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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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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cry, baby

DOZI 2019.06.08 11:26 read.1528 /

나이트 오브 세븐 X 제로였던 제11황자

R18주의

임신 유산 주의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현재 갇혀있다. 돌아온 곳은 그리운 아리에스 궁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 멀쩡한 곳이 없는 이 곳에 를르슈는 홀로 갇혀 있었다. 한두 명 정도 있을 법한 메이드도 없고, 호위도 없는 이 아리에스에 를르슈는 저를 홀로 내버려둔 남자를 떠올렸다.

 

‘궁에 있는 한 자유롭게 지내도 돼.’

 

이게 자유롭게, 라는 말이 맞는건가. 를르슈는 그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남자는 그 질문을 받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꽤나 답하기 싫은 것처럼 대답했다.

 

‘네가 얌전히 있으면, 나나리는 안전해.’

 

대체 어떻게 있는 게 얌전히 있는걸까. 를르슈는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는 아리에스를 쓸고 닦는 것에 첫 주를 보냈다. 그 남자는 매일 감시할 것처럼 말했으면서 보름이 다 되도록 오지 않았다. 를르슈가 주방에서 혼자서 요리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슬슬 통조림 요리에 질려갈 무렵에 남자는 나타났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드물게 술에 취해있었다. 아니, 드물다는 표현은 맞지 않았다. 를르슈와 스자쿠는 술을 마실 수 없는 나이였다. 저에게는 얌전히 있으라 해놓고서 정작 본인은 술을 마시러 다녔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난 를르슈는 스자쿠를 노려보았다

 

“얌전히 있었어?”

 

스자쿠는 술 냄새를 풍기며 물었다. 를르슈는 어이가 없어서 대답도 못했다. 대답이 없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눈을 날카롭게 뜨면서 다시 물었다.

 

“얌전히 있었냐고, 물었잖아.”

“…보면 몰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어.”

“누구를?”

“…….”

“보나마나 나나리겠지.”

 

딱히 부정할 말은 아니었다. 를르슈가 대답없이 서있는 것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목을 잡고서 아리에스의 현관을 열고 들어섰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스자쿠는 잘도 를르슈의 침실로 향했다.

 

“너, 어디로 가는 줄 알아?”

“네가 자는 곳.”

“어떻게 알고….”

“여기엔 감시카메라가 있어. 24시간 내내 감시할 수 있도록 인력도 배치되어 있고. 매일 보고를 받고 있어.”

“…!”

“걱정 마, 내가 오는 날은 모두 오프로 돌리니까.”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라, 24시간 감시 당한다는 뜻이었다. 를르슈는 그동안 청소에 힘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탈출 계획이라도 세웠으면 아예 더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스자쿠는 마지막으로 를르슈의 침실 문을 열고서, 침대 위에 를르슈를 내던지듯 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잘거면 손님방에서 자라고 외치려고 하다가 제 입술에 닿는 뜨거운 혀와, 넘어오는 타액 사이로 느껴지는 술 냄새에 아무 말도 못했다. 겨우 떨어지는 입술에 를르슈는 소리를 질렀다.

 

“스자쿠!”

“아, 시끄러워. 얌전히 있었다며? 계속 얌전히 있어.”

 

를르슈의 파자마를 벗기면서 스자쿠는 자꾸 손이 미끄러지는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를르슈가 움직여서 그런 것도 있었다. 다리 위는 올라탄 스자쿠 때문에 움직이지 뭇하니 를르슈는 손으로 스자쿠를 내치면서 계속 반항했다.

결국 참지 못한 스자쿠는 를르슈의 따귀를 때렸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의 입술에서 피가 터짐과 안쪽의 여린 살이 짓뭉개지는 게 느껴졌다. 맞은 본인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 스자쿠는 딱 한 마디만 했다.

 

“가만히 있어.”

 

스자쿠의 폭력은 가차없다. 를르슈가 그의 친구였던 것, 한때 지켜야할 대상이었던 것은 이제 과거였기에, 가차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를르슈의 안에서 스자쿠는 아직까지도 미미하게나마 우정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를르슈는 말 그대로 가만히 있었지만, 공포에서 오는 떨림은 어쩔 수 없었다.

스자쿠는 상의를 다 벗기고 를르슈의 드러난 하얀 몸에 한숨을 쉬었다. 하얀 몸에 연붉은 색의 유두가 추위로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색에 취미가 있다면 누군가는 군침을 삼킬지 모르겠지만, 스자쿠에게 있어서 이는 주군을 죽인 원수의 몸이었다. 

 

“나나리가 그러던데.”

 

갑자기 나오는 여동생의 이름에 를르슈는 눈을 크게 떴다.

 

“너와 유피는 친한 사이였다고….”

“…….”

“나나리는 너와 다르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건 사실이겠지.”

“…그래.”

“유피를 죽인 이유가 뭐야?”

“…….”

“제로가 된 이유는?”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게 지금 다 무슨 소용이겠어. 를르슈, 그렇지? 스자쿠는 를르슈의 목을 물어뜯었다. 굵은 혈관에 이를 박을 것이 물어뜯는 것 그 자체였다. 아악, 하고 를르슈가 소리를 질렀다. 스자쿠는 너덜너덜해진 를르슈의 목과 피범벅이 된 제 입술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이런 걸로 죽지 않아, 를르슈.”

“아, 윽….”

“아프지? 그렇지만 죽지 않아…. 어지간해서 죽지 않는다고.”

“…….”

“그런데 유피는 죽었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게 사람인데, 유피는 죽었다고. 네가 죽여서.”

“…스, 스자쿠.”

 

사람은 누구도 다른 누구를 대신할 수 없어. 스자쿠는 중얼거렸다. 피로 흥건해진 를르슈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너를 죽이면 네 죄의 대가는 누가 치러? 나나리? 아니, 절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아.”

“…….”

“네가 살아서 치러야 돼. 유피의 죽음도, 일본인의 죽음도, 전부 다.”

“…….”

“나는 이제 네가 하는 말 따위 못 믿어. 네가 진실을 말해도 듣지 않아.”

 

내가 알던 를르슈는 그때 7년 만에 만났을 때, 죽었던 거야. 스자쿠는 제 밑에서 아픔에 울고 있는 를르슈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 내 아래에 있는 너는 누구일까. 스자쿠는 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제로, 너는 제로야. 

를르슈가 아니라 제로. 

유피를 죽이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살인자.

 

하지만 스자쿠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앞에서 실컷 떠든 대로, 죗값이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일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나리의 오빠였고, 어린 스자쿠의 여름을 아름답게 만든 사람이었으며,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극악무도한 살인자라 하더라도, 과거는 버릴 수 없었다.

과거를 버릴 순 없다. 스자쿠가 아버지를 죽인 과거를 여전히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섹스 해봤어?”

 

스자쿠는 를르슈의 속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를르슈는 눈을 부릅뜨며 다리를 버둥거리려고 했다. 스자쿠는 다시 한 번 를르슈의 뺨을 때렸다. 같은 곳을 두 번 맞은 탓에 고통이 더 얼얼하게 느껴졌다. 를르슈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 사이에 스자쿠는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축 늘어진 페니스를 지나쳐, 회음부 사이를 손끝으로 살짝 만지다가 구멍으로 바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하윽…! 스, 스자쿠, 하지 마!”

“왜?”

“이, 이런 거,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

 

스자쿠는 를르슈의 안에 손가락을 두 개 밀어넣었다. 젖지 않는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넣었더니 를르슈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뜨겁게 조이긴 하지만 마른 장벽에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라면 제 것을 넣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애무를 정성들여 해주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를르슈는 자신들의 관계를 묻는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울음을 참았다. 친구라고 말하기엔 모든 걸 뒤틀어놓은 건 자신이었다.

 

“섹스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를르슈?”

“아, 아읏, 손가락, 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 하는 섹스는 어떨까?”

 

스자쿠는 제 페니스를 꺼냈다. 발기조차 되지 않은 것을 손으로 주물러 겨우 세우고서 를르슈의 구멍에 맞추고 힘으로 억지로 눌러 밀어넣었다.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쥔 를르슈의 손이 하얗게 질려갔다. 힉, 히익, 아악…! 를르슈는 겨우 내는 소리가 거의 비명을 억누른 소리였다. 스자쿠도 버거운 삽입에 진땀이 흘렀다. 하지만 발기가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굳어가며 를르슈의 마른 안쪽에도 만족스럽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이상하지, 원수의 몸에 흥분하고, 쑤셔넣고, 섹스하고.

 

“좋아하지 않는 나랑 하는 섹스는 기분이 좋나보네, 를르슈.”

 

스자쿠는 서서히 굳기 시작하는 를르슈의 것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제 몸을 살핀 를르슈는 작은 목소리로 거짓말, 하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이건 진짜야. 스자쿠는 를르슈의 다리를 더 벌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 흐윽, 아, 아앙, 스, 스자쿠, 그만, 깊어, 이상해, 진다…! 아, 아앗!

를르슈의 우는 소리는 절정에 이르러서는 거의 소리가 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스자쿠는 아래에서는 피가 나는 주제에 저보다 이르게 사정을 맞이한 를르슈를 보면서 그의 목을 조르고만 싶었다. 이 섹스는 기분이 나쁘라고 할 예정이었는데, 정작 스자쿠도 를르슈도 모두 즐기고 말아버린 쾌락의 현장이었다.

우리는 뭐 하나 제대로 예정대로 되는 게 없다. 서로 때문에.

 

그리고, 스자쿠는 사흘에 한 번, 아리에스에 와서 를르슈와 섹스를 했다.

콘돔 따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를르슈는 구멍 안쪽이 가득 찰 때까지 뒤로 받아야했다. 한 번 하고 나면 하루는 꼬박 앓아누워서 목욕도 겨우 해서 정액을 긁어내는 것도 늦었다. 처음 왔을 때보다 더 말라가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꾸준히 섹스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다리를 벌리는 것, 그 다음엔 허리를 돌리는 것, 그 이후에는 펠라치오, 더 깊숙하게 삼키는 법, 그런 것들을 가르쳤다. 오로지 저의 쾌락과 를르슈에게 벌을 주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네 달 후에 를르슈는 식욕이 늘었다.

나나리는 여전히 만날 수 없고, 스자쿠는 식료품을 조달하러 오는 김에 를르슈를 안고 갔다. 그래서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몰린 탓에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체중이 늘어난 것 같진 않았다. 

온 몸이 나른했다. 섹스를 너무 자주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이 올랐다. 그것 역시 섹스를 너무 자주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이 너무 많이 왔다. 이것도 섹스를 너무 많이 해서.

나중엔 스자쿠가 현관을 열고 를르슈의 침실까지 와서도 를르슈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저 모르게 약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어서, 식료품 창고를 다 뒤집어 엎고 새 식료품을 채워넣었다. 그리고 섹스를 했다. 평소라면 싫어도 스자쿠의 것을 억지로 삼켰을 것을, 온몸이 거부하다 못해 결국 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 

흉한 꼴을 보였으니 오늘은 여기서 그만두겠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스자쿠는 더 저질스러운 남자였다. 셔츠가 토사물 위에 굴러서 엉망이 되어도 스자쿠는 섹스를 멈추지 않았다. 아랫배가 알싸하게 아파와서 를르슈는 큰소리로 울었다. 그게 좀 안쓰러웠는지, 스자쿠는 한 번으로 끝내주었다.

 

“유로피아 일 때문에 잠시 비울거야.”

“…….”

“한 달치 음식이랑 물은 다 채워놓았어.”

“…모자라게 되면?”

“굶고 기다려.”

 

24시간 감시하고 있다고 했으면서 사람 하나를 붙여주지 않는 것이 너무하다 싶었다. 하지만 스자쿠에게 를르슈가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나이트 오브 세븐의 푸른 망토를 보면서, 를르슈는 점차 뜨거워지고 나른해지는 몸에 소파에 주저 앉았다. 마중이나 배웅 같은 달콤한 인사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자쿠는 를르슈를 돌아보지 않고 나갈 것이다. 

를르슈는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스자쿠의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섹스는 그만하고 싶었다.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젠 몸이 아팠다. 

왜 아프지. 를르슈는 아무 생각없이 제 아랫배를 감쌌다. 빨리 씻어내야하는데, 기진맥진한 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요리를 엄청 했다. 먹을 수 있으면 다 먹었다. 한 달치를 채워놓았다는 것이 보름 만에 거의 반의 반도 안 남게 되었다. 스스로 해먹는 풀코스 요리는 맛있는 걸 떠나서, 그냥 먹고 싶었다. 그렇지만 술은 참았다. 술은 스자쿠가 저를 처음 안았던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최악의 음식이었다.

를르슈는 꺽꺽거리다시피 거의 다 음식을 먹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온몸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현기증에 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미끄러졌다. 붙잡았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가? 계단을 구르는 와중에 를르슈는 그런 태평한 생각을 했다. 이 정도면 멍이 드는 걸로 끝나겠군. 를르슈는 거의 마지막 바닥에 닿았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를르슈를 덮치는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아랫배, 다리, 허벅지, 발끝, 정수리, 사정없이 닥치는 고통과 동시에 입고 있는 바지 아래에서 축축하게 느껴지는 체액에 를르슈는 더듬거리며 그 체액의 정체를 확인했다. 

붉은 피.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아랫배가 꽉 뭉치듯 아팠다. 아아아악! 를르슈의 비명이 고요한 아리에스의 적막을 깼다.

 

“전하가 유산했다고?”

“…네, 그렇다고 합니다. 우선 급하게 의사를 불렀습니다만 응급처치는 끝났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다.”

 

나이트 오브 세븐은 제 부하에게서 받은 소식에 어이가 없어서 입가를 감추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유산이라니, 임신한 사실도 몰랐다. 를르슈, 너는 어디까지 날 속였던거야. 한 번도 거짓말을 안 한 적이 없어. 유로피아에 가기 전까지도 태연하게 아픈척이나 하고 있던 를르슈를 생각하면 더 열이 받았다.

이제 곧 돌아갈 일만 남아있던 스자쿠는 돌아가는 열차에 몸을 싣으며, 다시 들리는 를르슈의 소식을 확인했다. 

 

—의사는 돌아갔다.

—를르슈는 혼자 아리에스에 있다.

—식료품이 거의 떨어졌길래 급하게 채워넣었다.

—침대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 것 같다.

 

모두 다 거짓말 같았다. 를르슈는 그렇게 나약한 남자가 아니다. 이것도 계산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고 임신과 유산이라는 카드를 쓰다니.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제 몸을 빌어서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설풍이 몰아치는 열차의 바깥을 내다보는 스자쿠는 속았다는 생각과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건 잊으려고 해도 털어내지지 않는 생각이었다. 

나의 아이. 를르슈와 나의 아이. 아니다, 이건 제로의 속셈이다. 를르슈와 나의 아이가 아니야. 

 

오랫동안 꿈을 꾸었다. 나나리는 눈을 뜨고 걸어다녔다. 해바라기 밭에서 쉼없이 뛰어다니는 나나리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어디 가, 나나리. 같이 가. 를르슈는 숨을 헐떡대면서 나나리를 따라가려고 했다. 오라버니, 스자쿠 씨! 나나리가 부르고 있는데, 가야 되는데. 를르슈가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는 동안 스자쿠가 다가왔다. 스자쿠는 애쉬포드 학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를르슈, 나나리가 기다리잖아. 빨리 가자. 스자쿠가 내미는 손을 잡고서 를르슈는 쓰게 웃었다. 알고 있어, 지금 가던 중이었는데…. 

—어디 가?

를르슈의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스자쿠의 것이지만,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를르슈에게서 손을 내밀던 스자쿠는 어디 가고, 나이트 오브 세븐이 를르슈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 멀리서 나나리가 부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스자쿠 씨? 어디 있어요? 를르슈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번엔 그가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제로.

그래, 나는 제로다. 나나리가 원하는 상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너는 유피를 죽였어.

—그거로도 모자라서

—자기 아이까지.

내가 유피를 죽이고, 내 아이까지 죽였다고.

그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일어나, 를르슈. 자는척 그만해.”

 

를르슈는 저를 흔들어 깨우는 손에 눈을 떴다. 초점이 좀처럼 잡히지 않아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스자쿠였다. 애쉬포드 학원의 교복을 입은 스자쿠가 아니라, 나이트 오브 세븐인 스자쿠였다. 그의 푸른 옷이 보기 싫어서 를르슈는 눈물이 났다. 

 

“왜 우는거야?”

“…….”

“네가 바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 거짓말은 이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거, 거짓말을…한 적 없어.”

“또.”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나나리를 위해 얌전히 있었잖아, 거짓말도 하지 않고, 너를 기다렸는데!”

“임신한 거, 계속 숨겼잖아.”

 

를르슈의 더 마른 손목을 꽉 움켜쥐며 스자쿠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번 거짓말의 목적은 뭐였어? 유산까지 하는 게 네 계획이었어?”

“…아니야.”

“빨리 말하지 않으면, 지금 해버리는 수가 있어.”

“아냐, 진짜야. 임신한 거 몰랐어. 이렇게 아프기 전까지 몰랐다.

“…….”

“진짜야, 스자쿠.”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 받았다.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를르슈의 눈을 바라보던 스자쿠는 짧게 한숨을 토했다. 를르슈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겨우 쥐고서 스자쿠가 믿어주기를 바랐다. 임신도, 유산도, 모두 를르슈의 예상 밖이었다. 스자쿠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옷 벗어, 를르슈.”

 

두 번 다시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