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패러렐
쿠루루기 스자쿠 X 를르슈 람페르지
옛날부터 프레임에 무언가를 담는 것을 좋아했다.
한 순간의 찰나를 영원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사진은 그저 숨쉬는 것과 같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은 건 사람의 당연한 심리잖아.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건 당연한거야.
그렇지만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진 않았다. 스자쿠는 카메라를 여러 대 갖고 있었지만, 가장 많이 쓰는 카메라는 휴대폰 카메라였다.
—스자쿠 군, 사진 찍는다고 하지 않았어?
전의 전의 전 여자친구가 그런 질문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 비싼 카메라로 나 좀 찍어줘, 라는 말이었다. 스자쿠는 애매하게 웃었다. 카메라는 무겁잖아. 휴대폰으로도 충분해. 그 말에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자쿠는 입에 발린 말을 했다. 그래도 너는 어떤 카메라로 담아도 귀여우니까. 그리고 사흘 후에 스자쿠는 그녀에게 차였다.
차이는 순간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저녁을 먹고 나서, 그녀가 이별을 통보했을 때, 등 뒤로 지는 노을이 너무 예뻤다는 것, 그걸 찍었으면 좋았다,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노을 사이로 지나가는 를르슈를 보자마자 이 이별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뻔뻔한 녀석.”
“에이, 친구가 차였는데 위로해줘.”
“차인 거 맞아? 완전 얼굴이 폈는데.”
를르슈 람페르지는 스자쿠의 제법 오래된 친구였다. 고등학생 때 만난 친구로, 그 이후로 운좋게 센터 시험을 잘 본 스자쿠는 를르슈와 같은 대학을 다녔다. 룸메이트는 아니었지만, 둘은 같은 맨션의 옆집 생활을 6년 정도 했다.
를르슈의 회사가 지금의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를르슈는 가까운 본가로 집을 다시 옮겼고, 스자쿠는 계속 함께 했던 이웃을 마지막으로 배웅했다. 그래서 마주칠 일이 줄어들었다. 스자쿠도 회사를 다니긴 했지만, 재미없고 지루했으며, 주말에 나가는 사진 출사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여자친구가 있었을 때에는 데이트나, 데이트에 따르는 섹스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하지만 를르슈를 만나는 건 새로운 해방이었다. 주말인데도 거래처와의 미팅을 나왔다는 를르슈는 이제 일이 끝나 돌아가는 길이었고, 그 김에 스자쿠는 차이고 있던 중에 를르슈를 만난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우연이었다.
“왜 헤어졌어?”
“음, 솔직히 말하면 제대로 듣지 않아서….”
“사귀고 있으면 최선을 다해 집중을 해. 좋아서 사귄거잖아?”
섹스가 좋긴 하지. 스자쿠는 겨우 웃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방정맞은 성 생활을 모를 것이다.
둘은 학생 시절에 자주 갔던 술집에서 자리를 잡고서 안주를 왕창 시켰다. 를르슈가 산다고 하길래 스자쿠는 주저 없이 줄줄이 메뉴를 읊어댔다. 를르슈가 일하는 회사는 일본을 넘어서서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회사니 월급은 스자쿠와 급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를르슈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으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를르슈도 술을 줄줄이 외듯이 주문했다. 둘은 나름 술고래였고, 적당히 호흡이 맞는 술 친구였다.
“아, 지금 조명 좋아. 여기 올 때마다 그런 생각 하긴 하는데.”
“사진 이야기?”
“응. 음식도 딱 맛있게 보이잖아.”
“하긴, 너는 사진을 잘 찍었지. 예전에 나나리 사진은 진짜 고마웠어.”
나나리는 를르슈의 여동생이다. 원래 브리타니아에서 유학 중이던 나나리는 를르슈의 집에서 며칠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나나리와 같이 있는 를르슈의 표정이 좋아서, 스자쿠는 그때 들고 있던 카메라로 몇 장이고 두 사람의 사진을 찍었다.
를르슈의 사진이 훨씬 많았지만, 아마 를르슈는 나나리의 사진을 좋아할 게 틀림없으니, 를르슈의 사진보다 나나리의 사진을 더 엮어서 파일로 보내주었다. 한동안 를르슈의 배경화면이나 대기화면 같은 것은 스자쿠가 찍은 나나리였다. 영락없는 시스터 컴플렉스라고 놀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뭐, 피사체가 좋으니까 좋게 나오는거지.”
“맞는 말이지. 이번 겨울에 나나리가 다시 오거든. 너도 올래?”
“겨울? 왜?”
“…그래, 너는 바보였지. 오랜만에 만나니 그 사실을 잊었어.”
“바보 취급하지 말고 빨리 말해, 를르슈.”
내 생일, 겨울에 있잖아.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아, 하고 입을 벌렸다. 혼자서 술을 홀짝인 를르슈는 정말 바보다, 이 바보, 하면서 스자쿠에게 바보라고 놀려댔다. 하긴 6년을 옆집으로 살고, 그리고 1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를르슈의 생일은 계속 까먹었다.
“그래, 를르슈 생일이 겨울에 있었지….”
“날짜는?”
“12월…….”
“이제 31분의 1의 확률로 맞춰.”
25일은 를르슈와 거리가 오천억광년은 먼 성인의 생일이고. 24일은 연인들의 데이트, 러브 호텔이 만실이 되는 날. 그럼 를르슈는 대체 언제 태어난거지…. 스자쿠는 아무 생각 없이 잔을 채우면서 술을 홀짝거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12월의 언제든 부르면 갈게.”
“너무 정직하게 말하니 화가 나지도 않군. 약속한거다. 나나리도 기대하고 있어.”
“이번에 산 미러리스 카메라 들고 갈게.”
“그게 뭐야?”
미러리스 카메라가 뭐냐고 전 여자친구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스자쿠는 그때 뭐라고 대답을 했더라. 음, 그냥 DSLR 카메라보다 가벼워. 누가 들어도 대충인 대답에 전 여자친구는 기분이 나빠보였다. 그렇지만 스자쿠는 달래주지 않았다.
“DSLR이랑 좀 다르게, 안에 반사경이랑 또 그거의 반사체가 없는건데…. 보통 DSLR의 중간과정이 생략되면서 몸체가 가벼워진거지.”
“그래?”
“그래도 삼각대니 뭐니 들고 다니면 무겁긴 하지만.”
“무리하지 마.”
“괜찮아.”
왜 를르슈에게는 자세하게 설명을 하게 되지? 스자쿠는 꼬치를 뜯어먹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를르슈가 정확하게 그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전 여자친구와 마찬가지일 텐데.
스자쿠와 를르슈는 술잔을 계속 기울였고, 별 것도 아닌 이야기나, 회사 이야기, 그리고 스자쿠의 전 여자친구, 나나리의 이야기를 했다.
“아, 좋다.”
“뭐가?”
“뭔가, 부담이 없어. 를르슈랑 이야기 하는 거.”
“나름 긴 시간을 알았으니까, 편할 수 밖에.”
“다음에 사귄다면 를르슈 같은 애가 좋을 텐데.”
“그래?”
“나나리랑 사귀고 싶다는 이야긴 아니야.”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를르슈의 안에서 나나리와 나는 연애 플래그가 서지 않아?”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붉어진 뺨을 혼자서 문지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나쁘지 않지만……. 굳이?”
“그렇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그리고 나나리가 아깝다. 닳고 닳은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나나리는 안 돼. 그래, 안 돼.”
“아, 벌써부터 나나리와의 로맨스는 클라이막스에…. 시스터 컴플렉스 오빠에 의해서 파탄나기 일보 직전이잖아.”
“정말 마음이 있으면 시스터 컴플렉스라고 놀리지나 말고.”
“그렇지—. 마음 같은게 없으니 이런 말을 하는거지.”
를르슈와 스자쿠는 붉어진 뺨을 한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문득, 지금의 를르슈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한 색의 조명,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뺨, 부드럽게 일렁이는 를르슈의 눈, 이런 것들이 적절하게 아름다웠다. 적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아름다운 것은 스자쿠의 이상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빈 손에 제 손을 더했다.
난데 없이 손을 잡아오는 스자쿠를 내치지 않고, 를르슈는 뭐냐고 웃었다.
“를르슈 같은 애보다는 를르슈랑 사귀는 게 낫겠지?”
“뭐야, 이젠 나야?”
“응. 역시, 를르슈가 있으면 를르슈랑 사귀는 게 좋겠어.”
“나보고 내 생일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놈이랑 사귀라고?”
“사귀고 나서 별로면 차면 되잖아.”
“차고 나서도 친구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사귀어보지도 않았잖아.”
를르슈는 ‘흐음’하고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남자랑 사귄다, 그것도 스자쿠랑? 생각하는 것이 입 밖으로 나오는 를르슈는 그 빠릿빠릿한 머리가 평소와 다르게 잘 굴러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를르슈, 키스할래?”
“흠, 왜?”
“키스해서 기분이 좋으면 사귀자.”
“……왜?”
“보통 남자랑 남자는 키스하지 않잖아? 기분이 나쁘니까. 근데 우리끼리 키스해서 기분이 좋으면, 정말 좋은 거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사귀는거야.”
말도 안되는 궤변이지만, 를르슈는 흥미로웠다. 그래, 키스를 하자.
스자쿠는 를르슈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술잔을 부딪히고, 기울이고, 마시고, 왁자지껄한 사이였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아, 지금 카메라가 있으면 좋겠어. 지금의 를르슈를 찍고 싶다.
하지만 카메라는 없고, 아쉬운대로 눈에 담았다. 를르슈가 조용히 물었다. 눈, 감아? 그런 걸 왜 묻지. 스자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감으면 좋을지도…. 스자쿠의 작은 소리에 를르슈의 눈이 감겼다. 예쁘게 뻗은 속눈썹이 가라앉았다. 스자쿠는 술 냄새가 날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를르슈에게 키스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키스하는 두 남자는 술에 취해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를르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자쿠의 목에 팔을 둘렀다. 스자쿠의 혀가 들어와서 뜨겁게 입안을 훑었다. 둘이서 마셨던 술이 이렇게 달았나? 스자쿠는 그런 생각을 했다. 머릿속이 온통 핑크색, 빨간색이다.
키스를 끝내고 나서 를르슈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사귀자, 스자쿠.”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부탁해, 를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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