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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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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소설판이 절판된지도 한참이고 중고서점에서는 구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를 거라 생각한다. <반역> 부분의 에피소드야 넷플릭스에서 시간 좀 투자하면 내용은 다 알 수 있으니, 소설판에서 굳이 그 부분을 읽을 필요는 없다. 개인적으로 코드기어스 소설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Stage - 0 - Entrance(이하 스테이지 제로)> 부분, 즉 <반역> 직전의 스자쿠와 를르슈, 나나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자쿠를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나라를 버린 매국노라고 말하는 부분이 TVA나 극장판보다 소설판 <스테이지 제로>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스자쿠의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또 스자쿠의 개인사를 이렇게 세세하게 다룬 컨텐츠가 없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도 있고, 한편으로는 세 사람이 얼마나 단란했는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제일 처음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은 이제 막 체력을 겨우 회복했지만 예전과 같지 않은 장애를 입은 몸으로 살게 된 나나리의 정신이 무너지는 부분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늘 얌전하게 앉아서 오라버니 한 명만을 기다리는 소녀로만 보이는 나나리는, 사실 그런 침착한 상태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스테이지 제로>에서 묘사되다시피,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빛을 잃고 오로지 오빠 하나에 의존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부분이 순탄치는 않았다.

 

 

어린아이가 점점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결국 아이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과 같은 뜻이다. 넓은 세계는 두려울 것이다.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뛰어들지 않으면 아이는 어른이 될 수 없고 반대로 썩어갈 뿐이다. 그렇다, 정신적으로.

그 사실을 를르슈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일본에 오고 닷새째 되던 날 밤이었다. 우연히 시내에 볼일이 생겨서 외출을 하고 돌아온 를르슈는 나나리의 방을 보고 말문을 잃었다.

쑥대밭이었다.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무수한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찻잔, 유리컵, 그리고 꽃병과 기타 등등 온갖 다양한 깨지는 물건이.

나가기 전에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 막 함께 청소를 끝낸 바닥에 온통—.

일순 를르슈는 누군가의 못된 장난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브리타니아의 황족이 유유자적 여기에 체류하고 있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긴 일본인의 소행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방문도, 창문도 완전히 잠겨있었고 무엇보다 나나리 본인이 그렇게 엉망이 된 방 안에 당연한듯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나나리가 그런 것이었다.

제 손으로 부순 것이다. 깬 것이다. 

물론 이 때만큼은 를르슈도 평소의 다정함을 홱 벗어던지고—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성을 상실하고— 나나리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런데 를르슈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나나리 본인이 자신이 한 짓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를르슈의 질타를 들으면서 나나리는 오히려 기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명백히 왜 혼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한 짓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우선은 나나리 옆에서 깨지는 물건이나 날붙이를 멀찌감치 떼어놓기로 했으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물론 를르슈가 곁에 있을 때는 나나리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를르슈가 없을 때였다. 의지해야 될 오빠와 떨어지면 소녀의 정신은 자아를 상실해버리는 듯했다.

외출에서 돌아오자 서랍장 속에 잇던 옷이란 옷이 모조리 방에 흩어져 있던 때도 있었다.

벽이라도 계속 쳐댄 것인지 작은 손이 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어있던 때도 있었다.

침대 시트가 갈기갈기 찢겨있던 적도 있다.

심지어 옆으로 자빠진 휠체어 옆에 나나리 자신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적도 있다.

를르슈는 망연자실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지금에 와선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그것은 나나리가 보내는 사인이었다. 아무데도 가지 말아달라는, 그저 자기 곁에만 있어 달라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를르슈는 늘 나나리의 곁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낳았다. 를르슈가 곁에 있으면 나나리도 주위를 다치게 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나나리의 마음은 더더욱 를르슈 한 명에게만 열릴 뿐이었다. 

 

 

<스테이지 제로>에서 직접 발췌한 부분이다.

나나리의 닫혀있던 마음과 몰려있던 를르슈의 상황은 스자쿠와의 만남을 통해서 극적으로 타결된다. 나나리는 스자쿠를 만남으로써 일본에 와서 계속했던 긴장을 풀고, 오빠 말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사람- 즉 스자쿠에게 의지하게 된다.

나나리의 그런 변화에 를르슈는 를르슈 답게, ‘황당하고 동시에 분하기도 했다. 어째서 자신은 못했던 일을 이 소년은 해낸 것일까?’라고 반응하며, 또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소년을 제대로 보게 된다. 

 

를르슈가 진심으로 스자쿠를 믿어볼 마음이 생긴 것은 나나리가 스자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나리의 닫힌 세계에 빛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통해서 를르슈 또한 나나리에 대해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고 하더라도 어린애들은 어린애들이며, 피붙이는 먼 타국에서 단둘 뿐이라는 것의 상황이 를르슈도, 나나리도 괴롭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괴로움의 해방이 스자쿠와의 만남인데, 단 몇 개월이라고 하더라도 를르슈와 나나리에게 있어서는 서로를 제외한 타인을 받아들인 최초의 시간이었기에 각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