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AU
모처럼의 휴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늘 ‘모처럼’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연락을 한다. 대체 우리의 휴일 스케쥴을 어떻게 꿰고 있는 건지, 전화를 받으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으면 바로 정답이 돌아왔다.
나나쨩이 이번 주는 이미 약속이 있어서 같이 못 놀게 되었다고 말해줬지 뭐야~
나나리라면 죄가 없다.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거절하고 원래 일정대로 휴일을 보낸다면 사후가 두렵다. 원래 일정도 딱히 없었지만. 알겠다고 대답하는 를르슈의 옆에서 스자쿠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스자쿠를 쳐다보면, 스자쿠도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레이 애쉬포드를 위한 외출은 불가피한 것이다.
정작 애쉬포드 학원 구 교사에 도착하면 반기는 사람은 미레이 한 명 뿐이었다. 그녀는 전화 상으로는 ‘학생회 전원 집합’이라고 말했지만, 역시 꾀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나 싶었다. 를르슈가 질린 얼굴로 쳐다보자 미레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리발은 미팅이 있다고 하고, 셜리는 워크샵, 니나는 주말 출근, 카렌은 학원 강습, 나나쨩은 데이트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우리 셋이라면 금방 해낼 수 있어!”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건물 하나라고 해도 교실 수가 몇개인데…!”
“뭐, 그래도 학교 쪽에서 1차적으로 확인했다니까 우리가 할 일은 별 거 없을거야.”
미레이의 말에 따르면, 학원 구 교사의 건물 한 채를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는데, 그 건물을 헐기 전에 간단한 확인을 부탁받았다는 것이다. 스자쿠와 를르슈의 학년까지만 사용했던 구 교사는 아마 그 이후로 공식적으로는 안전상 이유로 입구는 폐쇄가 되었지만, 일탈 청소년들의 좋은 아지트가 되기도 해서 이번에 아예 없애기로 했다고.
“뭔가 아쉽네요.”
“그렇지? 그냥 못 챙긴 물건들이 있나 없나, 그거만 확인하고 갈 거니까, 금방 끝날 거 같아.”
“근데 사람이 없으니까 으스스하네요.”
제일 먼저 앞장 선 사람은 미레이, 그 뒤로 를르슈, 마지막이 스자쿠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교실에 들어가면 수가 맞지 않은 책상과 의자가 널부러져 있었다. 종이조각 같은 것도 바닥에 밟혔지만 크게 중요해보이는 건 없었다.
“벌레나 안 나오면 좋겠는데.”
를르슈는 더러운 교실 안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스자쿠가 명랑하게 웃으면서 받아쳤다. 이렇게 더러운데 안 나올 수가 없잖아, 를르슈. 미레이도 여전히 벌레가 무섭냐며 가벼운 조롱이 이어졌다.
대꾸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를르슈는 미간을 좁히면서 다음 교실을 둘러보았다. 다음 교실도 지저분하고, 먼지투성이에, 몇개 없는 책상과 그 위에 놓인 낡은 책들 따위가 있었다. 내용을 확인하려고 보면 빛바랜 성인 잡지였다.
“요즘도 이런 게 나오는군.”
“클래식은 영원한거지!”
고등부 교사에서 헐벗은 여자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성인 잡지가 어디가 클래식인지. 를르슈는 혀를 차며 원래 있던 책상 위로 그것을 던져두었다.
“되게 오래된 거네. 여기 나오는 여자애, 요즘에 잘 안나오는 애잖아.”
“…….”
“아, 약간 를르슈 닮았다고 생각해서 얼굴 외우고 있었어.”
“기분 나빠.”
“그건 반성하고 있어.”
전혀 그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던 스자쿠는 여기도 그럭저럭이라며 다음 교실로 움직였다. 다음 교실에서는 누군가 장난스럽게 그린 만화 공책이 나왔다. 내용이 흐지부지 끝났다. 또 다른 교실에서는 전해지지 않은 러브레터가 발견되었다.
빛바랜 종이에 빨간 하트의 잉크는 너무나도 선명했고, 그런 것을 놓치지 않는 미레이는 봉투를 뜯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거 를르슈한테 쓴 거잖아?!”
“네?”
그 말에 놀라서 뛰어온 스자쿠는 미레이의 손에 들린 편지를 급하게 읽어내렸다.
안녕하세요, 람페르지 군. 항상 단정한 모습으로 모두에게 친절한 람페르지 군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가끔 솔직하게 변하는 모습도 오히려 람페르지 군을 좋아지게 만듭니다. 중등부에 있는 여동생을 아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다정한 모습이 좋아서, 람페르지 군을 바라보는 제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처음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졸업까지 머지 않았으니, 용기를 내보려고 합니다. 람페르지 군, 좋아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에릭 메이어.
마지막 이름에 스자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릭?!”
“뭐야, 남자? 시간이 남아도는 녀석이었나보군. 그나저나 회장…. 이대로 보이는 교실마다 들어가면 비효율적인데요.”
스자쿠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와 를르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를르슈는, 이, 익숙해?”
“남자나 여자나, 자기 맘대로 편지를 써서 보내서 받는거야 너도 익숙하지 않아?”
“남자는 보통 상대 안하잖아.”
“남자랑 사귀는 놈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어머, 둘이 너무 뜨겁네. 나도 있는데~”
미레이의 말에 를르슈는 살짝 짜증난 듯 날을 세웠다. 스자쿠는 편지를 보고서 부들거리는 손으로 찢어버렸다. 이등분, 사등분, 팔등분…. 조각조각나는 편지를 보면서 를르슈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쓰레기는 치우고 가라, 스자쿠.”
“어차피 헐릴 건물인데 치워봤자.”
“불성실한 대답이군요, 전직 풍기위원님! 그럼 다음 교실 가볼까!”
한층 어두워진 표정의 스자쿠는 발걸음도 무거워 보였다. 다음 교실은 로커 하나 남지 않은 텅 빈 공간이었다. 그나마 깨끗한 느낌이지만 를르슈의 발끝에 걸린 무언가 하나로 이 공간의 용도를 알아버렸다.
“…콘돔이네.”
언제 썼을지 감은 안 잡히고, 그 모양도 변질된지는 한참이었지만 스자쿠와 를르슈에게는 지나가며 봐도 알 수 있을 그것은 콘돔이었다. 미레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빨리 건물 밀어야겠다’라고 중얼거렸다.
를르슈도 대충 맞장구를 치며 다음 교실을 향해 뒷문으로 나섰다. 전기가 끊겨 어둑하지만,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로도 를르슈의 붉어진 목 뒷덜미나, 귓볼 같은 것을 보기엔 충분했다. 스자쿠도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면서 뒤따라 나섰다. 예전 생각이 났다. 여기는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하면 안되는 짓을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다음 교실도, 그 다음 교실, 1층을 다 둘러보고 나서 남는 것은 없었다. 3층까지 있는 교실들을 살펴볼 생각을 하니 를르슈는 눈앞이 까마득해졌지만, 하겠다고 나선 이상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새 건물은 뭐로 쓰이나요?”
“우선 동아리 전용 건물로 쓴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우리 때처럼 활발하게 하는 편은 아닌 거 같아서 살짝 보류 중이래. 중등부의 새 건물로 쓰자는 이야기도 있어.”
“뭐로 쓰여도, 이젠 학생이 아니니까 감이 안 잡히네요.”
그래도 성실한 스자쿠는 나름의 의견을 낸다. 지금 모양이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서, 학생회 회의를 하는 기분이라 를르슈는 나름 신선했다. 세 사람 다 고등학생 시절이 10년도 더 이전의 일이 되었지만.
2층까지 무난하게 클리어. 누군가 흘리고 간 노트, 학교 신문,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보면서 시간의 무상함에 대해 서로 감상을 나누었다. 뭔가 타임캡슐을 연 기분이네. 스자쿠는 2층의 마지막 교실을 닫고 나서며 말했다.
뭔가가 있긴 있던 1층, 거의 비어있는 2층, 3층은 더욱 먼지가 쌓여있고, 열리지 않는 교실도 많았다.
“굳이 3층까지 오지 않아도, 나쁜짓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던 건물이 됐나보네요.”
“그런가봐. 하하, 나름 추억이 있는 곳인데, 후배들은 아니라니 슬프네.”
“아, 여긴 열린다. 어라.”
그 곳은 안 쓰는 물건들을 다 박아두는 창고인 것 같았다. 책상도 보이지 않고, 먼지 덮인 하얀 천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커다랗게 ‘무대 소품’이라고 적힌 상자가 있는 것을 보아서 연극부에서 썼던 교실이 아닐까, 다들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근데 연극부는 따로 소품창고가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뭐, 안 쓰는 물건들까지 같이 두기엔 늘 비좁다고 이야길 들었어.”
“연극부가 쓴 게 맞긴 한가…?”
를르슈가 하얀 천을 살짝 걷어냈다. 뚜껑 없는 박스 안에는 옷가지들이 곱게 개켜져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아는 순간 를르슈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연극부가 아니라 학생회가 쓰던 거였네. 그것도 우리가.”
남녀역전축제 때 쓰이던 의상들이었다. 를르슈가 입었던 드레스, 스자쿠의 세일러복 같은 것들이 나오자 를르슈만 빼고 모두들 반가운 얼굴이었다.
“지금 봐도 루루쨩의 드레스는 세련된 디자인이야, 그치?”
“그러네요. 정말 예뻤는데.”
“스자코도 귀여웠어?”
“감사합니다.”
아득해지는 두 사람의 대화 같은 것을 못들은 척 하면서, 를르슈는 다른 곳을 살폈다. 남은 학생회의 서류 같은 것이 있을까 했지만, 졸업하면서 를르슈가 필요 없는 것은 다 처분했고, 여기는 정말 잡동사니만 모아놓은 곳이었다.
“기념으로 가져갈래?”
“네?”
미레이의 말에 를르슈가 놀라서 대답했다. 스자쿠는 손에 들고 있던 세일러복을 몸에 대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어깨가 안 맞네요. 아쉽다.”
“흐~음. 루루쨩은 맞지 않을까?”
“음…….”
세일러복과 드레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옷 상태도 나쁘지 않고 한 번 세탁하면 멀쩡해질 거 같고 괜찮네요! 명쾌한 결론을 내린 스자쿠를 붙잡기도 전에 미레이가 튼튼해보이는 종이백을 찾아내더니 그곳에 두 개의 옷을 집어 넣었다.
“드레스는 예산 초과여서 살짝 힘들었지만 지금 봐도 예쁘니까~ 그때 욕심내길 잘했어.”
“그때 숫자가 안 맞은 게 회장 때문이었습니까?”
“모두가 바라는 공주님을 위해서 힘냈을 뿐이야.”
“그런…!”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지. 뭐, 반응 좋았잖아.”
자, 그럼 다음!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구 교사 탐방은 끝이 났다. 얻은 것이라고는 피로와 쓸모 없는 옷 두 벌이지만, 를르슈는 충분히 지쳤다. 미레이가 밥을 사겠다고 했지만, 스자쿠는 이제부터는 데이트를 하고 싶다며 부끄러움 없이 거절했다.
돌아가는 차에서는 스자쿠가 운전대를 잡았고, 를르슈는 조수석에 앉으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모처럼 쉬는 날이었는데, 쉬지도 못하고.”
“그렇긴 하지만, 색다른 기분이었잖아. 고등학생이 된 거 같았어.”
“…요즘 애들은 발랑 까져서.”
“아저씨 같은 말 하지마, 를르슈. 그리고 우리도 지지 않게 까져있었잖아.”
“너는 예나 지금이나.”
“아, 아파! 나 운전 중이잖아!”
장난스럽게 볼을 꼬집는 를르슈의 손에 스자쿠는 아픈척을 했다. 그러면서 뒷좌석에 둔 종이백을 쳐다보았다.
“를르슈는 아직도 입을 수 있겠지, 드레스.”
“…뭐?”
“오히려 예전보다 살이 빠져서, 음, 더 헐렁해질까. 그럼 세일러복 입을래?"
아니다, 를르슈는 검은 세일러복이…. 하얀색? 아니면 군청색? 보라색?
를르슈는 스자쿠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시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찔렀다.
“아저씨가 세일러복을 입어서 뭐가 좋아?”
“내가 좋아.”
“아아, 그러셔. 그럼 너도 입어. 내가 좋으니까.”
“우와, 를르슈 취향 이상하네….”
“드레스가 더 좋으면 그걸 입어도 돼.”
그 대화를 끝으로 갑자기 말이 사라진 스자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면 약간…여자랑 하는 기분이 들까?”
“뭐?”
“아, 근데 를르슈 동정이었지. 미안, 모르는걸 물어봐서.”
“뭐, 무슨…! 차 세워!”
“위험해, 위험해.”
“사과해!”
“동정이라고 말해서 미안해.”
“스자쿠…!”
스자쿠는 솜씨 좋게 를르슈의 꼬집으려는 손을 다 피하면서, 부드럽게 운전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세일러복과 드레스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세일러복과 파고드는 맛이 있는 드레스…
어느 쪽이든 군침이 돈다. 그런 스자쿠가 입맛을 다시는 것에 를르슈는 화를 내는 것이 무의미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서로가 뭘 입으면 더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러나 스자쿠와 다르게 를르슈는 10년도 더 된 고등학생 시절부터 꾸준한 취향으로, 세일러복이냐 드레스냐, 그것을 고민하지 않았다. 스자코는 세일러복이다. 훤히 드러나는 맨살의 느낌이 건강미와 동시에…. 생각하고 있으면 를르슈도 침을 꿀꺽 삼켰다.
집에 돌아가면 세탁기 앞에서 두 사람은 옷을 집어 넣었고, 빨래를 돌리는 동안 결국 참지 못하고 거실에서 해버리고 말았다. 건조기가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까지 해버리고 나서, 부랴부랴 옷을 꺼내면 이미 구겨진 상태라 다시 한 번 세탁기에게 신세를 지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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