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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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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기

DOZI 2019.07.18 19:09 read.543 /

스자루루가 알아서 사귀면 좋겠다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던 중학교 2학년. 를르슈 람페르지의 사랑은 타이밍이 안 좋게 그때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껏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에서 쿠루루기 스자쿠를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가 좋다. 그에게 욕정한다. 어떠한 의미에서든 그의 손을 잡는 것은 나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를르슈는 똑똑하고 영리했으며, 이러한 감정을 본인에게 전달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상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고백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길게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스자쿠는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이 이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를르슈와도 그런 소재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충 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를르슈에게는 그런 대화는 아프기만 했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런 이야기로 마음이 아픈 것은 어느덧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젠 몇 번째인지도 모를 스자쿠의 여자친구를 소개 받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었다.

 

“선배가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지노 바인베르그는 빨대로 음료를 쭉 빨아들이면서, 지금까지 구구절절하게 말하고 있던 를르슈의 말을 썩둑 잘라먹었다.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스자쿠의 친구 자리는 내 꺼니까 적당히 떨어지란 이야기다.”

“네? 잠시만요, 스자쿠 친구는 저 말고도 많은데요?”

“잘생긴 친구는 나 하나로 족해.”

“칭찬인 거 같은데 기분 나쁘네요. 스자쿠랑 친구하면 재미있는데 왜 선배가….”

“그 재미는 나만 보는 걸로 충분하다.”

“유치하네요!”

“사랑은 원래 유치한거야.”

“친구는 우정이잖아요!”

“나는 우정이 아니다.”

 

이 바보같은 대화는 어딘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지노는 미묘한 표정으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제가 있든 없든, 스자쿠는 제일 친한 친구는 선배라고 생각할걸요?”

“그렇겠지.”

“그럼 스자쿠랑 놀아도 되는 겁니까?”

“안 돼.”

“사실 같이 안 놀아도 돼요. 스자쿠는 생각보다 재미없고.”

“스자쿠는 재미있어! 같이 있을수록 행복하고 즐거운데, 복에 겨운 소리 하지 마라!”

“그럼 같이 놀아도 됩니까?”

“안 돼.”

 

이야기가 안 끝나잖아요, 선배. 지노는 자몽 주스를 홀짝거렸다. 그리고 애초부터 저는 스자쿠의 친구긴 하지만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선배가 걱정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구요. 를르슈는 딸기 주스의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도 처음엔 스자쿠를 친구로 보고 있었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배 같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 근데 스자쿠한테 친구가 생길 때마다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스자쿠가 좋고 너는 스자쿠랑 놀지 마?”

“그러기 전에 적당히 떨궈냈다고 해야하나. 아니, 스자쿠에게 여자친구가 있어서 내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지. 오히려 떨궈지는 쪽은 나였으니까.”

“…괜한 걸 물었네요.”

“아니, 그 여자친구들한테는 고맙다고 하고 싶어. 괜한 수고를 덜었으니까.”

“울지 말고 말해봐요, 선배.”

“안 울어!”

 

그럼 왜 저한테만 이러는건가요? 지노의 순진한 질문에 를르슈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스자쿠가 여자친구를 안 만든지 벌써 반년이 되어가고, 공교롭게도 너와 만난지도 반년이 되어가니 의심을 안할 수가 없다. 지노, 마음이 있다면 썩 정리하고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너무하네요! 스자쿠한테 마음 같은 게 생길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왜 스자쿠랑 붙어다녀? 주말엔 아침부터 스자쿠랑 자전거를 타지 않나, 수영 하러 다니질 않나.”

“동아리 모임이잖아요. 저 말고 10명의 남녀부원들이 다같이 모여서 자전거도 타고 수영도 하는데 스자쿠와 저와의 데이트처럼 만들지 마세요.”

“우선 둘이 만난다는거네?”

“열두 명이서 만난다니까요! 걱정되시면 선배도 저희 동아리 들어오세요!”

“관심 없다.”

“아! 어떻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게. 어떻게 하고 싶은걸까. 를르슈는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얼마 남지 않은 이성으로 앞으로의 전투 상황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눈앞의 지노는 사실상 를르슈의 분풀이 상대였다. 를르슈가 자신의 스자쿠 한정 커밍아웃을 한 것도, 지노가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계산 내의 일이었다.

알고 보면 좋은 녀석이다. 게다가 이런 말도 안되는 대화에 끝까지 귀기울여 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주말이나 평일 오후에 스자쿠를 (동아리 모임 때문에) 저에게서 뺏어가는 건 기분이 나빴다.

 

“지노.”

“네?”

 

자몽 주스를 빨아들이다가 어정쩡한 발음으로 대답하는 지노는 좀 엉성해보였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 이 노선은 확실하게 스자쿠와 지노를 갈라 놓을 수 있는 방법이며, 를르슈와 지노에게 있어서 썩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나랑 사귀자.”

 

그리고 지노가 하얀 셔츠 위로 자몽 주스를 다 흘려버린 것은 를르슈의 예상 밖 일이었다. 좀 정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사귈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싫은데요?”

“싫은 이유는?”

“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나도 스자쿠 외의 남자는 좋아한 적 없어.”

“그럼 스자쿠랑 사귀세요.”

“안 돼. 걔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저도 남자 안 좋아한다니까요?”

“나도 스자쿠 외의 남자는 안 좋아한다고 말했을 텐데. 그리고 나랑 사귀면 너에게도 이득이 있어.”

“없을 거 같은데요?”

“있어. 우선 내가 널 안 괴롭힐거야.”

“괴롭힌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 선배 진짜 성격 이상해요.”

“그리고 네가 남자랑 사귀어도 널 좋다고 해주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걸러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어.”

“그게 뭐예요, 전 제 대인관계에 크게 불만 없는데요?”

“너처럼 세상 편하게 사는 녀석이 뭘 알겠어?!”

 

나는 지금 10년째 짝사랑 중이라고, 한계가 왔으면 진작에 왔어! 어지간한 어중이떠중이들이 스자쿠랑 붙어먹는 걸 보는 건 이제 그럭저럭인데 너처럼 성격 좋고 집안 좋고 잘생기고 훤칠한 녀석이 스자쿠 옆에 있으면 기분 나쁘고 짜증난다고! 친구로써 나에게 승산이 있긴 한건가 의심하게 되게 만든 녀석은 너 밖에 없다고! 스자쿠가 헌팅 대결에 끌고 갈 친구로 과연 내가 뽑힐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제 내가 1순위가 아니게 된 거 같아서 기분이 나빠, 솔직히 말하면 죽으면 좋겠네, 아, 죽는 게 어떨까? 필요하다면 자연스럽게 사고사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 128가지를 고안하고 있는데 골라볼래? 그렇게 해서 스자쿠의 평생 친구는 내가 될 테니까 너는.

 

“뭐, 뭔지는 몰라도 선배가 엄청 불쌍하네요. 그리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되죠. 하지만 선배는 진짜로 죽일 거 같으니까 그냥 못들은 걸로 할게요.”

“그럼 나랑 사귀는건가?”

“아뇨.”

“동정하지 마.”

“죽여버리겠다는 사람한테 어떻게 동정을 합니까, 기겁하지….”

“아무튼 사귀는거다.”

“싫어요!”

“남자가 싫다, 말고 다른 이유를 대봐.”

“음, 요새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요.”

“카렌? 카렌은 나를 좋아해. 포기하도록.”

“그걸 어떻게 알아요!”

 

를르슈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대답했다.

 

“스자쿠랑 내가 같이 붙어다니는데도 스자쿠한테 고백하지 않고, 나와 정기적으로 연락하며 지내는 걸 보면 아마 나를 좋아하는거겠지. 스자쿠랑은 동아리 모임 때 말고는 따로 만나는 것 같진 않지만.”

“카렌이 스자쿠를 좋아하는데 선배한테 견제하다는 생각은 안해요?”

“카렌은 그럴 여자가 아니야.”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카렌이 선배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나저나 스자쿠한테 고백 안하고 선배한테 연락하면 다 선배를 좋아하는 건가요?”

“대체로 나를 좋아하던데. 99%는.”

“1%는?”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 그러니 1%의 가능성 정도는 남겨두는거야.”

“카렌이 그 99%라는 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저한테는 중요한대요.”

“아무튼 사귀는거다. 5분 있다가 스자쿠가 올 거야.”

 

뭐라구요? 지노는 를르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활기차게 웃으면서 들어오는 스자쿠와 마주했다. 이제껏 무표정, 아니면 한껏 찡그린 얼굴로 지노를 쳐다보던 를르슈도 활짝 웃으면서 스자쿠에게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왔네, 스자쿠. 응, 좀 빨리 움직였더니.

 

“두 사람이서 만나고 있었어? 무슨 일이야?”

 

세 명이서 둘러앉은 둥근 테이블에 스자쿠가 주문한 레몬에이드까지 놓여졌다. 스자쿠의 질문에 를르슈는 우물쭈물거렸다. 지노는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 스자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지노랑 같이 할 이야기야?”

 

왜인지 모르게 붉어진 를르슈의 뺨은 수줍은 사람의 그것이었고, 지노는 이제껏 를르슈가 스자쿠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지만,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납득할 수 있었다. 선배는 스자쿠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근데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람?

 

“스자쿠, 지노랑 나는 사귀고 있어.”

“응?”

“우리 둘은 연애를…하고 있다.”

 

뭐라구요?

지노는 어이가 없어서 스자쿠와 를르슈를 번갈아 보았다. 스자쿠도 충격을 받은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놀랐어? 를르슈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스자쿠에게 물었다. 스자쿠는 어어, 하고 멍하니 대답을 했다.

그 사이에 낀 를르슈의 남자친구가 된 지노는 애매한 침묵을 깰 수가 없었다. 아, 만에 하나 스자쿠도 를르슈를 좋아한다면 급조된 연애전선에 사랑을 깨닫고 를르슈에게 고백하면 좋을 텐데. 그럼 선배도 좋고, 나도 좋은 거 아닌가? 스자쿠와 선배가 사귀면 카렌도 선배를 포기하고. 완전 좋잖아.

 

“그래, 둘이서 사귀고 있었구나….”

“응.”

“기쁘네. 나한테 말해줘서 고마워. 둘이 잘 어울려. 언제부터 사귄거야? 아, 지노랑 를르슈는 예전에 브리타니아에서 같이 만났던 적이 있다고 그랬지? 집안 사정이라고 했던가? 그때부터 만난건가? 어렸을 적의 만남을 어른이 되어서 사랑으로 이어간다니 낭만적이네. 그렇지만 를르슈와 내가 같이 지낸 시간이 더 길지 않았을까? 지노는 작년에 브리타니아에서 막 왔는데다가 를르슈랑 같이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잖아? 를르슈는 지노의 애인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는 내 친구니까 를르슈한테 억지로 강요하고 있다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지노가 좋은 녀석인건 알지만 사람은 사귀다 보면 모르는 부분이 많으니까. 아, 그렇구나. 그동안 를르슈가 여자친구를 만들지 않은 이유도 혹시 지노 때문에? 그때부터 좋아하고 있었던거야? 를르슈, 섭섭하네. 우리 계속 친구였으니까 그런 고민 정도는 같이 해줄 수 있었는데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거야? 아, 그래도 둘이 잘 어울려.”

 

둘이 진짜 잘 어울려.

스자쿠의 반복되는 말에 를르슈는 겨우 웃었다. 어딘가 처연해보이고 서글픈 웃음이었지만 지노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다가 스자쿠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뭔가의 지뢰를 밟은 느낌이 들었다.

스자쿠는 웃고 있다. 입으로는 잘 어울린다, 어렸을 때의 어쩌고, 하면서 줄줄이 읊고 있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마치 동아리 모임에서 어떤 여자애가 도시락을 싸왔다며 누가 봐도 스자쿠가 좋아할만한 반찬으로만 가득한 그것을 스자쿠의 입에 넣어줬을 때 맛있다고 립서비스를 날렸을 때의 표정이었다.

뭐야, 둘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지노는 남들은 다 아는데 자기들만 모르는 두 사람의 세계에 애초부터 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말은 즉, 지노는 이 두 사람의 관계에 애매하게 끼어버린 이상 자의로 뛰쳐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