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리타니아의 도련님이 새로운 장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스자쿠의 귀까지 닿는 데에는 한달이 겨우 걸렸다. 새로운 장난은 스자쿠를 의미했다. 평소에는 정보 처리 능력 쪽에서는 (를르슈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처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스자쿠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단박에 자기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것이, 를르슈와 스자쿠는 직업적으로도 만날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그 이전까지 를르슈가 하던 위험한 장난질에 스자쿠는 ‘남색’으로 추가되었다. 도박, 사기, 공갈, 협박— 남색.
작업의 근거지인 이탈리아와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영국, 그리고 를르슈의 활동무대인 미국을 오가는 번거로운 스케쥴 와중에 를르슈의 끄나풀 한 명이 안 좋게 잡히고 말아버렸다. 를르슈는 몸을 숨기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고려했는데, 하나는 블러프로 자주 드나드는 세 나라에서 쥐죽은듯이 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3국에서 얌전히 사업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를르슈의 집안인 브리타니아 가문은 한때는 왕족이었으나 지금은 더러운 사업과 정치판에서 누구보다 정재계의 유착을 부추기는 인간들 소굴이었다. 를르슈는 그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크게 유감은 없었지만, 같은 집안 사람에게도 이빨을 박으려 드는 무뢰배들에게는 질린지 한참이었다.
지금 브리타니아의 수장은 수많은 애인과 그의 자식들에게 제 자리를 넘겨주는 것을 고려하고 있을 때, 를르슈는 수장 자리는 아니어도, 저에게 피라미들도 덤비지 못하는 위치에 오르고 싶었다. 나나리가 다리를 다쳤을 때 이미 했던 다짐이었다.
벌써 사람들이 줄을 선 남자—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에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휘하에 들어가겠다고 말하지, 슈나이젤은 를르슈를 반가워하며 맞이했다. 그리고 그가 처한 위험과 지고 있는 리스크를 모두 책임져주었다.
그래서 를르슈는 일본으로, 나나리의 다리도 치료할 겸, 그렇게 떠났다.
그곳에서 스자쿠와 사랑을 했다.
[2]
를르슈가 일본에 도착하던 여름에는 이미 습기가 가득해서 가벼운 호흡도 버거울 정도였다. 긴 비행으로 지쳐있는 나나리를 겨우 병원으로 옮겨주고, 수속을 마치고 나면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일본까지 와서 를르슈를 괴롭힐 인간이 있을까 싶어서 나나리의 SP로 시노자키 사요코를 데려왔지만, 생전 처음 오는 나라의 피로함에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나나리를 두고서 잔뜩 날이 서있는 를르슈를 보고 있던 사요코가 호텔에 먼저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처음 두세번은 거절을 하다가, 결국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 를르슈는 병원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몸을 좀먹는 피로 때문에 그 예민하던 를르슈가 사람과 부딪히게 된 것은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아마 그들은 를르슈의 그런 허점을 기대하긴 했으나 그가 그렇게까지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했다. 를르슈의 무너진 몸의 빈틈에 칼이 들어서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나리의 SP만 생각했고, 병원에서만 계속 머무를 생각에 굳이 자신의 경호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를르슈로써는 생각치도 못한 낭패였다.
—이대로 칼에 찔린다. 이 녀석들은 프로다. 어디를 찔러야 바로 죽는지, 그 급소를 노리고 있어. 나를 알아보고서 찌르는거야. 내 얼굴을 확인했어. 누구지? 슈나이젤의 아래에 있는 놈들이라고 하기에는 수법이 야비하다. 누가 나를?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나나리는?
를르슈는 가까스로 몸을 굴려 아예 칼날이 닿기 전에 스쳐 지나가 긁히더라도 급사하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를르슈의 몸은 를르슈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체력도 체력이거니와, 상당히 지쳐있는 피로감이 몸을 굳게 만들었으며, 죽음의 공포는 예상 외로 깊었기 때문이었다.
“…위험해!”
“?!”
괴한과 를르슈가 놀란 것은 동시였다.
아무리 봐도 길을 가던 사람처럼 보이는 사내가 를르슈의 몸을 낚아채며 괴한의 칼날을 발로 찼다. 나뒹구는 칼날 끝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이 또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 경찰을 부를테니까…!”
하지만 이 사내의 단점은 생각만 해도 될 일을 입밖으로 낸다는 것이었다. 경찰이라는 말에 괴한도 를르슈도 당황했다. 피해자인 를르슈야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지만, 이미 미국에서 를르슈의 이름은 나름 암암리에 골칫거리로 소문이 났을지라 FBI에 넘어가게 되면 를르슈도 곤란해진다. 괴한이 달아나는 사이에 사내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저 멍청이, 소리를 지른다고 될 일이라면 경찰이 왜 있겠어.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린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긴 했지만 호텔에서 쉬면 나을 것 같았다.
“저기, 저 사람 얼굴 기억하고 있어? 경찰에 신고해야하니까 ….”
“경찰은 필요없어.”
“응? 일본어 잘 하네. 의외야.”
이제껏 일본어로 말하던 사내는 ‘못 알아 들을까봐, 영어로 말하려고 했거든.’이라고 했지만 를르슈로써는 신뢰도 안가고 괜한 참견이었다.
“됐으니까 그냥 가게 해줘.”
“너 칼에 찔릴 뻔했어!”
“알아. 시끄러운 녀석이군. 소리 좀 낮춰.”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다음엔 다른 사람들이 다친다구!”
“저 녀석의 타겟은 나야! 그리고 다른 사람 따위….”
헛, 하고 입을 다물면 남자는 무언가 이해할 수 없다는듯이 쳐다보았다. 하긴, 일반인의 기준에서는 칼 맞는 것이 당연한 사람의 일상이 기이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를르슈는 납득 대신에 총을 꺼내들까 하다가, 아직 나나리의 다리 치료가 시작 단계라는 것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제발 갈 길 가주길 바란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는 쿠루루기 스자쿠야.”
“안 물어봤어.”
“응? 이름 알려줬으니까 이제 서로 아는 사이 아니야? 갈 길 가기엔 서로 통성명도 했어.”
“통성명? 하, 내 이름이라도 아는건가?”
“알아. 를르슈 람페르지.”
너무나도 또렷한 발음으로, 를르슈 람페르지라는 옛날 이름을 가지고 오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현기증, 현기증이 또 일어나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가 뭉개지고 왜인지 모르게 손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나면 쿠루루기 스자쿠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너.”
“음……. 그러는 넌?”
말 장난하나.
를르슈가 뭐라고 말을 더 하기 전에, 사람의 온기가 주는 따뜻함에 를르슈의 긴장은 풀려버리고 말았다. 호텔까지 갈 수 있을까. 나나리는. 를르슈의 머릿속에는 생각들이 엉망으로 꼬여있었지만 모든 것들이 암흑 속으로 가라앉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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