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스자쿠
말하자면, 친구였을 지도 모른다.
친구였던 기간은 너무 짧아서, 앞에 붙는 말은 미묘하다. 아마도, 혹은, 어쩌면, 말하자면, 그런 말이 붙어야지 친구라는 말이 따라붙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라는 말 뒤에는 많은 이야기가 붙는다.
그렇지만 그는 나의 주군을 죽였으며,
나의 나라를 우롱했고,
나의 명예를 짓밟았으며,
나의 삶을 괴롭혔고,
나를 죽여, 나에게 형벌을 내렸다.
누군가는 나에게, 그가 신인지, 물어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이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다. 신이라면 나의 운명을 가엾게 여겨, 그의 옆으로 나의 영혼을 먼저 데려가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신도 아니며, 그렇다고 신의 사자인 천사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마왕, 악마, 그리고….
친구일지도 모른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이 벽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누구인지 알 이유도 없다. 그저 사제라는 것만 안다. 누군가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몇년을 공부하며, 신을 가까이서 모시려고 한 사람에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누구였을까? 그래봤자 같은 인간이 인간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일 뿐이고, 그건 자기 만족에 불과한데.
그런 것에 의지하는 건 나쁜 걸까?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며]
하지만 나는 같은 인간에게 죄를 저질렀고, 인간에게 가장 용서받고 싶어한다.
나는 예전에 깨달았다. 죽음은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남은 이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하나의 악으로 존재한다. 살아서 죄를 갚아라. 그것이 앞으로의 속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동안 지은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가면을 내려놓고서, 정말 오랜만에 쿠루루기 스자쿠의 목소리를 꺼냈다.
“저는….”
너무 많은 죄가, 죽인 사람들의 이름이, 목 끝에서 입술 끝까지 쉼없이 흐를 것 같아서 입을 닫았다. 대신에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 괜찮을까요.”
그러자 벽 건너의 사제가 웃었다.
[사실이라면 곤란하지만, 그 또한 죄에 추가해서 고해하시면 됩니다.]
신은 편리하군. 나도 따라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기는 조금 수월하게 풀어가도록, 중요한 이야기는 발설하지 않되,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만 골라서 말했다.
제일 처음 나온 것은 아마 그녀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그리워했고,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 죄를 제일 먼저 용서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먼저 튀어나온 것은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친구를…죽였는데.”
이상하지.
그는 친구가 아니었다.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했다.
그 여름의, 그 때의, 그 직전까지만, 그가 제로가 되기 전까지만…. 그런 조건이 필요했는데도 나는 그 사제 앞에서 그를 조건 없이 친구라고 불렀다.
“굳이 죽였어야 했나, 생각합니다.”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우리는 같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뒷말을 삼켰다. 왜냐면, 나는 아직 제로이고, 가면을 벗어도 제로의 삶을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제는 한동안 침묵을 했다. 이 사제는 지금까지 몇 명의 살인죄를 묵인해왔을까? 그것을 기도로 씻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계속해서 저지른 죄를 고백하시면 됩니다.]
“네? 아, 바로바로 용서 받는 게 아닌가요?”
[정말 세례를 안 받았군요.]
“아, 세례도 안 받고 고해성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네.]
“차례도 세면 되나요?”
[편하신 대로.]
뭐야, 진짜 편리하군.
한 번 마음 먹으니 다음 죄도 술술 나왔다.
“두 번째, 지켜야할 사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저를 감싸준 유일한 은인인데,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에게 돌을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네 번째,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살인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 살아있습니다.”
아, 거기까지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살아있는 게 죄입니까?]
사제가 말을 꺼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면에 비친 빛이 어디로 흩어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을 죽여놓고 살아있는 게 죄입니다.”
[…….]
“이제 끝인데요.”
[그 밑에 뭐라고 적혀있을 텐데.]
“아, 그러네요. 이 부분인가요?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럼 이제 보속을…]
“보속이 뭔가요?”
[죄를 사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군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어쩌고, 말하는 사제의 말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제님.”
[네.]
“사실 저는 이 종교를 믿지 않아서, 그 기도문을 외우기는 힘듭니다.”
[시간을 내도?]
“그럴 시간이 없어요.”
세계의 정의를 수호하는 제로라서.
그 말을 꾹 삼켰다. 허어, 하고 사제가 허탈한 목소리를 내더니 다시 말을 바꾸었다.
[그럼 방법이 없군요. 보속은 따로 없습니다.]
“네? 죄를 이렇게 많이 지었는데도?”
[살아서 속죄하는 게 방법이라고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살아서 속죄…….”
정말 편한 말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나는 가면을 쓰고 알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미 기계음이 섞인 그 목소리에 사제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제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신 앞에서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진 직업은 어디에 가서도 혀를 놀리지 않을 것이다.
“살아라, 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아멘.”
이제 나가도 된다는 말에 나는 작은 방을 나왔다. 옆에는 누가 있을까. 나에게 대답하며 살아서 속죄하라는 그 사제는 누구였을까. 그런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은 알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어차피 궁금하지도 않았고, 죄를 용서받을 거라는 생각도 안 했다.
굳이 따지자면, 말하자면, 아마도, 어쩌면, 그는 친구.
“여전히 거짓말은 잘해, 를르슈.”
그리고 나의 죄를 사하는 사제.
작은 본당을 빠져나가며, 성수가 다 마른 입구까지 빠져나왔다. 벽이 다 바스러져 없어지는 중인 성당은 몸을 숨기긴 딱이었지만, 거기서 를르슈를 만날 줄은 몰랐다.
가면은 여름에 쓰기엔 덥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적당히 가려져 있으며, 진실을 말하기엔 무겁다. 딱 나의 죄의 무게 만큼이다. 네가 남겨준 건 그런 것이다. 흑의 기사단이 신호를 보냈다. 나나리가 이제 곧 발표를 할 것이고, 나는 그들을 제압한 후의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나는 나온 것이다.
어쩌면, 이것도 를르슈의 계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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