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아 제국 사회에서 그의 존재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다. 완벽한 외국인의 몸으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 오른 그를 보며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계승권이 한참 뒤떨어지는 황자가 라운즈의 취임식에 오게 된 연유는 다름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이었다. 를르슈의 어머니도 한때는 꽤나 이례적인 존재였다. 서민 출신으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어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를르슈의 어머니는 이번 나이트 오브 세븐의 취임식에 관심이 상당했다. 를르슈 역시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소문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의 존재는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를 선례로 삼아 브리타니아 제국의 실력주의를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나라 안팎으로 떠들어대는 것에 모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서민 출신 황후의 자녀로 나름의 관심을 끌었던 를르슈와 그의 여동생은 국민들의 관심 밖에 내몰렸다. 딱히 관심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쿠루루기 스자쿠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좁혀진 느낌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자기 자식들 앞가림이야 뒷전이고 새로운 후배의 등장에 싱글벙글 웃으며 황제 폐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 모습에 를르슈는 입맛이 썼다. 황제가 검을 들어 나이트 오브 세븐의 임명을 마치고, 이어지는 피로연에 기분을 내는 건 힘들었다. 심지어 를르슈는 쿠루루기 스자쿠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기에. 이 자리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제레미아, 지금 아리에스로 돌아갈 수 있나?”
샴페인 한 잔만으로도 이 자리를 충분히 지켰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를르슈는 이 자리에 있으나 없으나한 존재였기에, 지금 돌아가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기사이지만 아직 미성년인 를르슈의 호위를 임시로 맡고 있는 제레미아에게 투정하듯 말을 걸었다.
“전하, 나이트 오브 세븐과의 인사가 아직이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내 몫까지 인사를 받으셨겠지. 그리고 나는 딱히 나이트 오브 세븐의 인사를 받고 싶지도 않고.”
“…!”
“피곤하다. 돌아갈테니 준비를…….”
를르슈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은, 눈앞의 예기지 못한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역인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가 를르슈의 앞에 있었다. 젠장.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찬가지로 라운즈 출신인 어머니 역시 기척을 죽이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쿠루루기 스자쿠의 등장이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깜짝 놀라는 것은 익숙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처음 보는 상대에게는 더더욱.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전하께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가 인사드립니다.”
우선 습관처럼 손을 내밀어 그의 키스를 받긴 했으나 를르슈의 떨떠름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뭐라고 적당히 내둘러야하는 인사도 떠오르지 않아서 를르슈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저나 들었으려나, 방금 전에 인사 같은 건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는 말.
“전하께서 피곤을 느끼시기 전에 미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불찰을 용서해주십시오.”
들었군.
“나에게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오늘 이 연회의 주인공이 바로 나이트 오브 세븐인데, 쿠루루기 경이야말로 나보다 더 피곤할 터이니 어쩔 수 없지. 불찰까지 따질 필요는 없어.”
“마리안느 님께 전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 역시 어머니께 경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나와 동갑인데도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지금 자리에 올랐다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눈을 둥글게 휘며 웃는 웃음이 인상이 좋아보였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를르슈와 시선을 마주하며 무언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멀리서 보았을 때는 황제하고도 막힘없이 말을 나누던 주제에 를르슈 앞에서는 말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별로였다. 어머니께 말을 들었더니 체력이 형편없는 샌님 황자라는 소리를 들은건가? ‘섬광의 마리안느’의 자식이라서 기대를 좀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별로인가? 계승권이 한참 뒤떨어지는 황자와는 할 이야기가 딱히 없나? 재수 없는 자식. 를르슈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와중에도 환하게 웃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도 방금 전에 들었겠지만, 지금 내가 피곤해서 그런데 먼저 자리를 비워도 될까?”
“아! 물론이죠. 전하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원래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아서, 괜히 미안하군.”
이런 자리에 자주 올 일이 없을 만큼 나이트 오브 라운즈와 연이 없는 사람이니 알아서 걸러주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쿠루루기 스자쿠에게는 그런 뜻이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하가 편하실 때에 다시 인사드려도 될까요?”
“인사?”
“지, 지금 자리는 저 역시 불편해서. 물론 황제 폐하께서 열어주셔서 무척이나 황송하긴 하지만….”
“……?”
황족에게 충성의 키스를 했으면 그게 나이트 오브 세븐이 해야 할 인사가 전부가 아닌가? 를르슈는 뜻모를 소리를 하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나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나?”
“……”
“어머니의 무용담이라면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언제든 아리에스 궁에 와서 이야기를 들으면 될 테니, 딱히 나에게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저 권력 밖의 황자일 뿐이니까.”
를르슈는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에 이 자리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발걸음을 멈춰서 다시 뒤를 돌아보면 나이트 오브 세븐이 바닥에 시선을 박은 채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매정하게 말했나? 사실 이 자리에서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진심을 담아 축하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머니 역시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었을 때도 귀족 놈들이 열받게 굴어서 재미가 없었다고 하셨지. 를르슈는 크게 인심 쓰기로 했다.
“축하가 늦어서 미안하군.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된 것을 축하한다, 쿠루루기 경. 오늘을 즐기면 좋겠어.”
를르슈가 다시 코앞까지 다가가 축하의 말을 건네자, 쿠루루기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인지 얼굴도 빨개진 것 같았다. 술을 많이 마셨나? 그러나 가까이에서는 술 냄새가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다. 를르슈의 빤한 시선에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스자쿠, 라고 불러주시면 편하실겁니다.”
“응?”
“나이트 오브 세븐이나, 쿠루루기 경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스, 스자쿠라고 불러주시면.”
“우리가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 않나?”
“…….”
“하지만 오늘은 경의 축하를 위한 자리이니 그 정도는 해주지. 스자쿠.”
이젠 진짜로 가보겠다.
를르슈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눈치 빠른 제레미아가 미리 준비해둔 차를 타고서 아리에스로 돌아가는 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전하, 많이 피곤하셨습니까?”
“피곤하지 않을 수가 있나. 저런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안 넘어가.”
“돌아가시면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야겠어. 나나리는?”
“주무신다고 합니다.”
“그래.”
아리에스까지 가는 동안에는 잠깐 졸았다. 남매들끼리의 티 파티 같은 것이면 모를까 이런 대규모의 연회는 피곤한 것 말고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침실로 가는 복도를 터벅터벅 걸으면서 를르슈는 오늘 만났던 나이트 오브 세븐을 떠올렸다.
외국 출신으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자리까지 올랐고, 그건 즉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뜻이었다. 굳이 를르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권력을 가졌음에도 를르슈에게 직접 호명을 요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쪽은 어머니가 남들보다 특이한 출신이라는 점 빼고는 볼 것 없는 황실 사람들일 뿐이다. 평소라면 득실을 계산하여 쿠루루기 스자쿠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지만, 지금의 를르슈에게는 오로지 피곤함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길게 생각해보아도 남는 게 없을 것 같았다.
* * *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황자의 모습에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숱한 눈칫밥을 먹었던 스자쿠가 황자의 매정함에 대해 눈치를 못 챌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자가 브리타니아의 귀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저를 그렇게 대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거리감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아쉬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일찍이 먼저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들의 틈으로 돌아간 스자쿠는 황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아쉬운 마음과 동시에 드디어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쁨이 커져갔다. 빈 잔에 술을 더욱 채우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떤 것 하나 쉽지 않은 일이라도 두렵지 않았다.
연회의 밤이 무르익어 갈수록 스자쿠의 취기도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스자쿠는 술을 마셔도 얼굴에 티가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들 스자쿠가 취해간다는 것을 모르면서 그에게 연신 축하주를 퍼부었다. 황제와 황후가 자리를 비운지 제법 되었고, 남은 것은 친분이 있는 귀족과 나이트 오브 라운즈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는 그들은 부어라 마셔라 중이었다.
스자쿠는 아시아에서 왔다는 독한 술을 한 병 다 비우고 나서야 연회장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누구한테 보이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그림자만 밟아가며 새로 옮건 거처로 향했다. 그 곳은 황제가 머무는 궁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모시고 있는 주인의 위상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기사가 머무는 저택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느 황족이 머물고 있는 궁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저택의 새 주인을 모시러 나온 하인들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아서, 스자쿠는 겨우 걸음을 바로할 수 있었다. 스자쿠의 시중을 들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떼어내고, 스자쿠는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술 냄새가 온몸에서 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마셨더라? 를르슈 전하께 인사를 드릴 때도 났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싫어하셨나? 술을 마시기 전에 바로 인사를 드릴걸. 멍청하게 뭘 머뭇거렸다가…….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한숨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황자를 찾아가서 그때 술 냄새가 났냐고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깨끗하게 씻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내일부터 바로 업무에 들어가는 걸 다들 알면서 그렇게 술을 들이부었다는 게 어이없고 황당했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다시 인사를 드리러 아리에스에 가도 되냐는 말을 돌려서 했음에도 황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리에스의 주인은 황후인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였지만, 사실상 아리에스의 실권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아들―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라는 것을 펜 드래곤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에게 찾아가도 되냐고 직접 물은 것도 그의 허락이 마리안느의 허락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자의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서 아리에스에 들어갈 허락을 받는 것도 방법 중에 하나였지만, 직접 그의 허락을 받는 것과는 달랐다. 적어도 스자쿠에게는 그랬다.
이불을 몸에 대충 묻은 스자쿠는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는 일을 하고, 기회가 된다면 아리에스에 가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고작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된 주제에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상대는 손에 닿지도 않을 거리에 있는 황족이니.
그렇게 각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일이 안 풀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연이은 서류 업무에 스자쿠는 한숨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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