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lay [riːpleɪ]
1. (승부가 나지 않아서 하는) 재경기
2. 다시 보기(듣기)
3. (과거 일의) 재현
차례
1. Re:dial
2. Re:peat
3. Pendulum
4. Re:play
Epilogue
후기
1. Re:dial
를르슈가 저를 따라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괜한 오기가 아닌가 싶다. C.C.는 그늘에서 헐떡거리던 숨을 고르고 있는 를르슈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같은 거리를 걸어도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는 C.C.와 다르게 얼굴이 벌개질 때까지 달아오른 제가 부끄러운지, 를르슈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수줍은 소녀와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와서 를르슈에게 설렐 멋진 구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C.C.는 를르슈의 행태가 아니꼬울 뿐이었다.
L.L.은 어떠냐고 스스로의 가명을 짓는 모습이 뻔뻔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오만방자한 황제께서 모든 걸 다 버리고 선택해준 것이 고맙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C.C.와 다르게 돌아갈 곳이 있었고, 반겨줄 사람이 있었다. 미움도 받겠지만 그것도 하나의 관심이라고 생각하면, 를르슈는 C.C.의 옆보다 좋은 곳에 갈 수 있다.
‘왜 나를 따라왔지.’
C.C.는 가방의 주머니 안에서 물통을 꺼내서 마시는 를르슈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꾹 삼켰다. 본인에게 물어봐서 답을 얻는 것이 제일 적당하겠지만, 를르슈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다. 감정에 치우칠 때에는 그 뛰어난 머리를 쓰지 못하는 쓸모없는 경우도 있긴 하다만, 대부분 머리가 좋다. 만약 지금 당장에 질문을 해도 진실된 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고작 한 달밖에 안 지났다. 그래, 아직 한 달이다.
—너, 이름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를르슈 람페르지에서 따와서, L.L.은 어떨까?
사람을 놀리는 거라면 정말 최고점을 주고 싶다. C.C.를 비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런 네이밍 센스는 최악이다. 하지만 C.C.는 그런 것에 매달리고 있는 자신이 어리숙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이 보이지 않고, 목적도 흐릿한 이 여행의 끝에서 함께 해주는 사람이 바로 저 녀석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C.C.가 를르슈에게 왜 저를 따라왔냐고 물어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똑똑한 를르슈가 한 번도 묻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함께 하는 걸 허락했냐는 질문이었다. C.C.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없는 그 질문으로 반격을 가할 놈이었기에 그녀는 얌전히 옆을 걷고 있는 를르슈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끝과 끝을 다 맛본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한 명은 노예였고 한 명은 세계를 호령한 황제였다. C.C.는 넘겨받은 물통으로 목을 축였다.
둘은 지금 난민캠프에서 조금 벗어난 곳으로, C.C.만이 읽을 수 있는 기어스의 기척을 따라서 걷고 있는 중이었다. 자동차를 얻어타기도 했지만 대부분 질 나쁜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에 걷는 것이 우선이었다. C.C.와 를르슈의 무지막지하게 큰 짐을 노리는 녀석들도 많아서 짐도 대폭 줄였다. 를르슈의 짭짤한 수완에 C.C.는 물건을 팔고 오랜만에 피자를 먹었다. 대체 이런 애들 장난감은 왜 들고 다닌 거야? C.C.는 를르슈가 하는 말에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네가 쓰던 거야, 특히 그 만화경은 네가 제일 좋아했지, 같은 말이었다. 아무튼 그것도 다 팔아치웠다.
막막한 사막보다 더 싫은 것은 황폐한 마을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마을을 보고 있으면 C.C.는 그곳을 다시 정리하고 치워야하고, 곧 올 사람들을 맞이해야할 것 같았다. 를르슈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서 눈앞의 풍경을 보았다.
자신이 죽어서 만들어진 평화로운 세계가 아직도 이 모양이라서? C.C.가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할 무렵쯤에, 를르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 나는….
예전에 쿠루루기 스자쿠의 기억을 읽었을 때에, 아주 희미하지만 강하게 남아있던 흔적이 있었다. 어린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이를 악물며 외쳤던 말이었다. 나는 브리타니아를 부수겠어! 브리타니아의 황자가 하기에는 위험한 말이었다. 스자쿠의 기억 안에서도 그것은 친아버지를 두 손으로 죽인 후에도 강렬한 기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을은 를르슈가 잘못한 것도 아니며, 제로와 흑의 기사단이 닿을 수 없을 만큼의 거리이고, 또 예전에 망한 브리타니아의 나쁜 소행도 아니었다. 사람들끼리의 나약함이 이렇게 만든 것이었지만, 를르슈는 가끔 그런 곳에서도 과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C.C.는 를르슈와 잡은 손을 놓았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과거가 C.C.의 안에 들어오는 것 같아서 싫었다. 서로 알고 싶은 부분만 알고, 모르고 싶은 부분은 영원히 모르고 싶었다. 너무 많이 아는 것은 그녀를 괴롭게 했다.
“어디까지 왔어?”
“사람들이 얼마 없어서 잘 느껴지지 않아. 사람들이 더 많은 곳으로 가야겠어.”
“귀찮군."
“네 체력을 고려해서 걸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날카로운 시선이 C.C.에게 내리꽂혔다. C.C.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귀찮으면 안 오면 됐잖아. 그 말도 꾹 억눌렀다. 를르슈가 가방을 다시 둘러맸고, C.C.도 손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기어스의 조각은 말 그대로 조각이었다. 조각난 기어스는 애매하게 작동했다. 엄청난 능력을 주기도 했고, 열심히 찾고 있던 두 사람을 바보로 만들 정도로 미약하기도 했다. 대부분 마약에 취한 것처럼 자신이 일으킨 기적에 심취한 사람들이었고,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썼다. 예를 들면, 말도 안되는 꿈, 소위 세계정복 같은 것이다.
좀 더 물리적인 것으로 변했으면 회수가 편했을 지도 모른다. C.C.와 를르슈는 기어스의 조각에 홀린 사람들을 죽여나가며, 망가진 C의 세계가 복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기어스의 조각을 이렇게 열심히 찾지 않아도 돼. 사람들은 언젠가 죽고, 기어스의 조각은 다시 C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거니까.”
“그 사이에 코드 계승자가 될 사람이 나타나면?”
“지금 코드를 가진 건 너와 나뿐이야. 그런 사람이 나타나도, 우리가 찾지 않으면 소용없어…. 그리고 직접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코드를 주는 것도 쉽지 않아. 그 사람은 늙어서 죽어. 보통 사람처럼.”
“……지금 하는 건 그렇게 의미가 없는 일은 아냐.”
를르슈는 사람이 텅 빈 거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건 꼭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았다.
“나는 기어스 때문에 사람들이 또 혼란 속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아.”
“그거 참 자애로운 황제 폐하시군.”
“나그네에게 황제라니, 그거 참 영광이로소이다.”
단막극 속의 대사처럼 우아하게 중얼거린 를르슈는 다시 앞서 걸었다. 어디인지나 알고 걷는 건지, 저 바보. C.C.는 를르슈의 뒷목을 잡아 끌었다. 거기가 아니야. 뭐? 진작 말하지.
아무튼 또 걷는다. 정처 없이 걷는 건 를르슈 뿐이다. C.C.는 갈 곳이 어디인지도 알고, 어느 곳으로 향해야 할지도 알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도 안다.
“C의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가면 너는 원래대로의 소원을 이루고 싶은 건가?”
“원래대로의 소원? 죽는 거?”
“그래.”
“그러고 싶어.”
를르슈가 옆에 있어도 이 삶은 버겁고 끝이 없다. 인간답지 못하다. 원래 살았을 때에도 인간답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비참하다.
“마지막에는 꼭 웃어.”
“물론이지. 좋은 녀석을 찾을 거야.”
“……다시 계약을 해야겠네.”
“응. 과정이 번거롭지만, 너 같은 녀석은 안 걸렸으면 좋겠어.”
“나 같은 녀석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잖아.”
“하긴.”
C.C.와 를르슈는 다 무너져가는 담을 옆에 두고서 모닥불을 피웠다. 땔깜을 가져온 것은 C.C., 늘어져서 자던 를르슈는 뒤늦게 요리를 했다. 통조림으로 만든 것이지만 아주 맛있다. 노예였던 C.C.의 생존식과 차원이 다른 요리였다.
“그래도 너 같은 녀석이면 좋을지도 몰라. 미움 받는 건 싫잖아.”
“기어스는 비열한 힘이라고 욕먹는 게 싫은 건가?”
“그렇지. 사실 나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걸.”
“…그래.”
“너도 그렇겠지만, 를르슈.”
“나도 그럴까?”
아직 나는 길게 살아보질 못해서. 그러자 C.C.는 먹던 스푼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뭐야, 나는 늙어서 다 안다는거야? 여자에게 실례야. 를르슈는 귀찮다는 듯이 대꾸도 않고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난 기어스 때문에 삶이 변했으니까. 원하는 힘이었어. 그래서 나쁘지 않았고, 죽어도 너를 원망하지 않았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괴로워했잖아. 아, 그런 의미에서 네가 나 같은 녀석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건 이해한다. 나는 꽤 좋은 남자니까.”
“재수 없어.”
“그리고 하나 더 고쳐주자면.”
“…….”
“나는 좋아서 이러고 있어. 너와 다르게.”
재수 없는 좋은 남자. 를르슈의 평가가 올라가면서도 곤두박질쳤다. C.C.는 설거지는 네 몫이라고 했다. 땔감을 구해오느라 손이 다 망가졌다고 투덜거리자, 를르슈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식사를 마치고 를르슈는 진짜로 설거지를 했다. C.C.도 노는 일 없이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바닥깔개를 깔고, 담요를 두고, 겉옷을 돌돌 만 베개를 두었다. 를르슈와 C.C.는 항상 머리를 맞대고 잤다. 싸우고 나서 등을 맞대고 잔 날도 있다. 하지만 손을 잡거나, 끌어안거나, 그런 다정한 연인의 잠은 자지 않는다.
우리는 뭘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될까. C.C.는 눈을 감으며 다가오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그리운 사람들이 보고 싶은 밤이었다.
* * *
“C.C.! 지난주에 드레스 맞춘다고 했었잖아! 자는 척 하지 마!”
그리운 목소리다. C.C.는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이건 꿈이다. 예전에 본 꿈이다. C의 세계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그 영상이다. 어디까지나 과거에 마음이 묶여있으면 안되는데.
“C.C.!”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잔 모양이었다. 새벽잠이 없는 마리안느가 시도때도 없이 커튼을 걷어댄 탓에, 아침잠이 많은 C.C.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즉, 지금 꿈에는 마리안느가 나오고 있다. C.C.는 결국 눈을 떴다. 사실 반사적으로 뜬 것이다.
눈앞에는 물결치는 검은 머리를 손끝으로 빙빙 꼬고 있는 마리안느가 삐딱하게 서있었다. 수수하지만 화려한 외모 탓에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주홍빛 원피스를 입은 마리안느가 C.C.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눈을 바로 뜨는 걸 봐서는 아주 예전에 깨어나셨군? 얼른 일어나! 세수하고 나가자!”
“난 싫어.”
여기서 나가면 마리안느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서 또 이것저것의 선물공세로 C.C.를 두고 갈 것이다. 사실 오늘 이 꿈의 결말도, 드레스를 맞추러 가자고 해놓고서 과일 가게 앞에서 사과를 한 입 가득 베어물고 C.C.를 까먹은 마리안느가 저녁에 사과의 의미로 애플파이를 구웠다가 홀라당 태워먹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저를 잊는 마리안느를 보기 싫었다. 드레스 따위 맞출 기분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입고 나갈 마리안느의 서임식에 C.C.는 정식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드레스 같은 건 필요없고, 이 꿈은 더더욱 의미가 없었다.
“드레스가 싫은 거야, 나랑 나가는 게 싫은 거야?”
“둘 다라고 하면?”
“그럼 내가 상처 받지.”
“아아, 네 상처 정도야 뭐, 흔하디 흔한 거 아닌가?‘
“소녀의 마음은 연약하니까 좀 더 정중하게 다루어주면 안되겠니?”
그러는 너나, 마리안느. C.C.는 하고 싶은 말을 억눌렀다. 이쯤 되면 C.C.가 울상을 짓는 마리안느를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이었다.
“그래,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강요하지 않아.”
“……응?”
이건 꿈이 아닌가. 아니면, 진짜로 일어나는 일인가?
“그럼 집에서 뭐라도 해먹을까? 오늘은 내가 할까?”
“아니, 내가 할게. 뭐,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딱히 생각나는 건 없지만. 적당한 거 아무거나 좋아. 아, 그래도 C.C.가 먹고 싶은 거라면 좋겠는데.”
“오랜만이니까 기사님 입맛에 맞추지.”
“그래, 그럼 파스타가 어떨까?”
요즘 잘 안 먹었잖아. 미트볼도 엄청 넣어주면 좋겠어. 손가는 것만 골라서 말하는 마리안느 때문에 C.C.는 그래도 입가를 느슨하게 하며 웃었다. 이런 분위기가 좋다. 사람을 녹이는 마리안느의 웃음이 좋다.
“드레스가 그렇게 싫었어?”
“응. 그리고 나는…사람들이랑 다르니까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모처럼 예쁜 얼굴인데 말이야.”
“그런 것과 별개로 나는.”
“그렇지만 를르슈랑 같이 다니는 건 조심해. 극악무도한 황제 본인이니 닮았다는 말로도 이젠 둘러대기도 힘들 걸.”
마리안느, 무슨 소리야?
* * *
“꿈을 꾸는 건 지독한 일이야.”
자고 일어난 C.C.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이 기분 나빠서 C.C.는 를르슈의 얼굴을 쿡 찔렀다. 네가 뭘 안다고, 이 동정 꼬마가. 를르슈는 아침부터 대체 천박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짜증을 냈다.
아침은 콘 수프와 말라비틀어진 빵이었다. 그런 걸로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C.C.와 다르게 를르슈는 이런 영양불균형을 견딜 수 없는 눈치였다. 마리안느와 다른 점이었다. 오히려 그런 걸 신경쓰는 건 C.C.의 몫이었던, 꿈속의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마리안느가 나왔다는 시점에서는 꿈이었지만, 그것은 반복되는 과거가 아니라, C.C.의 심층심리를 드러낸 것 같은 표상이었다. 계속 C.C.가 신경쓰고 있는 부분을 콕 찝어내는 것이 그러했다. 그때의 마리안느는 를르슈도 모르고, 오로지 C.C.를 귀여운 친구라고 부르던 때였으니까. 그때의 마리안느만큼은 오로지 C.C.만의 것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사람처럼 꿈을 꾸었다. 인간처럼 꿈을 꾸고 나니까 드는 감상이 그것이었다. 꿈은 지독한 것이다. 꾸고 나서도 원하는 것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꿈 안에서도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심신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비효율적인 이 꿈을 왜 꿨지.
미묘한 표정인 C.C.를 빤히 쳐다보던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이름을 계속 부르더군, 너.”
“…아, 마리안느의 꿈을 꿨으니까.”
“그래? 어머니랑 친했어?”
“친구였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
“계약을 맺고 나서 친구가 됐어?”
“계약을…맺고 나서도, 마리안느가 기어스를 못 써서,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리안느가 날 친구라고 불러줬어. 그래서 친구가 됐어.”
“나에겐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너에겐 좋은 친구였나봐.”
“감당하기 버거운 친구였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게 익숙하고, 계속되는 호의에 지칠 줄 모르는 그런 너그러움이 나에겐 힘들었어. C.C.는 드물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게 좋았어. 마리안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그런 사람의 친구이고, 나의 비밀을 알아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니.
를르슈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듯한 C.C.의 눈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를르슈가 말하지 않아도 C.C.는 스스로 꿈에서 깨어났다.
“그래도 그건 꿈이었어. 마리안느가 네 이야길 했거든.”
“내 이야기?”
“극악무도한 황제와 같이 다니는 건 눈에 띄니, 조심하라고.”
“내 꿈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네 꿈에도 마리안느가 나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아주 예전에 꿈을 꿀 때는 있었어. 어머니는 보통 피투성이가 되어서 계단 위에서 나나리를 끌어안고 있는 중이시지.”
“V.V.도 악질이지, 왜 하필 너에게 그걸 보게 했을까? 너는 이 계획 밖의 사람이었는데.”
“사랑이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들지. 그래서 계획 밖의 변수를 계산하지 않을 때가 많아지잖아.”
C.C.는 를르슈에게 언젠가 갇혀 있는 시간 속에 사는 V.V.가 마리안느를 좋아했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한 이유는, 를르슈 역시 그 갇혀 있는 시간 속에서 영겁의 세월을 보낸다는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직 C의 세계도 원상태도 아니지만, 지금이라면 불안정한 를르슈의 코드나 기어스를 자기 힘으로 끝낼 수 있는 때여서, 영원한 시간은 끔찍하니 스스로 끝을 내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를르슈는 ‘마성의 여자잖아? 인기가 많다 못해 아주 마성이야.’라며 어머니를 비웃었다. 를르슈답고, 마리안느의 아들다운 호기였다.
“어머니는 네 걱정을 하는 거 같은데.”
“그럴 리가. 마리안느는 죽었어. 내 의식에 다시 나타날 수 없어. 이건 내가 원해서 꾸는 꿈이야.”
“…….”
“꿈에서라도 마리안느를 만나고 싶은데, 그 만나고 싶은 이유까지 정확하게 반영된 꿈이지.”
그녀의 첫 친구를 죽여버린 를르슈는 남은 물통을 비웠다. 다 무너진 광장 중앙에 있던 우물가로 가서 물을 퍼오겠다는 를르슈를 보내고서, C.C.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입밖으로 나온 말에 무슨 책임을 져야할지 몰랐다. 마리안느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눈앞의 소년은 마리안느의 아들이니 그런 같잖은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다시 깨달았다.
—를르슈, 넌 대체 왜 나를 따라온 거야?
C.C.는 오늘도 그 질문을 반추한다. 가까워지는 를르슈의 그림자가 제 얼굴을 덮었다. 잘그락거리는 물통의 이음새를 풀어서 주는 를르슈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가볍게 감사를 표했다. 꿀꺽, 하고 물을 삼켰다.
“기어스의 조각은 여기서 가까워. 조금만 걸으면 될 거 같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총알이 몇 발 남았더라?”
“앞으로 세 발.”
구형 권총은 반동도 엄청나지만 소리고 시끄러워서 잘 쓰지 않았는데, 어느새 열두 발에서 세 발이 남았다. 지금까지 회수한 기어스의 조각은 아홉 개. 총알의 개수에 비하면 엄청난 수확일수도 있다. 대부분 를르슈의 기어스가 활약을 했고, C.C.가 어깨가 빠질 거 같은 고통을 감수하고서 권총을 쏘는 역할이었다.
약골 녀석. C.C.는 탄창을 확인하고서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마 사람들이 있는 곳은 난민들이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새로운 터전일 것이다. 그 곳을 피바다로 만드는 건 불쾌한 일이지만, 기어스의 조각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말도 안되는 기적을 일으키며, 그걸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있어서, 그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불안에 떨고 있었다. 오히려 죽이려 하는 두 사람에게 고마워할 수도 있다. 극히 드문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대낮부터 총질을 하는 건 좀 그런데.”
“하지만 밤에 기어스를 쓰는 건 나도 불안해. 밝은 곳에서 눈을 마주치는 게 편하니까.”
“머리를 써, 를르슈.”
“지금까지의 조각 회수에 계속 써오고 있는 게 내 머리다만.”
“더 굴려.”
“내가 지금 건성이라고 생각해?”
“제로 레퀴엠에 비하면 허술한 작전이잖아. 좀 더 체계적으로 해보라고.”
제로 레퀴엠이라는 말에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두워진 표정에 C.C.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려고 하자, 를르슈는 으레 짓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C.C.를 노려보았다.
“네가 먼저 말한 거다, C.C.! 이번 나의 작전에 토달지 말도록!”
아, 재수없는 녀석. C.C.는 어깨 끈을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를르슈의 작전은 무엇이었냐면, 정말 이제껏 세웠던 작전 중에서 제일 형편없고 조잡하고 억지스러운 작전이었다. ‘연약한 여자1’을 연기할 C.C.는 두 번 다시 를르슈의 작전이 허술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1. 기어스의 조각을 가진 사람이 느껴지면 전력으로 그를 유혹한다.
(괜찮은 대사로는 “꺄악—! 살려주세요!” 상당히 가녀리고 애처롭게.)
2. 를르슈가 나타나서 구해주면 “어머, 멋진 사람, 당신에게 반했어요!” 라고 한다.
3. 그리고 나머지 뒷일은 를르슈에게 맡긴다.
4. 돌아가는 길에 가방을 매는 건 C.C.가 한다.
5. 저녁은 멋진 사람에게 반한 C.C.가 한다.
“죽일 거야.”
“열심히 살려놓고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하나.”
“죽여버린다.”
“힘내, 멋진 남자인 내가 구하러 갈 테니까. 힘껏 비명을 질러.”
“정말 구질구질해, 를르슈. 이건 아니야.”
“제로 레퀴엠도 얼마나 유치했어? 사람 하나 죽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는데 결국 폭군이 죽어야 해결되는 정론적인 이야기였다. 이것도 역시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 약자를 구하면 해결될 권선징악 스토리에 불과해.”
C.C.와 를르슈는 오 미터의 간격을 유지하기로 했다. 확실히 새로운 터전이 될 마을은 하룻밤 전에 묵었던 곳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북적거리기까지 하는 골목이 있어서 두 사람은 마른 침을 삼켰다.
를르슈는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모자를 푹 눌러쓰고 머플러를 칭칭 둘렀다.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 먹히는 방법이었다. C.C.는 여자를 앞세워서 저는 멋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철부지 꼬맹이의 놀음에 놀아나는 자기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봤자 애는 애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기어스의 기척은 희미해지면서도 강해지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강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또 다시 강하게, 또 한 걸음 멀어질 정도의 거리로 멀어지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를르슈의 기어스는 아니었다. 불완전한 기어스를 스스로도 어떻게 할 줄 몰라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기어스의 흔적을 좇은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다루게 되었다면 능숙하게 다루었을 것을,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워 한다면….
—그 힘을 쓰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걸로 두 명이서 어떻게 먹어요?!”
“어린애 두 명이면 차고도 넘치지! 어디서 토를 달아?!”
“나는 동생까지 업고 다녀야한단 말이에요! 빨리 더 줘요! 감자 한 알이라도 더 넣어요!”
“이 꼬마 녀석이 건방지게 어딜!”
기어이 감자 한 알을 주머니 안에 넣으려던 소년은 머리통을 쥐어박히곤 다시 내려놓았다. 간판을 달지도 않은 허술한 야채가게의 주인장을 노려보던 소년은 C.C.와 정면에서 마주쳤다. 그녀를 보고서 얼굴을 붉히고 다시 땅바닥으로 고개를 처박듯 시선을 아래로 깔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C.C.는 그 순간 제 몸을 스쳐 지나가는 기어스의 기척에 소리를 내질렀다. 를르슈, 라고 부르려다가 작전이 떠올랐다.
“어머, 멋진 사람—!”
어딜 봐도 이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 미터 간격의 를르슈는 당황한 눈치였다.
“당신에게 반했어요!”
를르슈가 낭패라는 듯이 머리를 싸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지금 C.C.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C.C.는 계획대로 했다. 갑자기 C.C.가 소리를 지른 것에 모두가 쳐다보았다. 달려나가던 소년까지도.
잘 됐다. C.C.는 소년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에게 반했어요, 이름이 뭐죠?”
진부한 헌팅 멘트는 덤이다.
를르슈는 소년의 손을 붙잡고 있는 C.C.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가 설마, 하는 눈이었다. 여전히 이런 곳에서만 눈치는 빠르다. 소년은 옆에 있던 를르슈를 알아채고는 C.C.와 를르슈를 번갈아 보았다.
대충 보기에는 14살 정도, 브리타니아계와 아랍계의 혼혈인 듯 했다. 반짝이는 홍옥의 눈동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거, 거짓말…. 여자 둘한테서 동시에?!”
여자 ‘둘’이란 말이지. 를르슈의 표정은 보기 좋게 구겨졌고, C.C.는 시장바닥에서 크게 웃어버렸다.
“누가 여자냐! 딱 봐도 몰라?! 난 남자다!”
우렁찬 를르슈의 낮은 목소리는 박력이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기어스의 흔적을 찾아 떠난 지 한 달. 이렇게 유쾌하게 웃어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 * *
소년의 이름은 아자드, 같이 다니는 네 살 어린 여동생의 이름은 할라였다. 할라는 프레이야의 섬광에 눈이 멀고, 먼 눈으로 길을 다니다 지뢰를 밟아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고 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설정이라고, C.C.는 할라에게 음식을 떠먹여주는 아자드를 바라보았다. 를르슈도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는 모습에 얼굴을 떨구었다.
“다른 가족이나, 의지할 어른은 없는 건가.”
를르슈의 낮은 목소리에 아자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이런 고생 같은 거 안 했을거야. 아자드는 L,L.와 C.C.라는 기묘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잘도 자기 이야기를 터놓았다. 어렸던 를르슈가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지 못했던 것과 달랐다.
할라는 오빠와 다르게 경계심이 강했다. 오빠의 등 뒤에서 를르슈를 노골적으로 피했다. 어쩌면 보이는 눈보다, 보이지 않는 눈이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알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프레이야를 그 전장에 끌어들인 원죄가 를르슈에게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알았을 지도 모른다.
“할라, 그렇게 달라붙으면 움직이기 힘들어.”
“그렇지만, 오빠…. 이름도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랑 계속 이야기하면.”
“괜찮아, 어차피 헤어지고 말 사람들인걸. 내일 또 멀리 떠나야하니까 자야지.”
싫은 표정이 역력했던 할라는 오빠의 손이 눈꺼풀을 덮으며 잠을 자라고 하자마자 편안해졌다. 아귀에 맞지 않는 전개에 를르슈와 C.C.는 그가 다시끔 기어스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기어스는 보통 눈과 눈을 통해서 먹히는 법이었다. 손에 닿는다고 모든 게 된다면? 게다가 를르슈와 같은 종류의 기어스임이 틀림없었다.
눈을 보는 것보다는 적은 범위에서 쓰이지만, 손에 닿는다면 100% 먹히는 절대복종의 힘이라니, 세상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다. C.C.는 를르슈와 시선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의 비상식량으로 평소보다 배부르게 먹었다는 아자드는 여동생의 옆에 드러누웠다. 금방이라도 잘 것 같던 아자드는 밖에 나가려던 두 사람을 붙잡고 어딜 가냐고 물었다.
“별 구경이라도 하려고.”
“낭만적인 데이트네. 근데 여긴 아직 판이 좁아서 그런 건 소문날걸.”
“데, 데이트 같은 게 아니다! 아무튼 어린애는 일찍 자!”
낄낄거리는 아자드의 목소리를 등 뒤로 하고, C.C.와 를르슈는 허물어져가는 건물 뒤편으로 걸어갔다. 목소리를 낮추면 어느 정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를르슈는 아자드와 할라가 자고 있는 곳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자드가 기어스의 조각을 가지고 있어.”
“그래, 할라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
“……아자드 없이 할라는 혼자 살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해? 기어스의 조각은 또 변질되어서 이젠 눈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변했잖아. 닿기만 해도 통한다니. 더 위험해지기 전에.”
“위험하지 않잖아, 지금은….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지킬 정도인데.”
“너도 처음에는 그랬어.”
“…….”
“나나리를 위한 세상이면 된다고, 그래서 이 지경이 됐지.”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이 없는 이야기였다.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 끝에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난 못해.”
“너와 나나리를 보는 거 같아서?”
“하다못해 스자쿠 같은 존재가 있으면.”
“친구가 있으면 좀 나아질 거 같아? 그건 아니지.”
마리안느를 친구로 두었던 C.C.에게는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하룻밤만 더 지켜보게 해줘.”
“……그래.”
C.C.도 말은 매섭게 했지만 아자드와 할라는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무력한 오빠와 만신창이 여동생. 두 사람은 앞으로 살아갈 가능성보다 일찍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냉정하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원하는 결론을 얻고 나서 를르슈와 C.C.는 아자드와 할라 옆에서 잠을 잤다. 예상 외의 상황에 지친 것인지 를르슈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C.C.는 자는 를르슈의 뺨에 손을 뻗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녀석은 잠귀가 밝으니까. 담요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자면 한기가 조금 가셨다.
다음날 아침에, 아자드는 어제 산 감자를 으깨서 를르슈와 C.C.에게 대접했다. 이렇게 호화로운 아침은 오랜만이라고 를르슈가 말하자, 아자드는 씩씩하게 웃었다. 하룻밤의 정이지, 뭐!
“아자드는 계속 여기서 살 건가?”
“아직 모르겠어. 할라는 여기가 별로라고 하고. 나도 사실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은데…. 여기가 이제껏 다녔던 곳보다 먹을 게 많거든.”
“그래? 난민캠프는 별로인가?”
“난민캠프는 흑의 기사단이 있는 곳이잖아, 싫어.”
‘흑의 기사단’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할라가 들고 있던 스푼이 떨어졌다. 아자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땅바닥에 떨어진 스푼을 주워서 물로 헹군 후에 다시 할라에게 쥐어주었다.
“함부로 말한 나도 나빴지만 떨어뜨리지 마.”
“으, 응….”
할라는 고개를 푹 떨구며 겨우 한술을 떴다. 느린 속도로 그릇을 다 비운 할라와 C.C.를 함께 두고서, 아자드와 를르슈는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마을 광장까지 가지 않아도 주변에 흐르는 개울에서 설거지를 하면 됐다. 깨끗하게 흐르는 물은 목욕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세수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희 남매는 흑의 기사단을 싫어하나?”
를르슈는 거칠게 세수를 끝낸 아자드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 싫지. 싫고 말고. 부모님이 펜드래건에 있었을 때, 프레이야로 죽었거든. 그때 할라의 눈도 그렇게 됐고.”
“그건 브리타니아가, 그 황제가 나쁜 거잖아.”
“브리타니아가 나쁜 걸 알면서도, 제로는 그걸 한참동안이나 내버려뒀잖아! 나중에 다 끝난 후에야 를르슈 황제를 죽이면 해결될 일이 아니었어! 그 전에, 더 이전에 죽였어야 했다고! 적어도 도쿄에 프레이야가 떨어지기 전에, 그 황제가 나타나기 전에!”
“제로는, 몰랐을 지도….”
“내 앞에서 제로의 편 같은 거 들지 마!”
버럭 지르는 아자드의 목소리에 를르슈는 입을 다물었다. 아자드는 눈을 부릅뜨고서 를르슈를 노려보았다. 노기가 서린 시선에 를르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은 외로우니까 너네처럼 이름도 안 밝히고 있는 녀석들에게 이러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너네 따위!”
그릇을 내동댕이치는 아자드의 모습에 제 모습을 겹쳐보던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외로움 같은 건, 를르슈는 한 번도 인정한 적 없었다. 아자드는 그런 점에서 달랐다.
확실해졌다. 이 녀석은 위험해질 가능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있을 놈도 아니라는 걸. 를르슈는 내팽개친 그릇을 다시 물가에 헹구면서 그것들을 옆구리에 끼고서 돌아가는 길목까지 앞장서서 걸었다. 분노로 헐떡거리던 숨을 고르던 아자드는 를르슈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다가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L.L., 미안해.”
“아니다. 네 사정을 모르고 아무렇게나 지껄인 나도 잘못했지.”
“…다들, 제로를 싫어한다고 말하면 나를 미친놈 취급해서, 어디가서 말을 잘 못했는데, 그런 게 쌓여있던 모양이야.”
“솔직한 꼬마군.”
“솔직한 게 나쁜 거야? 거짓말 하는 것보단 낫지.”
“…그렇지. 거짓말보단 훨씬 낫지.”
“제로가 얼마나 정의로울지는 몰라도, 난 정말 싫어….”
세계를 누비며 활약 중인 흑의 기사단과 제로의 탈을 쓰고 있는 스자쿠를 생각하면, 아자드의 의견에는 동조할 수는 없었지만, 를르슈는 누군가의 정의 때문에 희생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싫은 건 어쩔 수 없어.”
를르슈는 아자드의 말에 힘을 더하듯 그렇게 말을 보탰다. 아자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할라도 제로를 싫어해?”
“응. 제로도 할라의 이야기를 들으면 미움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걸. 할라는 가엾은 애야, 내 동생이 아니었어도….”
그건 를르슈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나리도 그랬다. 나나리는 악의에 의해서 세상으로부터 빛을 잃고 서지 못하는 가엾은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할라는, 악의도 아닌 정의를 위해 희생당한 것이다. 그것도 를르슈 때문에. 를르슈는 아자드의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자국을 보고서 뺨을 쓸어주었다. 아직 한창 성장기임에도 제대로 크지 못하는 아자드도 가엾기 짝이 없었다.
“뭐, 뭐야!”
“사람의 체온은 눈물을 그치게 만들어.”
“그런 거 필요없어!”
“어린애한테는 필요한 법이야.”
울음을 그친 아자드는 할라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는 것에 만족한 것 같았다. C.C.와 를르슈에게 보였던 경계심도 어느 순간 누그러딘 할라 덕분에 아자드는 방금 전보다 더 종알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네들은 어디로 갈 거야?”
“찾고 있는 게 있거든. 그게 우리를 어디로 갈지 이끌거야.”
“너네는 꼭 수도사 같아. 그, 신의 뜻을 찾아 떠돌아다니는…그런 거.”
“비슷하지.”
신의 뜻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것들이라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C.C.와 를르슈였다. 우리는 기도하는 법에 대해서 잘 알아. 아자드는 두 손을 깍지끼고 모으며 중얼거렸다. 브리타니아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이었다. 할라도 아자드의 낯선 언어에 두 손을 모았다. 신을 믿을 수 없는 C.C.와 를르슈도 두 사람을 흉내내며 손을 모았다. 아자드가 긴 기도문 끝에 무어라 강하게 끝맺는 단어를 말하자, 할라도 그 말을 되풀이하며 두 손을 풀었다. C.C.와 를르슈는 감았던 눈을 뜬 아자드에게 무엇을 빌었냐고 물었다.
“신의 열두 사자들이 너희들의 운명을 수호하기를.”
“열두 명씩이나?”
“뭐, 우리가 믿는 신은 열두 명의 사자를 거느리거든.”
“12라는 숫자는 동서양 막론하고 다양한 뜻을 가지지. 뭐, 그럴싸하다. 브리타니아만 해도 열두 명의 기사가 있었으니까.”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말하는거지?”
“알고 있어?”
아자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출신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 보는, 브리타니아의 가장 정의로운 제도였으니까. 할라는 아자드의 손을 꼭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오빠는 아빠처럼 군인이 되어서, 언젠가는 나이트 오브 세븐처럼 되길 바랐거든.”
“옛날 일이야…. 브리타니아가 망하고 나서부터는 소용없어졌으니까.”
C.C.와 를르슈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브리타니아를 무너뜨린 장본인들이 할 말이라고는 없었다. 할라와 C.C.가 집을 지키고, 아자드와 를르슈는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들고서 시장바닥으로 나갔다.
어제처럼 아자드는 감자를 얻었다. 아자드가 판 것은 어머니가 남긴 작은 보석이었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보석이었는데, 아자드는 브리타니아 제정이 망하면서 보라색은 불길한 색으로 통한 탓에 값을 제대로 못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를르슈는 달랐다.
—퍼플 다이아몬드입니다. 알아보시는 분은 진가를 알아보시겠죠?
그 말에 감자를 들고서 작은 보석을 이리저리 비추던 상인은 혀를 차면서 아예 한 포대를 아자드에게 내밀었다. 이렇게나 많이? 아자드가 놀란 눈으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를르슈는 쿡쿡 웃으면서 빨리 챙기고 떠나자고 했다.
돌아가는 길에, 를르슈는 아자드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오래 못 있게 될 거야.”
“왜?”
“팔았던 거, 퍼플 다이아몬드가 아니거든. 그냥 아메시스트야.”
“왜 거짓말을 해…?”
“여기는 위험해. 제로가 싫어도 너는 난민캠프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
“뭐?!”
나를 여기서 내쫓으려고 일부러 그런 거짓말을 한 거냐?! 아자드의 바락바락 내지르는 소리에 를르슈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 할라를 계속 저렇게 내버려 둘 거야?! 제로가 싫다는 그 이유만으로, 나을 수 있는데 낫지 않고 계속 저렇게 방치할거냔 말이다!”
“할라는…!”
이제 나을 수 없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 아자드는 입을 다물었다.
“포기하지 마. 볼 수 없더라도 걸을 수 있을 수도 있어. 어떤 가능성도 포기해서는 안 돼. 오빠가 그러면, 여동생은 뭘 바라겠어?”
마치 어렸던 자기 자신이 했던 다짐처럼, 를르슈는 아자드에게 말했다. 아자드는 감자 포대를 꼭 끌어안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아직 포기하면 안 돼.
“제로를 이용하는 거야. 제로에게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스자쿠를 만나기 전까지.
를르슈는 아자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돌아가서는 할라에게 많은 감자를 받았다는 말과, 이 마을을 떠나서 흑의 기사단이 운영하고 있는 난민캠프로 떠나자는 말을 했다. 중간에 긴 황무지를 거쳐야했지만 아자드는 할라의 손을 꼭 잡고서, 거기 정도는 눈 감으면 금방 건널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할라는 싫은 표정을 지었다가도, 다리가 나을 수도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C.C.는 를르슈를 보고서 한숨을 쉬었다. 감자 수프를 가득 해먹고 나서, 아자드와 할라가 잠들 때까지 기다린 C.C.와 를르슈는 어젯밤에 만났던 곳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쩔 셈이야? 제로에게 보낸다고?”
“…….”
“기어스의 조각은 회수한다. 이게 지금 우리의 목적이자 규칙인 걸로 알고 있는데, L.L. 나만 그렇게 생각했어?”
“아자드는…기어스를 나쁜 의도로 사용하지 않을 거야. 지켜야할 게 있고, 뭐가 옳고 그른지 알아. 나는 그를 이대로….”
“난 놓아주지 않아. 아무리 어리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할 때가 와. 그때 우리가 옆에 있을 리가 없지. 지금 밖에 없어.”
“그럼 할라는?”
“…….”
“할라는 혼자 남아버리잖아. 눈도 안 보이고, 걷지도 못하는 채로, 오빠 없이 홀로 남겨져서…. 그래서 살아가는 의미가 있겠어?”
“있어.”
너와 나나리가 홀로 서있는 것처럼 말이야. C.C.의 마지막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스자쿠와 네가 있었으니까 우리는 해낼 수 있었어. 아자드에겐, 그럴 사람이 없어…. 그러니 기어스라도.”
철컥.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와 잠금쇠가 풀린 총이 를르슈의 이마를 향했다. C.C.는 낮은 한숨과 함께 를르슈,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 죽으면 또 얼마나 오래 걸려서 너를 깨우게 될지 모르겠지만, 난 몇 번이고 널 살려낼 거야. 그러니까 원망은 깨어나서 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
“나를 쏘려고?”
“코드가 불완전하지만, 너는 우선 사람이 아니니까. 나처럼.”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려고 작정한 순간이었다. 를르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일이라면 C.C.의 판단이 옳았다. 총구를 들이댄 순간에 C.C.는 자기 정답 말고는 아무것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게 그녀가 가진 강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를르슈의 상냥함은 계획을 그르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도.
체념한 를르슈의 앞에서 C.C.는 총의 장전을 풀고, 잠금쇠를 걸었다.
“됐어, 이제 밤이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자드와 할라는 여기에서 충분히 눈에 띄는 인물이었으니까 당장에 없어지면 티가 나.”
“…….”
“여기서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마. 알겠어? 네가 아자드와 할라를 보고서 뭘 느끼는지 알겠지만.”
너는 이제 를르슈가 아니잖아.
“그래, 나는 를르슈가 아니지.”
낮게 중얼거리는 를르슈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모른체 하면서, C.C.는 권총을 다시 숨겼다. C.C.의 작은 목소리가 내일의 일정을 정했다.
난민캠프 근처에 도착하면, 기어스의 조각을 회수하고 할라는 캠프 앞까지 데려다주는 것. 그 곳은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떠나서 대륙을 건너면 될 것이다. 따뜻한 바다를 지나가기 때문에 추위도 걱정이 없었다. 그래, 를르슈는 모든 걸 다 수긍했다.
계획에 아자드의 이름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죽어야하는 운명이었으니.
(중략)
쿠루루기 스자쿠의 이야기를, 아니 제로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기호로써는 완전하더라도, 인간으로써는 불완전한 존재로써 살아가던 중이었다. 제로의 가면을 쓸 때에 그는 자신의 설 자리를 찾을 줄 알았고, 그 자리를 지켜내는 방법과 힘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가면을 벗고 나서, 거울을 마주할 때면 그는 자신의 힘이 앗아간 것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몇번이고 반복되는 지옥이고,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착각이 들게 했다. 실제로 스자쿠는 가면을 벗고 나면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본다거나, 샤워를 한다거나, 그러한 일상조차 그는 해낼 수가 없었다. 몇번이고 그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자살 충동이 그를 ‘살게’ 했다. 강제적으로 이어지는 삶은 스자쿠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었다.
그렇게 살았다.
제로는 완벽했다. 스자쿠가 존재하는 방식 중에 가장 선하고 효율적이었다. 제로로 있을 때 스자쿠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기호로서, 상징으로서 존재함으로 인해 쿠루루기 스자쿠의 과거는 사라지고, 오로지 제로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자유를 주었다. 를르슈는 이러한 자유를 이용한 걸까. 스자쿠는 나나리의 뒤에 있을 때면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는 눈앞에 있는 나나리를 위해서 그 거짓된 자유를 진실로 이끌어내기 위한 기적을 일으켰지만, 스자쿠에게는 제로의 가면이 주어져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면의 자유와 가면이 주는 진실과의 괴리감 사이에서 쿠루루기 스자쿠의 삶은 가라앉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하면서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기어스는 소망과 닮아있다고, 그가 말했다. 그와 그녀가 찾고 있는 기어스의 조각은, 누군가가 바랐던 소망의 조각들인 것일까? 그런 걸 찾아서…… 무엇을?
스자쿠는 를르슈와 C.C.가 떠나던 뒷모습을 떠올렸다. 둘과 스자쿠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자쿠의 안에서 를르슈에 대한 의문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자쿠의 를르슈에게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았다.
왜 기어스를 얻기 위한 계약을 맺었어?
왜 제로가 되었어?
왜 유피를 죽였어?
너는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진실이 많은데….
너의 이루고 싶은 소망은?
나나리는……
……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그러한 물음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기도 했고, 유치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나리조차 를르슈를 찾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자쿠는 계속해서 그의 흔적을 좇았으며, 혹시 들리는 이야기 속에서 C.C.나 를르슈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긴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가 죽은 이후, 재회한 이후 일이 년이 고작이었다.
그는 스자쿠를 찾지 않는다.
스자쿠도 그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둘 사이에는 이제 남은 관계라는 것이 없었다. 정의할 것들은 모두 과거의 것이었다. 친구, 원수, 기사, 주군, 공범자. 많은 단어들이 서로를 정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없는 상황을 정의할 만한 단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뭐가 있을까. 제로가 아닌 쿠루루기 스자쿠로서의 밤이 깊어지는 날이면 를르슈의 생각에 빠졌다. 그와 필사적으로 무언가의 관계를 짓고 싶어하는 것은 과거의 관성이라고 생각했다. 스자쿠보다 똑똑한 를르슈라면 정확하게 단어를 짚어서 둘 사이의 애매함을 확실하게 정리해줄 것이다. 하지만, 를르슈는 그를 찾지 않는다. 그리고 스자쿠도 그를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흑의 기사단, 그리고 제로이다. 를르슈는….
를르슈는 나나리의 손을 놓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 그는 무언가 한 차례의 결심을 한 듯 했다. 자신의 죽음이 만들어놓은 세상이, 를르슈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를르슈는 제로의 자리를 스자쿠에게 내밀고 유유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눈에 띄는 미모와 화려한 언변은 를르슈를 세상에서 감추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스자쿠의 기우였던 것 같았다. 를르슈나 C.C.가 연락하지 않는 이상, 스자쿠는 그들에게 닿을 수 없었다.
서로 완벽한 평행선을 그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걸 무엇이라고 하지…. 접점이라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서, 과거 조차 이제 의미가 없어진 사이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 스자쿠는 한숨과 함께 밤잠을 설쳤다. 그런 답이 없는 의문에 빠져드는 날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제 본능적으로 몸이 거부하는 그 물음은 답을 찾아 헤매지 않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운 좋게 살아 돌아온, 나의, 나의… 나의……?
그러한 물음에 오랜만에 빠져든 것은, 서른 두 살의 쿠루루기 스자쿠를 찾는 전화가 왔을 때였다. 그 전화는 예전에 를르슈와 C.C.가 떠나고 나서, 나나리가 만들어놓은 핫 라인의 전화번호였다. 그 전화번호가 부르는 벨 소리가 울리길 얼마나 기대했던가. 하지만 그때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스자쿠는 바라던 전화 한 통에 감동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를르슈, 너는 나의, 나의 무엇이기에, 이것조차 망설이게 만들고 있어?
나는 아직도 너를 미워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지나간 시간들은, 너와 모두 상관없이 흘러버렸는데.
스자쿠는 처음 울린 전화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스자쿠가 받기를 기다리는 듯, 그 전화는 계속 울렸고, 받을 사람이 받지 않자 전화는 곧 끊겼다. 그리고 두 번째 콜이 울렸다. 스자쿠는 계속해서 받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을 몸으로 느끼고 확인하는 것은 더 두려웠다.
그의 무슨 소식이 들리는 것이 두려웠다. 이제 더 이상 증오와 우정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마른 감정에 두려움만이 남은 것은 입안을 쓰게 만들었다. 몇번 마른 세수를 하고 나서 스자쿠는 전화를 아예 꺼버렸다.
제로의 핫 라인이 끊기면, 아마 명예고문인 나나리에게 그 전화가 돌아갈 것이다. 그가 찾는 것은 스자쿠도, 제로도 아닌 나나리여야만 했다. 나나리는 그와 피를 나눈 남매이고, 그를 움직였던 진짜 킹King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스자쿠와 같은 두려움도, 괴로움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순수하게 오빠의 소식을 기뻐할 여동생이다.
불순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전화를 받는 것보단 훨씬 나은 전개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스자쿠에게는 그러했다.
A5
아트지 유광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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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
95 | 스자쿠와 를르슈, 나나리의 어린 시절 <스테이지 제로> | 2019.10.09 |
94 | Marriage Blue | 2019.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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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 이상한 스자루루 일러스트의 고간 | 2019.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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