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조작
20살 X 12살
나오세 X 황자님
아리에스 궁의 황자님—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최근 관심사는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 를르슈는 스자쿠라고 부르는 그 남자였다. 를르슈보다 8살 많은 그 남자는 원래 를르슈의 어머니인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 소속이었다가, 이복 형제인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의 소속으로 바뀌더니, 이번에는 황제이자 아버지인 샤를 지 브리타니아의 기사가 되었다.
‘너는 줏대가 없구나.’
한참이나 어린 황자님이 하는 말에도 스자쿠는 파란 망토를 어색하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올바른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날은 를르슈에게 이제 예전처럼 아리에스 궁에 찾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러 왔을 때였다. 를르슈는 자기가 내온 홍차가 맛있는 것에 만족스러웠다가, 스자쿠가 하는 말에 실망하며 그 맛조차 희미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상하던 찰나였다.
‘뭘 위한 방법인데?’
‘글쎄요,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제대로 말하기가 어렵네요.’
‘흥. 애매하게 굴면 스자쿠만 손해니까.’
‘그렇겠죠. 아무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마리안느 황비 전하와 를르슈 전하의 도움이 크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스자쿠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를르슈는 조금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 나나리가 보고 싶어할 때는 아리에스에 오도록 해.’
‘하하…. 언제든지 가고 싶네요. 물론 전하가 부르실 때도 가고 싶지만.’
‘……?’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어렵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상한 것은 를르슈였는데, 오히려 스자쿠가 의기소침하게 웃는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스자쿠가 돌아가고 나서, 외출을 하고 온 마리안느와 나나리에게 스자쿠 이야기를 하다가 를르슈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나리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마리안느는 ‘생각 이상으로 스자쿠를 좋아했구나!’라고 웃으면서 를르슈의 등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서 나나리가 내미는 인형을 끌어안으면 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나나리가 비웃지 않을까 걱정되는 와중에도, 상냥한 나나리는 자기가 슬플 때 달래주는 친구라고 쥐어준 인형의 목소리로 울지 말라고 말했다.
아리에스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이 온화한 분위기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으로 짜여진 완벽한 곳이었다. 어머니와 나나리만 있다면.
그런 곳에 스자쿠의 자리는 원래 없었는데, 이제 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리에스가 다 무너지고 모든 게 색과 빛을 잃은 기분이었다.
마리안느는 열이 나는 를르슈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를르슈, 첫사랑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란다. 한 번 앓고 나면 또 괜찮아질거야.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를르슈는 사랑 같은 거는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를르슈를 침대에 뉘어준 마리안느는 웃으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날밤, 올라가던 체온은 떨어졌고, 새벽빛이 멀리서 터오는 창문을 바라보면서 를르슈는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생각 이상으로 스자쿠를 좋아했구나. 첫사랑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 법.
나는 스자쿠를 좋아하나…?
타오르는 햇빛에 아리에스 궁의 정원을 아름답게 수놓은 장미들이 다시 만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봐도 무언가가 허하게 느껴졌다.
그전과 지금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스자쿠가 오지 않는다고 말해서? 를르슈는 몇번이고 스자쿠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이다가 또 다시 눈물이 나는 것에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모든 것들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웃어주는 스자쿠가 괜히 미웠던 이유. 저에게도 준 꽃반지를 나나리와 유페미아에게도 줬을 때, 외출을 하러 나갔을 때마다 준 선물에 나나리의 것과 다를 바 없이 웃어준 것. 스자쿠와 단 둘이 있을 때면 괜히 더 기분이 좋았던 것.
사랑을 알아버린 황자님은 그의 어머니의 생각보다 더 열렬한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사교계와 무관했던 황자 전하는 어머니의 뒤를 종종 따라다닌다거나, 먼저 데뷔한 형과 누나의 파티에서 조용히 얼굴만 비추기도 했다. 낮부터 밤까지 그런 모임이 있고, 허락만 떨어진다면 를르슈는 쉬지 않고 외출을 했다. 나나리는 외로워하자, 마리안느는 그녀에게도 귀족 가문의 영애를 친구로 붙여주었다.
나나리에게도 친구가 생기자, 를르슈의 외출은 눈에 띄게 늘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 출신의 어머니 덕분에 를르슈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와 어울릴 기회가 늘었다. 그의 목표는 대부분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였지만 새로운 라운즈로 등용된 스자쿠는 유로 브리타니아 쪽 일에 매달리는 탓에 를르슈의 고된 노력에도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항상 단정하고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황자님이 가끔씩은 웃으면서, 또 똑똑한 머리로 재치 있게 위기를 넘기는 모습은, 를르슈가 열두 살의 어린애라는 점을 불식시키면서, 그가 있는 자리를 더욱 화사하게 빛나게 만들었다.
“를르슈, 열이 있는 거 아닌가?”
“…네? 아닙니다. 괜찮아요.”
오늘은 슈나이젤이 여는 야회였다. 엊그제 그와 체스를 하던 중에, 슈나이젤의 권유가 있었다. 슈나이젤은 스자쿠의 이전 상사였다. 지금 스자쿠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도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를르슈와 다르게 그는 왕위 계승권 순위도 높았고, 실질적으로는 제국 재상의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기 때문에, 유로 브리타니아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늦은밤에 열리는 연회에 조금 멍하니 있었더니, 슈나이젤이 다가와서 를르슈의 이마를 짚고서 한숨을 쉬었다.
“열이 있어. 오늘은 돌아가렴.”
“아닙니다. 형님의 손이 차가워서 그렇게 느끼시는 거예요.”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마리안느 님이 아시면 걱정하실 거다. 나나리는 물론이고.”
“…….”
“안 돌아가면 억지로 보낼거야.”
“싫습니다.”
항상 해사하게 웃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슈나이젤에게서 등을 돌리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작은 몸이 열이 나는 주제에 빠르게 홀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슈나이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슈나이젤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낯익은 얼굴과 한층 더 성장한 기백이 놀라워 슈나이젤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드디어 본국에 돌아왔군, 나이트 오브 세븐.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야.”
“슈나이젤 전하께서도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듣기로는 오늘 저녁에 도착했다고 하던데, 그래서 오늘 못 올줄 알았지. 피곤하지 않은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모처럼 초대해주셨는데….”
“확실히 올 줄 알았다면 를르슈를 더 붙잡아둘 걸 그랬군.”
갑자기 나오는 그리운 이름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를르슈 전하께서는 아직 이런 자리에 오시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아, 요즘 사교계에서 유명한 ‘아리에스의 황자님’ 소문은 유로 브리타니아까지 닿지 않은 것 같네.”
“…….”
“그래도 마리안느 님의 허락이 떨어져야지 참석할 수 있어. 를르슈도 영악하지. 몰래 참석해도 혼나지 않을 상대를 위주로 공략해서 그 자리에…. 오늘도 내가 ‘몰래’ 부른거야.”
“왜 갑자기…. 나나리 전하도 걱정하실 텐데요.”
“글쎄, 누굴 찾고 있는 것 같기도 하길래…….”
슈나이젤은 저 멀리 를르슈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정작 찾던 사람은 여기 있으니 아쉽게 되었어. 나중에 아리에스에 들러주지 그래? 를르슈가 안쓰럽더군.”
스자쿠는 슈나이젤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슈나이젤은 그의 모습을 보더니 작게 웃으면서, 이제 인사는 됐으니 파티를 즐기라고 말했다.
이제 가봐도 된다는 허락에 스자쿠는 그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테라스 바깥에는 경비들이 서있겠지만, 연회장 근처에는 밀회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삼엄하지는 않았다. 사람으로 인한 후덥지근함에 스자쿠는 테라스로 나오자 선선하게 저를 훑는 바람에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테라스에 경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세워진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평소였다면 바로 그 인기척을 알아차릴 텐데,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 그는 스자쿠의 발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소리 없이 숨을 들이키고, 스자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를르슈 전하.”
“…스자쿠!”
를르슈는 스자쿠의 이름을 부르며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않고서 환하게 웃었다. 붉게 물드는 뺨이 연회장에서 흐르는 빛 사이로도 보기 좋게 익어가고 있었다. 스자쿠에게 시선을 주고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를르슈는 평소보다 더 화려하고 어른스러운 차림이었다. 키가 그 사이에 더 큰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앳된 소년의 느낌이 강했다.
“스자쿠, 드디어 만났네.”
“네? 그나저나 이런 곳에 계시면 안되지 않습니까? 다들 걱정할 겁니다.”
“아, 그거라면…….”
“슈나이젤 전하께 들었습니다만, 다들 허락한다 하더라도 사교계 데뷔는 아직 이르시지 않나요?”
정론대로 말하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예전에는 스자쿠가 이렇게 고개를 숙였던 것 같은데. 슬픈 기시감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무릎이 굽혀지면서, 저와 시선을 맞추는 스자쿠의 얼굴에 우앗, 하고 소리를 냈다. 스자쿠에게 붙들린 팔 덕분에 뒤로 넘어지진 않았지만, 대신에 스자쿠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전하, 얼굴이 너무 빨갛습니다.”
“바, 바람이 차서, 그렇게 된거야.”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스자쿠의 이마와 를르슈의 이마가 맞닿았다. 콩, 소리가 살짝 났지만 아프진 않았다. 스자쿠의 머리카락과 닿는 이마의 체온이 서늘하게 느껴지고, 스자쿠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몸에 를르슈는 딱딱하게 굳었다.
“너무 뜨거운데요.”
“……아, 니다.”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밤도 늦었고요.”
“싫어.”
“……슈나이젤 전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혀, 형님께 말하는 건 비겁하잖아!”
“전하께서 아픈걸 보느니 비겁해지는 게 낫겠군요.”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울 정도로 아프신거잖아요.”
“누가, 운다고….”
“누구겠습니까?”
스자쿠의 커다란 눈동자 안에 비치는 제 자신이 울고 있는 모습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흔들림에 따라서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스자쿠의 장갑을 낀 손이 눈물 자국을 훑는 것에 더 서러워졌다.
이런 재미없고 따분한 자리에 몇번이고 스자쿠를 찾으러 왔는데. 모처럼 만났는데 열이 나서 길게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건 싫었다. 떨어지려는 스자쿠의 손을 잡으면서 를르슈는 싫다고 중얼거렸다.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
“…….”
“불러도 못 온다며. 그럼 내가 찾으러 가야된다고, 생각했는데.”
“…를르슈 전하.”
“이런 곳에 다녀도 너는 보이지도 않고, 유로 브리타니아 일은 나 같은 어린애가… 알아도 소용 없다고…!”
훌쩍거리면서 우는 를르슈를 품에 안고서 스자쿠는 자리를 옮겼다. 홀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섰다. 어둑해지는 그림자가 지는 난간에 걸터 앉아, 목을 끌어안고 우는 를르슈를 그대로 안아주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일은 드물었다.
“어머니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네?”
“나는 싫다. 그런 일반론적인 연애관에 지고 싶지 않아.”
“…네?”
“그래서 나름대로의 수를 쓰고, 나 답지 않은 일이지만 선수필승이라는 말이 있잖아? 더 조금만 나아가면….”
“……네?”
‘네?’만 반복하는 스자쿠에게 차가운 시선으로 쏘아본 를르슈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갑자기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떨떠름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좋아하는 분이라도 생기셨나요?”
“…….”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스자쿠.”
이름을 부르는 것에 스자쿠가 의아한 듯이 쳐다보면, 를르슈는 다시 ‘스자쿠’하고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의미가 다분한 그 눈빛이 싫어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를르슈의 시선과 맞추기 위해서 숙여져있던 고개는 더 깊게 떨어져서 를르슈의 얼굴과 부딪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스자쿠가 움직임을 빠르게 멈추자, 를르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얼굴을 들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게 부드럽게 닿는 움직임에 스자쿠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를르슈는 그게 싫어서 이번엔 쪽, 하고 소리가 나도록 스자쿠에게 작게 키스했다.
“를…르슈, 전…하……?”
“너를 찾으러 다녔다고 했잖아.”
이번엔 스자쿠의 얼굴에 를르슈의 열이 옮은 것처럼 빠르게 붉어졌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으아아’하고 작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다가 ‘이러면 안 돼’를 20번 정도 연달아 말하더니, 를르슈를 보고서 ‘흐아악’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이상한 스자쿠. 오랜만에 봤는데….
또 멋있고 더 좋아졌어.
를르슈는 깜빡깜빡거리는 생각들의 흐름과,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당황하는 스자쿠를 마음껏 즐기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작은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에 스자쿠는 급하게 그를 끌어안고서 홀을 지나갔다.
야회의 시간은 더 무르익어서 사람들이 여느때보다 많은 그 사이를 스자쿠는 늠름하게 지나가며, 품 안에 있는 황자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 이후로 를르슈는 ‘아리에스의 백설공주’라는 이름과, 스자쿠는 백마를 탄 ‘하얀 저승사자’ 정도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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