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자쿠 여체화 / 를르슈 여체화 / 백합GL입니당
그것은 쿠루루기 스자쿠의 오랜 염원으로, 아마 평생을 가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올해도 거절당하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말을 걸었지만 돌아온 승낙에 되려 놀랄 지경이었다. 정말? 진짜로? 몇 번이고 물어보자 귀찮은 듯해도 를르슈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도 와, 라고.
쿠루루기 스자쿠와 를르슈 람페르지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같은 반이며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서로의 집에 놀러가는 것은 물론, 방학에는 같이 여행도 다닐 정도로 친하다.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을 대라고 하면 바로 스자쿠의, 를르슈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친하다. 두 사람, 엄청 친하구나.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스자쿠는 어설프게 웃기만 했다. 옆에 있던 를르슈가 이정도면 악연이지, 라고 말하는 것도 흘려들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여도 안되는 건 안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친구가 되었던 첫 해, 스자쿠는 를르슈로부터 ‘안 돼’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다시 물었더니 ‘안된다니까’라고 를르슈는 두 번 더 말하지 않았다. 가방을 싸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평소라면 늘 떠들썩하게 구는 스자쿠가 조용하니 를르슈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둘러댈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우리집은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랑 보내서….”
“로로랑 나나리?”
“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오고 그래. 스자쿠는 재미 없을거고.”
“를르슈도 재미 없어?”
“그냥 그래.”
“그럼 나랑 같이 놀자!”
“말했잖아,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랑 보낸다구.”
를르슈의 집이 스자쿠의 집보다 먼저였기 때문에, 둘은 금방 헤어졌다. 스자쿠는 울먹거리는 눈으로(보통 이런 표정을 지으면 를르슈는 어지간해선 다 허락해주었다.) 를르슈를 쳐다보았으나, 를르슈는 매정하게 문을 닫고 나섰다.
를르슈도 사라졌으니 애꿎은 눈물도 흘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스자쿠는 금새 눈물이 쏙 들어갔지만, 기분은 여전히 나빴다.
—나는 를르슈랑 가장 친한 친구인데, 왜 크리스마스는 따로 보내는거야? 서로 선물도 주고 받고, 나는 나나리랑 로로랑도 친하고!
터벅터벅 걷다 보면 아가씨, 하고 저를 맞이하는 하인들이 줄 서있는 쿠루루기 대문 앞에 도착했다. 처음 스자쿠의 집에 놀러왔을 때, 를르슈가 ‘너도 힘들겠어’라고 말한 게 생각났다. 를르슈네 집처럼 아늑하진 않지만 그래도 돌아다니다보면 재미있는 곳인데.
시무룩한 얼굴로 가방을 넘겨주고, 스자쿠는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달력에 표시된 25일에 검은 줄을 그으면서 울컥했다.
12월 5일에 를르슈의 생일파티는 같이 했잖아. 왜 이제 와서 가족이 아니라고 끼워주지 않는거야? 를르슈 대신에 달력을 붙잡고 물어봐도 답은 없었다.
그 다음 해, 를르슈의 생일파티에 스자쿠는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를르슈가 가지고 싶다고 했던 공학용 계산기(어째서?!)를 사서 주었다. 신형 모델로, 함수식을 입력하면 그래프도 나온대.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나나리도 예쁜 분홍색이네요, 라고 말했고, 로로도 누나가 계속 갖고 싶어했으니까, 라고 호응이 좋았다.
그래서 스자쿠는 다시 틈을 타서 말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더 좋은 거 해줄게, 를르슈.”
그 말에 계산기를 보며 반짝거렸던 를르슈의 눈이 흐릿해지면서, 음, 하고 망설이는 소리가 났다. 옆에서 가만히 있던 로로가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끼리 보내는 거잖아요? 스자쿠 씨는 안 되죠.”
“로로!”
“하지만 로로 말이 맞지 않나요? 크리스마스는 가족끼리 모이고…. 스자쿠 씨도 가족들이랑 보내죠?”
“나나리….”
그 두 사람의 말은 비수처럼 어린 스자쿠의 가슴을 파고 들어서, 가장 최악은 어쩔 수 없이 웃는 를르슈였다.
“미안, 크리스마스는 힘들 것 같아.”
학교에서도 괜찮다면 선물 정도는 줄 수 있지만…. 를르슈는 두 동생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스자쿠는 또 다시 그 사이에 껴주지 않는 를르슈에 기분이 상해버렸다. 케이크를 우적우적 먹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를르슈가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지만 필요 없다고 말한 뒤,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로로가 따라잡았으면 몰라도, 를르슈는 무리인 속도였다.
집에 들어오고 나면 영문을 알 수 없게 카구야가 있었다. 스자쿠와 다르게 아가씨 그 자체인 카구야는 스자쿠보다 어린데도 우아한 자세로 차를 내리는 법도 알고 있었다.
“스자쿠, 그렇게 마음을 못되게 쓰면 안 됩니다.”
“무슨 상관이야?”
“또, 말투도 너무 험해요! 그렇게 굴면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도 안 줄거라고요.”
“아직도 그런 거 믿고 있어? 바보 같아.”
“실재하는지의 여부와 달리 마음과 기분의 문제죠.”
스자쿠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카구야에게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너, 진짜 짜증나!”
도장으로 도망갔다. 집중하지 못해서 달리기 50바퀴를 뛰었지만 스자쿠는 지치지 않았다. 분노는 또다른 에너지처럼 스자쿠를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완주 끝에 스자쿠는 강제 귀가를 명령 받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목욕을 하고, 스자쿠는 베개가 터질 때까지 이부자리를 두들겨 팼다.
다음날, 얼굴이 퉁퉁 부은 스자쿠를 보며 카구야가 한숨을 쉬었다. 왜 하룻밤 머물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카구야랑 있으면 스자쿠는 기분이 나빴다. 어제부터 계속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뭐가 문제인가요, 스자쿠?”
“네가 문제야.”
“저는 스자쿠의 관심 같은 거 안중에도 없는데요.”
“그럼 너네집으로 가!”
“어라, 삼촌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이번 크리스마스 때 쿠루루기 가문에서 가족 모임을 할 예정이에요. 저는 일손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조금 일찍 불렸지만.”
“…가족 모임?”
“아무래도 스자쿠보다 제가 더 믿음직스럽나보죠.”
스자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복도를 달려도 다들 아가씨, 하고 부를 뿐이지 막지 않았다. 학교로 달려가는 중에 눈앞에 를르슈가 나타났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인사를 할까. 어차피 같은 반이니까 같이 가야하고. 스자쿠는 속도를 줄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를르슈를 앞지르며 빠르게 뛰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다 싫었다.
먼저 교실에 도착하고,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에 얼굴을 박다시피 고개를 숙였다. 를르슈가 오든말든, 난 신경쓰지 않아! 저기압인 스자쿠의 주변에 오는 애들은 없었다.
딱 한 명만 빼고.
“…스자쿠?”
를르슈였다. 스자쿠는 무시할 생각이었다.
“곧 조회시간이니까 일어나는 게 좋을 거야.”
“알아서 일어날거야.”
생각대로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스자쿠는 책상 서랍 사이에 넣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선물을…가져왔는데.”
“응?”
또 다시. 스자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빨간색 포장지에 초록색 리본이 달린 상자. 그리고 화들짝 놀란 를르슈는 스자쿠의 책상 위에 그것을 두었다. 이게 뭐야, 라고 하기에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면 알 수 있었다.
“조금 이르지만, 당일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 것 같고….”
“조금이 아니라 엄청 이르잖아. 지금 12월 6일이라고?”
“뭐야, 날짜가 마음에 안 들면 23일에 다시 주면 되잖아!”
“23일? 더 애매해!”
“그럼 내놔!”
“먼저 준 건 를르슈잖아!”
내 꺼야! 스자쿠는 선물을 꼭 쥐고 있다가 를르슈와의 대화를 떠올리고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23일? 24일이 아니라?”
“응? 아, 음, 그렇지. 기본적으로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파티를 하잖아?”
“…가족끼리?”
“올해는 다행히도 일본에서 하지만, 내년엔 다시 브리타니아에서 하는 모양이야.”
“아.”
너 브리타니아 사람이지. 스자쿠의 멍청한 대답에 를르슈는 한숨만 쉬었다. 얼마 못가 선생님이 왔기 때문에 각자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바스락거리는 선물을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스자쿠는 답지 않게 머리를 굴렸다. 올해는 일본, 원래는 브리타니아에서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럼 매년 크리스마스를 브리타니아에서 보낸다고?
그날 하교길은 화해를 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를르슈가 준 선물은 연보라색의 스포츠타월이었다. 급하게 사느라 그것 밖에 못 구해서…. 를르슈는 내년에 제대로 된 걸 주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년에도 크리스마스는 가족끼리 보낼 거잖아.”
“…그건 미안해.”
순순히 사과를 하는 를르슈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괜찮다고 말했다. 작년에도, 어제도 그렇게 화를 냈는데.
“나, 나도 올해는 가족끼리 보내고! 카구야가 와서 벌써 준비 중이야!”
“벌써?”
“그, 그치, 유난이지? 보름 넘게 남았는데 말이야!”
“카구야…라면 여동생이지? 스자쿠도 선물을 준비해야하지 않을까?”
“카구야한테? 왜?”
“가족이니까…?”
“걘 내가 주는 거 다 싫어할 걸.”
“넌 이상한 걸 주잖아. 장수풍뎅이 같은 거 말고.”
“멋있는데!”
“난 스자쿠가 해바라기 줬을 때 좋았어.”
그 해바라기는, 작년 여름방학 때 스자쿠가 를르슈를 위해서 쿠루루기 가문이 소유한 밭에서 뽑아온 것이었다. 줄기를 자르면 분명 빨리 시들테니, 아예 뿌리 채 줘버린 것이라, 맨손으로 땅을 파서 지저분한 것도 모른 채로 ‘예쁘다’라고 말했으니 ‘가져!’라고 준거였다. 를르슈는 꽃보다 스자쿠의 손을 걱정했고, 그 손이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한 것에 만족하며 람페르지 가의 뒷마당에 심었다.
무럭무럭 자라나서, 올해도 예쁘게 폈다고 스자쿠를 데리고 자랑한 를르슈였다.
“카구야는 해바라기 씨 정도면 되지 않을까?”
“너무하네, 여동생이잖아.”
"를르슈가 모르나 본데, 카구야는 너나 나나리처럼 귀엽지 않아.”
“내가 귀여워?”
“응?”
“귀여운 건 스자쿠야. 나는 귀엽지 않아. 나나리가 귀여운 건 인정하지만.”
“…뭐?”
스자쿠는 팔에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귀엽다고? 귀여워?
“아니지, 를르슈가 귀여운거야! 솔직히 말하면 로로랑 나나리랑 같이 있어도 제일 귀여운 건 를르슈잖아!”
“뭐?! 로로랑 나나리는 세계에서, 아니 우주에서 제일 귀여워!”
“들어 봐, 를르슈랑 나나리랑 로로는 셋 다 가족이지? 가족이 귀여운건 당연한거야. 그렇지만 나는 남이잖아? 남인 내가 봤을 때 셋 중 가장 귀여운 건 를르슈야. 어때, 정답이지?”
“가족이 귀여운 게 당연하다니. 그럼 너도 카구야 씨를 귀여워해야지!”
“카구야는 가족이 아니야!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못생겼어!”
씩씩거리다가 결국 진 것은 스자쿠였다. 를르슈가 울었기 때문이었다.
“로로랑 나나리가 제일 귀엽단 말이야…!”
엉엉 우는 를르슈를 달래면서, 스자쿠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맞아, 로로랑 나나리가 제일 귀여워, 그리고 그 다음은 를르슈야. 우는 와중에도 를르슈는 로로-나나리-스자쿠-카구야-자기 순으로 귀엽다고 말을 했다. 스자쿠는 달래면서도, ‘너 카구야 얼굴 본 적 있어?’라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우는 를르슈 앞에서는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스자쿠의 생일이나, 를르슈의 생일에 서로의 집에서 간단한 파티를 열었다. 카구야나 나나리, 로로를 데리고서 놀이공원을 가기도 하면서.
“이런 아름다우신 분이 스자쿠의 친구라니! 스자쿠의 쓸모를 이제 알았네요!”
“아, 나는, 별로…. 카구야 씨야말로 예쁘고….”
“나나리 씨와 로로 씨도! 스자쿠로 태어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입니다!”
카구야의 칭찬에 어쩔 줄 몰라하는 를르슈를 빼돌리면서, 스자쿠는 카구야를 노려보았다. 내 친구야, 그만 괴롭혀. 친구의 친구도 친구잖아요? 스자쿠, 질투하지 마세요. 어라, 너랑 내가 친구의 친구였던가?
카구야가 나나리와 로로에게 종이접기를 가르쳐주고 있을 때, 스자쿠와 를르슈는 스자쿠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를르슈는 생일 선물 뭐 가지고 싶어?”
“아직 7월인데….”
“를르슈가 좋아하는 건 대체로 비싸서 용돈을 많이 모아야 한다구!”
“아무거나 줘도 상관 없어.”
“정말? 바퀴벌레 준다?”
“주면 정말 절교다. 내년에 중학생 맞아?”
“뭐야, 중학생이랑 바퀴벌레는 상관 없잖아.”
그래, 중학생이니까 내가 직접 고민해서 줄게! 스자쿠는 웃으면서 말했다. 를르슈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네 생일을 즐겨야지, 왜 한참 후인 내 생일이야? 시덥잖은 이야기와 함께 를르슈는 자연스럽게 브리타니아 이야기를 했다.
“올해 크리스마스도 브리타니아에서 하나봐. 정말 매년 가는 것도 일이야.”
“또 브리타니아? 힘들겠네. 안 가면 안 돼?”
할아버지들과 카구야와 있느니 를르슈랑 바깥에서 눈싸움이라도 하는 게 즐거울 것 같았다. 를르슈에게 브리타니아는 고향이겠지만, 스자쿠에게는 낯선 타지일 뿐이었다.
“다들 좀처럼 만나기 힘드니까…. 만나는 건 즐거워.”
“…….”
“아, 그래. 혹시 스자쿠가 갖고 싶은 거 있어? 크리스마스가 한참 지나서 오겠지만 그래도 브리타니아에서만 판다거나…. 크리스마스 에디션 같은 거도 브리타니아 한정판도 있고 그렇다는데.”
“필요 없어.”
스자쿠의 단호한 거절에 를르슈는 고개를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쏟아지면서 그녀의 표정을 가렸다. 그러다가 축 처진 어깨가 단숨에 기를 세우며 올라왔다.
“맞아, 스자쿠네 집이라면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지! 괜한 걸 물었어. 미안해.”
“아니, 그….”
“시간이 늦었네, 이제 가 볼게.”
“를르슈!”
일어서려는 를르슈를 붙잡고서, 스자쿠는 울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이제 곧 중학생인데, 이런 걸로 매달리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를르슈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같이 있으면 안 돼…?”
“…….”
“안 돼?”
를르슈는 늘 그렇듯, 미안한 얼굴로 스자쿠의 손을 잡았다. 그건…. 이어지는 말을 듣기 싫어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놓았다.
“시간, 늦었네. 카구야도 보내야하니까 괜찮다면 같이 차 타고 돌아갈래?”
“으, 응?”
“나는 도장에 가서 연습도 해야하고.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워, 를르슈.”
그렇게 먼저 자기 방을 뛰쳐나간 스자쿠는 카구야에게 말을 전하고는, 도장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다른 친구들이 가족끼리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왜 를르슈한테만 그럴까? 를르슈도 곤란하잖아. 친구면 더 이해해줘야지. 나는 왜 이러지? 정말 이상해. 이런 이상한 애랑 를르슈는….
이상한 애가 되면 안되는데. 스자쿠는 턱까지 차오르는 숨에도 질리지 않고 달렸다. 아, 이상하잖아. 이건 이상해. 이상해.
그 이상함은, 를르슈의 생일이 지나고 크리스마스, 연말이 지나고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둘이서 잘 입지 않은 치마를 매일 같이 입고 다니는 중학생이 되고 나서도. 예쁜 를르슈는 어딜가든 동경의 대상이다. 부활동은 하지 않지만, 검도부 활동으로 늦게 끝나는 스자쿠를 도서관에서 기다려주는 상냥함도 여전하다.
생일에는 케이크와 선물을, 방학에는 같이 과제를, 시험기간에는 공부를. 계속 같이 있지만, 스자쿠의 마음 속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남아있었다.
다시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를 앞에 두고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기말고사도 끝났고, 를르슈의 생일도 지났고, 스자쿠의 마음이 가장 가라앉을 때였다. 알지도 못하는 를르슈의 친척들에게 를르슈를 빼앗긴다. 하지만 원래 를르슈는 그쪽 사람인데. 뒤숭숭한 마음으로 그녀의 옆을 걷고 있으면 를르슈는 귀여운 것을 찾아내서 쇼윈도 너머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핑크? 아니, 노란색인가…?”
“시계?”
“응. 스자쿠는 어떤 게 제일 괜찮아보여?”
“무난한 걸로 치면 검은색일까…. 교칙에도 안 걸리고.”
“너무 칙칙하지 않을까.”
“나나리한테?”
“아니, 그…유피, 유페미아라고, 친척 중에 나보다 한 살 어린데,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시계가 갖고 싶다고 해서.”
“…그래?”
“평소에는 분홍색 계열을 좋아해서, 그런 계통으로 사면, 또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비슷한 걸 주는 게 아닐까, 그래서 좀 다른 색으로…. 그건 또 모험이지? 안 어울릴 수도 있고.”
“를르슈가 갖고 싶은 걸 주는 건 어때?”
“나?”
“맘에 안 든다고 하면 를르슈가 쓰면 되잖아.”
“…너, 선물이 뭔지 알고 있어? 남한테 주는 거야.”
“그럼 늘 그랬듯이 핑크를 사던지.”
“…….”
를르슈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에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들어가서 더 보면 되잖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라고 하면 를르슈는 스자쿠의 옆 얼굴을 째려보면서도 당당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귀찮긴. 스자쿠는 진열된 시계를 열심히 찾는 를르슈를 보면서 다른 시계 하나를 꺼내달라고 했다.
다른 곳에 삼매경인 를르슈 몰래 물건을 사는 것은 쉬웠다. 결국 핑크색으로 마음을 굳힌 를르슈는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쉬며 포장을 기다렸다.
“를르슈는 울보야.”
“네가 말을 험하게 해서 그래.”
“글쎄?”
“또.”
“나나리나 로로 앞에서는 안 그러잖아.”
“나한테만?”
“…아, 포장 다 됐다.”
예쁘게 리본까지 달린 상자를 받아, 가방에 넣는 를르슈는 스자쿠를 슬쩍 쳐다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보았지만, 스자쿠는 원래 말투가 험했고, 남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도 어설펐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고, 정말로 를르슈 앞에서만 아니면 그녀는 다정하고 상냥하고, 또 자기 주장을 할 때에는 지지 않는 기백으로 나선다.
타인의 모범이 되는 그 자체, 쿠루루기 스자쿠가 를르슈에게만 묘하게, 이런 식으로 거칠게 굴 때마다, 를르슈는 속이 상했다. 남들에게 하는 것처럼 상냥하게 말해줄 순 없는 건가? 그런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스자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말도 하지 않고 를르슈의 집앞까지 다다르면, 스자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야, 하고 물어보면, 열어봐, 하고 답이 돌아온다. 방금 전, 가게에서 샀던 시계였다. 를르슈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을 생각하면 검은색이 무난하겠지만, 스자쿠가 준 시계는 흰색이었다.
“흰색….”
“를르슈는 검은색보다 흰색이 더 잘 어울리니까. 이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아, 그럼 스자쿠, 브리타니아에서 내가.”
“아니, 내 건 됐어. 잘 들어가.”
그 해 크리스마스, 브리타니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은 를르슈는 어느 때보다 우울했다. 스자쿠가 선물한 손목시계를 찼지만 어색했다. 를르슈의 액세서리 취향과 늘 반대인 흰 시계는 로로와 나나리에게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를르슈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파티장에 들어가기 전에 시계를 풀까 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유페미아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를르슈는 오랜만에 만나는 여동생을 보고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를르슈! 오랜만이야. 나나리랑 로로는?”
“피곤해서 자고 있어. 저녁에는 나올거니까 걱정 마.”
“일본은 멀지. 역시, 브리타니아로 돌아오는 게 좋지 않을까?”
“일본도 나쁘지 않아. 참, 유피. 선물.”
선물 상자를 내밀면 유페미아는 상상했던 대로 좋아했다. 코넬리아 언니한테 부탁하면 더 좋잖아, 하고 를르슈가 말을 하면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코우 언니는 나한테 어울리는 것보다 제일 좋은 거만 산다구. 지난 출장에서 손목시계를 사달라고 부탁했는데.”
“아, 그 바이올렛 다이아몬드 시계….”
“그래! 어울리는 걸 떠나서 너무 비싸고…! 아, 를르슈도 시계 샀네. 나랑 같은 모델?”
“그건 잘 모르겠어, 나도, 선물 받은거라.”
“나나리한테?”
“아니, 스자쿠.”
를르슈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에 유페미아는 한숨을 쉬었다.
“를르슈, 나는 그 사람 싫어.”
“뭐? 스자쿠를 본 적도 없잖아.”
“를르슈가 브리타니아에 안 돌아오는 이유가 그 사람 때문 아니야?”
“그럴 리가…. 일본에는 어머니 사업도 관련되어 있고, 애쉬포드도.”
“학생인 우리랑 관련 없잖아. 나는 언제든지 를르슈를 보고 싶어. 로로랑 나나리도 물론. 크리스마스에 겨우 만나는 것도 싫어.”
“코넬리아 언니가 들으면 섭섭하겠어.”
“언니도 를르슈가 없어서 외로워. 슈나이젤 오라버니만 해도.”
“유피….”
“브리타니아에 돌아오면 안 돼?”
“메리 크리스마스, 유페미아, 를르슈.”
양반은 되지 못하는 오빠의 등장이다. 슈나이젤은 두 여동생에게 인사를 했다. 언제든 를르슈를 시험에 들게 하여 정답이 나올 때까지 들들 볶는 슈나이젤은 를르슈에게 썩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다. 작년에도 ‘일본에서 사귄 친한 친구’의 이름을 말하라고 해서 그동안 숨겨왔던 스자쿠의 존재를 알리고 말았으니까.
그런 를르슈의 심정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틀림 없는 슈나이젤은 평소와 같이 대했다.
“를르슈, 오랜만에 체스라도 할까?”
“아직 피곤해서요, 조금 있다가.”
“그렇지, 일본은 머니까. 내가 실례했군.”
“슈나이젤 오라버니도 를르슈가 브리타니아로 돌아왔으면 좋겠죠?”
“유피!”
“…더 자주 만나면 좋겠지. 그렇지만 유페미아, 그건 를르슈의 의지와 그 집안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말할 수 없어.”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 유피. 그러니까, 음, 조금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노력할게.”
슈나이젤까지 완고하게 말하고 나니, 유페미아는 기운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다가 손 안에 선물 상자를 보고서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럼 나도 노력할게, 를르슈를 자주 만날 수 있게!"
“으음, 음…. 코넬리아 언니한테 먼저 허락 받아.”
“그러면 당연히 못 만나잖아!”
“거기서부터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유페미아를 달래듯이 코넬리아가 나타나고, 파티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을 무렵에 마리안느가 자고 있던 로로와 나나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나이가 맞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때로는 자랑과 험담을, 그러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
를르슈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곤욕이었다. 아무 의자에 앉아서 입고 있는 드레스의 무늬나 세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은 스자쿠가 선물한 흰 시계가 좀 위안이었다. 체스판이 열리고 있는 곳에서는 슈나이젤이 연승을 달리고 있었다. 예년과 같았다면 를르슈가 마지막에 그의 상대를 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올해만큼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를르슈, 나는 그 사람 싫어.
를르슈가 브리타니아에 안 돌아오는 이유가 그 사람 때문 아니야?
모든 사정을 걷어내고, 를르슈만의 감정으로 부딪힌다면, 유페미아의 말은 사실이다. 스자쿠와 헤어지기 싫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실 이 크리스마스 파티도 달갑지 않아…. 스자쿠와 떨어져 있으면… 스자쿠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또 친한 친구로 만들거야….
“를르슈!”
“…코넬리아 언니.”
“클로비스가 졌어. 저 녀석도 많이 늘었지만 슈나이젤 오라버니도 여전하시지. 아, 아직도 피곤한가?”
“아뇨, 괜찮아요. 가겠습니다.”
“그래, 내일 다시 출국이던가?”
“네.”
“여기까지 왔으면 한 달 정도 지내면 좋을텐데. 일본은 지금 방학이지?”
“그렇긴 하지만….”
“유피 말로는, 거기에 네 친구가 있어서 못 온다고 하던데….”
“비슷하죠. 대부분의 친구들이 일본에 있으니까.”
“나로써는, 네가 조금이라도 어릴 때 브리타니아로 왔으면 좋겠다만…. 어차피 너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브리타니아에 있고. 친구는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무례한 말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코넬리아의 이야기는 틀린 곳이 없었다.
브리타니아야말로 를르슈가 살아갈 곳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를르슈가 원하는 사람들이다.
친구는, 다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스자쿠는….
울적해진 를르슈의 앞에 슈나이젤은 봐주듯이 져주고 있었고, 그에 기분이 나빠진 를르슈는 ‘제대로 상대하세요’라며 승부수를 내던졌다.
체크메이트를 외친 것은 슈나이젤이었다. 컨디션이 안 좋았나보구나, 를르슈. 답지 않게 실수가 많았네. 맞는 말이지만, 듣기 싫었다. 한 세트 더 할까? 슈나이젤의 도발에 를르슈는 응하지 않았다.
졸리니까 쉬러 간다는 말을 하고서 호텔 방을 찾아 들어가서, 를르슈는 드레스도 벗고 화장도 지웠다. 그제서야 제 얼굴이 보였다. 재미 없고 지루한 얼굴. 마지막으로 시계를 풀면서 스자쿠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를르슈에게만큼은 어린 모습을 보여주는 스자쿠. 만약 스자쿠가 를르슈에게도 상냥하고 다정하게, 남들처럼 대한다면….
스자쿠한테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가?
똑같아야…하지 않나?
우리는 친구니까.
친구니까 똑같이…상냥하고 다정하게.
누구에게나 다정한 스자쿠의 모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험한 말을 하고,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는 건 를르슈만 알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를르슈만.
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른 가족들의 배웅을 건성으로 받으며, 일본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이제 도착하면 보는데. 언제든지. 일본에 있으면….
일본에 있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스자쿠가 있는 일본에 있어야지 만날 수 있어. 를르슈는 그 결론에 도달한 이후, 바로 스자쿠를 만나러 갔다. 늦은 저녁이었다. 밤이 되기 전에 스자쿠를 만나야한다는 생각에 를르슈는 있는 힘껏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에 도착한 커다란 저택 앞에서, 스자쿠는 외출 중이었다. 그럼 도장인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한 쪽은 스자쿠, 다른 한 쪽은 모르는 남자였다.
도복 차림인 걸로 보아서는 도장 사람인 거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이 오가는 지는 몰라도, 스자쿠 특유의 멋쩍은 표정이 가로등길 불빛에도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의 스자쿠는 대부분 여유로운 표정으로, 부드러운 분위기인데. 를르슈 앞에서만 그런 어리광을 부리고….
저 사람이 꼭 를르슈인 것처럼 웃고 있어서, 를르슈는 순간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잃을 뻔 했다.
내가 있는 곳은 건물의 그림자 뒷편.
스자쿠의 옆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무릎에 힘이 빠져서 주저 앉았다. 바이바이, 하고 헤어지는 두 사람.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들킬까봐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눈물을 참다가,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울었다. 훌쩍훌쩍 우는 자기 숨소리가 기분이 나빴다.
집까지 겨우 걸어가서, 무슨 정신인지도 모른 상태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지 않고 자서 감기에 걸려, 사흘 동안 앓았다.
눈을 뜰 때마다 스자쿠를 생각했다. 이제 내가 일본에 온 걸 알 텐데…. 왜 오지 않아? 부르지 않으니까?
스자쿠는 내가 부르기 전에는 오지 않는구나.
스자쿠에게 나는.
“를르슈, 아팠어?”
“응? 아, 조금. 티가 나나?”
“엄청!”
“뭐, 이제 다 나았으니까 옮지는 않을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팠으면 부르라고. 병문안이라도 갈 거 아니야?”
“…괜찮아.”
“뭐?”
“어머니도 있었고, 로로랑 나나리도…. 병문안까지 올 정도는 아니야.”
“…….”
그렇게 말하고 나면, 스스로도 매정했나 싶었지만, 스자쿠는 화내지 않았다. 평소라면, ‘걱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하고 말도 안되는 말을 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일까. 스자쿠의 걱정은 정말 쓸데 없는 걱정이라, 잔소리가 없는 게 좋은 거지만…. 를르슈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날 저녁에 보았던 남자를 떠올렸다. 스자쿠 옆의 그 남자. 그래, 그 사람을 떠올리는건가?
스자쿠에게는 친구 따위 신경 쓸 시간은 없는거야.
그 이후의 크리스마스 이후로, 둘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를르슈는 스스로 변함없다고 생각했다. 스자쿠가 달라지고 있는 거라고 느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쿠루루기. 를르슈에게까지 친절한 쿠루루기 스자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고, 정의롭고, 어른스럽고. 이제 를르슈가 아는 스자쿠는 없었다.
그럼 이 일본에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고민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몇년이 지나서,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풀리지 않았다. 스자쿠와 등하교를 같이 하고, 그녀의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비참했다. 친구에게는 친구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를르슈에게는 달갑지 않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일본에서 보내기로 했어.”
“네?”
“일도 바쁘고, 애쉬포드도 정식으로 소개할 후계자도 있고…. 저쪽도 이제 가족 모임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엔 얽힌 일이 많아서.”
“크리스마스 파티는 없는거예요?”
늘 산더미 같이 쌓인 선물을 풀어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나나리는 아쉬운듯이 물었다. 마리안느는 턱을 괴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저쪽에서도 슈나이젤이랑 유페미아 밖에 못 온다고 하니까.”
“선물은요?”
“로로, 선물은 언제든지 받을 수 있잖아.”
로로와 나나리는 선물이 아쉬운 눈치였지만, 곧 이어지는 파티 준비 이야기에 흥미를 잃었다. 가봐도 돼요? 로로가 먼저 묻고, 마리안느가 허락하면 나나리가 발빠르게 먼저 빠져나갔다. 남은 를르슈 혼자서 한숨을 쉬었다.
“이번 파티에는 미레이도 부를거야. 인원수도 예정보다 반으로 줄었으니 조촐하긴 하지만…. 아, 스자쿠를 부르는 게 어때?”
“네?”
“다들 스자쿠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를르슈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니까.”
“…….”
“초대장이 필요하면 말하렴. 스페셜 게스트는 두 명으로 충분하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
크리스마스에 스자쿠?
태어나서 처음 엮어보는 조합은 신선하다 못해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아침에 겸업으로 하는 검도부 아침 운동으로 스자쿠는 먼저 학교에 갔고, 를르슈는 사고가 나지 않는게 다행일 정도로 멍하니, 멍하니 학교에 왔다.
연습을 마친 스자쿠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배고파—‘하며 빵을 먹는다거나, 어딘가 멍한 를르슈에게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 것에 를르슈의 제정신은 돌아왔다.
“입에 있는 거 다 먹고 말해.”
“으응.”
“스자쿠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해?”
“크리스마스? 그 전에 네 생일이 먼저 아니야? 음, 를르슈 생일에는 를르슈의 생일 파티에 갈 생각인데.”
“아니, 크리스마스다.”
“글쎄….”
“카구야 씨랑 약속이 있다거나….”
“하하, 를르슈, 정말 어디 아파?”
를르슈는 손목시계를 흘긋 쳐다보았다. 수업 시작까진 시간이 있었다. 이야기를 전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럼 우리집에 올래?”
“네 생일파티? 안 불러도 갈건데?”
“아니, 크리스마스 파티 말하는거야.”
“…크리스마스 파티?”
“선약이 없다면 너를 초대하고 싶은데.”
“크리스마스?”
“응. 괜찮다면.”
“크리스마스?”
“…너 아까부터 일부러 그러는거야?”
“아니, 그, 를르슈가… 크리스마스는 가족끼리라고, 옛날부터. 나는 가족이 아니니까….”
왜인지 기가 죽은 느낌의 스자쿠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제 가족이나 다름 없는 친구잖아. 나는 널 초대하고 싶은데.”
“…!”
“올 수 있어?”
“갈래! 갈 거야! 지구가 망해도! 우주가 폭발해도!”
“안 망하고 안 폭발해. 남의 생일에 무슨 그런….”
스자쿠는 선생님이 오기 전까지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떠들었다. 이전까지 교토 6가의 어르신들끼리 회합을 하고, 남은 꼬맹이 둘인 스자쿠와 카구야만 남아서 눈사람이나 만들다가 케이크의 조각도 보이지 않는 일식을 먹었고, 각자 집에 돌아가서, 26일에 과다 재고로 남은, 이미 지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혼자 먹다 버리는 게 일상이었다고 했다.
처참하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를르슈네 집 크리스마스 파티는 어떨까!’하고 기대에 부푼 스자쿠를 보고 있으면, 그 기대에 응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학기말 서류 작업이 한창인 학생회실에서 먹기로 했다. 스자쿠의 몫까지 싸온 도시락은 오늘도 영양만점으로, 를르슈는 크게 한 입, 맛있게 먹는 스자쿠를 보며 뿌듯해했다. 늘상 그렇듯, 미레이는 늘 마지막에 등장했다. 그녀다운 지각에 를르슈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파티에서도 늦으면 안 돼요, 라고 말하자, 분위기는 변했다.
스자쿠의 분위기가.
“회장도 가나요, 를르슈네 크리스마스 파티?”
“뭐~ 어쩔 수 없지. 이제 나의 모라토리엄도 끝이니까.”
“오기 싫으면 마세요, 회장.”
“농담도 못하겠어, 루루쨩. 당연히 가고 싶지. 모처럼 초대받았으니 가는 게 인지상정! 아, 기대되는걸. 인사는 예전에 다 했지만 공식적인 자리는 처음이니까 긴장한다구~!”
“이미 알아요? 를르슈네 가족들?”
“이번에 오는건 유페미아 양이랑 슈나이젤 씨라고 들었는데, 쉬워보여도 다들 어려우니까 스자쿠도 걱정이 많을 거야!”
“……그, 스자쿠는 유피랑 슈나이젤 오라버니에 대해서 모르니까요.”
“어? 아는 사이 아니야?”
이런, 하고 미레이는 서류를 흔들었다. 그보다 중요한건 코앞에 닥친 이 서류의 마감이라는거지! 스자쿠는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도시락을 입에 구겨넣고 있었고, 를르슈는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짝 다가온 미레이가 ‘미안’이라고 속삭였지만, 스자쿠의 기분은 더없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미안’으로 끝날 게 아닌데….
점심시간에도, 그 이후의 수업시간, 쉬는시간, 방과 후의 학생회실로 돌아가는 길까지.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미레이는 눈치껏 분위기를 이끌어, 빠르게 자리를 파했다. 평소라면 검도부에 자진적으로 연습을 나갔을 스자쿠는 오늘따라 바로 집에 간다.
이 상황에 대한 어떤 타계책도 짜지 못한 채로, 를르슈는 스자쿠의 뒤를 따랐다.
“를르슈.”
“…응?”
“를르슈랑 가장 친한 사람은 누구야?”
“…….”
“나지?”
언제나의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다. 다그치듯이, 떼를 쓰듯이,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다.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왜… 회장이 나보다 너에 대해서 잘 알아?”
“회장이랑은, 집안일이 얽혀있어. 나도 잘 모르지만 어머니가 예전에 일본에 오라버니나 언니가 왔을 때 소개한 거 같고.”
“그럼 왜 나는…!”
“그건 애쉬포드와 관련된 사업 때문이야, 회장이 너보다 더 친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
“우리 집안은 여러모로, 복잡하니까…. 거기에 너는 쿠루루기 집안의 후계자잖아. 소개할 타이밍이 좀처럼 맞지 않았다고 해야하나. 그, 너에게 부담이 될 거 같았고.”
“이번에 회장이 크리스마스 파티에 불리지 않았으면 나도 안 불렀겠네.”
“…아냐!”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쿠루루기 집안은 무슨 핑계야? 아, 사람이 아니라 집안을 본거야? 저질이네, 를르슈.”
“스자쿠!”
먼저 달리는 스자쿠를 를르슈가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그리고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는 달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를르슈는 집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또 감기에 걸렸다. 사흘 동안 앓아누웠다. 스자쿠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것도 예전과 똑같았다.
열이 떨어져서, 학교에 갈 무렵이 되면, 먼저 출근한 마리안느가 식탁 위에 올려두고 간 초대장이 있었다. 두 장이었다. 하나는 미레이, 하나는 스자쿠. 초대한다고 와줄까….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미레이의 이름이 적힌 초대장만 가방에 넣었다. 스자쿠의 초대장은 손대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평소보다 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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