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레퀴엠 전야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
모두에게 지은 죄를 죽음으로 면할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죄.
죄인인 그를 죽이는 건 나만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쿠루루기 스자쿠의 사고가 때가 가까워질수록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이 모든 것이 끝이 나게, 그도, 쿠루루기 스자쿠도 노력하고 있다.
노력의 방향이 과연 옳은 것인가? 스자쿠는 랜슬롯의 하얀 장갑을 만지며, 저를 계속해서 멈추게, 뒤돌아보게 하는 그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를 죽일 자격이 있는가?
그가 용서를 빌어야하는 건, 유피가 아닌가.
유피의 대리로 내가 그의 용서를 받아줘야하는 것인가?
유피의 대리? 내가?
스자쿠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웃는 경우가 많았다. 크게 웃어본 적이 드문 인생이었다. 그 인생이 언제든지 끝나도 상관이 없었다.
복수가,
유피의 원수를 향한 복수가,
과연 이 길의 끝에서,
완성될 것인가?
나는 또 그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랜슬롯의 장갑은 차게 식어있다가, 스자쿠의 체온을 빌어 미지근하게 변했다. 스자쿠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식의 의심은 그만두기로 했다.
를르슈는 죽을 각오를 했어. 그걸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격납고를 나서면서 스자쿠는 저를 스쳐 지나가는 인간들을 말 없이 쳐다보았다. 기어스에 걸린 군인들은 오합지졸이다. 여기서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사람은 단 한 명, 쿠루루기 스자쿠 뿐이었다.
아니, 그들과 스자쿠는 다르지 않다. 그 본질은 같다. 의지가 뒤틀린 채로, 이곳에 묶여있다.
“그리고 내일의 일정은…….”
“아, 드디어.”
“…….”
마지막 날 밤이었다.
스자쿠는 끊임없이 그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의심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럴 수도 있다. 너는 그래도 돼. 너는 유피의 기사다. 지금은 상황이 아쉬워 나의 기사 노릇을 하고 있지만. 스자쿠를 위로하듯이, 그의 마음을 달래는 말을 한다.
그런 날들을 몇번이고 지나서, 내일이면 그가 죽고, 제로만이 남는 때가 된다.
“죽는 게, 무섭지 않아?”
“무섭다.”
“도망치고, 싶다거나.”
“도망치고 싶다.”
“그렇다면 왜…?”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살았으면서. 스자쿠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를르슈는 책상 끝에서 끝을 손끝으로 쓸면서 중얼거렸다.
“지금 이 시점에서 세계는, 쿠루루기 스자쿠도 죽어서 없고, 나 하나 밖에 없는 세상이다.”
“…….”
“너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으로 남을 순 없지. 쿠루루기 스자쿠의 길동무가 되어주는 건…내가 너의 친구로써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위로가 아닐까?”
“이제 와서 친구라니.”
“너에게는 우습겠지만….”
“…….”
“너에게 위로가 되지 않으면, 그저 나의 자기 만족일 뿐이지.”
를르슈는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울한 얼굴도 아니었다. 사실을 말할 뿐인 그 입술은 다른 말들을 내뱉었다.
“살고 싶어, 스자쿠.”
“…….”
“다시 선택하라면, 나는 두 번 다시 나나리의 손을 놓지 않겠어. 네가 지켜주고 있는 도쿄 조계 밖을 벗어나지 않겠지.”
“…….”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다. 돌아갈 길은 없어.”
“살아서…용서를 빌어.”
“그렇게 하면, 유피가 살아돌아올까?”
그 이름은, 스자쿠와 를르슈의 선을 확실하게 긋고 벽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스자쿠를 보며, 를르슈는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복수를 해라, 스자쿠.”
“…너는, 끝까지 유피를 이용할 생각이지?”
“그게 너를 움직이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유피에게 직접 사과해. 나한테 말고!”
“…….”
를르슈는 어둑해진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스자쿠는 더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유피는 나를 용서할거야.”
“…….”
“그래서는, 내 죽음이 의미가 없어진다.”
“너는, 유피로도 모자라서 네 죽음까지, 이용하고, 거기에 나를….”
세계 평화 같은 것은 스자쿠에게 큰 의미가 없다. 눈앞의 를르슈를 잃는 내일에 대해서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이제껏 그가 있어서 가능했던 모든 일들을, 기적처럼 여겼던 것들을, 이 손으로 지워버릴 것을 생각하면 그는 포기하고 싶었다.
“나를 죽게 내버려뒀어야지.”
“미안해.”
“…쉽게 사과하지 마.”
“내가 유일하게 직접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스자쿠.”
“…….”
“미안해.”
미안해, 스자쿠.
그는 바라고 바랐던 그 사과의 말을 너무 쉽게, 아주 당연하게 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귀를 틀어막았다. 를르슈는 그 모습에 말을 멈추었다. 움직이는 입술은 느릿하게 사과의 말을 읊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끊임없이 속죄하는 를르슈의 말이 들렸다.
그의 미안하다는 말을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스자쿠는 다음날 그를 죽였다. 망설임은 없었다.
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
107 | 고양이 를르슈를 임시보호 중인 스자쿠 | 2020.02.24 |
106 | 1+1+1=3 | 2020.02.22 |
105 | 아리에스의 백설공주 | 2020.02.19 |
104 | 1+1+1=3 | 2020.02.01 |
> | 전야 | 2020.01.27 |
102 | [소설] 미완 ?? | 2020.01.27 |
101 | 세일러복과 드레스 | 2020.01.23 |
100 | 좋아서 | 2020.01.06 |
99 | Lily Christmas | 2019.12.25 |
98 | CIC가 K1에게* | 2019.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