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세상에서 스자루루+나나리가 사는 이야기
ETC 등등
[나나리]
[오늘 저녁은 뭐 먹고 싶어?]
퇴근 30분 전, 를르슈의 하루가 마무리 되는 시간이다.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귀여운 토끼 모양 스탬프가 깡총거리는 것이 귀여운 여동생을 떠올리게 했다.
[오늘은 피자]
[치즈 가득입니다!]
피자를 못 만드는 건 아니지만 집에서 만드는건 효율이 안 좋다. 그렇다고 사서 먹이는 건 또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 싫고. 를르슈는 우선 알겠다고 답장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또 모처럼 스자쿠가 집에 놀러오는 날이었기에 요리에 힘 좀 써볼까 했는데 피자인가.
나나리와의 메신저 창을 닫고 나니 바로 스자쿠에게 연락이 왔다. 금요일에 놀러올 때에는 장을 한가득 봐서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다.
[나나리의 리퀘스트는?]
[아쉽게도 피자]
[피자? 그것도 좋아!]
[집 근처에서 테이크아웃할거야.]
[를르슈가 주문해 놓으면 내가 가지고 갈게!]
[번거롭지 않아?]
[괜찮아!]
빠르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스자쿠에게 내역을 보냈다. 검은 고양이가 OK사인을 보내는 스탬프에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해졌다. 모처럼 스자쿠가 집에 오는 날인데 피자 같은 걸로 되려나. 그 점이 계속 아쉽지만 나나리가 피자를 먹고 싶어하니 그건 또 그것이다.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다. 를르슈는 모니터 속의 시계를 노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아, 얼른 가라. 할 일도 다 했다. 찾아서 일을 더 할 수도 있지만 금요일에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한시 바삐 집으로 돌아가서 여동생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도 들어야 되고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는 스자쿠의 푸념을 들어주면서 연인으로서의 성실한 면모도 보여줘야 되고 나는 퇴근하고 싶다!
하여, 그렇게 열심히 퇴근을 바란 를르슈는 집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를르슈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에 나나리가 반겨주었다.
“다녀오셨어요, 오라버니.”
“다녀왔어, 나나리.”
“어라, 피자는요?”
“스자쿠가 가지고 올거야.”
“스자쿠 씨를 너무 부려먹는거 아니예요?”
“체력이 넘쳐나는 녀석이라 이 정도는 일도 아니야.”
나나리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직 교복 차림인 나나리는 부활동이 늦게 끝난 모양이었다. 옷 갈아입고 오는 게 좋지 않아? 를르슈의 말에 나나리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 학교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었는데, 그거 구경하느라 부활동도 못 갔지 뭐예요.”
“드라마 촬영?”
“네, 구 교사에서 찍어서 학생들이 나올 일은 없지만 그래도 카메라나 배우, 막 그렇게 사람들이 움직이는데.”
“나나리가 좋아하는 배우라도 있었어?”
있었다면 남녀를 떠나서 사생활을 조작하고 SNS를 모두 해킹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인간쓰레기로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아뇨, 그냥 그랬는데, 아,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면을 쓴 배우가 나와요! 그 배우가 주인공 같았어요!
나나리는 그 배우에게 빠진 듯 했다. 가면을 썼는데도 어떻게 뭔가, 감정이 보인다는 게 신기했어요. 나나리의 꿈꾸는 눈빛에 를르슈가 감동 대신 열이 받을 지경 쯤에 스자쿠가 도착했다.
“어서 와, 스자쿠.”
“어서오세요, 스자쿠 씨.”
“안녕, 를르슈. 어라, 나나리. 아직도 교복? 학교 늦게 끝났어?”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테이크아웃한 피자와 콜라를 내밀었다. 어이, 스자쿠. 나는 콜라를 주문한 적 없는데. 피자에는 콜라를 먹어야지! 나나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피자에는 콜라죠, 오라버니. 나나리의 건강에 콜라는 좋지 않아. 를르슈의 과보호는 나나리에게 좋지 않아!
티격태격하는 스자쿠와 를르슈의 모습에 나나리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피자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스자쿠의 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던 를르슈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오늘 특별한 거라도 해?”
나나리가 평소에 챙겨보는 것도 없고, 를르슈가 보는 뉴스도 지금 시간은 아니었다. 아무튼 나나리가 원하는대로 거실 테이블 위에 피자와 콜라, 컵을 내려놓은 스자쿠는 를르슈처럼 궁금한 듯 나나리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오라버니한테는 말씀 드렸는데, 학교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었거든요.”
“애쉬포드 학원에서?”
“네, 구 교사에서 찍은 그 드라마가 사실 오늘부터 방영한다고 해서, 좀 궁금해서 보고 싶어요.”
“무슨 느낌인지 알 거 같아. 우리집 소유의 신사도 가끔씩 영화 촬영장으로 쓰이는데, 화면으로 보면 뭔가 느낌이 다르달까.”
나나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했다. 맞아요, 익숙한 공간의 다른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설레는 기분이에요. 를르슈는 애쉬포드 학원의 구 교사를 떠올렸다. 아마 를르슈와 스자쿠가 다닐 때까지만 쓰이고 그 이후로 폐쇄된 그 건물에서의 추억…이라는 이름의 사건 사고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 건물이 폐쇄된 이유는 8할이 미레이 애쉬포드의 기행에 건물이 헐리기 일보 직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에서 촬영해도 되나? 나나리의 신변이 걱정되는군.
피자를 다들 한 입씩 먹었을 무렵에 드라마는 시작되었다. 제법 돈을 들인 것 같은 드라마는 시작부터 미친 설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입 안의 피자를 겨우 삼키면서 제발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망했으면 싶었다. 그래서 조기종영 해버려라. 그리고 나나리가 관심을 안 갖길 바랐다. 이런 사상 불건전한 드라마를 매주 보는 나나리라니, 믿을 수 없는 악몽이다.
“저게 진짜 독가스일까요?”
“독가스여서 1화 만에 다 죽으면 좋겠는데.”
“그럼 드라마가 진행이 안 되잖아, 를르슈….”
주인공은 죽을 뻔 했는데 친구 덕분에 살았다가 무슨 이상한 힘을 얻고 살았다. 를르슈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스자쿠는 진지한 얼굴로 보고 있고, 나나리 역시 잔인한 장면에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주인공을 끝까지 응원하고 있었다. 아무튼 주인공은 엄청 셌고 다 죽였다. 를르슈는 주인공의 패턴을 21가지 정도 생각했지만 죄다 정신 나간 행보였기 때문에 설마 저렇게 될 줄은 몰랐다.
피자를 먹던 손길들이 다 멈출 정도로 정신 나간 드라마 전개에 다들 넋을 놓았다. 를르슈가 전자레인지에 데워오겠다고 하니 스자쿠도 따라서 일어났다.
“…요즘 드라마 엄청나구나.”
“너, 정신을 못차리면서 보던데.”
“설정이 너무 파격적이라 정신이 안 들었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나나리의 정서에 안 좋아.”
전자레인지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피자가 다 데워졌다는 소리가 들렸다. 를르슈가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스자쿠가 를르슈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잠깐만, 를르슈. 를르슈가 고개를 돌려서 그 쪽을 쳐다보자, 입술에 뭔가가 닿았다. 스자쿠의 입술이었다. 쪽, 하고 다시 한 번 더 소리 내서 닿는 느낌에 를르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스자쿠 입술, 피자 맛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산뜻한 쿠루루기 스자쿠 맛입니다.”
“그래? 다시 한 번 먹어봐야겠는데, 그럼.”
가볍게 물고 늘어지는 키스를 하고 나서 거실로 돌아오면 드라마가 끝이 났었다. 다시 데워온 피자를 먹으면서 서로 감상을 말했다.
“주인공이 너무 불쌍해요. 어머니랑 여동생한테 테러가 있었는데, 황제인 아버지가 아무런 반응도 없어서 화가 난 나머지 주인공은 아버지의 나라에 반역을 하게 된 거래요.”
“테러리스트한테 화를 내야지 왜…?”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저 드라마는 논리적으로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아.”
“아직 1화 밖에 안 했으니까요. 앞으로 계속 보면 이야기가 풀리지 않을까요?”
“계속 볼거야?”
“네! 가면을 쓴 그 분이 나올 때까지요!”
가면을 쓴 그 놈은 다음 화에서 죽었으면. 그래서 나나리가 드라마에 흥미를 잃으면 더 좋겠군.
그러나 드라마는 대박을 쳤고 시청률은 파죽지세로 치고 오르더니 거의 국민드라마 수준에 올랐다. 를르슈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이 친족살인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이용해먹는 천하의 몹쓸놈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주변 캐릭터들은 주인공이 없으면 없다고 죽을 기세였다. 주인공이 무슨 일 있냐고 물으면 네가 없다고 대답하는 놈이 나오자 를르슈는 아연실색했다. 여자 세 명이 꼬여있는 주인공에게 남자까지 꼬이는 이 드라마, 과연 국민 정서에 타당한가?
“애쉬포드 학원의 지원자가 작년보다 세 배 늘었다는 사실! 빨리 축하하시라~”
학교 동문이자 직장 상사인 미레이 애쉬포드가 자축하는 소리에 를르슈는 힘없이 박수를 쳤다. 오늘은 금요일이지만 오랜만에 회식이었다. 워낙에 사이가 좋은 팀이기에 회식 자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미레이의 기상천외한 기행을 떠올리면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거 드라마 때문이죠?”
“맞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학교 매점에서 제로 가면도 팔 예정!”
“학교 매점이 무슨 기념품 가게도 아니고….”
이어지는 술자리. 이제 회식 중인지 동창회 중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의 이야기가 오갔다. 루루를 좋아했어! 그렇지만 루루는 스자쿠 군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니까! (아직 동정이기 때문에 여자랑도 할 수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를르슈는 입을 다물었다.) 만취한 셜리의 오열에 미레이가 위로를 해주겠다며 리발을 불렀다.
“네, 회장!”
“당장 를르슈 람페르지를 포박해라!”
“잡았습니다!”
“뭐하는 거야, 놔!”
“셜리, 루루쨩의 어디가 제일 만지고 싶어?”
“루루의….”
“그래.”
“만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늘 궁금했는데 루루의 속옷은 브리프 파인지 드로즈 파인지 트렁크 파인지 궁금했습니다!!”
미레이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이 났다. 술을 먹으면 힘이 빠지는 사람이 있고, 힘이 세지는 사람이 있다. 를르슈는 전자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힘이 빠진다. 그래서 지금 리발에게 묶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신세이다. 미레이의 눈이 저렇게 무서운데 도망칠 수 없다니. 차라리 기절을 시켜줘. 죽기엔 아직 꽃같은 나나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안 돼.
“미레이 애쉬포드가 명한다! 를르슈 람페르지는 바지를 벗어!”
“그거 성희롱입니다!”
“아, 기어스가 안 듣네. 직접 해치우는 수 밖에!”
망할 드라마, 대체 사람을 몇 명이나 망쳐놓는거냐. 술에 취한 사람들이 미친듯이 달려든다. 벨트는 안 돼, 안 된다고! 그러나 를르슈의 비명에 벨트는 간단하게 제거되었다. 지퍼가 내려가면 끝장이다. 를르슈의 위에 올라탄 리발은 적당히 포기하라고 말했다.
“뭘 적당히 포기해?!”
“를르슈의 속옷이 뭔지만 알면 회장이 기뻐할테니까….”
“그렇다고 친구를 팔아?!”
“앗, 회장! 종류는 모르겠지만 를르슈의 속옷은 블랙입니다!”
블랙?! 흑의 기사단이다! 역시 저 녀석은 제로다!
미친 전개로 흘러가는 술자리에 더 이상 어울릴 생각은 없다. 를르슈는 리발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를르슈는 코트를 챙겨입고 나섰다. 를르슈—, 가지마아—. 다들 칭얼거리며 달라붙었지만 를르슈는 완고했다.
술집을 나오고 길거리를 걸으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정한 목소리의 스자쿠는 벌써 회식이 끝났냐고 물었다. 스자쿠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방금 전 술자리에서 있었던 망측한 일들에 머리가 굳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면 스자쿠는 위로해줄까.
“스자쿠, 벨트 잃어버렸어….”
‘응? 바지 벨트?’
“난 싫다고 했는데….”
술기운이 마구마구 올라와서 를르슈는 울기 시작했다. 스자쿠가 겨우 달래면서 위치를 물어서 찾아왔다. 고등학생 때는 스자쿠와 를르슈 둘이서 미레이를 막을 수 있었지만 를르슈 혼자서 미레이를 막는건 역부족이다. 스자쿠의 부재에 대한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를르슈. 를르슈는 그 간의 속상함에 대해서 눈물이 터졌다.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속옷이 궁금하대서. (누가?!) 누구였지…. 그래서 막 내 벨트를 벗기는거야. (뭐?!) 나는, 나는, 나는 싫다고 했어, 나는 벨트, 스자쿠가 선물해준 건데, 근데, 내 속옷이 블랙이라고, 나보고 제로라는 거야. 난 를르슈 람페르지인데…. 나나리의 오빠고, 근데, 나보고 제로라고 하면서, 흑의 기사단….
스자쿠의 품에 쓰러져 울면서 를르슈는 중얼거렸다.
“코드기어스 망했으면….”
#2
금요일은 그 망할 드라마를 보고 나서 조금 늦은 저녁을 같이 먹는다. 저녁 식사 내내 드라마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제발 친구가 주인공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주인공은 혼자서 그렇게 고군분투 하는데…! 나나리는 안타까운 주인공을 응원한다. 튀김을 한 입 베어물은 스자쿠는 그래도 안된다고 말한다. 서로 소속이 다르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면 일방적으로 복종시키는 방법 말고는 소용 없지 않을까? 근데 그렇게 되면 서로에게 파국이겠다. 스자쿠의 말에 나나리는 의기소침해진다. 맞아요, 그러면 더 관계가 나빠지겠죠….
를르슈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한 마디도 보탤 수가 없다. 한 번 말을 꺼냈다가는 끝도 없이 말이 나올 거 같으니까. 그냥 싱긋 웃으면서 제 몫의 밥을 빠르게 비우는 수 밖에 없었다.
“벌써 다 먹었어?”
“아, 응.”
“설거지 내가 할게. 그냥 싱크대에 넣어둬.”
“그럼 후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나나리가 후식까지 준비하면 나는 뭐해?”
“음…를르슈는 거실에서 휴식?”
“나만 따돌리는거냐?”
“그럴리가!”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두고 거실로 향하는 를르슈를 스자쿠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는게 느껴졌다. 장난이었는데 또 이런 말에 신경쓰지. 스자쿠의 시선에 를르슈는 싱긋 웃어주었다. 나나리한테도 말 한 마디를 보탰다.
“나나리, 나는 가볍게 녹차로 부탁할게.”
“네, 오라버니!”
후식은 과일이 나올까 아니면 어제 선물 받은 양갱? 아마 내가 녹차를 부탁했으니 양갱이 나올 거 같기도 한데. 그렇지만 저녁 먹은 후인데 양갱? 나나리의 선택이 뭐가 될 지 궁금해지는데….
를르슈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은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이후로는 보기도 싫어졌다. 승승장구하는 그 드라마의 배우들이 온갖 곳에 얼굴을 들이밀며 방송에 나오기 때문에 시도때도 없이 를르슈는 공격 당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학교 건물이 명물이라는 애쉬포드 학원에 대한 방송이 나올 때에도 미레이 애쉬포드와의 날카로운 추억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휴대폰으로 자주 들어가는 신문사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벌써 저녁 기사가 올라올 때인가. ‘코드기어스 시청률 신기록 경신’ 이런 건 줘도 안 읽는다. ‘코드기어스 새로운 전개, 제로의 선택은?!’ 실존 인물도 아닌데 왜 이런 걸 기사로 만드는 건지. ‘애쉬포드 학원에서 실제로 초대형 피자 만들기 세계 신기록 도전한 적 있어…’ 이런 건 누가 제보하는거냐! 그거 준비하느라고 죽을 맛이었는데!
[미모의 마리안느PD ‘딸이 두 명 있는데 둘 다 훌륭한 미인’]
“이 사람은…지금 무슨 말을….”
를르슈는 그 기사를 클릭했다. 현제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PD인 마리안느 람페르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시사국 말고도 드라마, 예능 쪽에도 관심이 많아서 다양한 행보가 기대되는 C사의 인재라는 이야기였다.
‘아름다운 얼굴로 화제가 되지 않았냐는 인터뷰어의 말에 마리안느PD는 자기보다 자신의 두 딸이 더 아름답고, 특히 첫째 딸의 외모가 경국지색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식 바보 같았냐고 되묻는 마리안느PD의 모습은 여느 평범한 부모의 것과 같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여자인 적도 없었으며 늘 자랑스러운 나나리의 오빠로써 평생을 살아온 를르슈에게 마리안느의 인터뷰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요즘 들어 매주 금요일은 충격의 연속이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으로 휴대폰 탭을 다 닫아버리고 화면까지 꺼버렸다.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있으면 테이블 앞에 뭔가가 놓였다. 스자쿠의 커다란 손이 눈앞을 몇번 오갔다.
“를르슈?”
“오라버니?”
“…아. 후식인가.”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혹시 체했어? 방금 전에 급하게 먹었나?”
“아냐, 그냥. 별 거 없어.”
후식은 양갱이었다. 녹차와 양갱은 좋은 조합이었다. 그래도 배가 부른 탓에 한 입 먹고 말아버린 를르슈와 다르게 스자쿠와 나나리는 남은 양갱을 다 먹었다. 너무 먹어서 살찌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나나리에게 를르슈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나리의 활동량이라면 더 먹어도 돼. 그리고 살이 쪄도 귀여움이 늘어날 뿐.”
“오라버니 눈에만 귀여워도 소용 없어요. 제 자기만족을 위해서라구요.”
“하하하, 이제 를르슈의 멘트도 안 통하네.”
“오라버니는 만약 제가 눈이 멀고 다리를 못 쓰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드라마 이야기인가. 나나리는 부쩍 그 드라마 속의 주인공 남매와 자기들을 비교하며 물어보는 일이 늘었다. 를르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말했다.
“좋은 의사를 알아봐야지. 그리고 빨리 다리도 낫게 하고 눈도 뜨게 하고.”
“복수는요?!”
“뭐, 테러리스트를 소탕하려고 하겠지? 나나리를 그렇게 만들고 아마 어머니도 죽인 그놈들을 살려둘 수는 없지. 아버지가 안 도와줘도 내가 살인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복수해.”
“황위 계승권이나 그런거는요?!”
“그걸 포기하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아? 심지어 나나리는 눈도 안 보이고 다리도 못 쓰는 상황이라며. 차라리 유폐되듯이 황궁 안에 갇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좀 답답하긴 하더라도 궁이니까 다른 곳보단 낫겠지?”
“궁 안에서 암살 당할 수도 있잖아요!”
“죽어도 나나리랑 같이 죽을 수 있게 나나리랑 계속 같이 있을게.”
“…….”
“…….”
마지막 한 조각의 양갱을 먹은 스자쿠가 결론을 내렸다.
“를르슈가 주인공이면 ‘코드 기어스’ 시작도 못하겠다….”
나나리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철저하게 방어 당한 느낌이에요. 를르슈는 그런 상황은 가정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나는 세계를 만들거나 부수고 싶지도 않아.”
“를르슈는 의외로 야망이 없지….”
“그냥 일상의 확실한 행복에 충실할 뿐이다. ‘나는 세계를 부수고, 세계를 창조한다’? 이런 말보다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말이 있지!”
“뭔데?”
“나는 정기적금을 들고, 만기 되면 깬다! 나는 딱 이 수준이야. 더 이상의 큰 비일상적인 이벤트 같은 건…고등학생도 아니고 바라지도 않아.”
비일상적인 이벤트라는 말에 순간 떠오른 미레이 애쉬포드 얼굴에 스자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를르슈 말에 동의. 나나리는 아직 고등학생이라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면 뭔가, 좀, 안정적인게 낫지. 나나리는 자기가 아직 어리니까 그런 말을 하는거냐며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아니, 음, 그냥 초대형 거대 피자 만들기 이런 건 안 하고 싶은거야. 그래, 이런 이벤트는 고등학생 때도 사절이었어. 어쩌다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코드 기어스’ 같이 파격적인 설정의 드라마 같은 걸 보고 있으면 재미있긴 해. 다크 히어로물이니까 흥미롭기도 하고.”
“아, 두 분의 고등학생 시절 같은 이벤트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애쉬포드 학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는 그 추억들에 대해서 겨우 이야기를 하고, 나나리는 상식적으로 가능한지 그 여부를 물어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밤이 늦었으니까 이제 자는 게 좋을거야. 나나리 먼저 씻어. 를르슈의 말에 나나리가 귀찮다고 소파에서 늘어져 있었다. 고개를 젖히느라 드러난 하얀 이마에 를르슈가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입술에 나나리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오라버니가 씻겨주세요.”
“고등학생이라서 이제 아기 취급하지 말라며?”
“나나리는 평생 오라버니의 아기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나는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 나나리가 되면 좋겠는데.”
“나나리는 오라버니가 씻겨주고 잠옷도 갈아입혀주고 자장가도 불러주고 재워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제멋대로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주는데도?”
“…….”
“3천엔 더 저렴한 선물 줄지도 몰라.”
“오라버니는 비겁합니다!”
“혼자 씻고 잘 준비하는 나나리는 기특해~”
속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는 나나리를 확인한 를르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다 같이 먹었던 후식의 설거지를 하고 있는 스자쿠가 마지막 찻잔을 정리하고 있었다.
“스자쿠가 다 해서 할 게 없네.”
“저녁 식사는 를르슈가 다 준비하는데 이 정도 쯤이야.”
“여기서 자고 갈래?”
“…나나리 있는데?”
“섹스 말고 그냥 잠만 자고 가는 건 힘들어? 네가 10대 청소년도 아니고 조절 못할 정도는 아니잖아.”
어깨를 밀어내는 를르슈의 손길에 스자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를르슈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체향을 맡고 있으면 기분이 간질간질해졌다.
“내일 호텔에서 저녁 먹을래, 를르슈?”
“…저녁만?”
“A코스 옵션으로 쿠루루기 스자쿠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좋아, 옵션 선택한다. 추가금은 다음날 체크아웃할 때 지불할게.”
“감사합니다, 고객님.”
스자쿠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에 눈을 감아 그 입술의 감촉을 느꼈다. 입술을 문지르고 혀로 점막을 핥는 느낌이 늘 부끄럽지만 기분이 좋았다. 스자쿠의 뒷머리를 끌어안으며 안으로 더 깊게 끌어당기고 있는 중에 스자쿠가 고개를 떼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왜? 시선으로 물어보고 있으면 열에 들뜬 스자쿠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방금 전보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는 키스 끝에 나온 말은 귀여웠다.
“더 하면 조절 못해, 나 아직도 어린가봐.”
“뭐야, 너까지?”
“너까지라니, 나 말고 또 이러는 사람 있어?”
“나나리. 요즘 들어서 어리광이 늘었어.”
방금 전에도 목욕 귀찮다고 한참을 실랑이를 하는데, 나나리는 평생 오라버니의 아기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귀여운 거 있지. 를르슈는 정말 귀여워서 견딜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스자쿠는 갑자기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연인의 여동생이고, 워낙에 우애가 깊은건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도…아무래도 평생 를르슈의….”
“너도 평생 나의 아기냐?”
“그러고 싶다고 하면 싫어?”
“당연히 싫지.”
를르슈는 스자쿠의 입술에 다시 제 입술을 갖다댔다. 드물게 를르슈 쪽에서 혀가 들어온다. 스자쿠의 안을 샅샅이 맛보는 감각에 발끝이 찌릿거릴 정도였다. 를르슈의 비음이 들리면서 울리는 낮은 신음에 방금 전보다 더 세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 스자쿠. 새어 나오는 호흡 사이로 들리는 이름에 스자쿠는 다시 한 번 그 입술을 빨아 삼켰다. 더 하고 싶다. 더 하고 싶지만, 안 된다. 이성이 빠르게 스자쿠의 손발을 잡아채려고 하고 있지만 스자쿠는 괜히 아랫입술만 깨물게 되었다. 그런 스자쿠를 다잡은 것이 를르슈의 말이었다.
“나는 아기랑은 이런 키스 안하니까.”
“…!”
“키스 이상의 일도 안 한다. 그런데도 내 아기가 되고 싶어?”
“아뇨, 연인하겠습니다.”
“그래, 너는 평생 내 연인이야.”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스자쿠의 말투가 괜히 비장해서 를르슈는 웃음이 나왔다. 둘 다 식탁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으면 목욕을 마친 나나리가 나왔다. 머리 말려야지. 를르슈의 말에 나나리는 방금 전의 말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오라버니가 말려주세요. 나나리는 오라버니가 말려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정도는 기꺼이. 헤어 드라이기가 있는 곳으로 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다음은 스자쿠야. 얼른 씻어. 속옷은 지난번에 두고 간 거 세탁해서 내 속옷 서랍 안에 있으니까 찾아서 쓰면 돼.”
“아, 그때 안 찾아갔구나. 내가 먼저 씻어도 돼?”
“나나리 자장가 불러주고 재우려면 시간 오래걸리니까 네가 먼저 씻는게 더 나아.”
“진짜로 불러주시나요?”
“나나리, 악몽을 꾸고 싶다면 말하렴. 내가 경쾌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캐롤 정도 밖에 안 된다.”
“자장가로 캐롤은 그렇죠….”
스자쿠는 씻으러 들어갔고, 나나리는 를르슈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며 드라이를 마쳤다. 몸이 식기 전에 빨리 침대에 들어가야지. 를르슈가 침대에 앉히는 것에 나나리는 잠깐 휴대폰을 확인한다며 메시지를 확인하는 듯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사준 휴대폰이었지만 가끔씩 나나리가 멀어지는 것 같아서 섭섭한 느낌이 드는 를르슈였다.
“내일부터 학교 매점에서 제로 가면을 판대요!”
“아, 그게 내일부터야?”
“네. 근데 한정 수량이라 빨리 가지 않으면 구할 수 없다는데…. 친구가 아침 일찍 가서 줄을 서겠다고 하는데 1인 1개일 확률이 높아서 제 것까지 못 구할 수도 있대요. 어떡하죠?”
“…내가 미레이 씨한테 부탁해볼까?”
“그런 부정한 방법으로 손에 넣은 제로 가면은…제로의 의지에 반하는 거예요! 저는 순수하게 제로의 뜻을 따르고 싶어요, 오라버니!”
아니, 무슨 드라마 캐릭터의 뜻을 따르려고 해.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를르슈는 정신 좀 차려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여동생이 빠져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역시…저도 내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는 수 밖에 없겠어요.”
“뭐?”
고작 캐릭터 가면 얻겠다고 학교 쉬는 날에 학교를 가?
“일찍 자야겠어요. 오라버니, 자장가는 내일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잽싸게 를르슈의 뺨에 입을 맞추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눈을 감은 나나리는 불까지 꺼달라며 부탁했다. 원하는대로 불까지 꺼주고 문도 닫고 나오는데 마음이 시렸다. 목욕을 마친 스자쿠가 촉촉한 얼굴로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나리한테 자장가는 끝났어?”
“…스자쿠.”
“응?”
덥썩 안기는 를르슈를 우선 마주 안아주기는 했지만 스자쿠로써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를르슈가 씻어야 하지 않아? 내가 씻겨줄까? 농담을 해보지만 어딘가 멍한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벗겨줘. 씻겨줘. 옷 입혀줘. 재워줘. 자장가. 굿 나잇 키스. 동화책도 읽어줘.”
“…저기, 를르슈 람페르지 씨?”
“제로…….”
스자쿠의 품에서 벌떡 일어난 를르슈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제로가 죽었으면 좋겠다. 정말, 그 미친 테러리스트를 숭배하는 이 사회는 지금 미쳤어.”
“…드라마에 열광하는 현대 사회라고 말해줄래?”
“너까지 제로를 옹호하는거냐!”
“나나리가 ‘코드 기어스’ 때문에 내일 뭐하러 가는구나. 그래서 기분이 나빠졌어?”
“다 알아차리는 너도 기분 나빠.”
“를르슈를 사랑하니까 다 아는거지. 얼른 씻고 와. 속옷은 내가 내 꺼 가져오는 김에 미리 갖다뒀어. 나는 를르슈 없으면 잠 못 자니까 빨리 씻고 와야 돼?”
욕실에 밀어넣어진 를르슈는 선반에 놓인 제 속옷을 확인했다. 철저한 스자쿠 자식. 보통 토요일은 나나리와 스자쿠, 양손의 꽃을 낀 채로 행복을 만끽하며 쇼핑을 한다거나 전시회에 가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를르슈의 일정이었다.
—코드 기어스…제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그리고 그거에 미친 이 사회도 제정신이 아니야. 나나리,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씻고 나니까 더 개운해졌지?”
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침실로 들어가면 침대에서 스자쿠가 기다리고 있었다. 를르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워지기 전에 빨리 와. 스자쿠가 이불을 들추며 빨리 제 품으로 오라고 말했지만 를르슈는 잠깐만 휴대폰을 보겠다고 했다.
“너무하네. 스자쿠는 상처 받았어. 사랑보다 일이 먼저인거지.”
“너도 미레이 애쉬포드 씨와 일을 함께 하면 이게 습관이 될 텐데. 어떻게, 우리 회사에 올 생각은 없나? 나름 스카우트 제의인데.”
“아, 회장이라면 사절하겠습니다. 를르슈, 파이팅!”
“매번 이런 식으로 유능한 인재를 놓치는 슬픔을 네가 알까….”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 중에 시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메시지가 한 건. 어지간해서는 연락하지 않는 그 사람이 왜? 이 메시지를 누르면 수신 확인했다는 이력이 뜰 거고, 그러면 또 다시 휘둘리게 된다. 하지만 메시지를 읽지 않았을 때의 그 후폭풍은 더 무섭다.
[어머니: 내일 오후 2시에 차 한 잔 어때?]
[어머니: K거리 A카페가 룸으로 되어있고 케이크도 맛있고 샌드위치나 브리또도 괜찮더라고.]
[어머니: 그럼 거기가 좋겠지?]
[어머니: 커피도 홍차도 나쁘지 않은 곳이야!]
[어머니: 그릇도 귀엽고 예뻐]
[어머니: 를르슈도 나나리도 오랜만에 거기서 보자!]
여섯 건의 메시지가 단 1분 사이에 온 것이었다. 답장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를르슈는 가기로 된 것으로 결정이 난 것이다. 를르슈는 유효할 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답장했다.
[갑자기 약속을 잡으시면 어떡해요]
[나나리는 내일 약속이 있어서 못 가요]
[저도 약속이 있고요]
애초에 주말이 제일 바쁠 사람 아닌가? 그러나 답장은 쏜살같이 왔다.
[어머니: 네가 약속이라고 해봤자 스자쿠 군이랑 약속?]
[어머니: 나나리는 친구랑 나가는 것 같으니]
[어머니: 그걸 깨고 나랑 만나자고 하는 건 가엾으니까]
[어머니: 네가 스자쿠 군이랑 나랑 만나자꾸나.]
[어머니: 스자쿠 군도 안 본지 제법 됐네.]
[어머니: 편집 들어가봐야되서 이제 그만. 내일 보자.]
방송국이랑 오가는 거 불편하다고 멀쩡한 집 두고 오피스텔 얻어나가 사는 어머니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제멋대로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 횡포다. 를르슈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스자쿠 테라피가 시급할 때였다. 침대에 꾸물꾸물 기어들어가 스자쿠 품으로 파고들었다.
“회장이었어?”
“아니, 그보다 더….”
“응?”
“어머니가….”
“마리안느 씨? 요새 바쁘신 일이 끝났나?”
를르슈는 끙끙거리며 스자쿠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부볐다. 같은 바디 워시를 썼을 텐데도 더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체향에 나빴던 기분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스자쿠랑 꼭 붙어서 끌어안고 있으면 서로의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까지 다 느껴졌다. 예전엔 그것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안심이 된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의 스트레스에서 힐링이 될 정도로.
“내일 같이 차 한 잔 하자는데….”
“오랜만에 보고 싶으신가보네.”
“너도 오래.”
“나도?”
“나나리가 내일 나갈 일이 있어서 못 나간다고 했고, 나도 너랑 나갈 거라고 안 나갈 거라고 하니까, 너랑 나라도 보고 싶다고 해서….”
“나 꿩 대신 닭이라도 된 그런 건가?”
“너를 그렇게 취급하는 우리 어머니가 나쁜거지….”
아, 가기 싫다. 를르슈의 투정에 스자쿠는 부드러운 그의 머리를 쓸어주며 기분 풀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자유분방한 것은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를르슈에게 들을 바에 따르면 이러하다.
를르슈, 나나리, 엄마는 이혼할거야. 아빠가 하는 일이 재미있긴 하지만 엄마가 일일이 다 따라다니면서 예쁜 척 하는 것도 지겨워서 못 해먹겠거든. 아빠는 너네랑 같이 살고 싶어하는 거 같긴 한데, 그런데 지금까지 결혼 경력이 화려하니까 아빠가 같아도 엄마가 다른 애들이 너네를 괴롭힐 걸 생각하면 엄마는 걱정이 되서 너네랑 같이 살 생각이야. 너네 아빠 말로는 지금까지 연애 결혼한 건 나밖에 없다고 하면서 나한테 하는 짓이 저모양이니 결혼은 정말 못할 짓이야. 그래도 를르슈와 나나리라는 보물을 얻었으니 아주 나쁜 건 아닐 지도 몰라.
를르슈! 엄마는 일을 시작할거야. 미안하지만 나나리를 봐줄 수 있을까? 나나리, 엄마가 오래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해.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 너희를 사랑해. 그래도 집에 매일 매일 들어올 수 있게 노력할게.
를르슈가 고등학생이 되니까 편하네. 정말 세상 어떤 여자에게도 지지 않을 훌륭한 요조숙녀가 다 되어서 엄마는 감개무량…. 미레이가 초대형 거대 피자를 만든다고? 우리 촬영팀 보낼게. 그런 재미있는 이벤트는 보도하지 않으면 손해지!
성인이 됐으니까 이제 집안의 보호자는 를르슈가 되어도 되잖아? 방송국에서 밤샘하는 일도 잦고 집까지 오는 길도 멀어서 사고 날까봐 걱정하는 일도 줄어들고 더 좋지 않아? 엄마한테 애인? 아, 요새 샤를을 다시 만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친구야. 여전히 힘이 좋아서 나나리 동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아, 이런 이야기보다, 를르슈, 너도 적당히 애인도 사귀고! 언제까지 나나리 시중만 들다가는 안된다구! 그 같이 다닌다는 스자쿠랑 애인이라도 되면 엄마 걱정이 덜 할거라는 생각은 안하니?!
“…아침?”
엄청난 꿈을 꾸고 나서 를르슈가 한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옆자리가 허전한 걸 보니까 벌써 스자쿠는 일어난 것 같았다. 커튼도 걷어놓은 탓에 들이치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햇살의 양을 보니 아침이라고 하기보다는 늦은 오전 같았다.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를르슈로써는 늦잠이었다.
사나운 꿈자리와 다르게 몸은 개운했다. 스자쿠랑 같이 자서 그런가. 침실 문을 열고 나오면 스자쿠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서 몰래 뒤쪽으로 가서 스자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스자쿠는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일어났어?”
“…왜 안 놀라?”
“집 안에 있을 사람이 를르슈 밖에 없는데 놀랄 게 뭐가 있어?”
“나나리는?”
“제로 가면 때문에 가봐야한다고 나가봤어. 나간 김에 친구랑 점심도 먹고 자고 올 거라는데.”
“그 놈의 제로. 내가 구해준다고 해도 싫다고 그랬어….”
시무룩해진 를르슈의 뺨에 입을 맞춘 스자쿠는 이제 늦은 아침을 먹자고 그랬다. 어느새 스자쿠의 옆자리에 앉은 를르슈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벌써 아침인지 점심인지…. 내가 만들어줄까?”
“아니, 나가서 먹자.”
“나가서?”
“응, 그리고 잠깐 내 집에도 들리고.”
“왜? 어제 옷에 뭐 묻었어?”
“아니, 마리안느 씨 만나는데 좀 차려입고 싶어서.”
를르슈네 어머니니까, 기합 넣어야지! 주먹까지 쥐어보이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아줌마 만나는데 옷 갈아입으러?”
“아줌마라니, 마리안느 씨잖아.”
“내가 오늘 무슨 꿈을 꿨는지…. 됐어, 그래, 네가 원하는대로 해.”
“아, 를르슈 옷도 내가 골라주고 싶어!”
“왜?”
“커플룩…하고 싶어서? 좀 부끄럽나?”
괜히 뺨을 긁적이는 스자쿠가 귀여워서 를르슈는 네 맘대로 하라고 말해버렸다. 가볍게 아침 샤워를 하고 나면 스자쿠가 벌써 드레스룸에서 옷을 골라왔다. 실버의 수트 차림. 일하는 날이랑 뭐가 다른거지. 셔츠도 평범한 그레이톤. 그런 와중에 기습 공격을 당했다.
에메랄드의 커프스, 넥타이핀 그리고 녹색의 넥타이.
“나도 집에 가면 커프스랑 넥타이핀, 넥타이 맞춰서 할게!”
“너…진짜 안 부끄러워?”
“사실 조금 부끄러워서 한 번도 시도한 적 없었는데, 오늘 를르슈가 내 맘대로 해보라며.”
“…….”
그래, 이젠 내 입이 방정이다.
스자쿠도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어제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차를 끌고 온 스자쿠는 자기 집까지 빠르게 운전했다.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을 각오로 입사한 스자쿠는 그 회사 근처에서 맨션을 얻어 살고 있다. 생활력은 거의 바닥 수준으로 청소기를 3일에 한 번 돌리는 것이 고작이라고 할 정도이지만, 사실은 그 정도로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일이 바쁘다.
오랜만에 들린 스자쿠의 집이 생각보다 깨끗한 모양에 를르슈는 놀랐다.
“아, 엊그제 처음으로 하우스 헬퍼 불러봤거든. 편하더라. 빨래까지 다 해주고. 옷 갈아입고 올게.”
“…….”
“머리도 좀 만지고 그럴까? 어차피 우리 저녁에 호텔 가니까 멋 정도는 내도 되잖아?”
“어머니 앞에서 오늘 호텔 간다는 소리는 안 할거지? 부탁이니까 하지 말아줘.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는 스자쿠를 보고 를르슈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검은 가죽 소파는 를르슈가 골라준 것이었다. 혈기 넘쳤던 시절에 멀쩡한 침대를 두고 여기서…. 를르슈는 머리를 내저으며 번뇌를 털어냈다.
깔끔한 집안은 보기는 좋았지만 왜인지 를르슈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스자쿠의 집에 들어올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필요에 의하면 누구든 들어올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기분 상할 일인가. 어른스럽지 못하군. 괜히 소파 끝을 쓸어보고 있으면 옷을 갈아입은 스자쿠가 나타났다.
를르슈와 비슷한 실버의 자켓, 그레이톤의 셔츠. 차이점은 누가 봐도 를르슈를 연상시키는 자수정의 커프스와 넥타이 핀, 보라색 넥타이다.
“어때?”
머리도 한쪽으로 넘길까? 곱슬거리는 갈색머리는 손질하는 대로 모양이 나서 또 그 모양이 잡히는 것에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별로야?”
소파에서 일어난 를르슈는 스자쿠의 넘겨진 머리를 다시 만져서 고쳐주었다. 넘기면 어른스러운 모습이 보여서 또 설레긴 한데 고작 내 어머니 만나자고 설레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으니까.
“평소대로가 좋아. 그리고 옷도 좋아. 커플룩, 나쁘지 않군.”
“다행이다.”
“잘생겼군, 나의 쿠루루기 스자쿠.”
입술 끝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면 스자쿠가 환하게 웃었다. 마리안느 씨도 좋아해주면 좋겠다. 키스를 해줬는데 왜 그런 대답을 들어야하는지. 를르슈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현관으로 나섰다. 구두를 먼저 신고 나가려는데, 스자쿠와 함께 그의 깔끔한 집안을 한 번 눈에 담아보았다. 역시. 기분 나쁘다.
“스자쿠.”
“응?”
“내가 쓸데없이 질투하는 거일 수도 있겠지만….”
“응.”
“하우스 헬퍼든 뭐든 너의 집에는 나만 들였으면 좋겠어. 청소할 시간이 없으면 내가 하러 올 테니까 그걸로 견뎌본다거나….”
갑작스럽게 스자쿠가 끌어안더니 숨도 못쉴 정도로 압박을 해오는 것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등을 쥐어 뜯었다. 야, 죽어, 죽는다고, 숨막혀! 그 와중에 수트에 주름이 갈까봐 살살 잡았다는 것도 웃겼다. 겨우 떨어진 스자쿠는 감격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랬다고 설명했다. 생각해보니 꽤 부끄러운 소리를 한 것 같아서 를르슈는 괜히 혀를 찼다.
점심을 먹으려고 하다가 마리안느가 말한 카페까지 시간이 또 제법 걸릴 것 같아서 그냥 안 먹고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기에는 번화가라 주차할 곳이 없어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전철을 타고 움직이기에는 이 커플룩이 너무 부끄러워서 를르슈의 수치심이 견뎌내지 못했다. 스자쿠가 ‘그래도 이거 사는 순간에 완전 를르슈라는 생각에 샀다구!’라고 말해서 더 부끄러워졌다.
“마리안느 씨!”
“스자쿠 군, 여전히 건강하구나. 그리고 를르슈….”
어머니가 자식 이름을 부르는 것 뿐인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것인지. 를르슈는 애써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여전히 예쁘구나. 어디서 이런 게 나왔을까?”
“…….”
“를르슈는 마리안느 씨를 닮아서 미인이니까요!”
“청출어람 그 자체지 않니? 그러고보니 오늘 둘 다 옷이, 흠, 커플룩이 귀엽구나, 그렇게 서로 어필하는 중이야?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서로 불안할 수 밖에 없겠구나. 를르슈는 미인이고 스자쿠 군은 미남이니.”
“여전히 아무말을 하시네요, 어머니.”
를르슈는 더 이상의 헛소리에 반격하기 위해 직원을 불러 메뉴를 주문했다. 가토 쇼콜라, 마들렌, 베이글, 샌드위치, 스자쿠는 오렌지 주스가 편하겠지, 그리고 저는 밀크티, 어머니는 카페오레로. 음료는 또 다시 주문을 할테니 메뉴판은 여기서 다시 보겠습니다. 오더를 마치고 나서 다시 조용해진 테이블 위로 마리안느가 싱글벙글 웃으며 턱을 괴었다.
“엄청 먹는구나.”
“저희 아직 아침도 안 먹었거든요.”
“아침을 거를 정도로 사랑하느라 바쁘니? 청춘이구나.”
“어머니 꿈을 꿔서 악몽 때문에 꿈자리 뒤숭숭해서 늦게 일어났습니다!”
“를르슈도 참, 엄마 꿈을 꿀 나이는 지났잖니. 이제 독립해서 자기 가정을 꾸릴 나이라고? 아, 그렇지만 넌 나나리가 결혼하기 전까지 자기 결혼은 미룰 느낌이지.”
“마리안느 씨는 를르슈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이래보여도 엄마인걸.”
요새 마리안느 씨 일은 어떤가요? 스자쿠가 정상적인 화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마리안느는 별로 재미없을 거야, 하고 운을 뗐다.
“이제 시사보도 쪽에서는 그만두려고. 계속 파고 있다보면 샤를이 연루된 게 너무 많아서, 그렇게 되면 애들 아빠를 나쁜놈으로 만드는…그런 건 또 기분이 나빠져서 그만두기로 했어. 너무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만 두는거라 방송국 쪽에서는 좀 놀라는 것 같지만 뭐, 어쩌겠어, 이혼했어도 샤를은 를르슈와 나나리의 아빠인걸.”
“그렇군요. 마리안느 씨가 만드는 시사보도 프로그램은 방송하고 난 다음날이면 저희 회사에서도 엄청 말이 많이 나와요. 가끔씩은 내부 비리 고발에도 도움이 되고 그랬는데….”
“그랬어? 스자쿠 군의 회사에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그래서 이번에 드라마국 쪽으로 옮길 것 같은데.”
“드라마국이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를르슈는 마리안느의 선택이 신기할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조금 밉다는 감정은 있었다. 왜냐면, 이제껏 아버지의 부인들은 귀족이니 대부호의 딸이었는데 마리안느는 정말 출신은 평범하고 배경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연애결혼이었기에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여자보다도 사랑했고, 그 자식인 를르슈와 나나리를 아껴주었다. 그래서 엄청난 질투와 시기에 시달리는 경우가 잦았다. 나나리가 다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진짜 사랑한다면 이런 일이 아예 없게 지켜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아버지를 미워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혼을 반기기도 했지만….
“‘코드 기어스’ 두 번째 시리즈 PD로 들어갈 거 같아!”
그 망할 드라마가 지금 온 가족을 망쳐놓고 있다.
앞에서 열심히 가정사정을 말했던 것이 의미가 없어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스자쿠는 우와, 하며 순수하게 놀랐다.
“곧 완결이 날 것 같긴 하던데 두 번째 시리즈가 만들어지는군요.”
“아, 둘 다 그 드라마 보고 있어? 왠지 그거 를르슈 취향은 아닌데.”
“나나리가 좋아해서 보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이번에 엄청 기합 넣고 만든 드라마인데 대박이 나서 다행이지.”
망했으면 더 다행인데. 어느새 점원이 다가와서 주문했던 모든 음식들과 음료들을 내려놓았다. 스자쿠 앞쪽에 샌드위치를, 마리안느 쪽에 가토 쇼콜라, 제 앞에는 베이글을 두었다. 음료도 각자 옆에 두고서 점원은 사라졌다. 룸 안에 따로 마련된 공간이라 느긋하게 이야기 해도 좋은 분위기라 편했다. 마리안느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를르슈는 내가 드라마PD가 된다는 게 별로 달가워보이지 않는 거 같은데?”
“잘 모르는 분야고, 또 어머니 일이니까요.”
“남의 일이니까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게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이유가 뭐니?”
“냉정하지 않아요!”
를르슈는 손에 있던 베이글을 조각내서 크림치즈를 적당껏 발라서 옆자리의 스자쿠를 불렀다. 스자쿠! 응?! 놀란 스자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것에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을 내밀었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 스자쿠가 그것을 씹어 삼켰다. 주스 마셔. 응! 빨대로 주스를 마시고 있는 스자쿠를 확인하고 다시 마리안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마리안느는 또 다시 싱글벙글이었다.
“그래, 그래. 를르슈도 자기 일이 급할 때이지. 내가 괜히 신경 써달라고 조르고 있었네. 미안해, 엄마가 되어서 오히려 어리광을 부리다니.”
“…뭘 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냐, 그냥 스자쿠 군이랑 를르슈랑 사이 좋은 거 보니까 기분이 좋아서.”
“저는 드라마를 원래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서 그냥 그렇습니다. 나나리한테 말하면 기뻐할 거예요. 원하시는 반응도 얻으실 수 있구요.”
“자식들이 무슨 시청자니, 원하는 반응?”
“…….”
“그래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 나나리는 가족보다 친구랑 노는 게 재미있어질 정도로 컸구나, 생각하면 사실 좀 섭섭하네.”
“나나리도 가족을 아껴요. 어머니도 엄청 자랑스러워하고.”
이번 베이글 조각은 제 입으로 밀어넣은 를르슈는 우물우물 씹어먹으며 한숨을 쉬었다. 괜한 오해를 사는 일도 하고 싶지 않고, 괜한 오해도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다음 베이글에 크림 치즈를 바르고 있는데 마리안느가 말을 꺼냈다.
“이제와서 하는 말로 하기엔 웃기지만…샤를한테 가고 싶은 마음은 없니?”
정말로, 이제와서 하는 말로 하기엔 웃기는 말이었다. 이제 성인이 된지 한참이고, 아버지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빈곤하지도 않다.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너네가 어렸고, 나 나름대로의 지킨다는 방법으로 그랬지만 지금은 샤를의 연줄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샤를도 를르슈, 너의 소식을 들을 때면 그리워하니까.”
“…….”
“다른 형제자매들이랑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더라도, 코넬리아나 유페미아랑은 사이 좋았잖아? 요새도 자주 연락하지?”
“…그렇긴 하죠.”
“슈나이젤이랑도 일 관련으로도 자주 만난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아이도 영특하니까 샤를한테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를르슈 너도 지지 않을 카드가 될 거야. 출신이나 배경 이런 걸 떠나서 우리는 실력이 되잖니?”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먹는 스자쿠의 입이 겨우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도 충격을 받은 게 틀림 없었다. 마리안느는 그런 걸 신경쓰지 않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애쉬포드 쪽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 미레이가 대표인 자회사라고…. 아직은 작지만 네가 있으니 엄청난 가능성이 있겠지. 그렇지만 샤를의 연줄이 닿으면 지금보다 덜 힘들이고 해낼 수 있어.”
“…힘들어하는 게 걱정되서 그런 말을 하시는건가요?”
“너에게 편한 길로 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거야.”
“그렇다면 거절합니다. 몸이 편해도 마음이 꺼림칙한 방법이니까.”
이번에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은 스자쿠 입에 넣어주었다. 주스 더 시켜? 를르슈는 절반 남은 스자쿠의 주스를 보고 물었다. 아, 아냐. 난 괜찮아. 를르슈의 눈치를 보는 스자쿠가 괜히 안쓰러웠다. 를르슈는 다시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샤를이 아직도 밉니?”
“아뇨, 아버지는 아버지죠. 밉다거나, 그런걸 떠나서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아요.”
“샤를이 들으면 섭섭한 소리를 하는구나.”
“떨어져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요.”
“그래도 양육비는 꼬박꼬박 보내준 아버지인데.”
“그런 점은 성실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누군가의 연줄이나 힘에 기대서 이루고 싶을 일이라면 애초에 하고 싶다는 생각도 안할 거라서요.”
마지막 베이글은 자기 입에 넣었다. 대충 허기는 때웠다. 마리안느는 두 사람이 식사를 거의 마쳐갈 무렵에 가토 쇼콜라에 손을 댔다. 혼자 남은 마들렌을 두 사람 앞쪽으로 밀며 디저트를 할 차례가 아니냐고 웃는 마리안느의 모습에 를르슈는 잘 먹겠다고 하나 들었다. 마리안느가 고른 카페는 모든 메뉴가 훌륭했다. 스자쿠에게도 먹어보라고 제가 먹던 것의 반쪽을 다시 먹여준 를르슈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나리한테도 그렇게 물어보실건가요?”
“글쎄. 나나리는 너를 제일 좋아하니까 물어보기도 전에 싫다고 대답할 것 같은데.”
“안 하시는 게 좋을거예요.”
“왜? 나나리가 원하는 일이 있다면 네가 이뤄줄 생각이니?”
“아뇨. 저도 나나리도, 배경이나 출신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되니까요. 어머니를 닮아서.
말을 마친 를르슈는 밀크티를 마셨다. 그리고 마리안느 쪽으로 마들렌이 놓인 접시를 밀었다. 정말 맛있네요, 가토 쇼콜라보다 아마 마들렌이 어머니 취향일 겁니다. 를르슈의 단호한 말투에 마리안느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네. 그럼 좀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해볼까. 우리 아들 커플은 이제 어디로 데이트를 갈 예정이지?”
“촌스럽게 그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를르슈가 대답해주지 않으면 스자쿠 군한테 물어보면 되지. 스자쿠 군?”
“아, 으, 그, 저, 저녁에 호텔에 가서 저녁을 먹고 스위트 룸에 하룻밤 묵기로 했어요. 나나리가 친구 집에서 자고 올거라고 그래서 안심이에요. 다음날 조식까지 먹고 나올 생각입니다!”
를르슈를 닮은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며 묻는 마리안느의 얼굴에 스자쿠가 당해낼 재간 같은 거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하나 뿐인 연인의 인생에 중대사가 걸린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저녁 데이트 일정에 대해 물어보니 뇌가 일하지 않았다. 스자쿠는 말을 다 하고 나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를르슈의 차게 식은 눈이 스자쿠를 한 번 훑어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네, 스자쿠가 말한대로입니다.”
“저녁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그럼 나랑 같이 쇼핑하는 건 어때?”
“네?”
“원래는 귀여운 딸내미랑 하는 게 더 재미있긴 하지만 를르슈도 딸내미 못지 않게 예쁘니까 만족. 스자쿠 군, 같이 도와줄거지? 디너 타임이 되면 안 늦게 보내줄게.”
거절 같은 선택지는 없다. 마리안느는 하나 남은 마들렌을 한 입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 꽃미남 둘을 끼고 쇼핑이라니 이런 호사가! 기세 좋게 외치는 마리안느의 옆에서 스자쿠가 코트를 입는 것을 도왔다. 젠틀하네, 스자쿠 군. 스자쿠는 커다란 눈을 반으로 접어 휘며 웃었다. 마리안느 씨의 에스코트를 확실하게 해야죠. 그 사이에 계산을 하고 온 를르슈는 자기 어머니와 사이 좋게 웃고 있는 연인을 보고 있으면서 속이 쓰렸다.
괜히 스자쿠와 마리안느 사이에 파고들면서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기사 잘 봤어요, 어머니. 딸이 두 명이고 첫째 딸의 외모가 경국지색? 언론인이 그런 거짓말을 하면 양심에 안 찔리시나요?”
“네 얼굴 보면 다들 딸인 줄 아니까 걱정 안 해.”
“무슨 이야기야, 를르슈?”
“…내 얼굴이 경국지색 급이라고 생각하냐?”
“맞는 말이긴 하지만, 경국지색은 좀 나쁜 뜻이니까 절세가인 정도가 낫지 않아? 그렇죠, 마리안느 씨?”
이젠 커플룩을 입은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이 남자와 커플인 게 부끄러울 지경인 를르슈는 아무렇게나 앞장서서 걸었다. 마리안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려서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에 겨우 걸음을 멈추었다. 스자쿠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갸웃거리고 있어서 상황이 더욱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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