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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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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에 사는 친구는 를르슈 람페르지.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브리타니아 사람이다. 아버지는 어디에 살아있겠지, 하고 말아버릴 정도로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셋이서 살고 있다. 처음 인사를 했을 때에는 를르슈라는 이름에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남자인데 왜 치마 입었어?”

 “뭐?!”

 

 달려드려는 를르슈에게 나는 우선 애매한 간격을 유지했다. 에, 그러니까. 

 

 “를르슈는 남자이름이잖아?”

 “나도 좋아서 를르슈가 된 게 아니야! 여자한테 를르슈라고 이름을 붙인 어머니 때문이다!”

 “너, 여자야?”

 

 바보야, 보면 알잖아! 여자라고! 를르슈는 질린다는 듯이 뒤돌아서 걸었다. 팔랑팔랑거리는 빨간 치맛자락에 여자같기는 한데, 머리도 짧고, 이름도 를르슈고…. 나의 뭔가가 납득할 수 없다는 대답에 를르슈는 눈을 부릅떴다. 

 

 “됐어, 어차피 너랑 친해질 생각도 없으니까!”

 “뭐? 그건 싫어! 너 예쁘게 생겼고, 내 취향이야!”

 “그런 칭찬에 넘어갈 줄 알아?”

 “좋아, 를르슈라면 남자여도 좋고, 여자여도 좋아!”

 

 지금 생각하면 꽤나 열렬한 고백이다. 를르슈는 지금도 똑똑하니까, 그때의 를르슈는 어떤 성별이어도 좋다고 말하는 내 말을 엄청난 호의의 표현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럼 너를 내 기사로 삼아주마. 어린아이가 지을 만한 표정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둘이서 놀러다녔다. 

 아무튼 여차저차 알게 된 결과, 를르슈는 여자였다. 교실에 있는 여자애들은 대부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거나, 묶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를르슈처럼 짧은 머리의 여자애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사왔을 때, 인사하기 위해서 치마를 입은 경우를 제외하고 를르슈는 치마 대신에 바지를 자주 입었다. 

 학교에서 를르슈는 왕자님이었다. 교실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를르슈가 모두 나서서 제지했다. 그러다가 를르슈가 맞기 일보 직전에 나는 를르슈의 기사로 활약했다. 우선 두들겨 패준 건 나였지만, 모두들 제일 먼저 말린 를르슈를 좋아했다. 를르슈는 반짝반짝거리는 존재였다. 를르슈를 좋아하는 건 여자애들도 많았지만, 남자애들도 있었다.

 

 “쿠루루기는 좋겠다. 람페르지랑 친해서.”

 

 를르슈는 체력이 없어서, 운동 같은 건 못하지만 반 대항 대결 같은 걸 할 때 작전을 잘 짰다. 대부분 내가 선두에 서서 주변의 어시스트를 받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져보였다. 할 수 있지, 스자쿠. 응!

 초등학교는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그 사이에 를르슈의 여동생인 나나리도 입학하면서 셋이서 운동장에서 놀기도 하고 그랬다. 를르슈는 여전히 짧은 머리를 하고 바지를 입고 다녔다.

 내가 방과후에 다른 녀석들과 축구를 하고 있을 때, 를르슈와 나나리가 스탠드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가 있었다. 나나리의 흐트러진 트윈테일을 고쳐 묶어주는 를르슈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열심히 공을 따라가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멈춰버렸다. 나나리의 머리를 제대로 묶어준 를르슈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뭐?

 

 “쿠루루기가 다쳤어!”

 “쿠루루기! 괜찮아?!”

 

 순식간에 시끄러워지는 주변에 내가 얼굴로 공을 받아낸 걸 알아냈다. 다들 내가 패스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굴로 받을 줄은 모른 것 같았다. 코피가 줄줄 흐르면서 아프다는 소리가 나왔다. 나나리에게 짐을 맡기고 온 를르슈가 놀란 눈으로 달려왔다. 

 창피하다. 붉어진 얼굴로 를르슈의 손을 잡고 나는 스탠드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를르슈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정신을 빼놓고 서있으면 어떡하냐고! 찰과상 뿐이냐? 지금 보건실도 문을 닫았을 텐데 빨리 집에 가서 상처를….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스자쿠 씨,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를르슈가 엄청 걱정해줘서 빨리 나을 거 같아.”

 “아직 치료도 안 했어!”

 

 를르슈가 들고 다니는 휴지로 코피가 흐르는 걸 막았다. 아, 부끄러우니까 보지 마. 맨 뒤에서 따라 갈게. 나의 말에 를르슈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나나리는 분홍색 가방, 를르슈는 검은 가방. 나는 두 가방만 보면서 걸었다.

 축구는 사실 재미 없다. 를르슈랑 나나리가 봐주는 게 좋아서 하고 있을 뿐.

 아직 부모님이 오시지 않아서, 나는 를르슈네 집 거실에서 상처를 치료받았다. 흉지지 않으면 좋을 텐데. 를르슈는 또 한숨을 쉬었다. 나나리가 빨리 낫는 주문을 걸어주었다. 

 

 “그러고보면 쿠루루기는 람페르지네 애들이랑 친하지?”

 “를르슈랑 나나리? 응.”

 “여자애들이랑 노는 거 지겹지 않아?”

 “글쎄…. 별로 안 지겨워. 를르슈는 똑똑하고, 나나리는 상냥하니까.”

 “…!”

 “그리고 둘 다 예쁘고. 혹시 나를 질투해?”

 

 아마 초등학교 때 있었던 싸움 중에서 가장 어이없던 싸움이었다. 를르슈도 모른다. 

 위험한 짓을 하고 싶어 안달난 남자애들 무리는 나를 끼워넣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를르슈랑 노는 게 더 즐겁고, 나나리랑 있는 게 재미있으니까 매번 거절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위험하게 놀면 두 사람이 걱정할 게 틀림없었다. 집단린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기면 그만이다.

 상처 하나 없이 두 손을 털고 나오면서, 나는 오늘은 도서관에서 나나리랑 있겠다는 를르슈의 말에 따라서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갔다.

 

 “스자쿠, 중학교 어디로 가?”

 “나? 아마도 공립으로 가겠지? 를르슈는?”

 “나도 스자쿠랑 같은 학교 가고 싶어. 근데 언니들이….”

 

 아마 졸업반이 되어서야 를르슈네 집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이유는 이혼을 해서. 그 이혼도 벌써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이미 를르슈 위로 나이가 있는 이복 남매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서로 같이 살았던 시절에는 사이가 좋았고, 지금도 연하장은 물론이고 매달 연락을 하고 있다고. 를르슈가 중학교에 올라가게 된다는 걸 알고서 공립 말고 사립 여학교에 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는데, 거절한 명분이 없다고 그랬다.

 그 사립 여학교는 전국에서 유명한 명문교로, 아마 나나리도 그쪽으로 진학하게 될 거고, 대학교까지 에스컬레이터식에 기숙사제여서 이제 나오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완전 감옥 같잖아, 거기.”

 “…스자쿠랑 헤어지기 싫어.”

 “근데 학교 다니는 건 를르슈니까, 를르슈가 거절하면 되잖아?”

 “언니가 모처럼 추천서도 써주는데 그럴 수가 없어….”

 

 똑똑한 를르슈가 입학시험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고. 나는 모처럼 를르슈가 고민하고 있는 일에 같이 협력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좋지.

 

 “나도 를르슈랑 같은 학교에 가고 싶은데. 여장하고 들어가면?”

 “바보야, 서류에서 떨어진다.”

 “…….”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같은 학교를 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를르슈는 분한 듯이 주먹을 꼭 쥐면서 말했다. 들어가면 휴대폰도 못 쓰고, 컴퓨터도 지정된 시간만 할 수 있고. 연락하기도 힘들어지고. 방학에는 브리타니아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를르슈의 입에서 나오는 무서운 소리에 나도 겁을 먹었다. 

 

 “내가 남자였으면…스자쿠랑 헤어지지 않고 같은 학교에 가는데.”

 

 결국 눈물을 비친 를르슈를 보고서 나는 어깨를 토닥거렸다.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던 를르슈가 이렇게 우는건 처음이었다. 스자쿠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나나리랑 같이 셋이 있고 싶어. 기숙사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나도 를르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힘이 없는 게 분하다.”

 “힘까지 필요할 일이야? 명문 여학교잖아.”

 “너랑 헤어지는게 싫으니까!”

 

 이제껏 너랑 계속 함께였는데. 를르슈는 필사적이었다. 괜히 없는 말재주로 가지고 달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나도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3년만 다른 학교를 다니자, 를르슈.”

 “바보, 거긴 에스컬레이터식 학교다. 바로 고등부로 바로 진급이라고.”

 “고등부는 다른 학원으로 편입하면 되잖아.”

 “이제껏 잘 다니다가 왜 고등부에서 편입하고 싶냐고 물으면?”

 “……음. 그럼 6년? 를르슈라면 T대 가능하지? 굳이 여대가 아니어도 되니까.”

 “네가 T대는 무리잖아.”

 “공부는 를르슈가 봐주면…이 아니라, 결국 를르슈가 없으면 불가능하고.”

 

 눈물을 닦은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다. 고등부도, T대도. 어차피 당장에 중학교도 내가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닌데…. 늘 의기양양했던 를르슈는 슬픈 얼굴로 웃었다. 

 

 “그런 먼 미래까지 를르슈랑 같이 있고 싶은걸.”

 “…….”

 “할 수 있을거야. 를르슈랑 나랑 둘이서 못 해내는 일은 없어.”

 

 그렇지만 를르슈와 나는 어렸고, 서로 정해진 일을 바꿀 힘은 없었다. 졸업식 때에는 앞으로 다닐 중학교 교복을 입고 나타난 를르슈는 정말 싫은 얼굴이었다. 우와, 람페르지가 치마를 입었어! 다들 놀라서 를르슈를 구경하고 갔다가 얼굴을 붉히고 갔다.

 언니, 졸업 축하드려요. 나나리가 주는 꽃다발을 주면서도 를르슈의 얼굴은 좀처럼 웃질 않았다. 나도 부모님이 주신 꽃다발을 들고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를르슈와 시선이 마주친다 싶었는데, 를르슈가 목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옥상은 지금쯤 잠겨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여기서 제일 높은 곳. 

 

 “스자쿠, 어디 가니?”

 “교실에 뭐 두고 온 거 같아서. 금방 다녀올게.”

 “그래, 엄마랑 아빠는 주차장에 가있을게.”

 

 교실은 열려있었다. 마지막 한 해를 보냈던 시끌벅적한 그곳에는 를르슈만이 서있었다. 를르슈는 나를 보고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지간히 그 여학교에 가기가 싫은 것 같았다. 

 

 “스자쿠, 졸업 축하해.”

 “응, 를르슈도 졸업 축하해.”

 “…중학교에 가면 나 말고 다른 친구도 생기겠지?”

 “그래도 내 첫번째 친구는 를르슈인걸.”

 “정말로?”

 “응.”

 “…….”

 “옛날에, 를르슈가 나를 기사로 삼아준다고 했잖아.”

 “어린애의 심술맞은 말을 기억하다니.”

 “동갑이면서.”

 “나는 계속 스자쿠를 첫 번째로 생각할거야. 스자쿠는….”

 “…나도.”

 

 뭔가 고백 같다. 를르슈는 내 앞으로 왔다. 또 눈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에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손수건을 꺼내려고 했다. 숙여진 내 고개, 뺨을 붙잡고 를르슈가 다가왔다. 

 

 “스자쿠가 좋았어. 계속 계속 좋았어.”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것도 를르슈일까? 나는 거의 다 지고 있는 노을 사이로 반짝거리는 를르슈를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를르슈는 계속해서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눈물도, 눈도, 머리카락도, 손끝도. 

 

 “…이제는 내가 안 좋아?”

 “좋아할 수 없게 됐잖아. 다른 학교에 가는 걸. 너는 날 잊을거야.”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려는데, 를르슈는 뒤를 돌아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뒤쫓아가야한다거나, 하다못해 이름을 부르며 붙잡아야한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뒤늦게 상황판단이 되었다. 

 

 나, 를르슈랑 키스했어. 우와. 게다가 를르슈는 나를 좋아한다고. 

 

 머리가 나쁜 나로써는 용량 초과 상태. 더 이상의 사고는 불가였다. 

 지금의 나에게, 그때는 조금 한심한 기억이다. 따라가야했고, 쫓아가야했고, 생각하는 마음이 같지 않아도 고맙다고 말을 해야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같은 마음이긴 했을 텐데. 를르슈를 첫 번째 친구로 생각하겠다는 고결한 생각은 중학교 입학 한 달만에 희미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검도부 활동을 시작해서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나리랑 만날 시간도 없어지고, 주말연습 같은 것으로 주말에도 만나기도 힘들어졌다. 를르슈는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 답장은 꼬박꼬박했다. 아, 글씨 쓰기 싫어. 책상 앞에 앉아서 숙제처럼 를르슈의 편지에 답장했다. 사립 명문 여학교는 힘들구나. 를르슈의 첫 편지에는 졸업식 때는 미안했고, 앞으로도 친구로, 나나리도 함께 셋이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하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참고로 수석 입학으로 들어와서 온갖 잡일을 다맡았는데 그러다가 쓰러져서 요새 좀 나아졌다고. 

 나는 검도부 활동과 나나리의 이야기를 쓰고, 더 할 말이 없었다. 너의 말대로 나는 너를 잊어가는 거 같아…. 이렇게 쓸 뻔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세계를 정복한 악역 황제로….”

 

 를르슈랑 이름이 똑같네. 지루한 수업시간에 를르슈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은 세계사 수업 중인데, 너랑 이름이 똑같은 악역 황제가 있었대. 자료 사진 봤는데 엄청 예뻐. 근데 야사에는 기사랑 사귀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기사는 남자겠지? 예쁜 남자는 진짜 게이인가봐.

 한 주가 한바퀴 돌아서야 답장이 왔다. 

 —엄마가 그 악역 황제 광팬이어서 내 이름이 를르슈가 된 거다. 그 당시 브리타니아 제국의 기사에는 남녀 차별은 없었어. 그리고 예쁜 남자가 게이라는 차별적인 사고 방식도 그만둬라. 수업 시간에는 편지 쓰지 말고 공부해. 

 

 “으, 잔소리.”

 

 나는 편지를 책꽂이에 대충 꽂아두었다. 편지로 보면 를르슈는 별반 다를 것 없다. 그 전에 그렇게 울면서 헤어지기 싫어한 게 거짓말인 것처럼. 키스도 가끔 꿈 같았다. 

 를르슈의 편지에는 다른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건 왜인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나는 여름 방학 합숙을 앞두고서 를르슈에게 답장이 늦어질 거라고 적었다. 를르슈의 답장에는 자기도 여름은 브리타니아의 아버지 집에서 지낼거라고 했다. 나나리도 같이 지낼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적혀있었다.

 그 답장에는 를르슈가 방학동안 머물 아버지의 집주소가 적혀있지 않았다. 나나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럼 방학동안 편지는…. 

 그 중학교 1학년 1학기의 여름방학 이후로 나는 를르슈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를르슈한테 편지가 많이 왔다. 방학동안 쌓였던 말들이 많았는지 다섯 장이나 적혀있었다. 나나리가 얼마나 귀여워졌는지 왜 안 알려줬냐고 짜증을 낸다거나, 브리타니아에서 지내는동안 형제들이 얼마나 잘해줬는지,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책장에 대충 꽂아두었던 를르슈의 편지를 작은 박스에 담아서 책장 높은 곳에 올려두었다. 처음엔 편지를 다 읽었지만, 나중엔 뜯지도 않고 봉투 그대로 그 박스에 넣었다.

 어느날은 나나리가 주말 아침에 찾아왔다. 검도부 연습 때문에 나가려던 찰나에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나나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언니가 답장이 없어서 걱정한다고 말했다. 나나리에게 화를 내는 건 나쁜 일이고, 괜한 화풀이라는 걸 알아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요새 검도부가 바빠서, 대회가 코 앞이라 그렇다고 말했다. 나나리는 그래도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첫 여자친구는 검도부 대회에서 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여자애. 라인에 답장도 열심히 하고, 전화가 오면 성실하게 받았다. 이야깃거리는 대부분 재미가 없다. 영화라도 같이 한 편 보면 서로 공통된 화제가 생겨서 영화를 자주 봤다. 음. 헤어졌다.

 두 번째 여자친구는 검도부에서 같이 동고동락하는 여자 검도부 대표였다. 좋았다. 같이 단련도 할 수 있고, 서로 힘든 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다. 그렇지만 필요 이상의 이야기를 하기가 싫다. 뭔가, 더 떠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들어서 입을 닫았더니 차였다. 

 세 번째 여자친구는 같은 반 여자애. 성실한 내 모습이 좋다고 했다. 쿠루루기 군은 취미가 뭐야? 검도. 그건 특기잖아. 학기 초에는 뭔가 자주 쓰는 거 같았는데, 편지? 러브레터? 편지였어. 누구한테 쓴 편지야? 사귄지 삼 개월은 넘었으니 이제 솔직하게 말해도 될 거 같아서 말했다. 소꿉친구. 에? 남자끼리? 아니, 여자야.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차였다.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나는 한 학기에 최소 세 명을 사귀었다. 중학교 2학년 봄방학을 앞두고서 동정까지 졸업. 를르슈의 편지는 그때까지도 오고 있어서 박스는 세 개가 되었다. 중학교 1학년 이후로 뜯어본 것도 없다. 

 

 “나? 애쉬포드로 진학하지 않을까? 거기 스포츠 지원도 좋고.”

 

 아마 중학교 시절 마지막 여자친구가 될 여자애와 이야기를 했다. 초등학교 때 를르슈랑 했던 대화가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뭐?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해놓고!”

 “안 물어봤으니까?”

 “…그런 명문으로 가면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교문 앞에 찾아가는 것도 민망하다구!”

 “찾아올 생각이었어?”

 “내가 찾아가는 게 싫어?”

 “…너랑은 아마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생각했거든.”

 

 뺨을 얻어맞은 나는 정말로 마지막인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제 졸업식 때까지 누구도 안 사귈거야. 나는 혼자서 다짐했다.

 검도부는 이미 은퇴한지 오래였다. 평소보다 빠른 귀가에 옆집에 들어가던 나나리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스자쿠 씨!”

 

 평소보다 경쾌한 목소리에 나는 우울했던 기분이 나아지는 거 같았다. 나나리는 집에 들어가다말고 바로 나에게 뛰어왔다. 

 

 “스자쿠 씨의 편지에도 적혀있죠?!”

 “응?”

 “언니, 고등학교는 이제 집에서 다니니까 다시 예전처럼 셋이서 놀 수 있어요!”

 “…뭐?”

 “애쉬포드 학원으로 편입한대요! 다른 언니랑 오빠들도 허락했어요! 이제 편지 말고 직접 만날 수 있어요!”

 

 나나리의 말에 나는 뭐라고 할 말을 잃었다. 편지? 지난 주도 편지가 왔었지. 확인하지 않아서 몰랐다. 나나리는 언니 방을 치우러 가야한다고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편지를 모아놓은 박스를 꺼냈다.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 아니기에 이번주에 온 편지만 제일 먼저 뜯었다. 두툼한 봉투에는 텅 비어있는 편지지 3장이 전부였다. 아무것도 안 써있다니. 그 다음 편지를 뜯고, 뜯고, 뜯고, 뜯고, 뜯고…. 

 

 —검도부가 많이 바빠? 그만큼 집중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뜻이겠지? 검도하는 스자쿠가 보고 싶어. 

 —나나리한테 네가 별 일 없이 잘 지낸다는 이야길 들었어. 그건 다행이야. 

 —학교는 재미없어.

 —내가 예전에 했던 말 때문에 화가 났어?

 —그때 키스해서 미안해.

 —사과가 너무 늦은걸까.

 —스자쿠가 내 편지를 안 보고 있는 거 같아.

 —답장할 때까지 나도 안 써.

 

중학교 1학년 때의 편지 이후로 더 이상 글씨가 적혀있는 편지는 없었다. 

 

 “큰일났다.”

 

 나는 입밖으로 소리를 내며 어디서 도움을 구해야할지 머리를 굴렸다. 나나리에게 이제껏 답장 한 번 안했다가 답장을 하려는데 용기가 안나니 도와달라고 말할 순 없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이제껏 친구라고 하는 놈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는데.

 를르슈도 대단해. 매주 쓰지도 않을 편지를 부친다고. 엄청 화났을거야. 

 하지만 를르슈도 졸업식 전까지는 그 여학교에서 나올 수 없는 모양이고, 나는 애쉬포드에 입학하기 전까지 를르슈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약간의 유예기간이 생긴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는 와중에도 를르슈 생각 뿐이었다. 내가 최소 2년 동안 편지는 뜯어보지도 않았다는 걸 를르슈는 안 거잖아. 이걸 뭐라고 변명해야하지. 우선 떨어지는 HP로 죽어가는 게임 캐릭터를 보다가 게임을 멈추었다. 

 때마침 현관에서 울리는 초인종에 분위기를 환기시켜야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님은 제발 현관 모니터를 확인하고 문을 열라고 하지만, 나는 유소년 가라데 대표 선수도 꺾었는걸…. 아마추어 청소년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최종병기라는 소리를 너무 들은 나에게 어지간한 위협은 통하지 않는다! 

 

 “뭐야, 너. 팔다리 멀쩡하잖아?”

 

 를르슈 빼고. 

 어렸을 적의 기억에는 거의 단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에 바지만 입었던 애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르, 를르슈?”

 “보면 몰라?”

 “모르겠으니까!”

 “나를 안에 들여라. 정중하게.”

 “싫어!”

 “뭐?”

 “나한테 화났잖아!”

 

 칠흑같이 검은 긴 머리카락. 사락거리는 소리까지 완벽하다. 어렸을 적에는 의기양양한 그 얼굴은 앳되다는 느낌 보다 이제 완벽한 어른의 것으로. 우리 아직 중학생인데?! 사립 여학교에서 3년을 보내면 그렇게 되는거야?! 

 

 “내가 왜 너한테 화가 나?”

 “펴, 편지 답장….”

 “아, 그거.”

 

 를르슈는 나보다 작지만, 안광이 번쩍인다는 표현이 맞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러고 있다는거지. 쿠루루기 스자쿠.”

 “를르슈도 적당히 포기하면…!”

 “적당히 포기? 그런 건 모른다. 아무튼 적당히 나를 거실에 들여. 너한테 물을 게 한 두개가 아니니까.”

 “……그, 때릴 때는 한꺼번에 몰아서 때리면 좋겠어.”

 “맞고 살아? 검도부라며?”

 “아니, 여자애들한테 자주 맞긴 하는데, 반사적으로 방어하거든. 를르슈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현관문이 닫히고, 를르슈를 소파로 안내했다. 마실 거, 줄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를르슈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여자애들한테 왜 맞아?!”

 “아, 차일 때 좀 맞을 짓을 했나봐.”

 “왜 차여?!”

 “사귀었으니까…?”

 “사귀었다고?!”

 

 를르슈는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더니 어깨를 떨며 울기 시작했다. 무어라 말이 나오는 거 같긴 했는데 잘 안 들렸다. 

 망할 여학교, 외출도 안 돼, 외박도 안 돼, 되는 게 뭐야. 전화도 못하게 하고, 편지만. 우표도 두 장 밖에 안 주고. 너랑 나나리 말고는 아무한테도 편지도 못 쓰고. 방학 동안에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다못해 엽서라도, 전화라도, 근데 네가 답장도 안하고. 여자애들 꺄악거리는 소리는 이제 지겨워, 공부를 하면 다 아는 거 왜 물어봐, 내 손을 막 잡고, 샤워 중에 벌컥 들어와서 가슴이나 만지고, 작다고 놀리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스자쿠한테 고백하고 사귀면서 교내 공식으로 소문 났을 텐데, 빌어먹을. 

 

 “너, 동정은?!”

 “그거까지 말해야 돼?!”

 “말을 못하는 걸 보면 아직 동정이구나!”

 “미안하지만 옛날에 졸업했습니다!”

 “배신자!”

 

 를르슈의 우는 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아직도 처녀인데 쟤는 왜 동정이 아니란 말이야!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을 주는 첫날밤 같은 걸 기대했는데!

 뭐라고 끼어들기 어려운 를르슈의 울음과 비난 사이에서 나는 애매하게 내린 홍차를 밀었다. 를르슈는 훌쩍거리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옆으로 와, 스자쿠. 방금 전에 동정이니 처녀니 하던 를르슈 옆에 앉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하면 더 큰일이 일어날 거 같아서 빨리 옆에 앉았다. 

 

 “누구랑 했어?”

 “아…. 동정의 이야기?”

 “응.”

 “그, 를르슈는 말해도 모르는 사람이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넌 죄인이다, 지금. 내 편지를 2년동안 답장 안한 죄인. 그리고 나나리에게 거짓말까지.”

 “…헤어진 여자친구인데, 솔직히 잘 기억 안나.”

 “지금까지 사귄 여자친구는 몇 명이야?”

 “음, 그것도 잘 기억이 안 나네. 하룻밤 잔 것도 카운트야?”

 “…….”

 

 아, 이건 물어보지 않아도 될 말이었나. 를르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내 허릿춤을 잡았다. 트레이닝 복 바지 차림이었기에 바로 내리면 속옷이다.

 

 “이, 이런걸 왜 를르슈한테 말해야 하는데! 편지랑 관련 없잖아!”

 “말했잖아!”

 “뭐?”

 “널 좋아하니까, 너랑 사귀고 싶고!”

 “……그, 그, 초등학교 졸업식 때의 연장입니까?”

 “그때 상황에 따른 억지의 과거형이었지만 그래도 너는 계속 편지를 받아줬으니까!”

 

 나한테도 해라, 섹스! 아무한테나 할 거면 나한테도!

 아예 골반 위에 올라타는 를르슈를 보면서 나는 이 광기에 서린 상황에 입만 뻐끔뻐끔 벌렸다. 그래, 이 엄청난 상황에 나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지?

 

 “나는 를르슈 안 좋아하니까 무리야!”

 

 이 대답은 기세 좋게 허리를 세우고 있던 를르슈를 바로 울보로 만들 정도로 엄청난 것으로, 우선 섹스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벗어났으나, 를르슈를 실연시킨 당사자로써 내 집에 있는 것임에도 내 집에서 나가야할 분위기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