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기사황제
여름 치고는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오고, 햇살은 부드럽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평화롭다는 말이 어울린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상황은 그렇게 평화롭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낮은 계승 서열 순위를 뒤집어 엎고서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 를르슈는 즉위한 날부터 꾸준하게 저에게 달려드는 것들을 떠올렸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그리고 그 외의 방법으로 를르슈의 숨통을 조여오는 것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저만 그런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를르슈의 옆자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이트 오브 제로가 그 위안이었다. 위안 치고는 팔자 좋게 졸고 있는 모습이 별로였지만, 저래보여도 를르슈의 검이라고 자처하는 유일한 놈이었다. 를르슈가 황제가 되기 이전까지는 쿠루루기 스자쿠라던가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불렸지만, 이제는 나이트 오브 제로 말고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원래부터 알던 사람들이나 될 것이다.
를르슈는 적당히 올라온 서류들을 천천히 해치워나갔다. 스자쿠는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편이었다. 스자쿠가 그나마 하는 일은 아마 보고서를 쓰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튼 날이 좋았다. 앉아서 펜이나 놀리고 있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다. 를르슈는 평소보다 적은 종이더미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으면 테라스에서 나나리와 티 타임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는데. 나나리는 지금 중화연방의 외교 특사로 나가있는지 한참이 되었다.
여러모로 화창한 날에 일을 하는 를르슈를 위로해줄 사람은 나이트 오브 제로 뿐이라는 걸 다시 실감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폐하?”
꾸벅꾸벅 졸고 있던 스자쿠에게서 질문이 들어왔다. 를르슈는 서명을 하던 손을 멈추고 턱을 괴었다. 고민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이라고 운을 띄우고 말을 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군.”
“그러네요. 중화연방은 비가 온다는데, 늦은 장마라고 합니다.”
“그래? 어차피 오늘 나나리의 일정은 호텔에서 오후 회의 밖에 없으니까 크게 지장은 없겠지.”
“네.”
“그래서 날씨가 너무 좋은데 말이야….”
를르슈의 또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보다 더 나른한 기색을 띄는 한숨에 나이트 오브 제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오늘은 안에만 있기에는 지루하죠.”
“맞아, 날씨가 아깝잖아,”
“오늘 같은 날에 시찰 일정이 없는 게 아쉽네요.”
“그렇네. 하지만 일정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
제레미아가 무슨 일이 있냐며 헐레벌떡 달려올 것을 생각하면 그만두기로 했다. 그의 야단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를르슈는 평소보다 늦은 속도로 다음 서류로 넘어갔다. 느려진 를르슈의 속도에 스자쿠는 남은 서류와 넘겨진 서류를 떠올렸다.
다음주에는 지금 황제의 즉위를 기념하는 식과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자세한 일정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 조정하겠지만, 큰 틀을 짜는 것은 우습게도 본인의 즉위를 기념하는 황제였다.
를르슈가 지금 보고 있는 서류도 기념식 관련으로 올라온 서류였다. 상당히 지루한 얼굴로 서류를 훑다가, 결국 만년필을 내려놓는다.
“나가고 싶다, 스자쿠.”
그가 일정 중에 나이트 오브 제로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건 드물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오늘 처리된 서류의 양은 상당했지만, 제국의 크기를 생각하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을 것이다. 를르슈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스자쿠는 처리된 서류를 들어올렸다. 두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를르슈는 비겁하다고 말했다. 너 혼자 나가는 건 비겁하다. 한 번 더 말하는 것에 스자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가봤자 복도죠. 폐하께서는 지금 창문 밖을 나가고 싶으신 거 아닌가요?”
“그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지.”
“복도라도 나가시겠습니까?”
“됐어. 할 일도 많은데 뭐하러 나왔냐고 물어볼 사람이 너무 많아.”
“잘 아시네요.”
“도망갈까?”
“제국의 황제가 날씨가 좋아서 도망이라뇨.”
나나리가 들으면 울겠어. 스자쿠는 키득거리며 집무실 문을 나섰다. 부드럽게 닫히는 문에 를르슈는 또 한숨을 쉬었다.
날씨가 좋아도 나가지도 못하는데, 일이 잘도 되겠어. 를르슈는 만년필을 굴리면서, 빈 종이에 스자쿠 바보라고 세 번이나 적었다. 발이 빠른 스자쿠는 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를르슈의 책상 가까이로 다가왔다.
“바보라고 세 번이나 적었어, 를르슈.”
“바보에게 바보라고 말한 게 뭐가 나빠?”
“세 번은 너무하잖아.”
“진짜 너무한 게 뭔지 알고나 말하는거야? 오늘 같은 날에 집무실에 가둬놓고 일을 시키는 네가 너무한거야.”
“가둬놓다니…. 네가 일하겠다고 해서 일하고 있는거면서.”
“도움이 안되는 기사 자식.”
“뭐야, 이제 도와주려고 하는데.”
스자쿠는 를르슈의 남은 서류 중에서 중요한 사안이 따로 표시되어 있는 것들을 모두 한쪽으로 빼놓았다. 책장에서 묵직해보이는 책도 몇권 꺼내서 따로 분류한 서류더미 위에 얹어놓았다. 그리고 남은 서류들, 즉 부피만 차지하고 내용물은 그저 그런 것들을 손에 들었다.
“를르슈, 이거 중요해? 국가 기밀 같은 거 있어?”
“아마 없을걸. 기념식 전이라 따로 급한 것도 없고.”
“다행이네.”
“근데 왜?”
“밖에 나가고 싶다며.”
“응?”
스자쿠는 창문을 열었다. 집무실은 2층이었다. 창문을 열자마자 아래에서, 위에서, 그리고 정면에서 선선하게 들어오는 바람이 좋았다. 를르슈는 그 바람을 즐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스자쿠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창문 밖으로 날려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자쿠! 뭐하는 짓이야?!”
“폐하…. 큰일 났습니다. 바람에 서류가 날아갔습니다!”
“네가 날렸잖아!”
“제가 가서 다 주워오겠습니다! 폐하는 여기서 기다리시죠!”
“뭐?!”
“그렇지만 중요한 서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를르슈도 빨리 내려와서 도와줘! 없어진 서류가 있는지 확인해야하니까!”
나이트 오브 제로는 잽싸게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체력만 믿고 나대는 미친놈이…! 스자쿠가 날린 서류에 놀란 사람들이 벌써 마당에 나와서 바람에 너덜너덜해진 종잇조각들을 줍고 있었다.
를르슈도 집무실 밖으로 나가면서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모두가 놀랐지만 우선 서류를 줍는 것에 급급했다. 다들 대충 모은 서류를 순서대로 대략 정리하고 나면 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다. 를르슈가 안도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각자 할일을 하러 다시 흩어졌다.
마당에는 황제와 그의 기사 밖에 남지 않았다.
“대충 다 모은 거 같으니 이제 들어갈까….”
“그런가요? 혹시 모르니 제가 더 찾아보고 갈까요?”
“그래도 상관 없어. 너무 구겨졌다 싶으면 새로 작성해서 갖다주면 좋겠는데.”
“하긴,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종이도 멀리 날아가고 싶겠지.”
“…뭐?”
나이트 오브 제로의 말에 를르슈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날씨 좋다, 를르슈.”
“…….”
스자쿠는 나가고 싶다고 말했던 를르슈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고지식하고 규칙에 있어서는 꽉 막힌 나이트 오브 제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를르슈로써는 지금이 놀라웠다.
“나나리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아, 그래도 난 를르슈랑 단둘이 있어서 좋아.”
“그래.”
“그래, 가 끝이야? 다른 건 없어? ‘나도 좋아’ 같은 거.”
팔랑팔랑거리는 종이 소리에 를르슈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스자쿠의 얼굴을 보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키스까지, 하면…더 좋겠네.”
그 말에 스자쿠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선을 맞추고 있지 않은 그의 황제는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자신을 모시는 기사가 얼굴이 붉어진 것도.
“그럼 빨리 돌아갈까요?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창문 열고.”
“그래요,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으니까.”
손을 잡고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빠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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