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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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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물

DOZI 2020.03.19 23:13 read.288 /

 10살 무렵에 옆집 이웃이라는 관계에서 시작된 이 관계는 이제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12살의 를르슈 람페르지는 덥다고 하드 아이스크림을 덥썩덥썩 씹어먹는 친구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외국인은 이상하게 생겼다며 시비를 거는 이상한 놈이었지만 막상 이야기를 해보면 나쁘지 않았고 근 2년 사이에 많은 사건과 모험을 겪으면서 이 친구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쿠루루기 스자쿠. 집안은 명문가이고, 뛰어난 운동신경과 나쁘지 않은 학습능력. 학급에서는 이 녀석을 짝사랑하는 여자애들은 넘쳐나고 남자애들은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어떻게든 같이 운동하려고 불러내려고 하는 인기인. 여자애들이랑은 어떻게 지내는지는 몰라도 점심시간에는 나랑 밥을 먹어야하니까, 방과 후에는 나랑 집에 가야하니까, 주말에는 나랑 놀아야한다는 이유로 다 거절하고 있다. 사실 주말에는 나 말고도 나나리와도 놀고 있긴 하고, 나나리에게도 상냥하다. 나나리도 스자쿠를 잘 따른다. 세상에 다시 없을 천사 같은 그 아이가 사람을 꺼리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 스자쿠를 가족처럼 따를 정도다.

 

 “스자쿠.”

 “응?”

 “너, 나나리를 어떻게 생각해?”

 “음…천사?”

 

 앗, 아이스크림 녹았어! 스자쿠는 제 손목에 타고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바지에 대충 닦으면서 아깝다고 중얼거렸다. 방금 전은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나나리에 대한 대답은 훌륭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에 대한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기로 했다.

 

 “스자쿠, 너 우리집에 장가와라.”

 “…장가?”

 “응.”

 “나 보고 너네집 사위가 되라는 말이야?”

 “그래.”

 “…….”

 “어디에도 내놓아도 지지 않을 미모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 상냥하고 다정한 성격의 아내, 그리고 무엇보다 너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지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라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서 서로를 알아갈 수 있을 테니 너에게도 나쁘지 않을 조건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집도 너네집 못지 않은 명문가이기도 하고! 비록 외국인 집안이긴 하지만 요즘 시대에 국제 결혼이 흠이라거나 그런 걸 따지거나 하는 건 촌스럽지?”

 

 기고만장한 표정의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멍한 얼굴을 했다.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서 뚝뚝 떨어져 결국 버리는 수 밖에 없었다.

 를르슈네 집 사위…? 어디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미모의 아내? 상냥하고 다정한 성격의 아내? 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들으면 들을수록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래, 내 아내가 를르슈가 되면 그것보다 좋을 일은 없지!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건 를르슈고, 또 나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건 를르슈니까!

 

 “좋아, 나 를르슈네 집 사위가 될게!”

 “후회 없는 선택을 한 거다. 잘했다, 스자쿠!”

 “응, 그런 거 같아.”

 “아, 그렇지만 본격적인 교제는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야.”

 

 나나리는 아직 어리니까. 를르슈는 당연한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스자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하면 바로 사귀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를르슈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납득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다시 한 번 여동생의 남편감을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13살이 되었을 때는 같이 중학교 입시를 하게 되었다. 애쉬포드 학원에 진학하겠다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하얗게 얼굴이 질렸다. 

 

 “거기는 체육 특기자 전형도 없잖아! 그리고 전철 통학인데 를르슈 어떻게 다닐거야?!”

 “공부해서 들어가야지. 원래 아는 사람이 그 학원의…이사장의 손녀라서 이번에 같이 학교를 다니자고 해서…. 그리고 전철 통학 정도는 할 수 있어.”

 “를르슈, 너 나를 두고 어떻게 그런….”

 

 나를 버리고 그 이사장의 손녀랑 사귈거야?!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미쳤어?! 어떤 의미에서든 그 사람 말고 너를 고를거야! 스자쿠는 그 대답에 그제서야 자기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면서 되물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응. 그리고 너도 어떤 의미에서든 그 사람이 싫어질거다. 그럼 나도 그 학교 가도 돼? 응? 같이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뭔가 느슨해진 대화의 흐름 속에서 스자쿠도 가까스로 애쉬포드 학원에 입학했다. 전철 통학으로 편도 30분이었다. 아침마다 를르슈를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부활동 1시간은 한 느낌이었다. 

 

 “아, 네가 루루쨩이 말한 스자쿠 군!”

 “루루쨩?”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은 신체 능력이지만 천연이라 다들 사람인 척 속아준다는 그런 스펙이라고!”

 “를르슈, 너 나를 어떻게 소개한거야!”

 

 소문의 이사장의 손녀와 만났지만 아무튼 여러가지 의미로 놀랐다. 를르슈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평범하게 소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평범이야. 스자쿠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면 미레이 애쉬포드는 스자쿠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일들을 시켰다. 

 즉 애쉬포드 학원의 중등부 운동부에서 가볍게 몸풀기를 시켰는데 부원들의 사기를 엄청나게 증진시키다 못해 모두가 스자쿠를 데려가려고 안달이 났다. 살면서 이런 러브콜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고등부에 올라가면 스자쿠 군의 인기 엄청날 것 같은데! 미레이의 말에 한기가 돌았다. 

 

 “전철 통학이라서 지금보다 더 일찍 나올 수 없어요. 운동부는 아침에도 연습하잖아요?”

 “뭐, 그 정도까지의 열정은 없는걸까?”

 “저는 나올 수 있어도 를르슈가….”

 “아, 루루쨩이라면 힘들지도.”

 “그리고 저 혼자 나오더라도 를르슈 혼자 전철을 탄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안하고요.”

 “둘이서 아무말이나 하는걸 들어주는 것도 한계군요.”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다. 작년보다 더 예뻐진 를르슈는 이젠 잘생겨져서 여자들이 노골적으로 구애를 했다. 스자쿠는 그때마다 불안해졌다. 셜리가 를르슈의 옆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면 일부러 를르슈를 불러서 별 것도 아닌 일에 도움을 청했다. 그때마다 괜히 미안했지만, 이미 장래가 약속된 를르슈 람페르지의 남편으로써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를르슈한테 고백한 남자애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까? 중등부 시절 내내 그런 고민을 하며 스자쿠는 학교를 다녔다. 미레이의 이벤트 계획에 를르슈의 도움이 필요할 때라던가 그래서 방과 후에 길게 남을 때가 아니면 운동부 용병도 하지도 않았다.

 3학년 졸업식을 일주일 남기고 있을 때 어떤 여자애가 스자쿠를 불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애였는데 스자쿠를 알고 있다고 그랬다. 대부분의 고백 패턴이 그랬다. 를르슈는 어디 있을까, 이런 불성실한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는 그러냐고 대답했다.

 

 “쿠루루기 군은 람페르지 군을 좋아하지?”

 

 어라. 그런 걸 어떻게?

 

 “그렇지만 왜 사귀지 않아?”

 

 그 우린 아직 어려서 성인이 되어 교제하겠다고 초등학교 때 약속한 복잡한 사정을 어떻게 말을 해줘야…아니 그걸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말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스자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고르려다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그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여자랑 해본 적 있어?”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 스자쿠의 반응에 여자애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 쿠루루기 군이랑 해보고 싶어. 이제 곧 졸업이니까 마지막 정도는 괜찮잖아?”

 “…그런 말 하면 안 돼.”

 “난 여기 고등부로 진학도 안 해서 얼굴 볼 일도 없고. 쿠루루기 군도…람페르지 군이랑 못 해서 쌓여있지 않을까? 그리고 람페르지 군도 경험 없는 남자는 싫을 거 같은데. 어쩌면 람페르지 군이 경험이 더 많을 수도.”

 

 그런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절박하지도 않고, 초조하지도 않은데도 스자쿠는 왜 넘어갔을까? 를르슈가 경험 같은 거에 관심 없을 정도로 담백하다는 것도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이 여자애가 애쉬포드 학원 고등부에 진학하지 않으니 이제 얼굴 볼 일이 없어서 안심하고 섹스할 수 있는 장소도 알고 있다고 해서 사람이 오지 않은 구 교사의 가장 구석진 교실에서 왜 섹스를 하자고 하는 것에 스자쿠는 그러자고 한 걸까? 를르슈랑 전혀 닮은 구석도 없는 그 여자애가 자기 벨트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려 속옷 속의 페니스를 물고 핥아 발기시켜 콘돔을 끼우는 과정과 함께 자신의 젖은 질에 삽입시켜 스자쿠에게 섹스를 재촉하는 그 과정까지도 스자쿠는 를르슈를 생각했으면서도 어째서 왜 멈추지 않았는지.

 사정이 끝나고 여자애가 먼저 옷을 추스르고 나갔고, 스자쿠도 다시 가지런한 옷차림으로 멍하니 먼지 쌓인 책상 위에 앉아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기분이 묘하게 나쁘고. 속이 좀 뒤집히는 느낌이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스자쿠도 구 교사를 나왔다. 

 

 “오늘은 용병 안 갔어? 왜 거기서 나와?”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를르슈를 만났다. 중등부 졸업식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며 어제보다 더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스자쿠는 자기가 어떤 얼굴로 웃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우선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곧 졸업인데 무슨 용병이야. 그냥 여기 건물 어떤가 궁금해서.”

 “졸업인데 이제 와서 탐험? 너답군.”

 “를르슈 기다리느라 지쳤어. 얼른 가자.”

 “오늘 집에 가기 전에 마트 들렀다가 장 보고 들어가자.”

 “이때다 싶어서 부려먹고 들어가시는군요….”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음날도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다. 여자애랑 복도에서 한 번 마주쳤다. 그러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갔다.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았으니 아무도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기분은 최악이었다.

 졸업식 날이 왔다. 미레이는 나나리도 알고 있었다. 나나쨩! 볼 키스를 쉼없이 하는 미레이의 모습에 를르슈가 겨우 둘을 떼어냈다. 스자쿠는 옆집 이웃이니 자주 보는 나나리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보는 모습은 또 색다른 느낌에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스자쿠 씨, 가슴의 꽃, 예뻐요.”

 “그래? 이거 를르슈가 사흘 밤낮으로 학생회실에서 만든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스자쿠.”

 “손재주가 좋아서 남들 하나 만들 때 다섯 개를 만들더라고.”

 “스자쿠!”

 “뭐든 잘하는 오라버니는 나나리의 자랑이에요!”

 

 종이꽃 가까이서 볼래? 스자쿠는 나나리를 품에 안아서 가슴에 매단 꽃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했다. 가슴팍을 간지럽히는 작은 손에 웃음이 나왔다. 를르슈의 검은 머리랑 다르게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보들보들한 느낌도, 를르슈랑 닮았지만 더 연한 보랏빛 눈동자도 정말 귀여웠다. 나나리는 를르슈의 천사라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귀여워라. 나나리의 머리를 괜히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 내려주었다.

 

 “졸업생 대표는 를르슈니까 꼭 비디오로 찍어야 돼, 나나리.”

 “네, 맡겨만 주세요!”

 “그런 거 찍고 있으면 팔이 아프니까 나나리 시키지 말고, 회장, 부탁드립니다.”

 “이럴 때만 나를 찾지, 루루쨩~”

 

 이제 식이 진행된다는 안내 방송에 따라 다들 자리로 이동했다. 졸업생 대표로 인사를 할 를르슈는 앞쪽으로, 학급 대열로 앉은 스자쿠는 뒷쪽이었다. 

 어차피 고등부로 같이 진학하기 때문에 이 강당에는 다시 올 거고, 이 교문도 다시 올 거고, 나는 계속 를르슈와 함께지만…. 스자쿠는 누군가가 연설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여자애와의 섹스 이후로 스자쿠는 변했다. 섹스가 기분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와의 섹스를 그렇게까지 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여자와 섹스를 했다. 를르슈를 좋아하는데도. 대체 왜 그랬을까. 성욕에 미쳐있는걸까? 초조하다면 를르슈 본인에게 말한다면….

 

 “졸업 축하해, 스자쿠!”

 

 어느새 스자쿠 곁으로 다가온 를르슈가 웃으며 하는 말에 스자쿠는 얼떨결에 따라 웃었다. 졸업 축하해, 졸업 축하해, 축하해, 끝, 끝, 끝. 이제 다시 시작, 시작, 시작. 그런 결론 와중에 스자쿠는 사고의 결말을 흐지부지 내버렸다.

 될 대로 되라! 

 그리하여 고등부 1학년이 된 스자쿠는 를르슈 모르게 엄청난 썸씽을 일으키고 다니게 되었다. 말 그대로 썸씽이다. 수위는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다. 하지만 정해진 룰은 있다. 발렌타인 초콜릿이나 생일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은 받아주지만 점심시간의 도시락 만큼은 안 받는다는 룰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스자쿠와 사귀는 여자애와의 쌍방 합의라면 뭐든지였다. 

 

 “스자쿠 요새 엄청나던데.”

 “응?”

 “맞아, 여자애들이 엄청나게 노리고 있더라구. 중등부 때보다 더 심한 느낌?”

 

 운동부의 용병으로 불려나간 스자쿠가 없는 사이에 모인 학생회 멤버들은 그의 이야기를 했다. 를르슈로써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리발은 자기는 그래도 회장 일편단심이니까 상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셜리도 스자쿠 군이 힘내준다면 나도 라이벌이 줄어들어서 힘낼 수 있다고 말했다. 

 

 “스자쿠가 여자랑 자주 노나?”

 “우와, 를르슈 모르는거야?”

 “…뭔데?”

 “요새 학교 여자애들이랑 계속 노는거야. 데이트도 하고, 그 이상도 하고.”

 “그 이상…?”

 “뭐, 남자로써는 능력 좋다는 이야기겠지. 근데 를르슈랑 스자쿠는 이런 이야기 잘 안해? 아, 약간 를르슈한테 말하면 혼날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

 

 니나가 조심스럽게 그래도 너무 카사노바 같아서 불성실해보이지 않냐는 말을 했다. 셜리가 그제서야 ‘맞아, 그런 생각도 조금 들어! 하지만 스자쿠 군은 또 만나면 여전히 성실해!’ 하면서 갭 모에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를르슈가 이해하려고 하기에는 그건 갭 모에가 아니라 그냥 이중성이었다.

 미레이가 나타나서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입니다~!’하고 기세 좋게 외친 것에 다들 해산했다. 다들 각자 갈 길로 가는 중에 셜리가 를르슈는 어느 쪽으로 가냐고 물었다. 스자쿠를 찾아서 갈 생각이라고 하니까 셜리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나를 좋아하나?’

 

 셜리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를르슈에게 고백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묘한 거리감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지금처럼 함께 가려고 하면서도, 를르슈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면 따라오지 않고 가볍게 포기할 정도의 가볍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연정이 느껴졌다. 그런 애매한 느낌이 를르슈는—

 

 ‘싫다.’

 

 더 다가오지 않는 부족한 적극성을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지를 계속 남기고 있는 자체가 싫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셜리는 상냥하고 다정하고 쾌활하고, 아주 좋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지만.

 

 “학생회 작업이 일찍 끝나서 오히려 루루가 스자쿠 군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지. 모처럼 스자쿠가 활약하는 걸 볼 기회네.”

 “…루루는 스자쿠 군이랑 정말 사이가 좋네.”

 “어렸을 때부터 줄곧 함께였으니까 그럴 수 밖에. 이제 진짜 찾으러 가볼게. 셜리, 잘 가.”

 

 이쪽에서 먼저 등을 돌리고 돌아섰다. 오늘은 테니스 부였던가? 를르슈는 그쪽으로 향하며 괜히 뒤에 홀로 남은 셜리를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테니스 코트가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어서 시간이 걸렸다. 오히려 지금 가면 적당한 시간에 마중나가는 모양이 될 지도. 를르슈는 그렇게 생각하며 철장 너머의 테니스 부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 테니스 부와 여자 테니스 부가 같이 연습한다고 했던가? 여자 목소리도 많이 들렸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스자쿠의 모습을 찾았다. 사람들이 대부분 뒷정리를 하는 걸로 보아서는 이쪽도 부 활동 마무리가 된 듯 싶었다. 좋은 타이밍이군.

 

 “부회장?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우리 풍기위원이 오늘 테니스 부에서 열심히 대타를 뛰어줬다고 들었는데, 모시러 왔지.”

 “아, 쿠루루기? 아마 여자애들 뒷정리 도와주러 갔을걸?”

 “과연 뒷정리를 도와주러 갔을 것인가~”

 “부회장이 온 김에 풍기위원의 경질을 바로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저쪽이라고 가리키는 방향에는 물품 창고가 있었다. 관리가 어떻게 되고 있나 확인할 겸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를르슈는 기꺼이 그쪽으로 향했다. 문은 의외로 소리없이 가볍게 열렸다. 어둑한 내부에 발자국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혀에서 이온음료 맛 난다.’

 ‘그걸로 수분보충 하니까? 스자쿠 군, 키스하고 나면 맛 감상하는거야?’

 ‘드물잖아, 여자 테니스 부 부장이랑 하는 건.’

 ‘아, 아직 땀에 젖어있으니까 만지는 건 조금….’

 ‘가슴이 미끌미끌하네.’

 ‘냄새 맡지 마, 아, 간지럽히지도 마.’

 ‘주문이 많네.’

 ‘싫어?’

 ‘나쁘진 않은데, 계속 그렇게 칭얼대면 누가 와서 들킬 수도 있다구?’

 ‘다들 뒷정리 중이라 안 오고, 스자쿠 군이 같이 들어온 거 알면 대부분 눈치 채고 비켜주는거야.’

 

 이어지는 질척거리는 소리는 서로 다른 타인들의 타액이 적나라하게 섞이는 소리였다. 아니, 한 명은 알고 있어. 스자쿠다. 어릴 적부터 줄곧 친구였고, 옆집 이웃이고, 누구보다 친한 나의.

 나의?

 를르슈가 자신의 사고에 의문을 품은 순간에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따.

 

 “…부회장?!”

 “를르슈?!”

 

 몸을 벌떡 일으키는 여자는 거의 반라였고, 불행 중 다행으로 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를르슈는 저를 지칭하는 말들에 짧게 호흡을 골랐다. 여자의 옷차림이 빠른 시간 안에 단정해지고 그걸 확인한 를르슈는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

 

 “부 활동도 방과 후라고 하더라도 교내 활동이니 풍기를 해치는 일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걸 스자쿠, 네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저기, 를르슈.”

 “아무튼 지금 일은 어디에서도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도록 해. 본인에게도 그렇겠지만 학교의 수치다.”

 

 창고 문을 닫고 나온 를르슈는 주변에서 무어라 하는 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로 교문 쪽으로 향했다. 스자쿠는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사이에 역까지 뛰어가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버리면 된다. 그리고 집에 가서 생각을 정리하면 된다.

 아직까지 여유 있어. 를르슈는 교문을 통과하고, 길거리를 걸어나가며 생각했다. 워낙에 인기가 많은 녀석이라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고, 절조 없이 구는 지경이라고는 상정 외지만 아무튼 그래도, 나는, 뭔가, 아니, 그만, 이제.

 를르슈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급하게 걷고 있었나. 이성적이지 못하게. 길거리의 가게의 쇼윈도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아무리 봐도 좋은 안색이 아니었다. 여기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걱정하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를르슈, 잠깐만 기다려!”

 

 저 녀석이 오니까. 아니, 이미 와버렸으니까 소용이 없을지도.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굳은 다리를 겨우 움직여 걸음을 내딛었다. 시간 계산을 해도 옷을 갈아입고 테니스 코트에서 교문을 통과, 이 역 근처까지 오는데만 해도 제법 시간이 걸리는데 어떻게? 내 걸음은 평소보다 빨랐으면 빨랐지 느리진 않았는데. 뭘 해도 예상 밖의 놈이니까 이젠 지긋지긋하다.

 제 팔을 낚아채는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기에 를르슈는 있는 힘껏 짜증을 냈다.

 

 “이거 놔!”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내가 기다려야 할 이유가 뭔데?”

 “를르슈한테 해명해야 하니까.”

 “무슨 해명?”

 “그, 방금 전의 일.”

 “창고에서의 일?”

 “그래.”

 

 잠깐의 대화로 차분해진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자쿠가 그렇게 자기 감정을 가라앉힐수록 를르슈는 열이 받았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런 식으로 내 계산을 망가뜨려놓고. 내 계획을 보란듯이 무너뜨려놓고.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

 “…응?”

 “운동부 용병에 매번 그렇게 놀아날 거면 앞으로 학생회 활동에만 전념해. 풍기위원이라는 네 직함이 부끄럽지도 않아? 여자 테니스 부랑 그런 일을 하는…아, 그건 이제 됐어. 남자랑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모든 운동부에서 그런다는…아니다. 해명이 필요 없다고 한 건 나니까. 됐어. 네 맘대로 해.”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를르슈는 잘 돌아가던 머릿속 계산기가 얽힌 것을 느꼈다. 스자쿠의 손을 떼어놓고 역으로 올라갔다. 개찰구 쪽으로 가려는데 등 뒤에서 또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스자쿠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심한 말을 한 느낌이었는데도, 그런 말을 듣고서도 스자쿠는 를르슈의 등 뒤에 서서 북적이는 전철 속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지켜주었다.

 등 뒤에서 스자쿠의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를르슈는 눈을 감았다. 앞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유리창에 비칠 스자쿠의 모습이 자기가 알고 있던 그 스자쿠인지 구별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너를 봐야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