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타루와 고등학생 스자쿠]
를르슈가 기억하는 첫번째 발렌타인데이는 나나리와 함께 초콜릿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리안느가 장을 한껏 봐오고, C.C.가 베이킹 관련 책을 펼쳐놓고 중탕이 무엇인지 한참이나 들여다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발렌타인의 첫 장이었다. 결국 를르슈가 책을 들고서 선두지휘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녹였다 굳힌 아몬드 초콜릿을 만들고, 가장 모양이 예쁜 것은 나나리와 마리안느에게 주었다.
가장 모양이 못난 것은 C.C.와 나누어 가졌다. 그날 저녁에, 검도부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스자쿠와 만나서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를 했다. 스자쿠는 대회를 앞두고서 주말에도 계속 학교를 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발렌타인데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자 스자쿠는 이렇게 말했다.
“어쩐지, 여자애들이 갑자기 많이 찾아온 이유가 있었네.”
“응? 스자쿠, 초콜릿 받았어?”
“…으음. 받기는 했는데 발렌타인 초콜릿인 줄은 몰랐어.”
“……나나리가 제일 먼저 주고 싶다고 했는데.”
“에이, 그건 를르슈가 제일 먼저 받아야지.”
“나는 오늘 받았어.”
“그래? 그럼 받아도 돼?”
를르슈는 머뭇거리다가 비닐 봉투에 마구잡이로 넣어둔 못생긴 초콜릿을 내밀었다.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것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냐는 눈빛에 를르슈는 괜히 시선이 간지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내가 만든 거야.”
“를르슈가?!”
“모양은 별로여도 맛있다고 다들 그랬으니까…. 스자쿠도 받아.”
“정말 받아도 돼?”
뭔가 감격한 눈으로 스자쿠는 엉망인 모양의 초콜릿을 보고서 바로 하나를 집어먹었다.
“진짜네, 엄청 맛있다.”
“나나리랑 같이 만든거니까!”
“그런가? 아무튼 초콜릿 고마워. 일본에는 화이트데이라는 게 있어, 그때 나도 사탕 줄게.”
“화이트데이?”
“응, 발렌타인데이는 여자가 남자한테,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여자한테 주는 날이야.”
“……근데 화이트데이는 왜 사탕이야?”
“어……?”
스자쿠는 그때 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게, 라고 말하다 를르슈에게 반대로 물어보았다.
“를르슈는 사탕 싫어?”
“아니, 그냥 그래.”
“그럼……. 음, 를르슈가 좋아하는 걸 선물로 줄까?”
“생일도 아닌데?”
“내가 를르슈를 좋아하니까 주고 싶은거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줘. 3월 14일엔 꼭 줄게! 아, 화이트데이는 3월 14일이거든…….”
그것이 를르슈의 첫 발렌타인데이였다.
그 이후로 스자쿠에게 매년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주었다. 나나리와 함께 초콜릿을 만들고 나서 같이 주면 스자쿠는 기쁜 얼굴로 두 사람의 초콜릿을 받았다. 화이트데이에는 두 사람 모두 스자쿠의 선물을 받았다. 스자쿠는 나나리에게는 사탕을 주었지만, 를르슈에게는 사탕이 아닌 다른 것을 주었다. 그것이 만화책일 때도 있었고, 운동화일 때도 있었고, 를르슈의 스타일이 아닌 옷일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것이 사탕보다 기뻐서 를르슈는 책장에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만화책을 꽂아두고, 발이 작아져서 못 신는 신발도 계속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었다.
왜 버리지 못하고 있는걸까?
그 대답은 스자쿠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알게 되었다.
스자쿠가 교복을 입거나, 도복을 입거나 그런 모습은 자주 보았지만, 스자쿠의 졸업식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꽃을 가슴팍에 달고서 졸업장을 들고 온 스자쿠는 를르슈를 보더니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졸업식 지루하지 않아? 교장 선생님, 말 엄청 많잖아.”
“아냐, 상 받는 스자쿠가 멋있었어.”
“멋있었어? 를르슈가 칭찬해주니까 기분 좋네.”
옆집의 의리를 다하러 왔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대리로 온 마리안느와 그 일가족을 보고서 스자쿠는 쑥스러운 듯이 볼을 붉혔다.
이제 갈까, 마리안느가 그렇게 운을 뗐을 때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는 스자쿠와 같은 꽃을 가슴팍에 달고 있었다. 잠깐만, 친구 좀 만나고 올게.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마리안느가 흥미롭게 쳐다보며 물었다. 여자친구니? 그러자 스자쿠는 부정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스자쿠의 등을 보던 를르슈는 왜인지 한없이 슬퍼져서, 스자쿠의 졸업장을 쥔 손에 힘까지 빠졌다.
“친한 형을 빼앗긴 기분일거야.”
“친한 형…?”
C.C.는 떨어질 뻔한 졸업장을 빼앗으며 를르슈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계속 스자쿠랑 친한 건 너인 줄 알았는데, 사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좀 충격이잖아? 나도 저 애송이가 여자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는걸.”
“…그런거야?”
“그래. 질투 같은 건 아닐걸. 그나저나 마리안느, 예약한 식당 몇 시였지?”
“어머, 벌써 15분 밖에 안 남았어! 를르슈, 스자쿠 군 좀 데리고 올래? C.C.랑 나나리는 주차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마리안느와 다른 사람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틈에, 를르슈는 입술을 삐죽이며 스자쿠와 그 여학생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갔다.
질투 같은 건 아닐걸.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뒷뜰 으슥한 곳까지 걸어가면서, 왜 이런 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나서 스자쿠를 부르려고 할 때였다.
스자쿠는 여학생과 키스를 하고 있었다. 를르슈보다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볼을 감싸고, 입을 깊게 맞추었다. 그건 를르슈가 보았던 ‘키스’와 다른 키스였다. 적나라하게 혀가 얽히는 소리와 달뜬 숨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스자쿠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스자쿠인 것은 확실했다.
그 옆에 있는 것이 를르슈가 아닌 것이다.
“……이제 됐어?”
“쿠루루기 군, 사실은, 사실은 나 안 좋아했지?”
“…….”
“지금도 안 좋아하면서 키스한 거잖아.”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사귄다고 무조건 좋아할 수도 없는거잖아.”
여학생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스자쿠는 그것을 보고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가볼게. 를르슈는 그 소리가 나자마자 햇빛이 가득한 운동장으로 달렸다. 있는 힘껏 뛰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가 그를 불렀다.
방금 전의 그 차가운 목소리와 다르게 햇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런 차이를 느끼면서 를르슈는 뒤를 돌아보았다. 울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애를 썼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얼굴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안아올렸다.
“무슨 일 있었어? 왜 울어?”
“스, 자쿠….”
“이상한 사람이라도 만났어? 누구야?”
“아니, 그게, 아니라…….”
“마리안느 씨는?”
“다들 주차장에 먼저 가있는데…. 스, 스자쿠, 나 안 울었어.”
를르슈의 그 말에 스자쿠는 한참을 시선을 보내다가 결국 ‘알겠다’라고 말하며, 를르슈의 눈물 자국이 남은 뺨을 닦아주었다.
스자쿠의 졸업식날, 를르슈는 저보다 10살이나 많은 스자쿠에게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저 친한 형이 아니라, 그와 키스하는 여자를 질투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나나리의 동화책 속에 나오는 공주님들처럼 얌전하게 키스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건네주는 마녀처럼 탐욕스럽게 스자쿠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그는 아주 어른스러운 아이였기에 그 감정을 인정하는 건 아주 쉬웠다.
하지만 어른스러운 것과, 어른이 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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