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물
모처럼 비어있는 학생회실. 시험기간이기 때문에 다들 이벤트 같은 건 신경 쓸 시간도 없다. 운동부도 없이 텅 비어있는 그라운드. 다들 도서실이나 교실에서 책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 학생회실에는 스자쿠와 를르슈만이 있다. 고정 멤버가 몇 명 있었지만 다들 약한 과목은 다 끝내고 먼저 나갔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스자쿠와 를르슈 뿐. 남아있는 과목은.
“그럼 다시 문제. ’쿠루루기 스자쿠가 죽은 사건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그때 안 죽고 살아남아서 제로가 된 내가 를르슈를 죽였으니까!”
“그건 우리 밖에 모르는 내용이니까 기각이다. 다시 외워라.”
외우는 김에 연도도 외우고 날짜도 외우고.
역사에 대해서 누구보다 감각이 뒤떨어지는 스자쿠를 위해 오늘도 를르슈가 희생당하고 있다. 스자쿠는 들이밀어진 프린트를 다시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거 완전 날조잖아. 어려워.”
“또 낙제해서 전국대회 나가지 말던가.”
“그건 학교에서 싫어할 걸….”
“어디가 대체 어려운거야? ‘제로’? ‘쿠루루기 스자쿠’?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전부라고 하면 진짜 싫어할거지?
진심으로 싫어하게 된다.
“나는 오히려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이 부분이 자신 있어! 여기서 점수를 따면 어때?”
“나나리의 파트는 세계 평화 말고는 외울 게 거의 없잖아. 제로가 하는 일도 악역 황제 를르슈의 암살 이후로도 비중이 적어지고. 점수를 따려면 그 이전에 세계 정세다.”
“너는 정말 잘 기억하는구나….”
“내가 한 일이니까. 그리고 너도 도왔잖아.”
“저는 랜슬롯에 타서 살아남았을 뿐이었죠, 유어 마제스티.”
자, ‘쿠루루기 스자쿠’부터 다시 외워봐라.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책상에 기어가다시피 중얼거렸다.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의 전임 기사가 되어 넘버스 최초로 기사가 되어….”
“그 다음.”
“기어스가 있는 를르슈를 팔아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었습니다.”
“너 서술형에도 그렇게 적을거냐?”
“음, 안되겠지?”
“안 돼.”
프린트에 적혀진 ‘쿠루루기 스자쿠’ 파트는 세 장이나 되었다. 아니 살아서 무슨 일을 이렇게 많이 저질렀대. 스자쿠는 전생의 자기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정리된 자료를 보고 있으면 질렸다.
하지만 그 다음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파트는 다섯 장이다. 아, 안 돼. 저건 더 힘들어. 를르슈는 수학 문제를 풀고 있으면서 스자쿠의 필기가 얼마나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했다.
“뭐야, 내 파트 외웠어?”
“나 요새 제로 레퀴엠 날짜로 가물가물해.”
“그 이후로 너는 할 일이 많았으니까.”
“아, 근데 이거 끝나고도 유로 브리타니아 쪽도 해야되지 않아?”
“알고 있네. 빨리 해.”
“줄리어스일 때의 너는 물 엄청 마셨는데.”
“시험에 나오는 내용만 기억해라, 스자쿠.”
내가 유로 브리타니아를 군사랑 갔는지 가습기랑 갔는지 정말 지금 생각하면 거의 화분에 물 주는 수준…. 우앗, 알았어, 외울게, 외울게.
“왜 첫날부터 역사인거야, 마지막 날이면 더 몰아서 급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데!”
“마지막 날이니 더 안할 거잖아.”
“어렵다고. 를르슈도 기억하지?”
나 초등학교 때 사실대로 역사 시험지 적어서 냈다가 0점 처리된거.
“그래.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망상병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아주머니가 병원 데려간 것도.”
“근데 너도 그때 전생의 기억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나만!”
“너 하는 거 보니까 그러면 안 될 거 같더라고.”
“친구라면 알려줬어야지!”
“전생에 나를 죽였던 놈을 친구라고 불러야할까….”
“같이 하자고 한 거였으면서! 제로 레퀴엠을 그렇게 매도하다니!”
“네, 네, 세계 평화 이룩하신 정의의 편 ‘제로’님. 얼른 프린트 외우고 집에 가자. 나나리 부활동도 끝날 시간이야.”
거짓말 하지마, 제로! 중등부도 오늘 부활동 없는 날이라서 나나리는 오늘 집에 먼저 갔을 거라고! 를르슈, 역시 너는….
“그래, 모처럼 나나리와의 같이 하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져버릴 정도로 너를 좋아하는 사랑에 미친 호모, 를르슈 람페르지다. 불만 있으면 빨리 프린트 외우고 너네집에 가서 내가 한 요리를 먹고 섹스하자.”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은 심장에 안 좋아.”
“죽을 것 같아?”
“조금?”
“삶의 주마등 빨리 돌려서 ‘쿠루루기 스자쿠’ 파트 빨리 암기해.”
그런 거 될 리가 없잖아. 스자쿠는 다시 샤프를 고쳐쥐면서 꾸물꾸물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프린트에 손을 댔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볼 때마다 엄청난 삶이었구나, 를르슈. ‘어머니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의 테러리스트 암살 사건으로…’ 아니 여기서부터 거짓말이면 뭘 어떻게 외우라는거야.
“스자쿠. 집에 갈 생각이 없는거지?”
“아니, 역사 프린트가 가식적이잖아! 너네 어머니는 사실 기어스를 쓸 수 있었고…!”
“장래 네 꿈이 사학자라면 괜찮은 학설이지 ‘기어스’ 학설. 그런데 내일 당장 시험에 논문 쓸 거 아니면 그냥 외워!”
전생의 기억, 가지고 있어봤자 시험에 도움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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