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 람페르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첫 친구에서 시작된 관계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연정으로 접어들고, 서로의 마음이 맞아떨어지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연인으로 관계는 발전. 18살이 된 지금, 누구보다 가까운 스자쿠와의 관계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성연애는 아직까지 크게 인정받고 있지 않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성인이 되면 홀로 저를 키워준 어머니께 스자쿠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예정이었고, 의절 당할 각오도 하고 있다. 어차피 펜드래곤에 있는 브리타니아 국립대학에 진학할 예정이기에 집에서의 독립도 완전하다. 저축도 좋게든 나쁘게든 열심히 모았고 작지만 펜드래곤에서 먹고 살만할 정도로 모았다. 물론 스자쿠도 그러하다.
하지만 성인이 되는 20살과 다르게 지금은 18살, 고등학생. 를르슈의 예정대로라면 어머니 마리안느에게 커밍아웃할 일은 없다. 스자쿠도 그럴 일 없게 조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
지금의 상황이라고 하면, 를르슈와 스자쿠를 소파에 앉혀두고, 맞은편 일인용 소파에 앉아서 홍차를 마시면서 낮은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
“…….”
“…….”
“…….”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를르슈는 마른침을 삼켰다. 스자쿠의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커밍아웃이 아니라 아웃팅이라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마리안느는 잔 속의 홍차가 다 빌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두 소년을 보면서 마리안느는 겨우 입을 열었다.
“를르슈, 스자쿠. 너희는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으니 지금의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해.”
이해는 오히려 이쪽의 불순한 동성 성관계에 대해서 받아야하는데. 를르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보였다.
“어머니의 이야기라면 언제든 이해할 수 있어요.”
“를르슈는 정말 의젓한 아들이야…. 정말 자랑스럽다.”
“…….”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마, 마, 마리안느 씨! 를르슈랑 저는…!”
스자쿠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마리안느는 울음과 함께 큰 소리를 내질렀다.
“나, 임신했어! 분명 조심하고 있었는데! 를르슈도 이제 다 컸으니까 스자쿠랑 결혼해서 집 나가서 살 거고 이제 애 키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임신이라니, 그 핑계로 또 결혼하자고 프로포즈까지 받아버리고 정말 이놈의 인기 지겨워!”
아.
“아니, 좋아, 말하고 나니까 편해. 를르슈, 나 사실 네 친아빠랑 몇 년 전부터 만나고 있거든. 솔직히 알맹이는 귀여운 사람이니까 나쁘지 않고, 외로웠으니까! 를르슈는 혼자서 훌쩍 커버리고 집안일은 나보다 잘하고, 스자쿠랑 사귀면서 더 나한테 거리를 두는 거 같으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하다보니까…!”
음.
“이 나이에 어떻게 애를 낳아! 지우려고 했는데, 를르슈도 이렇게 귀여운데 이번 아기도 얼마나 귀여울까 생각하면 그런 생각도 안 들고! 샤를한테 말하고 나니까 결혼하자고 하는데 그런 막되먹은 귀족 집안에 관심 없다고!”
그래서 를르슈는 이제껏 몰랐던 자기 친아버지의 정체와 어머니의 임신, 그리고 이미 숨겨도 소용 없을 정도로 티가 난 스자쿠와의 관계에 대해서 한 번에 정리하게 되었다. 엉엉 우는 마리안느에게 육아를 돕겠다고 말했다. 결혼하지 않아도 돼? 진짜? 누가 어머니고 아들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리고 19살, 를르슈에게는 나나리라는 늦둥이 여동생이 태어났다. 수험생활 중에 반은 공부, 반은 육아를 했다. 나나리가 태어난 날에 신문이나 잡지에서나 보던 재벌 총수 샤를 지 브리타니아가 병원에 찾아와서 깜짝 놀랐다. 마리안느는 주목받는 마님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기에 혼인 신고도 못 올리고, 나나리는 를르슈처럼 미혼모의 아이로 살게 되겠지만, 생활비와 육아에 대한 비용, 그리고 샤를 본인의 욕심에서 엄청난 돈을 매달 지원받았다.
를르슈와 스자쿠가 펜드래건에 이사갈 때에 집까지. 나나리가 아직 어리니까 독립은 이르다고 생각했다. 스자쿠와의 러브하우스는 당분간 미루기로 했다. 스자쿠는 학생 기숙사에서 지내기로 했다. 캠퍼스 안에서 데이트도 할 수 있고, 성인이니까 호텔도 다닐 수 있다. 게다가 부모 공인의 교제니까 거리낄 것도 없다. 어쩌면 해피엔딩.
“나나리도 데려가요?”
“음, 나나리는 아직 어리니까 못가지.”
“나나리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는데!”
“비행기는 아직 어려.”
“아니에요, 같은 반 친구도 비행기 타고 유로 브리타니아에 다녀왔댔어요! 그럼 나나리도 할 수 있어요!”
“…….”
“왜 스자쿠 씨랑 오라버니만 가요?”
대학교 4학년 졸업반. 마지막 학기를 앞둔 방학 중에 스자쿠는 용기를 냈다. 같이 일본에 가자. 나도 우리집에 너를 소개하고 싶어. 스자쿠네 집안, 쿠루루기 가문은 일본에서 유명한 정치가 집안이고, 스자쿠는 분가 출신이긴 하지만 최근 브리타니아 외교관으로 지냈던 아버지가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그 아버지의 아들인 스자쿠에게 기대가 쏠리는 듯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를르슈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너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스자쿠. 스자쿠는 웃으며 키스를 했다. 집안 때문에 너랑 헤어질 생각도 없어. 오히려 이번 기회에 완전히 매듭지을 수 있다면 좋거든.
그런 김에 겸사겸사 일본에서 지내기로 했다. 호텔에서 계속 머무는 건 사치이기에 일본에서 방학동안 지낼 숙소도 구해뒀고, 대강의 생필품도 미리 부쳤다. 모든 준비는 순조롭다. 다만, 이 계획의 가장 예상치 못한 변수.
“나나리만 빼고?”
“방학동안에 유피랑 코넬리아 누님도 오시니까 나나리는 안 외롭지? 나랑 스자쿠도 금방 돌아올거야.”
“근데 왜 나나리만 빼고 가요?”
“…….”
“나나리, 를르슈를 괴롭히면 안 되지! 오빠 짐 챙겨야하는데 방해하면 못써.”
“그치만 오라버니가 나나리만 빼고 스자쿠 씨랑만 가는데요!”
마리안느는 를르슈의 방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나나리를 끌어안았다. 나나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6살인 나나리는 한창 어리광쟁이였다. 이복형제들이랑 어쩌다보니 알게 되어서 언니들도 있고, 를르슈의 무지막지한 애정에 사랑스럽게 크고 있고, 스자쿠와의 끊임 없는 놀이로 하루하루가 즐거울 때이다.
그래서 한 달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나리도 데려가요!”
잽싸게 마리안느 품에서 빠져나와서 아직 다 채우지 않은 를르슈의 트렁크에 몸을 구겨 넣는 나나리의 모습에,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금방 돌아온다고 했잖아.”
“금방이면 나나리랑 같이 가요!”
“나나리. 선물도 많이 사올게.”
“같이 가서 고르면 되잖아요!”
여동생의 논리정연한 대답에 를르슈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틈을 보이면 안된다. 이번 여행은 그냥 여행이 아니라 스자쿠와의 관계를 확실히 다질 수 있는 기회니까. 열어진 문 사이로 트렁크 안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나리를 마리안느가 끌어냈다. 저녁 먹어야지. 를르슈도 오늘 급한 게 아니면 저녁 준비 도와줄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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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23:18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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