에게 먼저 건물 내부를 돌아보고 오라고 했다. 돌아보는 일 치고는 너무 볼게 없다. 여기는 애초에 특이한 케이스로 에리어11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고 대부분 비밀리에 있을 정치적 사정이 얽혀있기 때문에 구경할 것이 없었다. 오가는 사람도 없이 한적했다. 창문도 없는 복도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였다.
“람페르지 씨? 맞으신가요?”
왜 여기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있는 거지. 그것도 평소의 하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장이 아니라 갈색의 일반 병사가 입는 군복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닮은 사람인 걸지도.
“저는 쿠루루기 스자쿠. 에리어11에 기지를 두고 있는 특파 소속의 군인입니다. 계급은 준위입니다.”
“…….”
“안에서 자세한 내용을 못 들으셨을 겁니다. 아직 다른 한 분은 미성년자라서 해당 사항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성인이 되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무슨 말이야, 나나리가 뭘 하는데?”
“말씀을 편하게 하시기로 하셨군요. 하긴, 저도 자료를 봐서 동갑인 걸 알고는 있습니다. 아무리 명예 브리타니아인이라도 준위가 일반인보다는 계급이 높을 테니, 저도 사양 않고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뭐?”
“를르슈 람페르지, 너는 브리타니아 황실의 비밀인 ‘마녀’에 대해서 누구보다 오랫동안 접촉해 있었고,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어. 너의 여동생 역시도 그렇다. 같은 쌍둥이 형제인 줄리어스 킹슬레이 경은 브리타니아에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기에 이러한 제약 조건이 붙지 않았지만, 너는 충성도, 그렇다고 반역의 의지도 없이 펜드래곤을 떠났다. 황실의 비밀을 떠벌릴 가능성은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위해서 브리타니아 제국에서는 너를 평생 동안 감시하고자, 나를, 쿠루루기 스자쿠를 보냈어.”
“너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인데 고작 일반인의 감시를 한다고?”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
“아니면 지금 브리타니아와 사이가 안 좋은 중화연방으로 넘어가면 돼. 너의 안위가 걱정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할 리가 없다. 나나리의 일이 끝났는지 그쪽 방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와 동시에 스자쿠는 입을 열었다.
“평생의 감시에는 결혼만큼 좋은 게 없지.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 를르슈. 결혼이 싫다면 다른 스토킹에 가까운 방식으로 너를 감시할거야. 스토킹? 역시 결혼이 낫겠지? 그리고 너도 내 인생을 책임질 이유가 있어. 그건 나중에 하고, 우선…….”
갑작스럽게 제 입술에 닿고 떨어지는 것이 스자쿠의 입술이라는 것과, 나나리의 등 뒤로 숨으면서 그동안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 모습에, 를르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여기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만 하기도 그렇다.
나는 아직 YES라고 대답하지 못했는데…!
NO라고 오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쿠루루기 스자쿠!
후기
안녕하세요, 도지입니다. 연재했던 포스타입에서도 후기를 쓰다가 소장본 후기를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려던 중에, 후기는 두 번 써도 재미있으니 두 번째 후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포스타입에 올라간 후기에는 를르슈와 줄리어스에 대해서 어떤 의미로 쓰려고 했는지 짤막하게 써보았구요,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 를르슈가 ‘를르슈 람페르지’로써 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작에서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된 이유가 너무 슬프고 불행한 이유였기에, 저는 제가 쓰는 글 안에서나마 를르슈가 람페르지로써 살아가는 그 자체가 행복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써보았습니다. 읽으시는 분들은 를르슈에 대한 제 애정이 느껴지셨나요? 그래봤자 스자쿠가 가진 애정에 비하면 새발의 피니까요….
다른 캐릭터들과 를르슈, 나나리 남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코넬리아 자매는 에리어11로 총독과 부총독으로 취임할 것입니다. 에필로그에서 밝혀지겠지만 를르슈가 하는 일 관련상 황족과 얽히는 일이 많아 두 자매와 남매는 만날 일이 예전보다 더 많아집니다. 를르슈의 파트너로 나나리가 파티에 같이 참석하는 경우가 잦아집니다. 슈나이젤은 차기 황제가 되겠죠. 배 다른 남동생인 줄리어스도, 정직 중인 나이트 오브 세븐까지 모두 자기 세대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를르슈가 외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지만…그때쯤이면 를르슈도 강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에스에 남은 앨범은 줄리어스가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를르슈의 계산 내에 이루어진 것이고, 아리에스 궁은 C.C.의 거처로 남았기에 헐리지 않았습니다.
원작의 코드 기어스는 정말 를르슈가 자기를 희생해서 모든 최악의 수를 다 밟아가며 파국으로 치닫는 게 눈에 보여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원작을 보고서 2차 창작을 하는 제가 스스로 안쓰럽더군요. 그렇지만 를르슈는 죽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거 같은데 놀랍게도 부활이라니…. 세상 일은 역시 모르겠습니다. 완결 난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짧은 연재 기간 동안에 급하게 쓴 탓에 많이 부족했습니다. 심지어 이 소장본까지 내게 되는 것도 급하게 이루어지고 있네요. 마지막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상을 받는 건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를르슈 람페르지의 평일은 애쉬포드 사로 출근하는 걸로 시작된다. 그 전에 여동생을 깨워서 학교에 보낼 준비를 한다. 학교가 십 분 거리에 있으니 더 자도 된다고 침대에서 구르는 여동생을 겨우 일으켜 깨운다. 이제 운동은 쉬고 안 해본 걸 해보겠다고 조리부나 제과제빵부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체력 말고는 최악의 감각으로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자리가 남는 교내 오케스트라에 남아서 바이올린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아침을 야무지게 다 먹은 여동생은 바이올린 가방을 챙겨 들고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서로 뺨 키스를 나누고, 저녁에 언제쯤 올 건지,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
람페르지 남매가 살고 있는 이 맨션은 고급 맨션으로, 두 집이 마주보는 형식으로 맨션 입구부터 보안 키가 다 설치되다 못해, 베란다의 창문까지 방탄 기능을 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 나나리는 아직 나오지 않은 옆집의 이웃을 보며 웃었다. 먼저 내려갈게요. 깨우려면 또 한참일 거 같은걸요. 를르슈는 미안하다며 나나리를 먼저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내려보냈다. 그녀가 1층까지 도착하고 학교가는 뒷모습을 살핀 를르슈는 이제 기다렸다는 듯이 옆집의 문을 걷어찼다.
“일어나라, 스자쿠! 아침이다!”
쾅, 하고 걷어차인 현관문은 말끔했다. 나도 발차기 힘이 좀만 더 셌으면…. 를르슈가 아쉬워하고 있을 때, 옆집의 문이 열렸다. 머리가 부스스한 채로 일어난 스자쿠는 풀어진 입가를 감추지 않고 웃었다.
“아침부터 활기차네, 를르슈….”
“너는 또 늦을 생각이냐? 얼른 준비하지 않으면 로이드가 시끄럽다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직 출근까지 시간 남았지? 같이 출근할까?”
“오늘은 보고의 날도 아니라서 같이 갈 필요 없어.”
“를르슈랑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지.”
“아무튼 나는 너를 깨웠다. 나의 기상 시간은 6시 32분. 나나리는 7시 30분이었으니 잘 보고해. 귀가 시간은 나중에 오면 저녁 먹고 알려줄게.”
“알겠어. 정신 드니까 배고프다. 나도 저녁 같이 먹으면 안 돼?”
스자쿠가 먹은 게 분명한 컵라면이 건더기가 다 말라붙어서 치울 때 기분이 나빴다. 그 김에 부엌을 살펴 냉장고를 살펴보면 생수와 맥주 밖에 없었다. 이런 걸 먹고 그런 괴물 같은 힘이 난다고? 말도 안 돼. 보고서를 써야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쟤 아니야?
“그래, 저녁이든 아침이든 언제든 먹으러 와도 돼. 이런 거만 먹고 살다간 영양실조로 죽는다, 너.”
“나나리가 곧 성인인데, 마음대로 드나들기가 그래서….”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흠….”
를르슈의 곁으로 와서 냉장고 속의 작은 생수통을 다 비우고 구겨서 버리기까지 한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손짓했다.
“환영하는 건 나나리만?”
“…나도 환영해.”
모닝 키스를 하자고 말하는 스자쿠의 말투는 간지러웠다. 를르슈는 제 아랫입술을 핥는 혀에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 더 부드럽고 나긋해진 스자쿠와의 키스가 좋았다. 밤에 미친 듯이 먹어치울 것처럼 구는 것도 좋지만. 속삭이듯 좋아한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기분 좋았다.
“더는 안 돼. 회사 가야 돼.”
“나도 가야겠지. 로이드 씨, 에리어11로 돌아오고 나서 자기 홈그라운드로 들어왔다고 기뻐할 땐 언제고, 펜드래곤 시설보다 옛날 버전이라고 못 견디겠다고 하루에 열 두 번씩….”
“나중에 들어줄게. 보고하는 날이 되면 한 대 때려줄게.”
“상대는 백작이야?”
“나이트 오브 세븐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정직 중인데.”
“아니면 나를 감옥에 보내던가.”
“무서운 농담을 하네.”
스자쿠는 현관 앞에서 를르슈에게 손을 흔들었다. 벌써 를르슈와 나나리가 에리어11에 온 지 반 년이 지났다. 미레이 애쉬포드는 모든 건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집도, 차도, 모두 준비되어 있어서 스자쿠는 감탄했다. 하지만 를르슈는 면허가 없었다. 를르슈가 운전 면허를 따는 한달동안 스자쿠가 특파의 임무를 쉬면서 를르슈의 통근을 도왔다. 나나리는 애쉬포드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아직 람페르지라고 불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모두에게 말해서 ‘나나쨩’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말했다.
를르슈는 아리에스 궁에 있었을 때부터 애쉬포드의 사업을 도왔다고 했다. 대부분 우편과 서면으로 이루어진 조언이었음에도 를르슈의 계산은 늘 정확했기에, 미레이의 사업은 단 한 번의 손해도 없이 승승장구 중이고, 이번에 에리어11에 사쿠라다이트 관련 사업을 펼치면서 ‘제로’의 정체를 밝히게 되었다고 했다. 식사를 하던 중에 오가던 이야기라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대로 손해를 안 본다는 의미에서 제로야! 항상 편지 끝에는 <이 편지가 닿을 무렵에는 이미 미레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되어서 수습이 안 될 지경일 테니 내가 하는 말대로 수습하는 게 편할 것> 이라는 문구도 유명해서, 를르슈 전하…아니 를르슈…아니 루루쨩의 편지는 행운의 편지라고도 불려!’
‘루루쨩….’
‘오늘 이 분이 제로입니다, 하고 밝히니까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철없는 애송이가 나타나니까 그런 거겠죠.’
‘다들 제로의 정체를 추리하고 있긴 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초로의 아동 성애자여서 감옥에 갇혀 있지만 애쉬포드에게 도움을 주는 척 석방을 요구한다는 범죄자라는 이야기가…. 그런데 정작 나타난 것은 20대의 초 세기말 미인! 심지어 여자보다 예뻐서 대충격!’
초 세기말 미인과 사귀는 입장으로써는 그런 대충격 소식을 들어도 기쁘지 않다. 아리에스 궁에 살았을 때에도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그렇게 마을 해줘도 를르슈는 제 얼굴에 대해서 시큰둥했다. 너는 이 얼굴을 달고 살고 싶어? 스자쿠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나 그 얼굴 달고 살아서 쿠루루기 스자쿠랑 사귈래. 이 멍청이가! 여긴 밖이다!
시계를 보니까 이제 슬슬 준비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그래, 오늘 를르슈는 6시 32분. 나나리는 7시 30분. 나나리는 정말 칼 같이 일어나네. 군인인 나보다 더 아주 칼이야…. 저러다 군인이 되면…로이드 씨가 제일 기뻐하겠지. 그 사태만큼은 막자.
스자쿠는 특파로 출근한다. 를르슈와 나나리에 대한 보고서를 간략하게 쓴다. 그리고 랜슬롯의 디바이서로써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를르슈의 도시락이 없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매점으로 뛰어가려던 찰나에 뒤에서 세실이 불렀다.
“스자쿠 군! 내가 샌드위치 만들어왔어!”
“…….”
“뭐야~ 스자쿠 군, 모두를 위해서 빨리 달려갔어야지! 나의 위장 어떡할거야!”
정직 중이어도 때려도 되지 않을까. 근데 어느 쪽을 때려야할지 모르겠어. 세실 씨를 때려서 기절시키고 샌드위치 안 먹기? 로이드 씨를 때려서 그냥 후련해지기?
“그래서 나나리가 조리부에서 파스타를 만드는데 블루베리 잼을 넣었다고 혼난 거예요.”
“어머, 왜?”
“음…보통은 안 넣고, 그리고 어… 맛이 없잖아요?”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잖아? 나는 나나리 양의 도전이 아주 의미 있다고 봐.”
“…….”
타산지석의 교훈을 주려고 나나리의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까지 꺼냈지만 이렇게 될 줄이야. 애플파이라고 했으면서 파인애플과 고기를 같이 갈아 넣어 이맛도 저맛도 아닌 점심을 먹으며 스자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 특파 시설 정비가 있을 예정이라, 내일까지만 오고 2주 정도 휴가야, 스자쿠 군~!”
“어라, 갑자기 휴가요?”
“응. 펜드래곤에 있는 시설만큼 정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고, 조정도 해야 되거든. 내일 를르슈 군이랑 보고만 하고 당분간 쉬면 돼. 2주면 기니까 둘이서 여행도 다녀오고?”
“나나리가 위험해지니까 셋이서 다녀올 거예요.”
“흐음~ 사귀고 있는데 둘 만의 시간 정도는 괜찮잖아?”
특파가 스자쿠와 를르슈 사이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에리어11에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아직 미성년자인 나나리는 미레이의 손에 맡겨두고, 둘은 특파에 왔다.
를르슈 스스로가 작성해야하는 보고서가 있다. 스자쿠가 지금까지 한 보고에 거짓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스스로 자진보고해야할 사항에 대해서 확인하고 보고서에 대한 진실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아직 마녀와 접촉한 적 없음’ 같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스자쿠 군, 이제 와서 조강지처를 찾아주는 나쁜 남편이야~!’
‘저 예전에도 궁금했는데, 대체 왜 저를 나쁜 놈으로 못 만들어서 안달이세요?’
‘하핫! 스자쿠 군~ 억울한 마음은 알겠지만, 이 에리어11에 온 이상 특파의 모든 총 지휘권은 나한테 있다구~? 파워 헤러스먼트는 이제 통하지 않아! 심지어 너는 정직! 나는 아직 팔팔한 백작이라구~!’
‘로이드 씨가 제 억울한 마음을 안다는 게 충격이에요.’
‘신경 쓰지마, 스자쿠 군.’
‘우리 아이가, 우리 아이 랜슬롯이, 아빠라고 부르고 있잖아요! 스자쿠 씨, 이대로 가실건가요?! 볼 일만 보고 떠나는 그런 매정한 사람이었던가~요~!’
‘다 썼다. 이제 가보겠다.’
잔뜩 어두워진 얼굴의 를르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자쿠가 보고서 확인을 하고 서명을 해야했기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 걸 알면서, 를르슈는 출입문 쪽으로 달려가듯 걸어갔다. 를르슈, 기다려! 스자쿠는 를르슈를 잡으려고 보고서 확인도 안 하고 바로 따라나섰다.
그 다음날, 세실과 로이드에게 당연한 사실로 놀림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말이다.
<쿠루루기 스자쿠와 사귄지 25일 째. 절찬 열애 중. 손 잡음.>
단정한 글씨로 적혀 있는 귀여운 내용에 스자쿠는 랜슬롯 장갑을 때려부실 기세로 울었다. 그 이후로 세실과 로이드는 두 사람의 사귀는 날짜를 스자쿠보다 열심히 세어 가면서 놀리고 있었다. 손 잡음 다음은 이제 안 알려준대? 스자쿠 군의 염문을 아는 우리한테 속이려고 하지 마, 빨리, 빨리! 감시의 임무를 확실하게 해야지! 변화에 대해 보고도 빨리 빨리 해야 할 거 아니야!
남이사 손을 잡든 키스를 하든…. 그렇지만 그런 걸로 질투해주는 를르슈 귀여워!
스자쿠가 자기 연애 진도를 확인 당하는 동안 를르슈는 일하는 것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쪽 사업은 그냥 빨리 매각해버려서 손해를 덜 보는 게 낫네요. 미레이 애쉬포드의 비서로 취직한 를르슈는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들을 살피면서 숫자와 씨름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엉망인 상대 거래처의 서류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면 녹차가 담긴 찻잔이 내밀어져 있었다.
“계속 쉬지 않는 것 같으셔서….”
“아, 그럼 좀 한숨 돌리는 걸로. 그리고 카렌 슈타트펠트? 맞지? 우리 동갑인 걸로 아는데. 말 편하게 해. 이름으로 불러도 돼.”
“그, 그럴까. 나도 카렌으로, 편하게….”
를르슈의 옆에서 서서 텀블러 속의 차를 마시는 카렌은 를르슈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 회사에 들어와서 저런 시선은 익숙하게 받아보았다. 황족이 아닌데도 보라색 눋동자여서? 먼 친척이라고 둘러대면 된다. 람페르지라는 드문 성? 고아여서 그렇다고 하면 된다. 그녀가 궁금해 할 모든 것에 대한 답변을 다 갖추고 나서 를르슈는 입을 열었다.
“카렌은 뭔가 나한테 궁금한 게 있나?”
“정말 제로야? 를르슈는 나랑 동갑에, 솔직히 사업을 하기엔 어리잖아. 애쉬포드의 도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 내가 제로야.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는 몰라도.”
“…나, 제로가 펼치는 사업 방향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이 회사에 들어온 거야.”
“별 거 아니었는데.”
“넘버스에게 자립할 수 있는 경제권을 준다는 방향으로…회사를 이끌어가는 게 보였어. 지금까지 모든 브리타니아 회사들은 약탈에, 침략에 형편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너무 좋게 보고 있네. 원래 가지고 있을 사람들에게 돌려줄 뿐이다.”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아직 를르슈를 잘 모르니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래?”
“보통 다 큰 여동생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하는 오빠는 드무니까? 연기라고 해도 그 정도까지 하면 진짜 좋은 사람인거야.”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갖다 두려고 탕비실로 가려는데 셜리와 리발이 벌써 농땡이가 끝났냐며 다시 한 번 티 타임을 외치며 다가왔다. 니나가 인사부에서 쿠키를 얻어왔다고 했다. 다들 회사에 놀러왔어? 일해야지, 일! 를르슈의 다그치는 소리가 무색하게 미레이가 경쾌한 소리로 외쳤다. 루루쨩! 일하기 싫으니까 우리 서류 소각쇼 하는 거 어때?! 애쉬포드 대학교 운동장에서! 싫습니다! 일하세요!
진짜로 할 것 같았던 소각쇼를 뜯어 말리고 일을 다 마무리하고 나서 퇴근했다. 현관문을 열고나면 나나리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관객은 스자쿠 한 명이었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 부드럽게 울리는 음색에 현관을 소리 없이 빠르게 닫았다. 그래도 자동 잠금이 작동되는 소리에 음악은 끊겼다.
“어서오세요, 오라버니.”
“어서와, 를르슈.”
“나나리, 바이올린이 훌륭해졌어. 스자쿠는 일찍 왔네.”
“응, 그리고 내일 모레부터 특파 정비 때문에 2주 휴가라서…. 를르슈는 당분간 깨우러 안 와도 돼.”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줄게, 라고 말하는 눈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넥타이를 풀고 있는 중에 나나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 다다음주에 학교에서 졸업여행 간다고 그래서…. 당분간 오라버니와 스자쿠 씨 뿐이겠네요.”
를르슈의 넥타이를 풀던 손이 멈추었다. 스자쿠는 무언가를 엎질렀는지 뭔가가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런 기회가…. 그런 일이…. 나나리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갖다두겠다고 방으로 간 사이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시선이 오갔다.
이건 무조건 섹스다!
이제 우리는 섹스하지 않으면, 바보 멍청이다!
그동안 온갖 핑계로 키스만 하고 있었고 아직은 나나리가 어리니까(그녀는 내년에 성인이 되는 다 큰 청소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로 섹스를 미루고 있었다. 를르슈의 퇴근 후 두뇌가 빠르게 돌아간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로이드가 흥미로워할 가설과 이론을 세워서 특파의 일을 더 붙잡아 놓아서, 스자쿠가 투입되는 실전 전까지 시간을 더 늘려서…어떻게든 섹스한다.
반지를 맞추고, 스자쿠는 를르슈를 감시하고, 를르슈는 스자쿠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 인생을 망쳐놓았다는 이유로 보상하겠다는 의미로, 서로 평생을 걸쳐 서로만 바라보겠다는 맹세를 한지 반년 째. 진짜 바라만 보고 있기 일보 직전에 스자쿠는 이제 미쳐버릴 지경에 금 같은 시간이 흐를 것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건 섹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전쟁이 나도, 나는 를르슈랑 섹스하겠어. 최소 사흘은 옷을 입지 않고 섹스만 할 거야.
서로 눈빛이 다시 마주쳤다. 섹스하겠다고 그렇게 각오를 다진 게 방금 전인데, 눈빛이 마주치자마자 서로 생각을 읽고 얼굴이 빨개졌다.
자기방 안에 있는 나나리가 오히려 부끄러워서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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