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건 지독한 일이야.”
자고 일어난 C.C.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이 기분 나빠서 C.C.는 를르슈의 얼굴을 쿡 찔렀다. 네가 뭘 안다고, 이 동정 꼬마가. 를르슈는 아침부터 대체 천박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짜증을 냈다.
아침은 콘 수프와 말라비틀어진 빵이었다. 그런 걸로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C.C.와 다르게 를르슈는 이런 영양불균형을 견딜 수 없는 눈치였다. 마리안느와 다른 점이었다. 오히려 그런 걸 신경쓰는 건 C.C.의 몫이었던, 꿈속의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마리안느가 나왔다는 시점에서는 꿈이었지만, 그것은 반복되는 과거가 아니라, C.C.의 심층심리를 드러낸 것 같은 표상이었다. 계속 C.C.가 신경쓰고 있는 부분을 콕 찝어내는 것이 그러했다. 그때의 마리안느는 를르슈도 모르고, 오로지 C.C.를 귀여운 친구라고 부르던 때였으니까. 그때의 마리안느만큼은 오로지 C.C.만의 것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사람처럼 꿈을 꾸었다. 인간처럼 꿈을 꾸고 나니까 드는 감상이 그것이었다. 꿈은 지독한 것이다. 꾸고 나서도 원하는 것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꿈 안에서도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심신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비효율적인 이 꿈을 왜 꿨지.
미묘한 표정인 C.C.를 빤히 쳐다보던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이름을 계속 부르더군, 너.”
“…아, 마리안느의 꿈을 꿨으니까.”
“그래? 어머니랑 친했어?”
“친구였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
“계약을 맺고 나서 친구가 됐어?”
“계약을…맺고 나서도, 마리안느가 기어스를 못 써서,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리안느가 날 친구라고 불러줬어. 그래서 친구가 됐어.”
“나에겐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너에겐 좋은 친구였나봐.”
“감당하기 버거운 친구였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게 익숙하고, 계속되는 호의에 지칠 줄 모르는 그런 너그러움이 나에겐 힘들었어. C.C.는 드물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게 좋았어. 마리안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그런 사람의 친구이고, 나의 비밀을 알아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니.
를르슈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듯한 C.C.의 눈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를르슈가 말하지 않아도 C.C.는 스스로 꿈에서 깨어났다.
“그래도 그건 꿈이었어. 마리안느가 네 이야길 했거든.”
“내 이야기?”
“극악무도한 황제와 같이 다니는 건 눈에 띄니, 조심하라고.”
“내 꿈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네 꿈에도 마리안느가 나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아주 예전에 꿈을 꿀 때는 있었어. 어머니는 보통 피투성이가 되어서 계단 위에서 나나리를 끌어안고 있는 중이시지.”
“V.V.도 악질이지, 왜 하필 너에게 그걸 보게 했을까? 너는 이 계획 밖의 사람이었는데.”
“사랑이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들지. 그래서 계획 밖의 변수를 계산하지 않을 때가 많아지잖아.”
C.C.는 를르슈에게 언젠가 갇혀 있는 시간 속에 사는 V.V.가 마리안느를 좋아했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한 이유는, 를르슈 역시 그 갇혀 있는 시간 속에서 영겁의 세월을 보낸다는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직 C의 세계도 원상태도 아니지만, 지금이라면 불안정한 를르슈의 코드나 기어스를 자기 힘으로 끝낼 수 있는 때여서, 영원한 시간은 끔찍하니 스스로 끝을 내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를르슈는 ‘마성의 여자잖아? 인기가 많다 못해 아주 마성이야.’라며 어머니를 비웃었다. 를르슈답고, 마리안느의 아들다운 호기였다.
“어머니는 네 걱정을 하는 거 같은데.”
“그럴 리가. 마리안느는 죽었어. 내 의식에 다시 나타날 수 없어. 이건 내가 원해서 꾸는 꿈이야.”
“…….”
“꿈에서라도 마리안느를 만나고 싶은데, 그 만나고 싶은 이유까지 정확하게 반영된 꿈이지.”
그녀의 첫 친구를 죽여버린 를르슈는 남은 물통을 비웠다. 다 무너진 광장 중앙에 있던 우물가로 가서 물을 퍼오겠다는 를르슈를 보내고서, C.C.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입밖으로 나온 말에 무슨 책임을 져야할지 몰랐다. 마리안느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눈앞의 소년은 마리안느의 아들이니 그런 같잖은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다시 깨달았다.
—를르슈, 넌 대체 왜 나를 따라온 거야?
C.C.는 오늘도 그 질문을 반추한다. 가까워지는 를르슈의 그림자가 제 얼굴을 덮었다. 잘그락거리는 물통의 이음새를 풀어서 주는 를르슈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가볍게 감사를 표했다. 꿀꺽, 하고 물을 삼켰다.
“기어스의 조각은 여기서 가까워. 조금만 걸으면 될 거 같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총알이 몇 발 남았더라?”
“앞으로 세 발.”
구형 권총은 반동도 엄청나지만 소리고 시끄러워서 잘 쓰지 않았는데, 어느새 열두 발에서 세 발이 남았다. 지금까지 회수한 기어스의 조각은 아홉 개. 총알의 개수에 비하면 엄청난 수확일수도 있다. 대부분 를르슈의 기어스가 활약을 했고, C.C.가 어깨가 빠질 거 같은 고통을 감수하고서 권총을 쏘는 역할이었다.
약골 녀석. C.C.는 탄창을 확인하고서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마 사람들이 있는 곳은 난민들이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새로운 터전일 것이다. 그 곳을 피바다로 만드는 건 불쾌한 일이지만, 기어스의 조각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말도 안되는 기적을 일으키며, 그걸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있어서, 그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불안에 떨고 있었다. 오히려 죽이려 하는 두 사람에게 고마워할 수도 있다. 극히 드문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대낮부터 총질을 하는 건 좀 그런데.”
“하지만 밤에 기어스를 쓰는 건 나도 불안해. 밝은 곳에서 눈을 마주치는 게 편하니까.”
“머리를 써, 를르슈.”
“지금까지의 조각 회수에 계속 써오고 있는 게 내 머리다만.”
“더 굴려.”
“내가 지금 건성이라고 생각해?”
“제로 레퀴엠에 비하면 허술한 작전이잖아. 좀 더 체계적으로 해보라고.”
제로 레퀴엠이라는 말에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두워진 표정에 C.C.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려고 하자, 를르슈는 으레 짓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C.C.를 노려보았다.
“네가 먼저 말한 거다, C.C.! 이번 나의 작전에 토달지 말도록!”
아, 재수없는 녀석. C.C.는 어깨 끈을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를르슈의 작전은 무엇이었냐면, 정말 이제껏 세웠던 작전 중에서 제일 형편없고 조잡하고 억지스러운 작전이었다. ‘연약한 여자1’을 연기할 C.C.는 두 번 다시 를르슈의 작전이 허술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1. 기어스의 조각을 가진 사람이 느껴지면 전력으로 그를 유혹한다.
(괜찮은 대사로는 “꺄악—! 살려주세요!” 상당히 가녀리고 애처롭게.)
2. 를르슈가 나타나서 구해주면 “어머, 멋진 사람, 당신에게 반했어요!” 라고 한다.
3. 그리고 나머지 뒷일은 를르슈에게 맡긴다.
4. 돌아가는 길에 가방을 매는 건 C.C.가 한다.
5. 저녁은 멋진 사람에게 반한 C.C.가 한다.
“죽일 거야.”
“열심히 살려놓고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하나.”
“죽여버린다.”
“힘내, 멋진 남자인 내가 구하러 갈 테니까. 힘껏 비명을 질러.”
“정말 구질구질해, 를르슈. 이건 아니야.”
“제로 레퀴엠도 얼마나 유치했어? 사람 하나 죽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는데 결국 폭군이 죽어야 해결되는 정론적인 이야기였다. 이것도 역시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 약자를 구하면 해결될 권선징악 스토리에 불과해.”
C.C.와 를르슈는 오 미터의 간격을 유지하기로 했다. 확실히 새로운 터전이 될 마을은 하룻밤 전에 묵었던 곳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북적거리기까지 하는 골목이 있어서 두 사람은 마른 침을 삼켰다.
를르슈는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모자를 푹 눌러쓰고 머플러를 칭칭 둘렀다.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 먹히는 방법이었다. C.C.는 여자를 앞세워서 저는 멋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철부지 꼬맹이의 놀음에 놀아나는 자기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봤자 애는 애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기어스의 기척은 희미해지면서도 강해지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강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또 다시 강하게, 또 한 걸음 멀어질 정도의 거리로 멀어지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를르슈의 기어스는 아니었다. 불완전한 기어스를 스스로도 어떻게 할 줄 몰라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기어스의 흔적을 좇은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다루게 되었다면 능숙하게 다루었을 것을,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워 한다면….
—그 힘을 쓰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걸로 두 명이서 어떻게 먹어요?!”
“어린애 두 명이면 차고도 넘치지! 어디서 토를 달아?!”
“나는 동생까지 업고 다녀야한단 말이에요! 빨리 더 줘요! 감자 한 알이라도 더 넣어요!”
“이 꼬마 녀석이 건방지게 어딜!”
기어이 감자 한 알을 주머니 안에 넣으려던 소년은 머리통을 쥐어박히곤 다시 내려놓았다. 간판을 달지도 않은 허술한 야채가게의 주인장을 노려보던 소년은 C.C.와 정면에서 마주쳤다. 그녀를 보고서 얼굴을 붉히고 다시 땅바닥으로 고개를 처박듯 시선을 아래로 깔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C.C.는 그 순간 제 몸을 스쳐 지나가는 기어스의 기척에 소리를 내질렀다. 를르슈, 라고 부르려다가 작전이 떠올랐다.
“어머, 멋진 사람—!”
어딜 봐도 이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 미터 간격의 를르슈는 당황한 눈치였다.
“당신에게 반했어요!”
를르슈가 낭패라는 듯이 머리를 싸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지금 C.C.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C.C.는 계획대로 했다. 갑자기 C.C.가 소리를 지른 것에 모두가 쳐다보았다. 달려나가던 소년까지도.
잘 됐다. C.C.는 소년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에게 반했어요, 이름이 뭐죠?”
진부한 헌팅 멘트는 덤이다.
를르슈는 소년의 손을 붙잡고 있는 C.C.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가 설마, 하는 눈이었다. 여전히 이런 곳에서만 눈치는 빠르다. 소년은 옆에 있던 를르슈를 알아채고는 C.C.와 를르슈를 번갈아 보았다.
대충 보기에는 14살 정도, 브리타니아계와 아랍계의 혼혈인 듯 했다. 반짝이는 홍옥의 눈동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거, 거짓말…. 여자 둘한테서 동시에?!”
여자 ‘둘’이란 말이지. 를르슈의 표정은 보기 좋게 구겨졌고, C.C.는 시장바닥에서 크게 웃어버렸다.
“누가 여자냐! 딱 봐도 몰라?! 난 남자다!”
우렁찬 를르슈의 낮은 목소리는 박력이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기어스의 흔적을 찾아 떠난 지 한 달. 이렇게 유쾌하게 웃어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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